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그리운 날에 / 양선례
엄마! 오늘은 어버이날이네요. 어제 낮에 꽃가게에서 색색의 카네이션 파는 걸 보았어요. 큰 도로 모퉁이라서 차 세우기도 옹색한 자리였는 데도 가게는 문전성시였어요. 그때서야 알았어요. 내일이 어버이날이구나. 꽃을 달아드릴 부모님이 있는 그분들이 부러웠습니다. 생각해 보니 엄마랑 가장 가까이 사는 딸이면서도 가슴에 카네이션 달아드린 적은 한 번도 없었네요. 현금이 좋다는 엄마 말씀을 충실히 따라서 몇 푼의 용돈으로 할 도리를 다한 양 생색냈지요. 꽃 달아드리는 딸은 막내딸이고 용돈 드리는 딸은 큰딸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면서요.
그곳은 평안하신가요? 이제 한 달 반이 지나면 엄마의 두 번째 기일이 돌아옵니다. 어버이날 즈음에 습관처럼 형제간들 모였는데 올해는 그조차 없으니 긴 연휴가 더 썰렁하네요. 왁자지껄 밤늦게까지 놀던 그 시절이 행복한 날이었어요. 펜션을 빌려서 일박이일 논 적도 많았는데 이제는 모두 그리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날이 잡히면 우리보다 엄마가 더 즐거워하셨어요. “아이, 반찬은 뭘 준비할 거나?” “엄마, 취나물, 머윗대 나물, 명태 코다리 조림, 그리고 생김치요.” 알라딘의 요술 램프처럼 주문만 하면 뚝딱 만들어 오셨어요.
광주 여동생은 과일과 간식, 막내는 술, 저는 삼겹살과 해산물 몇 가지를 준비하면 되었지요. 다 즉석에서 돈 주고 사면 되는 것이지만 엄마는 그렇지 않았어요. 며칠 전부터 김치를 담그고 머윗대를 손질하고, 시장을 봐야 했지요. 들고 오시는 가방이 우리 중 제일 크고 무거웠어요. 엄마는 김장철이면 이 집 저 집 불려 다닐 정도로 김치 담는 솜씨가 좋았어요. 쭉쭉 찢어서 먹는 막 담은 배추김치, 적당히 익혀서 아삭하게 삭은 알타리 김치는 밥도둑이었어요. 풋내나지 않으면서 재료의 식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이맘때쯤 먹는 열무 김치는 또 어떻고요? 아직까지 저는 엄마만큼 그 김치를 맛있게 담는 분을 못 봤어요. 작년에는 그 맛이 그리워서 여러 군데서 조금씩 사서 먹어 봤어요. 잘한다고 소문난 집인데도 막상 먹어보니 아니더라고요.
솜씨가 좋다 보니 엄마를 음식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엄마도 아시지요? 대학 친구 은경이. 그 친구는 채 썬 감자볶음을 말하더라고요. 저는 기억도 없는데 언젠가 은경이가 우리 집에 놀러 오자, 엄마가 해 주셨대요. 가지런하게 채 썰어 알맞게 소금간 한 후 모양이 어글어지지 않으면서 식감이 살아있게 볶는 게 요령이죠. 간단해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요리가 채 썬 감자 볶음 아니던가요. 은경이는 지금까지도 그처럼 맛있는 감자 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대요.
부산 고모는 그러시더라고요. 엄마가 해 주신 명태 코다리 찜을 더이상 드실 수 없는 게 아쉽다고요. 엄마표 취나물 무침도 최고였어요. 취를 삶아서 찬물로 헹굴 때 바락바락 거품이 나도록 치댔어요. 그래야 부드럽고 맛이 있다고요. 취나물 무침을 먹어본 제 지인이 그러더라고요. 만들어서 파시면 안되겠느냐고 엄마한테 말해 보라고요. 올해도 몇 번이나 엄마 식대로 해 봤는데도 그 맛이 안 나더라고요. 그럴 줄 알았으면 좀 배워둘 걸 이제야 후회가 된답니다.
엄마! 2주 전에 부산 외삼촌이 돌아가셨어요. 엄마의 일곱 형제 중 막내시잖아요. 칠 형제가 다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한 분 두 분 떠나고 이제는 단 두 남매밖에 남지 않았어요. 엄마보다 열 살이나 많은 이모는 올해 요양원에 들어가셨어요. 자꾸 넘어져서 혼자살이가 더 이상 안되었나 봅니다. 서울 외삼촌은 장례식장에서 만나지 못했어요. 낮에 다녀가셨는데 바로 다음 날 병원 진료 예약이 잡혀 있어서 서둘러 올라 가셨다더라고요. 광주와 광양 사는 여동생 부부와 우리 부부, 남동생까지 모두 일곱이나 다녀왔어요. 평일이라서 거기까지 다녀오는 게 부담이긴 했으나 엄마 가시는 길에 외삼촌 부부가 고맙게 해 주셔서 부의금만 보내기는 미안했어요.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동생들도 흔쾌히 다녀오자 하더라고요. 집에 오니 밤 11시가 넘었지만 마음은 편안했어요. 한편으론 엄마 계셨더라면 막내 동생 죽음을 얼마나 슬퍼하셨을까 싶어서 먼저 가신 게 다행이다 싶었어요. 엄마와는 열한 살이나 차이가 나서 애틋하게 여긴 동생이잖아요.
엄마! 생각하면 못 해주고 미안한 일만 떠올라요. 속 모르는 사람들은 가까이 있어서 아들만큼 든든한 큰딸이었다고 위로하지만 그 기대만큼 착한 딸이 아니라는 걸 제가 제일 잘 알지요.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스스로는 속일 수는 없잖아요. 때론 제 어깨에 놓인 짐이 무거웠어요. 결혼도 안 한 데다 몸이 아픈 남동생 대신 집안의 대소사 책임지는 큰딸 역할이 버거웠어요. 부모님이나 남동생이 아프면 그땐 어쩌지? 미리 걱정하고 힘들어했어요. 엄마는 이런 제 걱정을 아셨을까요? 남들처럼 인생의 종착역이라는 요양원 한 번도 안 가시고 그렇게 훌훌 떠나셨으니 말입니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한 가지 있어요. 엄마는 곶감을 참 좋아하셨어요. 마침 지인의 시부모님이 대봉으로 직접 만들기에 해마다 엄마한테 크고 좋은 반건시를 선물했어요. 엄마는 냉동실에 넣어두고 혼자서만 조금씩 꺼내 드셨어요. 해마다 설 무렵에 연례 행사처럼 그렇게 해 온 게 몇십 년은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엄마 돌아가시기 바로 전해에는 그러지 않았어요. 왜 그랬는지도 말씀드렸지요? 장군처럼, 황소같이 씩씩하게 일만 하시던 엄마가 평생 동안 두 번 입원하셨잖아요. 한 번은 넘어져서, 한 번은 뇌경색으로. 특히 두 번째 입원은 설날과 겹쳤어요. 하루 종일 상차림 음식 준비하느라고 저녁에서야 엄마 드실 몇 가지 반찬을 담아 병원에 갔지요. 곶감도 몇 개 챙겨서요. 엄마는 그걸 보자마자 드셨고 곧이어 시간마다 혈압과 맥박, 당 수치를 재는 간호사가 들어왔어요.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높게 나온 혈당에 놀란 간호사가 도대체 뭘 드셨냐고 물었죠. 곶감 한 개가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한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어요.
“올해는 곶감 안 줄 거냐?” 설이 다 지나도록 소식이 없으니 어느 날 그리 물으셨지요. “이제부터는 안 드릴 거예요. 기다리지 마세요.” 냉정하게 말하는 제가 많이 서운하셨지요? 어리석은 인간이라서 그랬어요. 앞날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었더라면, 내년을 기약할 수 없는 걸 알았더라면 그리 대답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어요. 외삼촌 돌아가신 장례식장에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해 겨울에 엄마 곶감 드리러 갔다가 삼촌을 만났었죠. 마침 여유가 있어서 외삼촌께도 한 상자 드렸는데 그게 그리 맛있었나 봅니다. 몇 번이나, 심지어는 엄마 돌아가셨을 때도 그때 먹은 곶감이 최고였다고 말씀하였어요. 한 번이라도 더 챙겨 드렸어야 했는데, 뒤늦게 어리석은 저를 타박했답니다.
울타리가 되어 주던 어른들이 한 분 두 분 돌아가시니 이제는 우리가 그 역할을 할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떠나고, 또 남고, 그래도 세상은 변함없이 흐르고. 그게 순리인 데도 막상 우리 차례가 되니 두려운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사람들이 엄마한테 ‘죽을 복’ 타고났다고 하는 말이 야속하기만 했었습니다. 한마디 말씀도 없이 그리 떠난 게 애석하고 비통했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생각이 달라집니다. 잠자다가 홀연히 떠나는 건 모든 이가 꿈꾸는 죽음이니까요. 생과 사의 마지막 순간에 부디 엄마가 이승의 좋은 기억을 가지고 가셨기를 간절히 빈답니다.
엄마! 아직까지 휴대폰에 저장된 ‘우리 엄마’ 번호를 지우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러지 않는 한 엄마는 언제까지나 그대로 계실 것 같아서요. 소리 내어 가만히 불러봅니다. 눈물이 차오릅니다. 코가 매워집니다. ‘언제쯤 편안하게 엄마를 부를까?’ 굳이 조바심 내지 않으려고요. 열심히 살다가 엄마 만나러 갈게요. 제 최고의 행운은 엄마의 딸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때까지 부디 그곳에서는 평안하시길요.
2022. 5. 8. 엄마가 많이 그리운 날에
큰딸이 드립니다.
첫댓글 우리 어머니도 머윗대 나물을 잘 무치셨답니다. 어머니가 아프시고 나서는 추억의 음식이 되가고 있죠. 코끝이 찡해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나도 엄마에게 쓸까 하다가 슬플 것 같아 그만 뒀어요. 아침에 일어나 사진보며 인사했네요.
음식을 맛있게 하시는 손맛 좋은 어른이셨군요,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절절하네요. 읽는 제가 마음이 먹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