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천국인 것을 / 이임순
깃털인 양 내 몸이 가볍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근심 덩어리가 없어지니 세상 살맛 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활기차고 반짝거린다. 천국에 온 기분이다.
올해 2월부터 큰 바위에 눌려있는 기분으로 지냈다. 그래서 좋은 일이 있어도 반가운 사람을 만나도 표정이 굳었고 ‘어떻게 하지?’ 걱정만 되었다. 근심이 앞서니 만사에 의욕도 없었다. 새침해 있으니 주위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아니라고 하면서 속내를 털어놓지 못했다. 자신의 틀에만 갇혀 있었다.
24년 4월 29일, 전남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광양총동문 회장배 골프대회가 있는 날이다. 골프를 하지 않은 내가 대회장이다. 골프장 근처에도 가본 적 없고 대학교 때 한 강좌 배운 것이 전부다. 강의실과 연습실에서 기본강의를 들은 다음 골프채 잡는 법과 스윙할 때의 자세 등을 익혔고 필드는 가지도 않았다. 이런 내가 골프대회를 치러야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회를 앞두고 몇 차례 임원 회의를 했다. 그런데 우연치고는 너무 악조건이다. 함께 일을 맡은 사람 여섯 명 중 네 명이 공교롭게도 골프에 문외한이다. 그러니 골프위원장과 의전국장에게 모든 진행 상황을 위임하고 곁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 알아야 도움을 주고 챙길 것도 있으련만 니어리스트니 롱기스트니 하며 확인을 해도 닭 지붕 쳐다보듯 앉아 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일이 진행되는 동안 귀동냥이라도 하며 명단을 살펴보고 참가비를 확인하며 나름대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데 걸림돌이 있다.
후원금을 받는 일이다. 대회는 참가비와 후원금으로 치른다. 일찌감치 감투 값으로 2백만 원을 내놓았다. 더러 내 눈치를 살핀다. 얼마나 해야 하는지 고민인 모양이다. 직접 묻기도 한다.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정도에서 형편대로 하면 된다고 했다. 그런 말을 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목표한 액수를 모아야 하는데 이 불경기에 후원금을 해야 하는 원우들의 심정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은 답답했다.
실무진은 정색을 하고 말을 못 하니 후원금이 들어오는 족족 임원 카톡에 올린다. 무언의 압박이다. 그것을 읽는 내 마음도 편할 리가 없다. 그래도 고문과 임원의 입금액을 확인하고 누계를 계산한다.
연일 회장을 승낙한 것이 돌로 발등을 찍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주위에서 추천하고 권했어도 더 단호하게 거절해야 했다. 전례를 들어가며 여자가 한 일이 없다고 해도 그러니까 우리 기수에서 한번 해 보자고 이구동성으로 옥죄었다. 그럴수록 내 거절 의사를 완강하게 밝혔다. 혼연일체가 되어 도울 것이니 봉사하는 뜻으로 하자고 했다. 투표로 결정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한 가닥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웬걸, 더는 물러설 자리가 없다. 대신 단단히 약속을 받았다. 허나 약속은 약속일 뿐 모든 일은 내 몫이고 책임이 따른다.
팔을 걷어부쳤다. 전체 참가자와 대회 입상자 선물은 무엇이 좋으며 얼마만큼 지출할 것인지 의논한다. 입상에 관련된 것은 작년 기준으로 하면 좋겠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참가자 전원에게 줄 선물은 의견이 분분하다. 푸지게 주려니 예산 초과고 형편에 맞추자니 볼품없다. 최종적으로 골프공 한 묶음과 두 개가 든 수건 한 셋트와 양말 두 켤레로 정하고 추첨인 행운상에 비중을 두었다. 전체 참가자가 한 점 이상은 기본이고 운이 좋은 절반 정도는 두 점을 가질 수 있도록 준비했다.
책자를 인쇄해야 하는데 후원금이 마무리되지 않았다. 다른 일은 의논해도 이것만큼은 회장과 골프위원장의 몫이다. 염치불구하고 전화를 돌렸다. 신분을 밝히고 전화한 취지를 말했다. 고문은 본인들도 겪은 일이라 고생한다고 격려하며 흔쾌히 입금하겠다고 한다. 각 기수 회장인 부회장들도 십시일반으로 보태겠다고 하는데 문제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각종 위원이다. 경기가 안 좋다, 마음은 하고 싶은데 여건이 안 된다고 꽁무니를 뺀다. 자존심이 곤두박질친다. 이럴 줄 모르고 회장 승낙을 했느냐는 자학이 저절로 나온다. 더는 미룰 수 없는 시점이다. 일단 접수된 것으로 마무리를 짓고 차후에 들어온 것은 당일 구두로 전하기로 하고 일단락 짓는다.
처음 계획은 스무 팀이었다. 참가자는 각 기수 회장의 성의에 비례한다. 독려하면서 단합 차원에서 함께하는 데 의미가 있다며 참가를 유도한다. 의외로 반응이 좋아 목표량 초과다. 게스트도 세 팀을 확보해 두었다. 그런데 대회가 가까워질수록 불참을 알려온다. 세상사 피치 못할 사정도 있기 마련이다. 최종적으로 열여덟 팀으로 조를 편성했다. 한데 또 통보가 온다. 기가 막히면 웃음이 난다는 말이 실감 난다. 골프위원장으로부터 열일곱 팀이라는 연락이 왔다. 작년보다 한팀이 많은 것을 위안 삼는다.
일기예보에 대회 당일 비가 온다고 나왔다. 강수량은 많지 않으니 날짜까지 바꿀 정도는 아니다. 밤 열 시가 넘어 빗방울이 떨어진다. 밤새 들락거리며 비가 얼마나 오는지 살폈다. 제법 쏟아진다. 비가 와도 진행한다고 미리 공지는 하였으나 저 비를 맞고 어떻게 공을 칠까 심히 걱정이다. 대회 당일 열 시, 집행부 약속 시간은 다가오는데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다. 동문들의 표정이 굳어진다. 현장에서 긴급회의를 한다. 잠정연기와 강행 중에서 후자로 결정하고 문자 메시지를 발송한다. 문의가 빗발친다. 현장에는 비가 소강상태라고 문자 메시지를 재발송한다. 초조한 마음은 감추고 참가자 상품을 진열하며 접수대를 꾸린다. 가뭄에 콩나 듯 입장하는 동문들을 맞이한다. 광양에는 비가 억수로 쏟아진다는 전갈이다. 현장에는 안개가 걷히는 중이라고 답신을 보낸다. 던져진 주사위를 거둘 수 없다. 속속들이 들어서는 표정이 날씨보다 밝다. 우여곡절 끝에 시타를 한다. 행사는 날씨가 반 부조를 한다는데 그 행운마저 없다. 집행부의 시름은 여기까지고 필드에서 즐기는 것은 동문들의 몫이다. 시상식장을 꾸민다. 진행순서에 맞게 상품을 진열하고 점검을 거듭한다. 준비할 때의 우중충한 기분과 달리 꾸며진 장내는 근사하다. 채곡히 쌓인 행운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달아오른다.
식장으로 입장하는 동문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밝다. 식이 시작되고 행운권 추첨이 이어진다. 평생 처음 당첨되었다는 동문의 푸진 입담이 그동안의 시름을 거둔다. 추첨이 이어질수록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지고 굳었던 표정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뀐다. 날씨 때문에 조였던 마음을 쏟아지는 웃음으로 푼다. 행운권 대상의 추첨시간이다. 추천함을 흔들고 손을 뻗어 보여준 다음 깊숙한 곳에서 한 장을 꺼낸다. 모두의 반짝거리는 시선이 내게로 모아진다. 순간 그간에 했던 모든 걱정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대회를 준비하면서 같이 고생하는 임원에게 대회장으로 두 가지를 당부했다. “회장이 여자라서 진행이 미흡하고, 골프를 하지 않은 사람이 회장이라 부족한 점이 있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한 일은 후원금 받는 것과 고생한다고 격려한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하루에도 수십 번 지옥을 오갔다.
대회 전날 최종 점검하면서 나름대로 노력한 것을 이야기하는데 울컥했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 대회를 무사히 마쳤다. 고생해 준 임원들이 고맙기 그지없다. 마음고생은 했으나 보람은 있다. 하루를 무사히 마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비로소 깨닫는다. 친구들이 허리며 무릎, 어깨 통증이 심하다고 하는데 아직은 건강하다. 천국이 별천지에 있는 줄 알았다. 귀한 것을 옆에 두고도 몰랐으니 멋모르고 살았다. 걱정 없이 생활하는 내 일상이 천국인 것을 어리석게도 오늘에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