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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中國)은 조선(동국)의 중앙조정은 절대 아닐 것으로 보입니다.|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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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연구회 대부분의 기조가... 대륙조선의 중앙조정이 중국(中國)이요 그 제후국이 동국(조선)이라 하시는데...
전 많이 다르게 생각?니다.
밑에 김홍필선생님께선... 한자의 시대별 정음(正音)과 속음(俗音)을 들어... 동국(조선)의 중앙조정이 중국일 가능성이 많다. 고로, 구한말기 정도에..그게 남방음이든 북방음이든...북경어든... 중원의 발음과 상이한 한자발음을 쓰던 한반도 동국은... 역사가 얘기한 그 동국(조선)과는 좀 다른 문명일 것이란 뉘앙스의 글을 쓰신걸로 전 이해했습니다...?
전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거부하고 싶습니다.
역시, 전문지식은 태 부족인 자니...아주 상식적인 정황들로만 짚어 보렵니다.
한자의 표준음(정음)은...당나라 장안을 중심으로 했다. 송나라의 음으로 했다. 크게 남방음와 북방음으로 분류?다. 대체적으론 장안을 중심으로한 북방음이 정음류에 속한다. 근세의 북경어는 북방 정음보단 북방음 중 속음의 범주에 든다.
전 모두가 맞는 말인데... 그저 해석자들의 너무 목표의식이 강한 연구로인해... 아주 상식적인 것들이...해괴하게 엎그레이드 돼는 현상이 현재의 재야사학의 한계는 아닐지 싶습니다.
한자는 동이(東夷)가 발전시킨 문자란건 중원인들도 인정했다니... 당나라 이전의 한자 정음은...동이족들의 발음였을 것으로 보면 돼고... 그 표준발음의 중심은 중원의 서안과 낙양일대로 봄도 대체적으론 마땅해 보입니다.
후에 당나라가 이 지역을 정복하고선... 서방족인 당의 속음들이 한자음에 섞인 면은 있겠으나... 한자의 유구한 전통이 있기에...크게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전 봅니다.
비유하자면...
근세의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를 격었기에... 그 일상적인 한자표기등의 언어에 일제의 잔제가 잔존한 건 맞겠으나... 한자 발음...특히 기본 정음표기의 골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단 겁니다.
아메리카 대륙 전체가 양이들에 먹혀..인디언들의 문명이 거의 전멸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고유어는 양이들의 언어에 희석돼어 엉뚱한 언어가 재 탄생돼진 않았단 것도 참고가 ? 겁니다.
어떤 시원의 언어가 있었고...누천년의 유구한 세월동안 일정지역의 문명에서 공식언어로 사용했다면... 그 문명을 새롭게 지배한 민족의 새 언어가 지배하던지... 아님,지배를 원활케 하기 위해 그 문명 고유의 언어에 지배문명이 동화돼던지... 둘 중 한 가지로 언어가 보존돼거나 도태돼는 것이지... 두 언어가 합해져 기본 정음 자체가 급격하고 대대적으로 헝클어 질 순 없다 사료?니다.
한자를 발음할 경우의 민족과 문화권별 발음차이가 나기에...정음과 속음만이 존재할 뿐이고... 엄마 아빠 임금님등...그 문명에서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고유의 기본 단어들만이...한자의 기존 정음과 병용됐을 수 있다 보입니다.
중원을 지배했던 달단 청나라의 경우도 각 구성 민족과 문명의 언어를 병기해 사용하면서... 한자문명권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기존 한자로 해결되지 못하는 자신들의 언어를 한자문명권에 맞추어 만주문자를 발전시키긴 했지만... 그렇다고 언어학자들이 그 문자를 한자의 새로운 정음으로 인정하진 않는 이치이고여...
나라(國) 말씀이 중국과 서로 맞지 않아서...란 세종의 말씀을 여러기지로 해석들 하시나... 말 그대로 봄이 정답일지 싶습니다.
나라..즉, 세종의 나라말이 중국(中國)이라 일컬어지는 문명의 말과 맞지 않는단 얘기겠지여...
여기서 중요한 건... 중국의 위치가 어디메냔 것인데... 이도 역사지도들이 누누이 짚은 낙양(落陽)일대로 봄이 지극히 당연스럽다고 전 봅니다.
중국(中國)이란 국명은 역사서에 없다...근세에나 등장했다고들 하지만... 제가 얼핏 ?어 듣기론...역사에 심심찮게 거론돼던 단어라 하더군여...? 중국이란 나라는 없었다 치더라도...중국이라 불리운 지역과 고유문명권은 항시 낙양일대였다고 역사지도들은 말하며... 그것을 그대로 대입하면 그뿐일 것이란 제 생각입니다.
중국이란 지명은...송나라대에부터 역사지도에 본격적으로 표기됩니다. 송나라 대부터...늘상 하남성 낙양일대를 중심으로...섬서성 한중(漢中)일대...근세엔 산동성에 중국(中國)이란 지명이 늘상 표기됐습니다.
그 서쪽에 준가리아란 몽골계 오일라트족의 국명도... 몽골계(무굴계) 나라(고려)중... 중국 쪽...즉, 준쭉(왼쪽)..동쪽 고려(國=나라)란 의미로도 보입니다.
송나라 등은 중국의 "중"을 가운데 중심이라 상징했던 것이나...이민족인 몽골족 입장에선... 그 중국이 위치한 곳이 자기들의 준쭉(왼쪽)이기에 준가르(중고려)라 명칭했다 보이며... 준(중)이 동쪽(왼 쪽의 대명사가 ?도...아주 자연스럽게 그 방향에 준가르(중고려=중국)이라 불리운 절대적 문명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준가리아를 오일라트라 부를땐... 동몽골격인 원나라(大元)의 입장에선... 서쪽(오른쪽)의 몽골어...오론쭉 과도 관련이 많을 것이며... 서쪽(오른쪽)이 오론"으로 불리는 이치도 아주 평범하게 그 방향에 오스만,오손등의 문명이 유구한 세월 존재했기 때문으로 보이며... 서쪽(바른쪽)의 현재 몽골어인 "바론쭉"도... 결국은 그 방향에 페르시아나 프러시아, 비잔틴 등의 "밒)"자 지명을 애용하는 문명이 있었기 때문의 아주 상식적인 이유에서로 보입니다. 이 경우...원몽골(동몽골)입장에선 중국(낙양)은 남쪽(오르트쭉,음늬쭉)에 위치했으니... 준쭉(중국쪽)을 동쪽의 단어로 사용하기 보단...더른쭉(동쪽의 또다른 몽골어)..즉,동이,퉁그스,도이(刀夷)의 방향이란 의미를 부여했다 보입니다.
말이 중구난방이니...다시 중원으로 돌아와서...
등업신청난에 별미르란 선생님이 적시하신 글...
1490년 명나라 동월이 동국조선을 명나라 황제의 사신으로 방문하여 쓴 "조선부"란 기록엔... 중국(中國)과 조선(동국)을 확연히 다른 나라(지역)로 불렀단 겁니다.
글 전체를 보면...중국(中國)이란 자체도...자신들의 나라라 적시하지도 않은듯 합니다...?
자신들의 조정을 이를땐 아조(我朝),본조(本朝=본차오_본 차이나?)로 명기했으니여...
또한, 등업난의 별미르님 조선부 원문 해석이 정확하다고 전제한다면... 동국(東國=동고려)를 조선(朝鮮)이라 칭함도...그 주체가 명나라가 아닌...고려 공민왕인 정황이 있습니다. 원나라가 정복한 금나라(키타이)의 전통지역인 북경일대를 이방원이 정복하곤... 공민왕이나 그 후대왕 누가 이방원이를 그 지역 왕으로 임명했단 얘기로도 전 해석해 봅니다.
명나라 동월이 신기해 한 것은... 그 조선이란 국호도...기자나 단군조선을 잇는 전통국명에 기인함 이전에... 그 조선이란 국호 자체가...자신들도 쓰고 있던 조정이란 뜻의 조(朝)자란 연유에섭니다. 자신들 입장에선...조정(朝)이란 조(차오)를 그대로 국명에 쓰는 나라... 지금말로는 "정부"란 국명을 쓰는 희안한 나라가 조선이란 의아함도 드러냈습니다.
그럼, 중국(中國)의 상대적 방향인 동국(東國=퉁구스)이 조선이니... 중국인 낙양일대는 동국조선이 아니지 않냐...? 그건 쫌 다르다 봅니다.
원래의 동국조선은...중국(낙양)동쪽의 고려..즉,금나라(김고려=키타이)이겠으나... 그 동국조선이 중국(북송의 황도)에 있던 고려황실을 완전 접수한 이후부턴...중국이 오히려 동국조선의 범주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럼, 동국조선이 중국(북송황도)까지 다 흡수한 싯점부턴... 동국조선의 영토는 한반도부터 서안일대 까지니...최소 동서 5천리 남북 4천리는 돼야 마땅함인데.. 동월이 기록한 조선의 영토는 동서 이천리 남북 사천리 뿐이란 기록이 문제로 남습니다...?
저는 이걸 이렇게 해석합니다.
최초의 동국조선은...북송의 황도인 중국(낙양)의 상대적 동쪽인 북경동부 금나라 일대로 출발하지만... 이씨의 동국조선이 중국(고려황도=북송황도)을 접수한 이후론...서국(西國)격인 명나라 입장에선... 중국(낙양)을 중심으로한 탕구트(북송=고려)의 영토와 그 부속지인 남송의 영토가 동국의 내지(內地)인 셈이요... 북경 동쪽의 원 동국조선지는...그저 그 속지이자 키타이여진(금나라) 오랑케의 땅으로 보는 이치라 보입니다.
중국 부근에 새 기틀을 튼 이방원의 조선은...북경 동쪽과 한반도를 동국(東國)이라 칭하지만... 서국(西國)격인 명나라 입장에선...중국(낙양)부근 한양의 조선이 동국(東國)이 되는 이치라 전 해석합니다.
그리고 국(궈=國)이란 용어도... 음과 의미는 고려(고구려=골=궐)와 상통한다고 전 봅니다...문명과 시기에 따라 문자표기만 다른 것이라 전 해석해 봅니다.
그리고여... 별미르 선생님의 해석이 맞다고 전제한다면...아주 중요한게 있습니다. 동월이 한 말 중 아주 중요한게 있습니다.
고려 공민왕은... 문하시중으로 계시던 우리 태조를 동국조선의 왕으로 임명했다 한 구절여... 물론,아조(我朝=명나라)도 그를 인정했단 구절도 보이나...선후가 분명 다르고...주체가 다르다 해석?니다.
명조(明朝)가 곧 중국조정이요 고려조정이라기 보단... 명조는 당대의 중앙아 무굴제국(무굴리스탄,티무르제국)으로 봄이 마땅해 보입니다.
명조(무굴=티무르제국)입장에선...중국(낙양)이 곧, 동국(東國=동고려)의 왕도인 셈이고... 다시,중국(낙양)부근의 한양 동국조선 왕실 입장에선...영토중 동부인 산해관 동쪽 한반도가 동국인 셈이라고 보이고여...
문제는 우리 태조가 고려 공민왕의 문하시중으로 있다가 조선왕에 등극해 고려까지 다 흡수했다...? 그럼, 명나라의 시조도 태조 이성계가 ?단 얘기가 ?니다...?
물론 초기 명나라는 이성계 집권 이전에도 있었던 나라입니다. 이성계가 명나라의 시조는 아니지만...
초기 명나라인 투글룩 티무르의 무굴리스탄(동 차가타이한국)은... 서차가타이한국과 동쪽 원나라 조정의 사이에서 신흥 강자로 군림하긴 하지만.... 고려인 주원장이 이끄는 홍건적의 난을 계기로 고려와 명나라를 줄타기하며 홍건적을 무찌르다 ... 오히려 그 홍건적을 이용한 이성계(티무르?)에 의해 무굴(명)제국과 고려(탕구트)무두가 도륙이 나는 것이며... 이후, 명나라(무굴제국)의 태조는 이성계(티무르)가 돼는 것인데...
역사는 최초의 명나라 황가인 투륵룩 티무르가와... 그 자리서 도적떼들의 반란괴수로 활동하다...이성계(티무르?)에게 제압당하면서는 오히려 이성계의 주구노릇을 하다 이성계(티무르?)에게 처참히 토사구팽된 주원장 만을 명나라의 시조로 각인시키는 교활을 떤 걸로 보입니다.
그럼,동국조선은 뭔가란 의문이 남는데...?
제 방식으론 간단합니다.
동국조선은 고려(송)를 접수한 이방원의 나라입니다. 배다른 아들에게 황권을 승계하려던 이성계(티무르?)에 반발해...이방원(쇼호르?)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성계는 고향 함흥(사마르칸트?)로 돌아가고...쇼호르(이방원?)가 아프칸 고갯기로 보내는 형식적&대의명분적 사절(함흥차사)들을 활로 쏴 죽인 것이라 사료?니다.
세종대왕과 그 아들 안평(울르그벡?)때 명조선과 동국조선의 통합조짐이 보였으나... 수양대군의 왕자의 난으로...다시 동서로 분리...
이후, 명조(明朝=밍차오=밍차이나)은 태조 이성계(티무르?)의 옥새를 보유한 동국조선 황실의 고향이자 상국(上國)이니.. 명분에서 밀리는 중국 부근의 동국조선 황실은... 외형상으론...명나라(무굴제국?)를 상국이자 본가인 본조(本朝=본차오=본차이나?)로 존대할 수 밖엔 없었다 보입니다.
흔히 중국 도자기를 말하는 차이나...거기에 뼈가루를 섞어 만든 유럽식 도자기가 본(bone)+ 차이나라 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보입니다.
본 차이나의 본(bone)가 뼈"를 상징한 양이들 말은 맞으나... 본조(本朝)의 발음... 본차오+나라(누리)와도 상통하고...본(本)자 자체도 뿌리와 줄기등의 기본 뼈대를 의미하는 문자이니여...
억지대입 하자면...
차이나"는...조선(朝)나라와 그 상징인 청자&청와백자 도자기... 본 차이나"는...그 본가인 서역 명나라인 본조(本朝)...즉,본차이나의 상징인 뼈가루 섞어 더 단단히 만든 도자기... 이걸건데...양이들이 지들 스스로 발명했다 가증을 떠는 것일수도 있다 걱정?니다.
동서 양국으로의 분리와 임진란을 틈타서.. 안평을 호위하던 이징옥장군을 모든 여진의 통합 대칸으로 추대했던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야인여진(?차크몽골=카프카스한국)이 득세를 하고...
명조선(무굴)은 속지인 인도로 내 몰리고... 동국조선은...원래의 출발지였던 금나라지역 속지인 북경일대와 만주&한반도로 꾸준히 격리돼는게... 구한말 까지 이어진 구도일지 싶습니다.
중국(中國)이란 개념 말씀이져... 철저히 왕건고려의 시각으로 만든 개념일지 싶습니다. 음양오행상... 중악(中嶽)인 숭악(嵩嶽=숭산=송악?)일대 낙양을 중국(中國=중앙고려)... 그 동쪽인 산동성 태산을 동악(東岳)...서쪽 화산(華山)을 서악(西岳)...북쪽 환산(桓山)을 북악(北岳)...남쪽 형산(衡山0을 남악(南岳)...
이리 규정한 건...탕구트이자 북송의 발상인데...그게 곳 왕건의 고려같단 얘기입니다.
북송 남송이 분류돼는 이유는... 전통적으로 신라(사로=사라센?)의 영토인 양자강(漢江)이남의 속지로 금나라(키타이)에 이은 거란(카라키타이=타타르몽골)과 원나라의 꾸준한 침략으로...북송(고려)가 밀리면서... 원나라에 투항한 황실은 원나라와 연합국을 형성하고...이에 불응한 삼별초등의 군벌들은 양자강 이남에서 반발을 한게 남송의 정체일지 싶습니다.
역사서엔 그저 고려(高麗)라 표기돼지만... 그 지역의 명칭으론...당나라(탕~탄)을 이은 당고려(唐高麗)란 의미의 탕구트라 불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송나라(宋)란 국명은...단지 그 남방 속지인 신라(사로)일대의 지명일 뿐인데... 상국인 중국(낙양)일대의 탕구트(당고려)를 남송입장의 북송으로 칭해 버린게 역사의 행패같습니다.
그리고여... 북송(탕구트-왕건고려?)의 시원인 궁예의 태봉국여...한자 다 무시하고...티벳과 연관이 많을듯 싶습니다. 티벳 청장고원(철원?)에서 신라와 당나라에 저항하던 궁예가...당의 위기를 틈타 장안(서안)을 접수하고 이를 왕건이 찬탈하여... 그 수도를 낙양(송도?)로 옮긴게 왕건고려의 시작이자 북송(탕구트)의 시작일지 싶습니다.
젤 중요한건...한양의 위치입니다.
전 애초에 한중(漢中) 동남쪽 한수(漢水) 부근의 안강(安江)이 초기 한양이고... 청의 발호 이후 무한이 한양일지 예상했으나...
수정하겠습니다.
섬서성 한중(漢中)...한중이 한양(漢陽)임이 분명합니다. 한반도 서울(새올=쇠나라=새나라=금나라) 표기는 대부분 왕경(王京)이거나 경도(京都).경기도(킹기토우)입니다.
한양은 북쪽의 삼각산을 주산으로 했다 했습니다. 삼각산(三角山)은 화산(華山)의 전통적인 별칭입니다.
고 아래에 한중(漢中)이 있으며...그 남쪽에 큰 산맥이 감싸 안습니다.
그 서쪽은 말 한 마리 밖엔 다니지 못할 협로가 험하다 했으니...한중의 서쪽은 사천성이자 티벳일대고... 그 지역은 전통적으로 파촉(巴蜀)의 땅이라 파주(波州)입니다.
서울이고 북경이고 남경이고 무한이고 성도고... 역사가 말한 북악과 남악(목멱산)에 둘러쌓인 천해의 방벽을 가진 황도는 漢中 뿐일까 합니다.
후대 달단청나라의 발호로 남으로 몰리면서 남한(南漢)격인 무한이 한양이 돼며... 이땐 이미 무굴(인도&티벳)에서 양이들에게 밀린 서쪽 조선격인 남명(차오노르=차이나=무굴의 잔존세력)들도 무한일대에 집결했다 보여집니다.
그러다 달단 청나라의 남명토벌로 여기도 박살이 나고... 오로지 병합에 순순히 응했던 키타이(금나라)지역의 원조 동국조선만이 그 강역과 자치권을 유지하다 구한말에 달단과 함께 몰락했다 보여집니다.
요 격변의 당시... 중원의 동국 자리를 잠시 인수했다 ...북경으로...한반도 서울로 격리?게... 중원 상강일대에서 태평천국의난(동학난?)을 토벌하는데 달단청나라와 양이&왜노들에 일조했던 무굴의 잔존세력인 남명... 즉,대한뎨국의 정체일지 싶습니다.
그래서 현 한반도인들의 한자 정음표기가...장안어,북경어와 차이가 나는듯 싶습니다. 현재의 보통화란 북경어 자체도...구한말에 처 올라온 토왜들로 예상돼는 모택동계들의 언어가 뒤범벅 됐으니... 정음을 논할 개재도 못 돼겠지만여...
동국조선의 황도인 한양은..현재도 한수(漢水)라 일컬어지는 양자강의 상류가 흐르는 한중(漢中)을 이르느 것이며... 중국이라한 지역은...그 동국조선지 중...고려의 옛 황도인 낙양(송악=숭악일대)를 칭하는 명칭이지... 동국조선의 황도는 절대 아니라 사료?니다.
그리고 김홍필선생님께선... 동하(東夏)가 곧 동국(東國)일 것이라 예상하셨으나...
서하(西夏)는 이미 중원의 한나라때부터 서역의 별개 나라로 취급했던 카자흐스탄 우즈벡 일대의 나라니... 상대적으로 그 동부인 키르키스탄,아프칸 ,신장성,티벳등지가 동하(東夏)의 후보지가 돼야 자연스런 격이고... 이 지역을 고려(북송)가 통치할 시기엔...서쪽 화산(華山)일대의 夏족들이니...화하(華夏)로로 칭했다 예상?니다.
중화(中華)는..화산(華山)일대의 한중(초기한양?)이나 낙양의...조선(동국) 이나 고려 황도 일대라 보면 ? 것이겠고여...
너무 광범위하게 때려잡으려니 무리가 많았습니다... 알아서들 정리해서 이해들 하십시여...ㅡ.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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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漢字)는 오늘날에도 동양(東洋)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중화민국(中華民國), 일본국(日本國)에서 사용(使用)되고 있는 전통적(傳統的) 문자(文字)입니다.
그런데 한자(漢字)의 의미(意味; 뜻)와 달리, 한자(漢字)의 발음(發音; 소리)은 이른바 동양(東洋) 삼국(三國)에서 그 차이(差異)가 있습니다.
한자(漢字)가 최초(最初)로 만들어진 때부터 하나의 한자(漢字)마다 여러 가지의 발음(發音)이 설정(設定)되었거나, 처음부터 지역(地域)에 따라 그 발음(發音)이 서로 달랐을까요? 아니면, 세월(歲月)이 점차(漸次) 흐르면서 지역별(地域別)로 자연(自然)스럽게 한자(漢字)의 발음(發音)에 차이(差異)가 발생(發生)하였을까요?
한자(漢字) 음운(音韻)의 변천(變遷) 원인(原因)을 규명(糾明)하는 일은 언어학(言語學)의 영역(領域)이지만, 한자음(漢字音)에 관(關)하여 살펴보는 것도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에 한 발짝 다가서는 방법(方法)이라고 필자(筆者)는 생각합니다.
역사적(歷史的)으로, 한자(漢字)에는 ‘정음’(正音)과 ‘속음’(俗音)이라는 발음(發音)이 존재(存在)하였다고 합니다. 그럼, ‘정음’(正音)과 ‘속음’(俗音)의 일반적(一般的) 정의(定義)는 무엇일까요?
‘두산동아(斗山東亞)’의 <새 국어사전(國語辭典)> 제4판(第四版))에 따르면, ‘정음’(正音)은 글자의 ‘바른 소리’ 또는 ‘제소리’라고 하며, ‘속음’(俗音)은 ‘익은소리’ 또는 ‘버릇소리’라고도 하며 한자(漢字)의 원음(原音)이 변(變)하여 널리 통용(通用)되는 소리(音)라고 합니다. 속음(俗音)의 사례(事例)는 ‘솰’(刷)을 ‘쇄’로, ‘협’(洽)을 ‘흡’으로 읽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정음(正音)은 본음(本音) 또는 원음(原音)으로 볼 수 있고, 속음(俗音)은 관용음(慣用音) 또는 통용음(通用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자음(漢字音)을 ‘정음’(正音)과 ‘속음’(俗音)으로 구분(區分)하는 기준(基準)은 무엇일까요?
한자(漢字)가 사용(使用)되는 지역(地域)을 기준(基準)으로 할까요? 아니면, 한자(漢字) 사용(使用)의 주체(主體)를 기준(基準)으로 할까요? 예(例)를 들어, 정음(正音)은 귀족(貴族)들이 주(主)로 사용(使用)하였고, 속음(俗音)은 서민(庶民)들이 즐겨 사용(使用)하였을까요? 아니면, 또 다른 기준(基準)으로 구별(區別)되었을까요?
<네이버(NAVER) 백과사전(百科事典)>과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章閣韓國學硏究院)>의 자료(資料)에서는 ‘지역’(地域)을 기준(基準)으로 하여 ‘중국’(中國)의 한자음(漢字音)을 ‘정음’(正音)과 ‘속음’(俗音)으로 구분(區分)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그 자료(資料)를 소개(紹介)합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章閣韓國學硏究院)>의 자료(資料)에 따르면, 현재(現在) 규장각(奎章閣) 도서(圖書)에는 <周易正音(주역정음)>을 제외(除外)한 목활자본(木活字本) <書傳正音(서전정음)>‚ <詩傳正音(시전정음)>‚ <春秋正音(춘추정음)>‚ <大學正音(대학정음)>‚ <中庸正音(중용정음)>‚ <論語正音(논어정음)>‚ <孟子正音(맹자정음)>이 있으며, 이 책(冊)들이 늦어도 1735년에 간행(刊行)된 초간본(初刊本)인 것으로 추정(推定)된다고 합니다. [출처=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kyujanggak.snu.ac.kr/]
예(例)를 들어, <孟子正音(맹자정음)>은 무엇일까요?
<네이버(NAVER) 백과사전(百科事典)>에 따르면, <孟子正音(맹자정음)>은 유교(儒敎) 경전(經典)인 <맹자(孟子)>의 원문(原文)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언자(諺字)로 중국(中國)의 정음(正音)과 속음(俗音)을 함께 병기(倂記)한 책(冊)이며, <맹자(孟子)>의 주음표기(注音表記)는 원래(元來) 중국어(中國語) 역관(譯官)들에게 중국(中國)의 원음(原音)을 정확(正確)히 가르치기 위한 목적(目的)으로 간행(刊行)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음류(正音類)는 원문(原文)에 대(對)한 언해(諺解)가 없는 것이 특색(特色)이라고 합니다.
이 책(冊)에서는 <맹자(孟子)>에 나오는 3만(萬) 8985개(個)의 한자(漢字)에 대하여 일일(一一)이 표준음(標準音) 곧 정음(正音)인 북방음(北方音)과 속음(俗音)인 남방음(南方音)으로 구분(區分)하여 왼쪽(左側)에는 표준음(標準音)인 정음(正音)을, 오른쪽(右側)에는 속음(俗音)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언자(諺字)로 표기(表記)하였으며, 사성(四聲)의 표기(表記)인 방점(傍點)은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책(冊)은 당시(當時) 중국(中國) 한자음(漢字音)의 북방음(北方音)과 남방음(南方音)의 음운(音韻) 체계(體系)가 상당(相當)히 다른 것이었음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국(中國)은 어느 지역(地域)을 가리키며, 정음(正音)인 ‘북방음’(北方音)과 속음(俗音)인 ‘남방음’(南方音)의 실체(實體)는 무엇일까요?
위에 인용(引用)된 <네이버(NAVER) 백과사전(百科事典)>의 자료(資料)에 따르면, 중국(中國)이 북방(北方)과 남방(南方) 지역(地域)으로 구분(區分)되고 있습니다. 두 지역(地域)은 구체적(具體的)으로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중국(中國)은 이른바 지나(支那) 대륙(大陸)의 전역(全域)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만약(萬若) 그렇다면, 중간(中間) 지역(地域) 없이, 황하(黃河) 또는 장강(長江)을 기준(基準)으로 지나(支那) 대륙(大陸)을 북방(北方)과 남방(南方)으로 구별(區別)하여, 크게 두 지역(地域)이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황하(黃河)와 장강(長江) 사이의 중간(中間) 지역(地域)을 별도(別途)로 좁은 뜻(狹義)의 ‘중원’(中原)이라 부르고, 이곳을 기준(基準)으로 북(北)쪽 지역(地域)을 북방(北方)으로, 남(南)쪽 지방(地方)을 남방(南方)으로 구분(區分)하여, 크게 세 지역(地域)이 되는 것일까요?
한자음(漢字音)에 관(關)하여 더 구체적(具體的)으로 살펴보려면, 이른바 중국(中國)과 동국(東國)의 관계(關係)도 함께 검토(檢討)할 필요(必要)가 있습니다.
<孟子正音(맹자정음)>에서는 한자(漢字)에 대(對)하여 ‘중국’(中國)의 ‘정음’(正音)과 ‘속음’(俗音)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18세기(世紀) ‘동국’(東國)의 한자음(漢字音)은 어떠하였을까요?
<네이버(NAVER) 백과사전(百科事典)>에 따르면, 세종대왕(世宗大王) 때에 엮은 <東國正韻(동국정운)>(1447년~1448년)이라는 음운서(音韻書)는 1443년 훈민정음(訓民正音) 완성(完成) 후(後)에 한자음(漢字音)의 혼란(混亂)을 바로잡기 위하여 중국(中國)의 운서(韻書)인 <廣韻(광운)>, <集韻(집운)>, <洪武正韻(홍무정운)> 등(等)을 참고(參考)로 삼아 엮었다고 합니다.
18세기(世紀) ‘동국’(東國)의 한자음(漢字音)은 15세기(世紀)의 <東國正韻(동국정운)>에 나오는 한자(漢字) 발음(發音)과 얼마만큼 차이(差異)가 있었을까요?
중국(中國)과 동국(東國)은 그 성격(性格)이 서로 완전(完全)히 다른 것을 지칭(指稱)하는 낱말일까요?
중국(中國)과 동국(東國)은 모두 ‘조선’(朝鮮)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 들어가는 나라(國; 邦)들이라고 보아야 할까요?
‘중국’(中國)에도 한자(漢字)의 정음(正音)과 속음(俗音)이 있었고, ‘동국’(東國)에도 한자(漢字)의 정음(正音)과 속음(俗音)이 있었을까요?
중국(中國)의 한자음(漢字音)과 동국(東國)의 한자음(漢字音) 둘 중(中)에서 어느 쪽이 원형(原型) 또는 원조(元祖)일까요?
<대륙사관(大陸史觀)>을 토대(土臺)로 하여 위에 인용(引用)된 자료(資料)를 검토(檢討)해보니까, 여러 가지 의문(疑問)이 필자(筆者)의 머리 속에서 떠오릅니다.
지금(只今)부터는 “한자(漢字)의 정음(正音)과 속음(俗音)”에 관(關)하여 다소(多少) 전문적(專門的)인 자료(資料)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8세기(世紀)의 <經書正音(경서정음)>에 관(關)한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章閣韓國學硏究院)>의 자료(資料)에 따르면, <經書正音(경서정음)>은 <周易正音(주역정음)>, <書傳正音(서전정음)>‚ <詩傳正音(시전정음)>‚ <春秋正音(춘추정음)>‚ <大學正音(대학정음)>‚ <中庸正音(중용정음)>‚ <論語正音(논어정음)>‚ <孟子正音(맹자정음)>으로 구성(構成)되는데, 8종(種)의 유교(儒敎) 경전(經典)의 원문(原文)에 각(各) 한자(漢字)마다 두 가지의 한어(漢語) 발음(發音)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언자(諺字)로 달아 놓은 책(冊)이라고 합니다.
구체적(具體的)으로 설명(說明)하면, 한어(漢語) 원문(原文)의 각(各) 한자(漢字) 밑에 좌우(左右)로 한어음(漢語音)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언자(諺字)로 표기(表記)하는 방식(方式)은 사역원(司譯院) 역학서(譯學書)에서는 <飜譯老乞大(번역노걸대)>와 <飜譯朴通事(번역박통사)>에서 등장(登場)하기 시작(始作)하였으며 이후(以後)의 한학서(漢學書)들에도 나타나는데,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언자(諺字) 표기(表記) 중에서 왼쪽(左側)은 한어(漢語) 규범음(規範音) 또는 표준음(標準音)인 정음(正音)이며‚ 오른쪽(右側)은 한어(漢語) 현실음(現實音)인 속음(俗音)으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經書正音(경서정음)>의 좌측음(左側音)은 <洪武正韻譯訓(홍무정운역훈)>, <四聲通解(사성통해)>의 정음(正音)과 거의 일치(一致)하고 있으나 운미(韻尾)에 있어서만 차이(差異)를 보이는데, <經書正音(경서정음)>의 좌측음(左側音)에 나타나는 입성운미(入聲韻尾)와 지지치(支紙寘) 3운(韻)의 종성(終聲) 표기(表記)는 오히려 <洪武正韻譯訓(홍무정운역훈)>이나 <四聲通解(사성통해)>의 속음(俗音) 표기(表記)와 가깝고, 18세기(世紀) 간행(刊行)의 <老乞大諺解(노걸대언해)>(1745년)‚ <朴通事新釋諺解(박통사신석언해)>(1765년)‚ <重刊老乞大諺解(중간노걸대언해)>(1795년~) 등(等)의 좌측음(左側音)과 일치(一致)한다고 합니다.
한편 <經書正音(경서정음)>의 우측음(右側音)은 <老乞大諺解(노걸대언해)>(1670년)의 우측음(右側音)과 일치(一致)하는데, 이 책(冊)이 간행(刊行)된 시기(時期)의 한어음(漢語音)을 반영(反映)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비슷한 시기(時期)에 간행(刊行)된 <朴通事新釋諺解(박통사신석언해)>나 <重刊老乞大諺解(중간노걸대언해)>가 구개음화(口蓋音化)‚ 촬구호(撮口呼)에서의 변화(變化)‚ 일모자(日母字)에서의 변화(變化)‚ 산섭계(山攝系) 운모(韻母)의 변화(變化) 등(等) 17세기(世紀)~18세기(世紀)에 북방(北方) 한어(漢語)에서 일어난 음운변화(音韻變化)를 우측음(右側音)에서 생생히 반영(反映)하고 있는 반면(反面), <經書正音(경서정음)>의 우측음(右側音)은 초간본(初刊本)은 물론(勿論) 1784년 간행(刊行)의 중간본(重刊本)도 이러한 변화(變化)를 전혀 반영(反映)해 주고 있지 못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經書正音(경서정음)>의 우측음(右側音)은 금속음(今俗音)이라기보다는 전(前)시대(時代)의 한어(漢語) 현실음(現實音)인 속음(俗音)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妥當)해 보인다고 합니다.
<經書正音(경서정음)>은 독자적(獨自的)인 언어학적(言語學的) 자료(資料)로서의 가치(價値)보다는 기존(旣存)의 경서(經書) 원문(原文)에 한어음(漢語音)만을 달아 놓은 책(冊)을 간행(刊行)한 이유(理由)가 무엇인가에 대(對)해 더 관심(關心)이 기울여지며,현재(現在)로서는 한어(漢語) 통역관(通譯官)들에게 당시(當時)의 북방(北方) 한어음(漢語音)으로 경서(經書)를 읽도록 하여 통역(通譯)에서 경서(經書)가 인용(引用)될 경우(境遇)에 대비(對備)하게 하였다는 견해(見解)가 가장 설득력(說得力) 있어 보이지만 앞으로 보다 면밀(綿密)한 검토(檢討)가 요구(要求)된다고 합니다. [출처=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kyujanggak.snu.ac.kr/]
추가적(追加的)으로, 8종(種)의 <經書正音(경서정음)> 중(中)에서도 <춘추정음(春秋正音)>에 관(關)하여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章閣韓國學硏究院)>의 자료(資料)를 검토(檢討)해보겠습니다.
<춘추정음(春秋正音)>은 <춘추(春秋)>의 경문(經文)에 정음(正音)과 속음(俗音) 두 개(個)의 발음(發音)을 표기(表記)하였는데‚ 이 두 가지의 중국어음(中國語音)은 1517년에 간행(刊行)된 최세진(崔世珍, ?~1542년)의 <四聲通解(사성통해)> 권말(卷末)에 수록(收錄)된 <飜譯老乞大朴通事凡例(번역노걸대박통사범례)>의 설명(說明)에 따르면, i) 좌측(左側)은 이상적(理想的)인 중국음(中國音)곧 정음(正音)이고‚ ii) 우측(右側)은 당시(當時) 북방(北方) 중국어(中國語)의 현실음(現實音) 곧 속음(俗音)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원문(原文) 각(各) 한자(漢字) 아래에 두 가지의 중국어음(中國語音)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언자(諺字)로 표시(表示)하는 관습(慣習)은 16세기(世紀)부터 19세기(世紀) 말(末)까지 간행(刊行)된 <老乞大諺解(노걸대언해)>, <朴通事諺解(박통사언해)>등(等)의 모든 언해본(諺解本) 한학서(漢學書)에 일관(一貫)되게 나타나는 특징(特徵)이라고 합니다.
18세기(世紀) 이전(以前)에 간행(刊行)된 언해본(諺解本) 한학서(漢學書)들의 좌측음(左側音)은 <洪武正韻譯訓(홍무정운역훈)>과<四聲通解(사성통해)>에서 제시(提示)된 속음(俗音)과 대체(大體)로 일치(一致)하지만‚ <經書正音(경서정음)>을 비롯하여 18세기(世紀)에 간행(刊行)된 현존(現存) 한학서(漢學書)들의 좌측음(左側音)은 <四聲通解(사성통해)>의 정음(正音)에 더 가까우며, 우측음(右側音)은 17세기(世紀)~18세기(世紀)에 간행(刊行)된 언해본(諺解本) 한학서(漢學書)들의 우측음(右側音)과 대체(大體)로 일치(一致)한다고 합니다. [출처=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kyujanggak.snu.ac.kr/]
바로 위에 인용(引用)된 자료(資料)에서는, 중국(中國)의 한자음(漢字音)을 i) 이상적(理想的)인 중국음(中國音) 곧 정음(正音)과 ii)당시(當時) 북방(北方) 중국어(中國語)의 현실음(現實音) 곧 속음(俗音)으로 구별(區別)하고 있습니다.
결국(結局), 여기서는 정음(正音)을 ‘이상음’(理想音)으로, 속음(俗音)을 ‘현실음’(現實音)으로 설명(說明)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필자(筆者)가 앞에서 소개(紹介)한 <네이버(NAVER) 백과사전(百科事典)>의 <孟子正音(맹자정음)> 자료(資料)에서는, 정음(正音)을 중국(中國)의 북방음(北方音)으로, 속음(俗音)을 중국(中國)의 남방음(南方音)으로 설명(說明)하고 있어서 서로 차이(差異)가 나는 것이 문제(問題)입니다.
<춘추정음(春秋正音)>이든 <孟子正音(맹자정음)>이든 모두 <經書正音(경서정음)>에 해당(該當)되는 것이므로 그 내용(內容)이 서로 다르면 문제(問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자료(資料)에 오류(誤謬)가 있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관련(關聯) 자료(資料)를 추가적(追加的)으로 검토(檢討)해보겠습니다.
8종(種)의 <經書正音(경서정음)> 중(中)에서 <中庸正音(중용정음)>에 관(關)한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章閣韓國學硏究院)>의 자료(資料)에 따르면, <중용(中庸)> 원문(原文)의 한자(漢字)를 중국음(中國音)의 정음(正音) 곧 북방음(北方音)과 속음(俗音) 곧 남방음(南方音)으로 구분(區分)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언자(諺字)로 병기(倂記)한 책(冊)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大學正音(대학정음)>에 관(關)한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章閣韓國學硏究院)>의 자료(資料)에 따르면, <대학(大學)> 원문(原文)에 중국(中國)의 정음(正音)인 북방음(北方音)과 속음(俗音)인 남방음(南方音)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언자(諺字)로 표기(表記)하여 놓은 책(冊)으로 토(吐)나 언해(諺解)는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언자(諺字) 창제(創製) 동기(動機)는 중국(中國) 한자음(漢字音) 전체(全體)를 표기(表記)하기 위한 문자(文字) 체계(體系)가 아니라 정음(正音)의 표기(表記)를 위한 것이 아닐까 라고 추측(推測)된다고 합니다.
또한 도산본(陶山本) <大學諺解(대학언해)>의 한자음(漢字音)과 비교(比較)하면, 이 책(冊)에 나오는 중국(中國) 한자음(漢字音)의 정음(正音) 및 속음(俗音)과 동국(東國)의 한자음(漢字音)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합니다.
이 책(冊)에 나오는 중국(中國) 북방음(北方音)의 표기(表記)가 15세기(世紀) <東國正韻(동국정운)>(1447년~1448년)의 표기(表記)와 일치(一致)하고 있으나, 동국(東國)에 있어서 18세기(世紀) 당시(當時)의 현실(現實) 한자음(漢字音)은 남방음(南方音)에 가까웠던 것 같다고 합니다.
이러한 한자음(漢字音) 자체(自體)가 <大學正音(대학정음)>이 간행(刊行)된 당시(當時)의 것인지는 의문(疑問)이지만, 어쨌든 18세기(世紀) 중국(中國) 한자음(漢字音) 연구(硏究)를 위한 자료(資料)로 가치(價値)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출처=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kyujanggak.snu.ac.kr/]
<書傳正音(서전정음)>‚ <詩傳正音(시전정음)>‚ <論語正音(논어정음)>‚ <孟子正音(맹자정음)>에 관(關)한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章閣韓國學硏究院)>의 자료(資料)에서도, 경전(經典) 원문(原文)에 중국(中國)의 정음(正音)인 북방음(北方音)과 속음(俗音)인 남방음(南方音)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언자(諺字)로 표기(表記)하여 놓은 책(冊)이라고 합니다. [출처=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kyujanggak.snu.ac.kr/]
지금(只今)까지 추가(追加)로 검토(檢討)한 자료(資料)들을 종합(綜合)하면,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章閣韓國學硏究院)>의 <춘추정음(春秋正音)> 자료(資料)에 나오는 “북방(北方) 중국어(中國語)의 현실음(現實音)”이라는 표현(表現)을 “중국(中國) 남방음(南方音)”으로 이해(理解)하여야 된다고 필자(筆者)는 생각합니다.
18세기(世紀) 중국(中國)에서는 한자(漢字)의 남방음(南方音)이 유행(流行)하였을까요? 가령(假令) 18세기(世紀) 중국(中國)의 강역(疆域)을 지나(支那) 대륙(大陸)으로 본다면, 그 당시(當時) 지나(支那)의 북방(北方) 지역(地域)보다는 남방(南方) 지역(地域)의 인구(人口)가 훨씬 많았으며, 대항해(大航海) 시대(時代)부터 서양(西洋) 세력(勢力)에 의(衣)하여 바다(海)에 인접(隣接)한 남방(南方)의 주요(主要) 도시(都市)들이 개항(開港)되어 그곳에 산업(産業)과 인구(人口)가 지속적(持續的)으로 집중(集中)되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춘추정음(春秋正音)>에 관(關)한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章閣韓國學硏究院)>의 자료(資料)에서는 정음(正音)을 ‘이상음’(理想音)으로, 속음(俗音)을 ‘현실음’(現實音)이라고 설명(說明)하고 있습니다.
‘이상음’(理想音)은 중국(中國)의 북방음(北方音)이고, ‘현실음’(現實音)은 중국(中國)의 남방음(南方音)일까요? 한자(漢字)의 ‘이상음’(理想音)과 ‘현실음’(現實音)을 구별(區別)하는 다른 기준(基準)은 없을까요?
사전적(辭典的)으로, 현실음(現實音)이라는 것은 현실적(現實的)으로 사용(使用)되는 발음(發音)이고, 속음(俗音)이라는 것은 관용음(慣用音) 또는 통용음(通用音)을 가리킵니다.
<네이버(NAVER) 백과사전(百科事典)>에 따르면, 중국어(中國語) 음운사(音韻史)에서는 i) 자음(字音) 곧 한자(漢字)의 음운(音韻)과 ii) 어음(語音)의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지금까지 어음사(語音史)에 속(屬)하는 것은 전(傳)하는 것이 없고, 자음사(字音史)에 관(關)한 자료(資料)만이 전(傳)하고 있다고 합니다. 운서(韻書)나 운도(韻圖)에서 보여주는 음운체계(音韻體系)는 어디까지나 중국(中國) 각(各) 시대(時代)의 자음(字音)에 관(關)한 체계(體系)일 뿐, 실제(實際)로 사용(使用)되고 있던 어음(語音)의 체계(體系)는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중국어(中國語) 음운사(音韻史)는 자음(字音)의 역사(歷史)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중국(中國) 한자음사(漢字音史)의 시대(時代) 구분(區分)은 학자(學者)에 따라 다르나, 대략(大略) 상고음(上古音), 중고음(中古音; 隋-唐代 音), 근고음(近古音; 宋代 音), 근대음(近代音; 元代 以後 音), 현대음(現代音) 등(等)으로 구분(區分)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韓國) 자음(字音) 곧 한국식(韓國式) 한자(漢字) 음운(音韻)의 모태(母胎)는 중국(中國)의 각(各) 시대(時代) 음(音)이 끊임없이 전래(傳來)되어 형성(形成)된 것이지만, 가장 큰 바탕이 된 것은 ‘당대(唐代)의 장안음(長安音)’인 것으로 인정(認定)되고 있다고 합니다.
바로 위의 자료(資料)에 따르면, 특이(特異)하게도 한자(漢字)의 ‘자음’(字音)과 ‘어음’(語音)이 서로 구별(區別)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음’(字音)은 운서(韻書)나 운도(韻圖)에서 보여주는 ‘한자(漢字)의 음운(音韻)’을 가리키며, ‘어음’(語音)은 입(口)으로 소리(聲)를 내거나 귀(耳)로 들을 수 있는 ‘실제(實際) 발음(發音)’이라고 보입니다.
운서(韻書)나 운도(韻圖)에서 보여주는 음운체계(音韻體系)는 ‘자음’(字音)에 관(關)한 체계(體系)일 뿐이므로, 실제(實際)의 어음(語音)과 자음(字音)은 서로 일치(一致)하지 않는 경우(境遇)가 많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推測)됩니다.
거의 모든 ‘소리’(聲)를 문자(文字)로 표기(表記)할 수 있다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언자(諺字)’가 상고(上古) 시대(時代)부터 한자(漢字)의 발음(發音) 부호(符號)로 줄곧 사용(使用)되었다면 그러한 일이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필자(筆者)는 생각합니다.
한국식(韓國式) 한자(漢字) 음운(音韻)의 가장 큰 바탕이 된 것은 ‘당대(唐代)의 장안음(長安音)’이라고 하므로, 이러한 자음(字音)이야말로 15세기(世紀) 동국(東國)의 한자(漢字) ‘정음’(正音)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이상음’(理想音)은 ‘자음’(字音) 곧 운서(韻書)나 운도(韻圖)에서 보여주는 음운체계(音韻體系)이고, ‘현실음’(現實音)은 ‘어음’(語音)곧 실제(實際)로 일상(日常) 사용(使用)되었던 발음(發音)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지금(只今)까지 한자(漢字)의 ‘중국’(中國) 정음(正音) 곧 이상음(理想音)과 속음(俗音) 곧 현실음(現實音)에 관(關)하여 검토(檢討)하였습니다.
그럼, 18세기(世紀) ‘동국’(東國)에서는 한자음(漢字音)을 어떻게 구분(區分)하였을까요?
무엇보다 먼저 ‘화음’(華音)과 ‘동음’(東音)이라는 한자음(漢字音)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18세기(世紀)의 <璜正音通釋韻考(화동정음통석운고)>라는 책(冊)을 검토(檢討)해보겠습니다.
<璜正音通釋韻考(화동정음통석운고)>의 ‘璜’(화동)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이와 관련(關聯)하여, 조선(朝鮮) 전기(前期)의 학자(學者) 김종직(金宗直, 1431년~1492년)의 시문집(詩文集)인 <점필재집(佔畢齋集)>의 일부(一部) 내용(內容)을 아래에 소개(紹介)합니다.
<안음현(安陰縣)에 향교(鄕校)를 새로 창건(創建)하다> “조선(朝鮮)이 황제(皇帝)의 명(命)을 받아 동하(東夏)를 다스리면서 으뜸으로 학교(學校)를 개설(開設)하여 인재(人才) 양성(養成)하는 것을 급무(急務)로 삼았다. 그리하여 아무리 궁벽(窮僻)한 고장의 먼 곳 백성(百姓)들에게도 향교(鄕校)가 있지 않은 데가 없어, 이로 말미암아 문명(文明)의 치적(治績)이 전고(前古)를 초월(超越)하였다.” (後略)
<安陰縣新創鄕校> “朝鮮受帝命 尹東夏 首以闢庠序 育人才爲務 雖窮陬遐裔 莫不有鄕校 由是 文明之治 度越前古” (後略)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여기서 동하(東夏)를 중국(中国)이라고 번역(飜譯)하는 자료(資料)도 있습니다만, 동하(東夏)는 ‘동방(東方)의 화하(華夏)’라는 뜻이며 ‘동국’(東國)의 다른 표현(表現)이라고 보입니다.
화하(華夏)와 동하(東夏)는 서로 똑같은 것일까요?
<네이버(NAVER) 국어사전(國語辭典)>에 따르면, 화하(華夏)는 중국(中國)의 다른 이름이라고 합니다. 일반적(一般的)으로는 중국(中國)을 중화(中華)라고도 말합니다.
<璜正音通釋韻考(화동정음통석운고)>의 ‘璜’(화동)이라는 것은 ‘華夏’(화하)의 ‘華’(화)와 ‘東夏’(동하)의 ‘東’(동)을 각각(各各)가리킨다고 필자(筆者)는 생각합니다.
‘中國’이라는 낱말은 15세기(世紀)의 <훈민정음(訓民正音)> 서문(序文)에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 서문(序文)의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이라는 한문(漢文)에서, “國之語音”의 ‘國’은 문맥상(文脈上) 중국(中國)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동국’(東國)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5세기(世紀)의 <훈민정음언해(訓民正音諺解)>에 따르면, “國之語音”의 ‘國’은 ‘나라’로 언해(諺解)하였고, “異乎中國”의 ‘中國’은 ‘황제(皇帝)가 계시는 나라’로 언해(諺解)하였는데, 둘 다 ‘나라’라고 표현(表現)하고 있습니다.
<훈민정음언해(訓民正音諺解)>에서는 분명(分明)히 중국(中國)을 ‘황제국’(皇帝國)이라고 표현(表現)하였는데, 동국(東國)은 어떤 나라이었을까요? 이른바 ‘제후국’(諸侯國)이었을까요? 그 당시(當時)의 황제(皇帝)는 누구이었을까요?
하여간(何如間) ‘華夏’(화하)와 ‘東夏’(동하)는 서로 구별(區別)된다고 보이므로, ‘華’(화)는 중국(中國)을 말하고 ‘東’(동)은 동국(東國)을 가리킵니다.
결국(結局), 화음(華音)은 중국(中國)의 한자(漢字) 정음(正音)이고, 동음(東音)은 동국(東國)의 한자(漢字) 정음(正音)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네이버(NAVER) 백과사전(百科事典)>의 자료(資料)를 살펴보면, <璜正音通釋韻考(화동정음통석운고)>는 조선(朝鮮) 영조(英祖) 때의 음운학자(音韻學者) 포암(圃菴) 박성원(朴性源, 1697년∼1767년)이 1747년에 집필(執筆)한 운서(韻書)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책(冊)을 <정음통석(正音通釋)>이라고도 하는데, <삼운통고(三韻通考)>와 <사성통해(四聲通解)>를 바탕으로 하여 당시(當時)의 조선(朝鮮) 한자음(漢字音)과 중국(中國) 한자음(漢字音)을 밝힌 음운서(音韻書)라고 합니다.
특(特)히, <璜正音通釋韻考(화동정음통석운고)>는 최초(最初)로 ‘중국’(中國)의 한자음(漢字音)과 ‘동국’(東國)의 한자음(漢字音)을 병기(倂記)한 책(冊)이라고 합니다.
반면(反面), 필자(筆者)가 앞에서 소개(紹介)한 <經書正音(경서정음)>은 동국(東國)의 한자음(漢字音)이 아니라, ‘중국’(中國)의 한자음(漢字音)만을 정음(正音)과 속음(俗音)으로 구별(區別)하여 병기(倂記)한 책(冊)입니다.
또한 <한국운서(韓國韻書)의 이해(理解)>(정경일 지음, 2002년, 아카넷)라는 책(冊)에 따르면, 한자음(漢字音)은 화음(華音)과 동음(東音) 두 가지가 있는데, 조선(朝鮮) 전기(前期)에는 이들을 각각(各各) 표기(表記)하는 운서(韻書)가 만들어지다가, 조선(朝鮮) 후기(後期)에 들어서면서 이들을 통합(統合)하여 병기(倂記)하는 운서(韻書)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內容)을 <반도사관(半島史觀)>으로 검토(檢討)하면, 화음(華音)은 지나(支那) 대륙(大陸)의 중국(中國) 또는 중화(中華)의 한자음(漢字音)이고, 동음(東音)은 반도(半島)의 동국(東國)또는 조선(朝鮮)의 한자음(漢字音)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게다가 <네이버(NAVER) 백과사전(百科事典)>에 나오는 <孟子正音(맹자정음)>의 내용(內容)을 추가(追加)로 반영(反映)하면, 지나(支那) 대륙(大陸)의 화음(華音)은 정음(正音)인 북방음(北方音)과 속음(俗音)인 남방음(南方音)으로 다시 나뉜다는 뜻이 됩니다.
한편 <대륙사관(大陸史觀)>을 도입(導入)한다면, 조선(朝鮮)은 중국(中國)을 포함(包含)하는 광대(廣大)한 영토(領土) 개념(槪念)이 성립(成立)됩니다.
예(例)를 들면, 중화(中華) 또는 중국(中國)을 조선(朝鮮)의 황제국(皇帝國) 또는 천자국(天子國)으로, 동방(東邦/東方) 또는 동국(東國)을 조선(朝鮮)의 제후국(諸侯國)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見解)는, 중국(中國)과 동국(東國)을 조선(朝鮮)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 들어가는 별개(別個)의 나라(國; 邦)들이라고 보는 개념(槪念)을 적용(適用)한 것입니다.
가령(假令) 중국(中國)을 조선(朝鮮)의 중앙정부(中央政府)로 본다면, 동국(東國)은 조선(朝鮮)의 지방정부(地方政府)로 볼 수 있겠습니다.
조선(朝鮮)의 황제국(皇帝國)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조선(朝鮮)의 중앙정부(中央政府)가 남(南)과 북(北)으로 다시 나뉘는 것을 과연(果然) 납득(納得)할 수 있을까요?
혹시(或是),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章閣韓國學硏究院)>의 자료(資料)나 <네이버(NAVER) 백과사전(百科事典)>의 자료(資料)와 같이, 중국(中國)의 정음(正音)을 북방음(北方音)으로, 중국(中國)의 속음(俗音)을 남방음(南方音)으로 보는 견해(見解)에 문제(問題)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한편 <대륙사관(大陸史觀)>을 견지(堅持)하더라도, 중국(中國)과 동국(東國)의 관계(關係)에 대(對)하여 또 다른 개념(槪念)을 도입(導入)할 수 있습니다.
중국(中國)과 동국(東國)은 모두 조선(朝鮮)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 들어가는 나라(國; 邦)들이라고 보는 주장(主張)과 달리, 동국(東國) 자체(自體)가 지나(支那) 대륙(大陸) 전역(全域)이며 곧 조선(朝鮮) 전역(全域)이라고 주장(主張)하는 연구자(硏究者)도 있습니다. 이 경우(境遇)에 동국(東國)은 중국(中國)을 포함(包含)하는 개념(槪念)이고, 결국(結局) 중국(中國)은 동국(東國)의 중심지(中心地)라고 보는 학설(學說)입니다.
이러한 주장(主張)에 따를 경우(境遇) 동국(東國)의 한자음(漢字音)을 정음(正音)과 속음(俗音)으로 구분(區分)하는 것은 무방(無妨)하지만, <璜正音通釋韻考(화동정음통석운고)>와 같이 한자음(漢字音)이 동음(東音)과 화음(華音)으로 구별(區別)되는 것을 어떻게 이해(理解)하여야 할까요?
이러한 학설(學說)에서는 중국(中國)을 곧 동국(東國)의 중심지(中心地)라고 보기 때문에 중국(中國)의 한자음(漢字音)은 정음(正音)에 해당(該當)되며 곧 화음(華音)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동음(東音)은 무엇에 해당(該當)될까요? 여기서 동음(東音)은 속음(俗音)이 되어야 하는데, <璜正音通釋韻考(화동정음통석운고)>에서는 화음(華音)이든 동음(東音)이든 모두 정음(正音)이기 때문에 문제(問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화음(華音)과 동음(東音)은 실제(實際)로 얼마만큼 차이(差異)가 있을까요?
구체적(具體的)인 분석(分析)은 언어학(言語學)의 전문(專門) 영역(領域)이므로, 여기서는 간단(簡單)한 사례(事例) 하나만을 검토(檢討)해보겠습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章閣韓國學硏究院)>의 <璜正音通釋韻考(화동정음통석운고)>에 관(關)한 자료(資料)에 따르면, 이 책(冊)은 각각(各各)의 한자(漢字)에 대(對)하여 왼쪽(左側)에는 동음(東音)을‚ 오른쪽(右側)에는 화음(華音)을 각각(各各)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언자(諺字)로 표기(表記)하고 있는데, 이러한 방식(方式)은 이 책(冊)에서 처음으로 시도(試圖)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책(冊)의 서문(序文)에 의(衣)하면 화음(華音)의 표기(表記)는 역관(譯官) 이언용(李彦容)의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또한 이 책(冊)에는 한자(漢字)의 규범음(規範音) 곧 정음(正音) 이외(以外)에도 몇몇 한자(漢字)에 대(對)해서는 난상(欄上)에‘俗X’와 같은 형식(形式)으로 그 속음(俗音)을 제시(提示)하고 있기도 합니다.
가령(假令) 한자(漢字) ‘殄’(진)에 대(對)하여 동음(東音)과 화음(華音)을 모두 ‘뎐’이라고 하였지만, 난상(欄上)에 ‘殄俗딘’이라고 표기(表記)하여 그 속음(俗音)을 밝혀 주고 있다고 합니다. [출처=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kyujanggak.snu.ac.kr/]
바로 위의 자료(資料)에 따르면, ‘중국’(中國)과 마찬가지로, ‘동국’(東國)에도 한자(漢字)의 정음(正音) 이외(以外)에 속음(俗音)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한자(漢字) ‘殄’의 동국(東國) 정음(正音)과 화음(華音)은 모두 ‘뎐’이라고 하므로, 둘 다 똑같은 경우(境遇)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딘’이라는 18세기(世紀)의 동국(東國) 속음(俗音)은 오늘날의 한국식(韓國式) 발음(發音) ‘진’과 비슷하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18세기(世紀)의 화음(華音) ‘뎐’은 오늘날의 중국(中國) 북경(北京; Běijīng; 베이징) 표준음(標準音)인 ‘티엔’(tiǎn)과 차이(差異)가 납니다. 그 이유(理由)는 무엇일까요? 세월(歲月)이 많이 흘러서 ‘뎐’이 ‘티엔’으로 자연(自然)스럽게 바뀐 것일까요?
한편, 한자(漢字) ‘殄’의 오늘날 중국(中國) 남방(南方)의 광동어(廣東語; Guǎngdōngyǔ; 꽝뚱위) 발음(發音)은 ‘틴’(tin)입니다.
여기서 ‘틴’(tin)이라는 발음(發音)은 18세기(世紀) 동국(東國)의 한자(漢字) 속음(俗音)인 ‘딘’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事例)를 통(通)하여, 18세기(世紀) 당시(當時) 동국(東國)의 현실(現實) 한자음(漢字音) 곧 속음(俗音)은 중국(中國)의 남방(南方) 한자음(漢字音)에 가까웠던 것 같다고 하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章閣韓國學硏究院)>의 <大學正音(대학정음)> 자료(資料)를 이해(理解)할 수 있을까요?
한자(漢字) ‘殄’의 18세기(世紀) 동국(東國)의 정음(正音)을 ‘뎐’이라고 하는데, 오늘날의 한국식(韓國式) 발음(發音) ‘진’과 분명(分明)히 차이(差異)가 납니다. 그 이유(理由)는 무엇일까요? 세월(歲月)이 꽤 흘러서 ‘뎐’이 ‘진’으로 바뀐 것일까요? 아니면, 18세기(世紀) 동국(東國)의 속음(俗音) ‘딘’이 ‘진’으로 바뀐 것일까요?
분명(分明)한 사실(事實)은, 동국(東國)의 정음(正音) ‘뎐’과 그 속음(俗音) ‘딘’이라는 발음(發音)은 18세기(世紀) 당시(當時)에 공존(共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8세기(世紀)의 <璜正音通釋韻考(화동정음통석운고)>에서는 동음(東音)과 화음(華音)이 서로 구별(區別)된다는 것입니다.
모두(冒頭)에서도 필자(筆者)가 의문(疑問)을 제기(提起)하였지만, 한자(漢字)의 ‘정음’(正音)과 ‘속음’(俗音)을 구분(區分)하는 정확(正確)한 기준(基準)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한자(漢字)가 사용(使用)되는 지역(地域)에 따라 크게 둘로 나뉜 것일까요? 아니면, 한자(漢字) 사용(使用)의 주체(主體)를 기준(基準)으로 구분(區分)되었을까요? 아니면, 또 다른 기준(基準)이 있을까요?
<네이버(NAVER) 백과사전(百科事典)>에서 중국(中國)의 한자음(漢字音)을 북방음(北方音)과 남방음(南方音)으로 구별(區別)하는 근거(根據)는 어디에 있을까요?
<네이버(NAVER) 백과사전(百科事典)>에 따르면, 14세기(世紀) 지나(支那) 대륙(大陸)의 화중(華中)과 화북(華北) 지방(地方)에 직업(職業)과 계층(階層)과는 관계(關係) 없이 두루 통용(通用)되는 공통어(共通語)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중원아음’(中原雅音)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이러한 공통어(共通語)가 다른 지방(地方)에도 확산(擴散)되었고, 이를 ‘관화’(官話)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나(支那) 대륙(大陸)의 화중(華中)과 화북(華北) 지방(地方)에서 사용(使用)된 14세기(世紀)의 ‘중원아음’(中原雅音)이 후대(後代)에 이르러 북방음(北方音)인 표준음(標準音) 곧 정음(正音)으로 인정(認定)된 것일까요?
또한 <대륙사관(大陸史觀)>의 일설(一說)에 따르면, 이성계(李成桂) 조선(朝鮮) 왕조(王朝)의 초기(初期) 수도(首都) 또는 경도(京都)는 오늘날의 ‘서안’(西安; Xī'ān; 시안) 곧 옛날의 ‘장안’(長安)이었다고 합니다. 만약(萬若) 그것이 사실(史實)이라면, 늦어도 15세기(世紀) 세종대왕(世宗大王) 때에 한자(漢字)의 표준음(標準音)은 당시(當時) ‘장안’(長安) 지역(地域)의 그것과 똑같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네이버(NAVER) 백과사전(百科事典)>에 따르면, 현대(現代) 중국어(中國語)는 8대(八大) 방언계(方言系)로 크게 나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각(各) 방언(方言)의 문법(文法)과 어휘(語彙)는 대체(大體)로 일치(一致)하고 어음(語音)은 서로 대응관계(對應關係)에 있지만, 차이(差異)가 심(甚)하여 외국어(外國語)처럼 서로 통(通)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오늘날 중국어(中國語) 성조(聲調)의 경우(境遇) 지나(支那) 대륙(大陸) 북방(北方)의 북경(北京; Běijīng; 베이징) 어음(語音)을 표준(標準)으로 규정(規定)한 보통화(普通話; pǔtōnghua; 푸퉁화)는 4성(四聲)이지만, 지나(支那) 대륙(大陸) 남방(南方)의 광동어(廣東語; Guǎngdōngyǔ; 꽝뚱위)는 8성(八聲) 또는 9성(九聲)이 사용(使用)된다고 합니다.
14세기(世紀) 지나(支那) 대륙(大陸)의 화남(華南) 지방(地方)에서 사용(使用)된 한자음(漢字音)이 후대(後代)에 이르러 속음(俗音)인 남방음(南方音)으로 인정(認定)되었을까요?
이른바 ‘광동어’(廣東語; Guǎngdōngyǔ; 꽝뚱위)는 속음(俗音)인 남방음(南方音)의 하나에 해당(該當)되는 것일까요?
앞에서도 언급(言及)되었지만, <大學正音(대학정음)>에 관(關)한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章閣韓國學硏究院)>의 자료(資料)에 따르면, 18세기(世紀) <大學正音(대학정음)>에 나오는 한자(漢字)의 중국(中國) 북방음(北方音) 표기(表記)는 15세기(世紀) <東國正韻(동국정운)>(1447년~1448년)의 표기(表記)와 일치(一致)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理由)는 무엇일까요?
물론(勿論), <大學正音(대학정음)>에 나오는 중국(中國)의 한자(漢字) 정음(正音)과 속음(俗音) 자체(自體)가 이 책(冊)이 간행(刊行)된 18세기(世紀) 당시(當時)의 실제(實際) 중국(中國) 한자음(漢字音)인지는 확실(確實)하지 않습니다.
혹시(或是) <大學正音(대학정음)>에서는 15세기(世紀) <東國正韻(동국정운)>(1447년~1448년)의 표기(表記)를 그대로 답습(踏襲)하였을 가능성(可能性)도 있습니다.
동국(東國)의 한자(漢子) 정음(正音)은 15세기(世紀)뿐만이 아니라 18세기(世紀)에도 중국(中國)의 북방(北方) 한자음(漢字音)과 똑같다고 볼 수 있을까요?
18세기(世紀)의 <璜正音通釋韻考(화동정음통석운고)>(1747년)에 관(關)한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章閣韓國學硏究院)>의 자료(資料)에 따르면, 각각(各各)의 한자(漢字)에 대(對)하여 왼쪽(左側)에는 동음(東音)을‚ 오른쪽(右側)에는 화음(華音)을 각각(各各)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언자(諺字)로 표기(表記)하고 있으며, 이렇게 동음(東音)과 화음(華音)을 구별(區別)하여 각각(各各) 병기(倂記)한 방식(方式)은 이 책(冊)에서 처음으로 시도(試圖)된 것이라고 합니다.
<大學正音(대학정음)>이라는 책(冊)은 늦어도 1735년에 간행(刊行)된 초간본(初刊本)으로 추정(推定)된다고 하므로, <璜正音通釋韻考(화동정음통석운고)>(1747년)와 거의 같은 시대(時代)의 책(冊)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8세기(世紀) <大學正音(대학정음)>에 나오는 중국(中國)의 북방(北方) 한자음(漢字音) 곧 정음(正音)은 18세기(世紀) <璜正音通釋韻考(화동정음통석운고)>에 나오는 화음(華音) 곧 중국(中國)의 정음(正音)과 똑같다고 보아도 무방(無妨)할까요?
한편, 18세기(世紀) 동국(東國)의 한자(漢字) 속음(俗音)은 어떠하였을까요?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章閣韓國學硏究院)>의 <大學正音(대학정음)> 자료(資料)에 따르면, 18세기(世紀) 동국(東國)의 현실(現實) 한자음(漢字音) 곧 속음(俗音)은 중국(中國)의 남방(南方) 한자음(漢字音)에 가까웠던 것 같다고 합니다.
세월(歲月)을 거슬러 올라가서, 15세기(世紀) 중국(中國)의 북방(北方) 한자음(漢字音) 곧 정음(正音)은 무엇이었을까요?
혹시(或是), 14세기(世紀)에 지나(支那) 대륙(大陸)의 화중(華中)과 화북(華北) 지방(地方)에서 두루 통용(通用)되었던 공통어(共通語) 곧 ‘중원아음’(中原雅音)을 가리킬까요?
15세기(世紀) 동국(東國)의 한자(漢字) 정음(正音)은 어떠하였을까요? 15세기(世紀) 중국(中國)의 북방(北方) 한자음(漢字音)과 비슷하였을까요?
15세기(世紀) 무렵에 한자(漢字)의 표준음(標準音) 곧 ‘정음’(正音)만을 정확(正確)히 표기(表記)하기 위해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의 문자(文字) 곧 ‘언자’(諺字)가 만들어졌을까요?
<大學正音(대학정음)>에 관(關)한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章閣韓國學硏究院)>의 자료(資料)에 따르면,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언자(諺字) 창제(創製) 동기(動機)는 중국(中國) 한자음(漢字音) 전체(全體)를 표기(表記)하기 위한 문자(文字) 체계(體系)가 아니라 ‘정음’(正音)의 표기(表記)를 위한 것이라고 추측(推測)합니다.
물론(勿論), 세종대왕(世宗大王) 당시(當時)에는 ‘정음’(正音)의 정확(正確)한 표기(表記)가 최우선(最優先)이었다고 보이지만, 속음(俗音) 또한 결코 무시(無視)할 수 없는 발음(發音)이므로 정음(正音)이든 속음(俗音)이든 모두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언자(諺字)로 표기(表記)될 수 밖에 없었다고 필자(筆者)는 생각합니다.
당연(當然)한 것이지만, 15세기(世紀)에 세종대왕(世宗大王)과 집현전(集賢殿) 학자(學者)들은 새로운 ‘문자’(文字)를 만들어낸 것이지 새로운 언어(言語)나 새로운 발음(發音)을 창조(創祖)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기존(旣存) 언어(言語)의 발음(發音)을 ‘소리 나는 그대로’ 표기(表記)할 수 있는 표음(表音) 문자(文字)를 새롭게 만들어낸 것입니다.
예(例)를 들면, <經書正音(경서정음)>에서는 한자(漢字)의 중국(中國) 정음(正音)과 속음(俗音)을 모두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언자’(諺字)로 병기(倂記)하고 있으므로, 오로지 규범음(規範音) 곧 정음(正音)만을 표기(表記)하기 위해서 ‘언자’(諺字)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보이며, 기존(旣存)의 어떠한 발음(發音)이든 모두 표기(表記)할 수 있도록 당시(當時)의 학자(學者)들이 새로운 표음(表音) 문자(文字)를 만든 것으로 필자(筆者)는 생각합니다.
예조판서(禮曹判書) 정인지(鄭麟趾)의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서문(序文)에 따르면, 물건(物件)의 형상(形象)을 본떠서 글자(契字)는 고전(古篆)을 모방(模倣)하고 소리(聲)에 인(因)하여 음(音)은 칠조(七調)[=칠음(七音);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5음(五音)과 반치(半徵)-반상(半商) 2음(二音)]에 합하여 삼극(三極, 天地人)의 뜻과 이기(二氣; 陰陽)의 정묘(精妙)함이 구비(具備) 포괄(包括)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28자(二十八字)로써 쓰지 못하는 소리(聲)가 없고 간략(簡略)하면서도 요령(要領)이 있고 자세(仔細)하면서도 통달(通達)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15세기(世紀)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서문(序文)에 나오는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이라는 한문(漢文)의 언해(諺解)는 “나랏말미 듕귁에 달아 문와로 서르 디 아니”입니다.
여기서 “國之語音”을 더 정확(正確)하게 풀어보면 ‘國’은 ‘나라’로, ‘語’는 ‘말씀’ 또는 ‘말’로, ‘音’은 ‘소리’로 해석(解釋)할 수 있으므로, 결국(結局) “國之語音”은 ‘나라의 말소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훈민정음언해(訓民正音諺解)>에서는 한자어(漢字語)인 ‘中國’을 ‘듕귁’으로, ‘文字’를 ‘문’로 표기(表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자(漢字) 발음(發音)은 당시(當時)의 속음(俗音)이 아니라 ‘정음’(正音)이었다고 보입니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훈민정음(訓民正音)>이었기 때문입니다.
‘문’라는 15세기(世紀)의 동국(東國) 발음(發音)은 오늘날의 한국식(韓國式) 한자(漢字) 발음(發音)과 비슷합니다.
‘듕귁’과 ‘문’라는 발음(發音)은 15세기(世紀)의 ‘이상적(理想的)인 중국음(中國音)’ 곧 중국(中國)의 정음(正音)과 똑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한자어(漢字語) ‘中國’과 ‘文字’에 대(對)한 오늘날의 중국(中國) 북경(北京; Běijīng; 베이징) 표준음(標準音)은 각각(各各) ‘쫑꾸어’(Zhōng-guo)와 ‘원쯔’(wen-zi)입니다.
한자어(漢字語) ‘中國’에 대(對)한 18세기(世紀)의 중국(中國) 북방음(北方音)도 ‘듕귁’이라고 추정(推定)할 수 있을까요?
한편, 21세기(世紀) 중국(中國) 남방(南方)의 광동어(廣東語; Guǎngdōngyǔ; 꽝뚱위)로는 한자어(漢字語) ‘中國’을 ‘쫑꾸억’(Zung-gwok)으로, ‘文字’를 ‘만찌’(man-zi)로 발음(發音)합니다.
이러한 광동어(廣東語) 발음(發音)은 18세기(世紀)의 <經書正音(경서정음)>에 나오는 중국(中國) 남방음(南方音) 곧 속음(俗音)과 얼마나 차이(差異)가 날까요?
지금(只今)까지 필자(筆者)가 한자음(漢字音)에 관(關)한 여러 자료(資料)들을 검토(檢討)하면서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의문(疑問)들을 정리(整理)해보았습니다.
필자(筆者)가 예전에 “중국(中國)과 동국(東國)”에 관(關)하여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한자(漢字)의 정음(正音)과 속음(俗音)”에 관(關)한 문제(問題)도 이와 무관(無關)하지 않다고 봅니다.
최근(最近)에는 <반도사관(半島史觀)>을 제외(除外)한 <대륙사관(大陸史觀)>의 여러 학설(學說)에서 중국(中國)의 위치(位置)조차 다양(多樣)하게 비정(比定)되고 있는 실정(實情)입니다. 그렇다면, 18세기(世紀)의 <經書正音(경서정음)>에 나오는 중국(中國) 북방(北方) 및 남방(南方)의 후보지(候補地)도 여러 곳으로 비정(比定)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중국’(中國)이라는 지역(地域)이 시대별(時代別)로 변천(變遷)되었기 때문에 결과적(結果的)으로 다르게 나오는 것일까요?
중국(中國)과 동국(東國)은 역사적(歷史的)으로 어떠한 관계(關係)이었을까요?
만약(萬若) 18세기(世紀) 중국(中國)의 강역(疆域)을 지나(支那) 대륙(大陸)으로 볼 수 없다면, <네이버(NAVER) 백과사전(百科事典)>이나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章閣韓國學硏究院)>의 자료(資料)에 나오는 중국(中國) 북방음(北方音) 및 남방음(南方音)의 실체(實體)는 무엇일까요?
앞으로 이러한 의문(疑問)들에 대(對)하여 더 깊게 연구(硏究)하여야 된다고 필자(筆者)는 생각합니다.
“한자(漢字)의 정음(正音)과 속음(俗音)”이라는 주제(主題) 속에는 어떠한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이 숨겨져 있을까요?
<참고(參考) 자료(資料)>
<璜正音通釋韻考(화동정음통석운고)>의 목판본(木版本) 일부(一部) 내용(內容) [출처=http://www.kobay.co.kr/servlet/wsoff/item/offItemView?item.itemseq=0911EIB85ZF]
<훈민정음언해(訓民正音諺解)>의 일부(一部) 내용(內容) [출처=위키백과(한국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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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朝鲜赋(明) (明)董越 .提要 《朝鲜赋》一卷,明董越撰。越字尚矩,宁都人。成化己丑进士,官至南京工部尚书,谥文僖。孝宗即位,越以右春坊右庶子兼翰林院侍讲,同刑科给事中王敞使朝鲜,因述所见闻,以作此赋。又用谢灵运《山居赋》例,自为之注。所言与《明史·朝鲜传》皆合。知其信而有徵,非凿空也。考越自正月出使,五月还朝,留其地者仅一月有馀。而凡其土地之沿革,风俗之变易,以及山川、亭馆、人物、畜产,无不详录。自序所谓得於传闻周览,与彼国所具风俗帖者,恐不能如是之周匝。其亦奉使之始,预访图经,还朝以後,更徵典籍,参以耳目所及,以成是制乎?越有《文僖集》四十二卷,今未见其本。又别有《使东日录》一卷,亦其往返所作诗文,不及此赋之典核。别本孤行,此一卷固已足矣。
.原序 弘治元年春,先生圭峰董公,以右庶子兼翰林侍講奉詔使朝鮮國,秋八月歸復使命。首尾留國中者不旬日,於是宣布王命,延見其君臣之暇,詢事察言,將無遺善。餘若往來爭,有得於周爰,諮訪者尤多,於是遂罄其所得,參諸平日所聞,據實敷陳為使朝鮮賦一。通萬有千言,其所以獻納於上。前者率皆此意,而士大夫傳誦其成編,莫不嘉歎,以為鑿鑿乎可信,而郁郁乎有文也。傳曰:賦者,敷陳其事而直言之。先生文體有焉,而叔孫穆子所稱,使職如諏,謀度詢必咨于周者,備見言表。是雖古昔聖王雅歌所陳不過是矣。初先生之出祖也,鵬嘗竊附贈言,有模冩山河誦太平之句,葢深冀先生必有以大鳴國家之盛,比先生還朝而鵬守制,未獲與聞述作。兹幸得覩是賦,於邑司訓王君本仁所,捧讀數四,揄揚莫既。本仁故與予同年,吳大尹徳純為夀梓以傳,屬引其端,此正門牆效勤時也,遂不敢以僣陋辭。 弘治三年十二月八日泰和歐陽鵬序。 (弘治三年十二月八日/ 1490年 12月 8日)
조선부 번역본(일부)/조선의 강역과 지리, 그리고 평양의 위치등을 추정할수 있습니다. (원본 및 다른 사료원문은 http://cafe.daum.net/damooltour 역사원문자료실에서 볼수 있습니다.
명 나라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 “살펴보건대, 저 동국(東國)은 조가(朝家)의 바깥 울타리로, 서쪽은 압록강(鴨綠江)이 한계가 되고, 동쪽은 상돈(桑暾)에 닿았으며, 천지(天池)는 거의 그 남쪽 문이 되고, 말갈(靺鞨)은 그 북쪽 문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 나라는 동남쪽이 모두 바다에 닿아있고, 서북쪽은 건주(建州)이고, 정북쪽은 모련(毛憐) 해서(海西)이다. 팔도(八道)가 별처럼 벌여 있는데, 경기(京畿)가 홀로 으뜸이 되고, 충청(忠淸)ㆍ경상(慶尙)ㆍ황해(黃海)ㆍ강원(江原)을 날개로 삼았으며, 동북쪽의 명칭을 영안(永安 지금의 함경도)이라 한 것은 그 뜻이 경계를 견고히 하려는 데에 있다. 평안(平安)은 땅이 조금 척박하고, 전라(全羅)는 물산이 가장 풍부하였다. 경기ㆍ충청ㆍ경상ㆍ황해ㆍ강원ㆍ영안ㆍ평안ㆍ전라는 모두 도(道)의 이름인데, 평안은 곧 옛날 변한(弁韓)의 땅이고, 경상은 옛날 진한(辰韓)의 땅이며, 전라는 옛날 마한의 땅이다. 그 넓이는 거리가 2천 리이고, 길이는 배가 된다. 그 나라는 동서가 2천 리이고, 남북은 4천 리라고 〈지서(誌書)〉에 쓰여져 있다. 옛날을 살펴보면, “그 나라는 서너 나라로 봉해졌는데, 지금은 하나만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신라(新羅)ㆍ백제(百濟)ㆍ탐라(耽羅)가 지금은 다 그 소유가 되었다. 생각건대, 앞 사람의 실패한 자취를 밟지 않았으니, 그 까닭은 당시대의 깊은 은혜를 홀로 입었기 때문이다. 조서(詔書)로써 나라 세운 것을 허락하여 독자적으로 덕화를 펴게 하니, 본조 홍무(弘武) 2년에 고려국의 왕 왕전(王顓)이 표(表)로써 즉위(卽位)를 축하하여 조서로 독자적으로 교화를 펴도록 허락하고, 구뉴(龜紐)와 금인(金印)을 내려주었다. 시(詩)와 서(書)가 있고, 상(庠)과 교(校)가 있다. 선비가 궁하면 향(香)을 피우거나 좀을 물리고, 문장이나 꾸미는 하찮은 일을 하며, 벼슬길이 트이면 붕새를 잡거나 표범을 변하게 한다. 그 나라는 조정의 정삭(正朔)을 받들고, 향시(鄕試)는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년(酉年)에 행하고, 회시(會試)와 전시(殿試)는 진(辰)ㆍ술(戌)ㆍ축(丑)ㆍ미년(未年)에 행한다. 농사를 부지런히 짓고 기술을 잘 익히며, 관청에서는 옛것을 많이 본뜨고, 봉급으로는 논밭을 주며, 형벌은 궁형(宮刑)은 쓰지 않고, 도적이라야 옥에 가두어 큰 칼을 씌운다. 환관들도 모두 궁형(宮刑)을 받은 것이 아니다. 오직 어릴 때에 다쳤거나 질환이 있는 자를 뽑아 썼기 때문에 매우 적었다. 그러나 도적은 가벼이 용서해주지 않았다. 이 일은 서너명의 통역관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들의 말이 모두 같았다. 무역은 한결같이 곡식이나 베로써 하되, 그 쌓아두는 것에 따라 이익을 남기고, 쓰는 것으로는 금이나 은은 모두 다 금하였으므로, 비록 매우 적은 양이라도 따졌다. 민간에서는 매우 적은 양의 금은이라도 쌓아두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곡식이나 베를 많이 가진 이를 부잣집이라 하였다. 무역 매매는 한결같이 이 곡식과 베로써 하였다. 그 나라에 탐관(貪官)이 적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전답의 세(稅)는 결(結)로써 묘(畝)를 대신하였는데, 소로 나흘을 갈 정도라야 4두(斗)의 조세(租稅)를 내었다. 한 마리 소의 힘을 다해서 나흘 동안 가는 땅을 1결이라 한다. 태학(太學)에서 선비를 양성하는 데에는 종류에 따라 인원을 정하는데, 두 개의 재(齋)에 기숙(寄宿)하는 자는 모두 두 때의 녹(祿)을 먹는다. 성균관(成均館)에는 항상 5백 명을 양성하는데, 3년마다 명경(明經)으로써 뽑은 자를 생원(生員)이라 하고, 시부(詩賦)로써 뽑은 자를 진사(進士)라 하며, 또 남(南)ㆍ중(中)ㆍ동(東)ㆍ서(西)의 사학(四學)에서 승보(升補)된 자를 승학(升學)이라 한다. 사학에서 북쪽을 기피하여 감히 이름짓지 못한 것은 조정을 높여서이다. 생원과 진사는 상재(上齋)에 거처하고, 승학은 하재(下齋)에 거처한다. 생원과 진사로 전시에 합격한 자들만이 식년(式年)에 과거를 보아 비로소 관리가 되고, 그렇지 못하면 그대로 성균관에서 양성된다. 식년은 3년마다 있는데, 33명만 뽑는다. 관리로서 삼품이 아니면 비단으로 몸을 치장하지 못한다. 낮은 관리는 모두 주포(紬布)를 입고 저사(紵絲)는 입지 않는데, 그 짙푸른 색깔의 베옷도 항상 입지 않고 잔치 때라야 입는다. 백성들은 한 전(廛)씩을 받되 벼나 삼은 모든 움을 파고 넣어둔다. 그 간직하는 것도 요(遼) 나라 사람들과 같다. 그 가장 말할 만한 것은 그 나라에 80세가 되는 노인이 있으면 그 남녀들에게 모두 나라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어 은혜를 널리 베푼다. 해마다 늦가을에 왕은 팔십 노인에게 전(殿)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고, 왕비는 팔십 부인에게 궁(宮)에서 잔치를 베풀어준다. 자식에게는 삼년상(三年喪)이 있어서, 비록 종이라도 그렇게 행하는 것을 허락하여 그 효를 이루게 한다. 그 나라 풍속에 상복을 입는 것은 반드시 3년이고, 또 여묘(廬墓)살이 하는 것을 숭상한다. 종에게는 보통 백일의 상기(喪期)를 허락하고, 3년상을 원하는 자가 있으면 또한 허락한다. 왕도(王都)에는 귀후서(歸厚署)를 설치하고 관곽(棺槨)을 쌓아두었다가 빈궁한 사람들을 도와준다. 그 나라의 관곽은 소나무를 많이 쓴다. 그러나 한 도(道)에서 보면 적당한 재목이 적은 듯하기 때문에 왕도에 관청을 설치하여 편리를 보아준 것이다. 향음주례(鄕飮酒禮)에는 술잔을 드는 의식을 엄격하게 하고, 제기를 놓는 것은 질서 있게 하여 그 시끄러움을 경계한다. 의식은 중국과 같고 조정이라는 두 글자만을 고쳐서 국가라고 하였다. 혼인에는 중매하는 것을 신중히 하고 재가(再嫁)해서 난 자식은 아무리 학문이 많아도 사류(士流)에 끼이지 못한다. 그 풍속에는 재가를 부끄럽게 여겨 재가해서 낳았거나 행실이 나쁜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모두 사류의 등사판(登仕版)에 올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문벌에는 높은 벼슬을 하는 집안을 가장 중히 여겨, 대대로 양반(兩班)에 속한 사람이 혹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면 모두 예답지 못한 행동이라 한다. 조상 때부터 일찍이 문무(文武)의 벼슬을 겸한 사람을 양반이라 한다. 양반의 자제에게는 다만 글 읽기만 허락하고 기예(技藝)는 익히게 하지 않는다. 혹 소행이 착하지 못하면 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를 비난한다. 심지어는 집안에 도박 기구의 소장(所藏)도 허락하지 않는다. 바둑판이나 쌍륙 따위는 민간 자제들에게도 모두 익히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제사에 있어서는 모두 가묘(家廟)를 세우는데, 대부(大夫)는 삼대까지 제사를 지내고, 선비와 서민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제사만을 지낸다. 이것은 모두 기자(箕子)로부터 그 풍습을 전한 것이고, 또 중국에서 하는 것을 보고 본받은 것이다. 이상은 모두 관반사(館伴使) 이조 판서(吏曹判書) 허종(許琮)의 《구도풍속첩(具到風俗帖)》에 나와 있다. 대개 성곽을 쌓을 때에는 모두 높은 산 앞에 쌓아서 가끔 산봉우리나 산기슭으로 나오더라도 활처럼 굽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큰 것은 날고 나는 듯한 높은 성이 솟아 있고, 작은 것도 높고 높은 표관(豹關)처럼 웅장하다. 대개 의순(義順)에서 선천(宣川)을 지나는 곳에 의순은 객관(客館)의 이름으로 의주 압록강 동쪽에 있으며, 압록강은 바로 중국과 조선의 경계가 된다. 선천은 군(郡)의 이름으로 의주 동쪽에 있다. 그 사이에 비록 험준한 용호(龍虎)나 산 이름으로 용천군(龍川郡)의 진산(鎭山)이다. 웅골(熊骨) 산 이름으로 철산군(鐵山郡)의 진산이 있지만, 곽산(郭山)이 더욱 높이 하늘에 솟아 있다. 곽산은 군의 이름으로 그 성은 산꼭대기에 있다. 《지서(志書)》에는 능한성(凌漢城)이라고 이름하였다. 또 신안(新安)에서 객관의 이름으로정주(定州)에 있는데, 그 앞에는 누각이 있다. 대정(大定)을 지나는 곳에 강 이름으로 박천군(博川郡)에 있다. 바로 옛날 주몽(朱蒙)이 남으로 달려오다가 이곳에 이르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 주었다. 그래서 또 박천강(博川江)이라고도 한다. 그 산으로서 비록 천마(天馬) 산 이름으로 정주(定州)의 진산이다. 봉두(鳳頭)의 놓은 산이 있지만, 봉두는 곧 가산군(嘉山郡)의 진산이다. 압록강에서 동으로 가면 오직 가산령(嘉山嶺)이 가장 높다. 그 재에는 효성(曉星)과 망해(望海)란 곳이 있는데, 모두 사절(使節)들이 지나는 곳이다. 안주(安州)가 또 졸졸 흐르는 강물에 의지하고 있다. 안주성에서 살수(薩水)를 내려다보면 위에 백상루(百祥樓)가 있는데, 곧 수(隋) 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치다가 패한 곳이다. 이 강을 또 청천강(淸川江)이라고도 하며, 성 안에는 안흥관(安興館)이 있다. 군(郡)으로는 숙천(肅川)이 있고, 읍(邑)으로는 순안(順安)이 있는데, 지세는 모두 들판에 있지 않다. 누(樓)는 숙녕(肅寧) 숙녕관 앞에 누각이 있다 이고, 관(館)은 안정(安定) 관의 이름으로 순안현에 속해 있다. 인데 지대는 조금 널찍하고 조용한 편이다. 오직 저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만은 지대가 가장 평탄하고 넓기 때문에, 그 지세에 따라 이름을 평양(平壤)이라 하였다. 여기에 나라가 생길 때부터 이미 물을 임해서 성을 높이 쌓았는데, 얼마를 지내다가 또 가까운 북쪽 산의 험한 곳으로 옮겼다. 평양성은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자가 처음 봉해질 때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에 이르러서는 또 그것이 험한 곳에 의거하지 않은 것을 흠으로 여겨서, 다시 그 성 북쪽에 한 성을 쌓았는데, 동으로는 대동강(大同江)이 내려다보이고, 북으로는 금수산(錦繡山)이 닿아 있다. 기자 이후로 전승하여 동한(東漢)에 이르러, 준(準)이란 사람이 연(燕) 나라 위만(衛滿)에게 쫓기어 마한 땅에 도읍을 옮겼으나, 지금은 자취조차 없어졌다. 이 밖의 여러 고을은 토질이 대부분 마르고 붉으며, 간간이 누런 흙이 있으나 또한 모래와 돌이 섞여 있다. 오직 이 성 가까이에 있는 흙만이 차져서 밭도랑이나 봇도랑의 형상이 남아 있다. 옛 성 안에 기자가 구획한 정전제(井田制)의 형상이 아직 남아 있으니, 곧은 길 같은 따위가 바로 이것이다. 벼나 삼이나 콩이나 보리를 심기에 적당하며, 그 풀은 무성하고 그 나무는 키가 크다. 이때에 와서야 중국에서처럼 높은 버드나무가 있게 되었다. 나뭇잎에는 우는 매미가 있고, 풀은 빼어나고 무성하였다. 그리고 금수봉(錦繡峯)은 멀리 우뚝한 용산(龍山)에 접해 있고 용산은 구룡산(九龍山)이라고도 하고, 또 노양산(魯陽山)이라고도 하는데, 금수산 북쪽 20리에 있고, 산꼭대기에는 99개의 못이 있다. 부벽루(浮碧樓)는 아래로 도도(滔滔)히 흐르는 패수(浿水)를 굽어본다. 대동강이 바로 옛날 패수이다. 옛날의 기린(麒麟)은 아직도 석굴(石窟)에 남아 있고, 기린석은 부벽루 밑에 있는데, 대대로 전하기를, “동명왕(東明王)이 기린마(麒麟馬)를 타고 이 굴로 들어갔다가, 땅속에서 조천석(朝天石 하늘에 조회하는 돌) 위로 나와 승천(昇天)하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말 발자국이 남아 있다 한다. 타양(駝羊)은 반쯤 산허리에 버려져 있다. 옛날의 돌말과 구리 낙타가 모두 가시덤불 속에 있다. 궁전은 옛터가 남아 있고, 소나무는 위태로운 다리에 비스듬히 누워 있으니, 석양에 지는 해처럼 그대로 머물지 않는 지난 일을 슬퍼한다. 공묘(孔廟)의 뜰에 세워져 있는 형상은 모두 면류관 쓰고 의상을 갖추고 있고, 또한 청금(靑衿 선비들)도 길가에 성대하게 늘어서 있다. 부드러운 비단으로 만든 건과 띠는 나부끼고 날리며, 가죽으로 만든 신은 밑이 뾰족하면서 판판하다. 문후할 때는 몸을 굽히고 나아갈 때는 종종 걸음으로 걷는다. 생도들은 모두 부드러운 비단 건을 썼고, 푸른 비단 적삼에 하나의 띠를 늘어뜨렸다. 발에는 코가 뾰족하고 밑이 판판한 가죽신을 신었는데, 모두 버선을 신었다. 동쪽에는 기자의 사당이 있어 나무 신주를 예설(禮設)하고, 거기에 쓰기를, “조선 후대 시조”라 하였다. 이는 단군을 높이어 그 나라를 개창(開倉)한 이라 하였으니, 기자가 그 대를 잇고 왕통(王統)을 전했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단군은 요(堯) 임금 갑진년에 여기에 나라를 세웠다가, 뒤에 구월산(九月山)으로 들어갔는데, 그 후의 일은 알 수 없다. 나라 사람들이 대대로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내는 것은 그가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지금 그의 사당은 기자 사당의 동쪽에 있는데, 나무 신주를 세우고 쓰기를, “조선 시조 단군 신위(神位)”라 하였다. 기자묘는 토산(兔山)에 있으니, 유성(維城)의 서북방이다.기자묘는 성의 서북쪽 토산에 있는데, 성에서 반 리도 되지 않으며 산세는 매우 높다. 두 개의 석상(石像)이 있어서, 마치 당 나라의 건거(巾裾)와 같은데, 알록달록한 이끼가 끼어 있어, 마치 무늬가 있는 비단옷을 입은 것과 같다. 좌우에는 젖을 먹이면서 꿇어앉은 석양(石羊)이 벌여 있고, 비갈(碑碣)은 머리를 든 귀부(龜趺)에 실려 있다. 둥근 정자를 지어 절하는 자리를 만들었고, 어지럽게 돌을 포개 놓아 뜰의 한계를 정하였다. 이것은 그 근본에 보답하려는 뜻은 융성하지만, 물건을 갖추는 예의로서는 소홀한 것이다. 대동강을 건너면 산이 차츰차츰 높아져서, 생양(生陽) 관의 이름 에 비로소 다다르게 되지만, 길은 더욱 꼬불꼬불하다. 영루(營壘)가 소나무 그늘 사이에 남아 있어서, 마치 겹겹이 있는 옛 무덤과 같다. 서로 전하기를, “당 나라가 고구려를 칠 때의 진터다.” 하는데, 크고 작은 것이 뒤섞여 있어서 전혀 질서가 없는 것이 너무도 기주(冀州)와 유사한 점이 있다. 내가 처음 기주에 갔을 때에 의심하여 어떤 늙은 군인에게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이것이 당 나라 왕이 고구려를 칠 때의 양식이라고 속인 무더기”라 하였다. 즉 그 밑에는 모두 흙을 쌓고 그 위에는 쌀을 덮어서, 마치 단도제(檀道濟)의 양사창주(量沙唱籌) 따위와 같은 것이다. 생각건대 이 곳의 영루도 그런 따위일 것이다. 바다 위에서 파도를 바라보니, 넓은 도량의 크고 넓음을 알겠다. 땅은 황해도에 속했는데, 북쪽은 모두 산이고, 그 남쪽은 바다에 접하였다. 성불(成佛) 고개 이름 의 웅장한 관문에는 버려진 돌들이 층층이 쌓였는데, 북으로는 자비(慈悲) 고개 이름 에 접하고, 남으로는 발해(勃海)에 다다랐다. 앞서 원(元) 나라에서는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는데, 국조(國朝 명(明))에 이르러서는 바깥이 없음을 보였다. 성불재는 북으로는 뒤에 산이 있고, 남으로는 뒤에 바다가 있다. 산꼭대기에서 바라보면 구름 속에 높이 솟아 있다. 한 관문 어귀에 옛날 쳤던 추성(甃城)의 방석(方石) 두어 무더기가 있었다. 한 역관에게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그 북쪽은 곧 자비령으로 원 나라 때에는 여기를 그어 경계로 삼았으니, 이것이 곧 그 관문의 어귀이다.” 한다. 만일 그렇다면 압록강에서 동으로 평양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내지(內地)가 될 것이니, 조선이 통치하는 8도에서 이미 그 한 도 남짓을 버린 것이 된다. 우리 성조(聖祖 명태조)는 그것을 모두 경계로 삼았으니, 공손히 예를 행하는 것이 옛날에 비해서 차이를 두는 것이 당연하다. 그 고개는 황주에 속해 있다. 연진(延津) 강 이름ㆍ검수(劒水) 관의 이름ㆍ봉산(鳳山) 주(州) 이름ㆍ용천(龍川) 관의 이름 의 환취(環翠)는 으리으리하고 화려하며, 환취는 누대 이름으로 봉산주 관내(館內)에 있다. 총수(葱秀)에는 구름이 연해 있다. 산이 벽처럼 서서 물가에 임해 있는데, 높이 솟고 빼어나고 아름답다. 옛 이름은 총수(總秀)였는데, 내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일찍이 기문을 지은 일이 있다. 보산(寶山)에는 서기(瑞氣)가 날아오르고 금암(金巖)에는 고인 물이 뚫는다. 보산과 금암은 모두 관의 이름으로 평산부(平山府)에 속해 있다. 성거(聖居)ㆍ송악(松嶽)ㆍ천마(天磨)ㆍ박연(朴淵)은 성거ㆍ송악ㆍ천마는 모두 산의 이름이고, 박연은 폭포 이름이다. 송악이 그 진산이다. 성거와 천마는 동북쪽에서 뻗어나와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모두 푸른 하늘에까지 꽂혀 있고, 그 가운데 세 개의 봉우리는 마치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 같다. 그 중의 한 봉우리가 더욱 높고 좌우의 두 봉우리는 조금 물러앉아 낮은 편이니, 마치 시자(侍者)의 모양과 같은데, 항상 안개와 구름 속에 쌓여서,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내 일찍 시를 지은 일이 있다. 개성(開城)으로 돌아와 머무니 유도(留都)가 있는 곳이다. 위봉(威鳳) 문의 남은 터가 있어 북쪽 기슭에 버려져 있고, 위봉은 누대의 이름인데 왕건(王建)이 앞문이다. 반룡(蟠龍 청룡(靑龍))의 옛 언덕이 있어 동쪽의 밭두둑 길로 나온다. 동쪽에 능묘(陵墓)가 있으니 바로 지금 국왕 이씨(李氏)의 선대 무덤이다. 신물(神物)은 영추(靈湫)에 엎드려 있고 폭포는 긴 내를 걸려 있다. 산꼭대기에 용추 폭포가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왕씨가 여기에 도읍했을 때 가뭄을 만나 임금이 친히 거기에 가서 기도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어떤 도술을 부리는 자가 용을 쳤더니, 용이 물에서 나와 왕을 뵈었다. 왕이 지팡이로 용을 쳐서 비늘 몇 개를 떨어뜨렸는데, 지금도 그 비늘이 국고(國庫)에 수장되어 있다.”고 하였다. 통역관 이의(李義)는 개성 사람으로 일찍이 내게 이 사실을 말하고, 또 왕에게 아뢰어 그 비늘을 꺼내어 내게 보여 주려 하였으나, 나는 쓸데없는 일이라 여겨 드디어 그만두게 하였다. 여염집은 만 정(井)이나 되고 곡물은 백 전(廛)이 된다. 관청은 당속(堂屬)의 높낮이를 한정하고 묘학(廟學 개성의 성균관)에는 성현의 엄중한 소상(塑像)을 안치하였다. 지금의 군학(郡學)은 바로 왕건 때의 성균관으로, 성현을 모두 소상(塑像)으로 한 것은 평양과 같다. 그 망루(望樓)는 곧 왕씨 시대의 태평관(太平館)인데, 다른 관보다 유독 빼어나 웅장하기 때문이다.미나리는 반수(泮水)에서 향기를 피우고운초(芸草)는 묵은 책 속의 좀을 물리친다. 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펄럭이고 달 밝은 밤에 피리 소리 들린다. 그 생산물은 풍성하여 원래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도 밀집(密集)하여 서경(西京)이 견줄 바가 아니니, 이는 왕씨가 여기에서 왕천하한 것이 4백 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요(瑤 공양왕)가 혼미(昏迷)해서 비로소 나랏일을 이씨에게 임시로 맡기고 명목상 고려가 이곳을 통치한 것은 서너 개의 성(姓)을 바꾸었을 뿐이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얻자 다시 옛날로 돌아가기를 청하여 조선이라 이름하였다. 본조 명 홍무(弘武) 25년에 고려 국왕 왕요(王瑤)가 혼미하여 사람을 많이 죽여서 민심을 잃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문하시랑 이씨인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국사를 임시로 맡기고, 그 나라의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조반(趙胖)을 보내와서 명령을 청하였다. 뒤에 우리 태조의 옛날 이름을 지금의 휘(諱)로 바꾸고, 또 국호(國號)의 개칭을 하니, 상(上 명제)이 이르기를, “동이(東夷)의 이름 중에는 오직 ‘조선’이 가장 좋고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하고 명하여, ‘조선’으로 고치도록 명하였다. 명을 받은 뒤에 드디어 지금의 한성부(漢城府)로 천도하였다. 이 때문에 개성을 유도(留都)라 한 것이라? 한다. 임진(臨津)을 건너고 임진은 강 이름으로 장단부(長湍府)에 속해 있다. 파주(坡州)에 멈추어 멀리 한성을 바라보니, 아름다운 기운이 높이 오른다. 이에 벽제(碧蹄 관의 이름)를 지나고 홍제(弘濟 관의 이름)에 오르면 여기가 왕경(王京)으로 동쪽에 우뚝 솟아 있으니, 높고 높은 삼각산(三角山)으로 자리를 정하였는데, 삼각산은 곧 왕경의 진산으로 산세가 가장 높은데 왕궁은 그 산허리에 있다. 그 산마루를 바라보매 여러 높은 봉우리들이 마치 톱니와 같다. 푸르고 푸른 소나무들로 뒤덮여 있다. 북으로는 천길이나 되는 형세가 연이어 있으니, 어찌 천 명의 군사만을 누를 뿐이랴? 서쪽으로 한 관문을 바라보면 그 길은 한 기마(騎馬)만이 다닐 만하다. 홍제에서 동으로 반 리를 못 가서 자연적으로 된 한 관문이 있어서, 북으로는 삼각산에 접하고 남으로는 남산에 접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한 기마가 다닐 만하니, 그렇게 험할 수가 없다. 산이 성 밖을 둘러싸매 힘차게 나르는 봉황이 빛을 내뿜는 듯하고, 동으로 여러 산을 바라보면 그 형세가 모두 팔짱을 끼고 둘러 있는 듯하다. 모래가 소나무 뿌리에 쌓였으매 하얗게 쌓인 눈이 막 개인 듯하다. 삼각산에서 남산까지의 산빛이 모두 희고 희미하여 멀리서 바라보면 눈과 같다. 모화관(慕華館)은 서남쪽 산기슭에 세워졌고, 숭례문(崇禮門)은 바로 남쪽에 있다. 모화관은 성에서 8리에 있는데, 가운데는 전(殿)이고, 앞에는 문이다. 모든 명제의 조서가 이르면 왕이 나가 길 왼쪽에서 맞이한다. 숭례는 그 나라의 남문이다. 하나는 주원(周爰)의 황화(皇華)가 쉬는 것이고, 하나는 회동(會同)의 문궤(文軌)를 맞이하는 것이다. 조서가 오면 왕은 곤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교외에 나가 맞이하고, 신하는 예복(禮服)을 차려 입고 고니처럼 반듯이 서서 모신다. 거리는 모두 늙은이 어린이들로 가득 차고, 누대는 모두 비단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찬다. 여염집들은 모두 반포하여 내려준 예제(禮制)처럼 채색 비단을 벌여 놓고 그림을 걸어 둔다. 음악 소리는 느린 듯하면서 빠르고, 차린 음식은 빛나고도 화려하다. 침단(沈檀)은 새벽해가 연기와 안개를 내뿜는 듯하고, 도리(桃李)는 봄바람에 날리는 비단처럼 아름답다. 계속해 모여드는 거마(車馬) 소리가 울리고 끝없는 어룡(魚龍) 유희가 나온다. 이하는 모두 온갖 놀이를 베풀어 조서를 맞이하는 광경을 말한 것이다. 자라는 산을 이고 봉영(蓬瀛)의 바다해를 싸고, 광화문 밖에 동서로 두 오산(鰲山)의 두 자리가 벌여 있는데, 고흥문(高興門) 등은 지극히 교묘하다. 원숭이는 아들을 안고 무산협(巫山峽)의 물을 마신다. 사람이 양 어깨에 춤추는 두 명의 동자를 세운다.곤두박질을 하매 상국사(相國寺)의 곰은 셀 것도 없고, 긴 바람에 우니 어찌 소금 수레를 끄는 기마(驥馬)가 있겠는가? 많은 줄을 따라 내려가매 가볍기가 사뿐사뿐 걷는 미녀와 같고, 외나무다리를 밟으매 날뛰는 산귀신인가 놀라며 본다. 사자와 코끼리를 장식하는 데에는 모두 벗긴 말가죽을 뒤집어씌웠고, 원추새와 난새의 춤을 추는 데에는 들쭉날쭉한 꿩 꼬리를 모았도다. 이는 황해도나 서경(西京 평양)에서 추는 솔무(率舞)를 보아도 모두 이처럼 좋고 아름답지는 못하였다. 평양과 황주에서도 모두 오산붕(鰲山棚)을 만들어 놓고, 온갖 놀이를 베풀어 조서를 맞이하였지만, 유독 왕경이 가장 훌륭하였다. 태평관(太平館)이 있고, 숭례문 안에 있는 것으로 가운데는 전이고, 앞에는 전문(殿門)이 있으며 뒤에는 누각이 있고 동서에 곁채가 있다. 그 까닭은 그곳에서 천사(天使)를 기다리기 위해서이다. 종과 북이 있는 누대가 있어 성 안의 네거리 종로 한복판에 있는데 매우 높고 크다. 서울 안에 우뚝 솟았고 또한 길가에 높고 높도다. 잔치하고는 쉬고 즐기며 또 논다. 와탑(臥榻)에는 여덟 폭 병풍을 둘러치고 이 나라 풍속에 그림을 거는 일은 적은데, 모든 공관(公館)에는 네 벽에 모두 병풍을 세웠다. 병풍에는 산ㆍ물ㆍ대ㆍ돌을 그리거나 혹 초서(草書)를 썼는데, 높이는 2ㆍ3척이다. 와탑도 그러하다. 성긴 주렴에는 반쯤 걷힌 향구(香鉤)를 올려 둔다. 닭이 울면 문안오는 사자(使者)를 기다리고, 날마다 일찍 왕은 그 나라의 재상 한 명과 승지 한 명을 보내어 문안한다. 말을 타고 나가면 길 곁의 망아지가 운다. 집어(緝御)가 있어서 심부름을 해 주고, 종이와 먹이 있어서 글을 주고받는 데에 이바지한다. 이는 임금을 공경함에는 반드시 그 사자에게까지 미치므로 예의상 우대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궁실(宮室)의 제도는 중화와 같아서 모두 단청을 칠하고 이 나라에는 은주(銀硃)가 없기 때문에 단청으로 대신한다. 오동나무 기름도 없다. 기와를 얹는다. 문무(門廡)와 편전(便殿)에는 모두 기와를 쓰는데, 중화의 관공서의 덮개와 같다. 문은 세 겹으로 하여 배라(杯螺)의 번쩍이는 빛을 죽이고 대궐의 앞 문은 광화, 둘째 문은 홍례, 셋째 문은 근정(勤政)으로, 쇠못과 고리만을 썼다. 전(殿) 중앙에는 푸른 유리가 있다. 오직 정전(正殿)만을 근정이라 하고 푸른 유리를 쓰고, 다른 곳에는 쓰지 않는다. 당사(堂戺)는 일곱 계단의 차등이 엄격하고 계단은 모두 거칠게 간 석추(石甃)로써 하였는데, 형세가 매우 높고 위에는 자리로 덮었다. 비단창은 여덟 창문의 영롱함에 맞추었다. 전의 동서의 벽에는 모두 요격자(腰膈子)를 설치해 놓고 조서를 받을 때에는 다 갈구리로 건다. 혹은 높은 산으로 한계지어 따로 이궁(離宮)을 짓기도 한다. 근정전과 인정전에는 모두 각각 문을 만들어 들어가니, 모두 산으로 막혀있기 때문이다. 대개 모두 편편한 곳을 가려서 터를 잡지 않는 것은 오직 그 기세가 웅장하게 보이고자 해서이다. 조서가 전(殿)의 뜰에 이르면 임금은 몸을 굽히고, 세자(世子)와 배신(陪臣)들은 좌우에서 부축하고, 헌가(軒架 경쇠를 다는 시렁)를 섬돌 위에 설치하고, 장막을 정우(庭宇)에 둘러친다. 전의 앞과 섬돌 위에는 모두 흰 베로 만든 장막을 둘러치니, 흰색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의장(儀仗)은 방패를 가지런히 하고, 음악을 연주해서 축어(祝圉)로 마친다. 소호(召虎)가 절하는 것과 숭산(嵩山)에서 외친 세 번의 만세 소리와 같고, 봉의춤과 사자춤으로 양반을 거느린다. 비록 음성은 알 수 없으나 그 예의는 또한 취할 것이 있다. 예는 한결같이 중화를 따르는데, 좋은 향을 세 번 피우고 머리를 세 번 두드리며, 만세를 부를 때에는 시위(侍衛)들이 모두 팔짱 끼고 응한다. 궐정(闕庭)의 설치물도 거두고 하사품도 내려지면 동서로 갈라서서 손과 주인을 나눈다. 조서를 펴기를 마친 뒤에 인례(引禮)가 천사(天使)를 인도하여 중간에서 내려와 장막이 있는 동쪽으로 간다. 왕이 옷을 갈아입기를 기다려 천사를 인도하여 중간 계단에서 동으로 전에 오르고, 왕을 인도하여 역시 중간 계단에서 서쪽으로 전에 오르게 한다. 천사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고 왕은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자리에 앉는데, 왕의 자리는 부사(副使)의 자리와 마주 대하되 조금 아래로 반 자리에 앉는다. 서로 절하고 예를 마친 뒤에는 드디어 통역을 빌어 말을 전한다. 즉 명 나라의 울타리가 되는 것은 진실로 소국(小國)으로서 마땅한데, 베풀어 주시는 큰 은혜를 욕되게 하였습니다. 물방울과 먼지를 다 없애더라도 보답할 수 없으니, 비록 죽은들 어떻게 보답하리까? 오직 날마다 하늘이 보호하신 주 나라 시를 노래하고, 멀리서 해가 떠오르는 듯한 황제의 도움을 빌 뿐입니다. 비로소 《시경》의 습상(隰桑) 편의 희견(喜見)을 읊고, 《춘추》의 예서(禮序)를 강합니다. 생각하건대, 여러 나라가 모두 천자의 사자를 앞세우는데, 더구나 맑은 빛이 날로 과인에게 가까움이겠습니까? 근정전에 차례로 앉은 뒤에 인삼탕 한 잔씩을 다 마시고, 왕이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가 통역 장유성(張有誠)과 이승지(李承旨)를 돌아보고, 말을 전하기를, “소국의 신하로서 명 나라 조정을 높여 섬기는 것이 예의에 마땅하온데, 칙서(勅書)를 내려 이처럼 나를 격려하시니, 큰 은혜를 갚기 어렵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대답하기를, “명 나라는 조선이 본래부터 충성과 공경으로 지키기 때문에 그 은전(恩典)이 다른 나라와 같지 않습니다.” 하니, 왕이 또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연이어 말하기를, “보답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말을 마친 뒤에 우리 두 사람을 보내어 홍례문으로 나가 가마에 타기를 기다려 물러갔다. 우리 두 사람은 태평관으로 돌아와 여러 배신들을 차례로 다 만났다. 왕이 따라와 잔치를 베풀려고 관문 밖에서 기다리며 동쪽을 향해 서서 들어오지 않았다. 집사(執事)가 나에게 알리자, 우리 둘이 나가 맞이하여 읍하고 사양하면서 들어가, 뜰에 이르러 서로 읍하고 차례로 앉아 술잔을 들어 주고받았다. 술잔을 마시려 하자, 임금이 턱으로 두 통역을 시켜 말하기를, “《시경》에, ‘습지에 뽕나무가 아름다우니 그 잎이 무성하도다. 이미 군자를 만나보니 그 즐거움이 어떠한고.’라고 하였소이다. 나는 두 분 대인(大人)을 뵈오매 마음속의 기쁨이 끝이 없소.”라고 하였다. 우리 두 사람도 그의 어짊을 칭찬하고 또 지나온 길에서 후히 대접받은 것을 사례하였다. 장차 자리에 나아가려 할 때 다시 왕과 예로 사양하자, 왕이 이내 말하기를, “《춘추》의 예에 천자의 사자가 비록 미천하나 제후(諸侯)의 윗자리에 앉는다.”고 하였는데, 더구나 두 분의 대인은 바로 어떤 지위입니까? 모두 천자의 가까운 신하로서, “오늘 멀리 여기까지 오셨는데, 어찌 감히 사양하지 않겠소?” 하고, 다시 빙그레 웃으면서 두 통역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가까운 신하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 그는 바로 황제 앞에서 직접 거행하는 사람이다.” 하였다. 우리도 웃으면서 통역에게 답하기를, “본래부터 왕이 글을 읽고 예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뵈오매 과연 그렇습니다.” 하니, 왕이 또 공손히 팔짱을 끼고 “황공. 황공.”이라고 잇달아 말하였다. 문무(門廡)와 전정(殿庭)에는 모두 자리를 깔고, 손과 주인이 자리를 나누면 겹으로 더 깐다. 저 자리는, 등급을 밝히기 위해서 용이 나란히 누워 있지만 비늘은 없고, 이 자리는, 무늬를 짜는데 봉황이 쌍으로 날면서 날개를 편다. 집사는 자리 세 벌을 말아 가지고 따라다니다가, 서로 절할 때에 각각 펴서 놓는다. 음식 그릇은 금ㆍ은ㆍ동ㆍ자(瓷)를 섞어 쓰고, 식품은 바다와 육지의 진기한 것이 골고루 많다. 주인이 손에게 잔을 드릴 때에는 한결같이 중화의 예를 따르므로, 손이 주인에게 잔을 드릴 때에도 중국 연회(燕會)의 의식을 따른다. 밀이(密餌)를 벌여 놓을 때에는 그 수가 다섯 겹이고, 상에 차린 음식의 높이를 재면 크기가 한 자 둘레이다. 그릇마다 모두 은과 구리로 둘레를 만들어 푸른 구슬이 이어진 줄을 붙였고, 그 위에는 모두 비단을 잘라 꽃과 잎을 만들고 아롱진 봉황의 깃으로 춤추게 한다. 그 줄은 다섯 겹인데 모두 과실을 쓰지 않고, 꿀로 밀가루를 반죽하여 모나고 둥글게 만들어 떡과 유전(油煎)을 높게 낮게 맞추어, 영롱하게 첩첩이 쌓아 올리니 높이와 크기가 한 자쯤 된다. 다시 흰 은이나 흰 구리로 여덟 모가 난 둘레를 두르고 푸른 구슬로 그물을 만들어 그 위를 덮는다. 그리고 푸른 비단을 잘라 네 개의 꽃잎을 만들고 또 붉은 비단을 잘라 네 개의 꽃잎을 만드는데, 꽃잎마다에는 흰 구리를 작은 못으로 엮으니 중국의 진주화(珍珠花)의 모양 같다. 그 꼭대기에 동선(銅線)으로 다섯 빛깔의 채색실을 얹어 나는 봉이나 공작이나 혹은 나는 신선을 만들었는데, 꼬리는 치켜올리고 날개는 펴져 있으며 손님을 향해 모두 머리를 숙였다. 절조(折俎)를 보낼 때에 제거한다. 두변(豆籩)은 보기에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앞의 것은 크고 뒤의 것은 작은 것으로 차례를 삼고, 진열(陳列)하는 것은 향배(向背)를 적당히 하기 위하여 겉은 높고 안은 낮은 것으로 차별을 삼는다. 그 상은 일(一) 자 모양으로 가로 진열하니 상마다 모두 그렇다. 쌀가루를 섞어 끓인 국과 안주를 섞고 이것 또한 중화의 쌀떡과 여뀌꽃 따위를 만든다. 장조림과 젓갈을 섞으며, 술은 멥쌀로 빚는데, 수수는 쓰지 않는다. 비록 청주종사(靑州從事)로도 거의 그 우열을 다툴 수 없고, 빛과 향기가 잔에 넘치면 평원독우(平原督郵)도 감히 멀리서 그 울타리나마 바라볼 수 없다. 술맛이 뛰어나니 산동(山東)의 추로백(秋露白)도 빛깔과 향기가 같다. 일 자로 벌여 놓고 중간에는 비단으로 덮는다. 이(二) 자로 가로 벌여 놓은 상에서 복판의 한 상에만 붉은 비단으로 덮고, 그 위에 기름 종이를 깔고서 거기에 그릇을 벌여 놓는다. 좌우의 세 자리에는 모두 희뢰(餼牢)를 진열하고, 가까이 한 의자에 앉는데 착석하기를 기다려서야, 왕이 직접 들고 온다. 처음 자리에 들어 설 때에, 갖다 놓은 의자가 상에서 세 자쯤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몰랐더니, 왕이 직접 그 한 의자를 들고 오는 것을 보고서야, 그것은 자신이 공경하는 뜻을 펴려고 하여 그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상에 가득한 희생을 자를 때에는 신하가 반드시 친히 잡는다. 희생에는 소ㆍ양ㆍ돼지ㆍ거위의 네 종류가 있는데 모두 익힌 것이다. 최후의 한 상에는 큰 만두를 놓고 그 위에는 은으로 덮개를 만들어 덮었다. 한 대신이 칼을 잡고 그 희생을 자른 뒤에는 큰 만두 껍질을 가르는데, 그 속에는 만두가 호두처럼 큰 것이 들었는데, 맛이 그럴 듯하다. 특별히 죽였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희생은 모두 그 심장을 올리고, 살지고 맛난 것을 취하여 세 개의 창자에 창자기름을 채웠다. 양 등살 위에 세 개의 양 창자를 꿰고, 그 속에는 구운 고기와 여러 가지 과실을 넣는다.속헌(續獻)하는 데에는 동성(同姓)으로서 군(君)에 봉해진 이가 먼저 한다. 동종(同宗)의 현자는 모두 군에 봉해지는데, 모두 왕신(王臣)이라 일컫는다. 여러 신하들 중에서 무공(武功)이 있는 이도 군에 봉하고, 문직(文職)으로서 공이 있는 이를 봉하는 것도 그와 같다. 다음에는 정부의 육조(六曹)에까지 미친다. 잔을 드릴 때에는 왕이 반드시 그 자리에 나와 드리는 사람이 오르고 내릴 때마다 언제나 따른다. 탕(湯)을 한 번 올릴 때에는 반드시 다섯 사발로 한다. 왕이 직접 드리지 않는다. 오직 이것만은 중국과 다르다. 아무리 그릇을 포개더라도 그 높이는 한 자를 넘지 않는다. 그 밥상이 매우 작은데 굽고 지진 음식이 너무 많으므로 여러 개를 포개게 된다. 그 상에 다 들어가지 못하면 그것을 걷어 깔아 놓은 자리에 둔다. 안주와 탕을 두 번 올릴 때, 상 위에 들어갈 자리가 없으면 그것을 걷어 자리 사이의 맨땅에 놓는다. 이것은 그 나라 풍속이다. 고기를 배불리 먹고 나면 채소를 올리는데 시종관들이 모두 안팎에 반듯이 서서 모신다. 집사(執事)들은 모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린다. 내시와 통역관들은 그 주위에 엎드리고 있다. 내시들은 모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검은 각띠를 띠고 엎드려서 왕이 앉은 의자의 발을 받들고 있으며, 통사와 승지는 좌우에 엎드려서 그 분부하는 말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의 뒤에도 통사가 엎드려 있고, 내시만이 없다. 대개 세 번의 잔치는 태평관에서 하는데, 그 예는 모두 같고 의식을 감한 것이 없다. 한 번의 잔치는 인정전(仁政殿)에서 하는데, 정성이 더욱 지극하고 힘이 더욱 드는 것이다. 태평관에서의 처음 잔치는 말에서 내리는 잔치이고, 두 번째 잔치는 정연(正燕)이며, 세 번째 잔치는 말에 오르는 잔치이고, 인정전의 잔치는 사연(私燕)이라 한다. 처음에는 이 예가 마땅치 못한 것 같기에 의논하여 고치려 하였는데, 이르러서야 태평관과 모화관의 제도가 모두 전(殿)으로 그것은 오로지 천조(天詔)를 맞이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며, 일이 없을 때에는 왕이 거기에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매양 거기 와서 잔치를 베풀 때에는 왕이 반드시 먼저 관문 밖의 작은 전에서 기다리고서 들어온다. 비로소 고칠 필요가 없는 줄을 알았다. 내가 일을 마치고 동쪽에서 돌아오려고 수레를 빨리 재촉할 때에, 왕이 먼저 모화관에 나와 잔치를 베풀고 기다리라고 하는데 그 말이 더욱 친절하여 싫증을 내지 않고, 예는 더욱 성의 있어 게으르지 않았다. 천작(天爵)을 닦는다는 말에 감사하기 그지없고, 좋은 말을 두 번이나 하는데 감사하였다. 귀중한 《맹자(孟子)》의 천작(天爵)이란 말을 외우기까지 하면서 우리들을 다 능하다고 하였으며, 또 안자(晏子)의 증언(贈言)을 인용하여 스스로 그 재주의 미치치 못함을 한하였다. 대개 그 뜻은 장차 우리들에게 시구(詩句)를 주려 한 것이었는데, 아깝게도 우리가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이날 왕은 우리 두 사람이 여러 번 선사품을 물리치자 통역을 통해 뜻을 말하기를. “우리 선대로부터 천사(天使)가 멀리서 오면 언제나 약소한 물품으로나마 뜻을 표하였는데, 지금 두 분 대인이 그처럼 하는 것을 보니, 나는 황공하여 더 할 말이 없소. 다만 내가 듣건대, 옛날 사람의 말에, ‘인자(仁者)는 작별할 적에 말을 주고, 그렇지 못한 자는 금(金)을 준다.’고 하였소. 나는 지금 좋은 말을 해주지 못하고 한갓 약소한 물품만을 드리니 마음속으로 매우 황공하오. 나는 마침 또, ‘옛날 사람은 천작을 닦으면 인작이 따른다.’는 맹자 말씀이 생각나오. 지금 두 분 대인은 진실로 천작을 닦은 분이니, 이번에 돌아가면 특별한 은혜를 입을 것이오. 이것이 곧 내가 말을 주는 것이오.” 하였다. 우리 두 사람은, “왕이 우리를 덕으로 사랑하는 데에 감사한다.”라고 답하였다. 우리가 술을 다 마시지 않자 통역을 시켜 “이 한 잔을 다 드시오. 내일이면 천연(天淵)의 거리가 될 것이오.”라고 하였다. 통역은 그 천연을 ‘천원(天遠)’이라고 잘못 전하였다. 우리가 그 말을 알기 때문에 해석해 주니, 왕은 웃고 문을 나와 전송하면서 또 술을 내어 권하고 다시 ‘원별천리(遠別千里)’라고 말하였다. 통역은 또 ‘원별’을 ‘영결(永訣)’이라고 잘못 전하였다. 이는 장유성(張有誠)이 중국어는 잘하나 글을 많이 읽지 못하였고, 이승지는 글은 읽었지만 중국어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매양 그 말을 전할 때에 땀을 빼면서도 여전히 통하지 못하는 것이 더욱 우스웠다. 이날 밤에는 벽제관에서 자면서, 허이조(許吏曹)의 왕이 시짓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 뜻을 깨달았다. 산천과 길은 한 달 동안이나 지났으나, 풍물(風物)과 인정(人情)은 5일 만에 안 것이므로, 비록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상당히 기억이 난다. 국학(國學) 성균관(成均館)은 뒤에는 산 앞에는 물이 있는데, 앞뒤에는 전당(殿堂)이고 좌우에는 뜰이 있다. 성전(聖殿)은 앞에 있고 명륜당(明倫堂)은 뒤에 있으며, 사학(四學)은 동서로 갈라져 있다. 관원으로는 대소사성(大小司成)이 있고 생도들은 상ㆍ하의 기재(寄齋)에 산다. 생원과 진사가 있는 곳을 상재(上齋)라 하고, 승학(升學)들이 있는 곳을 하재(下齋)라 한다. 생원은 3년 동안 경전에 밝은 이로 뽑힌 사람이고, 진사는 시부(詩賦)로 뽑힌 사람이며, 승학은 민간의 뛰어난 사람들이니 기재(寄齋)라고도 한다. 서경(西京)에서도 견줄 수 없고, 개성에서도 짝할 수 없는 것은 제사에 소상(塑像)을 두어서 더럽히거나 어지럽히지 않으며, 생도는 공부함으로써 친구가 된다. 기내(畿內)의 경치로는 한강이 제일이다. 누대가 높아 구름을 막고 물이 푸르러 거울이 떠 있는 것 같다. 나루로는 양화도(楊花渡)가 있어서 물산이 번성한데 팔도(八道)에서 운반된 곡식이 모여, 일국의 금령(襟領)이 된다. 가장 높은 정자에서 긴 물가를 굽어보면 백제의 옛 경계에 닿아 있다. 나는 일찍이 여기서 배를 띄우고 말을 타고서 하루 동안 논 적이 있는데 저들도 그 즐거운 일과 완상하는 마음이 백년 만에 있는 다행이라고 스스로 경하하였다. 트인 골목과 통한 거리는 쪽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고, 깎아지른 듯한 처마에 우뚝히 빛나는 집이다. 집집마다 높은 담이 있어서 바람과 불을 막고, 방마다 북쪽으로 들창을 내어 더위를 피한다. 그 밖은 모두 관청에서 나누어 받으므로, 빈부에 따라 그 제도가 다르지 않고, 그 안은 자기들 마음대로 지을 수가 있다. 그 곧은 거리 양쪽에는 모두 관청으로서 동와(瓦)를 얹고 일반 백성들에게도 나누어 주었으니, 밖에서 보면 누가 가난하고 부자인 지 분별할 수가 없고, 안으로 들어가 그 방과 집을 보아야 비로소 같지 않다. 관청도 제도는 다르지 않다. 모두 당침(堂寢)이 있는데 모두 모서리를 꾸미고, 누각은 난간을 날개처럼 내고 들보에는 동자 기둥을 댔다. 관사(館舍)와 전사(傳舍)의 벽 사이에는 다 수묵(水墨)의 변변찮은 그림을 바르고, 문과 들창이 합한 곳에는 모두 혼돈(混沌)이 처음으로 나누어지는 그림을 그려 놓았다. 이것은 꼭 다 그런 것은 아니고, 다만 내가 본 것을 근거로 하여 곧장 쓴 것이다. 가난한 집의 벽은 대로 얽되 새끼를 꼬아서 튼튼하게 하고, 그 위에는 띠풀로 지붕을 이었으며, 구멍이 있는 곳에는 진흙덩이로 막았다. 그 벽은 잡목 따위를 가져다 바로 세우고 엮지 않고 다만 새끼로 얽는다. 새끼로 얽은 곳은 마치 그물 눈과 같은데, 그 한 눈금마다 진흙덩이 한 개씩으로 틀어막았다. 서울의 작은 골목은 이와 같고, 길에서 본 것으로는 모두 완전히 진흙을 발랐다. 어떤 집은 가시나무 가지가 도리어 처마 끝에까지 나왔고, 어떤 집은 겨우 동그란 소반만하다. 이것을 봉황새에 비하면, 비록 천 길을 날지는 못하지만, 뱁새에게 비하면 한 나뭇가지에 편안함을 의탁할 만한 것과 같다. 부잣집은 그 기와가 모두 동()으로서 무서(廡序)가 동서로 뻗은 것은 그 마룻대가 도리어 남북으로 솟아 있고, 모두 흙으로 벽을 바른 집으로 당침(堂寢)이 앞뒤에 있는 것은 그 등마루가 도리어 중간보다 낮다. 당침은 모두 한 칸인데 무서가 도리어 세 칸이다. 문은 모두 동서(東序)의 마룻대를 돌아 있기 때문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되 바로 걸어가야 당침으로 갈 수 있다. 그 문은 모두 남향이지만 가운데에서는 열리지 않고, 모두 동무(東廡)의 마룻대로 나아가 남쪽을 향해 열리는 것은 그 터가 매우 높아서 사다리가 있어야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동서로 향한 것도 그와 같다. 지대는 모두 낮고 습한 것을 두려워해서 널빤지를 깔아서 습기를 막았으니, 만일 책상다리하고 앉으려면 모두 띠풀을 깔아야 한다. 그 풍속이 모두 땅에 자리를 깔고 앉는다. 사람들은 네모진 하나의 방석을 만들거나, 베나 비단으로 하나의 큰 베개를 만드는데, 그 속에 풀을 채워 앉는 사람의 안석으로 쓴다. 관부에서는 만화좌(滿花座)로 방석을 만드는데, 그 제도 역시 네모로 만들고 녹색 모시로 초침(草枕)을 만들어 다닐 때에는 사람이 그것을 지고 따른다. 알 수 없는 일은 집에서 돼지를 기르지 않고 채소밭에는 울타리를 치지 않는다. 무거운 짐을 끄는 데에는 오직 소나 말 외에는 쓰는 것이 없고, 말을 부리는 사람은 많고 소를 부리는 사람은 적다. 목축에는 전혀 양을 볼 수 없다. 고기를 먹으려면 산이나 바다에 그물이나 통발을 쓰고, 나물을 먹으려면 강이나 바다에 나가 캔다. 평안도에서 황해도까지 오면서 본 것이 이러하였다. 촌늙은이 중에는 한 번도 돼지고기 맛을 모르다가 우연히 관청에서 베푸는 잔치에서 먹게 되면, 곧 꿈속에서 돼지가 채소밭을 망치게 되는 꿈을 꾸는 자도 있다.관청에서라야 양이나 돼지를 두었다가 향음례(鄕飮禮) 때에 더러 쓰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은 사람이 죽으면 산마루에 장사지내고, 귀한 사람이라야 교외 언덕에 묘자리를 잡는다. 평안도에서 황해도로 오면서 멀리 산꼭대기를 바라보면 성가퀴처럼 벌여 있는 것이 모두 무덤이었다. 귀한 사람은 지형을 선택하고 또 화표(華表)와 석양(石羊) 따위도 있다. 그러나 비를 세운 것은 볼 수 없었다. 이것들은 모두 특별한 지방의 이상한 풍속에서 나온 것이나, 굳이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논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총환(總環)을 드러내어 귀천을 분별한다. 그 나라에서는 머리를 싸매는 망건(網巾)은 모두 말총으로 만들었고, 환(環 관자(貫子))으로 등급을 정하였으니, 1품은 옥이고 2품은 금이며, 3품 이하는 은이고, 서인(庶人)은 뼈ㆍ각(角)ㆍ동(銅)ㆍ방(蚌) 따위로 만들었다. 아기의 어릴 때의 머리카락을 그대로 보존하여 먼저와 뒤의 구별이 없어서, 어떤 아이는 어릴 때에 머리카락이 벌써 어깨에 드리우며, 어떤 아이는 6ㆍ7세가 되면 뿔 모양으로 쌍 상투를 묶는다. 헤아려 보건대 태아 적 머리카락을 보존하려는 것은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모두 갓을 쓰기 전인 것이다. 백성들은 초모(草帽)를 쓰는데 턱에는 구슬을 드리우고, 정수리는 둥글거나 혹은 모나며 색깔은 모두 검다. 천한 사람은 네 잎의 푸른 적삼을 입고, 정수리에는 새 깃을 꽂는다. 보통 사람은 여러 겹의 삼베옷을 입고 걸을 때에는 긴 옷자락을 끈다. 시끄러움을 싫어할 때는 길에서 하루를 묵고, 충돌하는 것을 말리려면 뜰 끝에서 지팡이를 끈다. 천한 사람의 네 잎 적삼은 오직 평안도와 황해도의 두 도만이 이렇게 하였고 경기도는 그렇지 않다. 지팡이를 끄는 사람이란 모두 키 큰 사람을 뽑는 것이니, 큰 모자를 쓰고 누런 베옷을 입고, 둥근 깃에는 노끈을 달고 다만 정수리에 새 깃을 꽂지 않았다. 신은 가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진흙 속을 다니더라도 상관이 없고, 버선은 바지에 한데 묶으므로 물을 건너더라도 구애를 받지 않는다. 옷은 모두 흰색인데 굵은 베옷이 많고, 치마는 펄렁거리는데 주름도 성글며, 등에 짐을 지고서 구부리고 가는 것은 마치 거북이가 볕을 쬐는 것 같고, 그 풍속에 남자들은 모두 등에 짐을 졌다. 어른의 명이 있으면 구부리고 가는 것은 마치 오리가 뒤뚱뒤뚱 걷는 것과 같다. 그 풍속에 사람을 보면 구부리는 것으로 공경을 표하고, 어른이 부르면 구부리고 달려가서 대답한다. 가마를 멜 때에는 반드시 24명이 한 가마를 메는데, 가다가는 30리도 못 가서 또 백 사람이나 바꾼다. 이는 무거운 것은 모두 어깨로만 질 수 없으므로, 이렇게 모두 손으로 붙잡아 드는 것이 당연하다. 가마 한 채에 앞뒤에 전부 24명을 쓰고, 또 곁에서 붙드는 사람이 있다. 그 가마는 중국의 교의와 같은데, 네 발이 짧고 좌우에 두 개의 긴 가마채를 끼운 것도 중국의 제도와 같다. 자리 밑에는 나무 하나를 가로질러 그 양쪽 끝이 나왔는데 길이는 6ㆍ7척이고, 앞뒤에 또 두 개의 나무를 가로질렀는데, 길이는 자리 밑의 가로지른 나무와 같다. 들려고 할 때에는 붉은 베로 가로지른 나무 양쪽 끝에 불들어 매고, 사람은 다만 그 베를 어깨에 걸고 손으로 들고 간다. 또 가마 중간에는 뒤에서 앞까지 긴 베 두 폭을 바로 대어서 사람의 두 어깨에 나누어 걸어서, 마치 말 멍에에 가로지른 나무 모양과 같은데, 이것은 한쪽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 나머지는 10여 명을 시켜 앞에서 끌게 한다. 여자들의 귀밑털은 귀를 덮어 귀고리가 보이지 않고, 머리에는 흰 권(圈)을 써서 바로 눈썹을 내리누른다. 개성부에서 왕경으로 오는 길가에서 이런 것을 보았다. 부유하고 귀한 여자는 검은 비단으로 얼굴을 가리고, 부유하고 귀한 집 부인들은 머리에 한 광(匡)을 썼는데 큰 모자와 같다. 앞 채양에 검은 비단을 드리워 얼굴을 가렸다. 비록 얼굴을 가렸지만 이것도 사람을 피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울에서 보았다. 가난하고 천한 사람은 흰 치마가 장딴지를 가리지 못한다. 지위가 있고 존귀하여야 가마를 타고 출입하는 것을 허락하고, 지위가 없으면 아무리 부자라도 말타는 것만을 허락한다. 이 두 글귀는 허 이조(許吏曹)가 써 준 《풍속첩[風俗帖]》에 나온다. 버선과 신은 베나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발을 묶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었다. 신은 보통 사람은 소 가죽이고, 귀한 사람은 사슴 가죽이며, 버선은 비단이 많다. 3ㆍ4명의 통사의 말이 모두 같았다. 옷은 베나 비단으로 만드는데, 소매는 넓으나 길지는 않다. 윗옷은 모두 무릎 밑에까지 내려가고 아랫도리 옷은 모두 마루에까지 닿는다.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볼 때에는 꿇어앉는 것을 예의로 삼고, 천한 사람이 일이 있을 때에는 머리로 이는 것이 보통이다.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도 손으로 붙들지 않고, 열한 말의 쌀을 지고도 그 걸음은 빠르다. 이것은 내가 직접 본 것을 간단히 말한 것이고, 보지 못한 것은 자세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이른바 냇가에서 남자와 함께 목욕하고 역(驛)에서 심부름하는 자는 모두 과부라는 것은, 처음 전해 들을 때에는 매우 놀라웠지만, 지금은 이미 고친 것을 알았으니, 어찌 이 또한 성스런 황제의 거룩한 교화에 젖은 것으로 넓은 한수(漢水)를 뗏목으로 건널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기 전에는 모두 전하기를, ‘그 풍속에 과부들이 관역(館驛)에서 일을 한다 ’하였다. 나는 그들의 추잡함을 매우 미워하였는데, 와서 보매, 와서 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 그 고을 아전들이고, 부인은 역 밖의 별실(別室)에서 밥을 짓고 있었다. 서로 전하기를 ‘이 풍속은 경태(景泰) 연간에 그 국왕이 즉위한 이후에 변하였다. ’하니, 요동(遼東)의 부총병(副摠兵) 한빈이 한 말이다. 냇가에서 남녀가 같이 목욕한다는 사실은 옛날 기록에 나오는데, 지금은 변하였다. 새로는 꿩ㆍ비둘기ㆍ참새ㆍ메추라기가 많고, 짐승으로는 고라니ㆍ사슴ㆍ노루ㆍ포(麅)가 많다. 포는 노루와 같은데 뿔이 하나이고, 그 고기는 매우 맛나다. 산에서는 포가 나지 않는다. 해산물(海産物)로는 곤포ㆍ김ㆍ굴ㆍ조개이고, 곤포는 종려나무 잎과 같은데 녹색이다. 김은 자채(紫菜)와 같은데 크다. 생선으로는 금문(錦紋)ㆍ이항(飴項)ㆍ중순(重唇)ㆍ팔초(八稍)이다. 금문은 붕어와 비슷한데 몸이 둥글고, 이항은 피라미와 같은데 홀쭉한 것 밖에 볼 수 없다. 왕이 사람을 시켜 음식상을 차려 보내어, 중도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것들이 모두 거기 있었다. 중순은 중국의 눈이 붉은 고기와 같은데, 입술은 말코 같고 살은 매우 맛나며, 그 새끼는 조기 새끼 같은데 잘고도 많다. 팔초는 곧 절강(浙江)의 망조(望潮)인데 맛은 그다지 좋지 못하고 길이는 4ㆍ5척이 된다. 잉어와 즉어(鯽魚)는 내와 못 어디서나 모두 잡을 수 있다. 청천(淸川)ㆍ대정(大定)ㆍ임진(臨津)ㆍ한강의 여러 물에 다 있고, 즉어는 길이가 한자쯤 되는 것도 있다. 황새는 정원(庭院)에도 그 보금자리가 많이 보인다. 대합조개 같은 결명(決明)은 그 맛이 해산물에서 제일 맛나고, 석결명(石決明)은 약에 넣는 것이다. 그 살이 밖으로는 껍질에 붙고 속은 돌에 붙었는데, 복어라고도 한다. 껍질은 바닷가의 구멍이나 바다 복판에 있다. 주먹 같은 자궐(紫蕨)은 그 맛이 산채(山菜) 중에서 제일 낫다. 고사리에는 푸른빛과 자줏빛 두 가지가 있는데, 중국에서 나는 것과 같다. 그 지방 사람들은 잘 캘 줄을 모른다. 대개 그것을 캘 때에는 반드시 송곳으로 땅을 파서 흙을 제거하고서 그 뿌리 밑동을 잘라야 한다. 내가 허 이조에게 그 캐는 법을 가르쳐 주었더니, 매우 기뻐하였다. 시내나 육지에서 나는 기이한 물건에 있어서는 난초 향기를 피우는 것은 필관(筆管)ㆍ산장(酸漿)과, 필관은 싹을 먹는데 맛이 부드럽고 달다. 그 잎은 알 수 없는데 혹은 황정(黃精) 싹이라 한다. 산장의 잎은 뾰족하고 줄기는 푸르거나 붉으며 맛은 달고 시다. 자근(紫芹)과 백고(白蒿)가 있다. 왕도와 개성 사람들 집의 작은 못에는 다 미나리를 심는다. 수료(水蓼)의 싹ㆍ당귀(當歸)의 싹ㆍ송부(松膚)의 떡ㆍ산삼(山蔘)의 떡은 소나무의 겉껍질은 벗겨내고, 그 희고 부드러운 속껍질을 벗겨 멥쌀을 섞어 찧어서 떡을 만든다. 산삼이란 약에 쓰는 것이 아니다. 그 길이는 손가락만 한데 형상은 무와 같다. 요동사람들은 그것을 산무라 하고, 거기에 멥쌀을 섞어 찧고 구워서 떡을 만든다. 또 3월 3일에 그 보드라운 쑥잎을 뜯어 멥쌀가루를 섞어 쪄서 떡을 만드니 그것을 쑥떡이라 한다. 그 멥쌀은 빛이 희고 맛이 향기롭다. 모두 상에 차릴 만하여 모두 술안주에 쓴다. 과실로는 배ㆍ밤ㆍ대추ㆍ감ㆍ개암ㆍ송화(松花)ㆍ살구ㆍ복숭아ㆍ감자ㆍ귤ㆍ매실ㆍ오얏ㆍ석류ㆍ포도이고, 배ㆍ대추ㆍ개암이 가장 많아서 어디에나 있고, 감자와 귤은 전라도에서 난다. 가죽으로는 범ㆍ표범ㆍ고라니ㆍ사슴ㆍ여우ㆍ담비ㆍ들고양이ㆍ돈피이니, 토인들은 담비를 돈피라 하고, 들고양이의 가죽은 알지 못한다. 그것들을 가지고 무늬 자리ㆍ겹갖옷ㆍ화살통ㆍ활집들을 만든다. 꽃으로는 장미ㆍ철쭉ㆍ작약ㆍ모란ㆍ차꽃ㆍ정향(丁香)ㆍ작미(雀眉)ㆍ산반(山礬)이 있다. 2월이 한창인데 앵두꽃은 다 지고, 늦봄이 다 가지 않았는데도 오얏꽃이 모두 시들었다. 내가 3월 8일 그 나라에서 떠날 때에 당리화(棠梨花)가 거의 떨어졌는데, 또 며칠을 걸어 압록강을 지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막 피는 것을 보았다. 이는 그 나라가 동남쪽에 가까울수록 따뜻했기 때문이다. 풀은 대부분 무성하게 우거졌으며, 나무는 대부분 동글고 고불고불하다. 산에 모래와 돌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노송은 단단하기가 잣나무와 같은데, 사람들이 그것을 가져다 등불 기름을 만들려 하나 송진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 소나무의 결이 가장 단단하고 누른 빛이 잣나무와 같으나 기름이 적다. 어디를 가나 있다. 그 향기로운 꽃은 한번 봄이 지나면 모두 따고, 맺은 열매는 2년 만에라야 먹는다. 소나무에는 두 종류가 있다. 열매를 맺는 것은 껍질이 그다지 거칠지 않고 가지와 잎은 위로 치솟았으며, 맺은 열매는 2년 만이라야 딸 수가 있다. 경기도에 가서야 있었다. 작은 것은 시내의 다리를 만들고, 큰 것은 묘당(廟堂)의 기둥이 된다. 대개 가는 길에 물이 있는 곳이 있으면 모두 소나무를 베어 다리를 놓고, 그 가지를 잘라서는 난간을 만들며 잎을 가지고서는 좌우의 흙을 막는다. 보산관(寶山館)에 가까운 한 시내는 저탄(猪灘)이라 하는데, 넓이가 20여 길이나 되며 소나무로 다리를 놓았다. 들보나 마룻대를 만들려면 곧은 것을 얻기가 어렵고, 만일 다락 기둥으로 쓰려면 아래 위의 두 동강으로 하여야 한다. 이것은 그 종류가 같지 않으므로 그것을 씀에는 각각 알맞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금(金)에 있어서는 그 캐는 곳을 자세히는 모르나 가장 많은 것은 구리이다. 땅에서 캐는 구리가 가장 단단하고 또 빛이 붉다. 밥그릇과 수저는 다 이것으로 만드니, 즉 중국에서 이르는 고려동(高麗銅)이 그것이다. 다섯 가지 빛깔에 있어서는 각각 그 쓰이는 바를 따르는데, 금하는 것은 붉은 빛이다. 왕이 입는 옷이 모두 붉기 때문에 그것을 금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맛에 있어서는 초와 장이 많이 쓰이고, 다섯 가지 소리에 있어서는 음운(音韻)을 잘 알지 못한다. 그 나라의 소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글을 읽으면 평성(平聲)이 거성(去聲)과 같으니 이를테면 성(星)을 성(聖)이라 하고, 연(煙)을 연(燕)이라 하는 따위와 같다. 일상어는 여진(女眞)과 비슷한 것이 많다. 심지어 한 글자를 서너 자로 부르는 것은 8로써 위(爲)ㆍ야(也)ㆍ득(得)ㆍ리(理)ㆍ불(不)로 부르는 따위와 같고, 한 글자를 두 자로 만들어 부르는 것은 더욱 많으니, 부(父)를 아필(阿必)이라 하고, 모(母)를 액파(額婆)라 하는 따위와 같다. 《지(志)》에 실린 것은 이리 꼬리로 만든 붓이고, 《일통지(一統志)》에, 생산되는 것에 이리 꼬리로 만든 붓은 그 대롱은 작기가 화살 같고, 수염 길이는 한 치 남짓하며 붓 끝이 자루에 들어 둥글다고 하였다. 물어보았더니, 그것은 누런 쥐의 털로 만든 것이고 이리 꼬리가 아니었다. 무인(武人)이 숭상하는 것은 벚나무 껍질로 만든 활이다. 활은 중국의 제도에 비하면 조금 짧다. 그러나 화살은 매우 잘 나간다. 베는 삼으로 짜는데 모시로 이름 지은 것은 잘못 전해들은 데서 나왔고, 종이는 닥나무로 만드는데 누에고치로 만든다고 하니, 인식하는 것은 도련(搗鍊)한 것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옛날에 모두 전하기를, “그 나라에서 나는 종이는 고치로 만든다.” 하였는데, 지금 와서야 비로소 닥나무로 만드는데, 그 만든 솜씨가 교묘할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일찍이 불에다 시험해 보고 그런 줄을 알았다. 베의 정(精)하고 세밀하기가 고운 명주와 같고, 종이의 귀한 것은 통처럼 말 수 있는데, 기름을 먹이면 비도 막을 수 있고, 그 두꺼운 종이는 어떤 것은 네 폭으로 한 장을 만들고, 어떤 것은 여덟 폭으로 한 장을 만드는데, 통틀어서 유석(油席)이라 한다. 자기네들도 중하게 안다. 폭을 잇대면 바람도 막을 수 있다. 가는 곳마다 모두 흰 베로 장막을 만들었는데, 육지로 다닐 때에는 말에 싣고 따른다. 그리고 이른바 남자의 머리에 쓰는 건은, 당 나라 제도와 같은데 지금은 옛날과 같지 않고, 아주 작은 과하마(果下馬)도 키가 3척 되는 것이 없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이르기를, “그 나라 사람들은 절풍건(折風巾)을 쓰는데, 남자의 건은 당나라의 것과 같다.” 하였다. 지금 남자들은 모두 대모(大帽)를 쓰고, 오직 왕도에서 왕의 가마를 메는 자들만은 육각(六角)으로 된 흰 비단 건을 쓴다. 육각에는 다 흰 솜공을 붙였고, 자색 비단으로 깃이 둥근 옷을 입었는데, 발에는 뾰족한 코의 가죽신을 신었으니, 마치 당 나라 말을 탄 해관(奚官)을 그려 놓은 것과 같다. 생각건대, 그 때의 옷은 모두 그와 같았기 때문에 당 나라와 같다고 말한 것인 듯하다. 또 《일통지》에, “백제에서 과하마가 나는데 그 키는 석 자로써 과실나무 밑에서도 탈 수 있다.” 하였다. 지금 백제의 국경은 바로 양화도(楊花渡)의 남쪽 언덕에 있었으니, 왕경에서 2ㆍ30리 밖에 안 된다.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벌써부터 나지 않는다.” 하였다. 다만 그 나라 길에서 보이는 짐 실은 말이 비록 석 자 이상이긴 하지만 중국 말에 비하면 조금 작다. 아마 그 종류일 것이지만 우선 기록하고 다음 날을 기다린다. 오직 오엽(五葉)의 인삼과 만화석(滿花席)이 있어서 오엽의 인삼이란 즉 《본초(本草)》에서 말한 인삼이다. 만화석의 풀빛은 누르고 또 부드러워 아무리 접어도 꺾어지지 않으니, 소주(蘇州)의 것에 비하면 훨씬 좋다. 해마다 중국에 조공으로 바치고 때때로 상국(上國)에게도 공물로 바친다. 1백 20년 이래로 중국에서 내려주신 물품의 자주하고 많은 것이 비록 성명(聖明)의 주신 바에서 나왔지만, 또 그 공물의 끊이지 않음에 말미암은 것이다. 아, 육의(六義) 중에 부(賦)처럼 오직 바로 진술함을 취한 것이나 겨우 달포를 돌아다니면서 어떻게 그 진상을 다 알았겠는가? 하물며 내가 말선(襪綫)의 얕은 재주로 창해(滄海)의 가는 비늘과 다르지 않음에랴? 그러나 이제 붓끝의 조화(造化)를 잘 부려 육합(六合)의 동춘(同春)을 그려 보노니, 감히 보고 들은 것을 많이 속이지 않았다면 거의 자순(諮詢)에 부끄럽지 않을까 한다. ○ 상고하건대 동월의 주석에, “향시(鄕試)는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년에 있고, 회시와 전시(殿試)는 진(辰)ㆍ술(戌)ㆍ축(丑)ㆍ미(未)년에 있다.”고 한 것이나 “개성 동쪽에 능묘가 있으니 바로 지금 국왕 이씨의 선영이다.” 한 따위는 모두 진실이 아닌데, 아마 통역(通譯)이 말을 잘못 전한 것인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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