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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의 추억 #72, 인연깊은 친구 D
그의 명명(세칭 동방교에서 내린 이름)은 D였다. 부산의 모처 목욕탕집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란 어린시절에 그도 나처럼 누군가의 전도를 받아 세칭 동방교에 발을 디뎠는데 그래도 우찌우찌 부산의 모 상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여 1학년을 다니다가 곧 그만두고 나처럼 부름을 받아 대기처(천국을 가기위해 이땅에 임시로 머물며 대기하는 곳, 집을 나온 세칭 동방교 신도들이 집단으로 머무는 곳을 말하는 은어-隱語)에 들어가서 전술한대로 세칭 동방교에서 발간하던 ‘주간 기독교’라는 신문사에 무임근로(無賃勤勞)하다가 내가 동방교를 뛰쳐나온 1여년 후 그도 군입대를 하게 되었고 무사히 군복무를 마친후는 다시 동방교에 들어가지 않고 세칭 동방교를 떠나버렸다.
학적이 남아있던 대학에 다시 복학절차를 밟아 학업을 계속하여 졸업, 교편을 잡고 부산의 어느 여고에 교사로 봉직하게 되었다. 어린시절 불우했던 그의 부인은 그때까지도 변함없이 세칭 동방교의 추종자였다. 대학입시에 별 볼일없는 교과목을 가르치던 교직생활이 무료했던지, 사립재단에서의 자리유지를 위한 긴장도 높은 인간관계에 지쳤던지, 어느날 갑자기 교사를 그만두고 그의 부인과 같이 다시 세칭 동방교 집단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그 이후 소식이 끊겼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세월이 흐른 후 또 다시 들리는 소문은 울산근교의 어디선가 주산학원을 한다는 소문도 들리다가 멀리 남미 아르헨티나로 떠났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수소문 끝에 그가 거주하는 남미 아르헨티나의 전화번호를 알아가지고 안부통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는 수년후 다시 귀국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많이 흐른후 상세한 소식을 다시 접하게 되었다. 부산 문현동 언덕받이에 간판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한빛교회라는 간판을 걸어놓은 곳, 그곳이 지금 부산의 세칭 동방교 중심교회라 할수있는데 옛 '초량12교회'가 이전 한 곳이다. 이전 한 시기가 아마도 90년대 중반쯤이라고 생각된다. 그곳에서 일반신도들이 모르는 새벽에 부산지방의 선택받은 신도들만 불러모아 미국에서 일시 귀국한 2대 교주 노영구가 특별집회를 열었다.
그때 세칭 동방교를 떠나 밖으로 나가 살고있던 세사람이 다시 동방교에 들어올 수 있는 기회를 특별히 하사받았는데 바로 인연깊은 내 친구 D를 위시하여 A와 H였다. 그들 세사람은 지금 모두 세칭 동방교집단에서 주요 역활들을 담당하고 있다.
당시 내 친구 D는 전술(前述)한대로 부산의 어느 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고, A는 세칭 동방교의 사주(四柱)장로중의 한사람인 오인숙 헤레나장로 (여성으로서 인물이 특출했으나 친아들이 없었던 헤레나장로는 짐작은 가지만 무슨 연유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는 사유로 일찌감치 동방교를 떠났고 부산에 거주하면서 가끔 초량12교회에 얼굴을 나타내곤 했었다)를 모시고 부산 수영의 헤레나장로집에서 노년의 할머니가 된 그를 보살피며 살고 있었는데
미국에 있는 헤레나장로의 양아들이 와서 집이 탐이 났는지 자기들이 모시겠다고 나가라고 해서 맨손으로 나와서 세칭 동방교의 대기처에서 대기자로 만나 결혼한 같은 동방교 신도인 그의 부인과 조그만 식당을 운영하면서 생활하고 있었고 H는 이것저것 손대는 사업마다 실패하여 의기소침해 있던 시기였다.
2대 교주 노영구의 특별한 은혜로 이때 다시 세칭 동방교 집단에 들어가게 된 인연깊은 내 친구 D는 대기처에서 생활하면서 어르신(2대 교주 노영구를 지칭)을 수종들다가 온다간다 말도없이 그곳을 다시 떠나게 되었다. 세칭 동방교 용어로 말하면 '도망'인 것이다.
그리고는 가족들을 데리고 울산근처로 이사를 와서 여상출신인 그의 부인의 특기를 살려 주산학원을 운영하다가 남미의 아르헨티나까지 가서 지인의 봉제공장에서 6년동안 일하다가 귀국하여 세칭 동방교집단으로 다시 들어갔다고 하는 상세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런 그가 어찌된 영문인지 세칭 동방교의 목사(?)가 되어 어느 해인가 부산 문현동의 한빛교회에 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세칭 동방교에서 잔뼈가 굵었던 나에게 동방교에서의 ‘목사’란 단어자체가 별 의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어떤 정상적인 경로를 밟아 목사가 되었는지, 그리고 목사가 되었다면 지금에 와서 그의 신앙관은 어떤 변화가 있는지 궁금함과 반가운 마음으로 같은 친구인 '누가'(세칭 동방교의 명명)와 같이 부산 문현동소재 세칭 동방교 한빛교회를 방문, 그 교회의 4층에 있는 생활관을 찾아 올라가 D와 차를 한잔 나누고 교회내부를 안내받아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그 옛날의 세칭 동방교, 더구나 '초량12교회'의 자취는 찾을 수 없었고 여느 제도권 기독교의 예배당과 똑같은 내부장식을 해놓고 있었다. 그가 거처한다고 하는 숙소의 방에 가보니 아무 장식이나 가구는 없이 붙박이 농이 한쪽벽에 붙어있고 찻잔 몇개 놓을만한 나즈막한 찻상위에 노트북 하나 달랑 놓여 있는것이 방안의 전부였다. 가족과 헤어져 홀아비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릴때 보았던 두딸의 소식을 물으니 그들의 근황을 이야기 해 주었다. 서면으로 같이 나가 초밥집에 들어가 점심을 같이하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옛날 이바구 주고 받으면서 회포를 풀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가 젊은 시절 한솥밥을 먹으면서 고락을 같이하고 뜬구름같은 이상을 공유했기에 거리낌이 없는 사이라 서로의 체면이나 조심스런 타진에 의한 접근이 필요없이 바로 본론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사이였다.
내가 궁극의 의문을 꺼집어 내었다.
“인간이 왜 그토록 하나님이 되고 싶었을까? 그리고 한 인간을 신으로 우상화 하는것은 성경에 비추어 볼때 너무나 큰 죄악이 아닌가, 노광공이라는 사람이 분명코 이땅의 창조주요, 재림의 구세주가 아니지 않은가?”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신봉(信奉)의 기초를 뒤흔드는 나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D가 말했다.
“사람이 기록한 성경을 어찌 믿을 수 있는냐. . .? ”
비록 세칭 동방교지만 간판만은 어엿하게 교회라 걸어놓고 기독교연 하고 있는 목사가 성경을 믿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자신도 믿지못하는 성경으로 어찌 남은 믿으라고 설교할 수 있느냐, 그러면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냐?”
노광공을 이래 할아버지요, 이땅의 창조주, 재림의 구세주로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는것이 아니라 '이래 조부님(노광공을 지칭)의 이름으로 기도' 하는 세칭 동방교의 구(舊)성민 신도에게는 가당찮은 질문이 되는 것이다. 애초부터 예수는 역사속의 4대성인 정도로 각인되어 있을 뿐이다.
그가 대답했다.
“서울에 다다르는 길은 한 길만 있는것이 아니다. 경부선으로 기차를 타고 가던,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승용차로 가던,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타고 가던,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늘나라에 이르는 길도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산의 정상을 오르는 길은 동쪽의 등산로로 올라가던지, 서쪽의 기슭으로 올라가던지 계속 오르다 보면 정상에 다다르는 것이다”
논리상 틀린말은 아니지만 복음과 구원의 유일성을 인정하지않는 범심론적 주장이다. 일리있는 말이지만 일리가 진리는 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또 말했다.
“기독교의 탈을 쓰고 유불선의 잡종교리로 뒤범벅이 된 세칭 동방교의 뿌리깊은 이중성과 이미 유죄판결로 드러난 신도들의 헌금갈취와 연단선님들에 의한 껌팔이등의 강요로 이루어진 그 재력의 기반위에 세워진 교단이 진정한 기독교 교회라고 할 수 있겠느냐?
불법적 재산갈취와 현재의 재력 형성과정에 대한 뼈아픈 고발이다.
D가 말했다.
“고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계율을 어기고 물살이 센 개울을 건너지 못해 발을 구르는 여자를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너 주었던 중과,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계율을 어겼다고 그것을 타박하는 친구 중에게 ‘나는 벌써 그 여자를 잊었는데 너는 아직 그 여자를 업고 있느냐’고 말했다는 어느 중의 이야기가 있다, 옛날 일은 잊어달라”
내가 다시 말했다.
“참회와 반성은 종교의 기본이다. 잘못을 스스로 참회하지 않으면 발전도 변화도 있을 수 없다. 과거의 공과를 솔직히 드러내어 기록으로 남기고 잘못은 솔직히 시인하여 지상에 공개사과를 통하여 과거를 털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D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단독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대충 이런 이바구들이 오고 갔다. 이야기 도중에 서로 격한 내용도 있었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서 나누는 서로의 애정어린 대화라 큰 무리는 없었다. 기독교의 탈을 쓰고있는 세칭 동방교의 정체성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며 공감도 하고 이견도 있었다. D는 자기자신도 정체성의 혼란이 심각한듯 했다.
다음에 또 연락하기로 하고 씁쓰레하게 헤어졌는데 역시 서로의 가는길이 다르니 간극을 느낄 수 밖에 없는듯 했다. 그날 이후 D는 나와의 연락을 끊었고 수십번의 휴대전화도 받지않아 다시는 연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마 수신거절 리스트에 올려놓은지도 모르겠다.
지난날의 친구였으되 현재의 자기 정체성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나를 다시 만날 필요가 없다고 작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있으리라. 그날 만난 내 친구 D! 사람이 많이 변한건가, 아니면 어느것 하나 마음대로 되지않던 이런저런 세파에 찌든 탓인가, 몸은 야위고 얼굴의 주름은 자글거리는데 실없이 웃던 모습이 인생의 짐이 힘겨운 모습이었다.
아. . . 세월의 무상함이여.
아직 세칭 동방교에 몸담고 있는 친구들이여, 후배들이여, 지인들이여,
오류를 인정할 용기가 없거나 판단력의 수준이 떨어지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진정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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