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는 뜻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풍요로워 마음껏 취하도록 술을 마시며 즐길 수 있다는 말이다.
不 : 아닐 불(一/3)
醉 : 취할 취(酉/8)
無 : 없을 무(灬/8)
歸 : 돌아갈 귀(止/14)
출전 : 시경(詩經) 소아(小雅) 잠로(湛露)
이 성어는 시경(詩經) 소아(小雅) 第2 남유가어지십(南有嘉魚之什) 잠로(湛露)에 나오는 말로 천자(天子)가 제후(諸侯)들에게 연회를 베풀었을 때 부른 노래라고도 하며, 정조(正祖)가 즐겨하던 건배사라고도 하는데, 그 내용의 1장은 다음과 같다.
잠로(湛露)
(흠뻑 젖은 이슬)
촉촉이
내린 이슬이 옷깃을 적시는
새벽녘이 되었는가,
햇빛이
나지 아니하면 이슬은
마르지 아니하나니,
밤이
깊어갈수록 편안도 깊어져
잔치는 절정으로 치닫고,
이 어찌
취하지 아니하고
홀로 돌아갈 수 있으리.
湛湛露斯(쟙쟙로사)
匪陽不晞(비양불희)
厭厭夜飮(염염야음)
不醉無歸(불취무귀)
조선 정조임금은 술에 관대했다. 역사적 사실도 이를 증명한다.
때는 1796년(정조20년) 4월11일 2경(밤10시). 성균관 유생 이정용이 술에 취해 궁궐 담장 아래에서 잠을 자다 붙잡혔다.
당시 ‘일성록’에도 ‘유생이 술에 취해 야금을 범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임금이 사는 궁궐 담벼락을 베게 삼아 큰 대(大)자로 누워 잠을 잤으니 중죄라면 중죄다.
그러나 정조는 죄를 묻는 대신, “조정 관료와 선비들은 주량이 너무 적어서 술에 취하는 풍류를 모른다.이 유생은 술 마시는 멋을 알고 있으니 매우 가상하다. 술 값으로 쌀 1포를 지급하라.”고 명한다.
술에 약한 정약용에겐 필통에 술을 부어 마시게 했을 정도로 짓궂었던 정조는 술을 마다하지 않았다.
시경(詩經)에 나오는 염염야음 불취무귀(厭厭夜飮 不醉無歸), 흐뭇한 술자리 밤에 벌어졌으니, 취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못하리라며 술을 권했다. 不醉無歸는 현재까지 건배사로 인용될 정도로 유명한 구절이다.
군자의 음주는 공자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공자는 술 마시고 흥청거리는 모습에 대해, “백날을 수고하고 하루를 즐기는 것”이라며 개의치 않았다.
논어 향당편(鄕黨篇)에는 ‘오직 주량은 한정이 없으시되 정신이 혼란스러운 데는 이르지 않으셨다(唯酒無量 不及亂)’고 공자의 음주법을 전한다.
술자리가 빈번하게 이뤄지는 때다. 여전히 취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분위기가 있긴 하나 주법은 예전과 같지 않다.
밤 9시면 문을 닫는 장소에서 모임을 갖는 신데렐라 송년회가 인기를 끌고, 아예 술을 마시지 않거나, 석잔 이상 마시지 말라는 지침을 따른다.
꽃은 반쯤 핀 것이 좋고 술도 반만 취한 것이 좋다는 얘기다. 적절히 마시고 중간에 그칠 줄을 아는 적중이지(適中而止)의 주법이다.
술꾼들은 술 취하는 단계로 네 단계를 꼽는다. 긴장된 입이 풀리는 해구(解口), 미운 것도 예뻐 보이는 해색(解色), 분통과 원한이 풀리는 해원(解怨), 인사불성이 되는 해망(解妄)이 그 것이다.
건배사로 인기를 끈 ‘인사불성(인간을 사랑하면 불가능도 성공이 된다)’이면 좋으련만 해망(解妄)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다.
올 송년회는 ‘한가지 술만으로 일차에서 9시까지만(119)’ 하거나 ‘8시에 만나 9시에 끝내고 2차는 없는(892)’ 자리이길...
🔘 술(酒)
우리 민족이 즐겨 마시는 술은 거른 형태에 따라 청주(淸酒; 소주)와 탁주(濁酒; 막걸리)로 나뉜다. 이는 자연스럽게 고급 술과 대중 술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옛사람들은 청성탁현(淸聖濁賢)이라며 청주를 성인(聖人)으로, 탁주를 현인(賢人)에 빗대어 표현했다.
그런데 조선 초기 소주는 특정 계급인 양반들에게만 접근 가능한 기호품이었고, 사치스러운 고급주로 인식됐다.
소주를 발효시켜 증류하기 위해서는 곡식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인데, 곡식 낭비 때문에 소주 제조를 금지시키자는 간언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영조는 오랜 기간 금주령을 내린 바 있다.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은 정경세 역시 “술은 사람을 죽이는 독약이다. 아주 통렬하게 술을 끊어서 누룩이나 술잔, 술동이 따위를 일절 집 안에 두지 말라”며 제자들에게 교육을 시켰다.
반면 술의 효용을 인정하고 적절하게 활용한 정조는 기쁜 일이 있으면 신하들과 함께 흠뻑 취하는 술자리를 종종 마련했다.
그는 1792년 희정당에서 열린 연회에서 성균관 제술 시험의 합격자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주고는, “옛사람의 말에 술로 취하게 하고 그의 덕을 살펴본다고 했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는(不醉無歸) 뜻을 생각하고 각자 양껏 마시라”며 합격자들을 격려했다.
술에 대해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동시에 평가한 이도 있다.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는, “술은 기형을 순환시키고(導氣), 감정을 펴고(布情), 예를 행하는(行禮) 세 가지 의의가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이 마셔 혼미한 지경에 이르면 인간의 도리를 해한다”며 긍정과 부정적 측면을 모두 지적했다.
⏹ 송년회 건배사와 주도(酒道)
唯酒無量, 不及亂.
오직 주량은 한정이 없으시되, 정신이 혼란스러운 데는 이르지 않으셨다.
沽酒市脯, 不食.
시장에서 파는 술이나 육포는, 드시지 않았다.
논어 향당편(鄕黨篇)에 실려 있는 공자의 음주 모습이다.
채근담(菜根譚) : 꽃은 반쯤 핀 것이 좋고 술도 반만 취한 것이 좋다.
안자춘추(晏子春秋) : 술이 머리에 미치기 전까지만 마셔라. 허세가 밀려오기 때문이다.
출 취하는 단계 : 긴장된 입이 풀리는 해구(解口), 미운 것도 예뻐 보이는 해색(解色), 분통과 원한이 풀리는 해원(解怨), 인사불성이 되는 해망(解妄)
전통 주도의 세 가지 계명 : 저녁에만 마셔라(酉時誡), 술 마신 후 물로 입을 헹궈라(玄酒誡), 석 잔 이상 마시지 말라(三盃誡)
연말이 되면 이런저런 인연의 송년회가 이어진다. 음주가무는 항상 빠지지 않는다. 잔 돌리는 수작례(酬酌禮)에 언제부턴가 건배사도 필수조건이 됐다.
건배(乾杯)는 잔을 말린다는 뜻이니 다 마시는 원샷이고, 축배(祝杯)는 축하의 잔이니 남겨도 무방하다.
고상하고 멋진 건배사가 속속 개발되고 있다. 술 향기는 백리까지 퍼져가고(酒香百里), 꽃향기는 천리까지 퍼져가고(花香千里), 인품의 향기는 만리까지 퍼져간다(人香萬里).
차가운 술은 위를 상하게 하고(冷酒傷胃), 독한 술은 간을 상하게 하고(毒酒傷肝), 술이 없으면 마음을 상하게 한다(無酒傷心).
정조 임금은 성균관 제술시험에 합격한 유생들과 함께한 주연(酒宴)에서 각자 양껏 마시라며 시경(詩經)의 구절을 인용했다.
흐뭇한 술자리 밤에 벌어졌으니, 취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못하리라(厭厭夜飮 不醉無歸). 이 구절에서 따온 불취무귀(不醉無歸)로 건배사를 했다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은 술 취해 흥청대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모양이다. 송년축제 행사장에서 사람들은 즐기며 취해 있었다.
공자께서 “너도 즐거우냐?”고 묻자, 자공이 대답했다. “온 나라 삶이 모두 미친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즐거움을 알지 못합니다.”
술을 좋아해 유주무량(唯酒無量)한 공자께서 제자에게 말씀한다. “백날을 수고하고 하루를 즐기는 것이다. 긴장만하고 풀어지지 않는 일은 문왕과 무왕이 하지 않았으며 풀어지기만 하고 긴장하지 않는 일도 문왕과 무왕이 하지 않았다.”
조선 3대 태종 임금이 셋째아들 충녕대군(세종대왕)을 후계자로 택한 이유 중 하나가 술을 마실 줄 안다는 것이었다. 중국 사신을 맞을 때 주인으로서 한잔도 마시지 못하면 어떻게 손님에게 권하여 즐거운 자리를 만들 수 있겠는가는 생각이었다.
장남 양녕대군은 지나치게 마시고 차남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충녕대군은 적절히 마시고 중간에 그칠 줄을 알았다. 조선왕조실록에 적중이지(適中而止)라고 기록돼 있다.
불안하고 속상한 연말 술자리가 잦아지면서 자칫 불취무귀(不醉無歸) 하거나, 상위(傷胃) 상간(傷肝) 하지 말고, 적중이지(適中而止)의 지혜를 발휘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