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에 관한 일반론
-주제 에두아르두 아구아루사/이지민 옮김
-구민사 2018년판
아프리카적인 향기의 매혹
1
루도비코는 어릴 때 아버지 친구로부터 폭력적 강간을 통해 임신한 뒤 출산한 딸은 어디론가 입양되고 부모님으로부터 외면당한 아픔을 안고 살다 결혼한 뒤 아프리카 앙골라로 가서 살게 된 언니를 따라 포르투갈을 떠난다.
당시 앙골라는 수백 년에 걸친 포르투갈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신생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혁명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형부와 언니가 개전초기에 의문의 실종을 당한 채 혼자 집에서 외부와 단절한 채 수 십년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는 소외된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그 사이 세상은 혁명전쟁을 치르며 전쟁에 관계된 정보국 요원, 반정부 인사들의 구금과 탈출,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든 채 멸종되어가는 아프리카 순수 부족, 전쟁의 틈새에서 한 몫 보려는 부정부패자와 해외자본가, 전쟁의 와중에 실종된 사람들을 찾아내는 일로 생활하는 사립탐정과 기자, 그리고 거리로 내몰린 전쟁고아들의 척박한 생활상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2
전화가 휩쓰는 앙골라 수도 루안다의 석호가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11층에 혼자 고립되어-출입구 통로에 담을 쌓아 통행을 막아버렸다-삼십 년 가까이 살았던 루도비코의 삶은 이 소설에서 별도로 분리해 읽어도 그 자체로 흥미롭고 신선한 이야기가 되고 있다.
먹을 음식이 충분하고 읽을 책이 적당히 소장되어 있으며 말은 통하지 않지만 감각과 체온을 나눌 수 있는 반려견이 한 마리 정도 같이 있다면 라디오나 신문 같은 세상 소식을 들을 수 있는 매체가 없어도 단절된 일상을 그럭저럭 영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데 단절되고 고립된 일상이 마냥 부정적인 아닌 삶의 한 양태로 자리잡는-현대 사회에서는 거의 불가능한-과정이 퍽 흥미롭다.
날마다 넘쳐나는 세상의 잡다하고 불필요한 정보의 홍수로부터 벗어나 먹고 쉬는(혹은 잠을 자는) 필요하면 책을 읽는 단순한 일과의 반복이지만 일기나 기록을 통해 자아를 발견, 유지해나가다 보면 보다 성숙해나가는 일면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3
-진실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의 평범한 신발이지. (본문중)
거대한 사실의 양은 사람들을 억누른다. 한번밖에 인생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역사이래로 기록, 전수된 많은 사실들과 지금 현재에도 밝혀지는 사실들은 온전한 삶을 영위하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 벅차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다루는데 있어서 알기를 체념하고 모종의 전문가-학자, 기자, 저널리스트 등등-들에게 맡긴 채 살아가지만 부담스럽기는 여전하다.
과연 우리 주변을 밝히는 많은 사실들과 진실에 거리를 둔 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가부터 순전히 그것으로부터 이득을 취하려는 집단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데 ‘나’만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것에 흔쾌히 동의할 수 있을까 등등.
소설은 그런 한계를 극복하면서 살 수 있는 삶의 단면들을 친절하게 다룸으로 해서 ‘우리 인생의 진실이 무엇일까’라는 독자 나름의 대답을 찾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 작품 또한 여는 소설들과 같이 잘 갖추어진 각본과 복선으로 책의 말미에 이르러야 전말을 알 수 있는 복잡다단하고 혼란스럽다 못해 흥미진진한 전개가 이어지지만 책을 재미있게 잘 읽는 독자들은 책을 덮는 순간에 이르면 꼭 집어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뭔가 가슴에 와 닿는 따스한 감정을 누구나 지니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실상 문학과 예술의 긍극적 역할은 이성적 의미전달이 아닌 ‘생의 어떤 인식’이라는 감성에 호소하는 감정적 역량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앙골라 독립전쟁이라는 참혹한 역사를 배경으로 깔고 진행되지만 그 어디에도 잔혹하고 비참한 전쟁의 상흔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대목은 없다. 대신 다소 우스꽝스러운 인물군들과 그들의 자잘한 욕망과 내면의 충돌, 아프리카 초원의 낭만을 대표하는 원시부족의 일상들, 수도 루안다의 한켠에서 고립된 채 살아가는 어느 여인의 기이한 삶, 그리고 남녀의 사랑과 전쟁 고아들의 일탈된 일상 등이 마치 가벼운 희극처럼 뒤섞인 채 잔잔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 양상은 루도가 가끔씩 종이박스를 뒤집어 쓴 채 바깥세상의 동정을 탐구하다 보게 되는 석호의 풍경과 같다고 할까.
‘아프리카적’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은 이미지를 작품 전편에서 작가는 잘 살려내고 있는데, 스페인 포르투갈어 문화권의 문학들이 전반적으로 내뿜는 환상적 리얼리즘이 이 작품에서도 여실히 그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다.
더불어 시적으로 붙여진 각 단락의 소제목들과 작품의 제목 ‘망각에 관한 일반론’이라는 철학적 개념에 대해 서정적으로 생각해보는 따스한 시간이 될 수도 있겠다.
(2023.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