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좋은 날 / 황선영
강씨 네 자매가 수년만에 한자리에 있다. 한국 병원 5층 병동. 2인실을 며칠 째 독방으로 쓴다. 병원에 온 날부터 작정을 한 건지 약 기운인지 주무시기만 한다. 깬 것 같은데 눈을 뜨지 않는다. 싸우기 좋은 판이다. 90 넘은 노인한테 무슨 새록새록한 생명력을 기대한다고. 병 원인을 두고 책임 공방에 열을 내고 있다. 당뇨 합병증으로 여기저기 망가졌는데 누구도 당뇨가 있는 줄 몰랐다. 몇 달 전 검사에서 별 이상이 없었다. 큰언니가 정성으로 돌보지 않아서 그렇다고 쏘아붙이면 일 년에 몇 번이나 얼굴 비췄냐고 응수했다. 이 볼썽사나운 싸움은 이유가 있다. 돈. 긴병이 될지 모르기에 병원비와 앞으로 들어갈 비용을 누구에게 더 크게 지울지 판가름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힘이 센 것은 돈이구나. 사는 것에 넌더리가 난다. 그렇다고 내 것을 내놓을 맘은 없으니 나도 별수 없는 인간이다.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할머니가 쇠약해지는 데 보탠 것이 많다. 말 안 듣던 사춘기 시절이 스쳐간다. 불똥이 나한테까지 튀면 어쩌나. 부디 우리 엄마가 승리를 거둬주길.
"언니가 물려받았으니까, 언니가 다 해." 뭐? 물려받아? 치열한 싸움 소리가 멀리 사라진다. 뭣을 받았을까? 너무 궁금하다.
엄마가 땅 지번이 적힌 종이를 주더니 시세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란다. 공시 지가 알려주는 사이트에 들어가 봤다. 평당 만 원도 안 되는 작은 밭이다. 부동산에 전화해 실거래가를 물었다. 뭐 가격이야 내놓는 사람 마음이지만, 어떤 값이든 아무도 안 살 거란다.
미동도 않고 누워있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온다. 진이 다 빠져 차갑고 쭈글쭈글하다. 누가 속의 것을 다 빼 먹은 것 같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져 누구도 갖기 싫은 몸. 싱싱하고 물기 가득했을 땐 사랑받았겠지? 키워 준 은혜가 떠올라 내 집으로 모셔갈까 하는 생각이 잠깐 머물렀으나 이내 버렸다. 다른 걱정보다 할머니 밑을 볼 자신이 없다.
딱 한 달 병원에 있다 가셨다. 누구의 돈도 축내지 않고 말이다. 조금 울었다. 깔끔하게 끝내준 게 고마워서. 하나도 슬프지 않은 것이 슬퍼서.
텔레비전 리모컨을 손에 쥐고 잠과 싸우고 있다. 더 보고 싶은데 졸린다. 휴대폰 시간이 끝났는지 아이들이 하나 둘 내 옆으로 온다. 팔, 다리 하나씩 차지하고 몸을 기댄다. 리모컨을 빼 가려고 작은놈이 검지를 입술에 대고 '쉿' 한다. 나머지는 입을 틀어막고 웃는다. 자기들 좋아하는 채널로 바꾸고 간식거리도 내온다. 실눈으로 보니 무척 행복해 보인다. 지금 죽어도 괜찮을 것 같다. 모두 나를 사랑할 때. 그러면 다들 슬퍼서 울겠지?
첫댓글 역시 기대를 져버리시지 않는군요. 할머니도 하늘나라에서 흐믓하게 황선생님 보고 계실거예요.
지금 죽다니요.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꺼내면 안되지요. 토끼 같은 아이 넷은 어쩌라고.
말이 씨 된다고합니다.
죽는다는 말은 거두워주세요.
우와! 정말 글 좋으네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긴병에 효자없다는 말이 괜히 생겼겠어요? 부모의 와병에 마음아프면서도 뒷일을 생각하며 이기적이 되더라고요. 보살피는 것을 숙제처럼 여길 때도 많았고요. 잘 읽었습니다.
하하. 죽다니요?
엄마는 자식들의 권력인걸요.
오래오래 제 자리를 지켜 주셔야죠.
역시 글 재밌습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도 이렇게 재미있게 풀어내시는군요. 강렬합니다.
죽기 좋은 날? 그런 날이 있으면 좋겠네요.
행복한 시간 만끽하길 바랍니다.
죽기 좋은 날이란 가장 행복한 때를 말하는 거지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어.'라고 말하는 날이 더 많아지길 바라요.
가감없이 심중을 드러내셨내요. 그래요. 요양원이다, 병원이다하면 먼저 경비부터
계산을 때려요. 그게 현실이다라고 말하기엔 잔인한 것 같고요. 할머니를 그리는 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행간을 읽습니다.
드라마 보는 것 같습니다.
슬픈 얘기도 재밌게 풀어내시는 재능, 대단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