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그후 남부의 초상
2차 대전 이후의 미국은 승전국으로서 위상을 누리게 된다. 경제와 정치는 급속도로 안정화가 진행되고 사람들의 삶은 점차 윤택해 지지만 남부의 일부 도시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타인을 배척하며 살아내야 했다. 영화는 5, 60년대 오하이오와 웨스트 버지니아를 배경으로 악으로 점철된 인간 군상과 무너져가는 선한 이들의 삶을 아빈 가족의 연대기를 통해 보여 준다. 이성적 사고와 판단 대신 신이 하시는 말씀을 맹목적으로 믿는 이들과 그를 이용하는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 살인과 폭력, 부정과 부패로 점철된 남부의 모습과 거기서 벗어나려는 아빈은 관객에게 무엇이 악마와 인간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지 묻고 있다.
십자가의 무게
윌러드는 전장에서 전우를 매단 십자가를 목도한다. 가죽을 벗긴채 산채로 매달린 그를 고통에서 해방 시키기 위해 방아쇠를 당긴다. 그 트라우마를 안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만 사랑으로 새로운 삶을 얻고 그 행복을 지키기위해 다시 기도를 하고 싶다 말한다. 그는 자신의 담벼락으로 쓰이던 나무를 뜯어 만든 십자가를 만든다. 전장의 참혹함이 아닌 자신의 일부를 도려내 가정의 평안을 기원하는 것이다. 아내가 암에 걸리고 그의 기도는 광기에 사로잡혀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결국엔 키우던 개를 제물로 바쳐 아내를 살려달라 신에게 애원한다. 간절한 기도에도 아내는 세상을 떠나고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윌러드 역시 아들 아빈만을 남기고 아내의 뒤를 따른다. 시간이 흘러 청년이된 아빈은 또다른 교회에 그려진 십자가를 주시한다.
파렴치한 욕망만이 가득한 목사와 교회가 그 그림에 투사된 것처럼 아빈에겐 읽힌다. 영화속에 십자가는 이처럼 다양한 상징으로 쓰인다. 명분 없는 전쟁의 실체이며, 기댈곳 없는 가난한 자들이 기약없는 희망이자 믿음에 대한 가차없는 배신이다. 어떤 십자가도 인물들에게 구원을 주지 않는다. 모두 거기에 기대려 하지만 무게를 견디는 사람은 오직 아빈 한사람이다. 그에게 십자가는 아버지가 주신 가르침이며, 억울한 죽음을 맞은 리노라다. 그 무게를 인지하는 순간 십자가는 그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루거 권총이 길을 제시한다.
장르적 매력을 대신하는 문학적 은유
영화는 5, 60년대 남부를 그려내면서 당시 미국의 어두웠던 부분을 문학적 은유로 표현하려 했다. 그런 점에서 원작자의 내레이션은 적절한 장치로 보인다. 앞서 말했지만 문학적 은유가 작품에 녹아있다는 사실은 플롯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윌러드와 스치는 인물은 모두 묘한 인연으로 얽혀있다. 식당에서 주문 순서가 바뀌면서 만나게 된 연인 샬롯, 후에 살인마 부부가 되는 칼과 샌디 다음으로 교회의 인연인 목사 로이와 헬렌을 보여준다. 영화의 3/1지점까지는 이 인물들의 이야기가 각각 진행되다 조금씩 연결된다. 윌러드와 샬롯은 각자 비슷한 시기에 아이가 태어나고 자신들의 삶을 살아간다. 헬렌의 남편 리는 신과 교감을 하려다 점점 미쳐가다 기어이 아내를 죽이고 부활 시키겠다는 미친 시도를 하지만 신은 응답하지 않는다. 도망치듯 마을 을 떠나던 리는 히치하이킹을 통해 칼과 샌디 부부를 만난다. 그들은 리를 시작으로 사람을 죽이고 그 흔적을 사진으로 남기는 엽기적인 행각을 이어간다. 윌러드는 아내를 잃고 자살을 하고 만다. 헬렌과 윌러드에 아이들은 어머니에게 보내지고 조부모의 손에 자란 아이들은 자라면서 자신들의 부모와 비슷한 성향을 보인다. 리노라는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처럼 신앙심이 강한 사람으로 아빈은 아버지처럼 절대 굴복하지 않는 성격으로 성장한다. 이들의 삶 역시 대물림 되듯 부모와 비슷한 족적을 밟는다. 헬렌은 목사 프레스턴의 아이를 갖게 되지만 그에게 버려져 자살을 택하고, 아빈 역시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괴로워 한다. 악마같은 인간들로 인해 비참한 삶을 대물림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플롯의 한축을 만들고 후반부에 진행되는 아빈의 복수 역시 여기저기 풀어둔 이야기들을 하나로 모으면서 결말을 향해 간다. 아빈은 복수를 위해 교회로 가 프레스턴을 죽이고 도망치듯 차를 몰고 마을을 떠나지만 히치하이킹을 해야하는 순간을 맞는다. 이때 운명처럼 만난 이들이 샌디와 칼이다. 칼은 여느때처럼 사람을 죽이려 하지만 눈치를 챈 아빈에게 선수를 당하고 샌디 역시 대치하다 죽음을 맞는다. 동생의 소식을 접하고 사건을 조사하던 리는 아빈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추적한다. 동생의 복수를 하려던 리는 결국 아빈에게 죽고 만다. 아빈과 연결되었던 악마들은 모두 죽었다. 전체적인 스토리를 보면 스릴러나 액션같은 장르적 요소를 극대화할 부분이 충분하다. 하지만 영화는 대물림 되는 비극과 흩어진 이야기들이 하나로 뭉쳐지는 과정을 점진적으로 보여주는데 치중한다. 플롯 자체에 의미를 둔다면 반복되는 역사와 종교의 현대적 의미, 악마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질문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장면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아빈은 히치하이킹으로 차를 얻어탄다. 라디오에서는 배트남전 파병에 관한 지루한 연설이 흐르고 장발에 수염을 기른 남자는 마치 예수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남자는 자신이 신시내티에서 왔다는 말을 한다. 그 순간 관객은 신시내티 출신 희대의 살인마 찰스 맨슨을 떠올릴 것이다. 아빈을 태워준 그 남자는 예수일 수도 살인마 일수도 있다. 사람을 믿을 수 없어 피곤한 자신을 깨우려는 아빈을 점점 잠이 들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악마를 찾는다면 거울을 보라
처음에 악마는 적군이었다. 솔로몬 제도에서 사람 가죽을 벗겨 십자가에 걸어두는 일본군이 그랬다. 고향으로 돌아오니 나와 내가 가족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 결국 나 자신 까지도 악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들은 악마들과 맞서 싸웠다. 악마를 죽였으니 그들의 세상에서 떠나야 했다. 카메라의 관찰하는듯한 무심한 시선과 어딘가 냉소적인 내레이션은 돌이켜 보면 질문이었다. 악마가 죽으면 악마는 사라졌는가? 라디오에선 전장으로 청년들을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라는 틀 안에서 악마는 누구인가? 보이지 않는다면 거울을 보라 그 속에 악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