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의 <흰머리 독수리> 감상 / 권순진
결혼 피로연장
중앙에 자리 잡은 독수리 한 마리
금세 날아오를 듯 활짝 날개를 펼치고 있다
바람이 묻어있는 커다란 날개는
단숨에 하객들을 제압했다
갖가지 소음에도
칠캣*의 피를 물려받은 제왕의 품위가 의젓하다
초원을 지휘하던 날갯짓, 칼끝에서 다듬어진 깃털이 섬세하다
칠캣의 물맛을 기억하는 투명한 피
한 줌이 내장도 없는 독수리가 날카로운 부리를 들이댄다
냉동창고에서 부화된
싸늘한 야생의 발톱으로
그는 아직 무거운 날개를 쳐들고 있다
번뜩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마지막 풍경
하객들의 웃음소리가 달아오른다
연이어 터지는 플래시에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저 얼음제왕
굽은 부리가 서서히 녹고 있다
* 미국 알래스카에 있는 흰머리 독수리 보존 구역
- 계간『문학마을』2012년 가을호(통권 제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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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머리독수리는 북아메리카에 서식하는 맹금류로 미국을 상징하는 국조다. 동전에도 새겨져 있고 대통령 문장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달러화에는 한쪽 발톱으로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를 쥐고 있고, 다른 쪽 발톱으로는 힘의 상징으로 13개의 화살을 거머쥐고 있다. 독수리 중에 왕이라 부르는 흰머리독수리는 원래 인디언들이 우상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새였다. 알라스카 칠캣에서는 흰머리독수리의 둥지를 찾아가는 여행상품이 있는데,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이 인디언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이 여행을 즐기고 있다. 흰머리독수리는 미국의 막강한 파워를 상징하고 활짝 편 날개는 팍스아메리카를 은근히 꿈꾸는 듯하다.
그런데 생뚱맞게 결혼 피로연장에 이 독수리가 나타날 게 뭐람. ‘단숨에 하객들을 제압’하며 겁을 주려했던 걸까. 물론 신성하고도 아름다운 결혼식에 하객을 초대해놓고 부러 기를 죽이려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분위기에 주눅이 들 사람도 더러 있지 싶다. 홀 중앙에 저만한 위용의 ‘얼음제왕’을 모셔 앉히려면 일단 무궁화5개 호텔은 되어야한다. 서울시내 특급호텔의 경우 꽃장식비용만으로 천만 원 정도라 하고, 하객 1인당 한 끼 음식비는 최하가 10만, 와인이 곁들여지면 15만원은 훌쩍 넘는다고 들었다. 하객이 7백 명일 때 식사비만 1억 원이라는 계산이다. 얼마 전 그런 자리에 달랑 축의금 5만원 내고 뻔뻔하게 앉아 있었으니 속으로 얼마나 조롱했을까.
지금은 결혼도 제때 할 수 없는 좌절과 불안의 시대다. 여전히 과도한 등록금에 대학 다니기가 쉽지 않고, 어렵사리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가 없다. 천신만고 끝에 구한 직장도 절반이 비정규직이다. 새내기 직장인들의 지갑은 얇아져 치솟는 월세를 부담하기도 벅차다. 집 장만은 꿈도 꾸지 못한다. 삼포시대(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란 서글픈 신조어가 등장한지 오래다. 결혼 기피는 이런 환경들이 포괄적으로 작용했겠지만 일단 예식문화부터 바꾸어가는 것도 중요하다. 결국 문제는 남의 이목을 의식하는 체면에 있지 않은가. 녹아내리고 말 얼음독수리 말고 서로 마음 맞는 상대만 있으면 찬물 한 사발 떠놓아도 기죽지 않는 사회적 풍토가 자리잡았으면 좋겠다.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