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 가요제(歌謠祭)’를 사양한 나훈아의 겸손
나훈아 신드롬이 이어지고 있다 . 드디어 나훈아가 성장한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2동 415번지 7통3반 , 부산지방국토관리청 부근 도로를 ‘ 나훈아 거리 ’ 로 명명하고 나훈아가 성장한 건물 찾기도 나선다는 보도가 있다 . 관할 부산광역시 동구청이 그렇게 할 것이란다 . 나훈아가 자랐던 집터는 현재 허름한 4층 건물로 남아 있다 . 지하는 노래방이고 1층은 비어 있다 . 3층에는 역술인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 동구청이 나설 것이 아니라 부산광역시가 나서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
나훈아는 부산D중학 재학시절 야구선수였고 포지션은 유격수였다고 야구계 인사가 말하기도 했다 . 나훈아가 부산에서 서울로 가서 모(某) 레코드사에서 음악공부를 할 때 있었던 일화도 SNS에 나돌고 있다 . ‘ 대한민국 , 어게인 나훈아 ’ 를 통해 나훈아는 재조명되고 있다 .
나훈아가 정부가 수여하는 훈장(勳章)을 사양했다는 얘기는 공연 도중 나훈아와 김동건과의 인터뷰에서 확인됐다 .
그러나 나훈아가 ‘ 나훈아 가요제 (羅勳兒 歌謠祭) ’ 를 사양했다는 소리는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다 . 2000년대 초 한국민간상업방송의 효시(嚆矢)인 부산문화방송사 K사장이 부산을 한국대중가요의 메카로 만들어 보고자 예능담당 PD를 시켜 ‘ 나훈아가요제 ’ 제정에 대한 나훈아 본인의 의사 타진을 한 적이 있었다 .
그때 나훈아는 “ 멀쩡하게 살아 있는 나훈아 이름을 팔아 가요제를 만드는 것은 좀 부끄럽지 않습니까 ? ” 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 “ 가요제나 공덕비 , 훈장 같은 것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는 당사자가 그런 것을 받고도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을 때 수여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 ” 고 하더란 것이다 .
나훈아의 이 같은 응답은 “ 가수는 노래하기도 힘든데 훈장까지 받으면 너무 무겁지 않느냐 ” 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 지금 우리 세상에는 훈장을 받고 , 송덕비를 세우고 동상을 세우고도 나쁜 짓을 해서 칭송과 송덕(頌德)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나훈아의 겸손은 참으로 훌륭한 탁견(卓見)이 아닐 수 없다 .
그러나 나훈아의 음악 인생은 일부 분파분자들이 상투적으로 들고 다니는 친일(親日)과는 거리가 멀다 . 북한의 돈군(豚君)에게 굽실거리는 친북이나 종북과도 거리가 먼 대한의 자유인이다 .
나훈아의 음악 업적은 가요제 제정이나 훈장 수여에도 흠결이 없는 당당한 예인(藝人)이요 , 가성(歌聖)이다 . 그래서 나훈아는 더욱 돋보인다 . 전국에는 숱한 가요제가 있다 . 목포의 이난영 가요제 , 진주의 남인수 가요제 , 울산의 고복수 가요제를 비롯해서 성주의 백년설 , 밀양의 박시춘 , 부산의 현인가요제 등등 수많은 가요제가 있다 .
이들 가요제에 대해 트집을 잡거나 지역 연고를 문제 삼는 자들도 있다 . 그러나 민족의 애환을 노래로 달래주고 나라 뺏긴 슬픔과 전쟁의 고통을 노래로 어루만져 준 공로자들이다 .
전라도가 창(唱)이라면 경상도는 대중가요(大衆歌謠)가 강하다 . 실제 탁월한 가수와 작사가 , 작곡가가 경상도에는 수없이 많다 .
앞에 열거한 분들 외에도 김정구 , 현인 , 남백송 , 진방남 , 김상국 , 안다성 , 남일해 , 진송남 , 은방울 자매 , 나훈아 . 현철 , 김상진 , 설운도 , 김건모 , 문주란 , 정훈희 , 이자연 , 윤승희 등등 . 작곡가로는 백영호 , 정풍송 , 김영광 , 이호섭 등등 . 작사가로는 이재호 , 정두수 , ‘ 트롯100년 ’ 작가상을 받은 정풍송 등등 . 기라성 같은 한국 대중가요계 거성들의 산실(産室)인 부산에도 이제는 국제적인 가요제 하나쯤은 제정될 만한 풍토와 토양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