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14,1.7-14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여러분 오늘 복음 끝부분에 잔치 베풀 때 누구 초대하라고 그랬어요?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그래서 부를 때는 누구?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해라. 이유가 뭐예요?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제가 피정 때 그런 얘기 많이 하죠. 우리가 기쁘게 사는 여러 가지 얘기, 영적 기쁨이 성경에 나오는데, 그 중 첫 번째가 뭐라 했습니까? 첫 단추를 잘 채우면은 다른 단추는 저절로 채워집니다. ‘되받을 생각하지 말고 줘라.’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쁨을 얻는 첫 번째 방법이라고 했어요. 부부 사이에 왜 마음에 상처가 생기고, 고부지간에 왜 의가 상하고, 신자들끼리 왜 서로가 원수가 되느냐? 처음에는 사이가 다 좋았어요. 이혼하기 위해서 결혼하는 부부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근데 현실적으로는 우리나라 이혼율은 OECD 국가에서 1위예요. 남편에게 베풀고, 며느리에게 베풀죠. 그런데 베풀면서 항상 마음 구석 한쪽에는 어떤 생각을 합니까? ‘분명히 되돌아올 거다. 인간이라면 내가 열을 줬는데 최소한 세 개는 안 주겠어?’ 세 개 되돌아옵니까? 아무것도 안 돌아와요. 그때 우리 마음에 씨가 뿌려진다고 그랬죠. 그 씨 이름이 뭐라고 그랬어요? ‘서운한 씨앗’이 그냥 툭 떨어져요. 그런데 그놈의 씨는 물 안 주고 비료 안 줘도 잘 자라요, 그 서운한 씨앗에서 ‘미움의 싹’이 비집고 올라와요. 그리고 미움의 싹에서 ‘분노의 줄기’가 쭉쭉 올라가고, 마지막에는 ‘무관심’이라는 열매가 맺어져요. 무관심이라고 하는 것은 성서적으로 볼 때 영적 살인, 한집에 있어도 남남인 거죠. 이 무관심이라는 어둠의 열매의 시작은 아주 미미했죠. 서운한 감정이에요. 그러면 애초부터 서운한 감정을 안 갖게 하려면 답은 이미 나왔어요. 줄 때부터 어떡하라고요? 그렇죠. 되받을 생각하지 말고 줘라. 오늘 예수님께서 ‘있는 사람한테 베풀면 분명히 너도 되받으니 아예 받을 수 없는 사람한테 베풀어라.’ 제가 늘 하는 얘기랑 똑같은 얘기예요.
제가 8월 1일부터 전업주부로 나섰다고 그랬어요. 이렇게 혼자 있으니까 참 좋아요. 사제의 오복 가운데 첫 번째 복이 식복사 복인데, 마지막 자매 말고는 대부분 참 힘들었어요. 음식을 잘하면 성질이 개떡이고, 너무 착하면 음식을 못 하고, 음식도 잘하고 착한데 정리를 못 해요. 아마 내가 눈이 높아서 그런가 보다 생각해요. 그런데 혼자 하려니, 온종일 일해야 해요. 아침에 일어나서 청소하고, 중간중간 밥해 먹고, 설거지 끝나면 또 밥 먹을 시간이에요. 요즘 내가 정말 주부들 정말 존경스럽다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그래도 재밌어요. 은퇴 전에는 제가 못 느끼고, 깨닫지 못했던 것에 대해 아주 작은 것이지만 감사하는 것이 많이 생겼어요. 그전에는 내가 살림할 일도 없고, 설거지통에 손 넣을 일도 없고, 분리수거를 할 일도 없었죠. 이런 것들이 전부 다 현실로 나한테 다가오니까, 강론 준비를 하면서 은퇴 전에는 못 느꼈는데 요즘 내가 깨닫는 것들을 쭉 한번 생각나는 대로 적어봤어요. 첫 번째가 가위입니다. 가위의 존재가 이렇게 다양하구나! 난 가위는 종이나 헝겊만 자르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집게로 딱 집고 가위로 자르니, 칼을 안 쓰고도 김치를 자를 수 있어요. 예전 식복사 자매님이 가위를 두 개나 칼 옆에 꽂아놓은 이유를 알았어요.
두 번째 내가 느낀 게 내가 밥을 끝내주게 잘해요. 밥솥이 하는 거죠.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를 밥을 해주면 너무 되거나 너무 질을 때가 있죠. 밥솥 안을 보면 한 컵을 넣었을 때 부어야 하는 물 눈금이 있죠. 거기 딱 맞추면 내 입에는 돼서, 딱 2mm만 더 너 넣어요. 그러면 내 입에 딱 맞아요. 그리고 밥 냄새가 그렇게 좋은 걸 처음 알았어요. 김이 날 때 옆에 있으면 밥 냄새가 확 올라오는데, 이것은 샤넬 5 향기보다 매괴 향기보다 더 좋아요. 해주는 밥만 먹었을 때는 절대 못 맡았던 냄새였어요. 그래서 밥솥에 대한 고마움을 내가 느껴요.
세 번째로 내가 느끼는 것은 세탁기에 대한 고마움이에요. 은퇴하면서 신자들이 사 주었죠. 밑에는 세탁기 위에는 건조기죠 그런데 처음에는 색깔 있는 거와 하얀 것을 같이 집어넣었어요. 런닝이 새파래지는 거예요. 그래서 물어보니 색 있는 것과 색이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한대요. 그리고 세제를 많이 넣으면 더 잘 빨아지는 줄 알고 꽉 채워서 넣었더니, 가끔 오는 조카딸 아이가 6개월 쓸 것을 보름 만에 다 썼다고 하네요. 어느 정도 넣는 것인지 이제 배웠어요. 그러니까 신학교에서 안 배웠던 것, 신부 생활하면서 안 배웠던 것을 배워요. 그리고 너무 신기한 것이 빨래를 넣고 버튼을 누르면, 띵 소리가 나면서 돌아가요. 그 안을 어떤 때 나는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면, 고양이도 따라 쳐다봐요. 물이 나오고, 돌리고, 막 때리고 야단법석을 치다가, 구정물은 밑으로 나오고. 그런데 불편한 것 하나는 자동으로 빨래가 다 되면 건조기로 올라갔으면 좋겠어요. 세탁기를 위로 건조기를 밑으로 내려서, 빨래 끝나면 세탁기가 문이 열려서 옷이 건조기로 탁 떨어지면 좋겠어요. 또, 건조 끝나고 보면 양말 한 짝이 없어 찾아보면, 세탁기 바닥에 붙어 있어요. 아무튼 세탁기 만든 사람에게 노벨 평화상 줘야 해요. 옛날 할머니가 엄동설한에 냇가에 가서 얼음 깨면서 방망이질하며 빨래하던 모습을 저는 보았거든요.
네 번째는 인덕션을 한참 쓰면 냄비 올라왔던 자리가 떡이 져요. 물티슈로 아무리 닦아도 안 지워져서 유튜브를 찾아봤죠. 세제를 쇠 수세미에 묻혀 문지르라는 거예요. 나는 유리가 상할 줄 알았는데, 유리도 상하지 않고 때도 깨끗하게 벗겨진다는 것을 배웠어요.
다섯 번째 반찬을 담는 방법이에요. 처음에는 반찬마다 접시를 해서 따로 담아 먹었어요. 그랬더니 귀찮고, 설거지가 왜 이렇게 많아? 그래서 그다음에는 큰 접시에다 덜어서 먹었죠. 그런데 그것보다 내가 어저께 뭘 주문했느냐? 식판을 주문했어요. 군대에서 쓰던 철 식판 말고 품위 있게 사기로 된 식판을 샀어요. 이러한 지혜도 생기더라 이거예요.
그다음에 여섯 번째 산골에 사니 제일 힘든 것이 남은 음식물 버리는 것이에요. 저는 음식을 기계로 잘라 묻어요. 기계 소개해 달라면 해 줄 수 있어요.
일곱 번째 잠자기 전 마른 누룽지에 물을 뿌려 놓으면 아침에 훨씬 부드러운 숭늉과 누룽지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먹기 전에 물 붓고 끓이면 부글부글 막 올라오고, 먹어보면 딱딱해서 이에 끼기만 해요.
사실은 훨씬 더 많은데, 어제 그냥 생각난 것만 적어보았어요. 깨달았을 때 느끼는 이 기쁨은 정말 좋았고, 한 달가량 살다 보니 자신감도 좀 생겼어요. 이따 냉장고 한번 열어보세요. 물론 교우들이 준 것인데, 그것에 모두 이름을 써 붙였어요. 옷장도 각 잡아 쫙쫙 정리되었지만, 반찬 통도 탁탁 정리되어있어요. 오늘 많이들 회개하고 가시길 바랍니다. 세상에! 신부님도 이렇게 정리를 잘하고 사시는구나!
오늘 1독서에는 ‘겸손하여라, 그러면 주님의 은총을 받으리라.’ 하는 말이 나오죠.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핵심은 뭐예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세상에는 높고 귀한 사람,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참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을 대개는 그런 사람들한테 잘 안 보여줬던 것 같아요. 겸손한 사람에게만 드러내셨죠.
‘겸손’을 라틴어로 겸손을 humilitas(후밀리다스)라고 해요. 어원적으로는 라틴어 후무스(humus)에서 왔고, 땅, 흙을 뜻해요. 한국에서 제일 비싼 땅은 검색해 보니까는 충무로 쪽이에요. 그 땅이 왜 비싸요? 이유는 피정 때 내가 얘기 다 했죠. 인간들이 많이 밟고 다니기 때문에 비싼 거예요. 산골짜기, 생전 사람 하나 안 오는 땅은 싸지만, 많이 밟힐수록 비싼 땅이 돼요.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비싼 영혼이 되려면 사람들한테 많이 밟힐 각오를 해야 해요. 이제껏 누구를 밟고만 살았다면은 회개해야죠. 그리고 밟힐 줄 알아야 해요. 우리 실제로 살아가다 보면 밝힘을 받는 느낌을 받을 때 있죠. 누구랑 대화하다 보면 잘난 것도 없는 게 나를 개무시한다는 모욕감을 느낄 때 있어요. 밟으라고 그러세요. ‘그래, 내가 실컷 밟혀야 주님이 나를 비싼 영혼으로 거룩한 영으로 만들어 주신다.’ 사람에게 상처받는 거 두려워하지 말라는 얘기죠.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이 있으면 ‘하느님이 알아서 심판하실 거고, 알아서 벌주실 거고, 저 인간이 나한테 준 상처 때문에 내가 지금 잠을 못 잘 이유가 없어. 담대해져라!’ 비싼 영혼이 되려면 많이 밟혀야 합니다. 또 어떤 땅이 귀해요? 더러운 거 많이 받아들인 땅, 거름이 많이 들어간 땅이 귀한 땅이죠. 뒤뜰에 음식 찌꺼기 잔뜩 묻고 몇 개월 후 씨앗을 심으면 다른 땅보다 더 잘 자랄까요? 잘 자라죠. 기막힌 거름으로 바뀌어 있어요. 그래서 귀한 영혼이 되려면 더러운 것을 많이 끌어안아야 해요. 모욕감, 수치, 분노, 이런 것을 모두 끌어안다 보면 귀한 열매가 맺어진다는 얘기죠. 그래서 명심하세요. 겸손이라고 하는 단어는 땅이라고 하는 단어에서 나왔다고 그랬죠. 땅의 존재 이유는 사람이 밟고 다녀야 하고 더러운 것 다 끌어들여야 해요. 마찬가지로 비싼 영혼이 되고 귀한 영혼이 되려면 많이 밟혀야 하고, 더러운 것을 모두 끌어안아야 해요. 그래야만 우리는 겸손한 사람이 되면서 하느님이 들어 올려주는 사람으로 바뀐다는 거죠. 그렇게 살고 있나 한번 뒤돌아봅시다.
제가 크리스천의 영성을 딱 세 마디로 요약을 피정이나 강론에서 많이 했어요. 기억나세요? 첫 번째 걸레의 영성, 두 번째 연탄불의 영성, 세 번째 바보의 영성. 순서는 상관없어 바보든 걸레든 연탄불이든 예수님의 삶은 겸손의 삶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삶을 세 가지로 정리를 하고 압축을 시켜보면은 지금 얘기한 이거예요.
첫 번째 예수님은 바보처럼 사셨다. 큰 바보다. 그러면 우리도 작은 바보처럼 살아야죠. 그런데 요즘은 참 바보 보기 힘들죠. 어찌 그렇게 하나같이 다 똑똑하고 영특하고 잘났는지. 성당도 보면 본당 신부보다 다 잘났어. 신부님이 설령 판단을 잘못했다 하더라고, 그냥 신부님 따라가면 하느님이 알아서 결과만큼은 다 선하게 만들어 주시는데. 뒤에서 구시렁거리고, 투서질하고 한단 말이야. 옛날에 개신교에서는 목사 쫓아내는 교회는 많았어요. 그러나 지금 천주교도 투서 때문에 그렇게 쫓겨나는 신부들이 많단 말이야. 내 살다 살다 별의별 기도도 다 들어봤어요. ‘신부 보내기 9일 기도’ 아이고 나 참 짜증 나죠. 이게 말세예요. 천주교가 어떻게 이렇게 바뀌었는지 몰라요. 바보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는 예비자들이 꾸역꾸역 늘어나요. 바보들만 있는 반 모임은 방이 모자랄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요. 그런데 잘난 인간들만 있는 반 모임에 가고 싶겠어요? 나라도 안 가요. 그런데 정말 바보 같은 사람 순진한 사람이 많으면 반 모임 오기가 기다려지는 거예요. 현대 교회의 제일 큰 문제는 바보가 없어요. 다 예수님보다 다 잘났어요. 십자가에 매달리는 이분이 능력이 없어서 매달려 계신 거 아니잖아요. 말 한마디면 세상의 왕이 될 수 있는 분이에요. 이분 따라가야 하잖아요. 저 양반은 오는 축복은 좋아하면서 저 양반이 걸어가신 길은 왜 안 따라갑니까?
두 번째 예수님의 삶은 연탄불의 삶이셨죠. 예수님이 나는 세상에 불 지르러 왔다고 하시어, 바오로 사도를 비롯하여 많은 천주교인이 네로 황제 때 방화범으로 몰려 죽었어요. 하지만, 그 불은 무슨 불이요? 성령의 불이에요. 시커먼 연탄을 붙이려면 불기가 있는 놈이 밑으로 기어 내려가야 하죠. 이건 만고의 진리예요. 불기가 있는 놈이 위로 기어 올라가면 불붙었던 놈마저 불이 꺼져요. 아래 있는 불기 있는 놈은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내 위의 놈에 불을 붙이고 내 생을 마감하려면 밑으로 내려가는 불편함을 겪어야 해요. 또, 밑으로만 내려가면 안 돼요. 구멍이 맞아야 해요. 구멍이 안 맞으면 불이 꺼지죠. 예수님은 더 밑으로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내려가신 분이에요. 여러분 가운데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분 손 들어보세요? 없죠. 물론 옛날에는 밭일하다가도 애를 낳기도 했었어요. 하지만 마구간에서 난 사람은 없을 거예요. 내가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도 예수님보다 가난하게 산 사람은 없어요. 하느님이, 메시아가 더 어떻게 내려갑니까?
세 번째는 예수님의 삶은 걸레의 삶이셨죠. 예수님의 삶은 공생활 시작하면서부터 치유 구마. 더러운 것 닦아주고, 흘러내리는 피 닦아주고, 상처를 치유시키는 삶이었어요. 이게 바로 걸레의 삶이셨어요.
그래서 제가 40년 가까이 ‘크리스천의 영성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이 세 가지만 우리가 실천하자. 그럼 우리 적어도 성인까지 안 돼도 복자품에 오를 수 있다.’ 했어요. 예수님이 바보이듯이 바보처럼 살자, 허허실실하게 살자. 또 예수님이 내려가셨듯이 밑으로 내려가자, 위로 올라가려고만 하지 말고. 또, 예수님이 더러운 것을 닦아주시고 대가 바라지 않으셨듯이, 내 몸과 마음과 가지고 있는 능력과 재산을 이용해서 내 주변에 정말 상처받고 더러운데 내가 닦아주어야 할 곳이 어디 있는가 찾아야죠.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겸손의 삶이라는 겁니다. 아멘
노자 아시죠? 노자는 물을 최고의 선으로 보았어요. 노자는 물의 특징을 세 가지로 이야기했는데, 첫 번째 물은 다투는 법이 없다. 내려온 물이 올라가려고 하지도 않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물은 내려와요. 그래서 산꼭대기에 있는 물이 밑으로 잘 내려가면, 모난 바위도 깎으면서 큰 강으로 내려가다가 바다까지 가죠. 그리고 태양의 힘으로 증발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요. 이렇게 물처럼 낮은 곳으로 임하면 나중에 승천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물은 자기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 둥근 곳에 들어가면 둥글게, 세모나게 생긴 그릇에 들어가면은 세모 모양을 만들어요. 절대 자기 고집을 부리지 않아요.
세 번째로 물은 만물을 키우면서 생의 기운을 준다. 그렇죠? 물이 없으면 죽잖아요. 사람이든 짐승이든 식물이든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에요. 그래서 옛날부터 강가에서 문화는 발달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언젠가 강론 때 물은 많은 종류가 있다 했습니다. 영성 신학에서 물은 굉장히 중요한 테마입니다. 물에는 긍정적인 의미의 물이 있고 부정적인 의미의 물이 있어요. 긍정적인 의미의 물을 내가 제목만 드리면, 낙수, 유수, 담수, 호수, 용수, 정수, 약수, 생수, 조수, 천수가 있어요. 부정적인 의미의 물에는 상수, 하수, 침수, 누수, 한수, 건수, 무수, 운수, 호수, 해일, 마지막으로 밀수가 있어요. 밀수도 어쨌든 끝에 ‘수’가 들어가잖아요. (웃음)
그중에서도 담수, 사실 여기 연못도 담수예요. 전 주인이 흙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고, 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을 막아 고이게 만든 거예요. 이 담수는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무리를 형성하는 거죠. 즉, 담수는 공동체를 뜻해요. 계곡마다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큰 담수가 만들어지듯이 교회 공동체도 그렇죠. 그런데 담수는 아주 상반된 성격이 있어요. 첫 번째는 부력이라는 게 있어요. 부력은 가라앉지 않고 뜨게 하려고 하는 힘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수영을 할 수 있는 거예요. 힘 쫙 빼면은 우리 몸이 뜨고 힘이 들어가면 가라앉아요. 부력, 상대를 띄워주는 것입니다. 우리 영성에서 얘기하면 영적 부력은 상대편을 띄어주는 것, 칭찬하는 것, 위로하는 것, 격려하는 것, 상대를 높여주는 것이에요.
또 담수에는 전혀 반대의 성격인 침력이 있어요. 침력은 끄집어 내리는 거예요. 그래서 익사하잖아요? 영적 침력은 상대를 헐뜯는 것, 비판하는 것, 험담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사람에 입에서 남 칭찬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여러분들도 각자 생각했을 때, 정말 남에 대한 칭찬해준 것이 험담하고 비판한 것보다 훨씬 더 적다면 이것은 아직 신앙인이 아니고 종교인입니다. 그냥 꼴만 갖추고 있는 종교인.
우리는 어느 쪽의 힘으로 살아야 합니까, 부력입니까, 침력입니까? 맞아요, 부력! 그것이 바로 겸손이에요. 겸손한 자는 다른 사람을 들어 올려요. 그런데 사실은 들어 올려지는 사람보다는 들어 올리는 사람이 더 빛나요. 주인공보다는 조연이 더 빛날 때가 있잖아요. 이렇게 겸손한 자는 공동체 안에서 부력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볍씨를 파종하기 전에 먼저 소금물에 담는 거 아시죠. 왜요? 싹을 틔울 수 있는 좋은 볍씨는 아래로 가라앉지만, 쓸모없는 쭉정이는 둥둥 떠요. 가벼운 사람 즉 교만한 사람은 위로 자꾸 드러내려고 내세우려 해요. 하지만 무거운 사람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아요. 아까 말한 3대 영성 가운데 연탄불의 영성처럼 밑으로 내려가려 해요. 겸손이야말로 모든 덕의 어머니이고 하느님 앞에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하느님은 낮은 곳에 계신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는 바로 겸손의 신비임을 또한 잊지 맙시다. 바보가 되고, 불붙은 연탄이 돼서 밑으로 내려가고, 걸레가 돼서 더러운 것 닦아주면서 부력의 역할로 늘 다른 사람을 띄어주려고 애쓰는 자가 바로 오늘 예수님이 그토록 강조하는 겸손한 자임을 잊지 말도록 합시다.
♣2022년 연중 제22주일 (8/28)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