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계 5장 1-10절
설교제목 : 묵시적 그리스도
전환의 시대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꽃들이 만개를 하였습니다. 길가의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자동적으로 폰을 꺼내어 길가의 핀 꽃들을 찍는 광경을 자주 목격하였습니다. 아름다움을 본다는 것 자체만으로 위로와 만족을 주기에 충분한 듯합니다. 이런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길거리 유세로 시끄러운 한 주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권력의 이름에는 에로스를 끼어들 수 없습니다.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가늠대가 선거인 듯 보입니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 개인의 운명까지 좌지우지할 수 없는 법입니다. 군중심리에 이끌린 맹목의 어두움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습니다.
C.G. 융은 1957년 “발견되지 않은 자기(현재와 미래)Undiscovered Self(past and future)”를 발표하였습니다. 83세의 노 심리학자가 바라보는 현재와 미래를 향한 혜안은 근 7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고 앞으로의 다가올 세상에 중대한 물음을 던집니다.
우리는 그리스인들이 “신들의 변모metamorphosis”를 위한 ‘카이로스-바로 그 순간이라고 부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말하자면 근본적인 원리와 상징의 변화 속에 살고 있다. 분명하게 우리의 의식적 선택이 아닌 우리 시대의 특이성은 우리 내면에서 변화하고 있는 무의식적 인간의 표현이다. 만일 인류가 기술과 과학의 힘으로 스스로 파괴하지 않으려면, 다가오는 세대는 이런 중대한 변환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시대의 초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다시 우리는 과학적, 기술적, 그리고 사회적 진보를 따라잡지 못하는 전반적인 도덕적 낙후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 현대인은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 목적으로 자신의 힘을 사용하려는 유혹에 저항할 수 있을까? 현대인은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을 잘 알고 있으며, 현 세계상황과 자신의 정신적 상황으로부터 도출되어야할 결론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을까? 현대인은 기독교가 인간을 위해 소중히 간직해온, 내면의 인간이 생명을 지킨다는 신화를 잃어버릴 상황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현대인은 그런 재앙이 닥칠 경우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해 알고 있을까? ... 마지막으로 현대인은 자신이 바로 저울을 기울게 만들 추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행복과 만족, 영혼의 평안, 삶의 의미, 이런 것들은 오직 개인에 의해서만 경험할 수 있고, 국가에 의해서는 결코 경험될 수 없는 것들이다. ... 그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환경도 분명 매우 큰 의미를 지니지만 사회적 정치적 환경이 개인의 행복이나 불행에 미치는 영향이 터무니없이 과장되어 있다. ....
나(정신과 의사로서)는 지나친 낙관주의에 휩쓸리지도 않고 높은 이상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단지 개별 인간의 운명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개인이라는 극소 단위가 한 세계를 좌지우지 하며, 세계는 그 개인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 메시지의 의미를 올바르게 읽는다면, 심지어 하나님도 자신의 목표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C.G. Jung, C.W.10, paras.585-588.]
오늘날 전체주의적, 집단의식이 개별적 인간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대재앙의 한복판에서 허욱적 거리고 있는 줄로 모르겠습니다. 내면의 인간인 영혼이 우리의 생명을 생생하게 살아있게 한다는 신화를 잃어버린 채 외적 가치에만 몰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개인 개인만이 기울어진 추를 균형있게 맞출 수 있을 것입니다.
묵시적 그리스도
요한은 계시록 4장에서 하늘의 보좌의 환상을 보았고, 이어지는 5장에서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오른 손에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안팎으로 글이 적혀 있고, 일곱 인을 찍어 봉해져 있었습니다. 봉해진 두루마리에 일곱인이 하나씩 떼어질 때마다 심판이 진행되는 것을 보았을 때 이 두루마리에는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의 메시지는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절대기준, 원형적인 절대적 보편기준이 집단적 무의식에는 존재함을 가리킵니다. 그곳에는 개인과 집단의 운명의 배열이 담긴 감추어진 메시지가 있음을 드러냅니다.
힘센 천사가 큰 소리로 “이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사람이 누구인가?(5:2)”라고 외칩니다. 여기에서 ‘합당한(αξιος)’란 능력이나 권리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의로움과 선함과 같은 적합성이라는 뜻입니다. 봉인된 책을 열기에 의로운 자격에 부합된 자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아서 슬피 울었습니다. 요한의 눈물에는 더 이상 계시의 말씀을 알 수 없음에 대한 막막함과 회한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장로들 중 한 명이 그 봉인을 뗄 자가 있다고 일러줍니다. 그는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였으니, 그분이 일곱 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펼칠 수 있음을 일러줍니다(5). 이어서 네 생물과 장로들 가운데 어린 양을 봅니다. 그 양은 죽임을 당한 것 같고 뿔이 일곱, 눈이 일곱을 가진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묵시적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어린양의 이미지라기 보다는 뿔을 가진 숫양의 이미지가 더욱 어울립니다. 그리스어, 양으로 번역된 ‘아르니온arnion’은 양 또는 숫양 모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양은 양자리 또는 숫양이 후속 물고기 자리에서 ‘물고기’을 대변하는 그리스도 시대에 끝나는 황도대의 봄 별자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숫양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말을 예고하고 다른 시대로의 전환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는 양으로 죽고 물고기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묵시적 양은 무시무시한 괴물의 형상이라도 과언이 아닙니다. 순수하고 희생적인 양이 아니라 맹렬하고 공격적인 동물인 숫양이며, 일곱 개의 뿔은 다양한 신적 잠재력과 힘과 권위를 의미합니다. 묵시적 양의 일곱 뿔은 새로운 전환의 활성화되는 힘과 잠재력임을 시사합니다.
일곱 눈을 지닌 특성은 신성한 지혜와 통찰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눈은 자아의 경험 중에 객체 정신을 가장 뚜렷하게 표현한 원형상입니다. 항상 신의 눈은 광범위하게 모든 민족, 신화에 등장합니다. 자기Self가 가시성으로 다가옴은 자아가 자신을 바라보는 경험이며, 모든 변장을 벗겨내고 자신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경험을 동반합니다. 우리가 만약 이런 신성한 눈의 이미지를 본다면 그 자체로 자아의 실체를 제대로 바라보게 될 수 있고, 신성한 통찰로 자아를 객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성한 눈이 하나님과 적절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은 자아에게는 팽창적 동일시로 파괴적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묵시적 양의 일곱 눈은 새로운 전환을 위한 자아 객관화로 나아가게 하는 모든 실체를 드러나게 하는 심판의 눈입니다.
오늘날 현대인은 자아의 인식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며, 모든 것을 결정하고 정당성을 주장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그저 일면의 제한된 인식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스스로 정답이라고 가정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오류를 너무 자주 저지릅니다. 내 생각도 온전한 나의 생각이 아니라 집단이 규정해 놓은 사상이며, 그것조차도 우리는 확실성을 담보할 수 없는 법입니다. 1년에 부활절이 지나고 감리교는 연회를 진행합니다. 여러 행정적 절차와 기타 안건들을 처리하고, 목사 안수식과 은퇴식을 거행하는 자리입니다. 우연히 뒤늦게 목회전선에 들어온 후배와 여러 목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창조과학회 강연자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나왔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모든 과학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의 창조과학회의 특성입니다. 다윈의 진화론 조차도 상당부분 과학계에서는 신다윈주의의 입장에서 오래 전에 수정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문자주의에 빠져서 성서를 어떤 문자적 사실확인으로 간주하려는 중세적 천동설적 세계관을 여전히 신봉하고 있는 것을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신학대학에서 무엇을 배웠고, 성경만 읽지 말고 다른 책도 많이 읽어보라고 권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 그 인식을 넘어서 오늘 묵시적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일곱 개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꿰뚫어 통찰하게 만들고 있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거문고와 금대접에 담긴 향
어린 양이 나와서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 있는 책을 취합니다. 여기에서 취한다는 표현은 대단히 극적이고 생생한 표현입니다. 이 심판과 구원을 이룰 권한과 권위를 부여받는 것이며, 마치 실질적인 전권임 위식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묵시적 그리스도가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을 때 네 생물과 24 장로가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지고 어린 양 앞에 엎드립니다.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거문고는 찬양을 하는 악기이며, 금대접에 담긴 향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감정과 정서를 조화롭게 기능할 수 있는 악기와 보이지 않지만 은은하게 직관적으로 퍼지는 기도는 중요한 정신의 요소임을 시사합니다. 찬양과 기도는 삶의 중요한 기술입니다. 노래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삶을 만족시키는 힘입니다. 어떤 분의 꿈에서 병원에 들렀는데 병원에서는 무대에서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었고, 그 무대 위에서 꿈꾼 이가 싫어하는 장르의 노래가 불려 질 예정이었습니다. 관람을 포기하고 나와버렸습니다. 원색적인 노래가 삶의 무대에서 불려져야 함을 일러주는 꿈입니다. 어떤 것을 해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기도는 내향적인 삶의 방식으로 하나님과 접속을 시도함으로써 하나님께 희구를 아뢰며 연합을 꾀하는 것입니다. 지적이고 이성적이며 지나친 합리성을 추구하는 시대에서 노래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외적 성취와 성공과 지나친 일방성으로 치달은 세상에서 기도하는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금대접에 향기처럼 담겨 있음을 알아차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새 노래로 노래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노래할 수 있는 거문고와 기도의 향이 있습니까? 이 노래할 수 있는 능력과 기도의 향이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옛 감정과 정서를 가지고 노래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새로운 감정과 정서를 가지고 다가올 시간, 묵시적 그리스도를 노래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