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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2 / 하나님의 손은 짧지 않다 (민11:16-23)
오늘은 민족의 명절인 설날입니다. 매년 그래 왔지만, 코로나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있는 올해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오고 갈 것입니다.
듣기론 중국에서는 대략 21억 명이 이동할 거라는 예상이 되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설 명절 이동 인구가 해외로 나가는 사람을 빼고도 귀성, 귀경 다 포함해서 대략 2천6백4십8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하니 전 국민의 거의 절반이 움직인다 할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가히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할만합니다.
교통편도 그렇고 도로 사정도 그렇고 이동 간에 많은 고생과 어려움이 있으리라 예상되지만 그래도 여러분을 포함하여 모두가 평안하고 행복한 설날 명절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성경에서도 보면 이미 예전에 대규모의 민족 대이동이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애굽에서 해방되어 새 땅 가나안을 찾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동이었습니다.
당시 성인 남자만 60만 명이고 어린이와 여자들을 모두 포함하면 대략 200만 명은 됐다고 하는데, 요즘이야 이동 길이 고생길이긴 해도 다양한 교통수단이 있고 또 중간중간에 휴게소도 있습니다만 당시만 해도 도보로, 그것도 허허벌판인 광야를 관통하여 이동해야 했으니 그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이동 경로를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지만, 정작 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긴 이동 중에 식수가 떨어져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불평하자 하나님께서 반석을 쳐서 물이 흘러 마시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식량이 바닥이 납니다. 이에 백성들 사이에서 다시 불평이 나오자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양식을 삼게 하셨습니다.
이젠 됐나 싶었는데, 또 다른 이유로 백성들이 불평합니다. 이번엔 고기도 좀 먹어야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그냥 고기를 좀 먹고 싶다는 희망 사항 정도가 아니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18절에 보면 백성들이 모세 앞에 나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좋았다.’라고 했다 합니다.
본문에서 ‘울다’란 말은 원어의 뉘앙스로는 상대를 쳐 죽일 듯이 감정이 격앙된 상태를 의미하는 말인데 고기를 먹고 싶어 그런 것까지는 이해가 되나 그로 인해 저들은 모세에게 죽일 듯이 대들었으며 급기야는 출애굽 한 것까지 후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출애굽의 역사는 누가 누구를 위해 한 일입니까?
출애굽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들을 해방시키시려고 행하신 축복입니다. 그런데 한낱 고기로 인한 불평 때문에 자기들을 축복하시려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불만을 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이런 태도에 대해 20절에 보면 모세는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계시는 여호와를 멸시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끔은 불만이 있어 불평하는 것이 아주 큰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는 불만이나 불평이 자칫 하나님을 향한 불신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믿는다는 이유로 불만족스러운데도 무조건 불평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불평을 표출하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살다 보면 도저히 못 하겠다 내지는 이젠 못 해 먹겠다고 할 순간이 왜 없겠습니까마는 그럴 때라도 우리가 성도라면 불만이 있을 때면 불평이 아니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게 출애굽 당시 일반 백성들과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차이였습니다. 백성들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불만 불평할 때 모세는 이런 백성을 축복의 길로 인도해야 할 자신의 사명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이에 18절에 보면 저들이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불평을 다 듣고 계셨다는 겁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도 들으셨을 겁니다.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 하나님은 다 들으시는 분이심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 더.
들으시는 하나님은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랬기에 홀로 사명을 감당하며 힘들어하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고.
그렇습니다. 당시 모세가 그랬듯 오늘 여러분은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생의 어려움 속에 절대 홀로 있게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같은 이유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고기를 주어 너희로 먹게 하겠다.”고.
보면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백성들의 불평에도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보면 좀 헷갈립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기도에도 응답하셨고 백성들의 불평에도 응답하셨다고 한다면 때론 기도가 아닌 불평을 해도 어차피 응답받는 건 같은 거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20절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고기를 주어 먹게는 하시되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계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가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은 저들이 나를 멸시했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저들이 원하는 것을 응답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은 사람들의 불평에도 응답하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소원에 응답해 주신 이유는 그들의 불평을 들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위해 그리하신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시려는데 모세의 기도 제목이 뭐였습니까?
‘이렇게 매사에 불평불만이 많은 백성을 어찌 하나님이 지정하신 자리까지 인도할 수 있을는지요?’ 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시고자 하니 먼저 모세를 향한 백성들의 불평부터 잠재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불평했던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불평에 응답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응답하심은 모세의 기도 때문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성도는 불만을 표출하려 할 때면 불평이 아니라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평은 문제 해결에 걸림돌만 될 뿐입니다. 기도만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도우심이 있게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거들랑은, 또한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만난다면 모세가 그랬듯 여러분도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세는 그리했습니다. 백성들에게 한 달간이나 고기를 먹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을 향해 모세는 다시금 이렇게 기도합니다. 22절을 보세요.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이때 모세가 했던 “족하오리이까?”라는 반문은 실제론 “그게 가능합니까?”라는 의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린 불평이 있을 때만이 아니라, 믿어지지 않을 때도 기도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될까 하는 의문이 들 때, 안 될 거라는 의심이 들 때면 불평과 마찬가지로 의문이나 의심 대신 우린 기도해야 합니다.
당시 모세 일행은 광야 한복판에 있습니다. 그랬기에 이 광야에서 이 많은 백성에게 그것도 한 달간이나 고기를 먹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 되지가 않았기에 암만 믿음 좋은 모세였지만 믿어지지가 않은 겁니다.
계산상으로만 봐도 고기 1인분을 200g이라 했을 때 200만 명이 먹을 양이면 족히 40만kg이 됩니다. 그것도 한 달간이나 먹이는 것이라면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손이 짧으냐?”고.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믿으면서도 “이게 정말 될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껏 기도해 놓고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우리만의 생각은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그런 생각을 하는 우리를 향해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손이 짧으냐?”고.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자면 “내가 해서 못 할 것이 뭐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 ‘너는 믿기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믿기만 하는 것을 해내야 우리도 믿음에서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올해 우리가 내가 하려는 일을 ‘주가 행하시게 하자.’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이 하시면 못 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원하는 일을 주가 행하시게 하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기도와 함께 늘 떠올려야 하는 말씀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손은 절대 짧지 않다.’는 사실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는 말에 숨겨진 뜻은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심을 알라는 것입니다.
기억하시지요? 하나님의 창조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만 할 단어가 히브리어 ‘토후와 보후’입니다.
창세기에서 혼돈이라고 번역된 토후의 의미는 ‘텅 빈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며 공허라고 번역된 보후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창조 전에는 인간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있어야 할 것’이나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가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즉 창조주 하나님께서 ‘없는 것을 있게’ 하시며,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며, ‘필요한 것을 채우시는’ 은혜가 바로 우리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창조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라는 말씀을 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축복’을 기억해야 합니다. 혼돈과 공허 속에서 창조의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은 광야 같은 인생에서도 축복의 하나님으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당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없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양식이었나요? 고기였습니까? 물인가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없는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 내게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원하는 바를 간절하게 기도해 놓고도 혹여라도 ‘여호와의 손이 짧은가?’라는 생각이 들 때면 성경이 이사야 59:1절에서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고 하신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손은 절대로 짧지 않으십니다.
2.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라는 말씀에 숨겨진 또 다른 뜻은 세상의 지식이나 상식으로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의 ‘된다, 안 된다.’는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사안입니다. 솔직히 광야에서 그 많은 사람에게 한 달 동안이나 고기를 먹인다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주변 여건으로 볼 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세상의 불가능과 함께 하나님도 그곳에도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세상적으로 안 된다고 하나님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세상이 못한다고 하나님도 못 한다고 판단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내 생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마세요. 오히려 내가 안 되니까 하나님이 하셔야 하는 것이고, 세상이 못하니까 하나님이 하셔야 될 것임을 믿어야 하는 겁니다.
요게벳이란 여인은 이스라엘 여자들은 아들을 낳으면 죽여야 한다는 애굽 왕 바로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숨겨서 키웠지만, 아이가 커지면서 더는 숨겨 키울 수 없게 되자 아들을 데리고 나일강으로 갑니다. 그러나 다른 여인들은 아들의 생명을 포기하고 강물에 던진 반면에 요게벳은 아들을 산 채로 갈대 상자에 담아 물결에 띄워 보냅니다.
신학자들은 이때의 ‘갈대 상자’를 ‘노아의 방주’를 상징하는 것이자 신약으로 넘어오면 ‘예수님’을 예표 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결과가 어땠나요? 똑같이 강물에 던져졌지만, 맨몸으로 던져진 아이들은 물에 빠져 죽고 말았으나 방주에 담긴 아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살았고 커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모세’입니다.
흔히 인생을 쓰디쓴 고통의 바다라는 뜻으로 ‘고해’라고들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인생을 살면서 세상으로부터 당하는 온갖 고통과 시련을 ‘세파’에 비유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 맨몸으로 던져진 인생이라면 고해에 빠져 허우적대고 세파에 시달려 죽네 사네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구원의 방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몸을 맡긴 인생이라면 우리에겐 살길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 ‘내 손이 짧으냐?’고 물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세상의 고해와 세파에서 건져 내실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고 그럴 능력도 충분하시다는 말씀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사는 건 믿음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려 할 때면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인도해 줄 것이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 ‘내 손이 짧으냐?’고 되물으시는 또 다른 이유는 앞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불평이 아니라 기도가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병원 원목 시절에 어느 장로님이 간증하시기를 교회에서 동기 장로 한 분에 대한 질투와 미움으로 늘 생각하기를 ‘저 인간만 안 봤으면.’ 했답니다. 그랬더니 어느 날 진짜로 그 장로를 안 보게 되었는데 이유인즉 자신이 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느라 교회를 떠나오게 되자 저절로 그 장로를 안 보게 되더라는 겁니다.
그분에 의하면 저 인간 좀 내 앞에서 치워주시기를 바랐는데 하나님은 그 인간이 아니라 나를 치우시더라는 간증입니다.
누구에게나 그렇습니다. 저 꼴 좀, 저 문제 좀, 저 시련과 질병 좀, 저 실패와 아픔 좀 안 봤으면, 내 앞에서 치워졌으면 하지만 자칫 그 모든 생각과 말이 곧 불평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어차피 한마디 할 거라면 우리의 생각이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불평이 아니라 기도가 되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불평하려는 그 말 앞에 ‘하나님!’만 붙이면 됩니다.
‘못 해 먹겠다.’고 말하면 불평이지만 그 말 앞에 하나님을 붙여 ‘하나님 못 해 먹겠어요.’라고 하면 기도가 됩니다.
‘안 되잖아’라고 하는 건 불평이지만 ‘하나님 안 되잖아요.’라고 하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죽겠네, 못 살겠네’라고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 죽겠어요, 하나님 못 살겠어요.’라고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불평 대신 기도하면 그때는 민수기 14장 28절 말씀이 우리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내 말이 하나님의 귀에 들린 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내 말을 들으신 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셔서 이제부터는 모든 일에서 나를 위해 주가 행하시게 하려 하면 주께서 내 말을 들으실 때 오직 기도의 말만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가요? 이젠 결단하셔야겠지요?
하나님이 나에게서 나오는 불평을 들으시게 할 건지, 기도를 들으시게 할 건지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끝으로 23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고 물으시는 하나님은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 응하는 여부를’ 누가 볼 것이라고요?
바로 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게 하실 것이기에 이제 곧 나도 그 응답을 보게 될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기다림은 있을지언정 실패와 실망은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우리의 현 위치에서 못마땅한 일들과 상종 못 할 일들과 원치 않는 일들이 있다고는 할지라도 우리에겐 우리에게서 ‘들으신 대로 되게’ 하시는, 즉 우리가 ‘기도한 대로 응답’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손은 절대 짧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이 올 한해 주가 행하시기를 믿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을 가나안의 축복의 자리로 인도해 가실 줄로 믿습니다.
첫댓글 우리의 생각이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불평이 아니라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설주일 예배를 드리지 못하였는데
깊이 있는 주일 말씀 올려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