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空)사상은 대승불교(마하야나)에서 나온 사상입니다. 대승불교가 나오기 전에는 소승불교라고 부르는 근본불교(테라밧다)가 있었습니다. 대승불교가 나오기 직전에 소승불교에서는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아니다. 이것이 바른 가르침이다’ 이렇게 동쪽이니 서쪽이니 북쪽이니 여러 학파로 나누어 다투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하나로 절대화해서 서로 주장을 했던 겁니다. 대승불교 초기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동쪽이라 할 수도 없고 서쪽이라 할 수도 없고 북쪽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다가 ‘공(空)’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공을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잘못됐어요. 정확하게는 ‘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즉, 어떤 것도 시간과 공간을 무시하고는 정해질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시간과 공간이 정해지면 어떤 방향이 정해진다는 뜻입니다.
‘시카고 가는 방향이 어떤 방향입니까?’
이렇게만 물으면 ‘정해진 길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한다면 방향은 동쪽으로 정해집니다. 애틀랜타에서 출발한다면 북쪽으로 정해집니다. 방향은 인연에 따라서 그때그때 달라집니다. 선불교에서는 이것을 중도(中道), 근본불교에서는 무아(無我), 대승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표현합니다.
또 여기에 컵과 컵 받침대를 보십시오. 제가 있고, 컵이 있고, 컵 받침대가 있습니다.
컵은 받침대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큽니다.”
“컵은 법륜스님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작습니다.”
“이 컵은 큽니까, 작습니까?”
“Nothing.”(크다고도 작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네. 컵이 없다는 뜻은 아니죠. 질문을 바꿔서 이 컵은 무겁습니까, 가볍습니까?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습니다. 이 컵은 비쌉니까? 쌉니까? 비싼 것도 아니고 싼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조건에서 비교를 하면 이 컵은 크다고 불리기도 하고 작다고 불리기도 합니다. 비싸다고 하기도 하고, 싸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크다 작다, 비씨다 싸다, 가볍다 무겁다는 성질은 컵에 있는 거예요? 내가 인식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예요?”
“네, 인식하는 방법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조건에서 작다고 인식을 한 건데, 컵 자체가 작기 때문에 작다고 인식했다고 보고 컵이 작은 게 사실이라고 객관화시켜요. 존재 자체는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크다, 작다는 것은 내가 어떤 것과 비교해서 인식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어떤 사람을 보고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 자체에 좋고 나쁨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인식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괴로움의 뿌리, 옳고 그른 시비 분별은 다 내가 일으킨 거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 공이란 단순히 비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에 크다고 할 것이 없고, 작다고 할 것이 없고, 옳다고 할 것도 없고 그르다고 할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조건에서는 그렇게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원리를 알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괴로워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주장을 할 때는 순간적으로 상대적인 것을 객관화시켜 버립니다. ‘내가 그렇게 인식했구나’라고 보는 게 아니라 ‘이게 옳다. 사실이다,’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주장을 하는 거예요. 우리의 일상은 늘 그렇습니다.
나는 이 컵을 작다고 보는데 다른 사람이 크다고 하면 틀렸다고 할 게 아니라 ‘저 사람은 이 컵을 크다고 인식하는구나.’ 이렇게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 다르게 인식한다고 해서 갈등이 생길 일이 없습니다. 누구는 시카고 가는 길이 동쪽이라고 하고 누구는 서쪽이라고 하면 어느 게 맞는지 따질 필요가 없어요. 서쪽이라고 하면 ‘아, 저 사람은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구나.’라고 이해하면 되고 동쪽이라고 하면 ‘저 사람은 보스턴에 살고 있구나.’ 이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공한 줄 알면 마음에 괴로움이 일어날 일이 없습니다. 존재 자체는 크지도 작지도 않으니 작다, 크다라고 말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내가 인식하는 대로 말할 수는 있지만 절대적 성질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서로 다를 뿐이지 누가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고 높고 낮고가 없습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논쟁하는 사람들을 볼 때도, 누가 맞는지 따지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은 믿음이 다르구나.’라고 바라보면 됩니다. 제가 너무 길게 얘기했는데 이해하셨습니까?”
“네, 스님. 모든 예시들이 다 공감이 되었습니다. 굉장히 흥미롭고 훌륭한 답변이었습니다. 훨씬 더 이해가 깊어진 거 같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출처 : 외국인과 즉문즉설 중에서
“After getting to know you, I have been taking deeper interests in Buddhism. One Buddhist concept of "Shunyata (공사상)" is difficult for me to understand. Will you please explain to the general public what is "Shunyata (공사상)" with simple examples for us laymen to understand? Secondly, how can we use the understanding of "Shunyata" in our day-to-day lives? On a related note, from Jungto 1000 day practice, I have been learning that "The root of all suffering and attachments is within us... and that the mind itself is empty. With this realization, our suffering naturally disappears.". But, I am not making a connection between "mind itself is empty" and "with this realization, our suffering naturally disappears." Can you please explain to us the general public with examples how this realization of an empty mind leads to the disappearance of suffering?”
“스님을 뵙고 저는 불교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중 ‘공사상’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천일결사 기도 수행문에도 ‘모든 괴로움의 뿌리가 다 마음 가운데 있고, 그 마음에 실체가 본래 공한 줄 알면 모든 괴로움은 저절로 사라진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이 이해가 안 됩니다. 마음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어떻게 괴로움이 사라지게 되나요? 저와 같은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한 예를 들어서 공에 대해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