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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로 불리는 오스트레일리아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 한구석에 치우쳐서, ‘고립된 땅’이라는 인상을 주는 곳이다. 이 아대륙의 동남부에 살던 원주민들은 1770년 영국인과 처음 만났을 때, “금속의 사용이나 농경, 가축 사육(개를 제외한), 토기, 그리고 활과 화살 같은 종류의 기술들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조상이 호주에 처음 닿았을 때는 이러한 기술들 중 아무 것도 갖고 오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C.W.M. 하트[Hart]’ 교수와 ‘아놀드 R. 필링[Arnold. R. Pilling]’ 교수. 아래 ‘하트 교수와 필링 교수’).”
따라서 “호주란 마지막 섬에 닿았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멀리 나아갈 수가 없었고, 그곳에서 격리된 채로 살아가면서 자기네들이 가져온 단순한 기술을 더 발전시키지도 않고 유지만 해 왔던 것이다(하트 교수와 필링 교수).”라는 말은 사실인 것 같고,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지역과 시대를 가리지 않고, 유럽인이 오기 전까지 똑같은 문화를 지닌 채 똑같은 삶을 살아온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 그들은 하트 교수와 필링 교수가 연구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한 갈래인 ‘티위’ 족이 자신들이 살던 섬에 다른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민족이나 말레이인 같은 바깥 사람들이 들어왔을 때, 그들을 죽이거나 내쫓아 버린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철저하게 배타적이며 다른 민족이나 인종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들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러한 인식은 적어도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의 원주민들을 묘사할 때에는 더 이상 써먹을 수가 없다. 그들은 영국인이 오기 수 세기 전(또는 3세기 전이나 1세기 전)에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만났고, 그들과 오랫동안 교류했으며, 평화롭게 공존했고, 유럽인이 오스트레일리아에 나타난 뒤에도 온 서른여섯 해(136년) 동안 그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만남은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의 원주민 언어와 물질생활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지도를 펼치면 그 의문을 풀 실마리가 보인다. 오스트레일리아 아대륙의 지도를 보자. 지도를 보면, 오스트레일리아의 동부와 서부와 남부는 주변에 접촉할 만한 다른 지역이 없다. 동쪽으로는 흔히 ‘뉴질랜드’로 알려진 ‘아오테아로아’ 섬이 있으나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큰 바다만 있지, 대륙이나 섬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북부는 다르다. 북부는 파푸아뉴기니가 있는 뉴기니섬, 동티모르가 있는 티모르섬, 인도네시아 땅인 셀레베스섬이 가까운 곳에 있고, 배를 탈 수 있다면 오스트레일리아 북쪽에서 뉴기니섬/티모르섬/셀레베스섬으로 가거나 그 반대로 갈 수 있다.
그리고 만약 그 배가 바람을 받고 움직이는 돛단배라면, 양력 1월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북부로 북서 몬순이 부는 것을 틈타 남쪽인 오스트레일리아로 내려가고, 양력 7월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동남아시아로 부는 남동 몬순을 이용해 다시 동남아시아로 올라갈 수 있다. 이는 교역과 교류가 일어나기에 좋은 조건이다.
게다가 인도네시아는 이미 기원전 400년부터 청동기와 철기를 쓰기 시작했고, 아무리 늦어도 기원후 4세기에는 인도네시아에 왕국이 세워질 정도로 문명이 발달했다. 그리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이미 1세기부터 돛을 단 전통 선박을 만들기도 한 나라였다. 이런 나라와 교류했다면, 그 영향을 받아 문화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 이제 두 민족 사이의 교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 사실을 연구한 사람들의 설명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의 토레스 해협 섬 주민과 술라웨시섬 남쪽에 있던 독립왕국인 ‘마카사르(Makassar)’ 왕국 장사꾼들은 1200년대(한국으로 치면 후기 고리[高麗] 시대고, ‘만주’로 치면 금나라 시대이며, 제하[諸夏]로 치면 남송 시대고, 비엣남[Vietnam]으로 치면 ‘다이비엣[대월(大越)]’ 시대다)부터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의 바닷가로 건너가기 시작했다(그들이 당시에 남긴 야영지의 유적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 수 있다).[어떤 사람들은 마카사르 사람들이 1200년대가 아니라 1400년, 또는 1606년이나 1720년에 시작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연대를 따르건, 그것은 영국인이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한 해보다는 훨씬 이르다] 제하(諸夏) 시장에서 고급 요리의 재료이자 한약재로 높이 평가받는 미(‘해삼[海蔘]’의 순수한 배달말 낱말)를 낚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제하(諸夏) 남부 시장에 미(‘해삼’)를 공급하려고 아넘랜드(Arnhem Land)[오늘날의 ‘다윈’ 시가 있는 곳]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오스트레일리아 북부의 원주민인 ‘요잉구[Yolngu]’의 한 갈래인 ‘이르칼라[Yirrkala]’의 ‘구마츠[Gumatj]’ 씨족을 만났는데, 나중에는 아넘랜드 반도 뿐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 북쪽의 다른 바닷가에도 갔고, 그곳에서도 요잉구 족과 교역했다고 한다.
이들은 티위 족을 뺀 나머지 북부 원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 사실은 요잉구 족의 구전(口傳. 말로 전하여 내려옴) 갈마(‘역사’)나 노래에도 남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원주민들은 마카사르 왕국 사람들과의 만남이 “길고 평화로운 접촉”이었다고 기억한다.
마카사르 왕국 사람들은 해마다 여름(남반구에서는 1월이 여름이다)이 되면 북서 계절풍을 타고 아넘랜드 바닷가로 왔다가, 석 달 뒤 남동풍을 타고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그들은 미(‘해삼’)나 바다 민달팽이를 모으려고 아넘랜드로 왔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아예 아넘랜드에 뿌리를 내리기까지 했다.
(덧붙이자면, 마카사르 사람들이 요잉구 족의 땅에 온 걸 알 수 있는 까닭은, 요잉구 족이 동굴 벽에 그린 그림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그림들은 마카사르 사람들이 타고 온 커다란 배를 그린 그림들이다)
무역이 이루어진 방식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먼저 요잉구 족 출신 잠수부들이 바다에 들어가 작살로 미(‘해삼’)를 잡아 물 위로 가져오면, 마카사르 사람들이 그것을 쪼개서 바닷물에 끓인 다음, 모래나 돌 밑에 눌러 햇볕에 말린 뒤 연기로 훈제했다. 그리고 그것을 얻은 마카사르 사람들은 답례로 요잉구 족에게 쇠로 만든 칼이나, 쌀이나, 옷감이나, 담배를 주었고(담배는 콜럼버스 이후에야 아메리카[‘거북섬’] 밖으로 퍼졌으므로, 무역 초기에는 칼/쌀/옷감만 주었을 것이다. 담배를 주는 관행은 1606년 이후에 뿌리내린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요잉구 족에게 술/철제 도구/통나무배를 파서 만든 카누/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소개했다. 그래서 요잉구 족은 영국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로 오기 수 세기 전(또는 온 예순네 해[164년] 전. 이는 무역이 1606년에 시작되었다는 학설을 따를 때 얻을 수 있는 수치다)부터 철기를 썼다.
(마카사르 사람들은 타마린드 나무의 씨를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져와서 심은 사람들이기도 한데, 이 나무는 잎이나 열매를 약으로 쓰고, 잎으로는 차를 만들어서 마신다. 열매는 향신료로 쓰이거나 과일로 먹기도 한다. 이 나무의 열매는 변비약이나 몸의 열을 식힐 때에도 먹는데, 맛은 새콤달콤하며 보통 단맛과 곶감 맛이 난다. 이는 요잉구 족의 식생활과 의료에도 기여를 했음이 틀림없다)
(마카사르 사람들은 또한, 오스트레일리아에 맨 처음 이슬람교를 소개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마카사르 사람들은 가공한 미(‘해삼’)를 티모르 섬으로 가져가서 그곳에 온 ‘한족(漢族)’들에게 그것을 팔고, 그 다음 마카사르로 돌아갔다. 그들은 아넘랜드를 ‘마레게(Marege)’로 불렀으며, 아넘랜드 서부에 살던 원주민들은 마카사르를 ‘망가 자라(Mangga djara)’ 또는 ‘무낭가(Munanga)’로 불렀다.
이 마카사르 사람들은 요잉구 족의 바다에서 고기를 잡을 권리를 얻으려고 요잉구 족과 협상을 벌였으며, 요잉구 족을 어업 노동자로 고용했고, 요잉구 족의 전승(이자 설명)에 따르면, 마카사르 사람들은 “이 바닷가에 왔을 때, (요잉구 족의) 족장이나 우두머리나 지도자에게 해삼을 얻기 위해 허락을 구했다.”고 한다. 또한 마카사르 사람들은 아넘랜드의 바다에서 진주를 캘 권리를 얻으려고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고, 대부분은 요잉구 족에게 진주를 가져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또, 마카사르 왕국 뿐 아니라 (역시 인도네시아의 동부인) 소(小) 순다 열도의 ‘플로레스’ 섬이나 ‘로티(Roti)’ 섬에서도 사람들이 오스트레일리아 북부로 건너와서 교역했다.
요잉구 족의 한 갈래인 ‘마웅’족 출신 목사의 글에 따르면, “ … 마카사르인들은 아주 오랫동안 우리 지역에 오고 있었다. 우리 민족은 그들을 좋아했고, 우리가 ‘바라’라고 부르는 북서풍이 불 때 배가 돌아오면 우리는 그들을 보고 기뻐했다. … 배가 미(‘해삼’)를 낚을 때, 각 배에는 약 10명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 일하고 약 10명의 마카사르인들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 마카사르인들은 무두질을 하고 미(‘해삼’)를 포장하는 것을 도왔다. 마카사르 사람들은 떠나기 전에 잔치를 열었다. … 그들은 다음 해에 원주민을 다시 만날 테니, 거북이 등껍질과 부갈로 뿔을 모으라고 말하고, 선물을 가져오겠다고 약속했다, 원주민들은 마카사르인들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들은 ‘형제’, ‘삼촌’, 또는 ‘아버님’을 뜻하는 원주민어 낱말로 마카사르 사람들을 부르곤 했다. 그들은 (마카사르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는 계절이 왔을 때 기뻐했다. 그들은 마카사르 사람들이 가져온 선물을 받는 것을 좋아했다.”
요잉구 족이 마카사르인들을 좋아했던 까닭이 단순히 아토(‘선물’을 일컫는 배달말 낱말)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카사르인들의 행동이나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마카사르 사람들은 요잉구 족의 땅에서 자원(미[‘해삼’]나 진주)을 가져갈 때 반드시 원주민인 요잉구 족의 허락을 받고 나서 했고, 그냥 가져간 게 아니라 대가를 주었다. 그리고 그들(그러니까, 마카사르 장사꾼들과 어부들)은 바닷가에서만 야영했지 내륙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지는 않았고, 요잉구 족 여성들과의 접촉을 피했다.
이렇게 요잉구 족을 존중하고 그들의 권리를 침범하지 않으면서 무역을 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요잉구 족도 배를 타고 마카사르 사람들의 땅으로 건너가게 되는데, 이는 제 3자인 영국인의 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 1841년 ‘조지 윈저 백작(George Windsor Earl)’이 쓴 글에 따르면, “바닷가를 떠나는 거의 모든 페라후(인도네시아 전통 배)는 두세 명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을 마카사르로 데려가고, 다음 계절에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낸다.”고 했다. 요잉구 족 방문객들은 마카사르에 머무는 동안 미(‘해삼’) 산업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한 명의 보살핌을 받았다.
이러한 외교적 여행은 특정 요잉구 씨족과 페라후 선단을 꾸려나가는 마카사르인 집안 사이의 유대를 강화했다. 원주민들에게 마카사르인들의 항해를 따라가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고, 무역/교역이 시작된 뒤 수많은 원주민 젊은이들이 그 모험에 참가했다(어떤 사람은 이 ‘해외 원정’이 젊은 요잉구족 남성에게 일종의 ‘통과의례’로 여겨진 건 아니냐는 의문을 품는다). 여행을 한 사람들은 세상을 보는 시야가 상당히 넓어졌으며, 그들이 본 많은 놀라운 것들에 대한 매혹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또한 그들은 고향에서 익숙했던 것과는 다른 사회조직을 경험했다.
요잉구 족인 ‘라미라미(Lamilami)’는 마카사르 여행의 몇 가지 매력에 대해 설명했는데, 그는 사람들(그러니까, 요잉구 족)이 ‘골번’ 섬에서 마카사르로 갔을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어떤 내우를 받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들은 (마카사르)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매우 친절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마카사르 왕국에) 경찰관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 그러니까 마카사르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서 법을 지킬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마카사르 사람들)에게도 (요잉구 족처럼) 전사들이 있었지요. … 요잉구 족 남자들 가운데 몇몇은 마카사르에 여자친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민족은 그곳에 가서 통나무배로 만든 카누와 아름다운 천(바틱? - 아사달)과 칼을 만드는 다양한 도구들을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마카사르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젊은 원주민 남성들은 귀환 후 지역 사회에서 명성을 얻었는데, 이는 그들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대부분의 요잉구 족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장소와 사람들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전달했기 때문이며, 그들의 마카사르어 구사 능력은 미래에 마카사르와의 무역 협상에 쓰일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기도 했다. 마카사르어에 대한 원주민들의 지식은 해안을 따라 있는 다른 요잉구 족 공동체와의 무역 거래를 중개할 때도 큰 수요가 있었다.
이런 교역은 요잉구 족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 증거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쓰는 언어의 낱말 가운데 많은 것이 인도네시아/말레이어와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한 예로, 요잉구 어로 ‘바파(Bapa)’는 ‘아버지’라는 뜻인데, 인도네시아어로는 ‘아버지’가 ‘바팍(Bapak)’이다. 그리고 요잉구 어로 ‘바위/돌’은 ‘바쑤(Bathu)’인데, 인도네시아 어로는 ‘바투’다. 또, 요잉구 어로 ‘채소(푸성귀) 식품/감자’는 ‘바왕(Bawang)’인데, 인도네시아어로는 ‘양파/마늘’이 ‘바왕’이다. 나아가 요잉구 어로 ‘내리다.’는 ‘드후륜(Dhuryun)’인데, 인도네시아어로는 ‘내리막’이 ‘투룬(Turun)’이다. 요잉구 어로 ‘큰 배’는 ‘가팔라(Gapala)’인데, 인도네시아어로는 같은 말이 ‘카팔(Kapal)’이며, 요잉구 어로 ‘나무’는 ‘가유(Gayu)’인데, 인도네시아어로는 ‘카유(Kayu)’다. 나아가 요잉구 어로 ‘백인’이나 ‘유럽인’을 뜻하는 ‘발란다.’는 표준 인도네시아어로는 ‘벨란다’고, ‘돈’을 뜻하는 요잉구 말은 ‘루피야’인데, 인도네시아의 통화는 ‘루피아’다. 이는 요잉구 족이 마카사르 왕국 사람들이나 플로레스 섬사람들이나 자와(자바) 사람들과 교역하면서 그들의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요잉구 족과 마카사르 사람들의 무역은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고(18세기) 오스트레일리아에 영국인들이 물밀 듯이 밀려온 뒤(19세기)에도 계속되었으나, 19세기 말에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가 무역에 관세를 부과하고 미(‘해삼’)와 진주 채취를 하기 위한 면허를 발급하며 그 수수료를 걷어가자 서서히 무역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1901년(이때 한국에는 대한제국이 있었다)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정부가 무역을 금지했으며, 연방 정부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영토 보전”을 위한 법안을 도입하고 1906년(이보다 한 해 전인 1905년에 을사늑약이 강요되어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기고 근대 왜국[倭國]의 속국이 된다)에는 더 이상 마카사르인의 미(‘해삼’) 수확 허가를 갱신하지 않음으로써, 그때부터 요잉구 족의 생활 방식에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불행히도 요잉구 족은 마카사르인이 왜 오지 않는지를 알지 못했고, 이후 둘 사이의 관계가 끊어지고 마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과 마카사르 사람들은 1993년부터 이 관계를 되살리려고 시도했고, 2000년대에는 마카사르로 옮겨갔던 요잉구족의 후손 가운데 다수가 요잉구 족을 만났다고 한다.
※ 참고 자료
- 『 티위 사람들 – 북호주 원주민의 문화 - 』( ‘하트/필링’ 지음, ‘왕한석’ 옮김, ‘(주)교문사’ 펴냄, 1987년 )
- 『 고등학교 지리부도 』( ‘이기석/오홍석/황만익/반용부/허행구’ 지음, ‘주식회사 보진재’ 펴냄, 1995년 )
- ‘데비앙 아트’의 역사만화인 < 마아프(Maaf) > 작가가 참고한 자료들
- 음력 12월 19일에, 아사달이 올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