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선생과의 결혼? 힘들었지만 후회 없어…다시 하라면 못한다”
출처 동아일보 :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30124/117557247/1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은 16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 2층 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서재에서 진행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선생은 평생 글을 쓰느라 누워 쉰적이 없다”며 “그의 시간을 아껴주기 위해 정말로 허덕허덕 바쁘게 살았다”고 말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노상 글을 써야 해서 그에게는 서재가 필요했다. 내가 그의 서재를 치외법권 지대처럼 일상 세계와 격리시키려고 기를 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강인숙(90) 영인문학관장(건국대 명예교수)이 다음달 26일 남편 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1934~2022)의 1주기를 앞두고 최근 자전적 에세이집 ‘글로 지은 집’(열림원)을 펴냈다. 강 관장의 표현대로 한 가정의 ‘치외법권 지대’였던 고인의 서울 종로구 평창동 집 서재에서 16일 강 관장을 만났다. 그는 “1년 가까이 이 선생 서재의 디지털 아카이빙(기록보관) 작업을 했지만 아직도 많이 남았다”며 “올 가을쯤엔 (이 전 장관의 바람대로)서재를 일반에 공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생전 모습. 동아일보DB
이 전 장관의 서재는 그가 생전 사용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6400권이 빼곡히 꽂힌 책장, 7대의 컴퓨터가 놓여져 있는 널따란 책상, 마지막까지 그의 삶을 기록해준 카메라까지. 서울대 국문과 동기로 만나 해로한 동갑내기 이어령·강인숙 부부의 숙원은 방해받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온전한 서재를 갖는 것이었다. 평론을 쓰면서 여러 대학의 강의를 나가야 했던 두 사람에게 서재는 창작의 자궁이자, 세 자녀를 길러낼 수 있게 해준 생업의 현장이다.
1958년 10월 23일 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의 결혼식.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동기로 만나 5년 연애 끝에 결혼한 두 사람은 성북동에 셋방을 얻어 신접살림을 차렸다. 열림원 제공
생전 130여 권의 책을 쓴 ‘시대의 지성’ 이 전 장관과 64년을 함께한 삶은 어땠을까. 강 관장은 웃으면서 “대단히 힘들었지만 후회는 없다”면서도 “다시 살라면 못 살 것 같다”며 손사래를 쳤다. “결혼 생활은 학교거든요. 인간에 대해 알게 되고, 부모가 되면 또 얼마나 사람이 돼요? 아이들이 부모를 많이 가르치잖아요. (원고 교정 등) 이 선생 심부름한 것도 후회 안하고, 그럴만한 분이었으니까. 근데 그러면서 내 일을 하려니까 힘들었죠. (이 선생은) 완벽주의자라 누굴 칭찬하는 법이 없었어요. 자기가 한 일도 만족하지 못하고.”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이 16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 2층에 위치한 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서재 앞에서 최근 펴낸 자전적 에세이집 ‘글로 지은 집’을 들어 보이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강 관장은 책에서 남편 이야기하길 꺼려 왔다. 하지만 이번 책은 ‘구순 동갑내기 이어령·강인숙의 주택 연대기’라는 부제처럼 부부가 안정된 보금자리를 마련해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어 이 전 장관과의 일화나 가족사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 선생 이야기가 나오니까 본인에게 모니터링을 시켰죠. 사후에 내기로 합의를 봤고요. 읽고는 아무 말씀 없으셨어요. 원래는 서로의 글을 읽거나 얘기하지 않아요. 집에만 오면 애 셋이 달려들어 ‘내 얘기 좀 들어 달라’고 아우성 치고 잠들면 이 선생은 또 작업을 하셔야 하니까. 그리고 나는 리얼리즘, 이어령 씨는 수사학·기호학 전공이니까 영역도 다르죠.” 그렇게 ‘크로스체크’까지 마쳤는데도 2020년 마무리된 이 책은 발간까지 3년이 걸렸다. 강 관장은 “이 선생이 (투병으로 인해) 책을 못내는 기간이 오니 다 쓴 책도 차마 내질 못했다”고 했다.
이 전 장관의 투병 사실은 2019년 공개됐지만, 대장암 발병은 2015년부터였다. “이 양반이 병이 나니까 그때부터 쓸게 많다고 새벽 2시까지 서재에서 매일 글을 썼어요. 빨리 빨리 다 쓰고 가야 한다고. 나는 글을 쓰고 있다가 2시간에 한 번씩 올라와 상태를 살폈죠.” 이 전 장관이 수술을 받은 뒤 항암치료 대신 집필을 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부부가 각자 써낸 책이 이 전 장관 사후 발간된 첫 유작 ‘한국인 이야기’와 강 장관의 이번 책 ‘글로 지은 집’이다.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왼쪽)이 1962년 서울 한강로2가 연립주택 앞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는 장녀 고 이민아 목사와 함께 찍은 사진. 열림원 제공
결혼 후 삶을 정리하는 글을 쓰는 데 집을 ‘연결고리’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선 집이 제일 중요하죠. 인간과 정착공간의 관계를 생각해 본거예요. 아이들의 탄생, 이어령 씨와 나의 사회생활 진척도, 평론적 글쓰기, 서재의 함수관계 등 모든 게 담겨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피란민이던 강 관장과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이 컸던 이 전 장관에게 있어 결혼 4년 만의 첫 내 집 마련은 “‘간장 종지만한 자유’(박완서 소설 ‘조그만 체험기’에서 인용)가 우리를 정신적으로 해방시켜준” 적지 않은 의미였다.
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이 온전한 서재를 갖기 위해 1974년 주택가가 형성되지 않아 외딴 섬 같았던 평창동 499-3번지에 지은 집. 열림원 제공.
이후 일곱 번의 이사를 거쳐 1974년 산골짜기 외딴섬이던 평창동에 지은 집은 부부의 영원한 보금자리가 됐다. “바위산에 백설이 쌓여 천지가 거룩한 신선계” 같았던 평창동의 자연을 품은 집은 자녀들의 출가 후 2008년 이어령의 ‘영’ 강인숙의 ‘인’을 딴 문학관으로 새로 태어났다.
“그(이어령)의 시간을 아껴주기 위해…” 강 관장은 허덕허덕 바빴다고 했다. “내 작업이 이 사람(이어령)을 해쳐선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어요. 당시엔 인터넷이 없으니 남편이나 저나 평론을 쓰려면 큰 방에 책을 줄 세워 놓고 뽑아 쓰는 방식으로 ‘푸트노트’(주석) 다는 작업을 했는데, 저만 유독 남편이나 애들이 오면 하던 일을 숨기느라 급급했죠. 제가 일하는 걸 보면 가족들이 부담을 느낄까봐서요.”
1993년 평창동 집 대문 앞에서 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오른쪽)과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왼쪽)이 자녀, 손주들과 함께 찍은 가족 사진. 열림원 제공
늘 그에게 1순위였던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강 관장은 어쩌다 전화 한 통 오지 않는 날엔 ‘자식도 없고, 돈도 없는 외로운 노인의 고독’을 떠올린다고 했다. “혼자 살고 싶은 그들에게 응원가를 불러주고 싶어요. 자유로우려면 외로운 건 참아야죠. 요즘은 익숙해져 괜찮아요. 1년의 학습기간이 있었으니까요.”
강 관장은 평창동 집에서 생을 마감한 이 전 장관과 같은 마지막 바람을 적으며 책을 끝맺는다. “우리는 이 집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 이왕이면 송홧가루가 시폰 숄처럼 공중에서 하느작거리는 계절이면 좋겠다.”
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빛명상
추천의 글
비과학, 반과학, 탈과학도 아닌
초과학적 세계로서의 빛(VIIT)
이어령
초대 문화부장관, 문학박사
누구도 근대 과학의 가장 큰 별로 뉴턴을 내세우는데 주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뉴턴은 흔히 우리가 신비주의라고 웃어넘기는 비과학적 세계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은 관심과 심혈을 기울여 연구를 했다. 연금술을 비롯하여 성서의 창조론이나 묵시록의 종말론 풀이에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다. 그래서 말년의 뉴턴은 거의 과학과는 거리가 먼 비과학적 주제에 대해 100만 단어가 넘는 방대한 연구기록을 남기고 있다. 스스로가 자신을 지구사의 초기 시대부터 시작된 '지(知)의 신비주의적인 전통'을 잇는 계승자로 생각했다.
뿐만 아니다. 뉴턴은 자신의 만유인력설을 비롯 그 놀라운 물리학적 발견에 대해서는 그저 젊은 시절의 도락 정도로 여기고 별 가치를 두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뉴턴에 대해서 많은 과학사가 들은 당혹하고 있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별로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다. 이 세상에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현상들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것일수록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사실 풀수 있는 것, 설명 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복잡하고 난해한 것이라 해도 속이 빤한 것으로 별로 대수로운 것이 못된다. 그보다는 과학으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은 신비한 우주 현상 등 왜 인간은 벌이나 나비도 아닌데 꽃을 보면 아름다움을 느끼는지, 밥 먹여주는 일과는 동떨어진 무지개를 보면 왜 마음이 설레는지, 따지고 보면 정말 만유인력에 대한 설명보다 충격적인 것이다. 실제로 미적의 수리문제를 단숨에 푼 뉴턴과 같은 천재도 좌우 대칭으로 된 풀잎 하나의 신비에 대해서는 그저 마음을 두근댈 뿐이었다.
서정주 시인이 '꽃피는 것 기특해'라고 한 것처럼 식물학이 아니라 꽃을 우주의 시각, 생명의 현상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신비감에 빠져 든다. 신비란 비과학이 아니라 과학으로 아직 설명되지 않았거나 과학으로는 풀 수 없는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라고 한다면 세상에는 뉴턴이 물리학을 팽개치고 몰두한 우주의 수많은 수수께끼들이 (과학만으로는 풀 수 없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빛(VIIT)에 관한 이론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그 흔한 신비철학정도로 생각해버렸다. 그러나 실제로 정광호 빛(VIIT)선생님을 대하고 그동안 쌓아온 진지한 연구와 실천에 대해 알고부터는 뉴턴이 왜 물리학보다 연금술이나 성서의 예언 해독에 도전했는지를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보통 과학으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초과학의 세계 ― 비과학이 아니라 반과학이 아니라 그리고 탈과학이 아니라 분명 초과학적인 이 차원의 세계 —우리가 보통 우주라고 간단히 말해버리는 그 세계에는 무엇인가 인간의 혜지를 넘어선 어떤 거대한 힘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아직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분명 신의 영역처럼 인간의 지적 한계를 넘어선 과학적 지성으로는 풀 수 없는 신묘한 힘이 나의 작은 육체에서 광대한 전 우주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작용하는 빛(VIIT)현상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결코 종교나 과학에 위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더 풍성하게 하고 그 연구를 촉진해 주는 힘이라고 생각되었다. 언젠가는 과학의 힘이나 신학의 힘으로 빛(VIIT)의 실체가 밝혀지고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 누구나가 다 이해 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이 책은 그날을 준비하는 징검다리의 하나로 남게 될 것이다.
이어령
출처 : "빛(VIIT)명상" 눈덩이 처럼 불어나는 행복순환의 법칙
2009/09/14초판 1쇄 발행
2021/06/01초판 45쇄 중 P. 8-11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발견을 했다는) 뉴턴이 거의 비과학적 주제를 그만큼 다루었다는 사실을 터득한 이어령 님
그가 내리신 빛에 대한 정의에 감동합니다.
비과학이 아니라 반과학이 아니라 탈과학이 아니라 분명 초과학적인 세계...
귀한 빛의 글 볼수있게해주셔서진심으로감사합니다
우주의 빛에너지, 함께 할수있음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귀한글 감사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