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간원 대사간 김공 묘표〔司諫院大司諫金公墓表〕
나는 당세의 문장지사(文章之士) 가운데서 세 사람의 외우(畏友)를 두었으니, 풍산(豐山) 홍자순(洪子順 홍낙명(洪樂命))과 광산(光山) 김치오(金穉五)와 풍양(豐壤) 조경서(趙景瑞 조경(趙璥))이다. 자순은 순수하면서도 반듯하였고 치오는 침착하면서도 단정하였고 경서는 대범하면서도 밝았으며, 세 사람은 또 모두 행실이 바르고 옛 학문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나와 친하게 지냈다. 아, 그런데 지금은 세 사람 모두 세상에 없다. 자순은 벼슬이 이조 판서였지만 물러난 때가 많고 나아간 때는 적었으며 경서는 정승에 임명되고도 부임하지 않았으나, 또 모두 관각(館閣)에 출입하여 당세에 명성이 높았다. 그런데 유독 치오는 늙어서 급제하고도 중간에 뜻하지 않은 불운을 만나, 끝내 큰 굴곡을 겪다가 생을 마쳤다. 나는 이 일을 매우 슬퍼하는데, 이제 그의 아들 기응(箕應)이 치오의 사행(事行)을 정리하여 나에게 그의 묘표를 써 주기를 청하였다.
공의 휘는 상정(相定)이다. 치오는 자(字)이고 호는 석당(石堂)이다. 김씨(金氏)로서 보계(譜系)가 신라 왕자에서 나오고 광주(光州)를 관향으로 둔 인물이 세상에 크게 드러났으니, 휘가 장생(長生)이고 호가 사계(沙溪)로서 공자의 묘정(廟庭)에 배향된 분이 공의 6대조이다. 조부 휘 진항(鎭恒)은 증 이조 참판이고, 퇴어자(退漁子) 진상(鎭商)이 그의 아우이다. 부친 휘 영택(令澤)은 대흥 군수(大興郡守)이고, 모친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평운군(平雲君) 신성하(申聖夏)의 따님으로, 경종 임인년(1722, 경종2) 12월 9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말을 배우자마자 글을 읽을 줄 알았고, 15세에 《상서(尙書)》를 읽고서 대나무를 잘라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제대로 만들었다. 자라서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시험에서 모두 여섯 차례나 많은 선비들 중에서 으뜸을 차지하였으나 끝내 진사시에 입격하지 못하였다. 임오년(1762, 영조38)에 선공감 가감역관(繕工監假監役官)에 선임되었고, 제용감ㆍ장례원ㆍ상의원의 낭관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토산 현감(兎山縣監)이 되었다. 현을 다스릴 때, 성심껏 백성들을 사랑하고 백성들도 그를 믿어서, 백성들과 날짜를 약정하면 환곡 납입에 백성들이 감히 날짜를 넘기지 않았다.
익위사 위솔(翊衛司衛率)에 제수되었을 당시에 금상(今上 정조)이 동궁에 있었는데, 매번 서연(書筵)에서 시강할 때 문의(文義)을 진술하라고 명하여도 공은 오히려 오래 머뭇거리다가 하문(下問)이 있으면 대답하였는데, 상이 그때마다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또 광흥창과 종친부의 낭관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의성 현령(義城縣令)이 되었고, 그 벼슬에 있은 지 석 달 만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때 공은 이미 51세였는데, 세인들이 왁자지껄하며 이번의 과거에서 문형(文衡)의 재목을 얻었다고 하였다. 공은 품계가 통정대부로 뛰어오르고 동부승지가 되었는데, 뒤에 승지가 된 것이 다섯 차례이고 한 차례 병조 참의와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으나 나아가기도 하고 나아가지 않기도 하였고, 나아간 경우에도 며칠 만에 체직되었다.
병신년(1776, 정조 즉위년)에 국수(鞫囚) 윤약연(尹若淵)의 거짓된 공초로 인하여 체포되고, 공사(供辭)를 올리기도 전에 바로 명을 받아 전리(田里)로 추방되었다가 임인년(1782)에 사면을 받았다. 갑진년(1784)에 상이 고신(告身)을 돌려주도록 명하였고, 무신년(1788) 8월에 울진 현령(蔚珍縣令)에 제수하도록 명하면서 이르기를 “그에게 딴마음이 없다는 것을 내가 이미 알았다.” 하였다. 부임하여서는 부지런히 관청의 사무를 처리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1월에 병이 나서 현아(縣衙)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이 67세였다. 광주(廣州) 번산(樊山) 축좌(丑坐)의 언덕에 장사하였는데, 이곳에 증(贈) 숙부인(淑夫人) 연안 이씨(延安李氏)를 부장(祔葬)하였다.
부인(夫人)은 진사 이명집(李命集)의 따님이니, 문청공(文淸公) 서지수(徐志修)의 생질녀이다. 문청공이 우리 할아버지에게 생질이 되므로 내가 일찍이 부인을 만나 보았는데, 겉과 속이 밝고 맑아서 마치 세속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진사시에 입격하고 현령을 지낸 기응(箕應)과 기덕(箕德)이다. 손자는 재원(在元), 재의(在義), 재희(在羲), 재미(在美), 재선(在善), 재간(在澗), 재선(在羨)이다. 후부인(後夫人)은 당성 서씨(唐城徐氏)로 진사 서이일(徐履一)의 따님이다.
공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중후하였으며 법도를 잘 지켜서 지나치지 않았으나, 지기(志氣)가 높고 굳세어 용감하게 매진하면서 돌아보지 않는 의지가 있었다. 그렇지만 실상과 다르게 꾸며서 이름을 드러내어 보통 사람과 달리 보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공의 학문은 내면을 지키는 데 전념하고 외물을 따르기를 부끄러워하였으니, 존양(存養)하는 공부를 묵묵히 실천하여 깨달음이 심오하였고, 기미(幾微)를 분석하여 얽힌 것을 풀어내는 데는 종종 독보적인 신묘함이 있었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를 다하고 제사를 더욱 엄숙하게 받들었으니, 사당에 오르내리고 제물을 올릴 때에 문중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공의 기색을 가만히 살펴보니 털끝만큼도 경건하지 않은 점이 없다.” 하였다.
입조(立朝)한 기간은 앞뒤로 겨우 수십일이었으나 충애(忠愛)의 일념은 자나 깨나 한결같았으니, 이것은 벼슬을 하기 전에도 이미 그러하였다. 개연히 천하와 국가의 일을 논할 때는 시야가 넓고 논리가 치밀하여, 마치 하루아침에 그 주장을 들어서 시행하더라도 어려움이 없을 듯하였다. 붕우에 대해서 신의가 있기로 소문이 났으며, 청렴을 실천하여 마음에 안 된다고 생각되면 남에게서 지푸라기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시문(詩文)은 간결하고 예스러웠으니, 마음 쓰는 것이 치밀하고 법도를 지키는 것이 엄격하였으나 기운이 평안하고 자유로웠다. 문집 몇권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공의 지조와 재주에 경술과 문장이 더해졌으니, 만약 나아가서 세상을 위하여 쓰였다면 수립하고 성취한 것이 응당 어떠하였겠는가. 그러나 늙을 때까지 때를 만나지 못하였고, 때를 만나자 죄도 없이 버림을 받았으니, 오호라, 이것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공이 세상의 학자들이 먼 것에 힘쓰고 가까운 것을 소홀히 하며 논설을 숭상하고 실천을 등한시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 〈원학(原學)〉 세 편을 지었으니, 후세의 인사들이 그 글을 읽는다면 반드시 공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리라. 아, 안타깝도다.
司諫院大司諫金公墓表
余於當世文章之士。有畏友三。曰豐山洪子順。曰光山金穉五。曰豐壤趙景瑞。子順醇而法。穉五沈而整。景瑞簡而明。三人者。又皆淸修好古。故與余善。噫。今則盡亡矣。子順官冢宰。而多退小進。景瑞爲相不拜命。又皆出入館閣。名聲重當世。獨穉五老而登第。中罹無妄。卒嶒嶝以歿其世。余甚悲之。今其孤箕應。纂次穉五事行。謁余表其墓。公諱相定。穉五字也。號石堂。金氏。系出新羅王子。籍光州者最著。有諱長生號沙溪。配食孔子廟庭。於公六代祖。祖諱鎭恒。贈吏曹參判。退漁子。鎭商其弟也。考諱令澤。大興郡守。妣平山申氏。平雲君聖夏女。以景宗壬寅十二月九日生公。甫學語。知讀書。十五。讀尙書。折竹造璣衡如法。及長。遊泮庠。凡六魁多士。而竟不成進士。壬午。調繕工監假監役官。歷郞濟用監,掌隷院,尙衣院。出爲兎山縣監。誠心愛民。民亦信之。與民約日輸糴。民不敢踰日。拜翊衛司衛率。時今上在東宮。每侍講書筵。命陳文義。公猶逡巡良久。有下問則對。上輒稱善。又歷郞廣興倉,宗
親府。出義城縣令。在官三月。擢文科狀元及第。時公年已五十一。世藉藉言今榜得文衡材。超通政大夫。爲同副承旨。後爲承旨者五。一爲兵曹參議,司諫院大司諫。或就或不就。就亦數日而遞。丙申。因鞫囚。尹若淵亂招被逮。未納供。卽命放歸田里。壬寅。蒙宥。甲辰。命還給告身。戊申八月。命除蔚珍縣令。曰予已知其無他矣。旣上官。勤於吏事。不少懈。子月疾。卒于縣衙。享年六十七。葬于廣州樊山坐丑原。贈淑夫人延安李氏祔。夫人進士命集女。徐文淸公志修甥也。文淸於吾祖爲甥。故余甞見夫人。表裏瑩澈。類不食烟火人。生二男。箕應進士縣令,箕德。孫在元,在義,在羲,在美,在善,在澗,在羨。後夫人唐城徐氏。進士履一女。公爲人貞介簡重。謹繩尺不逾越。而志氣亢壯。昂然有邁往不顧之意。然不喜矯情立名。以取異於衆。公之爲學也。專內守而恥徇外。默契乎存養之功。悟解玄透。至剖析幾微。解脫紛糾。往往有獨詣之竗。事親極其孝。尤致嚴於祭祀。方其降升薦獻也。門內人相傳以爲默察公氣
色。一毛一髮。無非敬者。立朝首尾甫數十日。而忠愛一念。寤寐竱竱。自布衣時已然。慨然論天下國家事。範圍廣而經緯密。如可一朝擧而錯之無難也。於朋友。亦以信義聞。砥礪廉白。意有不可。一芥不取於人。爲詩文簡古。用意苦取法嚴。而神氣安閒自在。有文集幾卷。藏于家。夫以公志節才猷。補之以經術文章。使出而爲世用者。其樹立成就當何如也。而白首不遇。遇卽以非罪廢。嗚呼。豈非命哉。公病世之學者騖遠忽近。崇論說而後實踐。作原學三篇。後世之士。讀其書。必有知公者。噫。
[주1] 늙어서 …… 만나 : 김상정은 1771년(영조47) 50세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승지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나,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정조와 사이가 나쁘던 홍인한(洪麟漢)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주2] 국수(鞫囚) …… 인하여 : 정조의 왕위 계승을 반대해 오던 홍인한 일당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실시될 때, 당시 수찬으로 있던 윤약연이 임금의 하교에 따라 홍인한 일당의 상소들을 검토하면서, 대역 죄인으로 판정되었던 홍인한의 죄를 가벼이 기술하여 임금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 그 결과 임금이 직접 국문(鞫問)을 하였고, 이때 그가 진술한 말에 김상정의 이름이 들어간 것이다. 《正祖實錄 1年 6月 23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