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대 후량(中國史朝代)
중국역사 오대십국 오대 五代 후량(後梁)·기원전 907년ㅡ923년 중원왕조 중국역사왕조
출처:중국바이두백과 소스:이페어케이
후량(中國史朝代)
후량(907년923년)은 5대의 첫 왕조였다.907년 양왕 주윈(朱溫)이 당나라의 황제, 국호량(國號 梁)을 따서 남량(南梁소량)과 차별화하기 위해 후량(後 。)이라 칭하자 당나라가 멸망하고 중국 역사가 5대 10개국에 접어들었다.후량정두개봉(지금의 하남개봉)후량 태조인 주전충원은 황소부장으로서 황소를 도와 양경을 점령한 후 황소가 패하여 당나라에 항복하고, 선무군 절도사, 진수변주(지금의 하남성 개봉), 어문덕원년(889)에 강적 진종권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한 후, 동산동 제지를 동원하여 중원을 제패하고, 우천우원년(904) 우천우원년 우천우원년(우원)을 제패하였다.결국 천우 4년(907년) 폐당애제에 즉위해 대들보를 세웠다.주온은 건화 2년(913년) 1월 이불 주우규가 살해되자 동생 주우정에게 뒤집히면서 내란이 가라앉아 서기 923년 숙적 이존욱의 손에 죽었다.후량강역은 5대 중 가장 작았고, 북쪽으로는 황하를 경계로 동쪽으로는 바다 쪽으로, 남쪽으로는 진령 회하와 서쪽으로는 관문까지 이르렀으나, 국경은 불안정하고 전란이 빈번하였다.
약설 그림 출처: 《중국고대사 지도집》 [1]
중국어 이름 뒤에 양외문명 Later Liang별 명량 시기 범위 907~923년 도성(都城)의 주요 도시인 송주(宋州)허주(許州)진주(陳州)상주(相州)옹주(雍州) 등 주요 민족 한족 국토 면적의 약 56만 제곱킬로미터(908년)를 개척한 주온(朱溫)이다.
카테고리
1 역사
▪ 군무 기가
▪ 후량대당
▪ 부자 상잔
▪말제순국
2 정치
▪ 도성
▪ 명신
삼번왕
▪ 동성 종실
▪ 이성 번왕
4황제 가계
역사
군무가 집안을 일으켜 세우다.
후량개국의 황제는 주온으로, 그는 당 희종 건부 연간에 황소에 투신하였다.이후 대장으로 승진해 황소공략 장안에 대제정권을 세운 뒤 사방에서 공격해 오는 번진 연합군을 막아내라는 명령을 받았다.중화 2년, 전쟁이 격렬해지자 전주를 진수한 주온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적에게 투항하였다.쓰촨(四川)성에서 망명 중이던 당 희종에게 상황을 보고하자 왕중영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다"며 기뻐했다.전충(全忠)의 이름을 하사하고 김오위 대장군(金吳衛)에게 수좌하고 하중행영(河中行營) 부소수사(副 副使)를 맡겼으며, 이때부터 그는 병사를 거느리고 왕중영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늘 승리를 쟁취하였다.
중화 3년 3월, 당 희종은 주온을 다시 선무군 절도사로 임명하고, 잠시 강에 임하였다.중행영 부소사.같은 해 4월, 황소가 란관에서 군대를 이끌고 물러갔고, 주온내(朱溫內)가 1여단의 군사를 거느리고 수개월에 걸쳐 변주치소(變州治所) 개봉부(開封府, 지금의 허난 카이펑)에 이르러 선무군 절도사로 부임하였다.황소가 철수한 데 이어 중원을 휩쓴 변주, 송주, 영주, 박주 등 4주를 거친 선무진. 변주만이 구진에서 살아남았다.주온이 대들보에 도착한 후, 치내의 상황은 매우 악화되었지만, 그는 병비를 정비하고 성을 견고히 하여 정비를 하였고, 마침내 질서를 회복하여, 과실이 남아 있는 지반을 확고히 하였다.이와 함께 황소는 진주를 공격한 지 오래되어 궁실을 짓고 장기 포위공격을 준비하였고, 자사조( 刺史趙)는 헐떡거리며 구원을 요청하였고, 진왕 이극용(李克用)과 서주(徐州)가 남았을 때 푸와 주온도(朱溫都)가 응원하였다.그해 12월, 주온은 길에서 박주 녹읍의 황소수군을 물리치고 2천여 명을 참수하였다.
중화 4년 봄, 주온은 천저우의 와쯔자이 국경에 이르러, 쉬저우 진의 장전을 계약하였다.이등은 주둔하고 있던 수만 대군을 다시 격파했다.이어 주온은 천저우 치소인 화이양에 이르러 대군을 휘둘러 40여 차례 전투 끝에 성을 둘러싼 황소군을 격파했다.천저우가 포위를 풀자, 조후가 주온의 수레를 직접 맞이하였다.이때 황소부대는 진주 북부의 구양루에 집결하여 선무진(宣武鎭)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주온수(朱溫秀)는 이극용(李克用)과 시부(時府)를 통합하여 함께 황소 공격을 준비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황소는 선무진(宣武鎭)을 향해 군대를 이끌고 중모북(中母北)의 변하(變河) 왕만나루터에서 강을 건널 때 연합군이 맹공격을 가해 황소는 큰 손실을 입었고, 황소 본인은 근위(近衛)를 거느리고 허겁지겁으로 도망쳐 낭호곡의 양왕촌에 포위되어 어쩔 수 없이 자결하였다.박주는 주온의 공세에 따라 포위를 푼 뒤 주온에게 귀순했고, 황소는 장귀패, 호리, 장귀후, 갈종주 등을 내려놓고 주온마 아래 무릎을 꿇었으며 주온은 황소군에서 만나 이들을 모두 받아주는 등 훗날 주온의 달인이 됐다.
후량대당
당천우 4년 4월 18일(907년 6월 1일), 주전충폐당애제(唐愛帝)를 몰아내고 스스로 제(帝)라 칭하였으며, 국호량(國號梁)은 연호개평(年號開平)하고, 사칭은 후량후량강역은 5대 중 가장 작았고, 관할지역은 현재 허난, 산둥, 산시, 후베이, 닝샤, 산시, 장쑤, 안후이 등의 성의 일부였다.검남왕건, 회남양행밀, 진북이극용, 농서이무정, 요동유인공불봉후량(东東有由公恭)을 제외한 할거세력은 대부분 후량에게 신의를 표하고 책봉받아 영남유은수봉군왕, 호남마은수봉초왕, 민남왕은랑용야군왕, 강남전염수는 오월왕을 봉했다.
주전충이 황제가 된 후 이듬해 그의 제일 적인 이극용은 병으로 죽었다.자이가 진의 왕위를 계승하도록 격려하다.리춘푸가 즉위했을 때 루주는 이미 1년여 동안 양군의 포위 공격을 받을 정도로 위급했다.이춘욱은 양군이 장례에 급급해 방심한 틈을 타 대군을 친히 이끌고 노주를 덮쳐 양군이 노주를 포위 공격해 만든 허를 찌르고, 양군의 총수인 부도소, 양군의 대패, 사망 만 명, 식량과 무기를 버리고 산더미처럼 쌓았다.양군이 승리하면 하동의 문호를 열어 진의 주도인 태원을 공격할 수 있고, 진군이 승리하면 하동의 남경을 공고히 할 뿐 아니라 남쪽으로 빔의 지배 중심인 하남을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양진 양국 모두에 큰 관계가 되었다.주전충은 짝퉁이 깨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아자처럼 내 새끼 돼지가 개귀신처럼 태어났다"며 실색했다.아자는 이존욱의 작은 글자다.
그런 다음, 이존욱은 느슨해진 군기를 다지고 농업 생산을 발전시키며 부업을 경감하는 일에 착수했다.세금과 과부들을 우대 위무하고, 내부 질서를 안정시키며, 인재를 선발하고, 군비를 정비하여 하동 지역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이 시기 후량(後梁) 내부에는 변고가 잇따랐고, 의무절도(義武節度)는 왕을 똑바로 처하게 하였다.성덕절도사 왕용은 주전충이 사려깊게 자기와 다른 자를 없애기 위해 거병하여 반량(反 。)을 하고, 이존욱에게 달려들어 그를 맹주로 추앙하고, 함께 반량(反 。)을 하였다.주 전충은 참언을 듣고, 우국절도사 왕중사(宇國節度使)를 죽이고, 전족을 멸망시켰으며, 유지준 대장은 의구심을 품고, 급기야 동주(同州)에서 반란을 일으켜 이무정과 연합하여 주(朱)를 토벌하였다.주전충은 또 현인의 질투를 시기하여, 말 수척함을 핑계로 연거푸 전공을 세운 효장 덩지균을 죽이고, 또 군령에 거역한 죄로 대장 이중윤과 이정직, 숙장씨 숙종과 양아들 주우공까지 처형했으며, 당소종 살해에 가담한 주전충은 죄책에서 벗어나 그들을 죽였다.후량 내부의 갈등이 격화되어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개평 4년(910년) 11월, 주전충파 대장왕경인솔대군은 성덕 왕용, 의무왕 처직을 토벌하고 진왕 이존욱은 대군을 친히 이끌고 증원하였다.이듬해 백향(白鄕, 지금의 북고읍현 경내)에서 만난 양군은 후량군의 갑옷이 선명하고 금빛 찬란한 은빛 햇살을 받아 진군(進軍)이 바라보니 두려움이 많았다.진 대장 주덕위는 "양군은 변주천무군(變州天武軍)으로 모두 시정잡배들이다.진군은 투지가 앙양되고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다.주더웨이는 먼저 소부대를 파견하여 양군을 습격 교란시켰으나, 지치고 곤궁할 때 전력을 다해 출격하여 양군을 대파하고, 황야를 사체폐쇄하며, 버린 군자 기구가 부지기수이다.백향전은 양진(梁晋)의 균형이 이뤄진 전환점이었으며, 이 전투 이후 전략적 이니셔티브는 진군 쪽으로 넘어갔다.
건화 2년(912년) 유주 유수광(유인공의 아들) 진격성덕과 의무, 이존욱이 대군을 이끌고 지원하러 가다.유수광은 적수가 아닌 것을 두려워하여 주전충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주전충은 백향의 원수를 갚기 위해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공진하여 50만 대군으로 불리게 되었다.주야 겸행하여 하박(지금의 하북심주)에 이르러 5만 군사를 거느리고 수현(현경현)으로 이적하였다.당시 진군 주력이 유주를 북공격해 남쪽이 공허하고, 조주(지금의 하북 조현)의 주둔군이 소부대로 양군을 괴롭혔으며, 이존심이 수백 기병을 양군으로 위장하여 야간에 양태조의 진영을 기습하고, 거기에다 진군으로부터 석방된 양군 병사가 돌아와 이존욱이 대군을 이끌고 공격했다는 소문이 돌자 양태조는 당황하며 야영하였다.다급하여 방향을 잃어 150여 리를 잘못 갔다.하북 사람들은 양군의 잔학함에 격분하여 잇달아 농기구를 들고 양군을 습격하였다.주전충은 연거푸 패배를 당하고, 부끄러움과 분노가 뒤엉켜 변량에서 허겁지겁 도망하여 병들어 병상에 누웠다.
부자가 서로 죽이다.
주전충 건달은 출신은 성격이 거칠고 잔인하지만, 만년에는 전쟁이 불리하여 추측을 할 수 있다.기지가 날로 심해지는 것은 살육을 자행하는 것 외에 종욕선음하는 것이다.궁중 선음(宣音) 외에도, 그는 심지어 대신의 안식구를 궁중에 불러들여 간음하였다.하남 윤, 위 왕 장 전의는 5대 10국 시절의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중원 지역의 사회 생산을 회복하는 데 공헌한 바가 크다. 주전충은 해마다 정벌에 소요되는 군수물자를 전적으로 장씨의 전폭적인 지지에 의지하였는데, 이런 대공신이라도 주전충은 그 가족들을 용서하지 않았다.그는 낙양을 여행하면서 장전의 집에서 머물며 딸과 며느리를 차례로 간음했다.주 전종을 죽이려고 분개한 장전의 제자는 고난을 당하고 말렸다.특히 황음한 것은 주 전충이 며느리도 가만히 두지 않아 양자든 친자든 며느리든 일일이 시침까지 불러들여 공공연하게 선음하고 짐승같이 행한다.아들은 귀여움 때문에 부끄러운 줄 모르고 아내를 헌신했다.이들은 아내가 잠자리에 드는 틈을 타 소식을 듣고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수양아들 주우문의 처가, 미모와 영민한 외모로 주전충의 총애를 받았는데, 이 때문에 주전충은 주우문에게도 자신의 친자식을 능가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건화 2년, 주전충패는 볜량에서 다시 낙양으로 돌아갔지만, 병으로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다.마침내 주우문을 볜량에서 불러 후사를 당부할 예정이다.영왕 주우규는 주전충의 친자이지만 그 어머니가 영기(營 妓, 즉 군기)였을 뿐이어서 주전충이 기뻐하지 않았다.그러나 주 의원은 야심이 커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 동참했다.이때 부인 장 씨가 주 전 과장의 곁에서 시중들고 있어 이를 알아냈고, 주 전 과장이 주 전 과장을 래주 자사로 폄하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즉시 주 전 과장에게 밀고했다.불안에 질린 주우규가 갑자기 살의를 일으키자, 그는 금군 장교를 매수하여, 병졸을 궁으로 끌고 들어가 주전충을 죽이고, 낙양에서 황제라 칭하였다.뿌리를 뽑기 위해 사람을 보내 변량(變梁)을 시키고, 주유문을 죽였다.
주우규
주우규
부친을 시해하고 찬위한 주우규는 충성을 다한 제자의 노여움과 불만을 샀다.안면이 밝은 사람은 주 의원의 처지를 잘 알기에 필패다.재상이 경상(敬上)이 병이 났다고 하자, 주전충의 양아들 주유겸은 여러 갈래로 격문을 돌리며 주우규의 죄를 물어 하중진(河中鎭)으로 돌아가 진왕(晋王) 이존욱(李 。 。)에게 항복하였다.후량숙은 양사후를 내세워 주전충이 꺼려하던 때에도 그 틈을 타서 웨이보를 차지하였다.주 의원은 언감생심인 만큼 기성사실을 인정하고 절도사로 임명하는 수밖에 없다.이런 인물에 대해 주 의원은 쉽게 휘둘리지 않고 양사후에게 입북시켜 군정을 상의하게 하고, 그 틈을 타서 척결해 후환을 끊으려 한다.양사후는 정병 만 명을 이끌고 낙향했는데, 주우규는 무슨 일을 보고도 감히 손을 댈 수 있었기에 후한 하사로 귀진을 보내야 했다.이 싸움에서 주우규는 득보다 실이 많았지만, 양사후는 더욱 횡포하여 주씨 제자를 초개처럼 여겼다.
주 전충의 넷째 아들인 주유정도 황위를 차지하려 했고, 주 전규는 그를 시켜 주 전우문을 살해하고, 저항하지 못하고, 명령대로 일을 처리했다.이 때문에 주 의원은 즉위 후 도쿄 유수, 행개봉부 윤, 검교 사도로 임명됐다.이때 후량(後 大臣)의 또 다른 대신 조암(趙岩)이 변량(變梁)으로 오자, 주유정(朱友貞)이 연회를 베풀어 황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자, 이를 대신할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조암은 "이번 일은 손바닥 뒤집듯 쉽게 끝났다"며 "성패는 양령공(楊令公양사후를 지칭)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다.양사장은 높은 권위와 금군 장병이 많고 위박중진(威博重鎭)을 차지하였으며, 정병맹장이 많이 장악하였으므로, 조암재는 양사후보다 주우정(朱友貞)에게 좋은 결실을 맺으라고 권하였다.조암은 당시에도 금군(禁軍)에 있다가 낙양( 洛陽)으로 돌아와 주우정과 상의한 내용을 친군도(親軍都)의 지휘사 원상(元像)에게 알려 원(元)의 지지를 받았다.주우정은 또 심복인 마신교를 위주로 보내 양사후를 만나 성사된 후, 노군에게 50만 관을 하사하고, 양사후가 번을 하나 더 가질 수 있도록 서원하였다.양사후는 부하들에게 우규 군신과 내 구분이 정해져 있는데 무단으로 고쳤으니 남들은 나를 어떻게 얘기하겠느냐며 머뭇거렸다.마신교 권유는 "우규는 자식으로 아버지를 죽인다.한번 성사되면 어떻게 지내겠느냐고 말했다.양사후는 깨닫고 나서 주유정을 지지하기로 결심했다.그래서 낙양에 사람을 보내 조암원상선 등과 거사계획을 숙의하도록 했다.
양사후의 지지를 받은 주우정은 마음을 다잡고 대담하게 행동했다.앞서 류의 한 장교가 와이저우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동당을 색출하는 행동을 벌이자 주우정은 이들을 침투시켜 "우규는 류양군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번에 뤄양으로 불러내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했다.좌우에 용양군(龍骧軍)이 변량(變梁)하자, 유정이 우규조서를 위조해 낙양( 洛陽)으로 옮긴 뒤 그 틈을 타 용양군(龍 。軍)이 거사하였다.이 소식을 들은 용양군 장교는 공포에 질려 주유정에게 탈출의 길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주유정은 이 틈을 타 이들을 선동해 우규를 죽이려 했고 제장교들도 우정을 받들겠다고 했다.주유정은 용양군의 병권을 장악한 후 바로 조암, 원상을 보내 먼저 밀고한 후, 조원 등이 금군을 이끌고 궁중에 뛰어들자, 주유규가 자살한 후, 주유정을 옹립하여 변량에서 왕이라 칭하였다.
말제가 순국하다
주우정은 금군장교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즉위한 뒤 상여를 베풀어 거액의 돈을 썼다.게다가 연이은 출전에 군사비 지출까지 크게 늘어 후방 재정이 갈수록 빠듯해지고 있다.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탐관오리를 등용해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모으는 등 사회적 갈등이 격화됐다.
양사후는 옹립의 공로를 믿고 무법자에 대한 자긍심을 더욱 높였다.양말제는 세가 클까 봐 두려웠고, 북중 간 큰일을 막론하고 먼저 자문을 받아 실행하였는데, 양사후는 후량들의 태상황(太上皇)이 되었다.다행히 양 선생은 연세가 많았으니 오래지 않아 병들어 죽었다.양말제는 소식을 듣고는 무거운 짐을 벗은 듯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어 축하하였다.
그러나 양사후가 속한 위박진은 여전히 위병이 많고 용맹하며 지세가 변량 가까이 위치해 있어 이 같은 위협이 해소되지 않으면 양말제의 안식은 어려워진다.따라서 측근인 조암헌계(趙岩憲計)는 군주가 없는 틈을 타 위박(威博)을 둘로 갈라놓음으로써 그의 강력한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양말제는 그 계책에 따라 위보를 천웅과 소덕의 두 진으로 나누고, 그 부고 장병들을 반으로 나누었다.또 위나라 보병들의 불복종을 두려워하여, 즉시 대장을 파견하여 6만의 대군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위주에 이르러 진격하려 하였다.
위보 장병은 고향을 등지고 떠나기 싫어 군중을 모아 뿔뿔이 흩어졌고, 그들은 불을 질러 대약하게 되었고, 신임 절도사 허드런을 납치하였으니 진나라에 항복하여 주십시오.이춘욱은 군사를 위주로 직접 이끌고 군정권을 넘겨받았다.이 같은 변화는 진에게 하늘의 떡이 떨어진 좋은 일이었음은 물론, 웨이보라는 군사 요충지를 일거에 차지하여 후량의 통치 중심 변량을 직접적으로 위협하였을 뿐만 아니라, 웨이보의 구전정병을 획득하여 리춘푸의 군사력이 크게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위보은의 총칼이 절군을 이룩함에 따라 더욱 큰 의미가 되었으며, 리춘푸는 후에 친군(親軍)이 되었다.이존욱은 태행황택령(지금의 산시 좌권동남)을 친병하고, 덕주(지금의 산둥)와 전주를 습격하여 양군은 연전연패하였다.
양말제는 당연히 위보의 죽음을 달가워하지 않고 유에게 빠른 진군을 촉구하며 위보를 되찾았다.유는 후량제장의 뛰어난 장수로 다모선단하여 병사로써 간사한 인물이다.그는 진군 병력이 강해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군 간도를 보내 태원을 습격하여, 함부로 진군 주력을 동원하여 구원하려고 한 후에 위보를 공격하였다.이춘욱은 그 책략을 꿰뚫어 보았으나 허사였다.양말제는 조칙으로 출전을 재촉했고, 유는 군량미가 부족해 10곡씩을 보내달라고 요청해 역공이 가능했다.양말제가 크게 노하여 조서를 내려 엄중히 질책하고 또 사람을 보내 전쟁을 지휘하게 하였다.유무네, 겨우 출병할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대파하고 돌아왔다.이때부터 유견벽은 부전승으로 진군의 선봉에 섰다.
정명 2년(916년) 양군을 유인하기 위해 이존욱 잔대장(李 。 。)이 수원(守原)에 진주하면서 스스로 태원으로 돌아가자고 했다.양말제는 다시 한번 위주(威州)에 진병하라고 재촉하면서 "사직은 존망하고 이 싸움은 전적으로 장군께서 힘을 내십시오"라고 말했다.유는 다시 진군하여, 고원성(故元城, 지금의 하북대명동) 서에서 진군과 맞닥뜨리게 되었고, 양군은 대패하여 보병만을 섬멸당한 7만의 군중을 거느리게 되었다.이때 태원을 공격한 양군은 성내 수비군과 성외 원군의 협공에 밀려 대패하고 말았다.승승장구하며 하형명(下形明) 등 주(州)를 잇고 있어 허베이(河北)의 땅이 모두 진(晋)으로 흘러들어가고, 후량(後 。)과 하천(黃河)이 대치하는 형국이다.위보진을 둘러싼 전쟁은 진군 전승 후량(梁軍)의 완패로 끝났고, 양말제는 패전 소식을 듣고 "오대사에 갔다"며 한탄했다.
이 시기 이후 양황실 내부의 갈등도 격화되어 주씨 제자들이 서로 시기하고 시시각각 궁중정변을 일으켜 황위를 차지하려 한다.정명 원년에 양말제의 장현비가 사망하고, 장례를 하루 앞두고 말제의 동생인 강왕주우가 마음을 터놓은 채 침전 안으로 들어가 말제를 암살하려 하고, 일루가 죽임을 당한다.이후 종실형제를 더욱 멀어지게 한 말제는 조암과 덕비형제 장한정, 장한걸 등을 총애하여 근밀직책을 세우고 군국대사와 상의하여 출병할 때마다 반드시 이들을 감군으로 보냈다.조암 등도 권세를 등에 업고 매관매직하며 장수를 이간질하여 북-중 간 난장판이 되어 인심이 어수선해졌다.노신인 경상, 이진 등은 비록 재상위하였지만, 그 말은 대부분 쓸모가 없었다.이진 씨는 아예 병이 안 난다며 정사를 묻지 않아 조, 장 화해를 피했다.이후 양정사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정명 4년(918년) 8월, 위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양보를 없애려고 양군과 함께 복주 일대를 지켰다.12월 하순, 진군(進軍)에서 후류피(胡流陂, 지금의 복양 서남쪽)로, 하류솔(賀瑰率率)이 양군(梁軍)을 미행하면서 양군 기군왕언장( 。章)이 패하고, 서쪽으로 도망가 진군(進軍)의 서부선(線) 부대를 흩어지게 하였고, 진명(晋名)은 주덕위(周德威)를 전사하였다.진나라는 이사소, 왕건 및 솔기병을 양보병에 대패시켰고, 양군은 3만 명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그러나 전원의 기가 크게 꺾이면서 양진전쟁은 한동안 잠잠해졌다.
용덕 원년(龍德元年921년) 봄에 이존욱(李存勖正)이 제위를 칭하는 사이 진주(鎭州) 왕용은 부하인 장문례(張文禮)에게 피살되었다.장문례가 유착한 후에 양과 거란.진군이 진을 포위한 주에 들어갔을 때, 양군은 진군을 습격하였으나, 도리어 진군에 패배하고 2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용덕 3년(923년) 리춘푸(李 李勖)는 공식적으로 제(帝)를 칭하고 국호는 당(唐), 사(史)는 후당(後唐)이라고 칭하였다.후량이 열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양용덕 3년, 당동광 원년(923년) 윤사월 말, 당군은 양군 서공택주(현 산서진성)에 올라타고, 대장 이자원은 5000습운주(현 산둥동평)에 올라타고 다음 날 아침 자리를 차지했다.후량계는 왕언장을 수장으로 하고 단응을 부수로 하여 정병 10만 명을 집결시켜 후당을 토벌하였다.당 장종이 직접 양군과 양군을 이끌고 양유(지금의 동아)에서 싸웠다.후왕언장은 중도현(지금의 산둥 문상)에 패하여 포로로 잡혔다.같은 해 11월 19일, 이사원의 부대는 개봉에 임박했다.주우정의 신하가 도망가자, 전국 옥새마저 이사원에게 도둑맞아 상견례를 당하고, 수병들도 적지 않게 이탈하고, 주우정 중원은 반역하여 속수무책으로 밤을 새웠다.무인일은 주변의 도지휘사 황보린에게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은 우리 대들보들의 원한이라 항복할 수 없다.황보린은 "신하는 황상을 대신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손을 써서라도 황상을 해칠 수 있겠느냐"며 바빴다.주유정은 "죽이지 않으려고 이씨에게 팔려고 한 거냐"고 했다.황보린은 사검을 뽑아 자살함으로써 본심을 밝혔다.주유정은 "나는 너와 함께 죽는다"고 말했다.그러던 중 황보린의 손에 있던 칼자루를 잡고 자신의 목에 칼을 휘둘러 피를 쏟으며 쓰러져 죽는다.황보린도 울면서 자결했다.
정치
도성
개평 원년(907년) 주온은 당애제를 폐위하고 스스로 제(帝)를 칭하며 이름을 황( 晃)으로 바꾸고 건도개봉(建都開封)했으며 국호는 양(梁), 후손은 양태조(梁太祖)라고 불렀다.승변주(李 。)는 개봉부(開封府, 동도(東都), 낙양을 서도(西都), 개평(開平) 3년(909)에 낙양으로 천도하고, 이축(李 。)을 제음왕(濟陰王)으로 봉하고, 이듬해에는 이축(李柷)을 죽임함으로써 289년 만에 당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은 5대 10국의 분란기에 접어들었다.
주온이 재위했을 때 황위 계승자는 미정이다.건화 2년(912) 2월, 그는 대군과 진을 친히 거느리고 하북을 다투다가 병들어 낙양으로 돌아갔다.6월에는 3남 주우규가 쿠데타를 일으켜 살온하고 자립해 황제가 됐다.이듬해 정월에 원봉력으로 고치다.2월에는 주온의 넷째 아들 주유정이 낙양금군과 함께 병변을 일으켜 우규가 자살했다.
건화 3년(913)에 주유정은 황제(元貞明, 龍德)라 하여 양말제(梁 。帝)를 위하여 개봉하였다.또 복년하여 건화 3년을 일컬었다.우정은 방진 대신을 시기하고 내부는 분열하며 양나라의 국력은 더욱 약해졌다.
주온은 당나라의 적폐를 혁파하고 농경을 장려하며 조세를 경감하였으며, 황하 중하류지역을 기본적으로 통일하여 하동(현 산서 태원 서남)의 진국(이극용), 남방의 양오오오월 마초 민국 남한, 검남의 전촉, 봉상의 기국(이무정), 유주의 연국(유공유광 정권)과 병합하였다.주온은 비록 어떤 개혁을 하기는 했지만, 그는 잔악하고 포악하며, 전쟁 중에 살육을 남발하였으며, 태원의 이극용, 이존욱 부자와 함께 여러 해 동안 전쟁을 하여 황허 양안을 크게 파괴하였다.
용덕 3년(923) 10월, 후당 장종(莊宗)인 리춘푸(李存勖)가 개봉을 시도하고 말제는 자살했다.양나라가 망하다.
명신
문신
이진경상사동유捍.
무장
방사고, 갈종주, 양사후, 장귀패, 주유공, 강회정, 왕중사, 이사안, 씨숙종, 장귀후, 호존, 우존절, 왕언장, 유심, 유지준(후항복기), 주진, 이당빈, 정회(후항복진왕) 등이 있다.
번왕
동성 종실.
광왕 주전욱(주성 장남, 주온 맏형)
광왕 주우량 (주전욱 장남)
혜왕 주우능 (주전욱 차남)
소오왕주유교(주전욱 어린아들)
낭왕주존(주온차형)
안왕 주유녕(주존장자)
밀왕 주우륜 (주존유자)
천왕 주유유 (주온의 장남)
영왕 주우규
균왕 주유정(주온삼자)
복왕 주우장 (주온 4남)
하왕 주우옹 (주온 5남)
건왕 주우휘 (주온육자)
강왕주유쯔 (주온유자)
박왕 주유문 (주온 양자)
기왕 주유겸 (주온 양자)
이성 번왕
영천왕 한손, 업왕 양사후, 발해왕 고계흥, 초왕 마은, 오월왕 전류, 민왕 심지, 연왕 유수광, 조왕용, 북평왕 처직, 팽군왕 유은, 남해왕 유龑.
황제 가계
庙号 | 谥号 | 姓名 | 在位时间 | 年号及使用时间 | 皇陵 | |
肃祖 | 宣元皇帝 | 朱黯 | - | - | 兴极陵 | |
敬祖 | 光献皇帝 | 朱茂琳 | - | - | 永安陵 | |
宪祖 | 昭武皇帝 | 朱信 | - | - | - | |
烈祖 | 文穆皇帝 [2] | 朱诚 | - | - | 咸宁陵 | |
太祖 | 神武元圣孝皇帝 | 朱温 | 907——912 | 开平 | 907——911 | 宣陵 |
乾化 | 911——915 | |||||
- | 废帝 | 朱友珪 | 912——913 (243天) | - | ||
末帝 | 朱友贞 | 913——923 | 贞明 | 915——921 | ||
龙德 | 921——923 | - |
注:
1.주온은 907년에 왕위에 올랐으나, 883년부터 할거하기 시작하였다.
2.
913년 주우규 서인으로 폐인되었으며, 924년 주온주우정후당 장종에 의해 서인으로 폐위되었고[3] 주온이 여러 세대에 걸쳐 조상에게 추서한 제호도 삭제되었다.
3.
주우규, 건년호 봉력 주우정 등장 후 취소건화연호를 회복하라
后梁 (中国历史朝代)
后梁(907年——923年),是五代的第一个朝代。907年,梁王朱温篡唐称帝,国号梁,为与南梁(萧梁)相区别史称后梁,唐朝正式覆灭,中国历史进入五代十国时期。后梁定都开封(今河南开封)。后梁太祖朱全忠原为黄巢部将,助黄巢攻占两京,后因黄巢将败,投降唐朝,被封为宣武军节度使,镇守汴州(今河南开封),于文德元年(889年)灭强敌秦宗权,占据中原,而后又东征山东诸地,称霸中原,于天佑元年(904年)挟唐昭宗迁都洛阳,后弑杀唐昭宗,控制中央。最终于天佑四年(907年)废唐哀帝即位,建立后梁。朱温最后在乾化二年(913年)一月被子朱友珪所杀,朱友珪随即又被弟弟朱友贞推翻,后梁经此内乱日趋没落,最终于公元923年亡于宿敌李存勖之手。后梁疆域是五代中最小的,北部约以黄河为界,东至大海,南抵秦岭淮河,西至关中,但疆界不稳,战乱频繁。
概述图片来源:《中国古代史地图集》 [1]
中文名后梁 外文名Later Liang 别 名梁 时间范围907年 至 923年 都 城开封 主要城市宋州、许州、陈州、相州、雍州等 主要民族汉族 国土面积约56万平方公里(908年) 开创者朱温
目录
1 历史
▪ 军武起家
▪ 后梁代唐
▪ 父子相残
▪ 末帝殉国
2 政治
▪ 都城
▪ 名臣
3 藩王
▪ 同姓宗室
▪ 异姓藩王
4 皇帝世系
历史
军武起家
后梁开国皇帝是朱温,他于唐僖宗乾符年间投效黄巢,之后逐渐晋升为一员大将,在黄巢攻取长安建立大齐政权后,他受命抵御四面来攻的藩镇联军。中和二年,战事越发激烈,镇守全州的朱温在得不到救援之下,遂归投了敌人:河中节度使王重荣。王重荣将情况汇报给流亡在四川的唐僖宗,僖宗高兴地说:“是天赐予也!”赐名全忠,授左金吾卫大将军,充任河中行营副招讨使,从此他带兵与王重荣并肩作战,每每都能取得胜利。
中和三年三月,唐僖宗再授朱温为宣武军节度使,暂任河中行营副招讨使。同年四月,黄巢自蓝关引兵退走,朱温乃率一旅之兵,历经数月,于是年7月到达汴州治所开封府(今河南开封)上任宣武军节度使。黄巢自关中撤军后,紧接着又席卷中原,原辖汴州、宋州、颍州、亳州四州之地的宣武镇,独有汴州在旧镇将坚守下幸存。朱温到达大梁后,治内的情况十分糟糕,可在他整修兵备、巩固城垒一番整顿下,终于又恢复秩序,稳固了硕果仅存的地盘。与此同时,黄巢因久攻陈州不下,营建了宫室准备长期围攻,刺史赵犨求援,晋王李克用和徐州留后时溥及朱温都应援。这年十二月,朱温于路上击败亳州鹿邑的黄巢守军,斩首两千余。
中和四年春,朱温到达陈州瓦子寨地界,合同许州镇将田从异等在此再次击败屯驻的数万大军。紧接着朱温领兵到达陈州治所淮阳,挥动大军猛攻,经大小战斗四十余次,终于破除了围城的黄巢军。陈州解围,赵犨亲迎朱温的座驾。此时,黄巢部队开始集结在陈州北部的故阳垒,准备转攻宣武镇,朱温遂与李克用和时溥整合兵力,预备一齐向黄巢进攻。没多久,黄巢就率军朝着宣武镇的方向进发,当他的部队在中牟北汴河王满渡口渡河时,联军猛然发动进攻,使黄巢损失惨重,黄巢本人率近卫狼狈逃到狼虎谷襄王村被时溥追兵围困,无奈自杀。经此一战,亳州由朱温攻取,陈州在解围后又向朱温归附,黄巢降将张归霸、霍存、张归厚、葛从周等人之后都跪倒在朱温马下,朱温在黄巢军中就与之相识,一一收纳了他们,这些人日后都成为朱温的得力干将。
后梁代唐
唐天祐四年四月十八日(907年6月1日),朱全忠废黜唐哀帝,自行称帝,国号梁,年号开平,史称后梁。后梁疆域是五代中最小的,辖地包括今河南、山东两省,陕西、湖北大部,河北、宁夏、山西、江苏、安徽等省的一部分。除剑南王建,淮南杨行密,晋北李克用,陇西李茂贞,辽东刘仁恭不奉后梁为正统;其余的割据势力大都向后梁称臣,并接受其册封:岭南刘隐受封大彭郡王;湖南马殷受封楚王;闽南王审知受封琅琊郡王;江南钱镠受封吴越王;河北王镕受封赵王……
朱全忠当上皇帝后次年他的头号敌人李克用就病死了,其子李存勖继晋王位。李存勖继位之时,潞州已经被梁军围攻了一年有余,形势非常危急。李存勖利用梁军以为他正忙于丧事,戒备松懈之机,亲率大军,直扑潞州,打破了梁军围攻潞州而修筑的夹寨,斩梁军统帅符道昭,梁军大败,死亡万余人,委弃的资粮、军械,堆积如山。此战对梁晋两方关系都很大,如梁军获胜,等于打开了河东的门户,可以直攻晋的首府太原;如晋军获胜,不仅可以巩固河东的南境,而且向南可以威胁梁的统治中心——河南地区。朱全忠听到夹寨被攻破的消息后,大惊失色,感叹地说:“生子当如李亚子,我子豚犬耳!”亚子是李存勖的小字。
然后李存勖着手整顿松弛的军纪,发展农业生产,减轻赋税,优抚孤寡,稳定内部秩序,选用人才,整军备战,使河东境内面貌焕然一新。
这一时期后梁内部却接连发生变故,义武节度使王处直、成德节度使王镕,因朱全忠处心积虑地削除异己而举兵反梁,并且投靠李存勖,推其为盟主,共同反梁。朱全忠听信谗言,杀死佑国节度使王重师,并诛灭全族,大将刘知俊疑惧,遂在同州举兵造反,与李茂贞联合,共同讨朱。朱全忠还妒贤嫉能,借口马瘦斩杀了屡立战功的骁将邓季筠;又以违抗军令罪,处死了大将李重允、李谠;宿将氏叔琮、养子朱友恭,因参与杀害唐昭宗,朱全忠为推脱罪责,将他们处斩;朱珍是其著名的战将,朱全忠寻故杀之,诸将苦苦求饶,被朱全忠赶出;李思安本为朱全忠爱将,因故被贬后,心怀不满,也被处死。后梁内部矛盾激化,极大地削弱了实力。
开平四年(910年)十一月,朱全忠派大将王景仁率大军讨伐成德王镕、义武王处直,晋王李存勖亲率大军增援。次年,两军在柏乡(今河北高邑县境内)相遇,后梁军队铠甲鲜明,缕金挂银,光彩耀日,晋军望见颇有惧意。晋大将周德威鼓励将士说:“梁军为汴州天武军,皆为市井之徒,衣甲虽鲜明,然战斗力极差,十不能挡汝一,希望大家努力作战,擒获一人,足可致富,此乃奇货,机不可失!”晋军斗志昂扬,士气大振。周德威先派小股部队袭扰梁军,待其疲惫困乏之时,全力出击,大败梁军,死尸蔽野,抛弃的军资器械不计其数。柏乡之战是梁晋争衡的转折点,此战之后,战略主动权转移到晋军一方。
乾化二年(912年),幽州刘守光(刘仁恭之子)进攻成德、义武,李存勖率大军赴援。刘守光担心不是敌手,遂向朱全忠求援,朱全忠为报柏乡之仇,亲率大军攻晋,号称50万大军。昼夜兼行,至下博(今河北深州),率军5万转攻蓨县(今景县)。其时晋军主力北攻幽州,南方空虚,晋在赵州(今河北赵县)的驻守军以小部队骚扰梁军,晋将李存审又派数百骑兵伪装梁军,趁夜奇袭梁太祖营寨,外加被晋军释放的梁军士兵,归来后传言李存勖亲率大军来攻,梁太祖惊惶失措,遂烧营夜遁。情急之中,迷失方向,错走了一百五十多里。河北人民对梁军的残暴非常愤恨,纷纷拿起农具袭击梁军。朱全忠连吃败仗,羞愤交加,狼狈逃回汴梁,患病卧床不起。
父子相残
朱全忠流氓出身,性情暴躁残忍,晚年由于战事不利,猜忌之心日重,除了肆无忌惮地杀戮外,便是纵欲宣淫。除了在宫中宣淫外,他甚至把大臣的女眷招进宫中奸污。河南尹、魏王张全义,是五代十国时期一个重要的历史人物,他在恢复中原地区的社会生产方面贡献颇大,朱全忠连年征伐,所需军需物资全赖张全义支持,即使是这样的大功臣,朱全忠也不放过其家属女眷。他巡幸洛阳时,住在张全义家中,将其女儿、媳妇一一奸淫。张全义诸子气愤难忍,打算杀死朱全忠,被张全义苦苦劝阻。尤为荒淫的是,朱全忠对自己的儿媳也不放过,无论是养子或是亲子之媳,逐一召见侍寝,公然宣淫,行同禽兽。而他的那些儿子为了争宠,甘愿献出自己妻子,而毫无羞耻之心。他们利用自己妻子入宫侍寝的机会,打听消息,争夺储位。养子朱友文之妻,貌美灵巧,深得朱全忠宠爱,由于这个原因,朱全忠对朱友文也非常宠爱,竟然超过了自己的亲子。
乾化二年,朱全忠败回汴梁,又转至洛阳,由于病势垂危,遂打算将朱友文从汴梁召来,嘱咐后事。郢王朱友珪虽是朱全忠的亲子,但由于其母只是一个营妓(即军妓),故不为朱全忠所喜。然而朱友珪野心很大,参与到争夺储位的斗争中来。这时他的妻子张氏正在朱全忠身边陪侍,探知这个消息,并且得知朱全忠要将朱友珪贬为莱州刺史,马上密告给朱友珪。朱友珪惊恐不安,顿起杀机,于是他买通禁军将校,引兵入宫,将朱全忠杀死,称帝于洛阳。为了斩草除根,他派人赶到汴梁,杀死了朱友文。
朱友珪
朱友珪
朱友珪弑父篡位,引起了朱全忠诸子的气愤与不满。明眼人都能看清朱友珪的处境,知其必败无疑。宰相敬翔称病不出,朱全忠的养子朱友谦传檄诸道,问罪朱友珪,并以河中镇归降了晋王李存勖。后梁宿将杨师厚,素为朱全忠所猜忌,这时也乘机占据魏博。朱友珪不敢得罪,只好承认既成事实,任命其为节度使。对于这样一个人物,朱友珪当然不愿轻易接受其摆布,他令杨师厚入朝商议军情,想借机铲除,以绝后患。杨师厚率精兵万人入洛,朱友珪见状哪里还敢动手,只得厚赐遣送归镇。在这场斗争中,朱友珪非但没有得利,反倒示弱于人;杨师厚更加骄横,对于朱氏诸子视若草芥
朱全忠的第四子朱友贞也想夺取皇位,朱友珪命他杀害朱友文,他也不敢违抗,只得奉命办事。因此,朱友珪即位后,任命他为东京留守、行开封府尹、检校司徒。这时后梁的另一大臣赵岩有事来到汴梁,朱友贞设宴款待,席间言及皇位之事,朱友贞遂乘机向他请教如何取而代之。赵岩说:“此事易如反掌,成败全在杨令公(指杨师厚)一人,只要得其一言,禁军立即奉命而行。”杨师厚位高权重,禁军将士多为其部下,又占据魏博重镇,精兵猛将多在其掌握之中,所以赵岩才劝朱友贞结好于杨师厚。赵岩当时也在禁军中任职,返回洛阳后,便把与朱友贞商议的内容告诉了侍卫亲军都指挥使袁象先,得到了袁的支持。朱友贞又派心腹马慎交前往魏州见杨师厚,答应事成之后,赐给劳军钱五十万贯,并许愿杨师厚可以再兼领一个藩镇。杨师厚犹豫不决,对其部下说:“我与友珪君臣之分已定,今无故改图,别人又会怎么议论我?”马慎交劝喻说:“友珪以子弑父,天下人皆知,友贞是太祖至亲之子,仗义讨贼,名正言顺。如果一旦事成,令公又如何相处?”杨师厚醒悟,决意支持朱友贞。于是他派人入洛阳,密与赵岩、袁象先等商议举事计划。
得到杨师厚的支持后,朱友贞便放心大胆地行动起来。在此之前,龙骧军的一个军官在怀州反叛,搜捕其同党的行动四处进行,朱友贞派人潜入其军中恐吓道:“友珪因为龙骧军曾经发生过叛乱,此次把你们召到洛阳,将要全部坑杀。”当时左右龙骧军驻扎在汴梁,朱友贞伪造友珪诏书,调其入洛阳,然后借机威吓龙骧军起事。龙骧军将校闻知这个消息,非常惊恐,纷纷到朱友贞处,向他请教逃生之路。朱友贞乘机煽动他们起兵诛杀友珪,诸将校也表示愿意拥戴友贞。朱友贞掌握了龙骧军的兵权后,马上派人密告赵岩、袁象先,于是赵、袁等人率禁军突入宫中,朱友珪自杀,然后拥立朱友贞在汴梁称帝。
末帝殉国
由于朱友贞是依靠禁军将校的拥戴当上皇帝的,所以即位之后,大肆赏赐,花费了巨额钱财。加之连年征战,军费开支浩大,使后梁财政日趋紧张。为了满足需要,朱友贞任用贪官污吏搜刮民财,致使社会矛盾骤然激化。
杨师厚倚仗其拥立之功,更加骄矜不法,目无君主。梁末帝惧怕其势大,朝中事务无论巨细,皆先咨询后而施行,杨师厚俨然成了后梁的太上皇。好在杨师厚毕竟年高,不久就病死了。梁末帝得知消息后,如释重负,在宫中设宴庆贺。
但是杨师厚所在的魏博镇仍然是一个很大的威胁,魏博兵多将广,勇悍善战,地理位置又靠近汴梁,如果这一威胁不解除,梁末帝仍然难以安生。于是其亲信赵岩献计,不如趁其军中无主,将魏博一分为二,可以达到削弱其强势地位的目的。梁末帝听从其计,下诏将魏博分为天雄、昭德两镇,其府库将士对半而分。又恐魏博将士不服,遂派大将刘鄩率大军六万渡过黄河,逼近魏州,准备弹压。
魏博将士不愿背井离乡,聚众哗变,他们纵火大掠,劫持了新任节度使贺德伦,请降于晋。李存勖喜出望外,亲率军队到魏州,接收了军政大权。这一变化对晋来说,无疑是天上掉馅饼的好事,不仅一举占据了魏博这一军事重镇,直接威胁到后梁的统治中心汴梁,而且获得了魏博的久战精兵,李存勖的军事实力大大地增强了,尤其魏博银枪效节军的获得,意义更大,这支军队战斗力勇悍异常,李存勖收其为亲军,后来在灭亡后梁的战争中出力甚大。李存勖乃亲征出兵太行黄泽岭(今山西左权东南),又袭德州(今属山东)、澶州,梁军连战皆败。
梁末帝当然不甘心魏博就此失去,催促刘迅速进军,收复魏博。刘是后梁诸将中非常杰出的将领,多谋善断,用兵诡诈。他自知晋军兵力强大,不能正面硬拼,于是派军队间道袭击太原,妄图调动晋军主力回救,然后再攻取魏博。李存勖洞察其谋,结果没有得逞,只好退屯莘县,闭营不出。梁末帝连诏催其出战,刘因军粮不足,请求每人发给十斛粮,才可进行反攻。梁末帝大怒,下诏严责,又派人督战。刘无奈,只好勉强进兵,结果大败而回。从此,刘坚壁不战,以避晋军锋芒。
贞明二年(916年),李存勖为了引诱梁军出战,留大将李存进驻守原处,扬言自己返回太原。梁末帝闻言,又一次催促刘进兵魏州,并且说:“社稷存亡,全系此战,望将军勉之!”刘只好再次进兵,在故元城(今河北大名东)西与晋军遭遇,梁军大败,仅步兵被歼的就达七万之众。这时派去袭击太原的梁军在城内守军与城外援军的夹击下,也大败溃退。晋军还乘胜进击,连下邢、洺等州,从而使河北之地尽数归于晋,与后梁形成夹河(黄河)对峙的局面。围绕着争夺魏博镇的这场战争,以晋军全胜后梁彻底失败而宣告结束,梁末帝得知战败的消息后,哀叹说:“吾大事去矣!”
这一时期后梁皇室内部的矛盾也趋激化,朱氏诸子互相猜忌,时刻想发动宫廷政变,以夺取皇位。贞明元年,梁末帝的张贤妃死亡,临出葬的前一夜,末帝之弟康王朱友孜遣心腹之人潜入寝宫,谋刺末帝,事泄被杀。此后末帝更加疏远宗室兄弟,宠信赵岩及德妃兄弟张汉鼎、张汉杰等人,他们均居近密之职,军国大事,多与他们商议,每次出兵也一定派这些人前往监军。而赵岩等人也倚仗权势,卖官鬻爵,离间将相,搞得朝中乌烟瘴气,人心涣散。老臣敬翔、李振等虽居相位,所言多不见用。李振干脆称病不出,不问政事,以避赵、张祸害。自此后梁政事更加混乱,直至灭亡。
贞明四年(918年)八月,李存勖从魏州举兵南下,想要灭梁,与梁军相持于濮州一带。十二月下旬,晋军至胡柳陂(今濮阳西南),贺瑰率梁军跟踪而至,两军激战,梁军骑军王彦章败,西逃时冲散了晋军的西线部队,晋名将周德威战死。晋将李嗣昭、王建及率骑兵冲击梁步兵,梁军惨败,伤亡近3万。但晋军也因此战元气大伤,梁晋战争沉寂了一段时期。
龙德元年(921年)春,李存勖正拟称帝之际,镇州王镕为部下张文礼所杀。张文礼勾结后梁与契丹。晋军进围镇州时,梁军袭击晋军,却反为晋军所败,死伤2万多人。
龙德三年(923年),李存勖正式称帝,国号唐,史称后唐。后梁开始处于劣势,梁龙德三年、唐同光元年(923年)闰四月末,唐军乘梁军西攻泽州(今山西晋城),派大将李嗣源率骑5000袭郓州(今山东东平),次日清晨占之。后梁启用王彦章为帅,段凝为副帅,调集精兵10万北讨后唐。唐庄宗亲自率军与梁军苦战于杨刘(今东阿)。后王彦章兵败中都县(今山东汶上)被俘斩。同年11月19日,李嗣源的部队逼近开封。朱友贞的臣子纷纷逃离,连传国玉玺也被部下偷走给李嗣源当了见面礼,守兵也有不少开了小差,朱友贞众叛亲离,束手无策,急得日夜哭泣。戊寅日,他对身旁的都指挥使皇甫麟说:“姓李的是我们大梁的世仇,我不能投降他们,与其等着让他们来杀,还不如由你先将我杀了吧。”皇甫麟忙说:“臣下只能替皇上效命,怎么能动手伤害皇上呢!”朱友贞说:“你不肯杀我,难道是准备将我出卖给姓李的吗?”皇甫麟拔出佩剑,想自杀以明心迹。朱友贞说:“我和你一起死。”说着,握住皇甫麟手中的剑柄,横剑往自己颈项一挥,血流如注,倒地死去。皇甫麟也哭着自刎而死。
政治
都城
开平元年(907年)朱温废唐哀帝,自行称帝,改名为晃,建都开封,国号为“梁”,后人称为梁太祖。升汴州(今河南开封)为开封府,称东都;以洛阳为西都;开平三年(909),由开封迁都洛阳,封李柷为济阴王,次年又杀李柷,自此历时289年的唐朝灭亡,中国进入五代十国的纷乱时期。
朱温在位时,皇位继承人未定。乾化二年(912)二月,他亲统大军与晋争河北,得病返洛阳。六月,三子朱友珪发动政变杀温,自立为帝。次年正月,改元凤历。二月,朱温第四子朱友贞联合洛阳禁军发动兵变,友珪自杀。
乾化三年(913),朱友贞即在开封称帝(先后改元贞明、龙德),是为梁末帝,还都开封。又复年号为乾化三年。友贞猜忌方镇大臣,内部分裂,梁朝国力进一步削弱。
朱温在称帝前后,革除了一些唐朝积弊,奖励农耕,减轻租赋,基本上统一黄河中下游地区,与河东(今山西太原西南)的晋国(李克用),南方的杨吴、吴越、马楚、闽国、南汉,剑南的前蜀,凤翔的岐国(李茂贞)、幽州的燕国(刘仁恭、刘守光)等政权并立。朱温虽然作了某些改革,但他残暴成性,战争中滥行杀戮,与据有太原的李克用、李存勖父子连年作战,使黄河两岸遭到严重破坏。
龙德三年(923)十月,后唐庄宗李存勖攻入开封,末帝自杀。梁朝亡。
名臣
文臣
李振、敬翔、谢瞳、刘捍。
武将
庞师古、葛从周、杨师厚、张归霸、朱友恭、康怀贞、王重师、李思安、氏叔琮、张归厚、霍存、牛存节、王彦章、刘鄩、刘知俊(后投降岐)、朱珍、李唐宾、丁会(后投降晋王)等。
藩王
同姓宗室
广王 朱全昱 (朱诚长子,朱温长兄)
广王 朱友谅 (朱全昱长子)
惠王朱友能 (朱全昱次子)
邵王 朱友诲 (朱全昱幼子)
朗王 朱存 (朱温次兄)
安王 朱友宁 (朱存长子)
密王 朱友伦 (朱存幼子)
郴王 朱友裕 (朱温长子)
郢王 朱友珪 (朱温次子,即皇帝位)
均王 朱友贞 (朱温三子,即皇帝位)
福王 朱友璋 (朱温四子)
贺王 朱友雍 (朱温五子)
建王 朱友徽 (朱温六子)
康王 朱友孜 (朱温幼子)
博王 朱友文 (朱温养子)
冀王 朱友谦 (朱温养子)
异姓藩王
颍川王韩逊、邺王杨师厚、渤海王高季兴、楚王马殷、吴越王钱镠、闽王王审知、燕王刘守光、赵王王镕、北平王王处直、彭郡王刘隐、南海王刘龑。
皇帝世系
庙号 | 谥号 | 姓名 | 在位时间 | 年号及使用时间 | 皇陵 | |
肃祖 | 宣元皇帝 | 朱黯 | - | - | 兴极陵 | |
敬祖 | 光献皇帝 | 朱茂琳 | - | - | 永安陵 | |
宪祖 | 昭武皇帝 | 朱信 | - | - | - | |
烈祖 | 文穆皇帝 [2] | 朱诚 | - | - | 咸宁陵 | |
太祖 | 神武元圣孝皇帝 | 朱温 | 907——912 | 开平 | 907——911 | 宣陵 |
乾化 | 911——915 | |||||
- | 废帝 | 朱友珪 | 912——913 (243天) | - | ||
末帝 | 朱友贞 | 913——923 | 贞明 | 915——921 | ||
龙德 | 921——923 | - |
注:
1.朱温于907年称帝,但自883年就已开始割据
2.
913年朱友珪被废为庶人,924年朱温、朱友贞被后唐庄宗废为庶人 [3] ,朱温给几代祖先追封的帝号也被削除
3.
朱友珪曾建年号凤历,朱友贞上台后将这个年号取消,恢复乾化年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