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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 1979년 12월 12일 저녁 6시 50분, 무장한 병력이 국군보안사령부를 출발한다. 어둠을 뚫고 이들이 향한 곳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공관이었다(서울 한남동). 순식간에 공관 밖을 장악하는 무장 병력, 이들은 정승화 참모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출동한 것이었다.
정승화 대장/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급하다니, 그게 뭡니까?
허삼수 대령/보안사 인사처장//우경윤 대령/육본범죄수사단장: 총장님께서 김재규로부터 돈을 많이 받으셨더군요.
정승화: 누가 그 따위 소리를 해? 김재규가 그런 말을 했어?
허삼수: 가셔야겠습니다.
정승화: 내가 계엄사령관이야 대통령이 그런 지시를 내렸나?
허삼수: 네, 그렇습니다.
정승화: 내가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그런 조사에 응할 수 없어
내레이션: 대통령의 재가를 확인하기 위해 총장 비서실장이 전화기를 든 순간, 총성이 울렸다. 이 총성은 12.12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우경윤: 총장님, 가시죠. (강제로 정승화 총장이 연행됨)
총장 비서실장: 경비병!
내레이션: 대통령의 재가는 없었다.
반란군: (정승화 참모총장 얼굴에다 총 뿌리를 겨누고) 빨리 따라오지 않고 뭘 꾸물대!
내레이션: 국군의 명령체계를 파괴한 명백한 군사반란, 새로운 날이 밝았지만 그날의 혼란을 알아챈 국민은 거의 없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은 대한민국을 탈취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사백 여덟 번째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오늘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47일 만에 전두환이 대한민국의 권력을 탈취한 그 이야기, 오늘 특별히 김기현 성우께서 시연주셨습니다.
이시원/배우: 옆에서 듣는데 너무 소름이 돋는게 놀라워요.
허준/방송인: 어린 시절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줬던 목소리가 김기현 성우님이 아니었을까
김기현/성우: 아이~ 감사합니다. 제가 성우에요 (알고 보면 53년차 성우)
허준: 성우가 아닌 배우로 아는 분들도 많지 않을까요?
김기현: TV 초창기에는 배우들이 모자랐어요. 오늘날의 나이 많이 드신 배우들이 성우출신이에요. 김영옥, 나문희, 사미자씨 안 해본 사람이 없어요.
이시원: 저는 사실 겸업이신 줄 알았어요. 배우가 본업이시고 드라마 <제5공화국> 명장면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김기현: 저도 깜짝 놀랬어요. 전철을 탔는데 어떤 녀석이 제 옆에 와 가지고 웃고 떠드는 거예요. 아니~ 내 얼굴이 거기에 나오는 거야! (성우 김기현 & 장태완 사령관-12.12를 말한다. 야! 이 반란놈의 새끼야 야! 이 반란군 놈들아, 보는 즉시 사살하도록!!-온라인을 달구는 버럭 김기현의 영상), 야! 반란군놈들 이 새끼야! 이 장면을 나중에 알고 보니까
최원정: 이시원씨가 그런 기분으로 옆에 직접 그러고 있는 거군요.
이시원: 직접 보니까 포스가 남다르세요.
김기현: 지난 일요일에 의료봉사를 갔어요. 갔는데 80이 넘으신 할아버지가 장태완 사령관이다! 20년 전 일인데도 지금도 기억을 해요.
허준: 군인인줄 아시는 분들도 분명히 있을 거예요.
김기현: 제가 원래 논산훈련소 조교출신이에요.
이시원: 그러면 제5공화국 드라마와 찰떡 궁합인 거네요.
김기현: 그렇죠, 그건 진짜 마음 먹고 했죠. 논산 훈련소에서 60만 대군을 양성하고 나온 전형적인 군인입니다. 몸에 틀이 베어있잖아요.
최태성/한국사 강사: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이라고 하는 인물 자체도 엄청난 자연적인~ 수도경비사령관이 어떤 역할을 했냐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의 심장인 서울을 방어하는 역할을 맡고 있잖아요. 서울에 뭐가 있어요. 청와대 대통령 있잖아요. 서울과 대통령을 지켜내는 그 직책이 바로 수도경비사령관이거든요. 이건 상징성이 엄청난 거에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에요.
최원정: 장포스라는 별명이 선생님 연기하는 동안에 이후에 생겼다고 하는데 당시에 어떻게 연기를 하셨기에 장포스 라는 별명을 얻게 되셨는지?
김기현: 이게 반란군들한테 하는 얘기예요. 야~ 이 반란군놈들 새끼야! 너희들 꼼짝말고 있어! 내가 전차를 몰고가서 너희놈들 머리통을 다 날려 버릴꺼야! 나쁜놈의 새끼들~역적놈의 새끼들~ 이런 연기를 한 거죠.
일동: (박수)
최원정: 이 분이 정승화 총장을 지켜내려고 하셨던 분이잖아요.
허준: 정승화 총장이 four star 잖아요. 대한민국에 현재 four star가 일곱명이에요. 합참의장 연합사부사령관 육/해/공군 참모총장(3) 육군지상작전사령관 육군제2작전사령관
최원정: 현재요?
허준: 네, 참모총장이라고 하면은 사실상 군의 넘버 완이에요. 넘버 완을 넘버 투도 아니고 한참 밑에 보이지도 않는 별 두 개 짜리가 감히 총칼을 들고 연행을 해? 이건 군인정신이 투철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있을 수 없고~
이시원: 下剋上이죠?
김기현: 하극상이죠.
허준: 이건 이시원씨가 최원정 아나 집에 가서 내일부터 내가 엠씨 할꺼야, 이런 거 예요.
최원정: 비유가 악하다. 이건 우리끼리 할 수 있는 거구, 언제든지 와도 돼~
이시원: 근데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일단 계급은 전두환보다 높잖아요. 이게 왜 여기서 연행한 건지 지금도 잘 모르겠거든요.
정병준/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당시 미대사관에서 볼 때 한국의 권력에 세 사람이 있다고 봤어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그런데 청렴했을 뿐이지 어떤 욕망도 없습니다. 정승화 총장 정치적인 군인이 아니고 야전군인입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모든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전두환 보안 사령관인 합수본부장, 이 사람에게 권한이 쏠린다고 봤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
제주도 제외 전국에 선포된 비상계엄, 최고 책임자였던 정승화 계엄사령관, 그러나 점차 심해지는 합동수사 본부장 &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의 월권,
정병준: 전두환이 대통령 서거 다음날인 10월 27일에 최초로 합수본부 회의를 했는데 중정차장, 검찰총장, 치안본부장이 왔습니다. 당시 참관했던 사람들의 얘기로는 이전에 상급자들인 사람들과 회의를 하는데 굉장히 단순 명쾌하게 좌중을 휘어잡고 명령을 내리고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보고서 깜짝 놀랐다. 권력을 행사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행동했다고 얘기합니다.
최원정: 호랑이 없는 데 여우가 왕 노릇한다고 전두환이 지금 그걸 하고 있는 거네요.
정병준: 합수본부장이 되고 난 다음부터 거의 총장이나 장관을 무시하고 멋대로 정치적인 행위와판단과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김기현: 드라마에서 생각이 나는데 전두환이 소장인데 상석에 앉아있고 그 옆에 도열 하듯이 쭉 장군들이 앉아 있어요. 근데 그걸 보면 전두환 소장보다 계급이 높은 중장들이 있어요. 근데 어떻게 상석에 앉아가지고~ 이미 다 휘어잡은 거죠.
정병준: 최규하 권한대행이 인제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에 나갑니다. 그런데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을 찾아와서 최소한 90% 득표율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경찰을 동원하겠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정승화 총장이 그런 짓 하지 마라. 어떻게 합수부나 보안사가 정치에 개입하느냐 만류했다는 겁니다. 10.26 이라고 하는 것은 대통령이 시해된 비상사태였지만 이건 우발적으로 대통령이 사망한 것이지 이게 쿠데타나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처럼 정치적 행위를 계속 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최태성: 정승화 참모총장이 일단은 전두환을 안 좋게 보고 있잖아요. 전두환이 참모총장을 구술리려고 많은 노력을 했어요. 합수부장을 맡았잖아요. 수사에 들어갔더니 청와대 비밀금고 안에 9억 여 원의 비밀자금이 발견이 돼요. 그 당시 9억이면 어마어마한 돈이잖아요. 그 돈이 발견되자 전두환 합수부장이 박 대통령의 딸 근혜에게 6억원을 주고 1억은 자기가 알아서 쓰고 나머지 2억원을 정승화 참모총장에게 갔다가 준거에요. 정승화 총장이 어떨 것 같애요?
허준: 미친 놈 아냐?
최태성: 정 총장이 노발대발하는 거에요. 너 수사권 있어서 수사할 수 있지, 돈이 나왔어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예요? 당연히 보고하고 국고로 환수해야지 너무나 당연한 데 네가 뭔데 마음대로 처리하냐 해가지고 엄청 질책했대요. 그리고 나서 나중에 전두환을 동해안 경비사령관으로 보내겠다는 전출계획을 할 정도로 많이 틀어진 거죠.
이시원: 아니 근데 전두환은 2억을 왜 또 정승화에게 건 낸 거예요?
허준: 자기 혼자 먹으면 항상 탈이 나요. 나눠 먹어야 탈이 안 나지.
정병준: 정승화 총장이 전두환을 좌천시킬려고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합니다 (당시 전두환 좌천 소문 군 내에 파다), 예를 들어서 전두환의 수행부관이었던 분이 12월초에 육군본부에 들어왔더니만 다른 부관들이 전 장군 언제 떠난다고 그래? 물어 왔다는 거예요. 12월 8일에 합수부 간부가 정승화 총장을 면담했는데 반응이 싸하더라는 거예요. 전두환에 대해서 이미 마음이 떠났다. 심지어는 미8군 사령관도 알 정도로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최원정: 계엄사령관을 무시할 순 없는 상황 아니잖아요. 정승화 총장을 제거하면 내 운신의 폭이훨씬 컸을텐데~ 요런 계획과 생각은 있었을 것 같애요.
최태성: 또 걸리는 사람 장태완, 장태완 장군을 똑같이 회유를 할려고 했대요. (의문의 봉투를 장태완 장군에게) 이런 식으로 측근을 시켜서 보낸 거예요.
최원정: 열어 보시는데
이시원: 얼마인가요?
김기현/장태완 장군役: 100만원 수표, 형님, 얼마되지 않지만 집의 김장에 보태 쓰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시원: 당시 물가를 환산해 보면 100만원이면 김장을 몇 포기 하는 거예요.
김기현: 79년도에
최태성: [장태완 사령관] 나를 대체 뭘로 보고
이시원: 부인이 와서 여보, 이거 뭐예요?
김기현: 장태완 사령관은 절대 이런 거 안 받죠.
최태성: 전두환 측이 수표를 보낸 게 12.12.군사반란 몇일 전이에요. 몇일 전인데 이걸 보냈다는 이유가 뭘까? 그건 뭐냐면 장태완 장군 같은 경우는 친분이 있던 것도 아니고 뭔가 거사 전에 꺼림찍한 게 있는 거예요. 버티고 있으면 뭔가 쉽지 않으니까. 가까이 만들고 싶다는 셈법이 있었던 것 같애요. 그리고 무슨 말 까지 했냐면 며칠 전에 합수부장이 식사자리에 초대하겠다 라고 이야기도 하는 거예요. 그것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에요. 요 식사자리 초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정병준: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정승화 총장이 임명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전두환이 볼 때는 정승화의 사람인 거죠. 정승화 체포에 방해를 안 받도록 그런 사전 조치를 하거나 관계를 돈독하게 할려고 했던 게 아니냐 전두환식 접근방법이었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허준: 지금 (봉투를) 던지고 있는 거예요, 툭 던져서 어~ 이 사람은 나중에 우리 편으로 합류시킬 수 있겠어, 그러면서 색깔 구분을 하는 거죠.
최태성: 결국은 전두환은 아~ 이거 안 되겠다, 정승화 총장을 잡아야 되겠다 판단한 거 같애요. 노태우의 증언에 따르면 10.26 사태가 벌어지고 11월초에 이미 정승화 잡아야겠다 라고 결정을 내린 것 같애요. 그러면 이제 모여 가지고 머리를 맞대고 짜내야 활 것 아녜요. 그 짜낸 결과가 뭐였냐면 바로 10.26 사건과 정승화 총장을 엮어 버린 거예요. 예를 들면 김재규가 내란목적 살인죄잖아요, 그러면 정승화는 내란방조죄로 몰아가는 거죠. 요런 식으로 판을 짜는 거죠.
최원정: 10.26 사건 때 궁정동 안가에 있었잖아요?
최태성: 그렇죠,
최원정: 충분히 혐의를 받는 거죠.
최태성: 그러니까요.
이시원: 그러면은 지금 기간을 살펴보면 한 달 넘게 이 계획을 세운 거잖아요. 그러면 충분히 귀에 들어갔을 법한데 왜 아무도 몰랐던 거죠?
정병준: 당시 미8군 사령관이었던 위컴 회고록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전두환 등 정규 육사출신장교단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이시원: 알았네요.
정병준: 그래서 그걸 당시 국방장관 노재현에게 알려줬다는 겁니다. 그런데 국방장관은 뜬 소문이다 라고 치부했다는 겁니다. 노재현 장관은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추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석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인 합수본부장한테 두환아~ 두환아~ 라고 할 정도로 굉장히 허물없이 대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이미 그 싯점에서 전두환은 군복을 입은 정치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알아채지 못한 것이죠.
이시원: 한 마디로 형님~ 형님~ 에 넘어갔네요.
최원정: 눈 빛 보면 모르나?
이시원: 겉 모습에 속은 거죠. 형님~ 언니~
최태성: 역사는 반복된다 이런 말 들어보셨어요? 이런 때 쓰는 것 같애요. 사실은 5.16 군사정변 같은 경우에도 이미 한 달 전에 박정희 소장이 5.16 군사반란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국무총리한테도 보고가 돼요 알 고 있었던 거예요. 그럼에도 막지 못했잖아요. 근데 이 12.12 군사반란도 똑 같아요. 군사반란을 계획하고 있다는 걸 이미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막지 못한 거죠.
허준: 이때 조금 이라도 어느 한쪽만 움직여줬으면 막을 수 있었던 게 아닙니까! (김기현씨를 향해서) 아니, 장태완 장군님은 그 중요한 시기에 대체 어디 계셨던 거예요!
김기현: 요정에!
허준: 갑자기 요정은 왜?
최태성: 거사를 앞 두고 전두환이 움직임을 하고 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걸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 아녜요, 장태완 수경사령관, 그 다음이 정병주 특전 사령관, 그 다음에 군인들의 경찰 김진기 헌병감, 12.12 그날의 상황을 제가 보드판으로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장태완 장군님은 어디 계셨다고 했죠?
허준: 요정
최태성: 기억나시죠? 돈 봉투와 함께 식사를 제안했던 전두환, 맞습니다. 그날이 바로 12월 12일!
이시원: 이게 함정이라니까요.
최태성: 장태완, 김진기, 정병주 세 사람을 연희동에 있는 요정으로 초대 (암호명: 생일집 잔치) 해서 여기다 묶어 둔 거예요.
김기현: 요정에 있는 데 누가 와서 얘기해 주는 거예요. 참모총장이 연행 되어갔다. 그 얘기를 듣고 사태파악을 해보니까 장세동, 김진영이 없는 거예요. 그때 이미 12.12이전에 군사멤버로 합류를 한 거예요. 장세동, 유학성, 황영시, 노태우 저 사람들이 경복궁에 가 있는 거예요. 경복궁이 어디냐 하면 장세동 단장이 맡고 있는 그 자리 30단이거든요. 장세동이 내 휘하인데 내 부하인데 장태완이 장세동에게 전화를 해요. 장세동이 바꿔! 거기에 유학성이라는 중장이 있었어요. 선배거든요. 아~ 나, 유학성이야, 장 장군 왜 흥분하고 그래~ 이런 단 말예요. 아니 형님은 왜 거기 와 계십니까? 거긴 내 부대입니다. 거기서 빨리 나오세요! 총장님 빨리 원대복귀 시키세요. 이러니까~ 왜 흥분하고 그래 너도 와서 여기 얘기를 들어보면 이해할 거 아냐? 혐의가 없으면 정 총장을 풀어 주면 될 거 아냐? 이러니까 화가 더 올라가지고 야~ 이 반란군의 놈 새끼야, (선배한테) 너희들 꼼짝 말고 있어, 내가 전차를 몰고가서 너희 놈들 머리통을 다 날려 버리겠어, 역적 놈의 새끼들 (불꽃 연기),
최원정: 그때 억울함과 배신감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애요.
12.12. 군사반란-암호명 “생일잔치”
경복궁 30경비단-장세동, 유학성, 황영시 등 전두환 측 장교,
연희동 요정-장태완, 정병주 등 정승화 측 장교,
보안사->삼청동 총리공관 (최규하)
허준: (유학성에게) 너는 선배 아냐, 너는 더 이상 선배 아냐, 군인들은 내 직속 상관의 말만 듣거든요. 무조건 이게 군인의 명예의식인데 그 밑에 실질적으로 움직여야 되는 대령들 손 발들이 돌아선 거네요. (상관의 명령거부), 이 순간 군대는 다 무너진 거예요.
최원정: 지금, 지휘체계는 없어요!
허준: 더 이상 군대라고 할 수 없죠. 더 이상 군대가 아니예요.
최태성: 정승화 참모총장을 잡아넣어야 될 것 아녜요. 일부는 또 한남동 총장공관으로 병력을 출동시킨 모습을 보인 겁니다.
이시원: 동시에 이뤄지고 있는 거죠?
최태성: 그렇죠,
정병준: (정승화 체포작전을 위해) 제일 중요한 지휘관들은 연희동 요정에 묶어 두고 전두환은 裁可 받으러 총리 공관에 가 있구요. 그런데 계엄 사령관 겸 육군총장을 체포하겠다고 하는 데 전두환이 덜렁 덜렁 혼자 온 거에요. 아니 너는 도대체 왜 이러느냐? 이렇게 중대한 사안이면은 당연히 국방부 장관을 대동하고 와서 허락을 받아야 되는 게 아니냐 라고 한 거죠.
최원정: (전두환은) 裁可가 쉽게 이루어질 거라고 예상했던 거잖아요.
정병준: 최규하가 고무도장이라고 생각한 거죠.
최원정: 재가가 되지 않아서 사건이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정병준: 사실은 당시 평가는 최규하 대통령이 가장 용감했던 하루가 12월 12일~13일 까지 였다는
허준: 사실은 가장 위 아래가 철저해야 하는 사람들이 성격이 제일 잘 맞는 직장이 군대 아니겠습니까. 근데 세상에서 제일 위 아래 없는 사람들이 군대에 가서 저 난리를 쳐 가지고 군대라는 조직을 반란군 조직으로 바꾸어 버렸네요.
이시원: 근데 정말 一絲不亂했다. 이거는 양동작전도 아니고 삼동작전, 사동작전인데 자기에 거역할 사람은 요정에다 묶어 놓고 정 총장 체포 하라고 투입시키고 자기는 최규하 한테 허락 받으러 가구, 진짜 어떻게 보면 치밀하고 계획적이었다.
김기현: 나머지는 경복궁에서 대기하고 (반란군 지휘소)
최원정: 이 사건을 터트린 게 어떻게 보면 최규하 대통령의 역할이라고 봐야
정병준: 대통령의 裁可가 떨어지지 않았는 데 계엄사령관이자 총장이 7시간 이상 체포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진 거죠.
최태성: 부끄럽다, 부끄럽다.
김기현: 한 참 보면은 열불이 터져요.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간 정승화 총장/1993년 KBS 다큐멘터리 극장), 잡혀가서 지하실에 가서 옷 벗기는 것 보고 하면 진짜 육본이~
이시원: 진짜 얼마나 황당하셨겠어요. 반란군을 진압하려고 휘하를 모우는데 그 사람들이 반란군이었어, 그 황당함~ 진짜 분노~ 배신감~ 이루 말 할 수 없을 것 같애요.
김기현: 그럼요, 배신감은 말도 못하죠. 그 때가 밤 촬영을 한 기억이 나는데 경복궁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데 최후 연설을 해요. 이 장태완이와 같이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동조하겠습니까 하니까 네~ 고맙소 고맙소 일일이 악수를 하고 그런데 참모가 딱 가로 막고 사령관님 고정하십시오. 저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을 데리고 사지로 끌고 가실 겁니까. 가면 銃擊戰이니까 죽잖아요 (반란군 진압을 위해 부하들의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상황), 막 말리는 거예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거기서 막 짐승 소리를 내는 거예요 (어쩔 도리가 없던 장태완 사령관), 하고서 탱크를 발로 막 차고 지금도 내가 생각하면 그 감정이 잊혀지지 않아요.
허준: 내 휘하 장병들의 목숨을 희생시켜야 되니까
김기현: 그러니 갈 수도 없고 안 갈수도 없고 탱크를 발로 차고 음~음~속절 없이 지켜볼 수 밖에없던 장태완 장군의 울분, 그게 지금도 기억이나
최원정: 진압군과 반란군의 대결이지만 사실 우리 모두 다 같은 국군이잖아요. 이게 무슨 비극이에요, 진짜.
허준: 장태완 장군님이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돌아가셨잖아요. 살아계신 것 같은 느낌이네요.
김기현 그분이 화가 얼마나 많았겠어요? 화가~ 이런 일을 겪고
정병준: 12.12 반란군도 체포를 하고 난 다음에 수경사령관의 뒤를 캤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캐도 어떤 돈과 관련되었거나 여자 문제나 비리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허준: 조사 했더니 나온 건 니가 준 백만원이다.
이시원: 이 분은 12.12 군사반란 이후 평생 사람들을 쉽게 못 믿게 됐을 것 같애요.
최원정: 아까 가슴으로 우는 포효 소리가 너무나 마음에 와 닿았어요.
최태성: 그러니까요,
----------12.12 군사반란의 주역-하나회-군사반란을 주도했던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장교들-그 중심에 있었던 전두환-박정희의 후견으로 성장한 하나회-대한민국 군의 요직을 장악,
----------이광용/아나: 1979년 12월 12일 당시 대한민국 육군 주요직위체계도를 보고 계십니다.
대통령 최규하-국방장관 노재현-참모총장 정승화-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국방장관 노재현-군수차관보 유학성 중장/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1군단장 황영시 중장/9사단장 노태우 소장,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71방위사단장 백운택 준장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30단 장세동 대령/방공포병단 황동환 대령, 33단 김진영 대령/헌병단 조홍 대령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1공수여단 박희도 준장/3공수여단 최세창 준장/5공수여단 장기오 준장/9공수여단 윤홍기 준장
일단 군최고통수권자 누구죠? 대통령입니다. 그 아래 국방부 장관 있구요. 육군참모총장/계엄사령관 정승화 대장입니다. 3군 사령부가 얼마나 중요한 부대냐면 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을 방어하는 주요한 부대가 3군 사령부 예하 부대입니다.
허준: 군대 다녀오신 분들이라면 다 아는 얘기예요. 대한민국의 절반이 다 아는 부대예요. 그렇기 때문에 3군이라고 한다면 핵심부대예요.
이광용: 저도 3군 사령부~ 뭐 그냥 경기도 일원에서 근무했다는 얘기죠. 거창하게 받아 들이지 마세요. 김기현 성우가 열연했던 장태완 장군이 이끄는 수도경비사령부가 있구요. 수경사 30경비단장이 장세동이었습니다.
최태성: (김기현씨를 향해) 왜 장세동씨를 통제 못하셨어요?
김기현: 말을 안 듣잖아요.
이광용: 차근차근 들어보세요, 그리고 33경비단 김진영 대령 문민정부 하나회 척결 때 육군참모총장이었죠. 그리고 정병주 소장이 이끄는 육군 특전사령부 아래 1공수, 3공수, 5공수, 9공수여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드리겠습니다. 이 안에서 12.12 군사반란에 참여했던 지휘관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김기현: 1공수여단 박희도, 최세창, 김진영, 장세동, 조홍, 황영시, 노태우
이시원: 그냥 다 읽으시는 거 아니세요?
이광용: 역시 12.12 군사반란을 전면에서 막으시던 장태완 장군이십니다. 그럼 정답을 보시죠~ 정답 공개
이시원: 무섭지 않으세요?
최태성: 전두환을 중심으로 해서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이광용: 보시면 3군 사령부가 정말 중요한 부대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이 아래 1군단장 수도군단장 그리고 9사단장 노태우 소장 그리고 71방위사단장 또 사령관은 막으려고 했지만 그 아래 핵심 예하부대 지휘관들이 다 하나회 였어요. 그리고 특수전 사령부 정병주 사령관 예하 부대도 1공수 3공수 5공수 여단장이 12.12 군사반란에 참여했습니다.
허준: 손발이 다 넘어간 거네요. 브레인들만 위에 그냥 있고 나머지는 이미 싹 돌아선 거네요.
이시원: 이거 바이러스 감염되었다가 숨기고 있다가 알고 보니 보균자예요.
최태성: 그렇지, 그렇지
허준: 무섭다 무서워
김기현: 그때에 장태완 사령관이 쓰신 “12.12 쿠데타와 나” 라는 회고록이 있어요. 책 속에 보면 그런 말이 있어요. 전두환 소장이 보안사령관으로 영전이 되면서 주변에 하나회 회원들을 수도권 주변에 모아서 집중 관리를 했다고 그래요. 나중에 12.12 쿠데타 일어날 때 그때 결정적으로 그 사람들이 합세를 한 거죠. 그때 장세동하고 김진영 하고는 이미 배반하고 경복궁에 들어가 있고~
허준: 성우님이 이미 나는 장태완 사령관이 되어 계시네요. 기억이 다 나죠.
이광용: 그리고 이 빨간색 표시의 주요 지휘관들은 5공화국 전두환 정부와 6공화국 노태우 정부 때 다 주요한 자리를~
김기현: 박희도도 참모총장 지내고 김진영이도 참모총장 지내고 장세동은 국정원장 지내고
이광용: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났던 그 당시 핵심병력이 어디 어디에 있었는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수경사 30경비단 장세동 대령이 서울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쪽으로 갑니다. 1공수여단 5공수여단은 김포와 인천 부근에 자리잡고 있구요. 3공수여단은 남한산성 쪽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서울을 향해 포위를 해서 진격을 하는 거죠. 또 30사단은 바로 행주대교 쪽 서울 바로 서쪽이죠. 그리고 노태우 소장이 이끄는 9사단이 사실은 서부전선 최전방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서울로 내려오면 안 돼요.
최태성: 내려오면 안 돼지, 말도 안 돼지
이광용: 그리고 2기갑여단장도 하나회 출신이었습니다. 제가 이 부대 출신인데 되게 죄송하네요. 2기갑여단의 1개 전차대대도 내려오고 공수여단들도 다 서울로 서울로 이렇게 모여든 거죠.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이 되면서부터 하나회 멤버들을 다 요소요소에 자리를 잡게 하고 작전 개시 직후부터 그들은 뭉쳐서 서울, 아니 대한민국을 점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내레이션: (동영상), 1979년 12월 12일 밤 11시 15분 제3공수 특전여단이 은밀한 작전에 돌입했다. 여단장의 지시로 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작전에 나선 것이다.
------------정병주소장: 야, 이거 무슨 소리야! 비서실장: 사령관님 안쪽으로 피하시죠.
내레이션: (동영상), 사령관 집무실에 난입한 반란군들, 김오랑 소령/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그리고 시작된 총격~사령관을 지키던 김오랑 소령은 반란군의 총을 맞고 숨을 거둔다. 정병주 사령관 역시 총격에 부상을 입고 부하의 손에 체포되고 만다. 작전을 이끈 사람은 제3공수 특전여단 15대대장 박종규 중령이다.
박종규 중령/제3공수 특전여단 15대대장: 사령관님을 체포합니다.
내레이션: 이들은 상관이 아닌 반란군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특전사 뿐만이 아니었다.
----------노태우 소장/9사단장: 9사단 연결해, 나 사단장이다. 29연대를 지금 즉시 중앙청 앞으로 출동시켜라.
내레이션: 9사단장 노태우는 휘하의 1개 연대를 빼내 서울 시내로 출동시켰다. 30대가 넘는 탱크까지 동원한 반란, 그러나 출동 사실은 철저히 숨겼다.
이건영 중장/3군사령관(쿠데타 반대측): 9사단 30연대가 출동하는 모양인데 어디 출동시키는가?
구창회 대령/9사단 참모장: 연대 출동 안 합니다.
이건영: 출동한다고 하던데 무슨 소리야?
구창회: 연대 출동 안 합니다.
내레이션: 10.26 사태 이후 북한의 무력도발이 우려되던 시기, 반란을 위해 핵심병력까지 동원한것이다.
이시원: 진짜 말도 안 되는 대혼란!
최태성: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네요.
최원정: 서울 진격작전처럼 지금 다 서울 중심으로 몰려들고 있는 거에요.
이시원: 더구나 마음이 아픈 건 같은 나라 군인끼리 지금 이러고 있는 거잖아요.
정병준: 육군분부에서도 처음에 정승화 총장이 납치되었다는 것을 알고서 반란군을 진압해서 정승화 장군을 구출하라고 수도 기계화 사단이나 26사단에 출동명령을 내렸지만 이 부대들은 출동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반란군들은 출동을 한 거죠. 왜 그랬느냐 정승화 총장 보다는 하나회에 포섭되어 있는 각 사단의 영관급들이 많았다는 거죠. 수도권 연대장, 사단 참모장, 주요 참모들이 대부분 하나회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측 보도에는 이 날은 (1979년 12월 12일은) 대령들의 밤이었다. 대부분의 영관급들이 주요한 자리에서 하나회에 포섭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경사령관, 특전사령관이 다 자기 부하들에게 당하게 된 거죠.
김기현: 장태완 사령관을 체포해 간 사람은 자기 부하인 조홍 헌병단장이에요. 그 이후 굉장히 계급이 올라가요.
정병준: 가장 말이 안 되는 것은 전방을 지키고 있던 노태우가 9사단에서 일개 예비연대를 서울로 빼돌린 사건이었습니다.
김기현: 장태완 사령관이 청문회에서도 그 얘기를 하셨어요. (허스키 보이스로) 노태우 9사단이 어떻게 서울로 왔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돼!
허준: 군인으로서 저지를 수 없는 일이라는 거죠.
김기현: 최전방에 있는 부대를 빼 내었으니 전방에 구멍이 뻥 뚫린 거죠.
허준: 9사단이 지키고 있는 지역이 서울의 머리 꼭대기예요. 이걸 문을 열어주면 북한에서 최단 거리로 밀고 내려오면 어쩔뻔 했어요.
이시원: 아까 미국이 전두환의 낌새를 눈치챘다고 했잖아요. 왜 가만히 있었을까요?
정병준: 나중에 위컴 미8군 사령관이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합니다. 12.12 군사반란의 가장 큰 포인트 중의 하나는 뭐였냐면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건 미군의 작전 통제권 하에 있는 연합군 사령관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는 노태우 전방 9사단이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예비 1개연대를 빼서 쿠데타에 가담시켜서 서울로 진격을 하게 한 거죠. 안보를 담보로 미군이 한국을 지키니까 군대를 출동시킨 건 정권탈취행위였고 미국이 볼 때는 미국과 맺은 국가간의 약속을 위배한 것이었고 잘못하면 한미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던 거죠. 당시 주한 미국 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이 위컴 사령관과 회고록을 냈습니다. 근데 여기에 보면 제일 중요한 건 뭐냐 첫번째는 아군끼리 총격을 하면 안 된다, 두번째는 쿠데타 진압에 미군이 나서서 하면 안 된다, 왜냐면 이미 61년도에 매그루더 미8군 사령관이 박정희 쿠데타 진압하려다가 실패했습니다. 차라리 말을 안 했으면 모르겠는데 진압하겠다고 했지만 진압을 못해서 위신이 추락했습니다. 그러니까 글라이스틴과 위컴도 5.16의 교훈을 알고 있었습니다. 세번째 선택지는 뭐냐 이 군사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군부가 현실적으로 한국의 핵심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면 이들이 합법적으로 정치체제를 따르도록 이끄는 게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게 미국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태성: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서 서울 중심부에 위치했던 중앙청이나 육본이 순식간에 접수가 돼요. 장태완 장군의 백여 명의 병력도 사실은 무용지물이 된 거구요. 장태완 사령관도 역시 마찬가지로 정승화 총장을 따라서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이 됩니다.
김기현: 맞아요, 탱크를 발로 찼을 때 심정이 꼭 그랬어요. 저 반란군들을 보고만 있고 어떻게 할 방법이 없잖아요. 그 심정이 어땠을까 생각을 하면서 미쳐서 짐승 소리를 내는 거죠.
최원정: 정승화 체포가 일단 목표였다면 그냥 죄목을 만들어서 체포만 하지 이렇게 반란까지 일으켰어야 했나요?
정병준: 정승화 총장은 본인이 궁정동 안가에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본인이 직접 10.26 사건 조사를 받겠다고 자청을 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전두환은 그런 사실을 알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정승화 총장이 대통령 시해와 관련이 있다라고 하는 루머나 그런 인상을 계속 풍겼습니다. 정승화 총장을 이 사건에 엮어서 군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사의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권력을 어떻게 하면 내가 가질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을 내가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런 자리에 내가 있다. 결국은 박정희 정부 시절에 정치군인으로 성장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당시 12.12 쿠데타 때 주한미국 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이 전두환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제자이자 아들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 전두환이 5.16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다음에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61년에 쿠데타가 났을 때 미8군 사령관이던 매그루더는 진압하라고 했습니다. 굉장히 큰 분노를 느꼈죠.
최태성: 이 때 전두환이 대위로 서울대 ROTC 교관이었어요. 이 전두환이 육사생도 그리고 졸업생 한 천명 다 동원해서 박정희 지지 시가행진을 시킨 거예요.
정병준: 동대문에서 남대문 동화백화점 반도호텔 시청 광장에 도착했는데 시민들이 환호를 하고 박수를 치는 겁니다. 미8군이나 대사관에선 이걸 보고서 국민들이 박수를 치니까 이제 민심이 돌아섰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육사생도의 시위행렬이 없었다고 한다면 박정희의 5.16 쿠데타가 안착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시원: 박정희 대통령은 전두환에게 일을 시키지도 않았는데 척척 해내네. 얼마나 예뼜을 까요. 포상이라도 주고 싶었을 거예요 (아낄만도 하네).
정병준: 그러니까 5.16 쿠데타 후에 전두환이 바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민원비서관이 됩니다. 이게 대령급 자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위가 임명된 거죠.
최태성: 말도 안 돼, 대위가 대령 자리를
정병준: 그리고 심지어는 1963년 민정이양 당시에 전두환 대위를 불러서 자네 국회의원에 나가 보게. 그렇게 권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전두환이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각하, 군대에도 각하께 충성하는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돼지 않겠습니까? 라고 거절했다는 거예요.
일동: 우~아~
정병준: 거절하니까 박정희가 어~ 이 친구 봐라. 특별하게 생각해서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그후로 청와대에 일년에 한 두 차례 불러서 육영수 여사와 함께 칼국수나 면을 먹고 식사를 할 정도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그 다음에 중앙정보부가 만들어진 다음에 인사과장으로 갔습니다. 그 다음에 지금 반란이 일어난 수경사 30경비단장으로 근무를 했구요.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지냈고 보안사령관을 지냈습니다. 그러니 권력의 중심에서 권력이 어떻게 유지되고 작동이 되는지 그걸 어떻게 잡아야 되는지를 알았습니다.
이시원: 한 마디로 5.16을 복습했다고 이해하면 될까요?
정병준: 전두환의 출발이 5.16이기 때문에 5.16부터 10.26까지 18년에 거친 모든 정치과정에서 노하우를 배웠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시원: 준비하고 기다리면 기회는 온다의 나쁜 예 같아요!
일동: 웃음
최태성: 전두환이라고 하는 인물이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인물이 아니라는 거예요. 박정희 라는 그늘 속에서 계속 성장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던 거죠.
정병준: 본인의 이야기입니다. 정치라는 것은 뭐냐 힘있는 사람이 마음대로 하는 게 정치다 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시원: 정치란 정의를 그렇게 정의하는 사람은 처음 봐요.
최원정: 전두환은 어떤 사람이기에 박정희의 아들이라는 평가를 받는지 살펴볼까요?
정병준: 1951년에 육사 11기로 입교했습니다. 육사 11기라고 하는 게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본인들은 졸업할 때 자신들이 정규육사 1기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1기부터 10기까지 훈련기간은 몇 주에서 몇 개월뿐이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육시 11기는 미국의 웨스트포인트를 본따서 4년제 정규과정을 마쳤습니다. 본인들이 이렇게 얘기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입학할 때는 서울대 보다 나았어. 이 사람들은 군내에서 엘리트주의 순혈주의 우리는 선배들이랑 다르다. 선배 그룹이든 지도부든 반감을 가지고 쳐다 봤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두환을 대표하는 게 육사내의 사조직으로 알려진 하나회였습니다. 박정희를 태양으로 받드는 하나회가 사실은 박정희로 볼 때는 자신의 지지기반에 적격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허준: 한 기수에 말 잘 듣고 태양 하나만 바라보는 친구 누구 없나 딱 바라봐서 경상도 출신 한열 명을 뽑습니다. 열 명을 뽑아서 하나회 선배가 앉아있다가 어디로 전출가거나 아니면 내가 승진을 하거나 하면 이게 요직이야. 요직을 그대로 하나회 회원에게 물려주는 겁니다. 이려면 어떻게 되냐면 이 점들이 계속 넓어지잖아요. 군을 다 장악하게 되잖아요.
최태성: 전혀 모르는 아래 장교가 와 가지고 형님으로 부르면 느낌이 아~ 너구나 하나회구나 이런 식으로 해 가지고 자기들끼리 광을 잡는게 있었대요.
이시원: 제가 군대를 안 갔다와서 그러는데 보통 이제 사병들 끼리도 형님~ 형~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김기현: 사병들끼리 형님이라는 말은 꿈도 못꾸는 일이죠.
-----------(동영상) 1979.12.14. 국군보안사령부, 12.12 성공을 자축하는 핵심 멤버들, 샴페인 터뜨리고~ 연예인들이 와서 노래 부르고~ 그러잖아요. 얼마나 신나겠어요, 참석자들의 잔을 직접 채워주는 전두환, 신나겠어요~ 총장체포 어려운 일을 우리가 해냈습니다. 이제 이들의 관심사는 論功行賞,
-니가 이 자리 맡아야지
-신원 미상의 두 장교-정보부는 지금 차규헌씨가 얘기가 있어요.
-응, 차
-그럼 우리 여기는?
-여기는 유학성씨가 지금 물망에, 오른다는 것 같은데
서로 나눠 먹기 하는 것 같은데요.
-1군에는 황영시
-황영시?
-합참의장도 바뀌었다. 뭐 이런 얘기가 있던데
-응, 합참의장도 바뀔 것 같아
-원로들 싹 바뀌는 군
-그렇죠, 엘리트들로
아~ 자기네들은 다 엘리트다
-우리 박형은 어디 한 자리 없는가?
-이번에 바로 장군으로 해 가지고 어디 한 자리 얻을까 싶은데 사양을 하고 있습니다.
최원정: 시청하시는 분들의 혈압이 굉장히 많이 올라갔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허준: 일반 시민들이 저거 쿠데타 반란군들이라고 생각한 건 언제예요?
김기현: 그 당시는 12.12 사건을 그렇게 반란군이라고 얘기를 할 수 없었죠. 그렇게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1980년도에는 체계적인 보도가 어려웠던 시대). 12.12가 났을 때도 한강 다리가 통제됐다. 이런 정도만 알았지, 12.12는 그건 나중에 알았어요 우리는 몰랐어요.
정병준: 12.12 쿠데타로 전두환 신군부는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바로 가라 치웁니다. 그리고 며칠 내에 장성 40명을 예편을 시켰습니다. 그 빈 자리를 하나회 출신들이 꿰어차는 거죠. (사진: 생일집 잔치 주역들),
이시원: 아까 암호명이 생일집 잔치였잖아요. 지금 생일 케이크 나눠 먹는 것 같아요.
-------------(동영상) (慰勞파티 1980.1.23),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장관님께 감사드리며 다 함께 건배합시다. 10.26 사건 이후 3개월 만에 권력의 중심에 선 전두환, 그러나 자신의 권력욕은 부인,
전두환/보안사령관: 보안사령관이 한국의 실권자라느니 여러가지 유언비어가 아직도 내용을 잘 모르는 우리 국민들간에 오고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많은 불순세력이 우리 한국에 숨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불순세력으로 인한 유언비어가 계속 이것이 확대되어 나간다든지 하게 되면 이것은 역시 혼란을 조성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기 때문에 유언비어를 방지하는 데 노력해 주시기를 당부합니다.
-1980.4, 중앙정보부장 서리
-1980.5,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1980.8, 제11대 대한민국 대통령
-----------(동영상) 전두환 노래: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정병준: 12.12 쿠데타가 일어나고난 후 8개월만에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게 되고 전두환이 1980년 8월에 장충체육관 선거를 통해서 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권력은 노태우로 이어졌구요 (동영상), 쿠데타에 참가했던 다른 장성들도 다 요직을 차지했습니다. 육군총장-장관-안기부장-국회의원 등 우리가 알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 올랐습니다 (동영상), 반면 정승화 총장은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서 물고문 당하고 빳다 맞고 난 다음에 7년 형 선고 받고 2등병으로 예편되어서 연금도 못 받게 됩니다.
일동: (탄식)
김기현: 못 받죠. 이등병으로 강등되면 못 받아요. 물고문 당한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장성이었던 사람이 지하 고문실에 혼자 끌려 들어가서 옷 벗어! 그러면 벗어야 되고 그 수모를 당했잖아요. 수모 자체가 고문이죠.
최태성: 내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내란죄를 묻는 말도 안 되는 세상이 지금 벌어진 거예요.
최원정: 賊反荷杖이죠.
최태성: 전두환이라는 사람이 권력을 장악하기 참 좋은 환경이었어요. 법체계가 유신체제이니까 국민들의 지지가 필요없는 거예요. 체육관에서 힘만 있으면 얼마든지 대통령이 될 수 있으니까
최원정: 반란을 일으켰다고 어떻게 바로 정권을 장악할 수 있죠?
정병준: 1979년 12.12 군사반란부터 1980년 8.27까지 무려 8개월이 걸렸습니다. 8개월을 역사에서 가장 긴 쿠데타라고 합니다. 그 사이 전두환이 어떻게 했느냐 1980년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합니다.
------------(동영상) 기자: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냐는 항간의 우려가 있는데~
전두환/중앙정보부장 서리: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본인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는 것이 오히려 정치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면 되었지 차질을 초래한다 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병준: 군의 명령 체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구요. 중정 한 해 예산이 1000억이었죠. 전두환이 마음대로 쓸 수 있었죠. 중정부장 서리가 되어서 대통령이 되기 위한 준비작업을 했다고 보통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 기간동안 미8군 사령관 주한미대사 CIA 한국지부장을 만나서 계속 미국의 승인을 받을려고 합니다. 미국이 쉽게 승인할 수 없잖아요. 종당에는 어떻게 했느냐 미 대사 미8군 사령관을 만나는 행위 자체가 미국이 12.12를 승인했다 혹은 전두환의 실권을 인정한 것 처럼 언론 플레이를 하게 됩니다. (미국, 전두환 지지 주장 제기/LA타임즈 1980.8.8) 왜냐 언론이 신군부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존 위컴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두환은 마치 왕으로 태어난 것처럼 행동했다. 권력을 누리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전두환의 인상은 무자비할 정도로 야심에 차 있었고 용의주도하며 원기왕성했다” 이러한 전두환을 보고서 글라이스틴 주한미국 대사는 회고록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전두환을 묘사할 때 교활한 cunningly, 전두환은 교활하게 정권을 잡았다. 왜냐하면 권력을 손에 넣을 때까지 마치 권력에 대한 야심이 없는 것처럼 언어와 행동을 했지만 실제로 보이는 태도는 이미 권좌에 오른 사람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최태성: 12.12 군사반란은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한테는 찬란한 미래를 열어준 계기가 되었죠. 그런데 그 반대측에서 군인답게 살려고 했던 사람들에게는 비극 그 자체가 다가오게 된 거예요. 전두환 사령관이 여의도 요정에 발을 묶었던 바로 세 사람,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 사령관, 김진기 헌병감, 이분들은 모두 보안사에 끌려가서 고초를 당했구요. 이듬해인 1980년에 강제예편됩니다.
정병준: 장태완 사령관은 이렇게 썼습니다. 제일 치욕스러운 건 직속 부하들에게 배신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당한 것은 그래도 낫다. 더 화가 나는 건 중간에 결단을 못 내리고 왔다 갔다 한 육군본부의 수뇌부들이었다.
김기현/장태완 장군役: 장태완 사령관이 의자를 박차고 나갑니다. 정말 이러고들 있을 겁니까!? 빵하고 음~ 하고 나가는 게 시리즈 장면, 반란군은 경복궁에 똘똘 뭉쳐 있는 데 육군본부는 자기 주장을 못 내고 어영 부영 하면서 결론을 못 내리고 서로 눈치만 본 거죠.
최태성: 가운데 있는 정병주 사령관은 어떻게 되셨나요?
------------(동영상), 12.12 군사반란 때 총상을 입고 부하들에게 체포된 정병주 특전 사령관, 왼쪽 팔둑에 크게 총상을 입은 흔적 공개,
정병준: 비극적이었어요. 정병주 특전 사령관은 1988년에 경기도 야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어요. 유서가 없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타살을 주장했지만 사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구요.
최원정: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너무 속상하다.
최태성: 이 참에 중요한 게 있어요. 특전 사령관 비서실장 이었던 김오랑 소령은 사령관을 지키려다 결국 반란군의 총에 맞아 사살되었구요. 또 반대로 박윤관 일병은 참모총장 공관에 출동해서 아군끼리 총격전에서 총에 맞고 사망합니다. 비극적인 모습입니다.
허준: 저기 일병은 상관의 명령에 띠를 수 밖에 없는데~ 평생을 앞으로 반란군으로 남는 거예요.
최태성: 그럴 수 밖에 없는 거죠.
최원정: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귀한 아들 형제들인데 그들의 죽음이 안타깝습니다. 저기서 정선엽 병장은 제대하기 3개월 전에 일을 당했다고 그러더라구요. 형님이 그때 분노와 충격으로 종교에 입문해서 지금은 해외 선교사를 하고 계시대요.
----------국립서울현충원/서울 동작구, (故정선엽 병장 묘역) 2년만에 다시 찾은 동생의 묘지,
최원정: 돌아가셨을 때, 바로 국립현충원에 묻히신 건가요?
정훈채/故정선엽 병장의 형: 아니에요, 그 사건 당시에 자기들 적이었잖아요. 그래서 국립묘지에 안장이 안 된다고 그랬어요. 명령에 따랐을 뿐인데 그렇게 까지 할 게 있느냐 그래서 안장은 결국엔 됐습니다. 처음에는 안 된다 그랬어요.
-------------(동영상) 1979.12.13. 00시 05분, 1공수여단 출동, 이들의 공격목표 동생이 근무하던 용산 국방부,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반란군의 총탄에 쓰러진 정선엽 병장, 육군 병장 정선엽의 묘, 동생이 떠난 지 43년, 아직도 생생한 그날의 기억
정훈채: 그러니까 12월 13일 이죠, 내가 삼각지를 거쳐서 택시를 타고 출근 하는 데 택시기사가 어젯밤에 대단한 총격전이 저기 국방부에서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국방부로 가서 면회 신청을 했어요. 면회가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동작동) 끝내 싸늘한 주검으로 만나게 된 동생, 교우관계가 참 좋았어요. 하지만 잊힌 동생의 죽음, 1979년 12월 13일 수도통합병원에서 순직,
전사 확인서
정귀상 귀하
소속: 국군수도병원
계급: 병장
군번:
생년월일: 56.06.21.
주소: 서울특별시
위 고인은 1977년 07월 05일 입대해서 국군수도병원 소속으로 전투중 1979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전사하였음을 통지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국가 유공자 및 보훈보상 대상자 해당여부는 별도 법률에 의거 국가보훈처 보훈심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결정되므로, 본 확인서 와는 별개 사항임을 알려 드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가까운 보훈(지)청으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2022년 12월 07일
육군참모총장
43만에 되찾은 동생의 명예, 하지만 끝내 받지 못한 사죄, 용서할 준비가 사실 개인적으로는 돼 있었어요. 그런데 용서라는 것이 잘못한 사람이 사죄해야 성립이 되잖아요. 재판에서 판결이 다 났음에도 불구하고 사과 한 마디 없이 세상을 떠났잖아요.
최원정: 나라를 지킨 주인공의 이름을 여러 차례 새기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을 좀 더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정훈채: 감사합니다.
이시원: 그나마 다행인 게 어떻게 보면 전두환은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 했잖아요. 그래도 정선엽 병장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어서 진짜 군인이라는 게 무엇인지 증명할 수 있어서 다행인 거 같애요.
허준: 서울 한 복판에 경비 초소에 설 정도로 얼마나 잘 생기고 얼마나 크고 그 집안에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
최원정: 아무튼 이후에 또 이어지는 5.18의 비극이 여기 12.12 그날에서 시작된 거 잖아요. 그렇게 멀지 않은 과거이기 때문에 어떻게 되돌려 볼 수 없을까 이런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정병준: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양성한 精銳將校集團이 軍事反亂과 下剋上을 벌였고요. 특전사는 북한의 인민무력성이 아니라 대한민국 육군본부를 공격을 했구요. 그리고 전방을 지키던 9사단은 전방을 지킨 게 아니라 서울로 진주했습니다. 국가와 국민의 군대가 아니라 마치 군대가 사병집단으로 드러났습니다. 안보라는 명분과 군인이라는 자긍심이 사라진 치욕의 날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반역의 날을 명백하게 보여줌으로써 사실은 역설적이고 비극적으로 한국 현대사가 민주주의로 민주화 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서막을 열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최원정: 편히 주무실 수 있을까요? 분이 안 풀리신 분들은 다음 시간에도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408회 전두환, 대한민국을 탈취하다 에서 정리).
요악
① 1979년 12월 12일 저녁 6시 50분, 무장한 병력이 국군보안사령부를 출발한다. 어둠을 뚫고 이들이 향한 곳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공관이었다(서울 한남동). 순식간에 공관 밖을 장악하는 무장 병력, 이들은 정승화 참모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출동한 것이었다. 대통령의 裁可를 확인하기 위해 총장 비서실장이 전화기를 든 순간, 총성이 울렸다. 이 총성은 12.12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대통령의 裁可는 없었다. 국군의 명령체계를 파괴한 명백한 軍事反亂, 새로운 날이 밝았지만 그날의 혼란을 알아챈 국민은 거의 없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은 대한민국을 탈취했다. 당시 미대사관에서 볼 때 한국의 권력에 세 사람이 있다고 봤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그런데 성실했을 뿐이지 어떤 욕망도 없다. 정승화 총장은 정치군인이 아니고 야전군인이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모든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전두환 보안 사령관, 이 사람에게 권한이 쏠린다고 봤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 제주도 제외 전국에 선포된 비상계엄, 최고 책임자였던 정승화 계엄사령관, 그러나 점차 심해지는 합동수사 본부장 &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의 월권, 전두환이 대통령 서거 다음날인 10월 27일에 최초로 합수본부 회의를 했는데 중정차장, 검찰총장, 치안본부장이 왔다. 당시 참관했던 사람들의 얘기로는 이전에 상급자들인 사람들과 회의를 하는데 굉장히 단순 명쾌하게 좌중을 휘어잡고 명령을 내리고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보고서 깜짝 놀랐다. 권력을 행사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행동했다.
② 전두환은 합수본부장이 되고 난 다음부터 거의 총장이나 장관을 무시하고 멋대로 정치적인 행위와 판단과 결정을 내렸다. 최규하 권한대행이 인제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에 나간다. 그런데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을 찾아와서 최소한 90% 득표율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경찰을 동원하겠다는 얘기다. 그래서 정승화 총장이 그런 짓 하지 마라. 어떻게 합수부나 보안사가 정치에 개입하느냐 만류했다. 10.26 이라고 하는 것은 대통령이 시해된 비상사태였지만 이건 우발적으로 대통령이 사망한 것이다. 이걸 쿠데타나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처럼 정치적 행위를 계속 하려고 했다. 정승화 참모총장이 일단은 전두환을 안 좋게 보고 있다. 전두환이 참모총장을 구슬리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합수부장을 맡았다. 수사에 들어갔더니 청와대 비밀금고 안에 9억 여 원의 비밀자금을 발견했다. 어마어마한 돈이다. 전두환 합수부장은 박 대통령의 딸 근혜에게 6억원을 주고 1억은 자기가 알아서 쓰고 나머지 2억원을 정승화 참모총장에게 갔다가 주었다. 정 총장이 노발대발하였다. 당연히 보고하고 국고로 환수하는 게 당연한 데 네가 뭔데 마음대로 처리하냐 엄청 질책했다. 전두환을 동해안 경비사령관으로 보내겠다는 전출계획을 할 정도로 많이 틀어졌다.
③ 정 총장이 전두환을 좌천시킬려고 한다는 소문이 군 내에 파다했다. 예를 들어서 전두환의 수행부관이 12월초 육군본부에 들어왔더니만 다른 부관들이 전 장군 언제 떠나느냐고 물어 왔다는 거다. 12월 8일에 합수부 간부가 정승화 총장을 면담했는데 반응이 싸하더라고, 전두환에 대해서 이미 마음이 떠났다. 미8군 사령관도 알 정도로 소문이 파다했다. 계엄사령관을 무시할 순 없다. 정승화 총장을 제거하면 내 운신의 폭이 훨씬 컸을텐데~ 또 걸리는 사람 장태완 장군을 똑같이 회유를 할려고 했다. 의문의 봉투를 장태완 장군에게 측근을 시켜서 보낸다. 100만원 수표, 형님, 얼마되지 않지만 집의 김장에 보태 쓰시면 감사하겠다. 장태완 사령관은 절대 이런 거 안 받았다. 전두환 측이 수표를 보낸 게 12.12. 군사반란 몇일 전이다. 이걸 보냈다는 이유가 뭘까? 그건 장태완 장군 같은 경우는 친분이 있던 것도 아니고 뭔가 거사 전에 꺼림찍한 게 있어서다. 버티고 있으면 뭔가 쉽지 않으니까. 가까이 만들고 싶다는 셈법이 있었다. 그리고 무슨 말까지 했냐면 며칠 전에 합수부장이 식사자리에 초대하겠다다. 그것도 이상하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정승화 총장이 임명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전두환이 볼 때는 정승화의 사람인 거다. 정승화 체포에 방해를 안 받도록 사전 조치를 하거나 관계를 돈독하게 할려고 했다. 이게 전두환식 접근방법이었다. 결국 전두환은 이거 안 되겠다, 정승화 총장을 잡아야 되겠다로 판단하였다. 노태우의 증언에 따르면 10.26 사태가 벌어지고 11월초에 이미 정승화 잡아야겠다 라고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 이제 모여 가지고 머리를 맞대고 짜야 한다. 그 짜낸 결과가 바로 10.26 사건과 정승화 총장을 엮는 것이다. 예를 들면 김재규가 내란목적 살인죄다, 그러면 정승화는 내란방조죄로 몰아가는 거다.
④ 정승화는 10.26 사건 때 궁정동 안가에 있었다. 충분히 혐의를 받는다. 그러면 지금 기간을 살펴보면 한 달 넘게 이 계획을 세운 거다. 당시 미8군 사령관이었던 위컴 회고록에 이렇게 되어 있다. 전두환 등 정규 육사출신장교단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그걸 당시 국방장관 노재현에게 알렸다. 그런데 국방장관은 뜬 소문으로 치부했다. 노재현 장관은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추천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석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한테 두환아~ 두환아~ 라고 할 정도다. 그렇지만 이미 그 싯점에서 전두환은 군복을 입은 정치인이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사실 5.16 군사정변 같은 경우에도 이미 한 달 전에 박정희 소장이 5.16 군사반란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국무총리한테도 보고가 되었다. 그럼에도 막지 못했다. 이 12.12 군사반란도 똑 같다. 군사반란을 계획하고 있다는 게 이미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막지 못했다. 거사를 앞 두고 걸리는 사람들이 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 사령관, 김진기 헌병감, 12.12 그날의 상황에 돈 봉투와 함께 식사를 제안했던 전두환, 그날이 바로 12월 12일! 장태완, 김진기, 정병주 세 사람을 연희동에 있는 요정으로 초대 해서 여기다 묶어 두었다. 요정에 있는 데 누가 와서 참모총장이 연행 되어갔다. 그 얘기를 듣고 사태파악을 해보니까 장세동, 김진영이 없다. 그때 이미 12.12이전에 군사멤버로 합류를 하였다. 장세동, 유학성, 황영시, 노태우 저 사람들이 경복궁에 가 있다. 경복궁이 어디냐 장세동 단장이 맡고 있는 30단이다. 장세동이 장태완 휘하인데 장태완이 장세동에게 전화를 한다. 장세동이 바꿔! 거기에 유학성 중장이 있었다. 선배다. 아~ 나, 유학성이야, 장 장군 왜 흥분하고 그래~ 아니 형님은 왜 거기 와 계십니까? 거긴 내 부대입니다. 거기서 빨리 나오세요! 총장님 빨리 원대복귀 시키세요. 이러니까~ 왜 흥분하고 그래 너도 와서 여기 얘기를 들어보면 이해할 거 아냐? 혐의가 없으면 정 총장을 풀어 주면 될 거 아냐? 이러니까 화가 더 올라가지고 야~ (선배한테) 이 반란군의 놈 새끼야, 너희들 꼼짝 말고 있어, 내가 전차를 몰고가서 너희 놈들 머리통을 다 날려 버리겠어, 역적 놈의 새끼들 (불꽃 연기), 그때 억울함과 배신감이 아직도 남아 있다.
⑤ 12.12. 군사반란-암호명 “생일잔치” 경복궁 30경비단-장세동, 유학성, 황영시 등 전두환 측 장교, 연희동 요정-장태완, 정병주 등 정승화 측 장교, 보안사->삼청동 총리공관 (최규하), 군인들은 내 직속 상관의 말만 듣는다. 무조건 이게 군인의 명예의식인데 그 밑에 실질적으로 움직여야 되는 대령들 손 발들이 돌아섰다 (상관의 명령거부), 이 순간 한국 군대는 다 무너졌다. 지금, 지휘체계는 없다! 더 이상 군대라고 할 수 없다. 더 이상 군대가 아니다. 정승화 참모총장을 잡아넣어야 될 것 아냐. 일부는 한남동 총장공관으로 병력을 출동시킨다. 모두가 동시에 이뤄지고 있다. 정승화 체포작전을 위해 제일 중요한 지휘관들은 연희동 요정에 묶어 두고 전두환은 裁可 받으러 총리 공관에 가 있다. 그런데 계엄 사령관 겸 육군총장을 체포하겠다고 하는 데 전두환이 덜렁 덜렁 혼자 온 거다. 이렇게 중대한 사안이면은 당연히 국방부 장관을 대동하고 와서 허락을 받아야 되는 게 아니냐. 전두환은 裁可가 쉽게 이루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최규하를 고무도장이라고 생각한 거다. 재가가 되지 않아서 사건이 삐걱거리기 시작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이 가장 용감했던 하루였다. 사실은 가장 위 아래가 철저해야 하는 직장이 군대다. 근데 세상에서 제일 위 아래 없는 사람들이 군대에 가서 저 난리를 쳐 가지고 군대라는 조직을 반란군 조직으로 바꾸어 버렸다. 정말 一絲不亂했다. 이거는 양동작전도 아니고 삼동작전, 사동작전인데 전두환에게 거역할 사람은 요정에다 묶어 놓고 정 총장 체포 하라고 병력 투입시키고 자기는 최규하 한테 허락 받으러 가구, 진짜 치밀하고 계획적이었다. 나머지는 경복궁에서 대기하고 (반란군 지휘소), 이 사건을 저초한 건 어떻게 보면 최규하 대통령이다.
⑥ 대통령 裁可가 떨어지지 않았는 데 계엄사령관이 7시간 이상 체포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부끄럽다, 부끄럽다.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간 정승화 총장은 잡혀가서 조사실에 가서 옷 벗기고 이루 말 할 수없는 모욕과 수치를 당하였다. 반란군을 진압하려고 휘하를 모우는데 그 사람들이 반란군이었다. 그 황당함~ 분노~ 배신감~ 이루 말 할 수 없다. 배신감은 말도 못한다. 그 때가 밤 촬영 기억이 나는데 경복궁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데 최후 연설을 한다. 이 장태완이와 같이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동조하겠습니까 하니까 네~ 고맙소 고맙소, 일일이 악수를 하고 그런데 참모가 딱 가로 막고 사령관님 고정하십시오. 저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을 데리고 死地로 끌고 가실 겁니까. 가면 銃擊戰이니까 죽는다. 반란군 진압을 위해 부하들의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상황, 막 말리는 거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거기서 장 장군은 막 짐승 소리를 낸다. 어쩔 도리가 없었던 장태완 사령관, 탱크를 발로 막 차고 지금도 내가 생각하면 그 감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내 휘하 장병들의 목숨을 희생시켜야 되니까. 그러니 갈 수도 없고 안 갈수도 없고 탱크를 발로 차고 음~음~속절 없이 지켜볼 수 밖에 없던 장태완 장군의 울분, 진압군과 반란군의 대결이지만 사실 우리 모두 다 같은 국군이다. 이게 무슨 비극이냐. 12.12 반란군이 수경사령관을 체포하고 난 다음에 뒤를 캤다. 아무리 캐도 어떤 돈과 관련되었거나 여자 문제나 비리도 발견하지 못했다. 1979년 12월 12일 당시 대한민국 육군 주요직위체계도는 아래와 같다. 대통령 최규하-국방장관 노재현-참모총장 정승화-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국방장관 노재현-군수차관보 유학성 중장/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1군단장 황영시 중장/9사단장 노태우 소장,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71방위사단장 백운택 준장,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30단 장세동 대령/방공포병단 황동환 대령, 33단 김진영 대령/헌병단 조홍 대령,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1공수여단 박희도 준장/3공수여단 최세창 준장/5공수여단 장기오 준장/9공수여단 윤홍기 준장, 군최고통수권자 대통령이다.
⑦ 장태완 장군이 이끄는 수도경비사령부가 있다. 수경사 30경비단장이 장세동 대령, 그리고 33경비단 김진영 대령, 문민정부 하나회 척결 때 육군참모총장이었다. 그리고 정병주 소장이 이끄는 육군 특전사령부 아래 1공수, 3공수, 5공수, 9공수여단이 있다. 여기서 이 안에서 12.12 군사반란에 참여했던 지휘관들은 1공수여단 박희도, 최세창, 김진영, 장세동, 조홍, 황영시, 노태우 이 아래 1군단장 수도군단장 그리고 9사단장 노태우 소장 그리고 71방위사단장 또 사령관은 막으려고 했지만 그 아래 핵심 예하부대 지휘관들이 다 하나회 였다. 그리고 특수전 사령부 정병주 사령관 예하 부대도 1공수 3공수 5공수 여단장이 12.12 군사반란에 참여했다. 손발이 다 넘어갔다. 브레인들만 위에 그냥 있고 나머지는 이미 싹 돌아선 거다. 장태완 사령관이 쓴 “12.12 쿠데타와 나” 라는 회고록이 있다. 책 속에 보면, 전두환 소장이 보안사령관으로 영전이 되면서 주변에 하나회 회원들을 수도권 주변에 모아서 집중 관리를 했다, 나중에 12.12 쿠데타 일어날 때 그때 결정적으로 합세를 하였다. 그때 장세동하고 김진영은 이미 경복궁에 들어가 있고~군사반란 주요 지휘관들은 5공화국 전두환 정부와 6공화국 노태우 정부 때 다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박희도와 김진영은 참모총장 지내고, 장세동은 국정원장 지내고,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났던 그 당시 핵심병력은 수경사 30경비단 장세동 대령이 서울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서쪽으로 가면 1공수여단 5공수여단은 김포와 인천 부근에 자리잡고 있다. 3공수여단은 남한산성 쪽에 있다. 그러니까 서울을 향해 포위를 해서 진격을 하는 거다. 또 30사단은 바로 행주대교 쪽 서울 바로 서쪽이다. 그리고 노태우 소장이 이끄는 9사단이 서부전선 최전방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서울로 내려오면 안 되었다. 2기갑여단장도 하나회 출신이었다. 2기갑여단의 1개 전차대대도 내려오고 공수여단들도 다 서울로 서울로 모여들었다.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이 되면서부터 하나회 멤버들을 다 요소요소에 자리를 잡게 하고 작전 개시 직후부터 그들은 뭉쳐서 서울, 아니 대한민국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⑧ 1979년 12월 12일 밤 11시 15분 제3공수 특전여단이 은밀한 작전에 돌입했다. 최세창 여단장의 지시로 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작전에 나선 것이다. 사령관 집무실에 난입한 반란군들, 김오랑 소령/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그리고 시작된 총격~사령관을 지키던 김오랑 소령은 반란군의 총을 맞고 숨을 거둔다. 정병주 사령관 역시 총격에 부상을 입고 부하의 손에 체포되고 만다. 작전을 이끈 사람은 제3공수 특전여단 15대대장 박종규 중령이다. 이들은 상관이 아닌 반란군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특전사 뿐만이 아니었다. 9사단장 노태우는 휘하의 1개 연대를 빼내 서울 시내로 출동시켰다. 30대가 넘는 탱크까지 동원된 반란, 그러나 출동 사실은 철저히 숨겼다. 10.26 사태 이후 북한의 무력도발이 우려되던 시기, 반란을 위해 핵심병력까지 동원한 것이다. 진짜 말도 안 되는 대혼란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서울 진격작전처럼 지금 다 서울 중심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마음이 아픈 건 같은 나라 군인끼리 지금 이러고 있다. 육군분부에서도 반란군을 진압해서 정승화 장군을 구출하라고 수도 기계화 사단이나 26사단에 출동명령을 내렸지만 출동하지 않았다. 반대로 반란군들은 출동을 하였다. 왜 그랬느냐 정승화 총장 보다는 하나회에 포섭되어 있는 각 사단의 영관급들이 많았다. 수도권 연대장, 사단 참모장, 주요 참모들이 대부분 하나회 출신이었다. 그래서 미국측 보도에 1979년 12월 12일은 대령들의 밤이었다. 대부분의 영관급들이 주요한 자리에서 하나회에 포섭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경사령관, 특전사령관이 다 자기 부하들에게 당하게 되었다. 장태완 사령관을 체포해 간 사람은 자기 부하인 조홍 헌병단장이다. 그는 이후 굉장히 계급이 올라갔다. 가장 말이 안 되는 것은 전방을 지키고 있던 노태우가 9사단에서 일개 예비연대를 서울로 빼돌린 사건이었다.
⑨ 장태완 사령관이 청문회에서 증언하였다. 노태우 9사단이 어떻게 서울로 왔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돼! 군인으로서 저지를 수 없는 일이다. 최전방에 있는 부대를 빼 내었으니 전방에 구멍이 뻥 뚫린 거다. 9사단이 지키고 있는 지역이 서울의 머리 꼭대기다. 이걸 문을 열어주면 북한에서 최단 거리로 밀고 내려온다. 나중에 위컴 미8군 사령관이 불같이 화를 냈다. 12.12 군사반란의 가장 큰 포인트 중의 하나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건 미군의 작전 통제권 하에 있는 연합군 사령관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는 노태우 전방 9사단이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예비 1개연대를 빼서 쿠데타에 가담시켜서 서울로 진격을 하게 한 거다. 안보를 담보로 미군이 한국을 지켜주니까 군대를 출동시킨 건 정권탈취행위였고 미국이 볼 때는 미국과 맺은 국가간의 약속을 위배한 것이었고 잘못하면 한미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이 위컴 사령관과 회고록을 냈다. 근데 여기에 보면 제일 중요한 건 뭐냐 첫번째는 아군끼리 총격을 하면 안 된다, 두번째는 쿠데타 진압에 미군이 나서서 하면 안 된다, 왜냐면 이미 61년도에 매그루더 미8군 사령관이 박정희 쿠데타 진압하려다가 실패했다. 차라리 말을 안 했으면 모르겠는데 진압하겠다고 했지만 진압을 못해서 위신이 추락했다. 그러니까 글라이스틴과 위컴도 5.16의 교훈을 알고 있었다. 세번째 선택지는 이 군사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군부가 현실적으로 한국의 핵심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면 이들이 합법적으로 정치체제를 따르도록 이끄는 게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게 미국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⑩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서 서울 중심부에 위치했던 중앙청이나 육본이 순식간에 접수가 된다. 장태완 장군의 백여 명의 병력도 사실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장 사령관도 역시 마찬가지로 정 총장을 따라서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이 된다. 탱크를 발로 찼을 때 심정이 꼭 그랬다. 저 반란군들을 보고만 있고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그 심정이 통탄스러워 미쳐서 짐승 소리를 내는 것이다. 정승화 체포가 목표였다면 죄목을 만들어서 체포만 하지 이렇게 군사반란까지 일으켰어야 했나, 정승화 총장은 본인이 궁정동 안가에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직접 10.26 사건 조사를 받겠다고 자청을 했다. 그렇지만 전두환은 그런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지속적으로 정승화 총장이 대통령 시해와 관련이 있다라고 루머나 그런 인상을 계속 풍겼다. 정승화 총장을 이 사건에 엮어서 군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사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권력을 어떻게 하면 내가 가질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을 내가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런 자리에 내가 있다. 결국 박정희 정부 시절에 정치군인으로 성장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당시 12.12 쿠데타 때 주한미국 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이 전두환을 이렇게 묘사했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제자이자 아들이다” 전두환이 5.16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다음에 운명이 바뀌었다. 61년에 쿠데타가 났을 때 미8군 사령관이던 매그루더는 진압하라고 했다. 그런데 실패해 큰 분노를 느꼈다.
⑪ 이 때 전두환이 대위로 서울대 ROTC 교관이었다. 이 전두환이 육사생도 그리고 졸업생 한 천명 다 동원해서 박정희 지지 시가행진을 시킨다. 동대문에서 남대문 동화백화점 반도호텔 시청 광장에 도착했는데 시민들이 환호를 하고 박수를 치는 거다. 미8군이나 대사관에선 이걸 보고서 국민들이 박수를 치니까 이제 민심이 돌아섰다 라고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사실은 육사생도의 시위행렬이 없었다고 한다면 박정희의 5.16 쿠데타가 안착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전두환에게 일을 시키지도 않았는데 해내니 얼마나 예뼜을까. 포상이라도 주고 싶었다. 아낄만도 하다. 전두환은 5.16 쿠데타 후에 바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민원비서관이 된다. 이게 대령급 자리였다. 1963년 민정이양 당시에 박의장은 전두환 대위를 불러서 자네 국회의원에 나가 보게. 그렇게 권했다. 그런데 전두환이 이렇게 답했다. 각하, 군대에도 각하께 충성하는 사람이 있어야 돼지 않겠습니까. 거절하니까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박정희는 그후로 청와대에 일년에 한 두 차례 불러서 육영수 여사와 함께 칼국수나 면을 먹고 식사를 할 정도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그 다음에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으로 갔다. 그 다음에 지금 반란이 일어난 수경사 30경비단장으로 근무를 했다.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지냈고 보안사령관을 지냈다. 그러니 권력의 중심에서 권력이 어떻게 유지되고 작동이 되는지 그걸 어떻게 잡아야 되는지를 알았다. 한 마디로 5.16을 복습했다고 이해하면 된다.
⑫ 全斗煥의 출발이 5.16이기 때문에 5.16부터 10.26까지 18년에 거친 모든 정치과정에서 노하우를 배웠다. 준비하고 기다리면 기회는 온다의 나쁜 例 같다. 전두환이라고 하는 인물이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다. 박정희 라는 그늘 속에서 계속 성장하고 있었다. 본인의 이야기로 정치라는 것은 힘있는 사람이 마음대로 하는 게 정치다. 정치를 그렇게 정의하는 사람은 없다. 전두환은 어떤 사람이기에 박정희의 아들이라는 평가를 받는지 살펴보자. 1951년에 육사 11기로 입교했다. 육사 11기라고 하는 게 다른 이름이 있다. 본인들은 졸업할 때 자신들이 正規陸士 1기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6.25 한국전쟁 시기 임관한 1기부터 10기까지 훈련기간은 몇 주에서 몇 개월뿐이 안 되었다. 그런데 육시 11기는 미국의 웨스트포인트를 본따서 4년제 正規科程을 마쳤다. 본인들이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가 입학할 때는 서울대 보다 나았다. 이 사람들은 군내에서 엘리트주의 순혈주의 우리는 선배들이랑 다르다. 선배 그룹이든 지도부든 반감을 가지고 쳐다 봤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全斗煥을 대표하는 게 육사내의 私組織으로 알려진 하나회였다. 박정희를 태양으로 받드는 하나회가 사실은 박정희로 볼 때는 자신의 지지기반에 適格이었다고 볼 수 있다.
⑬ 한 기수에 말 잘 듣고 태양 하나만 바라보는 친구 누구 없나 딱 바라봐서 경상도 출신 한 열 명을 뽑는다. 열 명을 뽑아서 하나회 선배가 앉아있다가 어디로 전출가거나 아니면 내가 승진을 하거나 하면 이게 요직이다. 요직을 그대로 하나회 회원에게 물려준다. 이려면 어떻게 되냐면 이 점들이 계속 넓어진다. 군을 다 장악하게 된다. 전혀 모르는 아래 장교가 와 가지고 형님으로 부르면 느낌이 아~ 너구나 하나회구나. 이런 식으로 자기들끼리 光을 잡는게 있었다. 1979.12.14. 국군보안사령부, 12.12 성공을 자축하는 핵심 멤버들, 샴페인 터뜨리고~ 연예인들이 와서 노래 부르고~ 춤추고~얼마나 신났겠나, 참석자들의 잔을 직접 채워주는 전두환, 총장체포 어려운 일을 우리가 해냈다. 이제 이들의 관심사는 論功行賞, 일반 시민들이 저거 쿠데타 反亂軍들이라고 생각한 건 언제였나. 그 당시는 12.12 사건을 反亂軍이라고 얘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1980년도는 체계적인 보도가 어려웠던 시대, 12.12가 났을 때도 한강 다리가 통제됐다. 이런 정도만 알았다, 12.12. 그건 나중에 알았다 우리는 몰랐다. 12.12 쿠데타로 전두환 신군부는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바로 가라 치운다. 그리고 며칠 내에 장성 40명을 예편시켰다. 그 빈 자리를 하나회 출신들이 꿰어찼다. 생일집 잔치 주역들, 慰勞파티 1980.1.23, 10.26 사건 이후 3개월 만에 권력의 중심에 선 전두환, 그러나 자신의 권력욕은 부인, 보안사령관이 한국의 실권자라느니 여러가지 유언비어가 아직도 내용을 잘 모르는 우리 국민들간에 오고 가고 있다.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많은 불순세력이 우리 한국에 숨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불순세력으로 인한 유언비어가 계속 이것이 확대되어 나간다든지 하게 되면 이것은 역시 혼란을 조성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기 때문에 유언비어를 방지하는 데 노력해 주시기를 당부한다.
-1980.4, 중앙정보부장 서리
-1980.5,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1980.8, 제11대 대한민국 대통령
⑭ 12.12 쿠데타가 일어나고난 후 8개월만에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게 되고 전두환이 1980년 8월에 장충체육관 선거를 통해서 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권력은 1988년 2월 노태우로 이어졌다. 쿠데타에 참가했던 다른 장성들도 다 요직을 차지했다. 육군총장-장관-안기부장-국회의원 등 우리가 알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 올랐다. 반면 정승화 총장은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서 물고문 당하고 빳다 맞고 7년 형 선고 받고 2등병으로 예편되어서 연금도 못 받게 된다. 이등병으로 강등되면 못 받는다. 물고문 당한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장성이었던 사람이 고문실에 끌려 들어가서 옷 벗어! 그러면 벗어야 되고 그 수모를 당했다. 수모 자체가 고문이다. 내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내란죄를 묻는 말도 안 되는 세상이 지금 벌어진 거였다. 賊反荷杖이다. 전두환이라는 사람이 권력을 장악하기 참 좋은 환경이었다. 법체계가 유신체제이니까 국민들의 지지가 필요없다. 힘만 있으면 체육관에서 얼마든지 대통령이 될 수 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부터 1980년 8.27까지 무려 8개월이 걸렸다. 이 8개월을 역사에서 가장 긴 쿠데타라고 한다. 그 사이 전두환이 어떻게 했느냐 1980년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한다. 군의 명령 체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중정 한 해 예산이 1000억이었다. 전두환이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중정부장 서리가 되어서 대통령이 되기 위한 준비작업을 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미8군 사령관, 주한미대사, CIA 한국지부장을 만나서 계속 미국의 승인을 받을려고 했다. 미국이 쉽게 승인할 수 없었다. 종당에는 어떻게 했느냐 미대사, 미8군 사령관을 만나는 행위 자체가 미국이 12.12를 승인했다 혹은 전두환의 실권을 인정한 것 처럼 언론 플레이를 하였다. 미국, 전두환 지지 주장 제기/LA타임즈 1980.8.8. 왜냐 언론이 신군부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 그래서 존 위컴이 이렇게 말했다. “전두환은 마치 왕으로 태어난 것처럼 행동했다. 권력을 누리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전두환의 인상은 무자비할 정도로 야심에 차 있었고 용의주도하며 원기왕성했다” 이러한 전두환을 보고서 글라이스틴 주한미국 대사는 회고록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전두환을 묘사할 때 교활한 cunningly, 전두환은 교활하게 정권을 잡았다. 왜냐하면 권력을 손에 넣을 때까지 마치 권력에 대한 야심이 없는 것처럼 언어와 행동을 했지만 실제로 보이는 태도는 이미 권좌에 오른 사람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었다.
⑮ 12.12 군사반란은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한테는 찬란한 미래를 열어준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그 반대측에서 군인답게 살려고 했던 사람들에게는 비극 그 자체였다. 전두환 사령관이 여의도 요정에 발을 묶었던 세 사람,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 사령관, 김진기 헌병감, 이분들은 모두 보안사에 끌려가서 고초를 당했다. 이듬해인 1980년에 강제예편된다. 장태완 사령관은 이렇게 썼다. 제일 치욕스러운 건 직속 부하들에게 배신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당한 것은 그래도 낫다. 더 화가 나는 건 중간에 결단을 못 내리고 왔다 갔다 한 육군본부의 수뇌부들이었다. 장태완 사령관이 의자를 박차고 나갔다. 정말 이러고들 있을 겁니까!? 反亂軍은 경복궁에 똘똘 뭉쳐 있는 데 陸軍本部는 자기 주장을 못 내고 어영 부영 하면서 결론을 못 내리고 서로 눈치만 본다. 12.12 군사반란 때 총상을 입고 부하들에게 체포된 정병주 특전 사령관은 비극적이었다. 1988년에 경기도 야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유서가 없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타살을 주장했지만 사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전 사령관 비서실장 이었던 김오랑 소령은 사령관을 지키려다 결국 반란군의 총에 맞아 사살되었다. 반대로 박윤관 일병은 참모총장 공관에 출동해서 아군끼리 총격전에서 총에 맞고 사망한다. 비극적인 모습이다. 박 일병은 상관의 명령에 띠를 수 밖에 없는데~ 평생을 반란군으로 남는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귀한 아들 형제들인데 그들의 죽음이 안타깝다. 국방부 정선엽 병장은 제대하기 3개월 전에 일을 당했다. 그의 형이 그때 분노와 충격으로 종교에 입문해서 지금은 해외 선교사를 하고 있다. 故정선엽 병장은 그 사건 당시에 반란군들 적이었다. 그래서 국립묘지에 안장이 안 된다고 그랬다. 명령에 따랐을 뿐인데 그렇게 까지 할 게 있느냐 안장은 결국엔 43만에 됐다. 1979.12.13. 00시 05분, 1공수여단 출동, 이들의 공격목표는 용산 국방부,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반란군의 총탄에 쓰러진 정선엽 병장, 육군 병장 정선엽의 묘, 떠난 지 43년, 아직도 생생한 그날의 기억 12월 13일 오전 택시기사가 어젯밤에 대단한 총격전이 저기 국방부에서 있었다고 했다. 국방부로 가서 면회 신청을 했다. 면회가 안 된다, 끝내 싸늘한 주검으로 만나게 된 동생, 1979년 12월 13일 수도통합병원에서 순직,
전사 확인서
정귀상 귀하
소속: 국군수도병원
계급: 병장
군번:
생년월일: 56.06.21.
주소: 서울특별시
위 고인은 1977년 07월 05일 입대해서 국군수도병원 소속으로 전투중 1979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전사하였음을 통지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국가 유공자 및 보훈보상 대상자 해당여부는 별도 법률에 의거 국가보훈처 보훈심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결정되므로, 본 확인서 와는 별개 사항임을 알려 드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가까운 보훈(지)청으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2022년 12월 07일
육군참모총장
43만에 되찾은 동생의 명예, 하지만 끝내 받지 못한 사죄, 용서할 준비가 사실 개인적으로는 돼 있었다. 그런데 용서라는 것이 잘못한 사람이 사죄해야 성립이 된다. 全斗煥은 재판에서 판결이 다 났음에도 불구하고 사과 한 마디 없이 세상을 떠났다.
ⓐ 그나마 다행인 게 전두환은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했다. 그래도 정선엽 兵長은 國立墓地에 묻힐 수 있어서 누가 진짜 군인인지 증명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양성한 精銳將校集團이 軍事反亂과 下剋上을 벌였다. 특전사는 북한의 인민무력성이 아니라 대한민국 육군본부를 공격했다. 전방을 지키던 9사단은 전방을 지킨 게 아니라 서울로 진주했다. 국가와 국민의 군대가 아니라 마치 군대가 私兵集團으로 드러났다. 안보라는 명분과 군인이라는 自矜心이 사라진 恥辱의 날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反逆의 날을 명백하게 보여줌으로써 사실은 역설적이고 비극적으로 한국 현대사가 民主主義로 民主化 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 序幕을 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