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왜 이리 설레는 걸까 지나버린 일이라 잊으러 해도...’
이건 어느 성탄절 노래의 첫 소절이다.
지나간 일이란 회한이 서리기도 하지만 아련한 그리움도 있을 것이다.
먼 훗날 남해에 대한 나의 추억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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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장날이었다.
남해 장날은 2일과 7일에 열린다.
따사로운 봄기운에 젖어 차를 몰고 뮌헨하우스 집을 나섰다.
삼동면 물건리 버스차로에서 독일문화 체험장을 향한 독일로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키가 큰 소나무 몇 그루가 양쪽으로 도열한 지점이 나온다.
그 지점은 차가 한 대씩 비켜야 빠져나갈 수 있는 병목도로다.
집에서 내려서면 바로 그 병목도로를 만나는데
좌회전을 해서 금방 고갯길을 오르게 된다.
도로좌우로 넓은 주차장을 드나드는 수많은 차량과
고갯마루의 커피카페 앞을 서성거리는 인파를 피해 서서히 차를 몰고
내리막길로 들어서면 금방 화암교를 건넌다.
내가 추운 겨울에 피한지(避寒地)처럼 보내는 남해 독일마을은 유명 관광지로 변했다.
가까이에 파독전시관과 원예예술촌, 해오름예술촌, 편백나무숲이 있어서
주말엔 번화가를 방불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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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교 다리 앞의 T자형 도로에서 남해방향으로 좌회전해서 갈현을 넘으려면
고갯길 중턱의 갈곡저수지 수면에 반사되는 햇빛을 눈으로 받아낸다.
갈현! 어설픈 한자 지식으로 풀이해 본다면 칡고개란 뜻이겠지?
칡은 어린 시절에 구하기도 쉽지 않았던 좋은 간식꺼리였는데...
갈현주변으로는 칡이 많았던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한낮의 고갯길 양옆으로 사철 푸르른 나무숲에선
이름 모를 새들이 이리저리 날며 지저귈 테지만
나이 먹은 승용차는 힘겨운 걸까 시끄러운 엔진소리만 귓전을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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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넘어 큰길 가까이 내려서면 삼거리에
오래된 느티나무 한그루가 나목이 되어 서있다.
그래도 봄을 맞이하려는 몸짓으로 앙상한 가지 끝자락마다 포로소롬하니
새생명의 초록물이 오르는 느낌을 전해준다.
부활의 계절임을 알리려는 가?
오가는 차량들의 매연에 눈살을 찌푸리며
"너희들은 나이가 도대체 몇 살이나 되는고?" 말하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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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반시간도 되기 전에 도착한 남해는 장날이어서 일까
읍내를 관통하는 도로 양옆으로는 차량들이 빼곡하다.
시장주차장에 차를 대고 시장으로 들어서면 어김없이 만나는 인물들이 있다.
먼저 남해읍의 ***교회에서 나온 전도인들로서
복잡한 시장길을 살짝 비킨 곳에 진열대를 차려놓고
몇몇 부인들이 어깨띠를 두르고 서성거리고 있다.
장보러 나온 고객들에게 차와 커피를 무료로 나눠주며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다.
아마도 권사나 집사님들이겠지?
안사람은 어느새 그들과 친해져서
커피 한 잔을 얻어들고 와서
“커피 한 잔 드세요.” 하며 건넨다.
“웬 커피?” 그렇게 알게 된 전도인들은 활짝 웃으며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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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시장안 골목길에 좌판을 펴놓고 손님들을 부르는 할머니들이다.
아직 쌀쌀한 바람으로 두터운 옷을 벗지 못하고
앞을 지나가는 손님들을 바라보는 표정없는 눈길이
고된 삶을 가감없이 풍기고 있다.
평소에는 차도로 이용하는 도로지만 장날이면 그 할머니들의 상품진열대가 된다.
시금치 가지 오이 당근 무우 감자 고구마 양파 대파 골파 생고추
깻닢 콩나물 세발나물 잡곡 약초 버섯 브로콜리 피망 등 소소한 상품들이
시장바닥에 누워 새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야말로 “없는 건 없어도 있을 건 다~ 있어요!”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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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람은 콩나물 조금, 안매운 고추 조금, 시금치 조금씩 사들고 나선다.
나는 당연한 듯 먼발치에서 안사람이 흥정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한다.
“할머니, 조금만 더 주세요!” 하는 말이 내 귀에 들어오면
대번에 “여보 여봇!” 하며 간섭을 하기 때문이다.
어느 교회의 젊은 사모님이 노점상 아주머니에게 찐고구마를 사게 되었다.
고만고만한 아가들 생각해서 “조금만 더 주세요!” 했더니 두말없이 덤을 얹어준다.
한 번 더 “한 개만 더 주세요!” 했더니 여전히 군말없이 덤을 얹어주는 거였다.
시력이 매우 나쁜 사모님이 그 다음 주일날 자기 교회에 출석한 고구마아주머니를 보고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지금세태라면 철없는 사모님이 갑질을 한 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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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봉지 몇 개를 양손에 든 안사람은
노점상 초입에 차려진 호떡가게를 기웃거린다.
젊은 시절 출사(出寫)를 다닐 때 식사시간을 맞출 수 없어서
제때에 끼니를 해결하기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그럴 때면 호떡 몇 개로 끼니를 때운 적이 부지기수였다.
어떤 때는 일부러 찾아다녔다.
호떡가게를 만나면 언제나 그 시절이 아련히 그리운 거다.
결국 방금 구워낸 호떡 두 개를 사들고 와서
멋쩍은 듯 싱긋 웃으며 하나를 내민다.
일회용 종이컵에 담아온 따끈따끈한 찹쌀호떡
“정말 맛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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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장에는
엿판을 둘러메고 커다란 가위를 쩔꺽거리며 장단을 맞추던 엿장수도 없고,
날이 무디어진 톱이나 부엌칼을 별러주던 장인도 볼 수 없고
“뻥이요!”를 소리높이 외치던 튀밥장수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어릴 적에 보았던 북적거리던 시장풍경은 아니다.
단지 그 노점할머니들의 모습은
청주 육거리시장이나 남해시장이나 별반 다름없어 보인다.
그래도 전통 5일장을 찾는 재미는
대형마트를 찾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푸근함이 있다.
정가제보다 흥정이 가능하고 덤을 얹어주는 푸근함이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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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장에선 인정이 넘친다.
몰랑몰랑 사람냄새 넘실넘실 살맛 풍기는 곳이다.
뮌헨하우스로 다시 돌아오는 차 안에는 산 게 별로 없어 빈자리가 많아도
남해 5일장 분위기를 그대로 싣고 오기에
그냥 풍성함으로 가득하다.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남해 전통시장!
언제 다시 들러볼 수 있으려나?
-觀-
활천문학 제7집 원고 2015.4.5. 송고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