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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초시는 과거에 여덟번 낙방하고 거의 폐인이 됐다. 술로 세월을 보내다 노름판에 끼더니 막판에는 저당 잡힌 집도 날아가게 생겼다. 어두컴컴한 노름방에서 온몸의 기(氣)를 쥐어짜 내도 끗발은 오르지 않고 눈이 침침해지더니 골패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부지 노름을 끊으셔야 해요.”
하나 남은 핏줄, 홍매가 울면서 사정해도 눈이 뒤집힌 홍 초시는 막무가내다.
살벌한 노름판에서 땅이 꺼질 듯한 한숨과 가슴을 찌르는 분노가 뒤엉켜 홍 초시의 어금니가 흔들거렸다. 묵 한그릇, 막걸리 한잔으로 밤을 꼬박 새운 게 몇번이던가. 십여년간 과거 공부를 하느라 말라버린 몸에 노름판에서 피를 말리느라 피골이 상접하고 눈은 퀭하니 십리나 들어갔다. 봄 고뿔에 드러눕더니 열흘이 지나도 보름이 지나도 일어나지를 못하고 식은땀만 흘렸다.
“홍매야!” 모깃소리다.
“아부지 나 여기 있잖아요.”
“어디 어디?”
부지깽이 같은 앙상한 팔을 휘젓는 게 심 봉사를 빼닮았다 했더니 그렇게 홍 초시는 장님이 됐다.
“내 눈 내 눈….”
흔들리던 이도 빠지기 시작했다. 사랑니에 이어 어금니가 빠지더니 합죽이가 됐다. 온몸이 불덩어리였다.
열다섯살 홍매가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잔칫집 허드렛일을 해 입에 풀칠을 했다. 홍매가 데려온 의원이 진맥해보더니 “장사 치를 준비나 해. 편작이 와도 안돼”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의원이 가고 나자 홍매는 반시체가 된 홍 초시를 부여안고 “아부지”하며 통곡했다.
홍 초시는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듯이 잠만 잤다. 홍매가 의원 말대로 장례 치를 준비를 하고 있는데 빚쟁이 돈놀이꾼이 들이닥쳐 신발을 신은 채 안방까지 들어와 쿵쿵 뛰었다. 홍매가 싹싹 빌었지만 이미 세번이나 미룬 터라 더 할 말도 없었다. 돈놀이꾼의 귓속말을 듣고 홍매는 화들짝 놀랐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밤새 울고 나니 눈이 퉁퉁 부었다.
이튿날 기생집 주인과 행수기생이 홍매를 찾아왔다. 집에서 쫓겨나는 건 면했지만 한달 후 홍매는 기생이 돼야 하는 것이다. 기생으로 팔린 값으로 빚을 갚고 묫자리도 마련해놓았다. 밤에도 몇번씩 숨이 끊긴 건 아닌지 아버지 코에 귀를 댔다. 명주실처럼 숨이 가늘게 이어지자 홍매는 안도했다. 곡기를 끊은 채 잠만 잔 게 도대체 몇날 며칠이던가.
어느 날 밤 잠자던 홍매가 손을 뻗어 아버지를 더듬다가 깜짝 놀라 호롱불을 켰더니 아버지가 벽에 기대 앉아 무엇인가 중얼거렸다. 이가 거의 다 빠져 말이 되진 않았다. 홍매가 밥을 씹어 아버지 입에 넣어주자 오물오물 목구멍으로 넘겼다. 이튿날 씨암탉 한마리를 사와 황기·대추·수삼을 넣고 푹 과서 홍매가 씹어 제 아비 입속에 넣자 끝없이 받아먹었다.
“아부지 살았어요. 천지신명이시여 고맙습니다. 으흐흐흑.”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 홍 초시는 ‘주역(周易)’을 줄줄 읊었다. 다른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홍매는 제 아비 말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홍매가 홍 초시를 부축해 나들이도 갔다.
어느 날 양지바른 우촌댁 툇마루에 홍매가 제 아비 팔짱을 끼고 앉아 우촌댁과 얘기를 했다.
“아부지 내달 보름날 우촌 아주머니가 큰일을 치른대요.”
“사위를 보는가?”
홍 초시가 물어 홍매가 통역했더니 “예. 초시 어른도 꼭 오셔야 합니다”라고 우촌댁이 답했다.
홍 초시가 손가락으로 뭔가 만지작거리더니 웅얼웅얼했다.
“아주머니, 아부지가 손가락으로 육갑을 짚어보더니 그날 천둥 번개에 폭우가 쏟아진대요.”
홍매가 말하자 우촌댁이 웃었다.
그날이 왔다. 꽃 피는 춘삼월 보름, 사모관대를 쓴 신랑과 연지곤지 바르고 족두리를 쓴 신부가 막 맞절을 하는데 그 좋던 날씨가 갑자기 변해 돌풍이 불어 차양이 날아가고 혼례상 위의 장닭이 떨어지며 장대비가 쏟아졌다. 하객들은 혼비백산이 됐다. 잔치가 엉망이 됐는데 단연코 화제는 홍 초시의 적중한 천기였다.
소금 장수가 돈 보따리를 싸 들고 찾아왔다.
“초시 어른, 염전에 가서 소금을 미리 사두려고 합니다.”
홍 초시가 고개를 저었다.
“가을 태풍이 무섭게 올 거요. 창고에 있는 소금을 사둬.”
날씨뿐만이 아니다. 홍 초시의 예지력(豫知力)은 상상을 초월했다. 함경도 무산에서 금광을 사려는 거부가 찾아오고, 제물포에서는 선단을 거느린 거상이 찾아오고, 청나라 무역상도 찾아왔다. 기생집 주인은 위약금도 없이 홍매 선도금 약정서를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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