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질투와는 좀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아기자기하고 찐득한 정성 내지 사랑 이런 것들이 담뿍 담겨 있음이 불 보듯 훤한 초콜릿. 그 사진을 보면서 말이다. 한때 '이 놈이 내 놈이구나'싶은 안도감과 깊은 유대를 느끼게 해 줬던 내 '엑스 보이프렌드'에게 그의 '뉴 걸프렌드'가 만들어 준 발렌타인 데이 초콜릿을 보면서 내가 느낀건, 지금 생각해도 질투는 분명 아니었다. 그런 구저분한 감정을 느끼기엔 애석하게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고, 그리고 우린, 각자 새로운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사진들을 보며 그토록 큰 울림이 있었던 것은, 이를테면 이런 이유에서다. "아, 나는 이 놈을 사랑한 게 아니었구나" 하는 자아비판 같은 것 말이다.
어렸고 편협했고, 근거없는 자신감에 차 있었고, 대상 모를 열정에 가득했던 그 때의 나는 '장사치들 초콜릿 팔아먹으려고 만든 날의 인위적 들뜸에 일조할 필요가 뭐 있어'하는 쪽이었다. 그리고 발렌타인 데이라는 날에 대한 생각은 아직도 '강요된 축제'의 스펙트럼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하지만 나는, 그때의 나는,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 시간을 희생하고 내 신념을 수정하는 일에 매우 인색했다. 사랑이라는 행위가 어차피 '이성'의 범주에 있지 않고, 매우 유치찬란하면서도 의미 있는 일임을 인정하는 일은 왠지 모종의 타협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엑스 보이프렌드'의 '뉴 걸프렌드'가 그를 위해 만들고 꾸미고 지지고 볶아 선사한 것들을 이쁘게 찍어놓은 사진들을 보면서 그제서야 나는 그를 진짜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것, 따라서 그가 내 친구와 바람을 피워 나를 아프게 했고 그 자식은 나쁜 자식이었으니 재수 없어 똥 밟은 것으로 치자는 식의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사랑은 아니었던 관계, 나도 그도 서로에게 잘한 점은 없었다. 급기야 '얼마나 좋았으면 니가 바람까지 피웠겠니, 눈치도 없고 사랑도 부족했던 내 잘못이다'는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그들이 내일(정확히 말해 오늘이 되겠다, 열 두 시가 넘었으니) 부부가 된단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이제 나는 정말로 괜찮아 졌음에도 아직 감히 내게 청첩장을 보낼 용기까진 없었는지 그는 측근을 통해 소식을 알려 왔다.
진정성 담뿍 담은 쿨한 마음가짐으로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은 그러나 매우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일일 테다. 학교 때 나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던 관계, 소위 말하는 '캠퍼스 커플'의 당사자가 그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은 아마도 몇몇 사람에게는 매우 불편한 일일 것이다. 불편한 축의금을 진짜배기 축하(내 딴엔 소주 한 잔 곁들인, 행복하게 잘 살아버리라는 기도 정도?!)로 대신하고 있는 것을, 그 자식은 알고나 있을까.
첫댓글 그 자식...나쁜 자식인 것 같은데요... 님 참 착하시네요.. 그래도 행복을 기도해준다는거.. 에휴..근데 정말 마음 아프네요.. 바람난 인간이 결혼까지 골인하다니.. 분명...님은 더 좋은일이 생길겁니다~!
님.. 멋지네요.
그럼 바람나서 날 떠났던 그 놈도 그 여자와 결혼할 가능성이 있는 건가...ㅋ 전 님처럼 행복을 빌어줄 수 있을지...의문이 드네요~더욱 더 좋은 남자 만날 겁니다! 님도 나도~
알 겁니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이 사실을 알고있는 친한 친구놈과 서로 눈빛만으로 대화한채 아무말 없이 소주한잔 입에 털어넣었다에 한표...
뭔가 공감이 많이 가는 글이네요. 비록 팩트는 다를지언정....
이제는 담담해진 옛 사랑이지만 그 사랑을 차분하게 잘 숙성시킨 님의 성숙함이 글 속에서 퐁퐁 묻어나옵니다. 멋진 글이군요. 꼭 행복한 사랑 하실거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