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시 일운면 항리(項里) 「정사년(丁巳年) 항리거민등장(項里居民等狀)」③>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1857년 「정사년(丁巳年) 항리거민등장(項里居民等狀)」은 19세기 조선 말기 거제시 항리(項里) 마을의 주민들이 올린 청원서 등장(等狀)이다. 가난한 백성들이 과중한 세금과 부역에 시달리다가, 다시 불합리한 새로운 부역 강요에 시달린 후에, 그 불공정함을 참지 못하고 여러 주민들이 이름을 잇대어 써서 관청(官廳)에 올려 하소연하였다. 대략 관아의 부당한 징발에 항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전에는 없었던 일은 철폐하고 앞으로도 유사한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지방관에게 올린 청원서(請願書) 또는 소장(訴狀)이다.
당시 세금 제도의 불공정성, 특히 호별(戶別)이나 지역 단위로 일률적인 부과 방식의 폐단을 보여준다. 이로부터 감당할 수 없는 부담 때문에 백성들의 도탄과 유망(流亡)으로 인한 행정력의 공백과 사회 불안정을 초래케 만든다. 즉, 각종 진상(進上) 공상(供上) 등과 과도한 징세부담으로 인해 어촌사회 동민들이 얼마나 곤고한(困苦) 삶을 살아야 하며, 또 이웃하는 마을들과는 어떠한 관계를 형성해 가는지를 알게 해준다.
내용인즉, 저희 항리(項里) 마을은 산을 등지고 바다에 인접해 있어 본래 백성이 매우 적고 생산력이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항목으로 바쳐야 할 진상품(進上品)이 12등급이나 되어, 겨우 남은 10집 남짓한 주민들이 이를 억지로 떠맡고 있다. 여기에 추가로 부과되는 각종 세금과 잡역(雜役)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만성적인 폐단이 생겨나 백성들이 끊임없이 고향을 떠나 유리걸식하고 있다.
게다가 이른바 '사성(四星) 행차'에 음식을 대접하고 책임을 지는 것과 같은, 진해(鎭海)에서부터 새로운 귀인을 맞이하는(新迎) 것부터 또 진해(鎭海) 부지군(負持軍)의 부담까지 져야하는 일, 및 각종 공물(進上)을 바치는 것 등은 관례(邑例)에도 없는 부당한 요구까지 맡게 되었다. 예부터 진상(進上)을 담당하는 마을에 이런 역(役)이 부과된 것은 예로부터 없던 일이다. 마을에서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
감히 청컨대 세심히 재고하여 앞으로 이런 군역(軍役)이나 강압적인 동원(支應軍推捉)의 일이 없도록 해주고 이를 면제하여 영구히 따르도록 해달라. 또 문서(完文)로 완결하여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앞으로 폐단이 없게 해달라고 청원하였다. 결론적으로, 지방관은 백성의 고통을 헤아려 부당한 세금 제도를 시급히 개선하고, 백성들이 안정적으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강력한 호소다.
○ 참고로 19세기 거제도(巨濟島) 구조라[舊助羅, 항리(項里)] 마을 고문서(古文書) 종류는 다음과 같다. ① 소차계장류 : 등장(等狀) 포함 26건. ② 첩관통보류 : 절목(節目) 서목(書目) 포함 79건. ③ 증빙류 : 호적중초, 완문(完文) 포함 45건. ④ 명문문기류 : 계약서(契約書) 포함 8건. ⑤ 서간통고류 : 간찰(簡札) 포함 1건. ⑥ 치부기록류 : 공사치부(公事置簿) 포함 25건으로, 총 184건(件)의 문건이 있다.
◉ 거제도 동남단에 위치한 구조라(항리) 마을은 연해 어촌지역의 전형적 특성을 보이면서 군사적으로도 천혜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일본의 대마도와 지근 거리에 위치해 있던 거제도에는 통제영과 경상 우수영 관할 수군진 7개가 포설되어 있는 등 일찍부터 군사 기구와 국방시설이 밀집되어 있었다.
거제도 동남단에 위치한 구조라(舊助羅) 마을의 명칭은 조라진(助羅鎭, 조라 수군진영)의 옛 소재지라는 의미로서 ‘조라(助羅)’는 ‘(목을) 조르다’의 음차(音借)라고 전해진다. 구조라는 일명 ‘항리(項里)’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수군진영으로 들어가는 길목 마을(項里)을 일컫는 말이다. 인근 지세포 진영 입구 ‘다리 마을(橋項)’을 교항(橋項)이라 부른다. 또 조선시대 전국적으로 ‘항리(項里)’ 마을이 수십 곳이 있었는데 모두 공통점이, 육군진, 수군진, 또는 관청, 공공기관이 있는 곳의 길목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땅의 지맥(地脈)이 사람의 목(項)과 같아서, 마을 이름이 곧 항리(項里)라고 했다고 전한다.
또한 구조라는 “사면(四面)이 바다로 둘러싸여 일경(一境)에 산이 많고 곡식이 나는 땅이 부족하여 백성이 살아갈 방도가 극히 어려워” “거민(居民, 주민)이 해업(海業)으로 자생(資生)”하는 연해 어촌마을의 전형적인 특성을 보인다. 게다가 북병산 자락이 커다랗게 감싸고 있는 구조라 마을은 선박 접안이 용이할 뿐 아니라 마을의 수정봉에서 원해(遠海)까지 조망이 가능한 천혜의 군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일찍부터 마을에 구조라 성이 축조되어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구조라를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와현(臥峴, 눌일곶)․왜구(倭仇, 예구(曳龜)), 왼쪽으로 양화(楊花)․망치(望峙) 마을이 각각 마주 보고 있는데 이들 5개 마을은 협력과 갈등을 겪으면서 지역사회의 현안을 협의하고 국가의 각종 수취에 대응하는 등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 다음 정사년(1857년) 「항리거민등장(丁巳年項里居民等狀)」은 조선 말기 거제시 항리(項里) 마을 주민들이 이름을 잇대어 써서 관청(官廳)에 올려 하소연한 서면 청원서이다. 주민들은 불합리한 부역 강요에 대해 공식적으로 청원하며,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부담을 철폐하고 앞으로도 유사한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지방관에게 올린 상소문이다. 또한 향촌 사회의 과도한 세금과 진상(進上), 부역(徭役) 부담 문제에 더하여, 돌발적인 역무(役務)가 새로이 추가된 징발 요구의 철회를 주장한 등장(等狀)이라 할 수 있다.
사건의 발단은 관료 관인의 인수인계가 제때(하루를 걸러) 이루어지지 않아, 해당 관리가 새로 발생한 일('사성 행차' 관련 지원과 '각양 진상' 요구)에 대해 제대로 나누어 일을 배정하지 못하고 뒤섞이게 하여, 결국 항리 주민들의 노고가 너무나 컸다. 따라서 이러한 부당한 요구사항들은 앞으로 전례에 따라 처리되어야 하며, 임시적인 조치가 영구적인 부담으로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결국 지방관 거제부사와 향소(鄕所)의 책임자(공형)가 이 청원서를 받들어, 다시는 업무 순서나 책임이 뒤바뀌어 예로부터 관례(邑例)에도 없는 부당한 요구가 발생하지 않도록 시행케 했다. 고로 이 「정사년 항리거민등장(丁巳年項里居民等狀)」 문서는 조선시대 지방 행정에서 중앙의 돌발적인 요구와 지방민들의 생계 유지 및 기존 관습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다.
덧붙여 이 문건은 일종의 한문 위주의 첩정(牒呈, 서면 보고)으로, 내용 구성상 ‘시호미(是乎㫆)’, '是乎所(시호소)', '是乎矣(시호의)', '是良㫆(시량야)' ‘시호내(是乎乃)’ 등 문장 연결을 위해 이두(吏讀)식 표현이 혼용되어 사용되었고 또 완문(完文)이나 특정 권한을 영구히 보장하는 내용에 자주 등장하는 ‘영위물침지의(永爲勿侵之意, 영원히 침범하지 말라는 뜻)’라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
**「정사년(丁巳年) 항리거민등장(項里居民等狀)」* 항리 주민의 등장(等狀) 1857년.
항리(項里) 주민들이 올리는 등장(等狀)입니다. 삼가 저희의 뜻을 올립니다. 저희 무리들이 사는 곳은 산을 등지고 바다에 인접해 있어 본래 백성이 매우 적습니다. 그런데도 각 항목으로 바쳐야 할 진상품(進上品)이 12등급이나 되어, 겨우 남은 열 집 남짓한 주민들이 이를 억지로 떠맡고 있습니다. 여기에 추가로 부과되는 각종 세금과 잡역(雜役)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이런 형편으로는 도저히 감당하여 지탱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로 인해 만성적인 폐단이 생겨나 백성들이 끊임없이 도망쳐 흩어지고 있습니다. 이 지경이 되었으니, 대체 어떻게 해야 백성들을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뜻밖에 (맡게 된) 진해(鎭海)에서 새로 원님을 맞이하는(新迎) 것부터 군수품 조달의 짐질꾼과 지군초착(持軍抄捉) 하는 일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일입니다. 비록 일이 당시 급박하여 마땅히 담당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이른바 '사성(四星) 행차'에 음식을 대접하고 책임을 지는 조항과 짐을 져 나르는 일을 하는 사람을 징발하는 일 및 각종 공물(進上)을 바치라는 부당한 요구(里哛)뿐입니다. 모두 마땅히 고을의 정해진 관례(邑例)에 따라야 합니다.
진상(進上)을 담당하는 마을에 이런 역(役)이 부과된 것은 예로부터 없던 일입니다.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아는 일인데, 만약 이번에 처음 시행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모두 함께 청하오니(齊聲仰訴), 공정하고 맑은 정치 아래에서 세심히 재고하여, 앞으로 이런 군역(軍役)이나 강압적인 동원(支應軍推捉)의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이를) 덜어주고 면제하여 영구히 따르도록 해주십시오. 문서(完文)로 완결하여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폐단이 없게 해주십시오. 행해지는(결정되는) 바를 분부 내리고 명령하시어, 도주(목사나 부사 등 지방관)의 처분을 바랍니다.
1857년(정사년) 5월 10일, 이 일을 맡은 사람(所任) 노성도, 박취대 등과, 이후 노일삼, 정광일, 노인삼, 강효돈, 조달숙, 강광득 등이 더하여 올림
「정사년 항리거민등장(丁巳年項里居民等狀)」 원본
[右謹陳所志矣段 矣徒等所居地 背山臨海生民鮮少之餘 各項進上十二等以十室殘民擔當 而加外所當之數屈指不較 其勢萬無支撑之道 於斯不無痼弊而生民逃散不遼 將何以保民乎 / 意外鎭海至新迎支應負持軍抄捉 古今無有之事是乎乃 事係時急固未免擔當 而所謂四星行次支供責應之節 負持軍抄捉之事 各樣進上不當之里哛 全當應有邑例是乎㫆 /進上擔當之里自古以來斯許之役 元無行公之例 一邑上下無不共知而然 若或一番刱行則 日後何可支保乎 敢將齊聲仰訴於政治平淸之下 細細參啇敎是後 日後良中 或有如許支應軍推捉之端是良置 蠲減永久遵行之意 完文成給於公於私俾無弊瘼事 行下爲只爲 行下向敎是事 使道主 處分 丁巳五月初十日 所任盧聖道 朴就大等 後 盧日三 鄭光日 盧仁三 姜孝敦 曹達淑 姜光得 等]
*[상급 관청의 지시 사항(題辭)] 너의 마을은 본래부터 차등(次等) 역(役)이 없었는데, 이번 일에 해당 관리가 제대로 나누어 배정하지 못하고 뒤섞이게 하였다. 관료 관인의 인수인계가 제때(하루를 걸러)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업무 순서나 책임이 뒤바뀌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후부터(此後)는 이번 사례와 같이 해서는 안 되며, 따로 완문(完文, 영구적인 증명 문서)을 만들 필요 없이 영원히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라. 공소(公所, 관청)의 공형(公兄, 향리의 우두머리) 및 관계자들은 이 뜻을 알고 마땅히 시행하도록 하라. 10일 날, 향소(鄕所, 향촌 자치 기구) 공형(公兄)과 거제 부사(지방관)가 날인하여 보냄.“
[제사(題辭)] 汝矣洞則自前元無 次等之役, 而今番之段該 吏不善分排混入之中, 而交龜隔日未及 移次是在果, 此後 段不可似今番各例 不必完文, 永爲勿 侵之意, 公所公兄丫 知委施行宜當事. 初十日 鄕所公兄 府使(押)
[주1] 항리(項里) : 길목 마을, 現거제시 일운면 구조라 마을의 옛 이름.
[주2] 등장(等狀) : 여러 사람이 연명하여 관아에 무엇을 하소연하는 일. 등소(等訴)
[주3] 잔민(殘民) : 남아있는 얼마 안 되는 백성
[주4] 지응(支應) : 조선시대 벼슬아치가 공무(公務)로 어느 곳에 갔을 경우, 필요한 물품을 그 지방 관아(官衙)에서 대어 주던 일.
[주5] 사성(四星) : 혼인이 정해진 뒤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신랑의 사주단자(四柱)를 적어서 보내는 종이.
[주6] 부지군(負持軍) : 짐질꾼. 짐질을 하는 사람.
[주7] 지군초착(持軍抄捉) : 군사를 거느리고 도망친 사람(죄인)을 색출하거나 체포하는 일 (군초(軍抄)는 군사를 뽑는 일, 초착(抄捉)은 잡아들이는 일)
[주8] 창행(刱行) : 처음으로 창시하여 시행함
[주9] 영구준행(永久遵行) : 규칙(規則)이나 약속 따위를 오래오래 지키어 나감.
[주10] 공형(公兄) : 조선 시대, 각 고을의 호장, 이방, 수형리의 세 관속. 향리 우두머리
[주11] 지위(知委) : 통지(通知)나 고시(告示) 따위의 형식으로 명령을 내려 알려 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