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 됨의 축복
마태복음27:51~56
(마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마 27: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마 27: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마 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마 27: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마 27: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여러분은 어떤 때 행복을 누리셨나요? 저의 경우는 사랑하는 사람과 한 마음을 품어 하나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제 일생에 큰 실수를 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제 아내가 둘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자궁에 물혹이 생겨 수술을 하고 병상에 누워 있을 때 함께하여 한 마음을 품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아이를 임신하고 5개월 되었을 때에 수술한 것이니 얼마나 두렵고 떨렸겠어요. 그럴 때 한 마음 되어 병상을 지켜주는 것이 마땅한데 저는 아내가 혼자 있어도 되니 집에 들어가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집에 들어가 잠을 자고 아침에 병원에 왔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때 제 아내가 얼마나 제게 섭섭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러워집니다.
이와는 반대로 제가 50이 넘어 탈장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은 간단하였지만 대소변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럴 때 제 아내는 24시간 저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한 밤중에 몸이 불편하여 뒤척이며 어려움을 호소하면 한 번도 짜증을 내지 않고 어떻게 하든 저를 편하게 해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저의 아픔에 기꺼운 마음으로 동참하는 아내가 그렇게 소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 제 마음에 아내와 나는 하나가 되었다는 기쁨과 행복을 누렸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하나 될 때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나 된다면 그 기쁨은 우주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사명을 완수(完遂)하시고 그 영혼이 떠나시면서 나타난 현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현상 중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라는 말씀입니다.
이 휘장의 높이는 대략 15m정도 되었고 너비는 8m, 그리고 그 두께는 10cm 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휘장은 당시 최고의 문화를 자랑하였던 바벨론 제(製)로서 고급 린넨(linen)의 직물을 아름답게 여러 모양의 수를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같은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 것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분명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담겨 있는 상징적인 사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휘장은 성전 안의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 짓는 가리개를 말합니다. 휘장 안쪽에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라는 명칭인 지성소가 있고, 여기는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고 오직 1년에 한차례 대속죄일에 양푼에 피를 담아 대제사장만이 들어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하여 대제사장은 죄를 멀리하고 성결해야 했기에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성전에서 정결예법에 따라 자신을 단장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속죄하는 상징인 피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예복의 아랫단에는 은방울들이 달려 있기 때문에 쟁그랑 쟁그랑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가 나지 않고 멈추면 대제사장이 죽었다는 신호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설에 의하면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 갈 때에는 몸에 끈을 매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이 잘못해서 즉사하게 되면 그 시체를 끌어내려고 들어간 사람도 죽게 되기 때문에 밖에서 그 끈을 잡아당겼다고 합니다.
이렇게 경건함이 배여 있는 지성소와 성소로 구분하는 것이 지성소의 휘장이었던 것입니다. 이 휘장은 상징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아래 있는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 경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경계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당신의 몸을 대속물로 드린 순간 그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전하는 의미는 대단합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선을 허물었음을 여실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 분으로 인하여 창조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반열에 도무지 들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이 경계를 허물고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놀라운 축복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요한복음 17장에 등장하는 데 거기서“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고 하였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하나 되셨다면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모두 동참하므로 얻어진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 됨의 기쁨입니다. 이것이 바로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할지어다”에 등장하는 ‘주님의 즐거움’ 영어로는 ‘Master’s happiness’입니다. 하나님도 아픔의 과정을 겪으면서 천상의 기쁨을 얻으셨습니다. 이는 영적세계에 드리워진 어둠인 마귀의 일을 십자가로 철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걷히게 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새로운 영적 세계가 탄생되었기에 이 승리의 기쁨을 예수님과 더불어 성부와 성령이 함께 누리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을 그 가슴에 품으시고 하나님과 하나 되는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기쁨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과 하나 됨의 축복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죽음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으로 연합하므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51~53절에서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무덤에 갇혔던 영혼들이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죽게 되면 영혼과 육이 분리됩니다. 예수 믿는 영혼은 낙원에 머물러 있다가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에 저들의 영혼에게 예수님이 입으셨던 부활의 영광의 몸이 덧입혀져 거룩한 성, 천국에 이르게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소망이 없었습니다. (엡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위치로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함을 받았기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돌보심이 절대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돌봄을 가볍게 여기고 주어진 육체의 시간 동안 하나님을 부인하며 더 나가 모욕적인 삶을 살게 되면 결국은 하나님의 돌봄이 전혀 없고 대적자 마귀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죽음을 우리 스스로 끊어내고 살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죄와 사망의 권세를 십자가에서 끊어버리고 믿음의 성도들을 주님과 연합하여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생명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여 주님과 함께 하나 됨으로 우리는 주님이 누리는 모든 영광과 존귀 그리고 기쁨을 누리도록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믿음에 연합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54절에서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백부장과 군병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집행하였던 무리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지진과 더불어 일어난 모든 일을 보고 예수님의 처형이 결코 평범한 사건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기이한 사건들은 그 군병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휩싸이게 했고 결국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두려움으로 예수님을 알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계 1:7에서는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무서운 진노가 나타날 때 그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심판의 주님이심을 인정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때 나타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로 인하여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믿는 것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 성령으로 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 친히 밝히셨습니다. (요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영혼이 떠나시므로 그 안에 계셨던 성령을 믿음의 성도들에게 보내셔서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이심을 확증시켜 주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심으로 내가 주님 안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내가 지식적인 관계로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영적인 부분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세 번째 천한 자가 존귀한 자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55,56절에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여자의 지위는 사회적으로 저평가되던 때였습니다. 여기서 특이점은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먼저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의 배열순서는 그 사람의 중요도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상례(常禮)였습니다. 또한 남은 여인들은 누구의 어머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막달라 마리아는 여기에 기록한 어떤 여인과 비교할 때 천한 삶을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천한 자가 존귀한 자와 연합되어 더욱 중요한 지위에 이르렀음을 예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예견하신 예수님께서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인이 행한 것이 전파되라고 하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어떤 면이 존귀한 자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막달라란 사람의 성이 아니라, ‘망대’란 뜻을 가진 도시 이름을 말합니다. 탈무드의 이야기에 의하면 막달라는 염색과 직물공장과 생산가공공장이 있었던 부유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부도덕하고 성적 비행이 심했던 곳이었습니다. 이런 도시에서 자란 마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타락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여인은 자기가 지은 성의 문란함이나 방종한 행위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을 찾아와 회개하였습니다. 그 회개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까지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부었다고 하였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하므로 주님으로부터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며 그녀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처럼 천한 자였던 모든 자들이 회개할 때 예수님의 존귀한 부활의 영광된 자리로 초청을 받게 될 것입니다. 회개는 나의 영혼을 새롭게 단장하고 아름답게 단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처럼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혀 있는 죄의 담을 하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을 본받아 다른 이들에게 대하여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실제 나에게 악을 저지르고 손해를 낀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나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내가 용서할 수 없을 때 십자가 앞에 나와 용서치 못하는 나의 악함을 회개하십시오! 그 사람에 대하여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용서가 흘러나올 때 까지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기도하십시오!
요즘 코로나 비이러스로 인하여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원망하고 불평하며 남을 비난했던 내 입술을 가리라는 주님의 징계로 여겨지지 않습니까? 마스크를 쓸 대마다 나의 입술로 또는 마음으로 저지른 죄를 회개하십시오!
밖에서 돌아오면 손과 발을 깨끗하게 씻을 때 나의 행위에 대한 죄를 회개하십시오! 나의 손으로 지은 죄 발로 더럽고 추한 곳에 다녔던 죄를 고백하십시오! 교회가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드렸던 나의 죄를 고백하십시오! 예배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내 편리한대로 예배를 멀리 하였던 죄를 회개하십시오! 회개를 하는 만큼 우리의 영혼이 맑아지며 거룩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환난의 때를 면할 수 있는 길도 회개입니다. 회개를 한 장에게 막달라 마리아를 천한 자리에서 이끌어 예수님의 존귀와 연합하게 하긴 주님이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대접하게 될 것입니다.
제 큰 딸이 사위와 함께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동영상에 담아 왔기에 보았습니다. ‘싹다~~ 갈아 엎어주세요’라며 유연하게 돌아가는 허리 춤사위와 한 쪽에 마이크를 잡고 한 쪽 손으로 내두르며 노래하는 모션(Motion)이 얼마나 재미있던지 그 동영상을 저장하여 몇 번을 보면서 깔깔대며 웃었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이 참 흐뭇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 딸 내외가 하나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위는 제 처가 하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출가하여 부부간에 화합하여 하나 되었을 때 기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믿음의 성도가 주님과 하나 되어 이 땅에서 천국의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일까요?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초청하셔서 하나 되는 모든 여건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셨습니다. 완성된 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실제를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환경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주어진 환경에 불만을 가지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은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여건이 나에게는 맞지 않고 불편하다면 이를 가지고 십자가 앞에 나와 회개하십시오! 나의 환경에 대하여 감사할 때까지 말입니다.
내 영혼에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휘장이 찢어질 때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하나 됨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충만하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이요, 예수님께 믿음이 하나 되어 주님이 내 안에 성령으로 함께 하시고 하나됨의 일체감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내게 처한 모든 것이 아무리 천하더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주님의 존귀함으로 나는 이미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 됨의 축복으로 이 세대의 모든 환난과 저주를 능히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영이 나와 함께 계심으로 주님은 나와 하나가 되었기에 능히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