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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먼, 아름다운 세상을 본다
전민호 시집, {아득하다, 그대 눈썹}의 시세계
권선옥(시인)
전민호 시인을 만난 것은 30년 전의 일이다. 내가 외처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논산에 다시 돌아와 살기 시작할 때였다. 시골 생활이라는 게 심심하기 마련이어서 나는 시를 쓰는 사람들을 수소문하여 놀뫼문학회를 창립하였다. 우리는 사흘이 멀다 하고 모여서 늦은 밤까지 문학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러던 중에 어느 날, 이미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던 김명환 시인이 논산시청에 시를 좋아하는 청년이 있다고 하여 데리고 나온 사람이 전민호 시인이었다.
그 역시 서울에서의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상당히 핸섬한 용모에 감성이 예민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도 곧 우리들처럼 문학에 대한 불길이 타올라 이런저런 일에 동참하였다. 동인지를 낼 때마다 빠지지 않고 작품을 냈고, 문학단체의 사무도 맡아 일 처리도 깔끔하게 해냈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어느 신문의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최종심에 오르기도 했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어엿한 시인이 곧 탄생할 것이란 기대를 했다. 그랬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시를 멀리 하는 기색이 보였다. 시장 선거에 출마하신 아버지를 도와 당선시키느라 그러는 것 같았다.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그를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뒤로 그는 직장에 전념하였다. 공무원으로서의 그는 매우 유능한 사람이었다. 기발한 생각으로 많은 일을 하는 그를 지켜보면서 그것 또한 그럴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근무하는 곳마다 새로워지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그는 논산시청의 국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나태주 시인의 도움으로 유수 문학지의 추천을 거쳐 시인이 되었다.
시인은 무엇보다 한 사람으로서 온전히 설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를 위해서 현실을 외면하는 일은 썩 바람직한 처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동안에 그가 시를 쓰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었는데, 다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전민호 시인이 주어진 일을 미루고 시에 전념하였더라면 진즉에 등단하여 많은 작품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그의 행적에 대하여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 그가 시집 원고를 보여 주었다. 그간 겉으로 드러나게 시작 활동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속으로는 시를 아주 멀리 하지 않았다는 증표이다. 나는 매우 기쁜 마음으로 그의 시를 샅샅이 살펴보고 그 소회를 적어보기로 하였다.
1. 적송처럼 멋지게 휘어져야지
시인마다 그가 즐겨 찾는 시의 세계가 있고 접근 방법도 다르다. 역시 전민호의 시를 읽으면서도 몇 가지의 특성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육친에 대한 그리움을 통한 가계의식(家系意識)이다.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시 가운데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작품이 「쑥」이다.
그저 쉬고 싶은 날
뒷쭉재에 계신 엄마 만나러
그림자 업혀 산소에 간다
잔디 속에 엉켜 있는 솔잎을 긁어
떨구었을 소나무 아래에 붙여 놓는다
빗돌을 만지고 상석을 닦고
이런저런 사연 일러바치느라
오래 절을 하다가
엄마 무덤에 무더기로 난 쑥을 뜯는다
돌아와 한 줌은 쑥국을 끓이고
한 움큼은 청주로 훈증하여 말린다
지쳐 쉬고 싶은 날
쑥차를 끓여 마시는데
저기서,
아부지 손잡고 엄마가 오신다
-「쑥」 전체
세상의 사람들은 생활하다보면 특별한 난관에 봉착하지 않더라도 힘에 겨울 때가 있다. 세상사에 지쳐 자신의 힘만으로는 헤어나기 힘든 상황, 누군가에게서 위안을 받아 생활의 동력을 회복하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가장 일반적인 양상은 종교적인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민호 시인의 선택은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 <뒷쭉재>에 묻혀 있는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살아계실 때에 그랬던 것처럼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시인은 어머니가 묻혀 있는 <뒷쭉재>로 향한다. 저승의 어머니는 그림자로 시인에게 다가와서 시인을 인도한다.
<뒷쭉재>에서 시인은 잔디 사이에 흩어져 있는 솔잎을 긁어 소나무에 붙여 놓는 행위를 통하여 어머니와 상봉한다. 시인은 생시의 어머니를 만난 듯이, 어머니의 육신인 양 빗돌을 어루만지고 어머니의 몸을 닦아 드리듯이 상석을 닦는다. 그리고 자신이 처해 있는 여러 일들을 일러바치고 오래 절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어머니로부터 위안을 받고 생의 원기를 회복하게 된다. <뒷쭉재>는 이승의 시인과 저승의 어머니가 재회하는 공간이자 시인이 상처를 회복하는 치유의 공간이다.
명계에 계시는 어머니와의 재회를 통해 상처를 극복한 시인은 어머니의 무덤에 무더기로 난 쑥을 뜯어 가지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이 쑥은 시인이 또다시 지쳐 있을 때에 쑥차를 끓여 마심으로써 어머니(부모)와 재회하게 하는 매개체가 된다.
담장 너머
자귀꽃처럼 서 계시던 엄마
-「자귀꽃」 일부
수년 전
고을을 살피실 제
심고 가신 아버지가
꽃으로 오셨다
-「어느 봄날」 일부
자귀꽃을 보면서 자귀꽃 같았던 어머니를 떠올리고, 아버지가 공직생활 중에 심으신 벚꽃을 보면서 아버지를 만난다. 시인은 생전의 부모와 관련이 있는 사물을 마주할 때뿐만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부모(혈육)와 재회한다. 이렇듯 빈번하게 부모와 조우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아래의 시에 극명하게 드러난다.
에미야
젖은 옷 입지 마라
그래야 누명 안 쓰고 산다
에미야
부뚜막은 물기가 없어야 한다
그래야 빚 안 지고 산다
에미야
행주는 꼭 짜서 말리거라
그래야 애비가
술에 젖어 들어오지 않는다
-「말씀」 전체
니 손은 털 손이고
내 손은 약손,
어릴 적 아픈 배를 쓸어주던 어머니
아프다는
너의 배를 쓸어주며 왼다
내 손이 약손이다
내 손이 약손이다
-「약손」 전체
「말씀」에서의 어머니는 노심초사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로서의 모습이다. 살아생전의 어머니는 혹여나 자식들이 누명을 쓰거나 빚을 질까봐 염려하셨고, 아들이 술에 젖을까봐 걱정하셨다. 이러한 염려는 비단 시인 어머니만의 모습이 아니고 일반적인 어머니의 모습이랄 수 있다. 그럼에도 시인은 어머니의 염려를 엄중하게 받아들여서 생생한 <말씀>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 <말씀>은 어머니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친어머니가 하신 <말씀>이고, 어머니의 시어머니의 <말씀>이기도 하다. 이 <말씀>은 그의 집안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말씀>은 시인의 삶에서 푯대가 되고, 동력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약손」 역시 이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어릴 적의 시인에게 어머니의 손이 신통력을 발휘하는 <약손>이었던 것처럼 시인의 손은 다시 그의 아이에게 <약손>인 것이다. 시인의 유년을 적셨던 토광 냄새는 그대로 셋째 딸이 이어받고 있다(「토광」). 「겨울냉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냉면을 드시다가 헛구역질을 하셨을 때에 ‘지은이’가 <할아버지 저두요/ 가끔 냉면 먹을 때 헛구역질이 나요>라고 한 말은 할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서 임기응변으로 없는 말을 지어서 한 말이 아니다. 시인도 냉면을 먹다가 헛구역질을 했던 경험이 있을 테고, 그 생리 현상은 ‘지은이’에게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목젖 근처를 매운바람이 지나갔다>고 술회하는 것이다.
전민호는 시에서 가족들이 하는 여러 행동들을 기술하고 있다. 다양한 행동들이 보이는 공통성은 그것이 한 개인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을 가족들이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대로 전해 오는 <말씀>을 통해서, 때로는 토광 냄새나 헛구역질을 통해서 가족이 가지는 끈끈한 혈연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행동들은 의식을 형성하여 그의 혈관 속에 녹아 흘러 그의 가계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것으로 그의 가족사를 관통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깊이 생각하게 한다. 가계란 피를 나눈 사람들이 형성하고 있는 것이어서 의식도 공유한다는 것을, 그것의 소중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의 형성 배경은 그의 일족들이 가지고 있는 명문가로서의 자긍심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러한 자긍심은 그의 의식 근저에 근착(根着)하고 있다. 곶감을 먹다가 씨가 여러 개가 나왔을 때에 <문득 고목일수록/ 씨가 많다던 할머니 생각>을 하기도 하고, <열리지 않는 은행나무 밑둥>에 톱질을 하시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어둔 밤 산행>을 하다가 <벼랑 끝 위태로운 사랑>(「알겠습디다」)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청빈하게/ 늘 겸손하게/ 뭐든 당당해야지// 벽송사 저 적송처럼/ 멋지게 휘어져야지>(「적송」)라고 다짐한다.
2. 하나도 가는 줄기 꺾지 않았네
하나의 사물을 두고서 느끼는 감정은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다. 우리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귀를 통해서 마음으로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눈을 통해서도 마음으로 본다. 그러므로 ‘글을 잘 쓰기도 어렵지만, 남의 글을 잘 읽기는 더욱 어렵다.“는 옛 말은 예삿말이 아니다. 우리 생활 속의 사소한 일도 그럴진대 자연을 보는 데에 있어서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눈 내린 아침은
새들도 좋은가 보다
논 건너 대숲에서 새소리 요란하다
그렇구나
나무들도 좋아서
눈을 털지 않는구나
-「눈 내린 아침」 전체
하나의 사물을 멀리서 관조하는 것과 그 사물이 나의 생활 속에 밀접하게 존재하며 작용할 때는 그에 대한 인식이 전혀 다르다. 폭설이 내렸을 때에 세상은 교통 대란이 벌어지기도 하여 눈은 아름다운 결정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이 된다. 마찬가지로 설해목에게도 눈은 폭력적인 가해자일 뿐이다.
시인은 눈이 내린 아침에 새들이 대숲에서 요란하게 지저귀는 것이나 나무 위에 쌓인 눈을 나무가 좋아서 눈을 털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을 자연에 대한 몰이해로 타박할 수 없다. 시인은 여기서 눈과 새가, 눈과 나무가 대립적인 관계에 있지 아니하고 서로 화해하여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자기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천하 만물이 공생공존하여야 한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팍팍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그 개선에 나서는 움직임은 없이 더욱 가중화, 가속화하는 행위를 예사로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세태에 대해 온건하게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저만치 수루수루
풀잎 흔들려
가까이 다가가자
참새 한 무리
풀씨 밥 쪼아 먹고
날아가거니
어쩌랴 강아지풀
풀섶을 보매
하나도 가는 줄기
꺾지 않았네
-「어쩌랴」 전체
대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절제된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 「어쩌랴」는 전민호의 시 가운데 단연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가 두드러져 보인다는 말은 문학적인 성취에서도 그렇지만 시를 통해서 아름다운 하나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풀잎이 수루수루 흔들리는 것을 보고 시인이 다가가는 것, 참새들이 먹이를 두고서도 시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날아가는 것, 참새들이 강아지풀 풀씨를 쪼아 먹었는데도 가는 줄기 하나도 꺾지 않은 것, 이 모두에서 지극히 아름다운 삶의 질서를 통한 조화를 엿볼 수 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세계를 어떻게 설정하겠는가.
이런 계열의 작품 가운데에서 또 하나의 수작을 꼽는다면 「득음」을 들 수 있다.
비바람
천둥소리에
휘청이는
대숲 속을
새소리가 관통한다
뒷곁에서
웃는지 우는지
절창이다
-「득음」의 일부
비바람에 천둥소리가 요란했던 시간은 아마도 밤이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지축을 흔들던 천둥소리가 마침내 멎자 이윽고 새들은 노래를 시작한다. 그것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그것의 정체가 웃음인지 울음인지를 구별하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오직 <절창>일 뿐이다.
이는 시인의 자연에 대한 찬탄이며 경외감의 표현이다. 오랜 통찰과 깊은 사유를 통해서만이 가지게 되는 깨달음이다. 자연의 섭리보다 더 절묘한 것이 어디 있는가. 다만 우리가 그를 함부로 대하고 그의 위대함을 평가절하하고 있을 뿐이다. 그로 인한 많은 부작용을 겪으면서도 멈출 줄 모르는 인간의 폭주에 대하여 시인은 깊은 성찰과 외경을 촉구하고 있다.
3. 가슴에 박힌 대못쯤이야
이쯤에서 나는 전민호의 시에 드러난 결여에 대하여 주목하고자 한다. 결여는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인간에게 가장 극심하게 작용하는 문제이다. 인간은 결여를 느낌으로써 그를 타개하고자 하는 노력을 했고, 그것이 발전의 동력이 되었다.
한 개인에 있어서도 결여의식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난다.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서 시인은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흔들리는
불을 켜고
네게로 간다
문 앞에서
너를 불러
웃어 주고는
두근두근
불을 끄고
집으로 온다
- 「어린 사랑」 전체
먼저 시인은 겸허한 자세로 대상에 접근하고 있다. 대상을 인식하고 그를 찾아가는 첫걸음이 설렘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그에게로 가는 <불>이 흔들리고 있다. 여기서 <흔들리는> 것은 의지나 확신이 부족한 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확신이 충일하기 때문에 오는 흔들림이다. 그것은 <두근두근/ 불을 끄고/ 집으로 돌아온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상대에게 특정 행위를 하지 않고 다만 웃어주는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결여가 극복된다는 확신이 바탕에 깔려 있다.
전민호 시인의 시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언어를 극도로 절제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 시도 그러한 예가 될 것이다. 그는 상당히 예민한 감성을 빈번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감정에 탐닉하지 않고 감정의 노출을 지극히 절제하고 있다. 이 시를 읽으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그 여백에서 무한히 많은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시 또한 <웃어 주고는>이라는 말에서 일일이 열거하지 않은 무수히 많은 언행과 인식을 읽을 수 있다.
못만 못하랴
못 하나가 천 근을 버틴다는데
가슴에 박힌 대못쯤이야
녹슬 때까지
견디는 거다
이기는 거다
- 「못」 전체
부조리한 상황에서 그가 그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선택하는 것이 묵묵히 인고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작은 <못 하나가 천 근을 버틴다는데>라는 진술은 그의 의식이 매우 견고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나는 말이다. 못은 흩어져 있던 것들을 하나로 모아 건축자가 의도하는 건물을 형성하게 하고, 모진 비바람과 세월 속에서도 그 원형을 오래오래 지탱해 준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도 몇 개의 못이 필요하다. 가치관이 급변하여 어제의 윤리와 도덕이 고리타분한 구사상으로 매도, 질타당하는 세태에서는 더욱 그렇다. 일그러진 것들을 회복하여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못이 필요한 시대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못 하나가 천 근을 버틴다는> 진술에는 아무리 가치가 전도된 세상이라 할지라도 그에 영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나 <못>은 언제나 박혀야 할 곳에 박혀서 긍정적 힘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때로 못이 가슴에 박히기도 한다. 그 못은 그리 쉽게 제거되지 않는다. 때로 그 못은 영원히 제거되지 않을 것처럼 깊이 박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은 못을 빼내겠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그 못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조급해 하지 않고 묵묵히 견딘다면 언젠가는 녹이 슬어 빠지고 말리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속/ 썩으면/ 진다고// 근심걱정/ 내려놓으니// 아침/ 새소리가// 들린다>(「해탈」)는 시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신념을 견지하고 살아가는 그는 마침내 인고의 시간을 극복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 안분지족의 경지에서만 향유할 수 있는 열락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리라.
그렇다. 그는 분명 거기에 도달할 것이다. 지금 그는 멀리 그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널,
사랑하니
내 안에 꽃이 펴
동백보다
붉은
꽃
- 「동백」 전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