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茶云 정진권 선생님
김진모
한국 수필계에서 매원 박연구, 덕계 허세욱, 다운 정진권 미꾸라지 3인방 중 이제 당신 혼자만 남았다고 하시며 먼저 가신 동료들을 그리워하시던 다운 선생이 그분들 뒤를 따라 떠나신 지도 어느덧 삼 년이 다가옵니다.
먼 길 떠나시던 그해 5월 9일 강의는 명강의로 두고두고 회자될 것입니다.
다운 선생께서 문교부 편수관 시절에 금아 선생 명수필들을 국정교과서에 싣게 되는 사연도 흥미롭거니와 금아(琴兒)가 편수관실을 찾으셔서 사제 간에 나눈 사연도 아름다웠습니다. 이런저런 사연들을 들려주시던 그때 그 강의가 이승에서 마지막이었다는 게 믿기 싫은 사실입니다.
그해 2월 중순 어느 날 선생은 저를 댁으로 부르셨습니다. 서재를 정리하고 싶다며 당장 필요한 책만 곁에 두고 모두 옮겨갔으면 좋겠다고. 그리하여 몇 번에 걸쳐 귀한 서적들을 우리 도서관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책을 옮기고 나니 서재가 허전해 작은 책장을 만들어 고서적 공간으로 꾸며드렸습니다. 선생은 매우 기뻐하시며 쇠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저는 사모님 모시고 셋이 짜장면 먹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러는 게 아니라고 쇠고기로 대접하겠다고 하셨지만, 저는 끝내 내외분과 함께 짜장면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진지 드실 때였습니다. 5월에 ‘금아 피천득 문학 이야기’가 흥사단에서 있을 예정인데 한 시간 정도 강의를 하실 수 있으시냐고, 정정호 교수님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늙은이가 무엇을 하겠느냐고 하시며 젊은 사람이 하는 게 좋겠다고 사양하셨습니다. 제 고집도 보통이 아니어서 거듭 청원하여 승낙을 받았습니다.
선생은 최고 명문이라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다니셨지만, 저는 더 센 ‘들이대학’을 다녔다고, 제가 억지 부릴 때 아버지처럼 미소를 지으셨지요. 저는 선생님을 대할 땐 유년 시절에 사별한 선친 생각이 난다고 할 때도 잔잔한 미소를 지으신 선생님. 저는 사정없이 들이대면 안 되는 일이 별로 없었다고, ‘들이대학이 최고’라고 했습니다.
강사료 문제로 계좌번호를 여쭈니 스승에 대해 강의를 하면서 어떻게 수고비를 받겠느냐고 하시면서 그날 행사 때 다과비로 충당하라고 거절하신 선생님. 통장으로 보내는 규정을 어기면 어느 별장(?)으로 가게된다고 말씀드리며 선생님의 청빈을 또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럼, 강의 끝나고 짜장면 먹으러 가세.”
저는 선생님의 명수필 ‘짜장면’에 나오는 그런 식당에서 짜장면 먹을 생각이었습니다.
선생님 강의가 있던 날엔 흥사단 3층 대강당이 좁았습니다. 방청객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보조 의자를 비치하고도 서 있는 분들이 있었으니까요. 학술위원장인 정정호 교수께서 사회를 보셨습니다. 특별한 사회였습니다. 기념사업회 세미나 땐 늘 유자효(본 기념사업회 고문) 시인께서 사회를 맡아 주셨는데 그날은 정정호 교수께서 자원하셨습니다. 제물포 고교 시절 국어를 가르치신 은사이셨기에 제자가 나선 것입니다. 스승 강의에 제자가 사회를 보게 되어 두 분이 50여 년 만에 만났으니 두 분은 행복한 분입니다. 세미나에 참석한 많은 회원은 이런 사연을 소개할 때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다운 선생은 충청도 두메산골에서 상경하여 서울대 사범대학에 다닐 때 자칭 시골뜨기가 그 유명한 금아 선생께 배우던 시절의 감동을 회상하시고 또 문교부 편수관 시절에 금아(琴兒)의 명수필들을 교과서에 싣게 되는 과정을 설명할 때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훌륭한 스승에게는 훌륭한 제자가 있기 마련이구나.’를 수없이 생각했습니다.
‘금아 문학이야기’ 세미나를 성황리에 마친 며칠 뒤 책상 앞에 앉아서 그날 일을 정리하며 미흡했던 부분은 가을 세미나 ‘금아 다시읽기’ 프로그램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기에 짜장면 사 주시겠다는 생각을 하며 반갑게 받았는데 사모님 음성이었습니다.
“우보님, 선생님 대학병원 응급실에 계세요.”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한걸음에 응급실로 달려갔습니다.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못 하시고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고 있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은 초원으로 가셨습니다. 짜장면 사주시겠다는 약속도 저버리고 마지막 한마디 말씀도 남기지 않으시고 가셨습니다. 저는 장례식장에서 사흘간 머물면서 문상객을 맞이하며 다정다감하시던 선생님과 마지막을 함께했습니다. 그렇게 맛있다는 짜장면은 이제 누가 사 주실까요?
이승에서 마지막 강의가 되어버린 세미나 때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둔 것이 있었습니다. 보통 강사들은 본인 세미나가 끝나면 떠나시는데, 다운 선생은 다른 분 강의 때도 경청하시며 열심히 메모도 하셨습니다. 나는 그런 모습이 존경스럽고 아름다워서 스냅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그런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마지막 강의 모습"과 자료 사진을 유가족에게 보내드렸습니다. 며칠 뒤 변호사인 장남이 저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다운 선생을 찾아뵐 때는 꼭 수필가 담원 선생을 대동하게 하시기에 한때는 저보다 담원을 더 생각하시는 줄 알고 섭섭할 때가 있었습니다. 과맥전대취인 저 대신, 문학에 대한 담소와 함께 대작할 수 있는 대상자가 필요했던 것이란 걸 나중에 알았습니다.
'교수님' 보다 '선생님'으로 부르는 것을 더 좋아하셨던 진정한 스승이자 선생님!
지금도 다운 선생이 그리울 땐 담원을 만나서 명수필 ‘짜장면’에 나오는 곳과 비슷한 장소를 찾아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 김진모/ 금아피천득선생 기념사업회 사무총장
( 다운 정진권, 담원 서 숙, 우보 김진모)
♤ 달걀 한 꾸러미
나는 서울사범대를 졸업하고 곧 충남 논산농업고등학교에 부임했는데, 이것은 부임해서 몇 년 안됐을 때 일이다. 하루는 퇴근을 했더니 하숙방 한쪽에 달걀 한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이거 웬 거예요?"
내가 묻자 주인 아주머니가 말했다.
" 선생님 출근하시고 한참 돼서 어떤 학생이 자전거에 매달고 왔어요. 누구냐니까 말을 안해요. 그냥 선생님 드리라고만 하고 갔어요. 아마 자전거 통학생인가 봐요."
나는 이튿날 그 아이를 찾아보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자전거 통학생이 한둘도 아니려니와 내가 찾는다고 '나요'하며 나타날 아이도 아니었을 것이다. 우연히라도 알게 되었으면 싶었지만, 결국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푸라기로 엮은 그 달걀 한 꾸러미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2003]
정진권 < 한 수필가의 짧은 이야기> 중에서
첫댓글 "그러나 지푸라기로 엮은 그 달걀 한 꾸러미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