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고,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가르침을 실천할 때만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의 가르침 또한, 진리의 이해 없이 말 그대로 원수를 사랑하기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의 지각을 떠난, 그 지각을 나투게 한 본질적 측면에서 본다면, 모든 게 이해가 가면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게 하나인 영의 실재세상에서 스스로 지각의 허상 세상을 만들고, 분리의 경계로 몸들을 만들어 그 중 하나의 몸이 내 정체라 착각을 하도록 한 것 뿐이니, 그들의 본래는 곧 나 자신이다.
이 분리의 몸은 나는 항상 옳고 다른 사람들은 틀렸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졌기에, 모든 삶의 부정성은 거의 남의 탓으로만 돌리고 비난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씨스템에서 어떻게 평화가 존재할 수 있을까?
본질의 이해 없이 사람이 태어난 그대로 살게 되면 계속 공격과 방어의 싸움만 영원히 지속될 뿐이고, 진리적 원리를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평화는 잠시의 짝퉁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런 세상은 허상일 뿐이라서 결코 실제로 일어난 적이 없으니, 모든걸 이해하고 용서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 원수라 생각되는 몸의 허상 너머 그의 본래모습은 나와 하나이며, 모두 그리스도이자 부처인 것이기에, 원수를 사랑하라란 뜻은 실재하지 않는 몸을 보지 말고, 그의 가슴속에 영원히 존재하는 본성을 사랑하라고 해석해야 맞는 것이다.
그 본래는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글 그대로 해석해 나에게 죄진 원수를 사랑하란 개념이 아니며, 원수가 실재로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그걸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가짜인 몸을 버리면서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할 수 있었다.
원수라 생각되는 그들 모두는 우리의 구원자들이다.
그런 나에게 잘못하는 듯한, 원수같은 사람들이 없다면 어떻게 용서하고 비워서 행복해지고 다시금 천국에 들수 있겠는가!
그들은 그들의 연극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고, 원수의 본성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