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바아사는 여로보암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기도 하였으나, 그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바아사의 집안은 시므리에 의해 살육을 당합니다. 자살을 한 시므리에 의해 오므리가 즉위하였는데, 그 역시 우상 숭배의 죄악으로 얼룩진 통치를 하였습니다. 오므리의 아들인 아합은 전형적인 악한 왕이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정치적인 혼란과 우상 숭배의 죄악 속에서 계속적인 악한 왕들의 즉위로 깊은 영적 암흑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1. 바아사에 대한 예후의 예언
1) 예후의 예언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후를 보내어 바아사 왕을 책망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비천한 출신이었던 바아사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도록 섭리하셨지만 그가 배은망덕하게도 여로보암의 전철을 밟으면서 우상 숭배의 죄악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아사도 여로보암과 같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후는 그가 여로보암의 집같이 멸절케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여로보암을 심판하실 때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바아사는 이제 심판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a.하나니의 아들 예후(대하19:2)
b.심판의 예언(왕상21:23-24)
2) 바아사의 죽음
바아사는 24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을 통치한 후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열왕기 저자는 그가 재위 기간에 행했던 일들은 일체 언급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는 바아사의 우상 숭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였던가를 입증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죄악과 더불어 바아사가 여로보암과 그의 가문을 살육한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책임을 바아사에게 돌리셨습니다. 이 두 가지 죄악이 바아사를 심판하신 이유임을 재차 강조하셨습니다. 바아사는 여로보암의 타락을 정죄하였으면서도 자신도 똑 같이 그 길을 본받아 행했기에 그의 죄는 더 큰 심판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a.디르사(왕상14:17)
b.여호와의 노(호1:4)
2. 이스라엘의 엘라와 시므리 왕의 통치
1) 단명하는 엘라
바아사를 이어 그의 아들 엘라가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이때 남유다는 아사 왕의 즉위 26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엘라는 자신의 군대 장관인 시므리가 왕위 찬탈의 야욕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 채 먹고 마시며 육체적 쾌락을 탐닉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시므리에 의해 죽음을 당했습니다. 결국 엘라는 2년 동안만 왕의 자리를 지켰던 것입니다.
a.궁내 대신(왕상18:3)
b.시므리의 모반(왕하9:31)
2) 바아사 집안에 임한 심판
엘라의 죽음은 바아사에 대한 예후의 심판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시므리가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시므리는 바아사가 여로보암 집에 행했던 살육보다 더 잔인하게 바아사 집안을 멸절시켰습니다. 심지어 바아사 집안의 친구들까지도 모조리 죽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진노는 바아사와 엘라가 먼저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백성들도 우상 숭배에 동참하도록 장려하였기에 더욱 컸던 것입니다.
a.잔인한 살육(삼상25:22)
b.하나님의 진노(신32:21)
3) 시므리의 칠 일 천하
시므리가 엘라를 죽이고 왕으로 즉위할 때에 군대 장관이었던 오므리는 깁브돈에서 블레셋과 대치 중이었습니다. 깁브돈은 원래 단 지파에 분배된 성읍이었으나 블레셋이 점령하였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므리는 이곳을 탈취하고자 깁브돈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때 여기에 있는 백성들은 시므리의 모반 소식을 듣고서는 시므리를 왕으로 인정치 않고, 군대 장관인 오므리를 새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오므리를 중심으로 한 백성들은 시므리가 머물고 있는 수도 디르사를 포위하였습니다. 그러자 시므리는 자신이 더 이상 왕위를 소유할 수 없으며, 죽게 될 것임을 감지하고 왕궁에 불을 놓아 자살하였습니다. 시므리는 7일 천하를 끝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진 북이스라엘은 오직 무력만이 지배하는 무법 천지로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반역은 또 다른 반역을 일으키면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당할 그날만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a.왕궁 호위소에서의 죽음(왕하15:25)
b.반역 행위(왕하11:14)
3. 오므리와 아합의 통치
1) 수도를 옮긴 오므리
시므리의 죽음 이후 북이스라엘은 오므리와 디브니를 따르는 두 패로 나뉘어졌습니다. 하지만 몇 년만에 왕권 싸움은 오므리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이제 공식적으로 왕이 뵌 오므리는 수도 디르사에서 6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겼습니다. 이곳은 세멜에게서 은 두 달란트를 주고 산 곳으로 그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 명명한 것입니다. 이 성은 산 위에다 견고하게 건축하였기에 외적의 침략을 막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므리는 12년 동안 강력하게 통치하였으므로 훗날 앗수르인들은 북이스라엘을 가리켜 오므리의 집이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a.사마리아 성읍(왕상13:32)
b.사마리아의 비극(왕하17:24)
2) 오므리의 악한 통치
오므리는 북이스라엘의 왕들 중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모압을 쳐부술 만큼 힘도 있었던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토지 매매를 금하는 율법을 어기고 사마리아를 사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 역시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를 지속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열왕기 저자는 오므리의 정치적 업적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의 영적인 상태가 올바르지 못하였기에 그를 평가 절하하였던 것입니다.
a.오므리의 악한 통치(미6:16)
b.이스라엘의 계속되는 죄악(왕상16:13)
3) 아합의 즉위
오므리의 죽음 이후에 그의 아들인 아합이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받은 왕이었습니다. 그의 부친인 오므리가 베니게와 동맹을 맺은 결과로 아합은 베니게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는 여로보암의 죄를 가볍게 여길 정도로 무수한 죄악을 범했습니다. 바알을 섬기는 베니게 민족의 신앙을 이세벨을 통해 알게 된 아합은 사마리아 수도에 바알의 신당을 건축하고 단을 쌓았으며, 아세라 목상을 세워 숭배하기도 하였습니다. 자연히 하나님의 진노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세벨을 아내로 삼은 아합(왕상21:25)
결론
바아사에서 아합으로 이어지는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한결같이 우상을 숭배하였고, 또 그 결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본장 마지막 절에 아합과는 상관없는 히엘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는 여호수아를 통해 금지된 여리고 성의 재건축을 시도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 아들들이 죽음을 당했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우상 숭배를 행한 북이스라엘 왕들에게 어떠한 심판이 내릴 것인지를 보여 주는 경고의 메시지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