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 칼럼] 근로의욕 줄어? 자본가들의 강변
인간은 굶주림 공포 없어도 열심히 일하는 존재
지배층도 가족 생존엔 관심…대상 사회로 넓혀야
재원 부족도 핑계일 뿐…재정의 우선 순위 문제
기본소득, 사회개혁과 더 나은 미래로 가는 첫발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이상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첫 출발점은 기본소득이다.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먼저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측에서 내세우는 주장을 검토해 보자.
일 하지 않으려는 건 강제노동에 대한 반발
한국에서는 단지 자본가계급이나 지배층만이 아니라 일반인들 속에서도 “기본소득이 있으면 누가 일을 하겠냐? 그러면 경제가 무너질 것이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민주진보세력이나 노동자, 농민을 대상으로 강의를 할 때에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접할 수 있었고 그때마다 놀라곤 했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자본가계급이나 지배층의 심리와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지배층은 자기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백성들을 강제로 노동시키고 착취했다. 노예제 시대의 노예들, 봉건제 시대의 농민들,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자들은 힘든 노동에 시달렸지만 겨우 생계나 유지할 정도의 비참한 삶을 강요당했다. 이 때문에 불평등한 계급사회, 착취사회의 백성들은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려는 동기를 가진다. 심리학자 프롬은 ‘게으름은 비정상적인 것으로서 정신적인 질병의 한 징후’(프롬/김병익 역, 1955, 『건전한 사회(The Sane Society)』, 범우사, 2001, 288쪽)라고 말했다. 즉 본성적으로 의미 있는 노동을 원하는 존재인 인간이 게으름이나 나태함 등을 갖게 되는 것은 강제적인 노동에 대한 반발이자 그것이 초래한 정신적 질병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지배층은 백성들에게 힘든 노동을 강요하기 위해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나 자본주의사회는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예전과 같은 물리적인 폭력은 사용하지 못한다. 이로부터 자본가계급은 새롭고 더 효과적인 채찍을 발명하여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고립적 생존 불안이다. 고립적 생존 불안이란 쉽게 말해 사람들을 개인 단위로 분열시키고 고립시켜 개인들이 홀로 생존 문제를 해결하도록 강제당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불안이다. 기본소득은 고립적 생존 불안이라는 새로운 채찍을 무력화시킨다. 자본가계급이나 지배층이 백성들에게 힘든 노동을 강제할 수 없고 백성들을 마음대로 지배하거나 복종시킬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가계급이나 지배층이 기본소득을 격렬하게 반대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와 정의당 강은미 의원,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 등이 18일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사회적경제 예산 원상복구 촉구 공동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피케팅을 하고 있다. 2023.10.18. 연합뉴스
자본가들이 휘두르는 채찍 무력화 시키는 기본소득
기본소득으로 사람들이 고립적 생존 불안에서 해방되면 일에 대한 동기가 사라지거나 감소할 거라는 주장은 자본가계급이나 지배층의 ‘자본주의적 인간관’에 기초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인간관이란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인간 개돼지론’이다. 즉 그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게으르고, 선천적으로 수동적이며, 물질적 이익이나’ ‘굶주림이나’ ‘또는 징벌의 공포라는 자극을 받지 않는 한 어떤 일도 하려 들지 않는다’고 보는 인간관이다.(프롬/이철범 역, 1976,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 동서문화사, 2011, 103쪽) 한마디로 인간을 매를 맞아야만 일을 하는 나태한 개돼지로 보는 것이다. 인간은 매를 맞지 않아도, 굶주림의 공포가 없더라도 열심히 노동할 수 있는 존재다. 이것은 사회안전망이 상대적으로 잘 갖추어진 북유럽 나라들의 노동생산성이 한국보다 더 높은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자본가계급이나 지배층이 아닌 보통 사람들은 ‘인간 개돼지론’을 반대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을 모욕하는 비과학적이고 반인간적인 주장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기본소득이 있으면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을 것이므로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은 “저는 채찍으로 맞아야만 일을 열심히 하는 개돼지예요. 행여라도 제가 나태해질 수도 있으니까 저를 계속 채찍으로 때려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보통 사람들이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것은 자본가계급이나 지배층한테 자기를 계속 괴롭히고 학대해 달라고 졸라대는 자기혐오적인 자해 행위다.
노동의 동기나 의욕의 문제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즐거운 노동을 할 수 있는 건전한 사회를 건설함으로써 해결해야 한다. 사람들이 채찍질을 당하면서 일하는 사회, 채찍에 맞아야만 열심히 노동하는 사회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무엇보다 그런 사회는 인간의 정신을 심각하게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채찍에 맞으면서 강제적으로 노동하는 시대착오적인 낡은 사회를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즐겁게 노동하는 선진적인 사회로 개혁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의 경제성장도 불가능하다. 이와 관련해 프롬은 기본소득이 실시되면 초기에는 약간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부작용이 ‘단기간 내에 사라질 것’으로 예측했다.(프롬/문국주 역, 1981, 『불복종에 관하여(On Disobedience)』, 범우사, 1996, 122쪽) 그의 예측처럼 기본소득은 사회를 크게 변모시킴으로써 사람들의 노동 동기나 의욕을 근본적으로 제고하고 경제성장을 촉진할 것이다.
불로소득 안 된다면서 일 안 하는 가족 기본소득은 챙기는 모순
자본가계급이나 지배층은 “일을 안 하는 사람한테 왜 돈을 주냐? 불로소득인 기본소득을 반대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런데 자본가계급이나 지배층은 불로소득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 그들이야말로 불로소득의 최대 수혜자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 문제를 논외로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문제가 남는다. 만일 자본가계급이나 지배층이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면 안 된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자기 가족구성원 중에서 일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 혹은 돈을 벌고 있지 않은 사람한테는 밥이나 용돈을 주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면 노동력을 상실한 노인인 부모나 아직 일을 하지 않고 있는 어린 자식한테는 밥이나 용돈을 주지 말고 굶어 죽도록 방치하는 것이 그들의 신념에 부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본소득을 한사코 반대하는 자본가계급이나 지배층도 일하지 않고 있는 자기 가족의 생존을 보장해준다. 그들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해주고 있는 셈이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아마도 “가족이니까!”라고 대답할 것이다. 노동을 하고 있든 아니든 간에 가족이 모든 가족구성원들의 생존을 책임지거나 보장해주는 것은 그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함께 살아가야 할 가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바로 이런 관점으로부터 제기된 것이다. 사회의 구성원들을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함께 살아가야 할 가족 같은 존재, 공존의 대상으로 본다면 사회는 당연히 모두의 생존을 보장해줘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프롬은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반려동물에 대해서도 생존을 위한 권리를 보장해주는데 어떻게 인간인 이웃의 생존권을 부정할 수 있냐고 묻기도 했다.
만일 사람들이 이웃, 타인을 싸움의 대상 혹은 이용 대상으로만 본다면 그들의 생존권에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웃의 생존권을 부정하는 것은 곧 이웃이 나의 생존권을 부정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서로를 공존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들과의 공존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사회는 분열과 갈등, 다툼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 가족이 가족구성원 중에서 노인이나 아이들의 생존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가족 내 갈등이 심해지고 마침내 가족은 붕괴한다. 마찬가지로 사회가 그 구성원들의 생존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사회적 갈등과 반목이 심해지고 그 사회는 궁극적으로 멸망한다.
기본소득은 사람들이 서로를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 화목하게 지내야 할 가족으로 대하면서 사이좋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고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높여준다. 화목한 인간관계가 선물해주는 진정한 기쁨이나 행복을 알지 못하는 자본가계급이나 지배층은 평등하고 화목한 사회를 싫어하고 반대한다. 그런 사회에서는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를 이용한 병적 쾌감을 누릴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지난 8월 23일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ECC에서 열린 제22차 기본소득 지구 네트워크 대회 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2023.8.23. 연합뉴스
기본소득 하고는 싶지만 돈이 없어서 못한다?
그 취지는 좋지만 돈이 없어서 기본소득은 불가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기본소득에 찬성하지만 돈이 없어서 못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기본소득을 반대하기 위해 돈 타령을 하는 것일까? 돈을 빌려주기 싫은 사람들 중에는 솔직하게 빌려주기 싫다고 말하기보다는 빌려주고는 싶지만 돈이 없어서 못 빌려준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게 말해야 상대방한테 매정하다거나 못 되먹었다는 비판을 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에서 기본소득을 대놓고 반대하기는 곤란한 일부 자본가계급이나 지배층은 돈이 없어서, 재정이 없어서 기본소득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세상에는 돈이 없더라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을 살리는 일이 그것이다. 가족 중에서 누군가가 중병을 앓는다고 해보자. 그는 현재 가족을 위해 돈 한 푼 벌어오지 못한다. 따라서 이윤, 돈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그를 그냥 죽게 내버려두는 게 합리적이다. 반면에 사람을 중심에 두고 판단하면 돈이 얼마가 들든 그를 살려내야만 한다.
사실 기본소득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크게 이익이 되는 제도이다. 그러나 나는 심리학자이므로 이 주제는 다른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한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기본소득은 죽어가고 있는 한국 사회를 살려낼 수 있는 생명수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돈에 여유가 있으면 하고 돈에 여유가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기본소득이 병든 한국 사회를 결정적으로 치유할 수 있고, 절대다수의 국민들을 끔찍한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더 행복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무조건적으로 시작해야 한다.
모두가 기본소득의 취지와 의의에 공감하고 모두가 마음과 뜻을 합친다면 기본소득을 시행할 수 있는 돈은 능히 만들 수 있다. 기본소득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굳건하다면 국민들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에서 돈이 있냐 없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임을 의미한다.
이 외에도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주장이나 논거는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지면 관계상 이 정도만 언급하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기본소득은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다.
출처 : "일 안 할 것" "줄 돈 없어서" 기본소득 반대의 핑계들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