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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서부 지역 초기 지연전(이천, 진천, 음성)
1.작전 개요
중서부지역 지연전은 전쟁 초기인 '50.6.29일부터 7월 13일까지 중서부지역의 이천, 진천, 청주, 음성 지역에서 '50. 7. 5일에 창설된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수도사단 및 제1사단, 그리고 제2사단이 북한군 제1군단 예하의 제2사단과 제2군단 예하의 제15사단이 벌인 공방전이다.
(*이 당시에 제6사단은 자측에서 제1군단 엄호 임무)
북한군은 서울을 기습 점령한 후에 제1군단을 경부축선에, 중동부지역을 담당한 제2군단을 내륙으로 집중하여 제2사단이 춘천-가평-광주 축선을 따라 진천 방면으로 서남진하였고, 제2군단의 제15사단이 홍천-이천-장호원 축선을 따라 음성방면으로 밀어붙이고 제2군단으로 배속이 전환된 제1사단이 수원-김량장리-장호원 축선을 따라 충주 방면으로 내려왔다.
반면에 국군은 한강선 방어에 실패한 이후에 신림-목계-장호원-죽산-안성을 연하는 차령산맥에서 제2차 방어선을 내정하였다.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 제7연대는 음성일대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을 맞이하고, 제6-19연대와 수도사단은 이천-곤암- 및 진천 일대에서 북한군 제2사단의 공격을 축차적으로 저지 지연시켰다.
중서부지역 우측에는 육군직할의 제6사단과 제8사단이 배치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북한군은 제2사단이 광주-진천-청주 방면으로 , 제15사단이 홍천-여주-음성 방면으로 진출하게 된다.
(가)이천지역 전투
이전투는 한강선 방어선이 무너진 이후에 6월 30일부터 국군의 재편성이 이루어지기 직전인 7월 4일까지 제6-19연대가 북한군 제2사단의 진출을 저지하는 전투다.
반면에 적은 제1군단의 좌익을 담당한 제2사단이 한강을 도하하여 광주-이천을 거쳐 김량장리로 진출, 아군전선의 양단을 시도하였다.
육군은 이에따라 이천지구전투사령부(이형근 준장)을 편성하여 제6사단-19연대와 7연대, 그리고 증파된 제2연대 제2대대, 경찰 및 기마경찰 400~500여명의 혼성부대로 편성된 3,000여명의 혼성부대로 곤지암-이천을 연하는 선에서 적과 대치하게 된다.
북한군은 한강을 도하한 제2사단이 6월 30일에 하번천리와 경안리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교두보 확장전투를 개시하게 된다. 7월 1일에 지금의 하남시 검단산(657m)하단 용마산(596m)에서 전투를 시작하였다.
국군 제6사-19연대는 홍천 점령을 기도하는 북한군 제12사단의 압력에 철수하여 횡성으로 철수후 6월 30일에 이천으로 와 적의 진출을 지연하라는 명령에 원주로 이동하여 열차로 충주로 도착한 후에 도보 및 차량으로 이천으로 직행하여 7월 1일 24:00에 곤지암(194m)-이천간을 점령 하였다, 7월2일부터 적의 진출을 목격하 후에 공격을 개시하여 특히 곤지암 194고지일대에서는 적을 전멸 시켰다. 그러나 결국 중과부족으로 7월 2일부로 철수를 개시하여 7월 4일 안성을 거쳐 진천 북쪽으로 철수를 개시한다.
이 작전결과 무려 전사에는 북한군 500여명의 사살고 19명을 생포하고 전차 2대를 파괴하였다고 기록되고 고지암 194고지에서만 아군의 피해없이 100여명의 북하군을 사살 하고 5명의 포로를 획득하였다고 한다.
"광주 상번천리 일대에 묻혀진 1개분대 규모의 국군 제6-19연대 병력은 무엇인가?"
"도척에 남겨진 소대장과 이영옥 상사는 어디로?"
하지만 현지에서 들려주는 전쟁의 실상은 너무 달랐다. 45번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용인에 다다르게 되는 교통의 길목으로 광주-오포-용인, 광주-초월읍-곤지암-이천, 곤지암-도척-양지리 현 영동고속도로변에 이르는 교통로가 매우 발달하여 적이 양단에 성공시 국군은 진퇴양난에 빠지는 중요한 곳이다.
내가 처음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하번천리 상수도사업소위 고지군과 하번천리 칠사산이었다. 이곳에는 당시를 기억하는 어르신들이 많이 살아계셔 제보를 구하는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실제로 계룡대 육본에 있으면서 곤지암일대의 제6-19연대의 전투지를 찾아가게 된 것은 제6사단 참전전우회 회장격인 김용철 특무상사님이 찾아와 증언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전사에는 크게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은 없다.
명성고개를 넘어 지도에 동방목장이라 나와 있는 곳을 가면 '00년도에는 밤나무 군락이 있고 비포장 산판길이 있었다. 지금은 그주변ㅇ 주택단지가 들어서 일부는 훼손 되었지만 믾은 지역이 남아 있다.
동네에서 어렵지않게 6.25전쟁에 참여하고 돌아와 살고 있는 참전용사님을 만나 관련 내용을 더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본인은 최초 전투에는 참여 못했고 '52년도부터 수도사단으로 수도고지와 이청동에서 전투하고 휴전을 맞이 했다고 하다. 그래서 최초 전투 당시에 북한군이 내려오기 전에 국군 제19연대 병력이 동네에 들어왔고 바로 뒤이어 북한군이 내려와 주로 길가에서 전투를 하고 국군은 바로 용인이나 이천 방향으로 퇴각해 갔다는 것이다.
"그럼 혹시 이곳에 참전용사님의 증언이 많이 죽었고 제대로 수습을 못하고 밀려났다는데 국군이 가매장된 곳을 아시는 곳 없습니까?"
"아 그곳이 아마 들어오면서 주유소가 있는데 그 당시에 그 길이 주 도로로 지금 연립형 주택이 들어선 곳 일대가 될거요.
"혹시 가능하시면 함께 동행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용사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신발을 바꿔신고 우리를 안내하였다. 입구에 들어서니 역시나 밤나무가 많아 밤송이의 날까로움에 걷기가 쉽지는 않다.
"이곳에 당시 분대규모가 안자아 있다가 다 죽어서 당시에는 얕은 개울이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너무 비참해 보이고 워낙 날씨가 뜨거워 부패정도가 심해 냄새가 진동하여 삽,괭이로 끌어 묻었다고 들었소."
"그렇습니까. 혹시 다른 곳은 모르시나요?"
"내가 전쟁에 갔다 '54년도 5월에 다시 들어왔는데 저기 앞산(물탱크 있는산)에 그리고역 뒤산이 칠시산이라고 7곱의 현인이 태어난다는 전설인데 이 산위에도 중공군 시체가 널렸다고 해요. 사람들이 경찰 통제로 올라가 구덩이에 다 묻었다고 들었소. 올라가시면 호도 많고 탄피같은 것이 굴러 다녀요."
"아니 초기전투에 없던 시체들이 언제 발생했는지 알 수 있나요?"
"1.4후퇴 당시에 중공군이 곤지암까지 왔다고 해요. 그 후 다시 밀고 올라 가면서 이곳 광주일대가 엄청난 전쟁터로 미군과 중공군이 전투 했는데 우리 19연대가 이곳으로 올라 갔다고 합니다."
용사님은 많은 제보를 하셨는데 이번에는 도척으로 가보자고 한다.
"도척에 소대 병력이 죽었다?"
"도척 면대에 가면 참전용사 묘비를 알고 있을거요. 옛날에는 특전사령관이란 분이 추모제를 지내면서 우리들이 참여한 적이 있어요."
"전사에는 이곳에 국군 전투가 별로 기록된 것이 없는데~"
우린 차를 몰아 도척면 면대를 찾았다. 점심시간대라 사람이 없어 우리도 밖으로 나가 소소한 국밥집을 찾았다. 요즘은 시골이라도 면소재지만 돼도 별거 다 있다. 용사님이 국밥집 좋다고 하여 자리에 앉아 기다리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국밥집 사장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요즘 TV에 유해발굴 모습이 나오는데 그걸 하는 군인인가요?"
"예, 제가 그 당사자인 육군본부 유해발굴 통제장요 입니다."
"아 어쩐지 많이 본 것같아서 물었는데 좋은 일 하시네요."
"좋긴요, 궂은 일 하는거지요?"
"무슨 말씀을 복받는 일이에요. 꼭 좋은 일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저기 밭언저리에 가면 묘들이 몇개 있는데 거기에 해마다 7월초에 군인들이 와서 경례하고 가던데 무슨 박대위 비가 있어요."
"그렇습니까? 바로 그곳을 찾아서 왔습니다. 또 길 모퉁이 어디에 상사님 묘도 한 곳 있다고 하는데 혹시 모르세요?"
"점심먹다 우린 현장 안내자를 만났다. 바로 국밥집 사장 아저씨다."
우연찮게 너무 쉽게 지역 제보자를 만나 우린 안내를 받게 되었다. 식사시간대라 오후 2시에 가기로 하고 우린 일어서 면대로 와서 예비군 중대장을 만났다. 나보다 아래의 군번인데 조금 불쾌한 인상이다. 귀찮다는 듯 퉁명한 목소리다. 참 옛날이야 바로 '야자, ㅅ자, ㅈ자 들어가는 꼴인데 세상 좋다보니 참아야 한다. 본인은 사단으로부터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했다며 슬슬 빠지려는 기세다. 요즘은 더하지만 그때도 쥐들이 많았다. 구멍을 파고 실컷 먹고 절대 남에게 양보하지않는 습성이 우리에겐 많이 있다고 본다.
사단 실무자에게 전화를 하여 자초지정을 이야기 하고 우리끼리 현장으로 떠났다.
우리 차를 이용하여 비석이 있는 근처까지 가 내려서 얼마 걷지않했는데 큰 비석이 우뚝 서 있다. 내려서서 보니 한문으로 이름이 쓰여있고 뒤에 보니 부인이 있고 자식도 있다.
"용사님 혹시 이곳에서 추모제를 할때 여기 부인께서 오시는 것을 보았습니까?"
"그럼요, 그런데 얼마전부터는 안보이던데 그리고 사실 특전사령관이란 분이 언제부터 안오니 이 행사도 흐지부지 되고 있어요."
뒤에 비문을 읽어보니 6.25전쟁 7월초에 중대장인 중위가 전사하여 1계급 특진하였고 당시 소대장이 특전사령관까지 된 강소위였다.
"적을 물리쳤다는 승전보에 중대장이 일어서 격려하려는 순간 저격되었다."
내용은 안타깝게도 후퇴하던 19연대 소속의 3대대 일부가 이곳 도척에 이르러 강소대장에게 정철을 나가 적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 임무가 부여 되었고 적정을 살피러 나가는 강소대장은 1개분대 규모를 데리고 직접 곤지암 방향으로 갈고개 방향으로 나갔다. 지금은 지방도 98번도로가 횡하니 뚫려 있지만 그당시는 우마차가 다니는 길인데 노곡교를 지나 갈고개에 이르러 적 도보부대 선발대를 만나 기습사격으로 전멸시켜 버렸단다.
그러자 뒤따르는 부대들이 움칫거리더니 추격하기 시작해서 전령을 보내 사실을 알리고 본대로 복귀한다고 고개를 넘어서 오는데 벌써 적의 일부가 추격해 왔던 것이다. 노곡교에 다다르는 순간 중대장이 엎드려 있다가 일어서 수신호로 위치를 알리는데 그만 적의 저격에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함께 있던 이상사도 전사했다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여러명이 전사했을 것이고 중대는 철수하여 용인방향으로 나갔다.
"전쟁이 끝나고 찾아온 장군님, 그가 그 당시의 소대장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모든것이 흔적조차 보이지않는 잊혀진 전쟁이 되었다. 그런 어느날 빨간 별이 붙어있는 군짚차가 들어서고 군인들이 찾아왔다. 동네집집마다 수소문하며 노곡교 부근 논둑에서 숨져간 국군을 처리한 동네사람을 찾았다. 사실 부역자란 오명때문에 서로가 나오지못하는데 누군가가 북한군과 내무서원의 강제로 마을 사람들이 시신을 묻었다고 제보하여 그곳에서 발굴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당시야 전문적인 유해감식이란 있을 수 없는 시대라 어떻게 구별했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중대장이 구별되고 장군이 직접 땅을 확보하여 크나큰 비석을 세우고 주기적 추모제를 지냈다. 고 이 상사는 갈고개 남단에 묻고 묘지를 세웠다. 하지만 제대로 관리가 안되어 잔듸는 없고 이끼만 매마르고 낮아진 봉분에 찬바람만 불었다.
"나는 모든 자료로 그 유가족을 찾았고 다만 이 상사님은 군적자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당시는 자가봉송 유해는 우리가 발굴하지 않도록 되어있다. 그러기에 지금도 유족을 지원하는 선에서 업무를 수행한다. 이유는 만약 우리가 직접 발굴하여 유ㅐ관련 것이 없다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러면 유가족의 원망과 허탈감을 해결해 드릴 법적인 지위가 없다. 우리는 주변에서 '05년도에 2구의 유해를 발굴하여 신원미확인 유해로 처리 하였다.
하지만 납득이 어려운 부분도 있다. 부인이신 유족께서 일단 발굴을 원하지 않고 실제 우리의 군적 자료에 실종 유해인데 위치가 어딘지 기록에 없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좋은 생각만 하기로 하고 이 상사 건을 조사하는데 마음이 아파 나는 내가 준비하여 술 한 잔 올렸다. 왜 기록에 없을까. 수수께끼다.
더 아시운 것은 몇해전 현장을 가보니 '고 박대위' 지역은 발굴 되어 현충원에 안장 되었다 한다. 그런데 98번도로가 확장되면서 이 상사 묘가 없어졌다. 공사 당사자를 찾아 확인해 보니 개장공고를 하여 처리 되었다며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차를 돌려 국밥집 사장을 내려드리고 곤지암으로 향했다. 195고지를 찾았다."
하지만 고생만 했다. 195고지에는 별 흔적이없다. 읍사무소 옆에 있는 노인정을 찾아 관련제보를 받아 보았다. 많은 분들이 국군이 오긴 왔지만 바로 후퇴해 내려갔다 한다. 오히려 중공군이 내려와 상열미리와 무갑산 앵자봉 등에 중공군이 하얀도포를 쓰고 몇 천명이 죽어 뒹굴었단다. 언제냐고 물었더니 "동란" 때란다.
동란이란 '51.1.4후퇴를 말하며 중공군이 실제 한강을 너어서 이곳까지 들어왔다.
"200여구가 발굴된 광주 일원, 곤지암의 나팔소리"
이곳의 발굴은 전사적 측면보다는 제보에 의해서 발굴이 이루어졌다. 전사는 국군이 싸운 기록이 미미하다. 국군 제6사단 제19연대 일부가 전투한 것인데 구한국전쟁사 상권에는 불과 한두 줄의 기록이다. 중권에는 P318-319쪽 평택-삼척선 철수편에 국군 제6사단이 1.4후퇴 당시에 미 제9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6사단이 55번도로와 17번도로를 이용하여 철수하면서 그 우측에 미 제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가 좌측에는 미 제1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1사단이 병행 철수 한다.
20번도로를 좌우로 연하는 수원-금량장어간에 미제 3사단과 국군 제1사단이 철수를 하여 평택-안성선에, 그 우측으로 미 제9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6사단과 영국군 제27여단이 장호원, 장호원에서 남한강에 이르는 곳에 미 제24사단이 지역방어를 하게 된다.
그러다 재반격을 '51. 2월 초에 총공세로 전환하게 되는데 이때 중공군은 제13병단이 주력부대로 한수이북에 있었고 그 일부 부대가 한강을 도하하여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그 당시 유엔군이 북진당시 장진호 일대에서 미 해병사단고 메 제7사단, 그리고 국군 제 1군단을 몰아붙였던 제9병단은 당시에 미군의 강력한 화력과 동계혹한의 위력 앞에 무릎꿇어 전투력이 거의 마비 되어 38도선 이남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재편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위의 상황은 차후에 다시 알아보기로 하고 2월초에 재반격을 위한 공격에 국군 제6-19연대가 미 제24사단에 배속되오 경안리로 진출한다는 내용이 중권 386쪽에 살짝 언급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죽어간 군인은 어느 나라인가?" 이 수수께끼는 재반격편에서 언급된다.
"전사에 없는 광주지역, 김량장지역 전투'
43번도로와 45번도로를 이용하여 후퇴하는 제19연대 3대대의 일부병력이 오포와 모현면을 지나 김량장동 뒷산에 진지를 편성한다. 하지만 이 전투의 기록은 아예 없으며 신편 3권 전쟁사 439페이지 이동경로에 곤지암에서 도척을 지나 이곳 김량장을 지나는 것으로 되어 있고 광주는 언급이 없다. 참전용사는 충주에서 아예 올라온 것도 아니고 3대대일부는 처음부터 한강을 도하하여 이곳을 경유하였다고 한다. 누구 말이 옳은 것인지 참가한 군인은 있는데 기록에는 없는 곳이다.
김량장 뒷산에도 이런 증언에 의해서 '00년 초기에 탐사를 하러 올라갔다. 그러나 개인호의 형체는 별로 남아 있지않았다. 유림동 근처 수목권에 들러 당시를 기억하는 민간인을 소개받아 만났더니 군인들이 우르르 올라가 진을 쳤는데 곧바로 총소리 얼마나고 사라지고 오히려 1.4후퇴와 곧바로 진격시에 이곳 3군사령부 뒷산인 석성산(471m)-마성 작고개-할미성- 88CC능선-백련사능선에 중공군이 떼죽음을 당했다 한다.
미군이 요상한 포탄을 쏘아서 호속에서 대부분 앉아서 타 죽었단다. 실제 이능선에 엄청난 개인호가 있고 유해도 100역가 발굴 되는데 정말 수수께끼다. 누구의 유해일까?
"한국당에서 당비를 반납하는 행사를 이곳에 와서 했다. 웃기는 일이고 당시 지휘부와 결정을 유도한 인원들은 천벌을 받아야하지 않을까~!" 이곳도 재반격편에서 상세 언급하겠다.
"이천 야전병원에 있던 부상자는 전원 북한군이 무자비하게 죽였다."
곤재암 일원에서 국군 제-19-3대댁 북한군 제2사단 1개연대와전투를 하는 사이 이천지역으로 우측방 이포에서 도하한 북한군 제15사단 병력이 이천으로 공격에 들어왔다.
당시 이천에 있던 제19연대(-)는 지금의 양정여중고교 자리에 텐트를 치고 야전병원을 운용하고 있었으며 일제시대에 구축된 동굴이 현재 학교 교회가 있는 곳과 학교에서 좌측으로 조금 내려가면 읍사무소인지 동사무소인지 나오는데 그 건물 뒷편에 굴이 하나 있다.
바로 이곳 안에 많은 인원이 죽어 있는데 부상병도 있고 프락치들에게 죽은 무고한 시민들도 있다 한다. 실제 노무현 시대에 조사한 "한국전쟁 전후 사망 실태보고서"에 의하면 양정학교에 북한군에 의해 많은 부상자가 죽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나는 이 지역 일대의 전투지역을 탐사하면서 또 다른 많은 제보자를 만나 실제 학교에 함께 동행하여 위치를 확인하고 면사무소(지금은 무슨 토지측량관련 업무소 위치)위치에 가서 굴도 확인했다. 학교에는 교회 출입구쪽에 나무도 큰 것이 있고 개인호 흔적도 찾아냈다. 그러나 전후에 교회를 확장했고 그 과정에 어떤 것이 나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굴속은 지금 통제 되어 들어갈 수 없는데 소문에는 죽은 사람을 다 밖으로 모셔서 유족들이 찾아갔다는 소문만 무성하다.
"설봉산, 정개산에 유해를 발굴하라?"
이곳저곳을 탐사 및 탐문하는 과정에 1.4후퇴후 재반격간에 영국군이 들어왔다는 이야기, 그리스군이 정개산에서 전투 했다는 이야기, 설봉산 영월암 들어가기 직전 우측 산중턱에 10여명의 국군 묘비가 있다는 제보등 많은 지역주민들의 참여가 있었다.
정개산에 전투는 기록에 남아 있다. 시기는 '51년도 2월 5일부터 시작된 재반격 작전이다. 하지만 설봉산에 묘비는 한두개도 아니고 10여명이 된다니 의아해서 우리는 바로 현장을 확인하기로 했다. 설봉공원에서 제보자분을 만나 현장으로 직행했다. 차가 멈춰서는 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산중턱에 정말 묘비가 있다. 이를 알아버려 이천시 재향군인회를 찾아가 참전용사님들을 대상으로 실체를 알아보려 했다.
"그거 군인들이 와서 묻어놓고 갔다가 얼마 지나 다시와서 발굴해 갔다고 들었는데~"
사연은 이렇다. 군인들이 1.4후퇴 당시에 밀리는데 작은 항아리에 화장된 유해를 갔고 이동하다 도저히 갔고 가기가 곤란하여 묻고 후퇴했는데 지금 이곳이 아닌 설봉공원 만들기전 저 밑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공원이 들어서면서 그걸 이곳에 옮기게 되었는데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누군가는 전쟁이 끝나고 6사단 병력이 와서 발굴해 갔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우린 3번도로 우측 넓고개와 정개산 일원에서 10여구의 유해를 발굴했지만 이것은 전사에 입각한 '51년도 2월 전투에서 전사한 군인을 발굴한 것이지 초기전투는 아니다.
"여주 왕대리에 벌어진 어마어마한 민간인 사망 사건과 양섬의 통곡"
세종대왕 묘가 있는 곳에서 얼마도지 않는 곳에 왕댈가 있고바로 남한강 옆 이다. 37번도로와 42번도로가 교차 되는 이곳에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 숨어 있다.
이곳에 전투는 크게 기록된 것이 없다. 신라시대 고찰인 신륵사와 명성항후 생가가 인근에 있고 양도에는 양섬수변생태공간이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 곳에 많은 민간인이 죽어갔다는 청원이 관계기관에 접수되고 우리에게 사실 규명을 위해 철저한 현장확인이 요청되었다.
우리는 '10년도에 장자터에서 부상당한 군인이 밭고 야산언저리에 묻혀 있다는 제보에 따라 발굴을 개시하여 1구의 유해를 발굴 했다.
"내가 직접 현장을 목격했소!"
나는 세종대왕로터리에서 너무 쉽게 한명의 제보자를 만났다. 바로 길옆에 식당이 있고 식당옆에 나이든 어른이 계셨는데 경운기를 몰고 나오고 계셨다.
"어르신 잠깐만요, 혹시 전쟁때 이곳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데 군인이었습니까?"
"그걸 이제와 왜 물어요. 나는 군인은 구경도 못했소."
"저희도 전사에는 기록이 없는데 여주에 사시는 어떤 분이 저 높은 긱관에 민원을 내서 본인 아버지가 이곳에 끌려와서 죽었다는 내용입니다."
"내가 뭐라고 말하면 여러부작용이 날텐데 어쨌든 이곳에 전투는 없었고 국군이 내려가는 '50. 7월초에 군인과 경찰이 읍내인지 어디인지 모르지만 많은 인원이 와서 저기 산소 밑(과거에는 그저 산기슭)에 길게 구덩이를 파고 다 드르륵 하여 죽고 묻어버렸어요."
"그럼 어르신은 어디서 이걸 목격하신거예요?"
"지금 마을 회관쪽에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끌려온 사람들이 '김일성 만세'도 부르고 고래고래 악을 쓰는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어"
경운기를 잠깐 끄고 어르신이 걸어서 직접 묘가 있는 매장 위치로 우리를 안내했다. 길에서 얼마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가까운 거리다. 물론 그 당시야 산밑의 밭언저리였단다.
"진실을 덮고 발굴을 감행한 무책임한 발굴팀."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군인들이 '11년도에 와서 이지역을 발굴을 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도 본인이 그걸 왜 발굴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소문이 퍼지고 여주에 있던 보도연맹인지 부역자인지 억울하게 죽어갔다는 사람들의 유가족중 누군가 이런 사실을 얼마전 물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군인이 발굴해 갔는데 몇구를 발굴했는지 모른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유족중 한 집안이 계속하여 법원재심을 통하여 무죄를 인정받고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이란 결과를 얻어낸 다음 국가를 상대로 명예회복과 손해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발굴 팀장과 지역발굴부대 발굴반장을 통하여 실체를 파악하다."
우선 제20사단 발굴반장 황상사는 절대로 발굴하면 안된다고 했다 한다. 지역주민 이야기가 아니였다. 그런데 발굴단의 발굴 팀장인 이상사가 발굴을 직접 통제하여 했다. 이유는 발굴해보면 유품들의 실체를 보면 혹시라도 지역 청방대나 본대를 이탈한 군인, 경찰이 붙잡혀 죽었을 수도 있다는 그럴듯한 이유를 엮어서 기록에 남겼다.
발굴결과 개인호도 아니고 길게 연결된 교통호와 같은 곳이고 유해가 한쪽 방향으로 두개골이 정돈되어 있고 총상흔적이 대부분 있었다. 통상 우리가 유해발굴 지역은 산악지형의 개인호이며 전투 유품이 수없이 많다. 하지만 이곳은 그런 유품이 아니라 칼빈탄피가 많았고 단추들이 많았다. 바로 민간인 복장이란 추저이 가능해진다.
"이상사, 정말 모르고 발굴한거야?"
나는 얼마전까지 그를 통제하는 발굴과장이었다. 똑똑하고 용감한 이팀장이 혼자 결정할 사안이 아니였다. 실제로 주모발굴과장이 파라고 결정한 것일 것이다.
"난감했다. 민원을 해결해야하는데 많은 인원을 발굴했다 할 수도 없고 안했다고 할 수도 없다"
발굴돈 유해의 존재를 확인했다. 또한 엉터리 감식과에서 어쩔려고 제대로 실체를 분석하니 아무래도 군인관련 유해가 아닌 것 같아서 현황에서 빼고 다른 곳에 보관하고 있는데 그걸 찾는데 꽤나 오래 걸렸다. 일상업무로 생각하니 아무런 꺼리낌없이, 죄의식이나 인륜적 가치는 없는 상태로 사실 케비넷 어느 곳에 방치(?)하였다.
좀더 솔직히 당시를 회상하면 이곳을 발굴한다는 소문이 있어 우리 조사과에서는 반대의견을 비공식으로 감식과에 전달했다. 왜냐하면 이미 '10년도에 내가 발굴과장 시절에 1구의 유해를 발굴하면서 많은 제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민간인 사망자로 우린 결론짓고 발굴을 금지시켰다.
"민원인을 만났다. 그리고 그 집안의 내력을 들었다."
민원인은 의왕에 살고 있었다. 집에 찾아가 만났다. 그런데 그 남동생이 바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동생인 박지만의 중앙고 선생이다. 6.25전쟁 당시에 죽어간 집안의 아버지의 죽음이 당시 꼬갑게 본 동네 이장의 거짓제보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밀려 내려간 군인과 경찰이 올라와 북한군에 동조한 인원을 찾는 가운데 이장이란 자가 허위로 북한군에 식량을 제공하였다는 거짓말을 밀고하여 경찰서 감방에 몇일을 보낸후에 어디론가 차량에 실려가 죽었고 어렵게 살았다.
그러다 진실과 화해위원회에서 민간인 피해자 진상조사과정에 그 당시의 이곳 여주읍의 많은 집들이 이렇게 엉터리 고자질로 끌려가 죽었다는 결론이 나고 재판을 거쳐 명예를 회복하게 되었다.
"나는 거짓말을 해야 했다. 아니 타협을 해야만 했다."
경찰서를 찾았다. 원래 민간인 시신은 경찰에서 처리하도록 되어 있다. 발굴된 유해를 그대로 경찰로 넘기고 경찰에서 유족을 상대로 DNA감식을 해서 찾고자 하는 유족의 아버지를 식별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변수가 또 생겼다.
"여보, 하리강변과 양도에서 죽어간 억울한 사람들 발굴하여 원한을 풀어 주구려!"
이 문제를 해결하려 옸다갔다 하는 동안에 누군가 나를 현충원에 일요일날 찾아왔다. 나는 현직에 있을 때는 주로 휴일날 현충원에 나가서 보냈다.
이 어른이 가져온 것은 큰 달력을 1장 떼어내 요도를 그렸는데 바로 양도와 하리 강변에 엄청난 인원이 죽어서 묻혀 있다는 것이다.
장자터나 양도는 거기서 거기다. 이분의 이야기는 후퇴해 가는 군인과 경찰이 지역빨갱이라며 수백명 잡아 차에 실어서 이곳에 와서 먼저 지역 청방대원이 땅을 파고 그 속에 몰아넣고 죽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북한군이 들어와 지역 양민과 군인 경찰의 가족들을 데려다 같은 곳에 또 죽였다 한다. 그 인원도 수백명이란다.
하리 강변도 경찰서 감방에 들어가 있던 인원들을 경찰이 차에 실어내 여기저기 총살하고 묻었단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그렇다면 도대체 이곳에 인구가 얼마인데 대다수가 우익에게 죽고 좌익에게 죽고 "살아난 것이 요행"이란 말이 옳다. 너무 아픈 사연이 이곳 여주 왕대리와 하리 강변에 남아 있다.
이제 유족의 민원을 해결해야 한다. 이런 사실을 솔직히 알려 주었다. 그러니 찾고자 하는 아버지는 지금 발굴단이 발굴한 곳에서 죽어갔다는 가정이 어렵다는 것이다. 아마도 하리 강변에 묻혀졌다고 봐야 한다고 답변하고 원하시면 비공개로 감식을 해 드릴 수 있다고 했다.
상급부서(장관급)의 민원처리 요청이지만 법대로 해야 한다. 그런데 발굴된 40여구의 유해는 너무 보존상태가 좋지않아 실제 감식조차 할 수도 없었다. 결과는 맞는 분이 없다는 결론을 알려 드려야 했다. 이런 과정에 몇차례 만나 우린 인식의 동질성을 공유해야 했다.
발굴해서는 안되는 유해를 숫자에 급급하여 발굴한 그 당시의 치욕적인 행태는 있어서는 안된다 . 하지만 그후에도 이런 유형의 발굴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에 안타깝기만 할 뿐이고~~~
결국 그 유해는 모두 경찰에 인계하고 경찰에서 무연고자로 처리하여 모두 화장하여 어디엔가 자연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영혼의 극락왕생, 천국을 기원한다."
이 지역에서의 발굴은'13년도에는 강건너 8번도로 옆에서 오금리에서 8구의 우해를 발굴했다. 지역 주민들 제보가 동란(1.4후퇴시)때 국군 제6사단이 이곳에 밀려 내려왔는데 떠나 가면서 군인들이 묻고 갔다는 제보였다. 그런데 그ㅠ후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며 발굴해 유족을 찾아달라 한다. 솔직히 이 유해도 어떻게 보면 지역 프락치를 군인들이 총살하여 묻고 갔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승적 견지에서 우리는 모르는체 조사결과를 내놓지않았다.
"여주 점동면 처리의 5형제의 비화"
이 지역은 공교롭게도 전쟁의 흔적보다는 그 사후처리가 문제되는 것들이 많았다. 이보다 훨씬 전에 '02년도에 37번 국도를 타고 여주지역을 달리다가 처리라는 동네 간판이 보이는 버스정류장에 잠깐 머물렀다. 이유는 동네 어른 몇분이 차를 기다리고 있어서 내려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제보를 받을 까 하는 마음이었다.
70이 넘으신 아주머니께서 '오빠'를 발굴해 달라는 것이다.
"언제 전사하셨습니까?"
"잘은 모르지만 내가 14살 오빠가 22살인데 군에 끌려갔는데 나중에 죽어서 잿봉다리만 와서 동네 입구에 묻혀 있는데 모두가 가짜라 한다며 동네가 '유씨' 집성촌인데 많은 인원이 가서 5명이 그렇게 돌아와 동네에서 관리하고 있어요."
"그럼 바쁘지않으시면 함께 가보겠어요?"
나는 나중에 우리차로 여주읍에 모셔다들이기로 하고 현장으로 갔다. 주도로에서 얼마 안들어가니 동네 입구고 옆에 밭들이 있는 곳에 비석들이 서 있다. 들어가 보니 모두 동일한 성씨로 참전용사비라 되어 있다.
"현충원에 발굴하여 안장해 주시요?"
동네 어른이 내려오고 관련된 세부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분들은 1.4후퇴 당시에 거의 함께 군에 들어간 가까운 친척간으로 한날 한시에 10여명이 이 작은 동네에서 군에 갔는데 5명이 화장되어 왔다는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국군묘지가 별도로 있는 것도 아니고 군인들이 보자기에 나무로 된 목하같은 것을 들고 오는데 하도 많이 죽어나가다 보니 소문에 "솔가지를 태워 유골이라 한다"는 말이 돌아서 동네에서는 군인이 오면 동구밖에서 못들어오게 하고 심지어는 "너희놈들 또 거짓이야~!"하며 몽둥이를 들고 후려치는 사례도 빈번하게 발생하여 들고온 군인들이 다리야 날 살려라하며 동네 입구나 인근 사찰에 놓고 가버린다 한다.
그래서 이곳 처리마을도 밎지 않고 있으며 동네에서 합동으로 때가 되면 위령제를 오려오고 있는데 이제 그 부모님들이 다 돌아가시고 형제지간에 행사를 주관하는데 2대, 3대로 넘어가니 누가 벌초도 제대로 않고 관리가 어렵다며 현충원에 안장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즉답을 피하고 원론적인 답변만 했다. 우리는 찾지못한 유해를 발굴하는 것이지 자가봉송된 유해는 유족측에서 신청하여 이장해야 한다는 법적인 절차를 알려드리고 계룡대로 향했다. 고, 유인석 용사등 5명의 인적사항을 가지고 병적을 조회하니 모두 있고 자가봉송 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유족측에서 현충원 안장을 원하니 절차는 알려주었지만 사실 이걸 굴토하여 이장하는 비용이 꽤나 되는데 지원은 없다. 그럼 이미 2~3세대들이 동네에 남아 있는데 누가 선뜻 돈을 내어 추진하겠는가?
"상부에 보고를 하고 병력을 지원하기로 하다."
그러나 한가지 조건이 있다. 만약에 묘를 굴토했는데 화장한 흔적이나 유품, 기타 관련된 증명할만한 것이 없을 경우에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였다.
나는 다시 처리로 달려가 유족 대표를 만나 문제점에 대한 것을 토론하고 만약에 아무런 흔적이 없으면 어쩔수 없이 다시 이곳에 원래 모습대로 묘비를 세워놓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상호 양해각서를 교환했다. 절대로 이의제기를 하지않는다는 다짐을 받은 것이다
"이윽고 50년만에 열리는 용사님의 화장유해"
충북대 박선주교수팀의 주도하에 지역 군부대에서 병력이 지원나와 묘비 마다 인원을 배치하여 이장절차에 들어갔다. 현충원과 협조하여 화장유해를 담는 유골함도 가져왔다.
간단한 제례를 올리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제발 까만색이든 하얀색이든 흔적이 나오길 기대하며 묘소마다 거의 허리춤까지 파내려간다.
"통제 장교님 여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1번 묘소 나오고, 3번 묘소 나오고, 4번 묘소도 나온다. 평체를 보니 까맣게 그을린 모습이 화장재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누가 보더라도 불에 탄 흔적임에 틀림이 없어 같은 유족이라도 탄식과 불안감이 교차하고 있다.
그런데 2번과 마지막 5번 묘소에서는 특이점이 없다
박교소님이 조용히 날 부른다.
"이거 소문대로 나무재를 보낸 것 같은데. 나무재는 시간이 되면 흔적이 없어요. 없다고 해야 되는지 좀 고민해야겠어요."
"일단 시간이 됐으니 점심을 먹고 생각하지요. 흙이 젖어 있으니 마르면 혹시 조그만 흔적이라도 보일지모르잖아요."
우린 점심을 먹는다. 마을에서 지원병력들 점심을 해 와서 배식이 이루어 진다. 하지만 나는 먹을 수가 없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지 골몰해 빠져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망설였다.
"통제 장교님 무슨 문제 있어요?"
나의 행동을 지켜보던 유족분중 한명이 나가서며 묻는다.
"아니요, 참 50년이 지났는데 그 흔적이 조금이라도 있다니 생명의 존엄성이 대단해서 하늘을 보고 기도하는 겁니다."
"묻게 되면 얼마나 오래 사람뼈가 온전히 남아 있나요?"
"그건 토질등 여러가지 조건에 따라 다르리라 보는데 전문가인 박교수에게 물어봐야 할 것같습니다."
"교수님 이리와 보세요. 호기 사람이 묻히면 형체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나요?"
"토질에 따라 어떤 경우는 몇만년이 지나도 미이라로 그대로 있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한 3년만 지나도 부패하여 흔적조차 없는 경우도 있어요."
"그럼 이곳으 토질은 황토흙이 많은데 오래 가나요, 아니면 어떻게 되나요?"
"꼭 이렇다 저렇다 말을 단편적으로 못해요. 같은 지역이라도 수맥이 지나는 경우도 있고 혹시 들쥐나 기타 요소로 구멍이 뚫려 수분이 공기와 같이 유입된다면 너무 숩게 부패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옛날 묘들을 보면 석관묘나 석회석으로 주변을 감싸 뿌리가 침투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거든요. 당장 이곳도 토질이 같은 것 갔지만 위치에 따라 흙 색이 조금씩 다르잖아요. 봉분에 풀이 나있는 것도 다르고."
나와 박교수는 만약을 대비하여 유족에게 변명할 구실을 지금 공유하고 있다.
유족의 충격을 누그러뜨리는 중이다. 아무리 각서를 상호 썼다하더라도 아무것도 없다면 유족의 그 충격은 정말 클 것이고 국가에 대한 배신감이 하늘을 찌를 것이다. 다시 오후 발굴이 시작되고
2번과 5번 묘소에서는 특이점이 안보인다. 그런데 땅이 말라가는데 언뜻 햇빛에 약간 검은 빛이 보이는, 극히 일부지만 모습을 찾아냈다. 나는 얼른 그 흙을 유골함에 담아 유족에게 나왔다고 알렸다.
"현충원 봉안관으로 옮겨진 5인의 화장재 유골함"
이제 매월 일정한 날짜를 잡아 봉안식을 통하여 안장되는 수순만 남았다. 그러나 사실은 온전한 유골함이 아니다. 어떻게 하랴, 유가족의 눈물을 두번 흘리게 할 수는 없었다.
"'01년 7월, 그리고 실제 발굴된 처리의 5인의 전사들"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우린 전나남도 화순 너릿재 고개 남단 이십곡리 입구에서 26인의 제8사단 참전용사를 발굴 했다.
지역주민 광주의 "한의사"로부터 제보를 받아 이곳을 조사하여 발굴을 하고 실제 매화장카드를 전량 확보한 결과 아니 이곳에 이 5명의 인적사항이 다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우린 DNA감식도 하여 일치함을 얻었다. 유족들은 난리다. 기뻐서 서로들 부둥켜안고 "그렇지"하며 당시의 거짓임이 들통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우릴 붙잡고 느러지지않고 고맙다고 한다.(상세한 내용은 전남 지역편에서 언급)
"용사님 우리를 용서하소서. 용사님 우리를 보호하소서!"
(나)진천-미호천(오근장)전투
진천 전투는 '50. 7. 6일부터 13일까지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수도사단이 북한군 예하 제2사단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진천에서 미호천 일대에서 실시한 방어전투다.
국군 제6-19-3대대를 따라 북한군 제2사단이 광주-김량장-안성-광혜원-진천으로 진출한다.
이포에서 남한강을 도하한 후속부대인 북한군 제15사단과 제603모토사이클 대대(?)가 이천-장호원-동락/무극으로 진출(북한군 제1사단 포함)하여 국군 제6사단-7연대와 동락-무극리에서 한판 승부를 벌인다.
수도사단은 '50. 7월 5일 신설딘 제1군단에 편입되면서 제1연대와 제8연대, 그리고 제18연대를 예속하고 평택으로 집결하였다. 그러나 사실 명목상 그렇고 각 연대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김홍일 군장장은 극도로 쇠약해진 이종찬 대령을 대신해 육사교장인 이준식 준장을 혼성 수도사단장에 보임하고 안성-발안 사이에 집결중인 각 사단 병력에서 1개 연대씩을 차출해 투입하기로 한다.
그러나 어수선한 당시에 수시로 지휘관이 바뀌고 건재도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 북한군 제2사단이 국군 제6-19연대를 밀어내며 계속 남하함에 따라 신속한 대비가 요구 되었다. 7월 6일에 진천으로 이동한 수도사단 이준식 장군은 먼저 도착한 제1연대(제1대대장이 장태환 소령등 3개 대대)를 백곡천에 먼저 투입하고 후속할 제8연대(제2대대장에 정승화 소령등 3개 대대)와 제18연대(3개 대대)를 진천 남쪽 봉화산과 문안산을 점령토록 하였다.
당시 연대의 상황을 잠깐 알아보면 제1연대는 한강선 방어후에 평택에서 수습하여 이희권 중령이 연대장으로 800여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20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진천으로 이동한다.
제8연대는 평택에 집결후 도보로 천안을 경유, 7월 8일에 늦게 진천 남쪽으로 도착하며 병력은 1,000여명이었다.
제18연대는 열차를 이용하여 청주로 이동후 겨우 500명인 제3연대를 흡수 통합하였다.
포병은 한강 도하전에 상실된 포병대대를 대신헤 7월 6일 대전에서 새로 창설된 제1포병단의 제2포병중대를 지원받았다.
7월 7일에는 김석원 장군이 새로 부임하여 민군간 협조체제와 지역 내의 학생과 부녀자들이 탄약 운반과 식사 추진에 참여하였다.
북한군 제2사단은 7월 1일에 김량장리를 점령하고 7월 6일에 안성을 점령한 후에 진천으로 지향하게 되며 이에 7월 8일에 육군은 조치원에서 청주로 행군중이던 독립 제17연대를 군단에 배속하여 진천으로독립기갑연대 장갑 제1중대와 도도대대, 제2포병 중대를 수도사단에 증원하였다.
7월 8일에 백곡천 전방 중산리에 추진된 제1연대가 물러나자 김석원 사단장은 제8연대를 문안산에, 제18연대를 봉화산에, 독립기갑연대는 잣고개 중앙에, 제17연대(-2:김희권 중령 지휘)를 문안산 좌측 330고지로, 제2사단 제20연대를 봉화산 우측방으로 배치하고 그 우측방에는 제2사-16연대가 144고지에서 백곡천까지 방어 토록 하였다.
그러나 7월 9일에 문안산-봉화산선의 주저항선을 피탈당한 수도사단은곧ㅂ로 반격을 실시하여 문안산-봉화산 선을 히복하였으녀 저긔 3번에 걸친 연대급 공격에도 봉화산과 문안산을 방어하였다. 그러나 양 측방의 북한군 진출과 동서측의 전선이 남하함에 따라 전선 균형을 위해 7월 10일 16:00을 기해 미호천 남안(오근장)으로 철수하게 된다. 하지만 제17연대 제1대대는 늦게 철수조치가 이루어져 조치원 방향으로 이동을 개시하여 7월 11일 조치원에 도착하고 다시 보은으로 이동해 본대와 합류하게 된다
미호천에 도달한 수도사단은 제1연대에 제9연대를 흡수해 재편성하여 팔결교가 있는 오근장 지역에 제1연대를 그 우측에 제18연대, 무심천 좌측에 제8연대로 급편방어에 들어가게 된다.
진천에서 미호천 남안으로 철수 과정에 미 공군이 근접 항공지원으로 뒤따르는 북한군을 차단하고 사단 또한 패차량을 동원하여 17번 도로상에 야간에 라이트를 켜고 시동을 걸고 있도록 함으로써 강력한 병력의 지원이 있는 것처럼 적을 속이어 진출 속도를 늦추게 함으로써 대전에 있는 임시 정부가 대구로 이동하는데 시간적 공간적 여유를 확보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아 봉화산~!"
봉화산 하단부에 '신흥사'란 절이 있다. '00년에 찾았을 때는 지금은 돌아가신 '탄허'스님의상좌승이 주지를 하고 계셨는데 친절히 우리를 맞아 주셨다.
안내를 받아 내부에 들어가 마침 점심공양도 받고 호강한 시간이 되었다. 우리의 찾아온 목적을 들으시고는 산불감시요원을 만나보라 하고 직접 진천 한약방 조씨라는 분도 소개해 주었다. 그래서 우린 바로 읍대장의 안내로 한약방을 찾아 갔다.
"어르신 계십니까?"
"아니 읍 기동대장님이 어떻게 여기에 오셨오?"
다시 우린 약방에 들어가 한방차 한 잔에 목적을 이야기하고 함께 탐사에 나섰다. 진천 재향군인회 회장님도 함께 한다. 진천은 어떻게 보면 역사의 고장처럼 김유신 장군의 태를 묻은 길상사가 있고 구한말 독립 유공자이신 이상설선생의 생가도 있다. 우리 삶의 지혜가 돋보이는 진천농교도 이곳에 있으며 우리나라 종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도 여기에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길상사가 있는 산의 능선이 문안산에서 흘러 내리는데 이 곳에 수백명이 죽어 동네에서 울력으로 묻었다는 이야기와 문안산(412m)은 지금 공군 부대가 앉아 있는데 건물을 지으면서 시신을 쓸어서 계곡에 넣어버렸다고 한다. 봉화산(412m)은 조선시대에 실제 봉화를 올리던 곳으로 위에 올라가면 그 당시 봉화병들이 살았던 병영시설이 불타버리면서 그 기왓장 등 파편이 남아 있고 그 둘레에 교통호가 있는데 시신이 가득했다는 제보다.
따라서 나는 '01년도에 이곳을 발굴계획에 포함하여 봉화산 정상에 포인트를 두고 발굴을 개시하여 11구의 유해를 발굴 했다.
"정강이 부분에 부목을 댄 채로 숨져간 용사님, 그의 손에는 수류탄이 안겨 있었다."
'00년도 발굴에 이어 두해째 발굴 인데 첫해는 344구의 유해를 주로 다부동 낙동강 방어선과 안강-기계일대에서 발굴 했다. 이번 발굴은 중부 지방의 효시가 되는데 산 정상도 아니고 비탈에 숨져갔으나 세월 속에서 낙엽과 풀뿌리에 휘싸여 그대로 모습이고 수류탄은 1박스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용사님 손아귀에는 수류탄이 있어 그 용맹 그 분노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육사 8기 박소위의 기막힌 증언"
그런데 내가 '03년도 5월에 이곳 동원사단 제67사단 포병연대장으로 2년간 재직하게 되어 잠깐 내려온 시기에 고, 김동석 HID대장의 육사 8기 동기생인 박소위가 김동석씨와 그 밑의 유격대원들하고 함께 우리 연대를 방문하여 안보교육차 진천에 온 적이 있었다. 그분이 바로 김석원 장군 밑에서 이곳 전투를 소대장으로써 수행하였던 것이다.
"선배님, 전사에는 몇차례의 공방전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느 고지에서 전투했습니까?"
"내가 1연대에 있다가 또 18연대도 가서 주로 봉화산과 잣고개에서 전투 했는데 호를 팔 시간이 없어서 죽어있는 시신을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르지만 눈앞에 쌓아놓고 총을 당겼어요. 주변에 흔한 것이 당시는 총이라 그걸 거꾸로 착검된체로 땅에 꽂아 지지대로 썼어요."
"그럼 그 당시가 7월 8~11일 어간이 되는데 엄청나게 덥고 비가 내려 시신처리도 어려웠겠어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말 말아, 죽는 고통보다 시체썩는 냄새가 더 독해?"
"그럼 그렇게 썩어내리는데 어떻게 계속 고지에서 머물렀어요?"
"참 비참하고 죄송스런 말인데 어떻게 해, 그냥 발로 밀어버리면 고지에서 흘러내려 가. 다른 시신으로 또 쌓는거야!"
이런 말 한마디가 나에게는 또 다른 정보가 되어 '05년도에 다시 육본 발굴업무를 수행하면서 아예 고지 법면을 완전히 들어내는 발굴로 전환하여 그후에 20여구를 더 발굴하게 되었다. 하지만 문안산 일대는 공구니지로 너무 많이 훼손이 되었고 유해가 주로 있었다는 곳은 진입로를 만들면서 도쟈로 그 계곡을 모두 메워버려 도무지 발굴할 수가 없다. 우린 제17연대(-2)가 있었던 330고지 일대에서 2구의 유해를 찾았고 문안산 앞 능선에서 2구를 발굴 했다.
"한 구도 발굴되지 않은 길상사내 고지군"
또한 백곡천 제방에서도 중산리 최초전투 현장에서도 유해발굴을 못했다. 모두 세월속에 묻혀버렸거나 홍수당시에 다 씻겨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길상사 안의 산고지군은 아직도 삼국시대의 성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지형의 변화가 별로 없어 믾은 기대를 했다. 왜냐하면 밀려 내려가던 국군이 갑작스레 돌아서 반격을 하면서 일시적으로 진천을 회복한 사례가 있어 제보대로 많은 희생자가 있으리라는 판단은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잣고개에 올라선 카이져 수염의 사단장 " 내 뒤로 가는자는 투살하라"
사실 나는 서울 대방동의 성남고를 나왔다. 당시에 우리학교 이사장님이 김석원 장군이셨다. 그러나 전쟁에서 한번도 북한군에게 진적이 없다는 것과 제1사단장 재직 시절에 못된 탐관 오리들이 북측과 물물교환으로 북어를 치떼기로 들여와 이익을 남기곤 하는데 부임 당시에 바로 모두 압수하여 전 병사에게 나눠줌으로써 당시 어린 채병덕 총장과 불화가 깊어져 전쟁발발 몇개월 전에 야인이 되었다는 영웅담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연대장으로 나온 이곳 진천의 봉화산-문안산전투에서 적의 양익포위를 못하도록 함으로써 임시정부의 대구이전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잘 몰랐고 사실 우리가 사관학교에서 전사 교육시 별로 알리리지도 안했다.
정처없이 후퇴하는 병력을 따라 수원으로 내려간 장군은 학생들의 열화같은 요구에 학생들을 규합하여 학도호국단을 만들고 이때에 정부는 병력도 제대로 없는 수도사단의 지휘권을 김석원 장군에게 부여하여 진천지역에서 북한군 제2사단과 맞서도록 하였다.
민간인 신분에서 다시 현역으로 복귀한 장군은 따르는 학생들을 대동하고 진천에 들어와 이곳 잣고개에 올라서 일본도를 차고 카이져 수염을 기른체 북쪽을 바라보니 후퇴하는 병력이 눈동자가 모두 오뉴월 동태처럼 썩어있고 핏대가 없는 패배에 물든 상태였다고 한다.
그래서 장군은 직접 잣고개 일원에 적의 포탄이 작열하는데도 아량곳 없이 "내가 김석원이다. 지금주터 내 뒤로 가는 놈은 목숨을 버려라!" 이렇게 호령하고 끄덕도 않고 정상에 서 있었다. 사단장이 새로 왔다는데 아니 적 포탄 속에 서서 물러나지 말라하고 "헌병들에게 독전대 임무를 부여하여 후퇴시 사단장부터 척살하라" 소리지르니 사단 참모들부터 겁에 질려 내려사자는 건의를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고개를 오르던 군인들은 돌아서 적에게 달겨들어야 했다.
"아휴 그 양반 고집 불통이야, 그래서 이나라가 살은거야~!"
박소위는 당시를 떠올렸다. 사실 모두가 고개를 넘어 빨리 청주지역으로 내려가려 했지 싸울 전의가 없었다 한다. 어ㅙ냐하면 연대라 해봐야 겨우 대대 병력정도 였지 싸울 인원도 없었다.
다만 이때부터 좀 나아진 것은 미군의 군수보급이 원활해져 대전에서부터 실탄이 이곳저곳으로 배분되어 숨통이 터지고 미군 공군이 수시로 전장에 나타나 맹폭을 하여 가끔은 로폭으로 아군이 대량 피해를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북한군의 진출을 지연하고 적 탱크를 무력화 시켰다.
"야 제들 미친 것 아냐? 빨리 물러나라"
이러니 파죽지세로 백곡천을 도하하여 진천을 함락하고 잣고개로 밀려오던 북한군 제2사단은 아니 도망가지 바쁜 군대가 갑작스레 돌아서 달려 내려오니 기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한다.
" 미친개에 물리면 약도 없다"는 속담이 현실로 눈앞에 전개된 것이다.그래서 뒤로 물러나는 사이에 병력이 보충되고 지휘체계가 확립되면서 협동작전으로 수도사단과 국군 제2사단이 지연전을 수행하여 승리를 하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길상사 내의 산 능선에는 지역주민들이 시신을 긁어 묻었다는 흔적은 조금씩 있으나 한구의 유해도 못찾았다. 심지어 탄피도 없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재향군인 회장님과 한약방 사장님을 만나 실상을 파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지역 주민들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는 많은데 정답은 없었다. 지역 향토사단장이신 제37사 박장군께서 정말 많은 병력과 포크레인등 중장비까지 동원하여 그 한구라도 발굴하려 했지만 못했다.
"평산리 대밭골에 국군 소대장이 묻혀 있다."
이런 와중에 '07년도에 읍기동대장으로부터(제3사 13기생) 전화가 왔다. 평산리에 제보자가 있는데 분명히 본인이 소대장이 묻혀 있다고 한다 한다.
나는 발굴반을 직접 데리고 현장에 가서 발굴을 통제했다. 이곳은 양천산(356m) 전방으로 제2사단 20연대나 16연대가 점령 방어하던 곳이다. 일대를 탐사하니 산마다 아직 개인호가 그대로 살아있고 지역 주민들 중에 연세가 되신 분들이 그래도 많이 살아계셨다.
하지만 어른들 이야기는 북한군이 와서 큰 전투는 목격하지 못했고 어느날 국군이 와서 밥 달라고 하여 밥해주고, 어느날에는 북한군이 와서 밥달라하여 밥해주고 동네사람들 간에도 큰 사상적 문제점은 없었다고 선을 긋는다
제보지역을 이곳저곳 시굴하는 과정에 드디어 전투화가 보이고 알류미늄 포크가 나오면서 우리는 한구의 완전유해를 발굴했다. 신분이 장교라하지만 50년이 지난 싯점에 그 계급장이나 신분증은 남아있지 않았다.
봉화산의 유해발굴은 끝나가는데 "백비"의 아픔~
그런 어느 날에 다시 재향군인 회장님과 한약방 주인이 나타나 사실을 알았다며 "백비"에 다 수습하여 묻었다는 엄청난 제보를 한다.
나는 육본 근무처장, 6.25사업과 과장, 지역 대표등을 모시고 함께 봉화산에 올랐다. 중턱에 잘 정돈된 묘소가 있는데 가장 우측에 엄청 큰 무덤이 있고 이 무덤의 앞에 큰 비석이 서 있는데 아무런 글씨기 없다. 이야기가 바로 시신이 야산에 뒹굴고 있다보니 신원확인 단서가 없기에 모두 모아서 전후에 이곳에 모두 묻었다는 정말 믿을 만한 제보다.
우린 엄청 큰 희망을 가지고 충북대 박선주 교수팀을 붙혀 발굴 작업에 들어갔다.
이때가 '01년도인데 그 당시에 발굴은 충북대 용역팀에서 지역 발굴부대 병력을 지원받아 진행 했다. 얼마 있어 연락이 와서 현장에 가 보았더니 여러구가 아니고 2구라는 것이다. 아니 조각 유해라도 많아야 하는데 무슨 이유인지 제보자를 모셔 현장을 보여주고 정확한 내용을 다시 들었으나 마찬가지다. 이때만 해도 모든 것을 충북대 발굴팀이 용역으로 책임을 지고 나는 사실 감독자 역활이었다. 다시 나는 전방으로 양구 북방 피의능선지역과 펀치볼에서 지역탐사를 하고 있었다. 발굴이 종료되었는데 2구에 불과하다고 전화 연락이 왔다.
"야, 너 큰일났다. 민원이 접수되었는데 봉화산의 조상묘를 누가 훔쳐갔다는 것"
그 당시는 지역별로 발굴이 종료되면 용결식을 하고 유해는 DNA 감식용 뼈를 부분 채취한 다음 화장하여 일정 장소에 봉정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수리봉, 피의능선에서 땀을 흘리며 탐사를 하고 있었다. 진천지구는 2주 후에 영결식이 진행돈다. 글ㄴ데 점심을 김밥으로 먹고 피의 능선에서 양구 서쪽 옥돌산, 방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51년도 국군 제7사단이 진출하는 진출로를 따라 백석산으로 탐사를 이어가려 했다. 그런데 계룡대에서 전화가 왔다. 이유없이 무조건 빨리 본대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나는 허겁지겁 운전자에게 부탁하여 가능한 빨리 차를 몰아 계룡대로 왔다. 저녁 무렵이 되어 도착하니 과장이하 과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진천 봉화산에 민간인 묘가 사라졌는데 군인들이 파냈다는 민원이 접수 되었다?"
"그런데 제가 해결할 능력이 있나요?"
"너가 육본의 발굴 책임자아니냐, 그러니 너가 책임을 지고 해결해야지 어떻게 하니?"
"아니 그곳을 선정할 때는 저뿐만이 아니라 과장님 처장님, 지역 부대장도 있었는데 제가 무슨 이유로 책임을 집니까?"
어이없는 올가미 작전에 분노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호국 영령이시어 저를 도와 주소서!"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 지역 신문에 발표되면 무슨 창피인가. 그리고 실제 묘를 발굴했다면 살인행위와 같은 무거운 죄다. 양심적으로는 더 큰 죄다.
나의 항변에 조용하게 누구도 말없이 등지고 서있다. 도대체 어떻게 나에게 모든걸 뒤집어씌워 책임지라니. 문제 해결은 논하지않고 누가 책임질 것인가만 논한 이상한 과원들이며 지휘체계다. 치사하게 책임을 면할 궁리는 싫었다. 청운의 꿈을 갔고 이곳 계룡대 육본에 입성했는데 원하지도 않은 보직을 억지로 나에게 맡기고 이제 문제 발생에 책임지라는 우수꽝스런 조직이다.
"알겠습니다. 제가 책임지죠. 하지만 현장에 가서 제가 확인한 다음에 잘못을 인정하는 인터뷰를 하십시요. 갑니다."
나는 다시 차를 몰아 진천 잣고개로 갔다.
어둠이 다가온다. 이곳 현장 발굴 책임을 맡았던 진천-음성대대 부대대장 송소령을 호출하여 현장으로 오라했다. 현장에 가보니 주변이 어수선하고 한여름인데 찬바람이 불고 있다.
"야 송소령, 내일 민원제기한 유족들을 현장으로 모시자.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자. 그전에 병력을 투입하여 주변좀 정리하라. 그 재향군인회장, 한약방 아저씨, 읍 기동대장님도 오라고 해라."
"형님, 알겠습니다. 그런데 연락했더니 모두 전화를 안받고 있는데 밤에 다시 한번 찾아가 꼭 와달라고 부탁하겠습니다."
"뭐 모두 연락두절. 아니 본인들이 큰 목소리로 제보하고선 모른다고 피한다 이거지~!"
아침해가 밝게 오르고 육본에서는 어떻게 할거냐고 계속 전화다. 과원들은 나의 위기에 꼬소하여 내가 없을 때에 잘 되었다며 박수를 쳤다고 한다. 우리 게원 중에 한명이 나의 전적인 신임을 받는 녀석이 있었기에 내부사정을 빤히 보고 있다.
"호국 영령이시어 나를 보호 하소서"
이윽고 유가족이 저 산밑에 도착했다고 한다. 나는 내려가서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현장으로 안내했다. 거의 10여명의 숫자가 살기 등등하게 오른다. 현장에는 송소령이 서 있다. 드디어 유족들이 올라서고 상황을 설명 하려는 순간 "야 송꽁, 너 여기 왜 있어?" 하며 유족중 한 건강한 남성이 송소령을 가리킨다.
"어어, 너 김짱돌 아니냐? 오랜만이다. 내가 이곳 발굴을 책임지고 한 부대대장이다."
"그래, 너가 발굴했다 이거지?"
"과장님 끝났습니다. 이상없으니 저는 전방으로 다시 갑니다. 과원들에게 미안하다 하십시요. 잡혀 들어가지 못해서~!"
알고보니 중학교 동창에 짝궁이었고 그 건간한 남성이 청주에 유명한 주먹계의 한 사람이었다. 주먹계들의 의리는 대단하다. 동창을 만나 그 당시의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이곳이 할아버지 산소인데 이장하려고 왔다가 없어진 것을 알고 신고했다는 것이다. 설명을 듣더니 그럴수 있겠다고 인정하고 차라리 발굴을 해 주어 고맙다는 것이다. 우린 발굴 되어 영결식을 기다리는 임시 봉안소로 갔다.
"호국 용사님이 되어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대형관에 잘 모셔져서 입관이 되어 있고 태극기가 덮여져 있는 모습에 유가족들은 너무 기뻤다. "아니 우리 아버지가 호국용사님이 되였네" "와 할머니도 태극기가 덮여있어~!" 유족들은 기뻤다. 다행이란다. 그나마 묘자리가 않좋다고 하여 이장을 하려 했는데 잘 되었다며 고맙다고 한다. 걱정마라며 전화기를 들더니 "어제 민원 취소한다"고 혼쾌히 용인해 주었다.
"나쁜(?) 박교수팀의 어이없는 실수?"
사실 이문제는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아니 뼈가 나오면 남녀노소가 구별되고 매장기법을 보면 어느정도 집단유해로써의 가능성을 가름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박사팀은 그렇지 못했다. 그저 육본에 통제장교가 발굴하라해서 발굴한다는 식의 무책임한 답변만 했다. ㄱ러나 인류학적 판단에 근거하여 발굴중 이상하면 멈추게 하고 진위를 가려야 한다. 그러려고 많은 용역비를 주어 발굴하는 것인데 문제가 발생하면 본인들은 빠지고 어쩌다 꺼리가 나오면 우리 허락도 없이 언론에 흘리는 아주 비이성적인 분들이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분명 나중에 알고 보니 발굴하면서 학과 팀원 중에 누가 여성갔다는 말과 뼈의 상태가 고령이라했다 한다. 하지만 6.25전쟁 당시에도 노무자중에는 고령자도 있었으니 또한 여자도 있었다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그대로 넘어가 버렸다고 한다.
결과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고 우리는 지역보상비에서 옮겨가는 묘지의 잔듸비용을 지원하는 선에서 이번 건을 마무리 했다.
그러나 이 발굴 사진이 공개 되었다.
원수는오나무 나리에서 만난다고 어느날 일요일에 나는 친구들과 동두천 소요산을 등산하게 되어 그 곳에 갔다가 박묽관이 있어 잠깐 들어갔는데 아니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벽에 글쎄 봉화산 발굴 사진이 걸려 있다.
도대체 이 사진을 어디서 구했느내고 물으니 충북대에서 획득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진에 무심코 보낸 결과로 '백비'의 발굴 모습이 있는 것이다. 나는 강력하게 박교수측에 항의 하고 박물관측에도 제거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어떻게 되었느지 그 후에 가질 않아 모르겠다.
"오창 농협 창고의 쓰라린 비밀"
사단이 문안산-봉화산선에서 전투를 수행하며 적의 강력한 압박전술에 점점 후퇴해야만 하는 싯점이 다가 오고 있다. 그런데 이 일대에 보도연맹에 가입된 인원이 상당수 있어 그냥 내버려두고 가면 후일 문제가 될 것이라 판단하여 모두를 "소개" 이유로 차에 실었다.
임무를 부여받은 박소위는 벌써 창고 옆으로 내려와 기관총을 거치하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차가 들어서고 사람들이 남자여자 할 것 없이 창고안으로 밀어 넣었다. 영문을 모르는지 아니면 삶을 포기했는지 알 수 없지만 모두가 순수히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명령이 떨어졌다.
"그 비명소리 지금도 들린다. 연대장 우리 묵념이라도 하게 소주 한 병 사오구려~!"
직접 현장에서 기관총 사격을 지휘한 박소위는 눈물이 뜨거워 졌다. 많은 세월이 흘러 이제는 알 것도 같지만 사실 그 당시만 해도 제한돈 정보와 계속되는 프락치들의 만행으로 극도로 민감한 보도연맹의 소위 학살 사건이 발생했지만 누가 나서서 구명운동도 쉽지가 않다.
실제 이 보도연맹의 골수분자들에 의해 피해를 입은 지역주민과 경찰 군인 및 그 가족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인원이 공평이란 단어에 속아 넘어가 주로 배운자와 가진 것이 없는 가간한 사람들이 혹시나 하는 개벽을 꿈꾸다 전쟁이란 소용도이 속에서 죽어가 청주 분터골에는 수백명이 죽어 있고 대구 경산의 코발트 광산갱도 내에는 천명이 넘는 인원이 죽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진실규명에 필요한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죽어가고 피해를 입은 사람의 2세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세력을 규합하여 정치권에 호소하는데 이 또한 모순으로 정확한 진상규명은 어렵다고 본다.
나도 여기서 하는 말이 다 옳다고 볼 수도 없다. 예를 들어 여주 왕대리에서 죽어간 많은 민간인은 국군이 총을 쏴 죽였다고 하고 재판에서도 무리한 총살이였다고 결과가 일부 나왔다.
하지만 내가 직접 현장에서 제보를 받고 발굴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 실제 그 당시를 지켜본 장본인이 있어 들어본 결과 대부분 "김일성 만세"를 부르며 죽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분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유가족들은 결사적으로 아니다라고 외치는 반면 그 당시에 방아쇠를 당긴 분들은 모두 숨져가 누가 나서서 "사실 이렇고 저렇고 해서 그랬다"고 말 할 사람이 없고 그 후선들이 나서서 대답할리도 없다. 또 다른 진실게임의 시작이다.
어쨌든 이곳에서 숨져간 사람 대부분은 몇일이 지나고 어디서 왔는지 그 유족들이 시신을 찾아갔고 찾아가지 않은 3구를 밭언저리로 옮겨 가매장 되었는데 지금 그 흔적도 없다.
"이종록 용사님의 증언: 대대장을 구출하라"
사단은 7월 10일부터 봉화산 선에서 철수를 개시하여 미호천 남안으로 내려가는데 북한군 제2사 단은 바로 따라붙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11일이 돼서야 꼬리를 물기 시작한다.
12일에 미호천 북안에 모습을 나타내는 북한군을 수도사단은 미군 전폭기를 이용하여 맹폭을 퍼부어 800여명의 인명피해를 입게 된다.
수도사단은 미호천변에서 적과 근접전투를 벌이는데 특히 오근장역이 있는 주변에서 팔결교를 사이에 두고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제1연대 소속 대대장이 절명하게 된다.
"대대장이 쓰러졌다. 얼른 차를 대라"
"대대장님 대대장님 , 그러나 이미 절명하여 눈마저 감지 못했다" 이종록 용사님의 증언이다. 오근장역 주변 과수원이나 야산등에 가면 지금도 그 당시를 알려주는 개인호가 많이 남아 있다. 이 일대를 몇차례 발굴 했지만 탄피나 유품은 찾았지만 유해는 찾지 못하였다.
바로 이 대대의 소대장인 이종록 소위는 대대장과 그 전령등 3명의 유해를 차에 운구하여 미원으로 내려가 진현사(?)가 있는 두부실 언덕에 묻고 계속 후퇴하여 청주를 거쳐 지금의 공군사관학교가 있는 국사봉일원으로 내려간다. 그 후 종전 후에 발굴하여 국군묘지로 안장을 하게 되는데 전령등은 그대로 있다고 하여 우리가 발굴에 직접 이종록(지금은 고인이 되어 현충원에 안장 됨)용사님을 모시고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말았다.
"팔결교에 묻힌 수많은 군인들~"
오근장 일대와 청주비행장안의 야산을 탐사하는 과정에 미호천 변에서 논일을 하는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다. 연세가 70을 넘었고 당시에 국민학교에 다녔다 한다.
"어르신 혹시 이곳이 전투지역이라는데 죽어있는 군인들 못 보셨나요?"
"무슨 소리요, 여기 강변 아래에 보면 당시에 폭격을 맞아 부서진 교각이 보여요. 이곳 지금은 제방이 생겼지만 얼마나 죽어있는지 시체가 차곡차곡 포개져 ㅇ있어서 마치 산처럼 보였어요."
"그럼 어르신이 직접 목격을 하신건가요?"
"우리 밭이 여긴데 내가 알지. 그래서 나중에 인민군이 내려와서 동네 사람들이 괭이 삽들고 나가 4군데에 임금님묘처럼 크게 무덤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홍수가 져서 모양이 변했어요."
"혹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을까요?"
"이곳에 제방을 만들면서 도쟈가 들어와 밀기도 하고 큰비가 서너차례 내려서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내가 군에 갔다 오니 흔적이 안보이더라고."
"그럼 북한군이라고 합니까 국군이라고 합니까?"
"난 잘 몰라요. 미군이 엄청나게 핵폭탄(?)을 쏘아서 이곳 일대에 모려와 있던 북한군이 다 죽었다고도 하고 미쳐 강을 도하하지 못한 군인이 함께 죽었다고도 하고."
나는 이곳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제67사단 포병연대장으로 부임('03.5~'05.12)해서 건 2년동안 이곳 일대와 봉화산 일대를 탐사 탐문했다. 더우기 청주 남일면 국사봉일원은 수시로 찾아가 탐문을 했다. 국사봉일원도 이미 '01~'02년도에 발굴을 1차로 했지만(10여구 발굴) 발굴 가능지역을 선정하려 노력했다.
결국 팔결교는 역사속에 묻히고 우린 청주 우암산 일대 용암저수지가 있는 뿌리뜸 일대에 대한 탐사에 나선다
(다)음성-괴산전투
음성전투는 '50. 7. 4일부터 13일까지 구군 제1군단 예하의 제1사단과 육군직할 제6사단의 제7연대(임부택 중령등 )가 북한군 제2군단 에하의 제15사단과 이를 지원하는 제1사단의 진격을 젖하기 위해 무극리, 동락리, 가장동, 음성일대에서 전개한 방어작전이다.
북한군 제15사단은 제1군단에서 제2군단으로 에속이 전환되어 홍천-여주-음성 방면으로 진출을 명받았고 그 우측에 제2사단 그좌측에 제12사단이 병행 공격하고 있었다.
국군은 제1군단의 우일선 부대로써 중서부지역의 음성방면에 대한 방어임무를 부여 받았으며 7월 5일에 창설된 제1군단에 편입 되었다. 사단은(백선엽 대령,작전참모 문형태 중령, 군수참모 이철희 중령등)11(최경록 중령등)-12(김점곤 중령등)-13연대(최영희 대령등, 제5사단 예하 15연대를 흡수 통합)로 음성지역으로 이동중에 있었다. 7월 6일에 북한군이 안성-평택까지 도달함에 따라 재편이 완료도 되기전에 성환에서 열차와 차량, 도보로 이동하여 먼저 증평ㅇ세서 머물러 처ㅚ종 부대정비를 한다. 여기서 제15연대를 통합 한다. 하지만 병력은 6천명 수준이라도 중화기는 겨우 1개연대 수준이었다.
"음성북방 전초전"
반면 제6(김종오 대령)-7연대는 충주로 내려온 사단의 예하 연대로써 7월 4일 20:00에 장호원에서 철수한 사단 헌병대오 강원도 경찰대로부터 북한군 제15사단이 장호원으로 남하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제7연대에게 장호원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연대장은 제2대대(김종수 소령)에게 장호원을 즉각 점령토록 하여 22:00경 충주를 출발하여 음성 북쪽 7km지점의 동락리에 도달했을 때에 전방에서 기계화부대의 기동을 첨병소대로부터 보고받고 처음으로먼저 음성북방에서 전초전을 벌였다.
보고를 받은 연대는 충주에서 음성으로 지휘소를 옮기고 무극리-음성간 도로 경비를 위해 제1대대를 보현산 전방 무극리에, 제3대대를 동락리 전방으로 투입토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제2대대는 작전지역 중앙(부용산일대)에서 양 대대의진출을 엄호하는 성격이 되었고 가엽산에는 춘천 전투 경찰대가 들어와 경계임무와 피난민 통제임무를 수행하였다.
"무극리 전투"
'50. 7. 4일부터 음성 북방, 동락리 북방에서 시작된 이곳 전투는 7. 5일 제1대대(김용배 소령)가 무극리로 향하던중 기름고개 일대에서 북한군과 조우하여 40여명을 사살 하고 7. 6일 14:00에 무극리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1개 연대 규모의 적이 압력을 가해와 다시 기름고개로 해서 마송리로 축차 이동하게 된다.
"동락리 전투"
한편 제3대대는 7. 5일 08:00경 동락리를 지나던중 적 정찰대를 만나 모도원까지 추격중 동락리로 복귀하여 7. 6일 아침에 차량으로 철수를 개시하여 신덕저수지 근처에서 병력을 하차하여 도로변에 전개시켰다.
그러다 보니 동락리나 모도원 사람들은 부대가 충주로 후퇴한 것으로 알았고 좌측에 제2대대는 제1대대의 전투경과를 지켜보며 부용산 일원으로 들어와 지역을 지나는 피난민으로부터 적이 계속 남하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대대장 김종수 소령은 부용산에 올라 동락리를 관찰하던 중에 동락 초등학교에 많은 북한군 병력과 장비가 관측되었다.
"김재옥 여교사와 병기 장교의 사랑"
이야기가 길지만 간략히 요약하면 갬재옥 교사가 학교에 주둔한 북한군의 동태를 정확하게 국군에게 알려주고 기습작전을 감행한 제2대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7. 7일 전장을 확ㅇ니하니 무려 1,000명의 시체가 너저부러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100여명의 포로를 획득하게 되는데 여기에 바로 북한군 제15사단 제48연대 군수참모와 중대장등 간부도 있었다. 장비는 무려 차량 60여대, 총기류 2,000여정, 곡사포 16문등 전재미문의 전과를 올렸다. 이무렵 국군 제1사단이 음성에 전개하여 들어왔다.
국군 제1사단의 음성 전투
제1군단의 우익인 제1사단은 평택부근에서 집결, 병력을 수습하여 7월 6일 차량과 기차, 도보로 음성을 향해 이동한다. 그리고 증평에서 제5사단 제15연대를 제13연대에 통합하고 제6사단장 김종오 장군과 만나 7. 8일날 진지교대를 하되 제7연대를 제1사단이 작전통제 하기로 한다.
사단의 우일선은 제12연대(김점곤 중령)가 용산리 일대에, 좌일선은 제11연대(최경록 대령)이 소여리 일대를 제 13연대(최영희 대령)가 제 전선으로 비산리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며 7월 8일에 진지 편성 후에 7월 9일부터 적 제15사단의 공격을 받게 되고 국군 제6-7연대는 제1사단의 진출을 엄호 후에 백마굴이 있는 보천역 방향으로 내려갔다. 가엽산의 강원전투경찰대는 상주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7월 10일부터 적의 공격이 더욱 집요해지면서 사단은 군단으로부터 미원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는데 당시에 제6사단은 수안보부근에서 수도사단은 미호천 부근에서 적과 대치 중이었다.
제1사단의 괴산 북방 지연전
7월 10일부터 적 제15사단은 제1사단 전면에 공격을 가해왔다. 이미 9일 야간에 철수를 개시하여 10일에는 괴산에 도착하여 음성에서 괴산에 이르는37번도로 망 주요 고지군에 진지편성을 하고 제2전선을 구축했던 제13연대는 11일에 미원으로 철수하여 다음에 내려오는 연대의 엄호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7월 12일에 제11,12연대는 괴산 전방 가장동 일원에서 적과 조우를 하고 13일 새벽에 미원으로 철수를 하게 된다.
"전사(한국전쟁사 3권 503p)에는 음성지구 전투기간 제1사단과 제6-7연대가 북한군 2,943명을 사살하고 350명을 포로로 획득하고 아군 피해는 28명 전사에 194명 전상자가 발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사실을 못믿어가 아니라 이곳에 연대장으로 2년간을 부임하여 그 실체를 알아보려 했지만 사실 너무 과한 기록이 아닌가 싶다.`
소련군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보고서에 의하면 북한군 제15사단은 홍천에서부터 투입되어 이포리 지역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4일 아침에 이천-여주를 점령한다. 오후에는 장호원을 점령하고 7월 6~7일 어간에 국군의 조직적인 저항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몇명의 피해기록은 없지만 음성북쪽과 충주 서쪽에서 2회에 걸쳐 많은 송실을 받았다는 기록과 북한군 제1사단이 7월 9일부터 이곳 음성지구에 투입되고 제15사단이 7월 10일에 음성을 점령했다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특이할만한 기록은 이때부터 북한군은 유엔군의 항공기 공포증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기록이다.
나는 연대장으로 부임한 '03년 5월부터 '5년 12월까지 수요일 오후와 토-일요일의 거의 모든 시간을 이충북과 경북 북부지방의 전투지역 탐사에 정열을 받쳤다. 거의 모든 전투 지역은 직접 올라가고 지역주민과의 만남으로 많은 식견을 넓혔다.
"북한군 2,000여명 사살의 진실-오웅진 신부와의 면담"
어느날 연대장 재임기간에 우리 군인들 인성교육기간에 나는 병력을 음성 꽃동네에 보냈다.
오웅진 신부님과의 만남을 주선한 결과 성사가 이루어져 금왕지역 어딘가 멋진 음식점에 저녁을 먹게 되었다. 신부님이 특별히 나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음성지구에서 많이 발굴을 했나요?"
"아닙니다. 그렇게 많은 북한군이 죽었다는데 북한군도 못봤고 불과 몇구 찾았습니다."
"3번도로와 37번도로 확장 공사에 혹시 무슨 연락도 없었습니까?'
'네 우린 생극의 창도봉 일대와 도신리의 용바위산 일대, 무극리 칠성산일대, 병막산고 숫돌고개, 21번 도로의 장고개 등에 대한 대대적인 탐사를 해보았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럼 동락 전투라고 하는 신니면 일대에 대해서는 알아보았습니까?"
신부님은 많은 전사지식을 갔고 계셨다. 여기에 지역 주민들이 제보한 내용을 알고 계시니 어떻게 보면 나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갔고 계셨다.
하지만 이곳 일대의 발굴은 보현산(482m)밑 동음리에서 1구, 용산리 지역에서 1구를 발굴했을 뿐이고 많은 개인호가 있음에도 적군 유해도 없다,
신부님 말씀이 3번도로 확장시에 동락전승비가 있는 도장골 일대에서 일부 나왔는데 "무연고자로 처리 되어 화장해 버렸다고 한다. 비록 북한군이었지만 싸울 때는 적이고 죽고 난 다음에는 상호간 제네바 협정에 의해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고 그렇게 처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인데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2,000여명의 숫자는 정말 엄청난 것인데 전쟁중 북한군이 북으로 옮겨간 것인지 아니면 지금 그 어디 땅속에 차갑게 묻혀 있는 것이지 알 수 없다.
적어도 3일간 우리가 지역을 통제했고 마을 사람들이 그후에 첩자라는 이유로 많이 희생도 되고했지만 그 시체처리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 문제는 화령장 전투에서 그렇다. 그렇게 많이 죽었다는 북한군을 우린 찾지 못했다.
"한국판 태형의 계곡(1차): 동락리"
국군이 철수했다는 주민의 이야기에 무장비로 학교와 도로변에서 휴식하던 북한군은 우왕좌왕 하면서 탈출을 시도 하지만 바로 충부 방향으로 내려가다 신니 저수지 근처에 진지를 편성한 제3대대(소령 이남호)에 걸려 다시금 100여명의 시체를 남기게 된다.
당시에 얼마나 죽었는지 시체를 치울 수가 없어서 그저 길거리 옆 개울이나 일부는 밭 언저리에 구덩이를 파고 밀어넣었다고 하는데 시간상 치울수도 없었다고 한다. 앞에서 치고 조우로 밀려나면 또 그곳에 기다리던 국군이 있었다. 이러한 것은 인디언의 벌을 주는 방법에 비유되는데 차후에 북으로 진격하여 올라간 유엔군이 군우리전투에서 터어키군이 이런 상황에서 대향 피해를 입게 되고 다시 1.4후퇴하여 원주와 충주 어간 산악 계곡에서 미 제2사단이 쫒아오는 북한군을 일망타진하는 전과를 올린다 이 전투의 결과로 제7연대 병력은 한국전 최초로 전원이 1계급 특진을 하게 된다.
"이 부락에 남기는 북한군의 보복"
하지만 승전으 기쁨도 잠시였다. 계속하여 북한군이 정오무렵부터 다시 밀어붙이자 국군은 동락리 남쪽으로 밀려나고 적은 이날 밤 보복으로 많은 부락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하지만 김재옥 등은 국군은 따라 피난을 떠나버려 화를 면하게 되고 병기장교와 결혼에 이른다
"고재봉 사건의 피해자, 이중령과 김교사"
우리가 잘알고 있는 일선 대대장을 도끼로 이마까라한 사건이 인제에서 먼 옛날에 발생한다. 그 이유는 당시 병기대대 중령의 당번이 부당한 대우로 옥살이를 한 후에 전역을 하여 나와서 그 원한을 갚겠다고 도끼를 들고 부대를 찾았다.
하지만 그 대대장은 보직을 마치고 떠나고 새로 부임한 대대장이 바로 이극주, 동락전투 당시 중위였던 그 사람이고 부인이 김재옥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고재봉은 무고한 대대장 가족을 도끼로 난타하여 절명하게 된다. 세상은 참 무심하다.(?)
"여보, 내가 그때 3대대 정훈업무 담당관 정상사요"
나는 왜 이런 분들을 자주 만나게 되는지 아리송하다. '00년도 영천지구 신령에서 발굴 작전을 하는데 한 참전용사가 찾아왔다. 본인이 이곳 전투 참가자고 동락리전투 참가자라 한다.
"여기는 저 저수지에 많이 들어가 죽었어. 밤에 뭐가 보보야지. 적들은 달겨들고"
"그럼 저수지 물을 빼고 유해를 발굴해야겠네요?"
"그렇지. 할려면 그렇게 해야 제대로 하는 거지"
"어르신,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곳 저수지는 물을 다 빼고 뻘속에 있는 총이나 시신을 모두 수거했어요." 이때 마을 이장이 나서서 답변을 한다.
여기 이야기는 영천편에서 하기로 하고 정용사님 이야기가 동락리로 옮겨왔다.
"거 학교에 가면 여교사가 영웅이 되었어. 우리 용사들은 들러리야?"
"아니 그럴리 있습니까?"
"가 봐요. 완전 잔다르크야?"
"우리가 제2대대보다 먼저 그 놈들의 이동정보를 알았고 기다리는데 제2대대가 무극리 방향에서 부용산쪽으로 오다가 발견하여 양개 대대가 협동으로 공격한거야. 그때 누가 누구를 만나 정보를 얻었다는 것은 만들어졌고 우리가 모도원에 진출하다가 그 놈들의 정찰대를 포로로 잡아 획득한 정보였다고. 그러니 우리가 충주로 철수하지 않고 매복작전한 것이 주효한 것아냐. 적들이 도망갈 곳이 없었으니."
"그런데 어느날 가보니 참전 승전비도 제2대대만 되어 있어. 그래서 우리 3대대 요원들이 웃긴다고 항의 하고 옆에 다시 우리 3대대 승전비도 세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