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유럽의 국가. 국토 중앙과 남서부가 넓은 고원지대로 이루어진 산악지형이다. 국민 대다수는 노르웨이인이고, 공용어는 노르웨이어이다. 국교는 복음주의 루터교이며, 화폐단위는 노르웨이크로네이다. 전통적인 어업 및 임업 국가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광업과 제조업이 증가했다. 주로 서비스업·석유와 천연가스 생산업·경공업·중공업에 기반을 둔 경제가 발달했다. 포괄적인 사회복지제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나토 회원국이다. 1994년 유럽 연합 가입을 거부했다. 면적 385,186㎢, 인구 5,514,477(2024 추계).
오슬로
도시 자체가 하나의 주를 이룬다. 노르웨이 남동쪽에 있는 오슬로 피요르드의 끝에 있다. 1050년경에 세워졌으며 1300년경 하콘 5세가 요새를 세웠다. 1624년 화재로 파괴된 뒤 요새 성벽 아래에 신도시를 세워 크리스티아니아라고 불렀다. 19세기에 인구가 늘어나, 그당시 노르웨이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영향력 있던 도시가 되었다.
1925년 오슬로라고 개명되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히 발전했다. 많은 위성 도시와 주거지대가 오슬로의 동부로 발전했다. 오슬로 항구는 무역·금융·산업·상업의 중심지로 노르웨이에서 가장 크고 가장 분주한 항구이다. 주요산업은 소비재 생산, 조선, 전자공업, 그래픽 산업이다. 1050년경 하랄 하르드로데 왕이 세웠으며 1300년경 하콘 5세가 아케르스후스 요새를 세웠다. 1624년 화재로 파괴된 뒤 덴마크-노르웨이의 크리스티안 4세가 보다 서쪽의 아케르스후스 요새 성벽 아래에 신도시를 세워 크리스티아니아라고 불렀다. 주위의 여러 자치체들을 흡수하게 됨으로써 19세기에 인구가 늘어나, 그당시 노르웨이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영향력 있던 베르겐이라는 서쪽 해안 항구도시보다 커지게 되었다. 1925년 오슬로라고 이름을 고쳤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히 발전했다.
오슬로에는 노르웨이의 주요 문화기관들이 있다. 도시 중심부에는 국립극장, 노르웨이 극장, 신(新)오슬로 극장, 노르웨이 오페라 극장이 있다. 오슬로대학교 근처에는 역사박물관(민속박물관 포함)과 국립미술관이 있는데, 국립미술관에는 유명한 미술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 시의 동쪽에 있는 퇴엔에는 식물원과 박물관들이 있다. 뷔그되이에 있는 노르웨이 민속박물관과 바이킹 선박 전시관, 프람후세트(유명한 극지대 탐험선이 전시되어 있음)·콘티키 박물관(토르 헤예르달의 태평양 탐험을 기념), 노르웨이 선박박물관은 오슬로가 바다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서쪽에 있는 프로그네르 공원은 근대 조각가 구스타브 비겔란의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오슬로대학교에는 여러 과학 연구소들이 부속되어 있으며 노르웨이는 대학 도서관으로 되어 있다. 오슬로에서 가장 유명한 강당은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가 장식한 오슬로대학교 강당인데 필하모닉 악단의 연주회도 이곳에서 열린다. 다른 국립 고등교육 중심기관들도 있다.
아케르스후스 요새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는 매년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열리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왕궁이 자리한 칼 요한 거리, 뭉크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국립미술관, 세계적인 명성의 비겔란 조각공원 등 볼거리가 즐비하다. 이곳 사진은 오슬로 시내 동쪽 바위산에 자리한 아케르스후스 요새(Akershus Slott)의 모습이다. 17세기 초 오슬로 대화재로 잿더미가 된 것을 르네상스풍으로 재건했다. 요새 아래 해안도로는 19세기 말 뭉크가 친구들과 산책을 나왔다가 '절규'의 모티브를 얻은 장소로 유명하다.
아케르스후스 요새는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 있는 중세 성으로 도시를 보호하고 왕궁을 제공하기 위해 지어졌다.중세 이후 이 요새는 노르웨이의 4대 주요 지역 중 하나였으며 동노르웨이의대부분을 포함했던 아케르후스의 주요 영지이자 후에 주요 백국의 이름과 중심지가 되었다.이 요새는 1919년까지 아케르스후스 주(州)에 있었고, 1842년까지 작은 아케르스후스 주(州)에 있었다.
이 성은 또한 군사 기지와 감옥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 노르웨이 총리의 임시 집무실이다
이 성의 건설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1290년대 후반 하콘 5세에 의해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두 개의 노르웨이 성들 중 하나로 여겨진다.그것은 1287년에 일어난 사르프스보리 의 오슬로 공격에 대한 노르웨이 귀족인 백작의 반응으로 건설되었다.공격의 여파로, 도시의 기존 방어가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따라서 더 강력한 방어 센터가 필요했다. 이 성은 1300년 하콘 왕이 오슬로의 한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처음으로 문서 자료에서 언급되었다.그러나 서한에는 당시 성곽 공사가 얼마나 진척됐는지는 언급되지 않았다. 이 요새는 1716년 찰스 12세가 이끄는 군대를 포함하여 주로 스웨덴군에 의한 모든 공성전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남았다. 당시 노르웨이 무역의 대부분이 해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해군력은 중요한 군사력이었다.그 요새는 수도에 전략적으로 중요했고, 따라서 노르웨이에도 중요했다.아케르후스 요새를 지배하는 자는 노르웨이를 지배했다. 1624년의 큰 화재 이후,크리스티안4세는오슬로 도시 전체를 이전하고 재건하기로 결정했다.왕은 새로운 도시를 아케르스후스 요새와 더 가까운 곳에 두라고 명령했고, 도시의 이름을 크리스티아니아로 바꾸었다.그 후 요새는 현대화되고 개조되었으며, 새로운 모습은 이탈리아로부터 영감을 받은 보루와 르네상스 성의 모습이었다.이 성은 19세기 초까지 주로 궁궐의 기능을 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운 탑, 홀, 방, 문이 추가되었다. 왕이 없을 때 성은 노르웨이 관리인의 자리 역할을 했다.
심 산
오슬로항 풍경▼
운 좋게 나토군의 군사 퍼레이드 행시를 구경▼
아케르스후스 요새▼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