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춰지는 퍼즐 조각 / 백현
오늘은 수많은 어제의 결과임을 안다. 나이가 들어서 실감하게 되는 삶의 비밀 중의 하나이다. 삶의 조각이 허튼 것이 없었다. 아, 오늘 이 순간을 위해서 그때 그 일이 필요했던 것인가? 그 일이 이런 인연으로 연결된다고? 오랜 시간을 건너서 짜 맞춘 듯이 들어맞는 일을 경험한 적은 없는지? 내가 ‘운명론자’라고 해도 할 수 없겠다. 내 삶은 그랬으니까.
올해 완성한 퍼즐 하나가 있다. 여름에 교감 자격연수를 받은 것이다. 다들 믿기 어려워하는 일이다. 승진과는 관계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1급 정교사 자격연수 첫날에 결석했다. 이 사연을 얘기하자면 길지만 어쨌든 그래서 점수가 나쁘다. 승진 요건이 무엇인지 모르는 교사들도, 이 점수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다 안다. 그래서 그 뒤로 승진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안타깝거나 아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현실이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사는 일이 행복했다. 불만이 있었다면 전문직 진출이라도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는 교사로 정년퇴직까지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할 수 있는 한 오래오래 하고 싶었다. 흰 머리는 성성하나 열정이 사그라지지 않은, 사람은 늙었으나 수업은 낡지 않은, 세대는 다르나 소통에 막힘없는 교사의 모습을 꿈꿨다. 그래서 일찌감치 교육대학원도 다녔으며, 국어과 교사들로 구성된 연구회 활동을 이십여 년간 해 왔다.
연구학교 점수가 뭔지도 모를 때였다. 누군가 인성 관련 글짓기 대회 심사를 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인성 관련 편지 쓰기도 도와 달라고 했다. 그러겠다고 했다. 그게 연구학교의 시작이었다. 연구학교를 신청하는 서류에 사인해 달라고 하면 해 주었고 도와달라는 대로 해줬다. 진심이 담긴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나중에는 연구학교 점수가 부족하다는 교무부장을 위해 연구학교 유치에 나서기도 했다. 그들을 위해 좋은 마음으로 함께 했던 연구학교가 나의 퍼즐 한 조각이 되어주었다.
나이 사십이 될 무렵부터 부장을 맡았다. 교장 선생님이 공문 펑크만 안 내면 된다고, 잘하라고는 안 할 테니 하기만 하라고 사정을 하셔서 어쩔 수 없이 학생부장을 맡은 것이다. 한 번 학생부장을 시작하니 학교를 옮겨서도 계속 학생부장을 하게 되었다. 그 뒤로 방과후부장과 교육협력부장 등 잡스러운 부장을 거쳐 교무부장까지 하게 되었다. 승진할 것도 아니면서 힘든 그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있냐던 교사도 있었다.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나도 굳이 하지 않았을 것 같다. 학교는 정상적으로 운영해야 하니까, 나라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
오십이 넘을 무렵 내게는 꿈이 있었다. 대학 3학년인 아이가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그해에 맞춰 교육연구년을 하고 싶었다. 교육연구년은 말 그대로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유급 휴가였다. 미리 준비하려고 전년도 교육연구년 대상자 선정 공문을 보니 정량점수표에 현직연구원 점수도 있었고, 등급 표창 점수도 있었다. 점수를 높이기 위해 그해 현직연구원을 시작했고, 교육자료 개발 연구대회 우수교원 표창 2등급을 받았다. 흐뭇한 마음으로 계획대로 일이 척척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해에 정량점수표가 완전히 달라졌다. 현직연구원 점수는 없어졌고, 등급 표창 점수도 없어졌다. 그 다음해에는 현직연구원을 완전히 바꾸겠다고 입법 예고를 했다. 앞으로는 정년 8년 전에 신청해야 한단다. 아이는 휴학을 해서 졸업은 더 늦어졌는데, 정년 8년 전이라니. 그 꿈은 물 건너갔다.
2019년 2월, 기다리던 발령이 안 나서 낙심하고 있을 무렵, 지인이 전화했다. 이십여 년간 연구회 활동을 같이한 전문직 출신 교감인데, 도에서 인사작업을 하면서 내 나이스 서류를 봤단다. 승진을 왜 안 하냐고. 승진되겠더라고. 자기가 그동안 왜 몰랐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1급 정교사 자격연수 점수 얘기를 했더니, 몇 년 전부터 그 점수 낮은 것은 부장 점수로 채울 수 있다고 했다. 얼핏 보니까 부장도 많이 했더라고. 요 몇 년 전부터 승진점수가 많이 낮아져서 오랫동안 촘촘히 준비를 안 해온 사람도 가능하다면서 내 인사기록을 보내보라고 했다. 자기가 본격적으로 보고 컨설팅을 하겠다고.
나는 승진할 사람이 아니라고 밝혔는데도, 학교폭력유공교원, 교육력유공교원 점수를 챙기시던 부장님. 열심히 한 사람이 받아야 하는 유공교원 점수라고, 혹시나 언제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정색하셨다. 고맙고 미안해서 서류를 써서 냈는데, 그분들 덕이다. 순천에서 광주로 갑자기 이사하는 바람에 통근이 쉬운 관내 학교로 옮길 때, 앞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도서점 수가 있는 순천승남중학교로 가야 한다고 하셨던 교감 선생님도 생각난다. 난 그때 고속도로 톨게이트 가까운 승주중학교를 기어이 1순위로 썼는데, 거기가 자리가 안 비는 바람에 결국 순천승남중학교로 가게 되었다.
지인의 컨설팅을 받아 승진을 본격적으로 준비한 것은 작년 일 년이었다. 도서벽지의 점수가 더 필요했다. 지인은 먼 섬에 가서 일 년 근무하는 것으로 점수를 채우라고 했지만, 나는 가까운 섬에서 이 년을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하고 있었던 가까운 섬의 자리가 비지 않아서 갈등 없이 먼 섬으로 가게 되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섬에서 생활은 좋았다. 전남의 교사라면 섬에서 근무는 꼭 해봐야 한다던 선배 교사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섬에 사는 아이들의 일상과 외로움을 알게 된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사교육을 받을 수 없어서 교사들이 밤 8시까지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해서 고민이 많았다. 내가 운영했던 프로그램 내용을 정리하여 방과후학교 운영 우수사례 연구대회에서 2등급을 받기도 했다.
승진하려고 십여 년을 준비한다는데, 그에 비하면 나는 아주 짧았다. 오십 대 초반 교사의 수가 적어 승진 경쟁이 약해져서 점수가 내려간 것. 그리고 교직 초반에 받은 1급 정교사 자격연수 점수로 승진이 좌절되는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라고 꾸준히 요구한 선배 교사들의 노력으로 바뀐 규정. 이렇게 운이 좋았던 것과 더불어 내가 살아온 날들이 버려지는 순간이 없이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는 퍼즐처럼 잘 맞아떨어진 결과이다. 이 글을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할지 머리를 쥐어짜고, 왜 글은 쓰다 보면 꼭 산으로 가는지 한숨 쉬는 이 시간도 언젠가는 퍼즐 한 조각이 되어 새로운 큰 그림을 완성할 것을 믿는다.
첫댓글 선생님의 열정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열심히 산 댓가가 큰그림을 완성했군요. 축하드립니다.
선생님만큼 열심히 살지는 못한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공감하다보니 잘 아는 분같은 느낌이 듭니다.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그 유명한 교무부장이셨군요. 덜덜.. 흐흐
올리신 글을 읽으며 패기넘치는 선생님의 삶을 응원합니다.
@백현 저는 나이가 깡패 흐흐
선생님, 글 읽는 내내 즐거웠어요. 열심히 산 보람이 있어서요. 알 수 없는 인연, 징검돌 하나가 모두 오늘을 위해 쓰인 거군요. 머리써서, 점수 찾아서 이 학교 저 학교 옮겨 다니는 철새보다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던 선생님 같은 분이 승진하시는 게 당연하지요. 순리대로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새벽 한 시가 넘어서 힘들게 글쓰기하는 이 시간도 언젠가는 퍼즐 한 조각이 되어 새로운 큰 그림을 완성할 거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위안이 됩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즐거운 고통이 바로 이 글쓰기 수업이잖아요. 언젠가 만나면 우리 반갑게 꼭 인사해요. 꼭이요.
아참, 저는 외서초에서 3년을 근무했답니다. 순박한 그 아이들이 이쁘고 사랑스러워서 원래 일 년만 살려고 간 건데 3년을 살았지요. 그 동네 있는 승남중학교 근무하셨다 하여 반가웠네요.
언젠가 꼭 뵙겠습니다. 좋은 만남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외서초등학교. 잘 알지요. 제각 낙안중학교에서도 5년 근무해서 그 길들을 잘 안답니다.
감동적인 글입니다. 주변에서 선생님을 더 인정해 주고 돕는 것 같습니다.
승진하시네요.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근데 솔직히 축하받을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교사는 적성에 맞았는데, 교감이 적성에 안 맞으면 어쩌지요?
생각 없이 살아도 누군가는 그렇게 눈여겨 보다 챙겨주더라구요. 저도 선생님 같은 케이스라, 힘든 날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고마우신 분들처럼 저희들도 선생님들 잘 살펴보시게요.
네, 저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욕심없이 묵묵히 제 몫을 다 하신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축하드립니다. 훌륭한 교감 선생님이 되셔서
멋진 꿈 펼치십시오. 글쓰기의 퍼즐 한 조각이 완성된 큰 그림도 응원합니다. 글 편안하게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간 올리신 좋은 글, 저도 잘 읽었습니다. 멋지고 당당하십니다.
큰 교훈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힘이 나네요. 큰 그림으로 완성될 퍼즐 한조각,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