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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도 문학의 한 장르 입니다. 진정성이 담기면 거기서 아름다움을 획득하기 때문입니다. 아래 글은 오래 전에 <<대구문학 >> 월평을 맡았을 때 쓴 글입니다. 평을 잘한다고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닙니다. 가르치는 일과 실제 그걸 응용하여 아름다운 작품을 빚어내는 일은 천양지차가 있습니다. 학생부군신위라고 쓰면 벼슬이 없었던 고인이라고 말하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배우다가 죽은 분이라는 겸손의 위패라 함이 맞는 말입니다. 밤하늘의 저 많은 별들이 무엇을 속삭이고 있는지 땅에 있는 내가 어찌 다 알수가 있습니까? 그저 절차탁마하는 것이지요. 월평의 주석이 복사가 아니되니 주석이 붙은 원문은 파일로 붙입니다.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작가가 되어 글쓰는 일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 작가라 할 수가 없습니다. POD 출판의 길도 열렸으니 귀한 그대의 귀한 사리(정신의 엑기스)를 많이 남기시길 바랍니다. 저는 직업적인 논문도 책하나 분량을 썼고 월간 <관세사지>에 발표도 했는데, 그 원고를 내가 보관한 게 없어져서 책으로 묶으려고 해도 이제는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살아온 내 흔적이니 묶어두는 보람이 있는데 아쉬움이 많습니다. 각자 원고를 잘 관리하시면서 또 옛날에 발표 된 글이라도 퇴고하면서~(퇴고는 죽을 때까지 합니다. 허물을 고치는 일이기 때문에 상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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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문학>> 제 141호 수필 월평
아름다운 수필을 쓰는 길
1. 시작하는 말
문학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평론마다 말하고 있다.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지만 아름다움이 뭔지 이해하기도 쉽지가 않다. 미(美)의 종류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추미(醜美)까지 있으니 미(美)자를 가져다 붙이기만 하면 미(美)가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까지 든다. 문학의 늪에 풍덩 뛰어든 초심의 작가는 여기서 혼돈에 빠진다. 그래서 온갖 미사여구를 다 동원하여 글을 써보지만 아름답지가 않다.
“미란 무엇일까?”
“진정한 미란 무엇을 두고 말함인가?”
그 궁극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2. 미(美)
「미란 “참”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이다.」“
이는 필자가 오랜 고민 끝에 얻어낸 정의이다. 이 견해를 따르려면 미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참이 무엇인지 부터 이해해야 한다. “참”은 또 무엇일까?
1) 참이란?
“참”이란 사물과 현상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사람이 어떤 사물을 본다는 행위를 해부해 보면, 우리는 1차적으로 동공을 통해 들어온 영상이 망막에 비친 형태를 인식한다. 이때 우리의 망막은 모든 빛을 다 인식하는 게 아니고 가시광선만 인식한다. 이 단계까지에서의 우리의 인식은 산은 보이는 자연의 산이요 물도 보이는 그대로의 물로 인식된다. 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인간들은 보이는 그대로의 산과 물을 인식하지 못한다. 망막에 비친 가시광선이 남기는 영상을 다시 해석하는 2차적인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망막에 비친 산과 물이 2차적인 눈을 통과하고 나면 산과 물은 보는 이들 저 마다의 산과 물로 인식된다. 심상(心想)이다. 심상이 작용하면 우리가 아는 산과 물은 참 산과 물이 아니게 된다. 이걸 글로 쓰면 제 아무리 “참”을 썼다고 강변하더라도 자기인식의 오류로 인해 거짓이 되고 마니 참이 주는 기쁨과 아름다움을 획득하지 못한다.
2) 무의식과 트라우마
인간의 내면에서 이 2차적 필터링 작업을 하는 눈이 바로 무의식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 무의식이 자기 내면에서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인간사의 모든 오해와 갈등은 여기서 일어난다. 제 아무리 서로를 이해하려고 애를 써 봐도 또 이해를 시키려고 노력을 해봐도 이 벽이 허물어지지 않는 한, 참이 참으로 보이질 않으니 소통이 되질 않는 것이다. 마치 적녹색맹인(人)이 푸른 고추를 붉은 고추라고 강변하듯이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세계가 동물의 세계보다 더 심각한 모순과 오해와 갈등 그리고 죽고 죽이는 전쟁 속에 빠지는 것도 바로 각인이 자신의 무의식의 필터를 통해서 인식하는 왜곡된 이 상(想)을 실상(實像)으로 알고 행동으로 옮기는 탓이다. 상(想)을 쫒아 다니면 십인십색 일인백색의 세상을 만들어 “참”에서부터 자꾸 멀어진다.
소통이 원활해지려면 사람이 저마다 지니고 있는 이 무의식의 벽을 깨트려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벽이 두꺼운 사람은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어떠한 빛도 투과시키질 못한다. 심안에 빛이 들지 않으니 완전색맹인(人)처럼 제 멋대로의 산을 산이라고 떠든다. 일관성도 없다. 깜깜한 속에 있으니 본디 밝음이 그런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무의식의 벽을 깨트리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건 오로지 각인이 참을 보려는 노력을 할 때만 가능하다. “예면 예, 아니면 아니요” 할 때만 가능하다. 형(形)이 상(象)이 되고, 상(象)이 다시 상(想)되는 이 과정을 이해하고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거짓된 상(想)을 부셔나가는 것이다. 이는 일찍이 임재가 살불살조(殺佛殺祖)하라고 가르친 것과 하나 다르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상(想)이 일어나는 틀은 그대로 둔 채 상(想)만 부셔나간다고 해서 참에 이를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건 불가능하다. 참을 만나려면 자신의 의식으로 무의식 세계를 여행해서 무의식이 생기게 된 근원을 찾아내어서 그걸 없애버려야 한다. 말하자면 2차적 필터링 작업을 하는 틀이 자기 내면에 존재함을 이해하고 왜 그게 생겼는지 자신의 과거를 살펴서 필터 자체를 자기 손으로 제거해야 바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의식으로 무의식의 발생 원인을 알게 되면 참 자신을 만나게 되고 자기 스스로가 참 자기를 버렸음을 깨닫고 자기를 용서하고 자기와 화해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이 일체가 되는 참 자신을 만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걸 통해서 영혼이 정화(이차적 필터링 제거)된다. 그 경지에 이르게 되면 이제까지는 느껴보지 못한 전혀 다른 차원의 기쁨이 일어난다.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업장(業障=트라우마)이 자의식에 의해 소멸되어 본디 맑고 밝음인 진아(眞我)가 드러나니 비로소 영혼이 맑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어 기쁨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것이다. 물세례가 아닌 성령세례를 받아야 영혼이 구원받는 경지에 이른다는 말이나 깨달아야 해탈에 이른다는 말을 상기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아무튼 이 2차적 필터링 역할을 하는 틀을 깨버리고 나면 보이는 그대로가 산이 되고, 문장이 되고, 글이 되고, 수필이 되고, 문학이 된다.
3) 사심 없는 관조
최근에 필자는 “미란 무엇을 말함인가”에 대한 사유를 하면서 칸트가 말한 “사심 없는 관조”라는 말에 주목하게 되었는데, 문학이란 관조에서 시작되는 영역이고, 특히 수필은 자기가 체험한 경험과 그에 대해 깊이 사유한 세계를 드러내는 특질을 여느 문학 장르보다 강하게 지니는 때문이다.
칸트가 말한 “사심 없는 관조”란 무엇일까? “사심 없는 관조”가 있다면 상대되는 개념인 “사심 있는 관조”도 있을 것이다. 칸트가 발표한 『순수이성 비판』, 『실천이성 비판』에 연관 지어서 생각해 볼 때 “사심 있는 관조”란 관념의 세계일뿐인 진리의 영역에 절대 불변하는 진리(神)가 실존한다고 믿고, 삶의 존재 영역인 실천영역에서 그걸 따르는 것을 선(善)이라 규정하고 있는 상태에서의 사유방식이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라보는 사물과 현상에 대해서 사유할 때, 거기에 이성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한하는 종교나 도덕이나 윤리가 영향을 미치면 그 순간부터 우리의 인식(認識)은 오류를 일으켜서 “참”의 모습은 일그러지고 그를 추종하는 선은 선이 아닌 것이 되어 그 본연의 아름다움도 잃게 된다는 것이다.
4) 소결
결국 문학예술의 세계에서 우리가 궁극의 미를 추구한다고 할 때, 그 일은 작가의 내면세계에서 비롯되는 무의식의 작용이나 외부세계에서 강요되는 사심의 개입이 없는,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정신활동의 자유로운 관조를 통하여 불변의 “참(眞)”을 드러내는데 있고, 발견된 “참” 그게 불변의 것이기에 만인이 공감하는 선(善)이 되고, 선(善)이기에 저절로 미를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가 마땅히 해야 할 급선무는 “모든 영역에서 총체적으로 참을 보는 일”이 될 것이고, 미(美)의 총합된 모습이라 할 수 있는 “진선미”를 드러내는 일에 작가가 지닌 모든 ‘정열적인 감정 에너지’를 바치는 일이 곧 문학예술 활동이라는 것이다.
3. <<월평>>
<<대구문학>> 제 141호에는 총 10편의 수필이 실렸다. 양적으로 지난 호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수필작가님들의 분발이 요망된다. 이번 월평에서 미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철학적인 개념을 도입해 보는 것은 글에 담겨있는 작가의 인식세계가 독자들에게 사고의 폭을 넓혀주되 더 넓고 깊게 해주는 것이 되어야 독서하는 기쁨을 주는 훌륭한 작품이 되는 때문이다. 이제까지는 그 누구도 말한 바가 없는 새로운 발견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글, 지향하고자 하는 선(善)에 사심이 개입되지 않아 저절로 그 태도를 따르고 싶어지는 글, 그래서 그 작품 전체가 아름다움으로 감싸여져서 읽고 나서도 다시 읽고 싶어지는 글이 많이 발표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두 편을 골라서 지금까지 설명한 “진선미적 접근방법”으로 재음미 해본다.
1) <스킨스쿠버 다이빙>
이 작품은 갱년기를 맞아 해외여행을 가서 스킨 스쿠버를 해본 경험담에 불과한 신변잡사이다. 수필문학작품을 이렇게 1차적인 인식의 틀로서만 읽으면 문학적인 안목이 없는 독자가 된다. 작가는 이 단순한 경험적 사실로서 작가만의 심안에 비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음에 주목해야 된다. 그 2차적인 눈에 비친 세계를 읽어 낼 능력이 곧 심미안인데 심미안이 있는 독자라야 이 작품에서 제대로 된 기쁨을 얻어갈 수가 있다. <스킨스쿠버 다이빙>에서 작가가 심안으로 본 진선미의 세계는 무엇일까?
진(眞)의 세계 : 인간은 누구나 과거의 트라우마에 갇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굴레 짓고 제한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어릴 때 친구들과 물놀이 하다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기억이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을 물에 대한 두려움으로 소심하게 살았다는 개인사로 묘사되어 있지만, 그 경험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되어 우리의 무의식 세계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 있는 트라우마는 평생 “나쁜 액”으로 우리를 지배하게 되니 그걸 깨부수라는 소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좋지 않은 경험이 남긴 인식의 오류에 대한 성찰로 순수이성비판에 해당되는데 작품의 기본 틀로 이를 깔아 놓음으로서 “무의식에 지배당하는 인간의 삶”이라는 “참”을 널리 드러내어 밝히는 미적 가치를 얻어내고 있다.
선(善)의 세계 :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해 볼까? 하지말까? 의 갈등을 통해 우리의 실천이성은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경험에서 지득된 인식으로 인해 “무섭다” “두렵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릇된 관념이 형성되어 스킨스쿠버 다이빙 체험을 거부하게 만드는 이성작용이 하나 있고 “지금 안 해보면 언제 해볼래?” “바다 속에는 아름다운 산호도 있고 니모라는 예쁜 물고기도 있다”는 주위의 권유와 유혹에 떠밀려가는 “그냥 확 저질러 버려” 하는 이성작용도 있다. 실천이성은 순수이성이 남긴 오류로 인해 지금까지 작가나 우리에게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요구를 더 많이 해 왔을 것이다. 단 한 번의 경험적 위기가 우리 삶을 그렇게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이 또한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의 경험으로 확장된다. 작품에서는 자의 반 타의 반이지만 스킨스쿠버 해보는 쪽으로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확 물속으로 떠밀려 들어간다. 해보지 않은 쪽을 선택했다면 작품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의식으로서 무의식의 세계를 청소하는 작업에 착수한 때문에 미적가치를 얻게 된 것이다.
미(美)의 세계 ; 그 이후에 작가가 만난 세상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의 세상을 만난다. 진과 선이 드러내 보이는 미적 완성이다. 그걸 작가는
“감았던 눈을 뜨자 수많은 고기 때들이 파도에 맞춰서 춤을 추고 있었다. 환영이라도 하듯 형형색색의 고기들이 나를 에워싸고 지느러미를 살랑 거렸다, 축제에 초대받은 느낌이었다. 산호초도 눈부시게 빛났다. 아름답고 황홀한 풍경이었다”
로 표현하면서 지금까지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난 아름다움을 그려내면서 독자들에게도 스스로를 가둔 트라우마를 극복해 보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자신을 가둔 틀을 벗어 던져버렸으니 얼마나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을까. 수필문학작품으로서 거의 완벽하게 성공한 작품이라고 평한다.
2) <통나무 의자>
산행 중에 통나무 쉼터에서 만난 월남전에서 두 다리를 잃은 상이용사를 두고 쓴 작품이다. 자칫 값싼 동정이나 슬픔으로 기술되기 쉬운 이 소재가 어떻게 가슴 찡한 아름다움을 얻어 가는지 살펴보자.
진(眞)의 세계 : 두 다리를 잃으면 정작 본인은 물론이요 세상 모든 이들의 시각도 비정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게 참의 세계처럼 보이지만 깊이 사유하면 참의 세계가 아니다. 작중 인물도 참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 수없는 낮과 밤을 “울분, 화, 스트레스, 수치심 같은 마음의 독소”를 품고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걸 어떻게 극복하고 일어났을까? 작중 주인공이 일어나지 못했다면 이 소재는 작품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모든 존재는 역할로서 존재감을 얻고, 남을 이해하고 사랑함으로서 자기 존재의 의의를 확인하게 되어 삶의 기쁨을 얻게 된다는 “참”을 작품의 밑바탕으로 삼고 있어 범인이 흉내 낼 수 없는 미적 가치를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작중 인물은 두 다리가 없는 장애자이지만 양노원이나 요양원을 찾아다니며 하모니카를 가르치고 그 아름다운 음률을 이웃들에게 들려주는 일을 통하여 존재의 이유와 기쁨을 확인한다. 무심코 앉아서 등산객들의 피곤한 다리를 쉬게 하는 굵은 몸통으로 된 통나무 의자가 작중 인물 위로 클로즈업 되면서 처연한 아픔이 승화되어 가슴 뭉클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한과 증오 속에서 불행으로 마감해야 할 삶이 참이 아니고 그 불행을 딛고 새롭게 일어서야 할 삶이 참이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이를 두고 애국심 운운하거나 국가와 민족을 들먹이면 “사심 있는 관조”가 되어 참에 이르지 못하는 글이 되고 만다.
선(善)의 세계 : 다리 없는 아저씨가 몸통만 보이는 통나무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는 다리 갖춘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지나온 삶의 이야기는 그 자체가 우리 모두에게 또 다른 위로가 되는 역설과 반전을 불러온다. 작가는 이 장면에서 우리의 내면 의식을 지배하는 사유의 대전환(실천이성 비판)을 기가 막히는 솜씨로 숨겨서 요구하고 있다. 그로인해 독자로 하여금 각자 그들의 처지를 돌아보게 하고 부정적인 의식을 긍정적인 의식으로 전환하게 만들며 커다란 감동과 기쁨을 얻어가게 해준다.
미(美)의 세계 : 작품 속에 올려놓은 시(詩)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눈물 나게 아름답다.
산 초입의 통나무 의자
뿌리조차 잘린 저것을 나무라고
부를 수 있을까
- (중략) -
그늘을 키우던 가지 흩어지고
욱신거리는 뼈마디 내어주며
좁아지고 말라가는 어깨로
그는 죽어서 또 이곳에 살아 있네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작가가 쓴 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진선미가 모두 갖추어져서 거기서 저절로 발현되는 아름다움을 획득한 훌륭한 작품이라 평한다.
4. 마치는 말
우리가 글을 쓰고 저작을 하는 것은 정신생명의 불후를 추구하는 때문이다. 유협이 문심조룡(文心彫龍)에서 경서에 대해 이르기를 “빼어난 지성과 탁월한 재기를 타고난 성인이 우주 만물의 현상을 관찰하여 그 이치를 깨닫고 이를 전하기 위해서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 경서임으로 비록 성인은 돌아 가셨지만 경서에 담긴 그 마음만은 영원하다.”고 했다. 문학 역시 불후가 되려면 경서처럼 바른 마음이 바르게 전해지도록 애를 써야 하는데 "바른 깨달음과 바른 소통" 이게 어느 하나라도 결여되면 사문(邪文)이 될 위험이 높다. 평론가들이 문학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하니 글 쓰는 이들이 국어사전에 있는 아름다운 단어란 단어를 다 찾아서 문장에 집어넣어 미문으로 만드는 경향도 있는데 그건 문장이 아니라 까마귀가 온갖 새들의 깃털을 주어 와서 제 몸에다 붙이고 자신이 가장 아름다운 새라고 뽐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세상에 “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던가? 바르게 표현하고 바르게 전하려는 노력을 쉼 없이 행할 때 비로소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할 만한 한 줄의 아름다운 문장이 얻어지는 것이다.
“시간은 속절없이 저물고 기억은 따스하고 추억은 가뭇없이 사라진다.”
<통나무 의자> 속의 문장이다. 작가된 이들은 촌음을 아껴서 오직 자신을 정진 시키는데 힘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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