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좋은 날 / 황선영
지난달 마지막 토요일에 글쓰기 반 회원들을 만났다. 광양 유당공원. 빙 둘러서서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총무님이 한 명 한 명 소개했다. 다들 이름 앞에 붙일 것이 있다. 내 앞엔 무엇을 갖다 놓을까. 목포에서 온 아줌마? 아무것도 되지 못한 것이 왜 양선례 선생님한테 미안한지 모르겠다. 나를 어떻게 소개할지 걱정되고 궁금하다. 염려가 무색하게 선생님은 내가 한 시덥잖은 농담을 가지고 나를 멋들어지게 포장해주었다. 국민 사회자라는 유재석 같았다.
아이들이 넷이니 뒤치다꺼리로 궁뎅이 한번 바닥에 붙일 새 없이 바빴다. 전쟁 같던 시간이 지난 요즘, 주부로 눌러앉은 것이 아쉽기도 하다. 혹시, 하고 싶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있을지 여러 사이트를 기웃거렸다. 교육청 학교폭력 담당과에서 행정 보조를 뽑는다는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보조라는 낱말이 맘에 든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응시원서를 작성하고 필요서류를 준비했다. 난생처음 자기소개서를 쓴다. 잘 할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 같고, 시켜만 주면 열심히 하겠다는 진심이지만 식상하다. 돈 주고 맡긴다더니 이해가 된다. 어렵다.
5월 9일. 서류전형 발표 날이다. 단절될 경력도 없는 나같은 사람은 안 뽑아 줄 것 같아 기대를 안 했다. 누워서 휴대폰을 하며 저녁 찬거리를 걱정하던 중, 합격 어쩌고 하는 문자가 화면에 뜬다. 뭐? 벌떡 일어나 안경을 쓰고 다시 읽었다. 황선영님, 서류전형 합격했으니 내일 한 시 40분까지 면접을 보러오란다.
저녁 장을 보러 나간 김에 미용실에 들렀다. 한 살이라도 어려 보일까 깔끔하게 단발로 잘라버렸다. 콧노래를 부르며 저녁밥을 준비했다. 무슨 잔칫날처럼 거하게 차려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이를 더 구석구석 닦았다. 물 아까운지 모르고 샤워를 오래 했다. 화장품을 평소보다 듬뿍 발랐다.
면접 날. 남편 출근 시키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딸들이 엄마 잘하라고 화이팅을 외치고 갔다. 집안일을 마치고 책상에 앉았다. 심장이 빨리 뛴다. 예상 질문에 답을 써보았다. 거울 앞에 가 섰다. 쑥스럽다. '안녕하세요. 황선영입다.'를 말했다. 손발이 오그라들어, 내 얼굴을 똑바로 못 보겠다. 눈을 감고 말을 했다. 웃기다. 열두 시. 씻고 화장했다. 오늘따라 팍삭 늙어 보인다. 잔주름이 자글자글하고 기미가 더 올라왔다. 아껴 둔 자켓을 꺼내 입었다. 팔뚝이 쪼인다. 한 시 10분에 주차장에 도착했다. 마음을 진정시켜야 할 것 같다. 케이비에스 라디오 클래식 에프엠을 켰다. 혼자서 이말 저말 해보았다. 혀가 꼬인다.
한 시 30분. 4층까지 계단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담당자가 대기실로 안내했다. 곧 다른 서류합격자도 왔다. 환하게 젊고 이쁘다. 똑똑해 보이기까지 한다. 위축된다. 상대가 안 될 것 같다. 순서를 뽑았다. 나는 관리번호 2번. 1번이 면접을 마치고 나왔다. 내가 들어갔다. 면접관 앞에 앉았다. 텔레비전에서 본, 출연자에게 독설을 날리는 무서운 심사위원을 생각했는데, 인상도 좋고 친절하였다. 나는 큰 죄라도 지은 사람마냥 벌벌 떨었다. 질문에는 염소 목소리로 헛말만 뱉었다. 뇌가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경험을 했다.
내가 사장이라도 나를 안 뽑을 것 같다. 그래도 콧구멍만 한 희망을 품어본다. 월급 받으면 남편 다 줘야지.
5월 11일. 아무 연락이 없는 것이 틀렸나 보다.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합격자 발표가 올라와 있다. 클릭. '최종합격자 관리번호 1번.' 동생한테 전화가 왔다. 뻔한 말을 한다. 다 경험이네 어쩌네 하면서. "듣기 싫어. 끊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올라오는 감정에 몸을 맡기고 느꼈다. 그리고 일어나 노트북을 열었다. 이때다. 지금 써야 한다.
첫댓글 역시나 재밌게 잘 쓰셨네요.
긴장속에 있다가, 마지막에 빵 터졌습니다. 고맙습니다.
처음 마주하는 면접인데 얼마나 떨렸겠어요. 공감합니다. 글쓰기에 재능이 있으니 계속 공부해서 이 길로 나가세요.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독자의 시선을 놓지 않는 힘이 있네요. 맛깔난 음식처
럼 찰진 언어로 솔직한 진술이 글의 맛을 더합니다. 내용은 안타까워 조마조마했지만
방송작가보다 잘 쓰셨습니다. 재능을 갈고닦으면 좋은 성과를 기대해도 되겠어요.
응원합니다.
선영씨 맞는 일을 금방 찾을 겁니다.
글쓰기 인재를 다른 곳에 뺏기지 않은 운수 좋은 날이네요. 하하!
합격자 명단에서 제외된 날이 글쓰기 좋은 날. 세상에 나쁘기만 한 것은 없는 것 같아요. 곧 합격의 감격을 글로 볼 날이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빠른 전개와 다양한 심리묘사. 글이 정말 재미있어요. 몇 년을 써도 제 글은 싱거운데 선생님 글은 감칠맛이 납니다. 고맙습니다.
숨 쉴 틈도없이
쭈욱 읽었답니다.
묘한 마력이 있어요.
멋지십니다.
늘 응원할게요.
맞아요.
우리 글쓰기 반의 떠오르는 샛별님이세요.
앞날이 창창해서 기대가 됩니다.
언젠가는 선생님께 맞는 자리가 있을 겁니다.
아이를 넷이나 낳은 것만으로도 칭찬 받아 마땅합니다.
우리 모두가 고마워해야 할 일이구요.
제가 등장하다니, 영광입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