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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11:1-4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이 시의 표제는 곧 본 시의 요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다른 사람들로 하나님을 찬송토록 자신을 실예로 찬송 방법을 말합니다.
또 하나님이 옛 성도들에게 베푸셨던 은혜와 현재 베푸시는 은혜를 간략히 말합니다.
이 시는 알파벳 순서대로 구성되어 있는데 매 구절마다 두 문자씩 들어 있습니다.
1절 상반절은 א (알렙)으로 시작하고, 하반절은 ב (베트)로 시작합니다.
끝 두 구절만 완전히 반구로 구분하면 이는 잘못이요, 부주의로 된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이 두 구절을 세 구절로 만든다면 잘 어울리는 문장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필사자는 선지자가 구분한 대로 따르지 않는 과오를 범한 것입니다.
1. 본문 1절은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여호와를 찬송하라 - 칼빈)” 입니다.
의무 수행을 가르쳐 주는 최상의 효과적인 방법은 모범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자신의 예로 다른 사람들로 하나님 찬송으로 인도해 줍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려는 그의 결심은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그 하나는, 자기의 온 마음을 다해 거짓 없이 하나님을 찬송하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성도들의 회중에서 공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매우 적절하게 마음의 찬송으로 시작합니다.
아무도 찬송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 목소리를 높여 찬송을 하는 것이나 외식하는 입술로 찬송하는 것보다는 은밀하게 찬송하는 것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감사하는 감정을 은밀하게 쏟아놓는 사람은 또한 큰소리로 찬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은 자신이 응당 받으셔야 할 영광을 온전히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는 온 마음과 바르고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것을 결심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감당 할 모든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결심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냉담하고도 이중적인 마음을 가졌거나 또는 교활하고 불성실하게 입술만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위선자들과 같이 되지 않을 것을 가리킵니다.
매우 바람직한 완벽한 마음 갖기 바라는 소망을 이루지 못한다고 해서 실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입니다.
시편 111 편
아무리 우리의 찬송이 미흡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이 헌신의 행위를 거짓없이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분명코 우리의 찬송을 받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선지자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바라고 있는 선지자의 또 하나의 결심을 대합니다.
히브리어 סוד (쏘드)란 말이 사적인 회중을 가리키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선지자가 이 구절에서는 이 말을 의미가 같은 두 단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에 대해 보다 세련된 견해를 취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가 바라는 대로 해석해도 좋을 것입니다.
선지자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를 말한 이유는 거룩한 회중이 소집된 목적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 찬송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시편 65편 1절 말씀과도 잘 어울립니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
2.본문 2절은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도다”입니다
선지자는 이제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한 풍성한 이유를 우리에게 일러 줍니다.
이 이유들은 하나님의 사역에 의해 주어지는 것으로 지금 선지자는 일반적으로 그 사역에 관해 언급하며 교회통치와 관련해서 보다 명확히 하나님의 사역을 규정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의 위대성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생각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아는 자들이 적습니다.
이런 무식은 사람들의 무관심과 배은망덕 때문이요, 상대적으로 극소수만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에서 나타난 크신 지혜와 인자하심과 공의와 능력을 깨닫습니다.
주석가들은 하반절에 대한 해석에서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저희의 모든 즐거움을 구하는도다’ 라고 번역합니다.
사실 히브리어의 חפץ (하페츠)란 말은 실제로 ‘좋은 쾌락’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이 말씀을 너무 억지로 해석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부사로 ‘사랑하는’ 또 ‘바라는’ 이란 개념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낫습니다.
‘구한다’는 분사는 히브리어 동사 דרש (다라쉬)를 따른 것으로 ‘기쁨으로 구하다’ 란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여호와의 사역이 여기서 דרושים (데루쉼; 깨닫다 또는 발견하다) 라고 불려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11 편
그러므로 이사야에서 “나는 ....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사65:1) 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선지자가 의도하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역을 연구하는 자가 심히 적다는 점에서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빛의 홍수 속에서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가르쳐 줍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역의 탁월하심이 이를 바라는 모든 자들에게 알려졌다고 말할 때고의로 눈을 가리거나 하나님의 사역에 주어진 빛을 악의를 품고 멸시하는 마음으로 꺼 버리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것을 알지 못할 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지식에 도달함으로 획득한 의미를 잘 간직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땅에 거주하는 한 그 이해력이 우둔하고 나약해져서 그 신비를 간파하거나 하나님의 사역의 높으심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 공평, 공의, 능력, 긍휼의 충만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그들에게 부여된 만큼은 사역에 근거한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사역에 관한 연구를 통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경외심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함으로 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불경건하여 비난하는 유기자들 생각엔 천박하게 보일 것입니다.
칠십인역은 이 구절을 ‘그의 모든 뜻을 다해 구하는도다’ 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철학적인 기교를 부려서 묻기를 ‘최소한 하나님 안에 어떻게 의지의 복합성이 있을 수 있는가? 라고 했습니다.
또 참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생각은 하나님께서 그의 율법 가운데서 그의 뜻을 나타내 주시기는 했지만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인생들의 행위의 놀라운 경영을 인도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은밀한 뜻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 교훈은 이 구절의 해석과는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3. 본문 3-4절은 “(3) 그 행사가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 의가 영원히 있도다
(4) 그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도다”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존귀하고”를 ‘찬란하고’ 로 번역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모든 행사가 영광스러운 엄위하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111 편
하반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이 아름다움과 존귀하심을 구성하고 있는지를 보다 자세하게 ‘하나님의 의’가 어느 곳에서든지 현저하게 두드러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행사 가운데 나타난 능력과 주권을 공포로 우리 마음이 채워지듯 그렇게 채우시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공의를 나타내시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사와 방법에 대한 이 찬송은 악인들의 소동이나 비방과는 대조 됩니다.
악인들은 자기들의 능력을 최대한 확대시켜 하나님의 행사의 영광을 손상시키고 흉측한 것으로 만들려고 사악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신 놀라운 사역들을 더 자세히 찬송합니다(4-).
“그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으니” 란 기억될만한 가치가 있는 일, 또는 영원토록 계속 명성을 떨칠 만한 일을 행하셨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선지자는 위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를 심사숙고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제는 거의 같은 말을 사용해서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행사와 원칙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찬송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보존하시고 지키실 때 나타내신 공의는 우리들을 향해 간직하고 계시는 그의 과분한 긍휼에서 흘러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11 편
시111:5-8 여호와께서 자기를
시인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자세히 제시합니다.
(1)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에게 광야에서 양식을 주셨으므로(5절상반), 우리는 그가 구원 계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는 줄 알게 됩니다.
(2)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에게 열방을 기업으로 주신 사실로 보아(6절), 우리는 그 가 진실되이 그의 약속을 지키시며 영원토록 공의에 의하여 그 원수는 멸하시고 그 백성은 구원하시는 줄 알게 됩니다(7, 8절)
1. 본문 5-6절은 “(5)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6) 저가 자기 백성에게 열방을 기업으로 주사 그 행사의 능을 저희에게 보이셨도다” 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의 거울이기에 선지자가 여기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 관해 언급한 것은 교회에 해당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를 일반적으로 취급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특별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하나님이 자기백성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그들의 모든 부족한 것들을 공급해 주기 위해 자기 자신을 풍성한 양식으로 삼으시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양식” 으로 번역한 טרף (테레프)는 종종 ‘먹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단어를 ‘고기’ 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식”으로 번역하며, 그 의미는 잠언 30장 8절과 31장 15절을 근거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했던 모든 것을 주셨다는 뜻으로 봅니다.
양식이라고 볼 때에는 그 분량이 크고 거저 주신 것이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부유한 것은 그들이 산업을 일으킨 결과가 아니라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이 자신의 복으로 각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하반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보살피심과 자비하심에 대한 이유를 하나님은 자기 언약의 가치와 파괴할 수 없는 성격을 효과있게 보여주시기 바라셨기 때문으로 밝힙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점은 하나님이 예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토록 큰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은 자신의 자비로우신 언약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긍휼도 우리를 그의 가족으로 택해 주신 결과였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데 지치는 일이 없기에 선지자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기억이 결코 지워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시편 111 편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은혜를 덧입혀 주시므로 우리의 믿음도 호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실패가 없습니다. 그것은 생명과 죽음을 초월해서 일어납니다.
6절은 해석상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열방을 기업으로 주실 때 그들에게 자신의 행사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셨던 의도가 첨가됩니다.
선지자는 실제로 “보이셨도다” 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나 참된 전시를 의미합니다.
거룩한 땅의 소유는 단순히 인간적인 힘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즉 많은 이적적인 행사를 통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실상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자신이 부여하신 무엇과도 비교가 안 되는 능력을 밝히 입증하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하늘의 도움을 받지 않았더라면 결코 쫓아내지 못했을 심히 많은 원수의 나라들과 싸우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2. 본문 7-8절은 “(7) 그 손의 행사는 진실과 공의며 그 법도는 다 확실하니
(8) 영원 무궁히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입니다.
상반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이 그의 행사 가운데서 신실하시고 의로운 분으로 알려졌음을 말하고, 곧 이어서 율법의 교훈에 들어있는 것과 동일한 진리와 정직을 말합니다.
이 말씀의 요점은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나 자신이 의로우시고 신실하심을 보여주시기 에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행사는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옛 백성들의 구속에서 이 사실에 대한 기억할만한 증거를 가집니다.
우리는 “행사”라는 말에서 교회의 끊임없는 통치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자신의 의와 진실을 보여주고, 같은 일을 계속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직업적 경우보다 실제에서 의 행함을 더 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율법의 교리는 백성들의 생명과 안전 그 자체였기에 선지자는 매우 적절하게 몇 가지의 표현을 하반에 포함시켜 놓습니다.
“그 법도는 다 확실하니 영원 무궁히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엄격한 진실과 정의의 법에 맞도록 완전하게 들어 올리운 바로다 -칼빈).
또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백성들을 보이지 않는 율법의 사슬로 자신에게 묶어 두시지 않았었다면 그들의 구속의 열매는 매우 적었을 것이요, 심지어는 그들에게서 은혜가 곧 상실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내용이 이 구절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항을 입증함에 있어서 이 주제가 생명을 부여해 주는 방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편 111 편
시111:9-10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구속하여 주신 사실을 보아(9절상반), 우리는 그의 구원 계약은 영원한 줄 알게 됩니다(9절하반).
이 시인은 이렇게 과거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구원행사를 보아 그와 같은 구원행사가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것을 결론하고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어야 될 것이라고 합니다(10절).
1. 본문 9절은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구속을 베푸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입니다.
선지자는 앞서 말한 것을 다른 말로 되풀이합니다.
주의 백성의 구원은 그들의 영적 구원의 시작이었기에 선지자는 이것을 먼저 말합니다 다음에 율법에 대한 확인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근거로 선택은 결코 실패하는 일이 없음을 부언(附言) 합니다.
오래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더불어 백성들의 구속의 때까지 언약을 맺었지만 여기서는 결코 폐기되지 않는 율법만을 들어 그 언약을 확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 하루만 은혜로우신 아버지로 역사하신 게 아니고 율법을 공포하실 때 영생이 교회 안에 영원히 계속되도록 자신의 은혜도 세우셨습니다.
신자들은 우리가 다른 곳에서 경계하기를 요했고, 율법에 대한 말이 나오는 119편에서 보다 길게 말하는 사실을 주의해야 됩니다.
즉 성령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언약들을 특별한 방법으로 말씀하기를 하나님은 이 언약으로 자기 백성들을 자신에게 불러 모으사 영생으로 거듭나게 하셨다고 했기 때문에 계명들은 항상 추상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111 편
2. 본문 10절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입니다.
선지자는 율법에 부여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두드러진 긍휼을 말한 후에 이어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열심히 율법을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선지자는 “여호와를 경외함”을 가리켜 ‘지혜의 시작’ 또는 ‘근본’이라 부름으로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은근히 책망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와 율법에 따라 자기 생활을 단속하지 않는 자는 야수(野獸)와 같은 자요 참된 지혜의 기초 단계도 모르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온 인류가 일반적으로 지혜롭게 되기를 바란다 해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자기 자신의 악한 기질로 기쁨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또 가장 악한 사람이 지혜에서 모든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평을 들으므로 이런 확신에 부풀어 올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퍅한 마음을 갖게 되기에 선지자는 세상의 모든 지혜가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으면 헛되고 텅 빈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실로 자기들이 사는 목적을 모르고 있는 자들은 모두 어리석은 자요 미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가 태어난 목적이요 살아가는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이런 목적하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업신여기거나, 또는 다른 곳에서 갖는 것과 같은 천박한 감정이나 무감각이나 앞을 못 보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악한 자들이 가진 기교는 무엇이든지 중하고 순전한 경건심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도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이 구절은 수식어 טוב (토브)를 매우 강조합니다.
선지자는 우리가 이미 말한 어리석은 견해를 통렬히 비난함으로서 자신의 악한 계교를 즐거워하는 자들을 은근히 정죄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관심을 잘 볼 줄 아는 사람, 풍조에 맞는 머리를 쓸 줄 아는 사람,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생각을 예리하고 교묘하게 지탱해 나가는 사람, 다른 사람을 속아 넘어가게 하는 사람을 가리켜 흔히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러나 이런 특성이 있음을 인정해도 그들의 지혜는 무익하고 빗나간 지혜입니다.
참된 지혜란 율법을 지키는데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선지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그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대치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예외 없이 자기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뽐내기는 하면서도 하나님의 계명 지키기를 게을리 하는 데는 모두 똑같습니다.
시편 111 편
그러므로 선지자는 매우 적절하게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멍에를 메고 우리의 생활 중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한 가장 만족스러운 증거인 하나님의 말씀의 법도에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근본”이라는 말은 어떤 사람들이 잘못 해석한 것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함이 마치 알파벳의 순서처럼 지혜의 입구(入口)를 가리키는 것과 같이 생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사람으로 참된 경건을 가질 준비를 갖추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말합니다.
이 견해는 욥기 28장 28절의 “지혜”라는 말씀을 볼 때 유의할 가치가 없습니다.
이 구절에서 “경외함”은 요한일서 4장 18절의 경우처럼 경건의 첫째 또는 기본 원리를 가리킨다고 보지 않고 모든 참된 경건, 즉 하나님이 예뻐하는 것을 포괄적으로 가리킨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 시의 결론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선지자는 단순히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사는 것보다 더 유익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시112:1-3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사실상 대다수의 사람들은 악한 행위를 통하여 형통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약탈과 사기와 온갖 부당한 방법들을 동원해서 부자 되기를 꾀합니다.
그러기에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순결하게 자기를 섬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복들을 열거하면서 경건하게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고 도덕적인 삶을 꾀한다고 해서 결코 우리가 받아야 할 참된 보화나 상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1. 본문 1절은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입니다.
이 구절에서 선지자는 비록 권면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성도들로 하나님께 찬송 드리게 하는 그 이상의 견해를 내포합니다.
대부분 수많은 사람들은 악을 행하고 불의에 젖어드는 것을 큰 복으로 간주합니다.
정직을 찬양한 사람은 있으나 이를 추구한 사람은 백 명 중 한명도 찾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정직을 추구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자기들의 길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노획물로 취하지를 못 한다면 비참하게 될 것으로 모두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반대로 아버지 같은 하나님의 보살핌에서 얻을 유익이 해악을 끼쳐서 얻는 유익이나 우리의 힘으로 온갖 불의를 지속해서 얻는 유익보다 더 많다고 말씀합니다.
선지자는 우리 앞에 확실한 보상의 소망을 보여서 정직과 긍휼을 주선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분석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그 계명을 크게 기뻐할 것이라’(칼빈 ;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한글).
선지자는 하반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구성 요소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설명이 덧붙여질 필요가 있는 점은 111편의 결론 말씀을 볼 때 매우 분명해집니다. 율법이 사람들에게 여지없이 멸시당하고 있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에 속하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려고 힘썼다고 말하여 이러한 불경건을 잘 논박했습니다.
히브리어 동사 חפץ (하페츠)는 강조형으로 ‘하나님의 기쁨을 취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우리는 ‘스스로 즐거워하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이유는 선지자가 기꺼이 신속히 율법을 지키려는 자와 노예같이 억지로 복종하는 자를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12 편
따라서 우리는 기꺼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들이며 또한 그 율법을 사랑하여 모든 즐거움을 누려서 모든 육체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단순한 주의만 기율여서는 그 효과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에서 얻은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서는 율법을 순전하게 지키는 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복이 있도다”고 확증하며 우리들로 복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악한행위를 저지르게 하는 악한자들의 위험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게 합니다
2. 본문 2-3절은 “(2)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3)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입니다.
선지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의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의 복에 대해 자신이 한 말을 확증하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주시기를 즐겨하시는 인자의 증거를 나열합니다.
첫째로 선지자는 하나님의 아버지 같으신 자비가 그의 백성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후손들에게도 미친다고 말합니다.
이는 율법에 기록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6) 라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103편 8, 9절과 다른 구절에서도 우리는 이미 이 교리의 말씀을 고찰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베푸신 일시적 은혜를 표준해서 이 교리를 왜곡하는 자들이 적지 않기에 우리는 마음 속에 우리가 37편 25절에서 말했던 것, 즉 이것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과 분량에 따라 부여받은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때로는 선한 사람도 자녀가 없을 수 있습니다.
자녀를 못 낳는 것 그 자체는 하나님의 저주라고 간주됩니다.
또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가난과 궁핍에 눌려 있었고 심한 질병에 시달렸으며 많은 환난에 둘러싸여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반적인 원리를 세워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의 유익에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기는 방법에 따라 때로는 보다 풍성한 자비를 베풀기도, 또 어떤 때는 그 자비를 적게 베풀기도 하며 심지어는 완전히 자기 백성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자기를 나타내지 않으실 때도 있으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환난 중에서도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라는 말씀이 공연한 말씀이 아닌 사실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권세를 누리고 자녀들에게 이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주려는 데에만 관심을 두는 악한 자들의 헛된 기대를 아주 빈번하게 깨뜨려 버리십니다.
시편 112 편
반면에 이 세상에 사는 자기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양육하며 겸손히 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성도들에게는 손을 뻗쳐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높여주십니다.
이 사실에 대한 교의 교훈의 진실성이 옛날에는 율법으로 더욱 분명해졌었습니다.
성년의 경험이 없이 유아적으로 나약했던 백성들에게는 일시적인 은혜의 방편을 통해서 보다 나은 소망을 더 많이 가지도록 연단을 받는 일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보다 장성한 교회에 속하는 오늘날에는 우리가 죄를 범하지만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일시적인 자비는 더욱 명확하게 우리에게 빛을 비춰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경험은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라는 사실이 항상 진리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곧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옛날에도 그러하였지만 오늘날에도 도덕적이고 거룩한 사람이 배고픔을 당하고 심지어는 가정적인 최상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일들도 흔하게 일어납니다.
주께서 이들에게 땅에 속한 은혜를 많이 베풀지 않는 것은 그들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신앙양심에 따라 행동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우리는 선지자가 찬미한 은혜가 이 구절에 두드러지게 특별히 나타난 것을 주시합니다
선량하고 신실한 자들이 그들의 처한 비천한 상태에도 만족하는 한편 세상 모두에게 미칠 정도로 크다 해도 세상적 지위는 불경건한 속물근성을 채워 주지는 못합니다.
옛 격언에 진실성이 내포되었습니다.
즉 욕심이 많은 사람은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은 물론 그가 가진 것도 부족해 합니다.
그는 허영의 주인이요, 부귀의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또 ‘선한 자의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사실상 경건한 자와 악한 자를 참되고 적절하게 구분합니다.
악한 자들은 잠시 충만한 부요를 축적해 놓으나 이것들이 모두 선지자의 말씀 ‘전능자가 불어 버리심으로 갑자기 사라져 버릴 것이다’(칼빈 ; 내가 불어버렸느니라 -한글)에 의한 때문입니다(학1:9).
또 폭력과 사기로 얻은 것은 다른 사람들의 먹이와 소유물이 된 사실을 매일 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그들의 무죄함이 하나님의 복을 소유할 수 있는 최상의 가장 확실한 요소가 됩니다.
시편 112 편
시112:4-8 정직한 자에게는
이 시편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 세상에서도 강성해지는 신자들을 가리켜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라고 하여 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도 강성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는 개인 신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셔주시기 기뻐하시는 그런 사람들은 어떠한가?
(1) 그 자손까지 복을 받음이 있습니다(2절).
이 사실을 보면 그에게 복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그 후손)의 조상은 벌써 별세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신자가 강성해지기 때문입니다.
(2) 재물이 풍부히 부어지기도 합니다(3절).
그의 재물이 풍부해진 원인은 그가 의(義)를 겸하여 소유했기 때문입니다(3절하반).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보시고 물질을 주셨으니 만큼 그 의가 있는 동안 그 부요는 유지될 것입니다.
(3) 그 신자는 선량한 것만큼 화(禍)가 변하여 복이 되기도 합니다(4절).
(4) 그 신자는 계속해서 잘 되어갑니다(5, 6). 그 신자는 남들을 많이 도와주며 의를 행하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인 만큼, 그의 의가 계속되는 동안 그 받은바 복이 변동될 위험이 없습니다.
(5) 그 신자는 흉악한 소식을 들어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7, 8).
그 이유는 그 신자가 여호와를 의지하고 마음을 굳게 정했기 때문입니다.
1. 본문 4절은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어질고 자비하고 의로운 자로다” 입니다.
히브리어 동사 זרח (자라흐)는 번역을 따라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즉 태양이 지상 어느 한 부분에만 비치고 나머지 다른 부분은 모두 어둠으로 봉인된 것처럼 하나님이 의인들을 인간 생활의 일반 환난에서 제외시켜 주셨다고 해석하거나, 낮이 밤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 종들의 마음에 얼마동안 무거운 짐을 지게 하셨다가도 평안하고 밝은 때를 다시 돌아오도록 해준다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후자를 취한다면 선지자는 “흑암” 또는 구름이 낀 때, 비가 오는 때, 폭풍이 부는 때의 환난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 종들의 인내를 시험하셨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우리에게는 전자의 해석이 타당한 것으로 보이는데 온 세상이 환난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은혜의 빛을 비추사 평안하고 복되게 해주신다는 뜻이 됩니다.
시편 112 편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형편은 다른 사람들의 일반적인 운명과 현저하게 차이가 있습니다.
악한 자들은 자기들이 형통함을 기뻐하지만 이는 빛 가운데서 앞 못 보는 경우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모르는 자들이며 역경 속에서 사망의 흑암에 빠졌기에 결코 평안한 안식의 때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한결같이 비쳐지고 있는 경건한 자들은 육신에 해로운 일은 당하기 쉬울지 모르나 결코 흑암 속에 빠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부요는 ‘흑암 중에서도 빛이 그들에게 비치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히브리어 동사에 능동의 의미를 부여하면 구문이 더 타당하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 ‘어질고, 자비하고, 의로우시다’는 칭호를 사용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동사로 ‘빛이 일어났다’로 한다면 하반은 상반에 대한 근거가 될 것입니다.
의롭고 겸손한 신자가 세상에 흑암을 확산시키지 않은 것만큼이나 불의하고 사악한 불신자들은 흑암을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빛에서 연기를 뽑아내려 하지 않고 연기에서 빛을 빼내어 버리려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선지자의 말씀을 오해한 결과일 뿐입니다.
2.본문 5절은 “은혜를 베풀며 꾸이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공의로 하리로다”입니다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두 사람 사이에 상대적으로 일어나는 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의견은 다른데,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는 자는 잘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선지자가 뜻하는 의도와 더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가 말하려는 것은 악한 자들이 부정하고 합당치 못한 방법으로 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크게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과 또 하나님의 긍휼이 모든 좋은 것의 근원과 원천임을 가리켜 주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관계 대명서 ‘그’(who)가 보충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우리들이 지나친 인색함과 과도한 강탈을 통해 부요케 되기를 바람으로서 멸망하는 자들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처럼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실한 자들은 온유와 자비로 통로를 열어 주의 은혜가 자기들에게로 흘러오게 합니다 טוב (토브)라는 단어가 남성이기는 하지만 ‘좋다’ 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종종 중성으로 취급되어 좋은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꾸이는” 이라고 한 것은 자비의 열매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고리대금 업자는 어려움을 돕는 척 위장하고 꾸어주지만 약탈자 입니다.
시편 112 편
그러므로 진실로 후한 자, 즉 동정심에서 우러나 가난한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는 의도가 없이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형통함을 주십니다.
이 구절 끝에 나오는 דבים (드바림)이란 말은 ‘말씀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랍비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주석가인 David Kimchi 의 의견대로 이 말이 ‘일들’ 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말씀들’ 이란 해석은 매우 빈약한 번역입니다.
선지자가 말씀들이라는 뜻을 나타내려 했었다면 보다 단순한 말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취한 번역이 적당합니다.
의인은 분별력과 지각으로 자기의 일을 처리해 생활해 나가는데서 낭비하거나 지나치게 인색하지 않고 매사에 경제적으로 검소함을 배워 사치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의인들은 모든 상거래(商去來)에 항상 공평과 도덕적 원칙에 따라 행동합니다.
3. 본문 6절은 “저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
입니다.
히브리어의 분사 כי (키)는 본질 또는 원인을 나타내는 의미를 갖고 있어 ‘~ 때문에’ 라고 번역하는데, 이 구절에서는 특별히 난외 주에서처럼 ‘사람과 더불어 잘 지낼 것이로다’ 로 번역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선지자는 자기가 말했던 복을 보다 분명한 말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는 자와 겸손한 자를 지켜 주시기에 모든 생활의 변동 속에서도 이들은 요동치 않는다고 말합니다.
또 선지자는 이들의 무죄함을 드러내고 부당한 비방에서부터 보호해 줍니다.
본 절 초두는 “저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함이여” 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도 사실상은 사람들에게 일어나기 쉬운 일에 있어서 똑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들이 심한 환난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여러 차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의 확신은 요동치 않으며 어느 누구도 넘어뜨릴 수 없는 인내를 가지고 자기들의 모든 환난을 극복해 나갑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의에 변호자 되신 하나님과 함께 해 악한 자들의 비방과 공격을 피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이들의 이름이 하나님과 천사들과 온 성도의 회중 앞에서 복을 받기에는 충분합니다.
4. 본문 7-8절은 “(7)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8) 그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그 대적의 받는 보응을 필경 보리로다” 입니다.
시편 112 편
이 구절은 6절의 내용을 확증해 주는 것 같으며 더 나아가 의인들은 사악한 자들이 사악한 행위로 얻는 치욕스러운 이름에서 제외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인들은 가장 사소한 비방이라 할지라도 두려워 떠는 불신자들과는 달리 자기들에게 닥쳐오는 모든 흉한 일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아버지 같으신 보살핌 속에서 평온하고 평안하게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 불신자들이란 스스로 상상하기를 자기들은 땅에서 운명의 노리개감이며 한편 하나님은 하늘에서 편히 계시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라고 반항합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이 낙엽 소리에도 고민하고 놀라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신실한 자들은 이런 불안에서 해방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소문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고 그것 때문에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방해받을까봐 두려워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자녀도 절박한 위험에 직면할 때 두려워한 내색을 보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환난을 문제 삼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러한 것마저 없다면 이는 하나님을 확신해서가 아니라 무감각한 결과에서 온 것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자들이 모든 두려움과 근심을 떨쳐 버릴 수는 없다고 해도 하나님을 자기들의 생활을 지켜 주시는 분으로 알고 또한 그들의 길의 지표로 따라가기에 하나님의 지켜 주시는 보호에 자신을 맡기며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킵니다.
이것은 큰소리로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려 하는 악한 소문을 무시할 수 있다고 말한 선지자의 말씀에 성도들이 영향을 입은 의인들의 관용입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께 도와 주시기를 의뢰함으로 기도합니다.
우리가 사면에서 헤아릴 수 없는 죽음에 둘러싸일 때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하심 하에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절망 속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가 말한 것은 순전한 안정이 하나님을 확신하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자들이 도취한 건방진 신념은 인생살이의 무상함을 간과한 것이며 마음 에 교만을 품고 하나님을 대적한 것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더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을 통해서는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라고 말씀했습니다(살전5:3).
재난이 성도들을 놀라고 당황하게 해도 그들의 마음을 나약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재난이 성도들의 믿음을 흔들 수 없고 오히려 담대하고 굳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그 신실한 신자들은 자기들의 연단받는 것에 대해 무감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들의 현재 당면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주실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성도들은 마음의 평안과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악한 자들에게 보응이 임할 적당한 때가 오기까지 기다리며 인내합니다.
시편 112 편
시112:9-10 저가 재물을 흩어
성도가 남들을 구제한 “의가 영원히” 썩지 않고 “그의 뿔”(힘과 권세) 처럼 있습니다.
이와 반면에 악인은 “이를 갈면서”(의인의 형통을 시기하면서) 소멸되어 갑니다.
시기(猜忌)로서는 남들을 해하지 못하고 결국 자기 “멸망”에 사용될 뿐입니다.
1. 본문 9절은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입니다.
선지자는 의인들이 자기들의 너그러움에 대한 열매와 보상을 결코 잃는 일이 없음을 다시 한번 말합니다.
선지자는 “흩어” 라는 말로 의인들이 인색하게 또는 마지못해 가난한 자들에게 적은 것을 나누어 주고도 그들에 대한 자기들의 의무를 다 수행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후하게 그들이 필요한 만큼 자기들이 허용할 수 있는 만큼 주었음을 암시합니다.
너그러운 마음은 이 세상의 재물을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지자가 의도한 모든 것은 의인들은 결코 인색한 일이 없이 항상 자기들이 허락하는 만큼 흩어 나누어 줄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라는 말로 의인들이 닥치는 대로 온정을 베풀지 않고 분별력과 식별력을 가지고 궁핍한 자의 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겉치레를 위해 불필요하게 지나친 지출을 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일이 종종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생의 많은 재물들이 잘 분별하여 적절하게 나누어지기 보다도 사치나 허영으로 탕진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를 관용에 대한 찬송은 우리들의 물건을 받을 대상을 고려하지도 않고 아무런 의도도 없이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궁핍한 자의 필요한 것을 덜어 주기 위해서 적절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쓰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고후9:9), 우리가 자유롭고 신중하게, 또 균등하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우리를 풍성하게 복 주시는 일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쉬운 일이라는 점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이는 선지자가 의도하는 것과 아주 잘 어울립니다.
하반절의 “그 의가 영원히 있고” 라는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악한 자들이 그들의 재물을 사용하려는 지나친 욕망은 선한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시편 112 편
그러므로 선지자가 앞서 ‘의인은 그 일을 공의로 하리로다’ 라고 말한 구절에 의하면 선지자가 여기서 찬송하는 것은 관용을 적합하고 적절하게 베푸는 방법입니다.
이 말씀이 의의 열매를 가리킨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 해도 우리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동일한 말씀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하나님이 은혜로 의인들의 자비에 의한 그 의의 영광을 보존시켜 주시며 의인들의 뿔을 더 높여서 그들에게 권세를 주거나 번영케 함으로 그들의 보상에 실망을 주지 않으시는가를 보여줍니다.
2. 본문 10절은 “악인은 이를 보고 한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하리니 악인의 소욕은 멸망하리로다” 입니다.
이 구절은 시편 2편 5절의 내용과 비슷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신실한 자들에게 더욱 놀랍게 나타남을 말합니다.
선지자가 의도하는 것은 악인들이 모든 경건을 도외시하고 인간 만사가 하나님의 섭리 하에 다스려진다는 생각을 다 몰아낸다 해도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의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응하여 헛되이 온정이나 긍휼을 베풀지 않음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자기들의 선택에 의해 자신들의 마음을 굳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베풀어 주신 영광이 그들에게 보여짐으로서의 그 자녀들의 모습이 그들로 하여금 이를 갈게 하고 또 이를 부러워함으로 점차 자기 자신들을 소멸케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선지자는 “악인의 소욕은 멸망하리로다” 라고 말합니다.
악인들은 결코 만족할 줄 모르며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갈급해합니다.
따라서 그 악인들의 소망은 그들의 욕심이 끝이 없는 것만큼 한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어리석은 기대에 온 세상을 주관하는데 전혀 망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들이 기대한 것을 이미 소유했다고 하는 생각을 하나님께서 탈취하시기에 항상 그들은 부족하고 굶주린 상태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113:1-4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여호와가 하늘보다 뛰어나심에도 친히 이 땅을 향해 인간을 주시하고 계십니다.
선지자는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이 시편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나 성도들 중에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흥망성쇠를 보고 좌절한 자들이 많습니다.
사실이 그러하기에 선지자는 이러한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했던 변화를 통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도록 가르치며 경고해 줍니다.
그 결과 만물이 주의 뜻과 기뻐하시는대로 다스려진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게 합니다.
1. 본문 1절은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입니다
이 시는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많은 이유를 제시합니다.
신실한 자들만 영적 분별로 주의 손길을 인식하기에 선지자는 특히 그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종교적인 행위에 사람들이 얼마나 냉담하고 무감각한가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불필요하게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반복해서 외치는 행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이름을 찬송하기 위해 지음 받았어도 주의 영광이 우리에게 경시됩니다.
선지자는 우리로 하여금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열심히 찬송하도록 해주려는 의도에서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무관심의 죄악을 여지없이 정죄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권면의 반복은 계속해서 열심히 하라는 말로 간주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종들”이라는 말씀을 율법에 따라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위임받은 레위인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에 대하여 우리는 크게 반대하지 않습니다.
단, 그것은 하나님이 예외없이 자기 백성들에게서 찬송을 받으시기 위해서 레위인들을 임명하사 그 백성들의 지도자와 악장을 삼으셨기에 레위인들이 다른 모든 신자들을 제외시키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레위인들을 특별히 하나님을 찬송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말씀한 것은 그들의 실예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그 방법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또한 모든 교회가 하나의 거룩한 찬양을 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벧전2:9) 이요, 스가랴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슥14:21) 레위인들이 그리스도의 통치하에서는 가장 미천한 신자가 레위인이 될 것이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불신자들을 제외하고는 우리 모두가 똑같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초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2. 본문 2-4절은 “(2)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시편 113 편
(3) 해 돋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4)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그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도다” 입니다.
선지자는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 계속해서 주를 찬양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계속 찬송을 받아야 한다면 우리는 이 짧은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우리의 성실을 다해 이 찬양에 대한 기억이 죽은 후에도 계속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3절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지구 온 지역에 확대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찬송을 사람들 중에 울려 퍼지게 못할 때 우리의 무감각을 핑계치 못합니다.
옛 율법 아래서는 유대 백성이 아니면 하나님께서 찬송을 받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행사가 모든 민족이 다 볼 수 있게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온 세상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찬송할 만하게 되었습니다.
4절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의 높으심에 대하여 같은 취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생각을 황홀한 찬사로 충만케 하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어찌 이 사실을 찬송하지 않고 우물쭈물하거나 마지못해 억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이 그러하기에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찬양하면서 우리들이 그 이름과는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하늘에서 유래된 것처럼 사랑하기 위해 우리가 최대한 그의 이름을 찬양하는데 힘쓰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면 그것은 곧 불경건한 기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라는 말씀 속에는 책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는 이 책망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찬송에 무감각하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앞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까지도 비추어진 하나님 영광을 친히 목도한 자가 이것을 자기들의 찬송의 제목으로 삼지 않는 것보다 더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 있을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하늘나라의 교리에 대한 지식을 맡은 자로 독특한 영광을 부여해 주실 때마다 분명히 증인을 세우셨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행14:17, 롬1:20). 복음이 선포된 이후에는 여호와가 모든 나라들보다 더 높으심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따라서 온 세계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신자라면, 온 세계에 펼쳐진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 안에 놓인 우리 자신이 있음을 깨닫고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편 113 편
시113:5-9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하나님은 가장 높으시기에 찬송을 받으실 분이십니다(4, 5).
하나님은 모든 낮은 자들을 체휼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6-9).
1. 본문 5-6절은 “(5) 여호와여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6)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인자를 그의 영광과 권세와 대조시켜서 하나님께 찬송 드리는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영광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별은 사람을 염두에 둔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비로서 자신을 낮추사 우리가 자신을 향하도록 자비와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하나님의 위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늘 위에 초월해 거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매우 가까이 계신 사실을 보여주는데 방해를 받지 않으시며 우리의 복을 예비해 주시고 계신 사실이 분명하다는 사실입니다.
또 선지자는 하나님이 하늘보다 높으시다고 말함으로서 연약하고 미천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확대시켜 줍니다.
또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어버이 같은 관심으로 자신을 낮춰 천사들을 보호하시지 않는다면 사람들도 형편없는 처지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대할 때 자신을 낮추셨다면 땅위에 기어 다니는 사람들을 대할 때는 완전히 더럽게 여기신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천지에 충만해 있지 않으신다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생깁니다.
그 대답은 명확합니다.
선지자의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 중에 가장 높은 것도 발로 밟으실 수가 있으며 피조물들과 무한한 거리를 두고 계시기에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접근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우리에게로 내려오사 우리가 그의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 되게 하신다고 결론해야 합니다.
시편 113 편
2. 본문 7-8절은 “(7)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8)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 입니다.
선지자는 사람들이 우연하게 생각하는 다양한 변화와 관련이 있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보호를 찬송합니다.
선지자는 우리의 예상을 훨씬 능가하여 일어나는 일들은 오직 하나님의 정하신 바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사가 항상 획일적으로 일어난다면 사람들은 그것들이 단지 자연적으로 일어났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변화는 우리에게 만사가 하나님의 은밀하신 뜻에 따라서 다스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반대로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일어나는 사건을 만나면 우리는 놀라움으로 말미암아 즉시 우연으로 돌려버리게 되고 또 하나님의 보살펴 주심을 깨닫지 못하는 반대되는 입장에서 사물을 판단하기가 쉽기에 선지자는 엄청난 사건이나 흔히 일어나지 않는 사건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하도록 합니다.
소몰이나 가장 미천하고 가장 비참한 처지에 있던 사람이 최고의 권세를 갖는 자리에 오르면 전혀 예기치 못한 변화에 우리의 관심이 몰릴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우리는 이제 선지자가 말하려는 바를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이 구절에서도 다른 구절에서처럼 천지의 구조를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우리의 마음은 일상적인 일로 인해서는 영향 받지 않기에 하나님의 손이 그의 놀라우신 사역 가운데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미천하고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주권을 사소하게 높이려고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주관하는 권세와 권위를 부여하여 이적의 위대함을 한층 높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상의 다른 부분을 주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합니다.
국가나 교회의 왕국은 하나님의 기이하신 능력과 지혜와 의를 나타내거나 행하는 전형적이고도 당당한 극장이기 때문입니다.
3. 본문 9절은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입니다.
선지자는 우리가 크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하나님의 또 다른 역사를 말합니다.
시편 113 편
우리는 흔한 하나님의 사역으로는 감동 받지 않아도 오랫동안 잉태하지 못한 여자가 예기치 못하게 많은 자녀를 가진 어머니가 되었을 때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됩니다.
히브리어 חבית (하바이트)는 “집” 만을 의미하지 않고, ‘집안’ 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헬러어 Οἶκος(오이코스)나 라틴어 domus(도무스)곧 ‘가족’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전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가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복을 받아 자녀들로 집을 채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선지자가 어머니에게 기쁨을 돌린 것은 모든사람의 마음은 부귀영화나 쾌락 또는 기타 다른 유익을 좇으려 하나 자손을 갖는 것이 다른 모든 것보다 더 귀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일상적인 자연의 과정을 감독하셔서 비참한 처지에 놓여있고 보잘것없는 혈통에서 태어난 자들을 높이시고 잉태하지 못했던 여자가 출산하게 되는 사건을 일어나게 하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손의 행사를 주의깊게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의 무감각함은 즉시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고 성삼위일체 하나님은 교회의 증거를 통해서 우리 눈에 기이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나오는 기적을 내십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감지하는 성도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