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 종로구 주민가운데 한 명이다. 오늘이 제 102주년 3.1독립운동 기념일이다. 나는 특히 3.1독립운동 기념일이 되면 종로구민인 것이 자랑스럽게도 생각되면서 뭔가 대단히 선각자들에게 죄송스런 마음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 다르다. 바로 딜쿠샤가 부활했기 때문이다. 딜쿠샤는 1919년 3월 1일 3.1독립운동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미국인 특파원인 앨버트 테일러 선생이 직접 지은 집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리고 그 잔혹스러웠던 시절에 그곳이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신문사로 사용됐다. 앨버트 테일러선생은 정말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았던 미국인이였다. 아니 진정한 한국인이었다.
딜쿠샤(Dilkusha)는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건물의 이름이다. 미국의 언론인인 앨버트 테일러(Albert Taylor)기자가 부인 메리 테일러(Mary Taylor)와 함께 살던 집으로 ‘앨버트 테일러 가옥’이라고도 부른다.
딜쿠샤는 앨버트 테일러 기자가 직접 지은 이름으로 힌두어로 ‘이상향’ 혹은 ‘행복한 마음, 기쁨’을 의미한다. 그는 1923년 딜쿠샤를 짓고 1942년 추방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딜쿠샤는 붉은색 벽돌로 지은 지하 1층~2층 건물로 총면적은 624㎡ 정도다. 서양식 주택 중에서도 구성과 외관이 독특한 편으로 일제강점기 건축 양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화강석 기저부 위로 붉은 벽돌을 세워 교차하면서 쌓은 것이 특징으로 한국에서는 흔치 않은 방식으로 평가된다.
앨버트 테일러 기자. 사진 서울시
테일러 기자가 3.1 독립운동 상황을 보도한 것은 극적이었다. 1919년 2월 28일. 미국 AP통신 임시 특파원으로 활동하던 앨버트기자는 고종의 국장(國葬)과 관련된 후속 취재를 마치고 아이 출산을 위해 아내가 입원해 있던 세브란스 병원으로 향했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에 승하(별세)했고 장례식은 2월 9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거행됐다.
고종의 장례식 사진이다. 이 한장의 사진이 당시의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흰 상복을 입은 조문객앞에 강압적인 모습의 일본군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고종의 별세는 이나라 국민들의 의식을 깨치는 데 큰 몫을 했다. 그리고 대규모 항일 항쟁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당연히 장례식 이후에도 고종의 떠남을 추모하는 추모행렬이 줄을 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테일러 기자는 취재했다.테일러 기자의 부인이 입원했던 세브란스 병원의 위치는 지금의 신촌이 아니다. 지금의 신촌병원은 1962년에 이전됐고 그전에는 남대문밖 봉숭아골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의 서울 용산구의 서울역앞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내가 아들을 출산해 병원을 찾은 그의 눈에 병원 침대 속 감춰진 종이뭉치가 들어왔다. 아마도 누군가 테일러 기자의 부인의 병원 침대속에 그 종이를 넣어둔 듯 하다. 종이를 테일러 기자의 부인 병실 침대에 몰래 넣은 사람은 과연 누굴까. 당시 세브란스병원에는 미국인 의료진도 있었지만 일본 의료진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발각됐으면 자칫 사전에 관련 인사들이 체포 구금될 수도 있는 위기상황이었다. 그런데 독립선언문을 감히 테일러 기자의 부인 침대에 슴겨뒀을 인물은 아마도 한국인 의료진이었을 것이다. 미국인 기자의 부인에게 한가닥 기대를 걸었을 수도 있다. 그 사람이 테일러기자의 부인인 것을 아는 사람은 당시 그 병원에 근무한 의료진밖에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세월이 흘러 그것을 증언해줄 사람이 어디에도 없다.
말을 줄이고 한국어를 할 줄 알았던 그는 한눈에 '독립선언서'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가 만일 한국어를 할 줄 몰랐다면 아마도 3.1독립운동은 세계에 알려지지 않고 한국에서 묻힐 뻔한 일이었다. 황급히 기사를 쓴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동생에게 기사와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그당시도 테일러기자는 일제의 입장에서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 아니였겠나. 그리고 그당시 한국에 와 있던 외국 특파원은 정말 몇명 안되는 시절 아니든가. 한국은 그당시 정말 지구촌에서 무시해도 좋은 그런 위치 아니였던가. 그는 일제 순사들의 초특급 요주의 대상자였을 것이다. 3.1독립운동은 겨우 겨우 한국을 빠져 나가 미국에 도착한 동생에 의해 3월 13일 뉴욕타임스에 3·1운동이 보도된다. 전세계에 한국의 3.1 항쟁이 알려진 최초의 일이다. 전세계에 3.1독립운동이 알려진 것은 테일러 기자 형제의 힘이 아니였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제는 이 기사의 출처를 조사하기 시작했고 결국 테일러기자의 행동으로 밝혀 냈다. 그 이후 일제가 테일러 기자에게 어떻게 했는가는 불문가지이다. 얼마나 드라마틱 이런 표현 사용하는 자체가 불경스럽지만 한편의 고급 영화를 보는 듯 하다.그것도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실화 아닌가. 이런 엄청난 일을 했음에도 그동안 한국은 테일러 기자의 이러한 공을 전혀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게 정상적인 나라인가.
복원되기 전 딜쿠샤(Dilkusha) 모습이다. 딜쿠샤는 한국전쟁이후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의 임시거처로도 사용됐다. 말이 좋아 임시거처이지 거의 노숙자들의 집합소나 다름 없었다. 오갈데 없는 사람들이 몰려와 지냈던 그런 장소이기도 했다. 역사의 유물이 팽개쳐진 상태로 수십년을 보냈다. 내부는 망가질 대로 망가졌고 이곳은 한때 사람들이 접근하기를 꺼렸던 그런 장소이기도 하다. 이 건물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도 모른채 그저 폐허속에 반세기이상을 보낸 것이다. 한때 이 건물을 철거해 달라는 인근 주민들의 민원도 많이 제출된 것도 사실이다. 이곳이 그런 곳인지를 주민들이 어찌 알았겠는가. 딜쿠샤를 찾아낸 계기를 만든 것도 한국인이 아니였다. 잊혀졌던 딜쿠샤를 찾아낸 것은 2005년의 일이었다. 앨버트선생의 아들이 서일대 김익상 교수에게 어린 시절 살던 집을 찾아봐달라고 부탁을 했다. 1년 뒤인 2006년 아들 브루스 테일러는 66년 만에 서울을 찾아 딜쿠샤를 돌아봤다. 문화재 그리고 역사적 귀중한 건물을 적당히 판단하고 대충 적당히 처리하고마는 한국인들의 슬픈 자화상이 서려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Royalcity1216 | CC BY
앨버트 테일러 가옥인 '딜쿠샤'의 옛모습. 사진 서울시
서울에 살던 앨버트 테일러 기자는 한양 도성 성곽을 따라 산책하다 '은행나무골'로 불리던 곳에 땅을 사들어 집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딜쿠샤가 위치한 곳 바로 옆은 권율장군의 생가가 있다. 권율장군이 어릴때 심은 것으로 알려진 은행나무가 지금도 위풍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권율장군의 생가는 이미 흔적을 감춘지 오래됐다. 지금 살고 있는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이렇게 하면 안된다. 권율장군이 누군가. 임진왜란때 행주대첩을 이끈 장군아니든가. 바다에는 이순신 장군 뭍에서는 권율장군 아니든가. 그런 영웅의 고택을 없애버린 만행에 통곡한다. 전쟁중에 타버렸어도 어떻게든 복원해야 했든게 아닌가. 하여튼 인도철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앨버트기자는 산스크리트어로 '딜쿠샤'란 이름도 붙였다. 1924년 붉은 벽돌집이 완공됐지만 2년 뒤 낙뢰로 불에 탔다. 앨버트기자는 1930년 같은 자리에 다시 집을 지었다. 한국 사연처럼 이 딜쿠샤도 사연도 많은 건물이 아닌가 한다.
테일러 기자는 이후에도 일본군이 수원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집단 학살한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하는 한편, 일본 총독을 찾아가 조선인 학살에 대해 항의했다. 이런 사건들로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기도 했으며 1941년 자택 감금되었다가 1942년 미국으로 결국 추방되었다. 고향인 캘리포니아로 돌아갔지만 그의 머리속에는 항상 한국의 상황이 걱정됐다. 그 이후로 한국에 와보지 못하다가 결국 6년 뒤 숨을 거뒀다. 아내 메리는 생전 한국을 그리워하던 남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선생의 유해와 함께 1948년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미국에서 한국을 오는 것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였지만 아내는 남편의 유지를 받들었다. 테일러선생은 그의 아내 메리여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안장됐다. 정말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이었던 테일러선생이었다.
원래 딜쿠샤는 어니스트 베델(Ernest Bethel)이 양기탁 선생 등과 함께 창간한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 사옥으로 추정되었다. 서울시는 1995년부터 딜쿠샤의 문화재 지정을 추진했으나, 건물 기초에 새겨진 ‘딜쿠샤 1923(DILKUSHA 1923)’의 뜻과 건물의 역사가 확실치 않아 사업이 진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뜻이 있는 사람들의 계속된 청원으로 2016년에 딜쿠샤 보전 양해각서를 체결하기에 이른다. 참으로 만시지탄의 심정이 든다. 그리고 복원작업을 거쳐 드디어 2021년 개관하게 된 것이다.
앨버트 테일러 선생의 손녀인 제니퍼 테일러(Jennifer Taylor) 여사는 조부모의 실질적 나라인 한국을 방문해 조부모인 앨버트 테일러 부부의 유품과 당시 소장품 등 394점을 서울시에 기증하기도 했다. 기증 물품에는 회중시계 같은 일상품부터 앨버트 테일러 선생이 한국에서 쓴 기사 등 역사적 물품이 포함돼 있다.
딜쿠샤는 오늘 3월 1일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1~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의 삶의 흔적이 담긴 1920년대를 복원했다. 2층 전시실엔 당시 언론활동을 비롯해 딜쿠샤의 건축 복원 과정을 볼 수 있게 해놨다. 2021년 3월 1일을 기해 공개되는 딜쿠샤 전시관은 매주 화~일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된다. 입장은 무료지만 사전 예약을 해야만 둘러볼 수 있다. 하루 4차례 관람이 진행되며, 1회당 가능 인원은 20명이다.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을 통해서만 신청할 수 있다.
이번 딜쿠샤의 복원과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는 것은 정말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울 종로구민 아니 이 나라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딜쿠샤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민족의 은인인 앨버트 테일러 선생을 조금이라도 기릴 수 있는 공간이 무려 백년만에 다시 우리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새롭다. 한국은 3.1운동을 계기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리고 항일 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그런 대단한 움직임의 중앙에 바로 앨버트 테일러 기자가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고맙다 .너무 고맙다. 그리고 그동안 그의 그 거룩한 업적을 기억하지 못한 못난 이 나라 국민의 한사람으로 선생에게 죄송한 마음을 드린다.
2021년 3월 1일 이른 봄비 내리는 새벽 화야산방에서 정찬호.
(*역사적인 사실의 정확성을 위해 다음백과를 일부 인용해 왔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