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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도 땅이름 / 가덕도 개요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대항리(大項里) [큰목, 대항] (부산시 강서구 천가면)
본래 웅천군 천가면의 지역. 지형이 크게 목이 되었으므로 큰목 또는 대항이라 하였는데, 융희 2년(1908)에 창원군에 편입되고, 같은 4년(1910)에 마산부(시)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항리라 해서 창원(의창)군에 편입.
가덕등대(加德燈臺) 【등대】동두말 남쪽 6km 지점의 등대. 일제 때 만들었는데, 사라호 태풍으로 피해를 입어 새로 만듦.
국수봉(國守峯) 【산】대항 동남쪽에 있는 산.
남산(南山) 【산】대항 남쪽에 있는 산.
내동섬 【섬】 대항 남서쪽에 있는 섬. 숭어잡이로 유명한 어장이 있음.
농바우섬 【섬】대항 남서쪽에 있는 섬. 농처럼 생겼음.
달빙이섬 【섬】대항 서쪽 3km 지점에 있는 섬. 달팽이처럼 생겼음.
동두말(東頭末) 【곶】대항리 남쪽 끝에 있는 곶.
동받이 【마을】→ 새받이
동섬조 【어장】오지양개 앞에 있는 어장.
두퉁개 【개】동두말 서북쪽에 있는 개.
땅집 【당】→ 제당.
망티 【산】동두말 북쪽에 있는 산.
멧새미 【우물】대항 뒷산 중턱에 있는 샘.
방띠이 【산】종바우섬 안에 있는 산.
사모령 【산】울분서 서쪽에 있는 산.
새받이1 [동받이] 【마을】대항 동쪽에 있는 마을. 샛바람(동풍)을 받는다고 함.
수리당먼뎅이 [관측산] 【산】대항 남쪽 1km 지점에 있는 산. 해군의 관측소가 있었다 함.
수무조 【어장】오지양개 앞에 있는 어장.
애기바구 [아동도] 【섬】새받이 동쪽에 있는 섬. 아이의 머리처럼 생겼음.
어은포 【어장】오지양개 앞에 있는 어장.
오지양개 【개】외양포 동쪽에 있는 개.
오지양조 【어장】오지양개 앞에 있는 어장.
외양포(外洋浦) 【마을】대항 남쪽에 있는 마을.
외양포고개 【고개】대향 앞에서 외양포로 가는 고개.
월분서 【섬】대항과 외양포 사이에 있는 섬.
자갈 【개】대항 앞에 있는 개.
제당 [땅집] 【당】대항 동쪽 500m 지점에 있는 제당. 당제를 지냄.
지양고개 [천성고개] 【고개】대항에서 천성리로 가는 고개.
천성고개 【고개】→ 지양고개.
큰목 【마을】→ 대항리.
탕근바우 【바위】대항 동쪽 5km 지점에 있는 바위. 탕근(탕건)처럼 생겼음.
헌병샘이 【우물】대항 남쪽에 있는 샘.
(이상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회장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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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도
가덕도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동에 속한 섬으로, 면적 21.073km2, 해안선 길이 36km이다. 명칭 유래를 보면 예로부터 섬에서 더덕이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가덕도는 천가산의 연대봉(煙臺峰, 459.4m), 국수봉(269m)을 중심으로 산지가 발달하였다.
북동쪽에 가로놓여 있는 눌차도(訥次島)는 사주에 의해 만들어진 육계도이다. 가덕도는 통일신라 때 당나라와의 무역을 하는 데 있어서 주요 항구 중의 하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웅천군(熊川郡)에 속하였다. 1908년 창원군에 편입되고, 1910년 마산부(馬山府)에 소속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다시 창원군에 편입되었다. 1980년 창원시의 승격으로 의창군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에는 부산광역시 강서구에 편입되었다.
구비전승으로는 처녀바위와 총각바위 전설과 등지노래, 가덕팔경가 등이 전해온다.
부산 지하철 1호선인 하단역에서 시내버스를 타면 가덕도에 올 수 있다. 거가대교는 가덕도를 거쳐서 거제시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부산·거제간 광역도로망이 건설되어 부산은 동남광역권의 산업과 항만, 물류 등을 담당하게 된 중요한 곳으로 변신하였다.
가덕도 둘러보기
내눌마을에서 동선방조제를 타고 남쪽으로 가면 동선새바지에 닿는다. 방조제에서 바닷가 쪽으로 바라보면 낙동강 하류인 다대포가 보인다. 몰운대의 길쭉하게 생긴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방조제를 따라 끝까지 가면 ‘생교동’이며, 오른쪽은 동선마을로 가는 길이고 왼쪽은 선착장으로 가는 길이다. 그리고 오른쪽 바닷가에 있는 조그마한 소나무로 덮인 섬이 ‘죽도’고, 마주 보이는 산이 강금봉이다.
포구 안에 가지런히 정박해 있는 배들은 대부분 FRP선들이다. 방파제 끝에는 하얀 무인등대가 서 있다. 방파제가 시작되는 지점의 바닷가로 직진하면 기도원 가는 길이 나온다. 갈맷길이 조성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동선방조제에서 동선새바지 가는 길목 삼거리에서 보면 갈림길에 색 바랜 노란 페인트집의 ‘소나무집’이란 간판이 보인다. 이 옆으로 난 길을 지나면 동선마을이다. 동선마을은 동묘산과 응봉산을 중심으로 한 산악중심의 행정동으로 세 개의 자연마을(생교, 서고지, 동선)로 구성되어 있다. 동선(東仙)마을은 창원군 천가면 지역의 동쪽 선창이 되므로 동선(東船)에서 동선(東仙)이라는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차가 한 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콘크리트길을 계속 가다보면 양쪽은 조립식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오른쪽으로 죽도가 보이는데 그 앞바다는 영 바다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바다가 죽었다는 의미다.
법정동인 가덕도동과 본동인 성북동 역시 네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 입구 오른쪽에서 보면 허름한 건물이 하나 보이는데 제칠안식일예수재림교회다. 다른 교회처럼 커다란 십자가는 보이지 않고 건물도 특이하다. 무심코 지나가면 교회인지도 모를 정도다. 방향을 ‘가덕도동사무소’가 있는 곳이 아닌 오른쪽 샛길로 들어서면 전형적인 시골 마을길이 나타난다.
이 동네는 바로 가덕동사무소가 있는 ‘성북마을’로 초·중·고를 비롯하여 파출소도 있고 보건지소도 있고 농협도 있는 등 가덕도의 행정중심지라 할 수 있다. 성의 북쪽에 위치했다 해서 붙여진 성북(城北)마을 입구에는 성북마을 표지석이 간단하게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근처에 김근도 독립유공자 동상이 세워져 있다. 성북마을에서 선창까지는 제법 멀다.
예전의 도선 선착장이 있는 곳으로, 가덕도 제 1관문이었던 선창(仙倉)이다. 물론 선착장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는 수군 군항지였다. 마을 뒷산에는 갈마봉이 있고, 그곳에 왜성이 하나 있다. 패류양식과 유자재배를 주업으로 한다. 옛 선창 매표소 옆에는 ‘선창(仙倉)마을’이라는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선창의 아침은 가덕의 특산물들이 돛배에 가득가득 실려 나가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는 인근 5일장은 물론, 멀리 낙동강 수로를 이용한 삼랑진장과 부산 자갈치시장까지 판로를 넓히는 등 배를 이용한 상행위가 왕성한 항구였다. 그리고 이곳 선창포구를 통해 대항에서 잡은 ‘가덕대구’, 눌차만의 ‘바지락과 굴’, 천성의 ‘미역’, 동선과 성북의 ‘양파’등이 가덕해로의 물살을 가로지르며 인근 송정장(녹산동), 용원장(진해)으로 실려서 나갔다.
1871년(고종 8)에 쇄국정책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우리나라 곳곳에 설치했던 ‘척화비’가 이 마을 뒷산 갈마봉 끝자락에 세워졌었고(지금은 성북동 천가초등학교로 옮겼다), 1554년(중종 39)에는 조선 수군의 주둔지로서 해안방어기능을 다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적인 영화를 뒤로하고 부산신항 공사로 인해 선창포구 영역은 상당히 위축되어 있다.
타원형의 선창포구는 선착장 바로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고깃배보다는 보트선외기가 더 많은 포구, 낚시꾼조차 찾아볼 수 없고 그 흔한 기중기도 없을뿐더러 포구 내의 기본시설마저 거의 없는 선창포구는 성북어촌계에 포함된다. 의창수협 산하 성북어촌계는 선창을 비롯하여 인근의 율리포구와 장항포구를 아우르고 있다.
선창에서 부산신항 배후도로를 타고 계속 가면 율리마을에 닿는다. 그러나 율리와 장항은 부산신항 공사로 인해 일부만 남아 있을 뿐 마을 자체가 거의 사라졌다. 밤마을로 알려진 ‘율리(栗里)마을’이다. 마을 뒤편에 구곡산(236m)과 삼박봉(310.9m)이 가지런히 서 있다. 구곡산은 선창의 갈마봉과 율리 삼박봉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뒷동산이다.
‘장항(獐項)마을’은 긴 항·포구를 끼고 있는 마을이다. 노루의 목처럼 생겨 노루목이란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 율리에서 장항까지는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장항에서 두문까지도 직선거리로는 먼 거리가 아닌 듯싶지만, 산 중턱을 끼고 도는 콘크리트길을 걸어야 하는 관계로 상당히 멀다. 산 중턱까지 이어진 꼬불꼬불한 찻길이다.
두문과 장항은 행정소속이 다르다. 장항은 성북동 관할 자연마을이지만 두문항은 천성동 소속 자연마을이다. ‘두문(斗文)마을’은 옛날 앞바다에서 생선이 많이 잡혔는데 한 마리씩 헤아리기 힘들어 말(斗)로 되서매매했다는 어원에서 생긴 마을이라고 한다. 선착장 입구 맞은편에 마을안내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두문마을은 연대봉을 등에 지고 몽돌밭이 있는 두문만을 굽어보는 아름다운 곳이다. 1544년에 천성보(天城堡)가 설치되면서 마을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서중 남중과 함께 옛 창원군의 천가면 천성리를 형성하였다. 산물로는 쌀, 보리, 콩 등과 전어, 숭어, 문어, 새우, 피조개와 성게 등이 채취된다. 이 마을에는 다른 마을과 달리 간이식 공중화장실이 있다.
두문에서 천성까지는 느린 걸음으로도 20여 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다. 천성으로 넘어가는 고개 아래 바닷가로 이어진 곳에 동뫼선착장이 있다. 왼쪽에 폐교된 천가초등학교 천성분교가 보인다. 내리막길을 가면 오른쪽에 서중선착장이 있다. 천성마을에는 세 개의 선착장이 있다. 서중과 남중 그리고 한창 공사 중인 천수말 선착장이 그것이다. 천수말에는 거가대교 가덕휴게소가 있다.
서중교라는 다리를 건너면 본격적으로 마을에 들어서게 된다. 이 다리는 가덕도의 유일한 저수지인 서중소류지에서 흘러나오는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로, 이 하천은 바다와 이어진다. 다리 건너 마을 중간에 조립식 건물로 된 마을회관이 있고 그 앞에는 남중선착장이 있다. 마을회관이 있고 매표소를 겸하는 가게가 있으며 그 사이에 두 개의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하나는 충효비이고 하나는 마을표지석이다. 충효비에는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이 忠이며 어버이를 잘 섬기는 일이 孝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마을표지석에는 천성마을 내력을 담고 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가덕도의 구석구석에는 역사의 흔적들이 즐비하다. 가덕도가 진해와 마산, 부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던 탓에 역사의 소용돌이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서중마을 뒤 교회 건물 옆의 밭에는 왜구가 침입하는 길목이었던, 가덕도에 세워졌던 천성진성이 있었다. 근처에 이순신 전승 기념비문도 있으나 지금은 일부 흔적과 안내문만이 있을 뿐 찾는 사람이 없다. 천성동과 성북동 사이에는 또 6·25 당시 참전했던 가덕도 젊은이 23명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국군묘지와 충혼 기념비가 있다.
가덕도는 행정동으로 보면 강서구 가덕도동이다. 그리고 법정동은 모두 5개(동선, 성북, 눌차, 천성, 대항)인데 그 중심이 바로 대항동이다. 외양포와 더불어 가덕도의 최남단에 위치하는 가덕도의 마지막 마을이자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성북동이 행정의 중심지라면, 대항은 어항의 중심지다. 그래서 이곳에는 행정시설이 몇 가지 있다. 해양경찰파출소가 있고 폐교된 천가초등학교 대항분교도 있다. 보건진료소뿐만 아니라 어촌체험관광마을 관광안내소까지 갖추었다. 이곳이 관광의 중심지다.
포구가 아주 아름답게 만들어졌다. 포구 입구 쪽은 원형으로 되어 있고, 바닷가 쪽에는 T자형으로 된 방파제 시설을 갖추었다. 일종의 놀이터인데 해안도로와 연결된 원형은 보통 행사를 치르는 공간(무대 겸용)과 이용객들의 편의시설로 이용되고, T자형 방파제에는 선착장과 옛 매표소가 자리잡고 있다. 방파제 끝에 제법 큰 하얀 등대가 있다. 가덕도에는 유인등대인 가덕도등대 외 세 곳에 등대가 있는데 모두 한 개짜리 그것도 하얀 등대들이다.
T자형 중앙방파제를 중심으로 남측 소형방파제와 외곽방파제(일자형)가 구축되어 정온 수면을 확보하고 있다. T자형 방파제 바깥쪽은 테트라포스가 있어 낚시꾼들이 낚싯대를 드리운 채 세월을 보내는 모습을 종종 본다. 그리고 끝부분에는 방파제 옹벽보다 높은 컨테이너하우스와 천막을 친 옥상이 있다. 이곳 옥상에서 차 한 잔 하면서 거제도 너머로 떨어지는 낙조를 보는 것도 참 운치가 있을 거라 생각해본다. 또는 초저녁에 이 방파제 끝에서 끝까지 한 번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바다 쪽은 노을이, 호안 쪽은 노을에 젖은 대항마을의 불그스름한 아름다움이 가슴 속으로 들어올 것이다.
원형광장에는 나무벤치와 테라스 등의 휴게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옛 매표소까지 이어지는 방파제 바닥은 다른 방파제와는 달리 붉은 블록으로 만들어졌다. 양쪽 호안에는 작은 배들이 제법 정박해 있다. 더러 어부들이 배를 끌고 포구를 드나든다.
외양포로 가는 임도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바닷가 쪽(대항과 외양포 사이의 톡 튀어나온 언덕 아래 갯바위 부분을 ‘달뱅이’ 라고 부른다)으로 이어지는 길로 가면 또 다른 작은 방파제가 있다. 왼쪽은 돌로 경사제를 이루고 있고, 오른쪽은 끝자락이 계단형식으로 된 방파제다. 웬만한 크고 작은 어선들은 거의 여기에 다 모여 있다. 배를 끌어들이는 기중기도 있다. 이 방파제는 옛날 형태의 방파제이다.T자형 중앙방파제는 이후에 증축된 것이다.
그런데 이 방파제와 바로 앞의 일자형 방파제 사이 바다 한가운데에 낯선 시설물이 보인다. 가두리 양식장이라고 한다. 가두리 양식은 ‘그물로 만든 가두리를 수중에 띄워 놓고 그 속에서 어류를 양식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시설물은 엄밀히 말하면 가두리 양식장은 아니다. 이것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설치된 ‘해상가두리형 활어 일시보관시설’이다. 활어 일시보관시설이란 잡은 물고기를 살아 있는 상태로 해상 가두리에서 수용하다 적절할 때 출하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활어 일시보관시설을 이용하면 어민들이 고기를 다량 잡았을 때 가두었다가 출하조절을 통해 제값을 받을 수 있도록 일시저장하여 소득증대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한다. 보관기간이 길어야 1주일을 넘지 않도록 하는 점에서 가두리 양식과 차이가 있다. 2005년에 만들어진 이 시설은 가로 6m, 세로 6m의 일반가두리 4면과 직경 20m의 원형가두리 1면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원형 가두리를 설치한 것은 숭어나 고등어 등 회유성 어종을 위한 배려라고 한다.
대항의 겨울철 대표적인 어종은 물메기와 가덕대구다. 물메기는 국이나 탕으로 끓이면 속까지 시원한 맛 덕분에 해장국으로 각광받고 있다. 특히 회와 찜요리도 제 맛을 낸다. 그리고 ‘겨울의 진객’으로 꼽히는 대구는 북태평양에서 지내다가 산란기인 11월 말부터 1월까지 가덕도 앞바다로 몰려든다. 대구는 12월이 제철이다.
1월부터 금어기로 접어들기 때문이다. 가덕도는 또 숭어로도 유명하다. 숭어야 사실 철을 가리지 않는 물고기지만 봄철에 가덕도 쪽으로 몰리는 숭어 떼의 맛이 단연 최고라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가덕도에서는 전통방식인 이른바 ‘육수장망’ 어법으로 숭어를 걷어 올린다. 문화재로 등록을 추진 중인 이 어법은 6척의 배가 함께 나가 30여 초 만에 그물을 일시에 들어올려 잡아내는 방식이다.
대항에서 동쪽으로 언덕바지를 지나면 확 트인 바닷가와 함께 조그마한 어촌마을을 볼 수 있다. 바로 대항새바지라는 포구다. 가덕도에 ‘새바지’라는 명칭이 붙은 지명은 이곳 외에도 동선포구에 있다. ‘바지’ 란 표준어 ‘받이’에서 유래한 방언으로 세찬 바람과 거친 파도, 거기 휩쓸려온 자갈 따위가 자연의 힘을 바로 받아들이는 거칠고 황량한 장소를 의미한다고나 할까.
오른쪽은 넓은 자갈밭이지만 왼쪽은 포구다. 마을자체는 여느 마을과 다름없는 허름한 촌락이다. 그것도 아주 경사진 곳에 집들이 있다. 가게인지 아닌지도 모를 그런 집들이 즐비한 골목을 들어서면 영락없이 촌구석에 왔음을 실감한다. 바다가 훤히 보이는 집들은 조망권을 따진다면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이 또 있을까 싶다. 드넓은 바다가 보이고 방파제가 보이고 배들이 보이고. 거기에다 등대까지 있다.
여기서 연대봉을 보면 진면목을 가장 확실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대항새바지의 지형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바로 연대봉 정상이다. 정상에서 남해안쪽으로 눈을 돌려 왼쪽 아래를 내려다 봤을 때, 방파제가 들어선 움푹 패인 만(灣)처럼 생긴 조그마한 바닷가 마을이 바로 대항새바지포구다.
이곳 해안 역시 소규모의 곶과 만이 이어져 드나듦이 심하고 대부분 가파른 해식애(해안의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곳은 주로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 곳 중의 하나이다. 특히 방파제 주변은 낚시꾼들의 천국이다. 제법 큰 고기들이 잡히기도 한다.
마을로 안 골목을 들어서면 아래로 펼쳐진 시원한 바닷가와 방파제 그리고 그 끝자락에 위치한 하얀 등대가 인상 깊게 다가온다. 방파제 안쪽에 채 10여 척도 안 되는 작은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고 안쪽은 자갈밭이다. 물만 깨끗하면 해수욕장으로 사용해도 될 듯싶으나 물이 그다지 깨끗한 편이 아니다. 대신 공간이 좁아 그렇게 많은 배들이 정박할 수 없을 것 같다. 바다 건너 마주 보이는 바다 끝이 다대포다.
이곳은 바로 남해안과 맞닿아서인지 방파제에 부딪치는 파도가 제법 세다. 뒤로는 가덕도에서 가장 높은 연대봉 봉우리가 불쑥 솟아 있고, 앞으로는 동쪽을 향해 활짝 열린 바다를 마주할 수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갯바위가 많고 돌섬도 몇 개 있다. 바위들이 올망졸망하다. 이들 돌섬바위 중 하나가 동도바위로 촛대바위라고도 한다. 빳빳하게 치켜든 용머리처럼 보이는 촛대다.
오른쪽 높은 산이 국수봉(가덕도에는 ‘국수봉’이란 산 이름이 두 개다. 눌차도에도 국수봉이 있다)으로 이 산을 넘으면 건립 100년을 바라보는 유인 ‘가덕도등대’가 있고 ‘동백야생군락지’가 있다. 제법 걸어가야 하지만 그렇다고 군 작전지역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물양장 한쪽 톡 튀어나온 초소가 들어선 커다란 바위, 아래에 보면 동굴이 보인다. 잘 알려진 인공동굴이다.
이곳에는 인공동굴이 세 개 있다. 오른쪽 한 개는 아예 구멍을 막아버렸고 왼쪽은 어구창고로 이용되고 가운데 동굴만이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를 하고 있다. 세계 1, 2차대전 당시 가덕도를 점령한 일본군들이 연합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해안 여러 곳에 인공동굴을 파서 적기의 공습에 대피하고, 또 한편으로는 가덕도 해안에 상륙하는 연합군을 저지하기 위한 사격기지로도 사용되었다. 동굴 속으로 들어가 끝까지 가면 4각형의 공간을 통해 바로 앞 자갈밭이 훤히 보인다.
일본의 잔재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가장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외양포구다. 반짝이는 바다 물결 너머로 거제도가 한눈에 보이는 작은 포구 마을인 가덕도 외양포는 산자락이 아이를 맞이하는 어머니처럼 팔을 벌려 작은 만(灣)을 만들고 그 만 안으로 잔잔한 바다가 들어서 있으며 포구가 바다를 보호하고 있다. 어머니 품같이 아늑한 호안에 자리잡은 외양포구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하다.
산과 바다 사이의 평지에는 집 몇 채가 띄엄띄엄 서 있고 그 집들 사이로 밭이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다. 자연 그대로의 풍경이다. 집들은 대개 장방형으로 벽은 검은 나무판자를 물고기 비늘처럼 겹쳐서 세웠고, 하나같이 삼각형 지붕을 하고 있다. 지붕색상도 거의 하늘색을 띠고 있다. 울타리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나 보는 사각형 평지붕이나 콘크리트 건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로 옆에 위치한 대항마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여전히 푸른 물결을 품은 외양포다. 그러나 기억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일본군의 막사, 우물, 화장실, 수로 등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 것이다. 가덕도의 일본군 진지는 러·일전쟁의 산물이다.1904년 전쟁 발발 이후 일본은 러시아의 무적함대인 발틱함대 격파를 위해 가덕도 부산 마산 거제도 등 남해안 일대에 포진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광복되기까지 포대 1개 대대가 남아 있었으며, 포대가 있던 자리에는 아직도 해군기지가 주둔하고 있다.
사방이 산과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어 바깥에서는 내부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기지 안으로 들어가면 바깥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던 수백m2 규모의 위장공간이 나타난다. 오른쪽에는 높이 4~5m, 폭 10여 m 크기의 시멘트 건물 두 동이 서 있고, 왼쪽에는 붉은 벽돌을 붙인 동굴 같은 구조물이 있다. 포탄창고는 오른쪽으로 다시 꺾여 들어가는 2중 출입구 구조로 천장도 아치형이다. 일부 깨진 벽에서는 자갈 모래 시멘트를 섞어 사용한 흔적이 드러난다. 일본군 병사들이 사용했던 병영은 각 40여 m2 (13평) 규모로 모두 2곳이다.
마을은 정적 속에 가라앉아 있다. 그 흔한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붉은 벽돌 기둥이 서 있는 우물이 길가에 버려져 있고 그 뒤로 낡은 집들이 보인다. 이제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일본식 목조주택들이다. 이곳엔 아직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사용했던, 나무판자와 기와로 지어진 낡은 막사 20동이 남아 있다. 그리고 주민 34가구 60여 명은 일본군이 사용했던 막사에 들어가 살고 있다.
정부수립 이후 부산 가덕도도 섬 전체 면적의 41.6%가 군사보호구역에서 해제됐지만 외양포 마을만은 예외였다. 집이 낡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불법으로 집을 지은 일부 주민들은 등기를 하지 못해 재산권 행사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지붕에 비가 새도 ‘군사시설보호구역’이란 이유로 건물 신축은 물론 증개축도 못한다.
외양포 주민 대부분은 선조 때부터 대대로 살아온 토박이들이지만 일제에 무단으로 땅을 뺏기고 해방 후엔 미 군정청 귀속, 1949년 다시 국방부 재산으로 등재되면서 한스러운 세월을 살아왔다. 주민들은 땅을 돌려받기 위해 법정소송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든다는 말에 포기해버렸다. 그런데도 강서구청은 이곳을 수산관광형 포구로 만든다고 한다. 방파제와 물양장을 신설하고 TTP도 설치한다고 했었다. 거기에다 이곳에 해안소공원과 산책로를 조성한다는 게 이미 오래 전에 발표되었는데 그 어디에도 공사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포구를 중심으로 양쪽에 호안이 형성되어 있다. 해안길이 경계인 다른 곳과는 달리 마을과 바닷가가 뚜렷이 구별되기도 한다. 무성한 잡풀이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해안가 한가운데에 선착장이 있고 이 선착장을 중심으로 양쪽에 자갈밭이 있다. 잔잔한 자갈밭이 해수욕을 하기에 적당한 바다다. 포구는 왼쪽 해안가에 위치해 있다. 접안시설은 포구 오른쪽 해안에 설치되어 있다. 정박해 있는 배가 그렇게 많은 편도 아니다. 기껏해야 10여 척도 되지 않는다. 방파제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래서 안쪽 배가 정박해 있는 곳에는 계단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계단형 방파제 바깥은 돌로 된 경사제로 이루어져 있다.
2004년 착공식을 가진 거가대교는 2010년 12월 14일 개통되었다. 가덕도를 통과하는 이 다리는 거제도의 거자와 가덕도의 가자를 따서 거가대교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다리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동 가덕도와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유호리를 연결하는 다리로, 가덕도-대죽도-중죽도-저도-유호리를 통과한다. 부산과 거제를 잇는 길이 8.2km의 다리로, 해상의 사장교와 해저의 침매터널 등으로 되어 있다. 총사업비는 1조 4,469억원이 들어갔다. 거가대교의 개통은 부산에서 거제까지의 통행거리 140km를 60km로 단축하고, 통행시간도 종전의 2시간 10분에서 50분으로 단축되었다.
따라서 승용차 1대당 9,000원의 유류비가 절감되고 시간이 단축되어 이 다리가 건설이 된 다음에 연간 2천억원 정도의 유류비 절감이 이뤄진데다 시간의 절약까지 생각한다면 천문학적인 규모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이 도로는 U형자로 연결되어 경부고속도로와 남해고속도로의 교통량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거제의 조선산업과 부산과 창원신항, 녹산공단 등 수출입 화물의 물동량을 처리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한다. 또 부산과 거제의 거리의 단축으로 거제-통영-남해-여수-목포로 이어지는 남해안관광 인프라 구축의 대동맥 역할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거가대교는 매년 4천억원 이상의 경제적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총연장 32km구간 중에 해상구간이 8.2km이며 서해대교(7.2km), 광안대교(7.4km)보다 길어 거가대교는 국내 최장 해상 다리로 기록될 전망이다. 당초에는 8.2km의 해상구간 모두를 다리로 건설하려 했으나 컨테이너 선박과 대형군함 등의 항해 문제로 거제도와 중죽도 간 3.7km는 해저침매터널(육상에서 터널구조물을 제작한 뒤 바다 밑에 가라앉혀 터널을 만드는 공법)로 실시하였다. 나머지 구간인 4.5km는 사장교로 건설하여 해상과 해저를 드나드는 관광명물로 탄생되었다. 가덕도는 섬이란 딱지를 벗고 개발의 중심에 서 있다. 이제 가덕도 신공항 건설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두고 다시 한 번 변신을 꾀하고 있다.
가덕도 관광명소
가덕도등대(부산시유형문화재 제50호)
가덕도등대는 대한제국 말기인 1909년 12월에 건립되었다. 옛 가덕도 등대건물은 서구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의 하나로 사무실과 숙소, 등탑이 연결된 복합건물 형태이다. 중앙에 높이 9.2m의 등탑이 세워져 있고, 붉은 벽돌과 미송을 사용했다. 출입구 천정에는 그 당시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 모양의 문장이 새겨져 있으며, 함석으로 된 지붕은 부식방지를 위해 피치타르가 덮여 있다.2002년 새로 지어진 지금의 등대는 팔각으로 된 돌출형이며 등탑높이는 40.5m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등대이다. 등대가 들어선 곳은 군부대라 사전에 허락을 받아야 한다.
가덕도척화비(加德島斥和碑, 부산기념물 제35호)
건축공사 중 출토되었다. 인근 성북 선창마을회 소유지에 세웠다가 1995년 12월 천가초등학교 교정으로 이전 복원하였다. 척화비는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양인(洋人)을 배척하기 위해 경향 각지에 세운 비석이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와 1871년(고종 8) 신미양요를 겪은 흥선대원군은 쇄국의 결의를 다지고 온 국민에게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1871년 4월을 기해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의 요소에 척화비를 세웠다. 그후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중국 청으로 납치되고, 쇄국정책이 풀리자 대부분의 비는 철거하거나 파묻어버렸다.
가덕도자생동백군(加德島自生冬栢群, 부산기념물 제36호)
가덕도 국수봉과 남선의 동쪽 중앙계곡들을 중심으로 해안 암벽 위 동남쪽 사면에 동백나무 군락이 자생하고 있다. 수령이 50~100년으로 추정되는2,500그루 정도의 동백나무가 약 6,600m2의 넓이에 단순림으로 있다.
자료 출처 / https://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sm=top_hty&fbm=0&ie=utf8&query=%EA%B0%80%EB%8D%95%EB%8F%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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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덕도에 관해서 알아 봅시다.
특히 이곳에 있는 땅이름에 관해서....
http://travelevent.net/spboard/board.cgi?id=01&action=view&gul=8204&page=1&go_cnt=0
가덕도에 국제공항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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