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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 있어서 반성돼야 하는 몇 가지 문제
信天함석헌
알파요 오메가
나만 사는 것 아니라 옹글게 하나(全體)로 사는 것이, 이제만 아니라 끝없는 자랑으로 사는 것이, 몸으로만 아니라 정신으로 사는 것이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먼저 생각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교육이다.
교육은 인간 살림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러므로 공자가 교육을 말하려 할 때 첫머리에 “물건에는 밑과 끝이 있고 일에는 나중과 처음이 있으니 그 먼저 할 것과 뒤에 할 것을 알면 도(道)에 가깝다” 했다.
밑과 끝이 따로 있고 나중과 처음이 다른 것 아니다. 끝이 밑이 되고 밑이 끝이 되며, 나중 올 것이 첨부터 있고 처음 있는 것이 나중까지 간다.
그렇기 때문에 도는 잠깐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교육은 그 도를 닦는 일이다.
그러므로 석가가 만물의 근본 되는 법(法)을 말할 때에 그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 했고, 예수가 우주의 주인 되는 하느님을 가르칠 때에 아버지라 했다.
생명은 자라는 정신이요 진화의 과정은 자기교육의 과정이다.
오늘 우리는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자리에 있다. 그러나 자라는 생명의 역사에 있어서 불행이 다행히 되고 화가 복이 되어서 우리는 역사를 한 번 새롭게 하는 기회를 만났다.
이때에 가장 먼저 하고 가장 끝까지 놓쳐서 아니되는 것은 교육이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있어서 안타까운 일은 사람들이 지나친 정치적 관심에 쓸려 교육을 등한히 하고 있는 일이다.
집에 불이 나면 모든 일을 그만두고 불끄는데 전력해야 하지만 어머니만은 거기서 제외돼야 하고, 가장 첫째 할 것은 아기를 구해내는 일 아닌가? 집과 세간을 다 태우면서라도 아기는 건져야 한다. 그 집과 재산은 아기를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을 끄려다가 집으로 아기 무덤이 되게 하는 것이 어리석음이라면 정치를 하려다가 학원을 짐승의 우리로 만든다면 그것은 더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다.
이제 우리 교육에 있어서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들을 생각해보기로 하자.
종교와 교육
맨 먼저 생각할 것은 이 교육이 거의 종교를 무시한 교육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인류 전체가 저지른 잘못이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 문명에서 떨어진 자리에 있느니만큼 그 피해를 입음이 남보다 갑절 더하다.
큰 배가 풍랑을 만나면 그 뒤를 따르던 매생이는 더 심한 놀을 겪게 마련이다.
일는 근세 과학 발달에서부터 시작됐다. 과학이 발달 못됐을 때 인간은 스스로의 약하고 무지함을 아느니만큼 겸손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에 비하면 모든 것이 유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과 역사를 어느 정도의 조화와 보람을 느끼는 마음속에 살 수 있었다. 이러한 심정의 분위기가 교육을 하는데 퍽 도움이 됐다.
교육이란 결국 인간이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살아오는 동안에 얻은 지혜와 힘을 전통으로 넘겨받고 거기다 새로운 창작의 한 발걸음을 내 놀 수 있는 가능성을 기르는 것인데 이러한 전통적인 사회 속에서는 그것이 각별한 어려움없이 쉽게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과학이 발달하면서 자연계의 모든 현상 뒤에 숨어 있는 법칙을 남김없이 들추어보았고 거기 대해 자신을 얻은 다음 그것을 인간 자신과 신비로운 정신계에 대하여도 적용해서 비판하고 분석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로 인해 얻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지나친 자신으로 모든 정신적 종교적인 것을 미신이라는 속단으로 한 묶음으로 배척해버리는 경향이 생겼다. 이로 인해서 인간 살림은 점점 물질적인 면으로만 닫기 시작했다.
오늘의 과학은 이미 스스로 그 한계성을 알고 전날에 저지른 잘못이 있는 것을 알기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나왔던 그 물질주의의 내킨 걸음은 쉽게 멈출 수 없다. 더구나 최근에 급속도로 발달하는 기술 때문에 더 어렵다.
간단한 말로 해서 교육은 종교 없이도 할 수 있다. 없이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종교에서 해방이 되어야만 할 수 있다 하는 생각에 사상의 테두리가 잡힌 사람들이 지금의 이 문명을 이끌고 나가니 새로 깨달은 사람의 경고가 거의 미칠 수가 없다.
그러나 공정하게 생각해서 오늘 인류의 위기는 어떤 새로운 종교적 체험없이는 도저히 건질 수 없다.
다만 주의할 것은 이미 굳어져 있는 기성 종교로서는 거의 그 능력이 없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서 종교에서 해방되어야 참 교육은 할 수 있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더구나 오늘 문명은 이미 민족국가의 차별을 넘어 세계적인 성격의 것이라는 점, 따라서 이날껏 자기의 절대성을 주장해오던 모든 종교가 이미 그런 주장을 할 수 없어졌다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그러나 기성 종교를 아무리 부정해도 인간의 종교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물질 세계가 인력(引力)으로 성립이 되듯이 정신세계는 믿음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무신론 반종교론 자체가 벌써 하나의 믿음을 주장 하는 것임을 어떻게 하나?
하여간 교육과 종교는 뗄 수 없다. 양쪽에 다 있는 교(敎)자가 그것을 증거한다. 옛날에 있어서 종교와 교육은 하나였다. 그러므로 발달에 의해서 분화가 된 오늘에 있어서도 종교는 마땅히 교육적이어야 하는 대신 교육은 반드시 종교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러므로 문명이 언제나 위기에 빠졌을 때는 그 구원을 위해 새 종교가 일어났고 위대한 종교의 스승들은 다 예외없이 훌륭한 교육자였다.
한 민족이나 인류 전체를 하나의 나무로 비유한다면 교육은 그 나무를 가꾸고 키워가는 일인데 그 가꾸고 키우는데서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이 무엇일까? 햇빛이다. 해 없이 아무 생명도 없다. 모든 생명은 햇빛에서 나왔다. 우주 인생 역사에 있어서 종교는 햇빛이다. 나무의 어느 부분도 아니지만 그것 없이는 나무도 없다. 태양이 물질계에서 에너지의 근원이듯이 종교는 정신계에 있어서 그 근원이다.
교육에서 맨 먼저 있을 것은 이념인데 이념은 종교 없이 있을 수 없다.
그 다음 교육 활동이 되려면 권위 없이는 될 수 없는데 권위의 근원은 어디인가? 그것도 종교가 종교를 무시한 현대 정치가 시대에 거꾸로 개인숭배를 시켜 가지가지 죄악을 짓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점을 잘 알 수 있다.
그 다음도 교육은 빼빼마른 지식이나 기술의 전달만이 아니라 심정으로 하는 인격의 변화기 때문에 감격 없이는 될 수 없는데, 그 감격의 원천도 어디 있느냐 하면 종교에 있다.
해방 후 우리 교육이 실패한 것은 이러한 참 종교적인 이념, 권위 감격이 없기 때문이다.
정치에서의 해방
그 다음 생각할 것은 교육과 정치와의 관계다. 한마디로 교육은 정치의 간섭을 벗어나지 않고는 그 사명을 할 수 없다. 가장 나쁜 폐단이 교육이 정치의 기구로 쓰여지는 일이다. 위에서 내논 그림을 정치에다 맞추어본다면 그것은 나무의 통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외양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나무는 그 우뚝 버티고 서는 통이 가장 중요한 듯하지만 사실 통이 통 노릇을 하려면 온전히 겸손해야 한다. 그 무거운 전채 나무의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를 한 머리에 떠이고 비바람 눈서리를 다 견디어내며 한 마디 말도 없는 것이 나무통이다. 통이 만일 가지 하나 하나 열매 하나 하나를 다 제 맘대로 하겠다면 전체를 버틸 수 있을까? 어느 것도 가지려 하지 않기 때문에 가질 수 있다. 밑에서 올라가는 양분이 맛이 있으되 그것을 제게 두지 않고 위로 올려만 보내고, 억만 잎, 꽃에서 내려오는 진액이 달고 향기로우되 그것을 하나도 독점하려 하지 않고 뿌리로 내려 보내어 그저 전해주고 통과시키는 것을 제 임무로 알고 있을 때 그 나무통은 살져 저 아름드리가 되고 전체 모든 것을 지지할 수가 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제 몸만을 굵게 한다면 어떻게 잎이 피며 꽃이 피며 열매가 맺히겠나?
정치가 교육에 직접 간섭을 아니할 때만 교육은 바로 된다.
교육이 뭔가? 내일의 나 아닌가. 내일을 위할 때만 오늘은 있을 수 있고 나는 살 수 있다. 나는 나에 있지 않고 내일에 있다. 오늘의 일은 온전히 자유로운 내일을 꿈으로 내 속에 자라게 하는 일이다.
위에서 권위라는 말을 했지만 권위는 하늘에서 오는 것이지 어느 사람이나 조직에서 오는 것 아니다. 선생도 부족한 인간이요 정치하는 자도 부족한 인간이다. 인간은 스스로 부족한 인간임을 알 때만 인간적일 수 있다. 그것을 잊고는 자기를 절대자의 자리에 앉히는 한 폭군으로 돼버린다. 많은 진보적인 혁명가들이 독재적 폭군으로 전락해버린 것은 이런 잘못에서 나온 것이다.
교육은 어린 새싹이기 때문에 제대로, 온전히 제대로 자라게 두고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 교사가 불완전한 인간이지만 신성한 교권을 그에게 맡길 때 그의 속에 있는 양심은 스스로 깨고 불완전한 욕심은 스스로 자중하여 가라앉는다. 반대로 간섭해서 믿어주지 않으면 개인적인 감정이 반발하여 빗나가기 쉽고 그러면 올바른 교육을 하지 못하고 치우친 편견을 피교육자에게 주기 쉽다. 학원은 신성하다는 말은 이래서 있는 것이다.
아무리 욕심 많은 사내라도 제 어린 자식을 보호하고 가장 좋은 것으로 주지 않던가? 국민이 어떤 고난을 겪으면서라도 교육만은 평화 속에서 하도록 해야 한다. 의붓자식의 성격이 비뚤어지고 대개 정상적인 직업조차 못가지고 마는 것을 우리는 잘 알지 않는가? 자 교육은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더구나 우리 역사를 생각할 때 이 민족은 의붓자식 같은 대접 속에 수백 년을 내려왔기 때문에 생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정상적인 발달을 못하고 이지러지고 비꼬인 데가 많다. 이것을 바로잡지 않고는 어떤 문화적 노력도 소용없다. 무엇보다 민족의 교육이 급선무다. 이 점에 각별 주의하고 정력을 기울였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반대였다. 본래 비뚤어진 것을 해방 후의 정치적 싸움으로 더 비뚤어지고 더 비겁하게 만들었다.
이 점에 관해서만은 우리가 제 지위나 이권이나 제 주장을 초월해 냉정히 다 함께 반성하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나쁜 버릇은 들기는 쉽고 빼기는 어렵다. 개인도 그렇지만 민족 전체에서는 더욱 힘든다.
우리는 이미 역사적 병신이 되고 죄인이 됐지만 너희만은 이렇게 되지 말아라 하는 비장한 성의가 발동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바른 교육을 하여 밝은 내일을 가지려면 현재의 이 지나친 정치적 신경과민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할 때 충심으로 민족과 나라와 인류를 걱정하는 어느 마음이 감히 반대하겠나? 나는 우리가 조금만 진실히 생각한다면 이 점에서 일치되는 일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다.
만일 옅은 이해관계, 지금 사회에 들어찬 맑지 못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서 세력싸움에 거의 모든 시간 정력을 다 소비하는 현재의 이꼴대로 서 간다면 우리 어린이의 미래는 암담하다 할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눈앞에 급한 생각만을 하고 백년대계를 그르치지 말라.
이렇기 때문에 우리 교육하는 눈이 좀더 멀리를 보고 좀더 우리 자신 속을 깊이 보고, 막연하게 지식 기술 배운다 하지만 말고 분명히 자아의 개조, 민족의 개조, 문명의 구원을 목표로 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그 믿는 바를 말해왔으나 들려지지 않을 뿐 아니라 이제 자유로운 비판의 길까지 거의 막혀버렸다. 이러고서 어떻게 새 역사를 짓겠단 말인가? 민족중흥을 하겠단 말인가?
역사는 용감하지 않고는 이루어갈 수 없다. 교육을 자유로 내맡길 때 불안이 있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불안을 눈앞에 보며 용감하게 조심스럽게 나가는데 역사가 있고 교육이 있다.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병이 생각이 넓고 크지 못한 데 있다. 비겁도 이래서 있고 싸움도 이래서 많고 부패도 이래서 있다.
높은 산에 올라가 웅대한 경치를 보는 사람이 어떻게 묵은 사감(私感)에 잡혀있겠나. 무한한 정신계에 활발발(活撥撥) 달음질을 할 수 있는데 어떻게 불쌍한 빈민을 울리며 부정 사업을 할 생각이 나겠나? 제발 가슴통을 좀 크고 깊게 길러보자.
그러려면 교육은 자유 속에서 주고받아야 한다.
무심한 나뭇가지도 벽에 가 닿으면 그리로는 새 순을 내지 않는데 어떻게 역사 창조를 할 사람의 자식을 갇히고 막힌 분위기 속에서, 누가 들으면 어쩌나, 누가 보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면서 할 수 있겠나?
답답해라, 청천백일 같은 이 진리를 모른단 말이냐!
정치야 어쩌거나 교육하는 너는 스스로 그 하는 일이 신성한 줄 알아야 하지 않겠나?
정치가는 오늘을 가지지만 너는 내일과 모레를, 영원한 미래를 가지지 않나?
정치는 그 밖을 차지하지만 너는 그 속의 스승이요 임금 아닌가? 그 어느 것이 참으로 높은가? 높은 것이 어찌 낮은 것에 엎드리겠나?
신성(神聖)이 왜 신성인가? 사람이 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만이 명할 수 있기 때문 아닌가? 누가 하라 해서 하고 말라 해서 말 것 아니라 내 양심에 내리는 명령에 의해서 할 것이기 때문 아닌가?
도지소존(道之所存)이 사지소존(師之所存)이라고, 옛 사람이 말하지 않았나?
자라나는 세대의 인격의 권위와 명예를 위해 죽음으로 네 교권(敎權)의 불가침권(不可侵權)을 지켜라!
산업과 교육
뿌리 없는 나무 없듯이 산업 없는 교육 없다.
교육이 옳게 되려면 밥 먹고 옷 입기를 바로 해야 된다.
오늘 우리 교육이 잘못되는 것은 우리 산업이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반대도 성립된다.
해방 후 교육자, 넓게는 일반 지식인의 질이 타락된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이다. 일제시대 에는 압박 밑에 있으면서도 다른 민족의 압박이라는 그 사실 때문에 자동적으로 어느 정도 사회의 부패가 방지되었다. 도덕이니 정신이니 하는 것은 다른 것 아니고 쉽게 말해서 남 생각을 하는 것인데 남이란 곧 눈에 뵈는 그 사람이 아니라 뵈지 않는 전체의 구체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동족적으로 운명을 같이한다는 생각이 있을 때 사회의 기풍은 어느 정도 건전을 유지해갈 수 있었다. 전체의 분위기가 그러했으므로 제한된 자유 안에 있어서도 교사에 의한 교육도, 일반 지식인에 의한 사회교육도 비교적 효과를 내면서 돼갈 수 있었다.
그런데 해방 후는 그 대적이 없어졌다는 데서 오는 잘못된 풀어진 마음과 절박한 생활문제로 인해 일어나는 경쟁심, 이기심, 거기다가 노골적인 권력주의의 정치 바람이 곁들어 사람들의 직업 심리가 극도로 타락하게 됐다.
이런 때에 옳게 한다면 사회를 나쁜 풍조에서 건져내는 것이 종교와 교육에 달린 것인데, 그 밖에는 믿을 데가 없는데, 그 종교 교육조차 그 전염병에 휘말려 들어가고 말았다.
물론 교사도 사람이요 목사 스님도 사람이니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지만 그러나 일의 계제로 보면 교육자가 사회 구원의 비장한 결심으로 일선에 섰어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완전히는 어렵더라도 어느 정도 구원이 되어 오늘 같은 이런 꼴은 되지 않았을 것인데 그렇게 못됐으니 유감이다.
직업(職業)이라는 직(職)자가 본래 밥벌이는 밥벌이로만 알아서는 아니 된다는 뜻을 말해주고 있다. 직(織)은 곧 천직(天職), 그래서 천생만민(天生萬民)에 필수지기직(必授之其職)이라, 하늘이 사람을 냄에 반드시 그 맡을 일을 준다고 했다. 봉건제도는 오늘은 있을 수도 없고 있으면 죄악이지만 그때에 그것으로 사회 질서를 유지해간 것은 이 하늘이 주었다는 사상 때문이었다. 거기는 전체가 움직이고 있다. 나만 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살기 위해 내게 맡긴 일을 한다는 것이 그 직업도덕과 지초돌이었다.
오늘은 물론 자유 직업시대지 봉건적으로 계급적으로 제한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는 개인도 사회도 발달할 수 없다. 그러나 제도가 어찌됐거나 간에 전체 대 개인의 관계는 변함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직업 선택 방법은 자유로 하더라도 그 직업의 의미는 전체에 의해서 주어져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그 발전 단계에 있을 때는 이 정신이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 발달이 오늘같이 절정에 이르러 모순을 드러내게 될 때 노골적인 경쟁이 일어나게 됐고 이것이 모든 사회 문제의 근원이 됐다.
교육은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니만큼 사회가 이런 단계에 왔을 때 교육자는 피교육자들 다음에 오는 새 환경에 적응할 수 있으리만큼 준비를 시켜주는데 힘을 썼어야 할 것인데 그 무너져가는 낡은 제도의 폐해 속에 자기도 빠져 버렸으니 그런 담에 교육이 성공이 될 리가 없다.
그 천직 사상을 우리가 그리는 나무 그림에서 보면 어떻게 되나.
모든 뿌리는 땅 속에 뵈지 않게 있다. 위에서 정치가 겸손해야 된다고 했지만 경제도 마찬가지다. 농(農)은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라 했지만 천하의 대본일 때 어떻게 해서 대본 노릇을 했던가? 뵈지 않게 땅 속에서 자기 할 일을 다함으로써였다. 뿌리가 만일 드러나 뵈기를 원한다면 그 순간에 말라버린다.
그런데 지금 문명을 산업문명이라 나라를 산업국가라 하는 때의 산업주의는 뭔가? 모든 것을 왼통 차지하겠다는 사상이다. 그리고 그것이 같은 양심을 가지는 정치와 결탁하여 기업 국가가 될 때 그 폐해는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런데 거기 항거하고 자기의 성역을 지켜서만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교육이 그렇지 못하고 그 종으로 떨어졌으니 거기 밝은 내일이 어떻게 있겠는가?
사회풍기 문제
그러나 해방 후 교육을 망가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예술, 오락도 거기 곁들였다.
어떤 신학교 학생들은 극장을 교회라 하고 영화구경 가는 것을 예배라고 하지만 사실 현대의 종교는 극장에 있고 신문사에 있다. 신자 불신자를 말할 것 없이 그 시대 사람인 담엔 의식리(意識裏)에 무의식리(無意識裏)에 그것을 마시지 않을 수 없는 일반적 공통적 기풍을 주는 것이 종교다. 불교가 종교였을 때는 그 인생관, 세계관, 풍속 사회분위기가 모두 불교적이었고 기독교가 종교일 때는 그 모든 것이 기독교적으로 됐다. 그래서 풍교(風敎)라 한다. 바람이다. 초상지풍(草尙之風)이면 필언(必偃)이다. 세상을 바람처럼 지배하는 것이 종교다. 그런데 오늘 기독교 불교가 과연 그만한 교화력을 가지고 있나. 일부의 신도를 내놓고는 전체 민중은 그런 종교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리고 무엇에 지배를 받느냐 하면 영화관에서 보고 신문소설에서 본 것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런 점으로 하면 해방 후 예술인이라는 사람들의 죄는 크다. 세상을 타락시킨 죄의 적어도 절반은 그들이 져야 할 것이다.
이론으로 한다면 해방이니 남북 분열이니 6·25전쟁이니 하는 큰 역사적 사건을 치렀으면 세계에 어디 내놔도 사람을 감동시키지 않고는 마지않을 만한 위대한 예술을 낼만하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예술 평론가가 아닌 나로서는 말할 자격도 없다 하겠지만 예술 평론에까지 갈 것 없이 하나의 보통 민중으로 느끼는 것을 말할 수야 있지 않은가?
생활의 표현이라면 말이 될 듯도 하지만 문제는 그 깊이에 있다. 밤 낮 한다는 소리가 궁정(宮庭) 양반, 가족주의의 썩어진 면 그것뿐이니, 그것이 사실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것밖에 말할 것이 없던가? 이 민중은 제가 싸놓은 똥만 되집어 먹고 또 싸서 또 먹고 해야 하는 것일까? 그 뒤에 크게 외치고 싶어하는 역사의 음성 혼의 부르짖음은 없을까?
요새 퇴폐풍조란 말이 많지만 예술인은 거기 대한 책임을 많이 져야 할 것이다. 6·25라는 큰 갑작스런 사건으로 외국 군대가 많이 왔고, 거기 따라 이때까지 오던 전통이 하룻밤에 무너졌는데 거기 부채질을 한 것이 대중이라는 미명하에 감히 내놓고 한 저속한 오락이었다. 앓는 아이도 장난을 하는 시간이 있어야지, 전쟁을 하면서도 오락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식이 있다면 거기서도 생각해서 할 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다.
그랬으니 그 가운데서 어떻게 교육이 효과를 낼 수 있었을까? 일일폭지(一日曝之)요 십일한지(十日曝之)라고 곡식 종자가 아무리 좋아도 해는 하루나고 춥기는 열흘씩하면 자랄 수가 없지 않은가. 학교에는 비록 가지만 돌아만 오면 어머니와 딸, 시아비와 며느리가 한 자리에 앉아 밤낮 보고 듣는 것이 물고 찢고 쓸고 썩어 문드러지는 아야기인데 어떻게 인격이고 정신이고 자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기를 20여년 30년 가까이 하고 있으니 어찌됐겠나? 잊자 마라, 과학이니 기술이니 하는 것은 나날이 발달하지만, 인간성은 거의 변함이 없다. 세살 버릇이 여든 간다. 어려서 듣고 보면 알고 했거나 모르고 했거나 정해(正解)거나 오해거나 간 그것이 인격이 돼버린다. 그것이 ‘나’인 것을 어떻게 하나. 나는 나다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틀이 박혀진 군국주의자, 퇴폐주의 예술에서 조각이 된 망나니인 경우가 많다.
이것을 바로 잡고 그 밑에 있어서도 물들지 않은 자아의 본체(本體)를 찾아 그것을 키워내는 것이 교육이지만 이 확성기가 시끄럽게 굴고 카바레가 미쳐 돌아가는 복판에서 어떻게 한단 말인가?
옛날에 정치에서 음악을 중요시한 것은 이 때문이다. 순(舜)은거문고 하나로 나라를 다스렸다 하고 오르퓨즈는 짐승들까지 감화시켰다 하지 않던가?
요새는 또 사회 폐풍을 고친다고 결혼식 청첩에 벌금을 매기고 마니스커트를 치수로 결정해서 경찰 힘으로 취체한다지만 모르는 소리다.
그렇게 할 열성을 십 년 전에 좀 냈더라면 세상이 좀 달라졌지 그때에 경고해 준 사람 없지 않았는데, 또 설혹 그 목적은 늦었으나마 좋다 하더라도 그 방법은 어리석다. 손톱눈에 박힌 가시를 뽑는데 청룡도로 하면 되겠나, 손이 잘라질 뿐이다. 손 잘라지는 것을 사양하지 아니한다 하는가? 그것은 의사는 아니다. 도둑이지!
원리 원칙 모르는가? 가짜 화폐는 진짜 화폐로만 몰아낼 수 있고 나쁜 예술은 좋은 예술로만, 미신은 참 종교로만 몰아낼 수 있다. 그밖에 것으로는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청룡도로 손가락을 자르듯이 생명을 죽여 버리고 만다.
마음은 마음으로만 고쳐진다. 칼로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면 공자가 왜 초초한 행장으로 죽을번 살번 천하를 돌았겠나? 예수가 왜 십자가에, 소크라테스가 왜 독약에 죽였겠나? 너보다 못해서가 아니니라.
잘라버릴 줄 몰라서가 아니라 생명을 아껴서다. 옴장이는 집어내버리면 된다지만 그것은 남이 하는 소리지 제 아비 어미가 하는 말은 아니다. 악한 행실이 미워 그놈을 한칼로 죽일 때 일이 다 된 듯 시원한 것 같지만, 그날 밤 잠자리에서 너는 네 가슴 속에 모가지 없는 한 귀신이 우는 것을 들을 것이다.
어버이 마음 없이 교육 못하고 교육하는 스승의 마음 없이 정치 못한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아니하던가?
이론과 교육
마지막으로 하나 더 생각해 보자. 언론과 교육의 관계다.
나무가 자라는데 햇빛도 있어야하고, 양분 빨아올리는 뿌리도 있어야 하고, 전체를 버티는 나무통도 있어야 하고. 동화작용을 하는 잎, 열매 맺는 꽃도 있어야 하지만, 또 하나 없어 아니되는 것은 바람이다. 예술은 잎, 꽃이라면 언론은 바람이다. 아마 그 중요한 것이 해 다음은 갈 것이다.
숨을, 쉬어야 생명이다. 바람은 천지의 숨이다. 육체적으로 맑은 바람을 마셔야 살 수 있듯이 정신적으로는 건전한 언론이 있어야 사회가 살아갈 수 있다.
지금은 더구나 세계적인 시대요 우주적인 문명이다. 활발한 언론이 있어야 교육이 돼 갈 수 있다.
바람이 잘 통치 않으면 썩히는 곰팡이나 독균만이 성하기 쉽다. 사상의 교통, 정신의 오고감이 없으면 사람의 마음이 썩어버린다. 썩어진 선비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문견이 좁은 데서 오는 잘못이다. 그것을 고루(固陋)라고 한다.
사람은 행동이 귀하지만 사상이 넓고 깊고 활달하지 못하면 그 행동이 도리어 자기를 망치고 남을 해하는 잘못이 돼버린다.
신문 잡지는 오늘 사회에 있어서는 지극히 큰 의미를 가진다. 신선한 바람이 없으면 먹은 것이 도리어 병이 되고 입은 것이 도리어 해가 돼버리듯이 신문 잡지 라디오를 통해서 시시각각으로 오고 가는 사상의 순환이 없으면 얻은 지식과 닦은 훈련이 도리어 해가 돼버린다. 공산사회 보면 알지 않나? 모든 폐쇄주의는 배격돼야 한다. 깊은 골짜기에서 사람을 만남 없이 아이를 키우면 그것이 사람질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바위나 숲으로 된 것만이 골짜기 아니다. 제도나 규칙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사람아닌 짐승 같은 것들만 만나게 하고 참이 아닌 거짓된 지식만 받으면 도시 복판에서도 골짜기 살림이다. 지금은 기술이 발달이 됐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면 백주에 대도시 복판에도 지옥을 유지해갈 수 있다.
사람은 바람 속에서 돼 나온 것이다.
신체는 공기의 유동으로 되는 바람 속에서, 정신은 영의 오르내리는 바람 속에서 되어 나왔다.
씨알 교육
이러한 것이 오늘 우리가 당한 문제다. 이런 조건 속에서 우리는 나를 건지고 나라를 건지고 세계를 건지는 교육을 더듬어보아야 한다.
이것은 어느 천재나 어느 힘있는 단체가 만들어 줄 것이 아니요, 우리 왼통이 직접 하는 가운데서 얻어져야 한다.
그런 교육을 무엇이라 이름 할까? 나더러 이름을 지으라면 ‘씨교육’이라고 하고 싶다.
그것은 두고 연구하고 닦아나갈 것이지만 다만 이것만을 지적해 두고 싶다. 이러한 개인적으로 민족적으로 또 인류적으로 모든 낡은 껍질과 찌꺼기를 청산해 버리고 새 우주적인 시대를 여는 교육은 씨에 돌아가는 태도로만 될 수 있다. 그밖에 길이 없다. 그것을 회개라고 할까? 씨은 과거의 총결산인 동시에 또 거기서의 비약이다. 그 비약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 자체가 하는 것이다.
씨알의소리 1973년 2월 19호
저작집30; 3-281
전집20; 5-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