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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심을 위한 기도
시 25:15-22
15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16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17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18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19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20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21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22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시 25:15-22 / (아인) 내 두 눈이 애타도록 여호와를 바라봄은 주님만이 올무에 걸려 든 이 두 발 자유롭게 하심이라. 16) (페) 이 몸 돌아보소서. 어여삐 보아주소서. 어디 하나 기댈 데 없이 외로운 이 몸, 무엇하나 가진 것 없어 서러운 이 몸, 17) (차데) 이렇듯 마음속에 번민이 많고 이렇듯 괴로움에 휩싸여 있으니 이 몸을 건져 주소서. 18) 이 괴로움과 이 고통을 보시고 내 모든 허물을 용서하소서. 19) (레쉬) 보소서, 내 원수들이 저리도 많습니다. 나를 미워하며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하여 어떻게든 고꾸라뜨리려 벼릅니다. 20) (쉰) 이 몸을 지켜 주소서. 이 몸을 건져 주소서.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21) (타우) 이 몸 주님을 바라고 애타게 그리워하오니 바르고 온전하게 살게 하소서. 22)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일어설 수 있도록 하나님, 이스라엘을 구해 주소서.
본문은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며 자신의 곤궁한 사정을 솔직히 아뢰면서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달라는 다윗의 기도입니다.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15-18) 다윗은 고독한 환난 중에서도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그는 자신의 위기를 그물로 비유합니다. 외롭고 괴롭다고 하소연합니다. 그의 친구들이 다 떠난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를 굽어보시고 내게 은총을 베푸소서 내 마음의 근심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고통을 풀어 주소서’라고 간곡히 기도합니다. 다윗은 이런 곤고와 환난을 자신의 죄와 연관시킵니다. ‘내 소시의 죄와 허물’(7), ‘죄악이 중대 하오니’(11)라는 고백은 자신의 죄악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것(11)이므로 그 죄의 심각성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죄로 말미암아 무서운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나온 시절의 모든 죄를 회개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18). 부패한 죄성 때문에 과거의 행위에 실수가 많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크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모든 죄를 사하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19-22) 죄는 지고 가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입니다. 다윗의 곤고와 환난은 구체적으로 원수들과 이어집니다. 그 원수들은 다윗의 죄 때문에, 그를 심히 미워하였을 것입니다. 이 미움은 생명을 위협하는 압제와 폭행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죄와 시련을 통해 하나님께 피하였고, 더욱 가까이 갔습니다(20). 그는 회개와 용서를 구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올바르고 흠 없게 살아가도록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21). 다윗은 큰 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행하며,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기로 한 것입니다(왕상 9:4). 이제까지 자신의 구원을 위해 간구했던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를 사하시며 그들의 구원을 위한 중보 기도로 이 기도를 끝맺고 있습니다(22).
적용: 누구든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힘입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없으며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항상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봄을 알리는 봄의 전령사 목련, 개나리, 매화 등 봄꽃 소식은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신기하게도 백목련은 잎이 돋기 전에 앙상한 가지 끝에 꽃이 핍니다. 보통 꽃나무처럼 푸릇한 잎이 먼저 나오고 열매 맺기 전 꽃을 피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추운 겨울 끝자락 그리고 이른 봄에 피어야 하는 목련은 이 세 가지 기능을 모두 하기엔 에너지도, 시간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목련은 꽃과 잎 중 번식에 가장 중요한 꽃을 먼저 피우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잎을 낼 것인가, 꽃을 피울 것인가 백목련의 꽃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것처럼 사람도 인생의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가 찾아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 설 교 >
경외감
시 25:12-14 / 서명성 목사
올림픽의 꽃이라면 지구상의 가장 빠른 사나이를 결정하는 100m 경주를 들 수 있습니다. 금년 런던 올림픽에도 우사인 볼트가 관심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볼트가 400m 경주에 참여하였더라면 우승을 할 수 있었을까요? 거의 불가능했을 겁니다. 단거리와 중거리는 달리는 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던 적이 있습니다.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라는 영화는 1924년 파리 올림픽 때의 실화를 배경으로 만든 것으로 1981년에 나왔을 때 아카데미상을 네 개씩이나 탔습니다. 주인공은 Eric Liddell인데 선교사 부모로 인해 중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육상을 포기하고 다시 중국에서 선교를 하도록 끊임없이 애원하는 여동생 때문에 갈등을 겪었습니다. 하루는 리델이 달리는 훈련을 하다가 교회 기도회를 빠지자 여동생은 리델이 하나님께 제대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책망하였습니다. 이때 리델은 “하나님은 내게 한 가지 목적을 주셨다고 믿어. 그분은 내게 빨리 달리게 하셨어. 내가 달릴 때 하나님의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리델은 몇 년 동안의 고된 훈련 끝에 드디어 100m 경주 영국 대표로 올림픽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런데 파리로 가는 배안에서 자신의 출전일이 일요일이라는 것을 알고 갑자기 출전을 포기합니다. 그 소식이 알려지자 영국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영국의 왕세자가 설득하고 영국 올림픽 위원회가 출전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지만 리델은 정중히 거절합니다. 영국 언론은 리델을 국가의 명예보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라고 비난합니다. 이때 리델의 동료인 Andrew Lindsay가 자기 대신 다음 주 목요일에 있는 400m 경주에 출전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합니다. Linday는 이미 400m 장애물 경주에서 은메달을 차지하였습니다. 리델은 100m 예선이 열리는 주일에 파리에 있는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설교를 하면서 이사야 40:31을 인용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리델이 400m 경주에 출전하기 전에 미국 육상 코치는 자기 선수들에게 리델이 자기의 주종목이 아닌 400m에서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경기 직전 미국 선수인 Jackson Scholz가 리델의 손에 메모 하나를 쥐어줍니다. 거기에는 삼상 2:30의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리델은 예상을 뒤엎고 쟁쟁한 미국 선수들을 물리치며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느냐고 기자가 물었을 때 리델은 “처음 100m는 내 힘으로 달렸습니다. 그러나 나머지는 그분이 주시는 힘으로 달렸습니다” 고 말했습니다. 리델은 그 후 중국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중일전쟁의 와중에서 1945년 그가 죽었을 때 온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애도했습니다. 리델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중심을 보시고 이기게 하였습니다. 그의 경주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리델은 진정 예수님의 흔적을 남긴 자였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며 하나님 우선순위로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경외는 입술의 구호요 여전히 내 중심으로 살아가십니까? 예배시리즈 5주차가 되었습니다. 이번 주의 주제는 경외감입니다. 이번 기회에 예배의 자세에 경외감을 더함으로 드리는 예배마다 깊이를 더해가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어떤 위대하고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칭송할 때 그 사람의 이름을 칭찬하고 귀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섭리주이시며 구원주이자 심판주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으며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우리 삶에 의미를 주시는 분이요 영원한 삶과 죽음의 열쇠를 쥐고 계신 분입니다. 따라서 호흡 있는 것들,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해야 하며 그 이름에 대해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시 99:3)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가 예배하고 섬겨야 할 대상입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하거나 취할 수 없습니다. 설령 천상이나 지상에 탁월한 능력을 소유한 존재가 있다고 해도 그들은 절대로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스럽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면 그분이 누구신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 때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그 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시편 25편에서 시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받는 복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이 복은 영적인 복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삶에 임하는 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어떤 복이 주어집니까?
1) 택할 길을 아는 복(12절)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어느 학교를 가야하고 어느 직장을 구해야 하고, 어떤 배우자를 구해야 하고, 어떤 교회에서 신앙생활 해야 하는가? “순간의 선택은 영원을 좌우한다.” 선택은 자유지만 그 결과는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기에 바른 선택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없습니다. 선택 중에 가장 중요한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선택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선택은 우리가 한 것 같지만 실상 우리의 뒤에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기도, 말씀, 사람이나 상황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깨우쳐 주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바른 선택을 하게 하십니다.
2) 영혼이 평안을 누리는 복(13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 때문에 평안하고 의인들의 자손은 땅을 물려받는다고 약속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27절에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이 약속하신 평안은 ‘하나님을 향한 확신 속에서 얻는 고요함과 안전함과 건강’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둔 상황에서도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확신함에서 얻는 진정한 평안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령님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주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십니다.
3) 언약 속에 사는 복 (14절)
하나님의 언약을 지킬 때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언약에 기록된 말씀대로 살 때 이스라엘은 언약에 기록된 대로 복을 받습니다. 때로는 욥과 같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호소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인 헤세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이상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당연히 구원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경외하는 자를 친밀하게 대하십니다. 여기서‘친밀함’은 언제든지 격의 없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친밀한 사람 사이에는 아무 때든 만나서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언제나 그들과 의논의 상대가 되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초월성
다윗의 평생의 소원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그러나 이스라엘 땅에 아직 shalom이 임하지 아니하였기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 솔로몬을 통하여 성전을 지으려고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성전을 지을 수 없는 것이 섭섭할 수도 있었으나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다윗의 마음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대상 29:1).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는 이유는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며 자기 가문을 빛내기 위함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대상 29:5)하며 성전 건축에 동참을 호소합니다. 다윗이 먼저 자기 소유의 금은을 바치자 백성의 리더들이 다윗을 따라 즐거이, 전심으로, 자원하여, 정직하게 드립니다. 그들의 뒤를 이어 백성이 또한 성심으로 즐거이 예물을 드립니다. 온 나라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즐거이 드리는 모습을 지켜본 다윗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감사의 찬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대상 29:11). 다윗의 찬양 속에 세 가지 고백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을 가지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밝히는 것인데 이를 위해 하나님의 초월적인 속성을 나타내는 어휘들을 나열합니다. 둘째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이라 하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의 참 주인이시고 우리가 가진 것이 다 주께서 나온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한 나라의 왕이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대 왕권 사회에서 한 나라의 모든 것은 그 나라 왕에게 속하기 때문입니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14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분의 것을 다시 돌려드리는 것뿐이지 우리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겸손하게 말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부어주시는 은혜는 나를 통하여 어딘가에 쓰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 부요하신 하나님의 청지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신 만물의 머리시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며, 자신의 뜻 가운데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능력의 신이십니다. 다윗은 모든 자를 크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는 것도 주님 손에 달려 있다고 고백합니다. 아무리 아침부터 밤까지 뛴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하늘이 그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 ... 여호와여 주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니이다”(시 97:6,9) 예배자는 초월자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경외감이 필요합니다.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능력, 경험을 비롯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틈틈이 모든 생각을 멈추고 그분의 위대함을 겸허한 마음으로 묵상해야 합니다. 일주일의 하루인 주일은 그분 앞에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그 시간만큼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찬양하고 묵상하고 경배하고 높임으로 그분의 임재와 영광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구원과 회복, 평안과 치유를 경험합니다.
참을 수 없는 예배의 가벼움
오늘날 예배가 너무 가벼워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단순히 음악스타일만 가벼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80년대 시작된 예배의 변화가 결국 의식의 변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의 변화까지 가져왔습니다. 80년대 찬양운동은 엄격한 예배의식에서 생동감 있는 찬양으로 전환되면서 예배의 자유를 가져왔습니다. 많은 경우 예배에 대한 기대감이나 자신을 추스르고 하나님을 경외할 여유도 없이 교회에 오자마자 바로 예배에 참여하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배의 품격, 진지함, 경외감이 약해집니다. 예배가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자칫하면 ‘나의 필요’, ‘내 공허함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추구하다 보니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나’로 바뀔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과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은 놀라운 복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를 친구 관계로 비유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 33:11상)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이해하고 받아주는 것이 친구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친구 같다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이 감사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하) 예수님이 나의 친구라는 개념 자체가 귀합니다. 그러나 친구도 친구 나름입니다. 인간의 친구와 하나님의 친구 되심은 그 차원이 다릅니다. 동년배 친구와 경륜과 지혜가 있는 할아버지 친구와 다르듯이 우주만물의 창조주 친구는 인간적인 친구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특별한 관계입니다. 그분은 원래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초월적인 분이십니다. 하늘 보좌에서 말씀 한 마디로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나 같은 존재를 친구 삼으신 것이 놀랍고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은혜를 값싸게 만듭니다. 자기중심으로, 자기 편의에 따라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미르바 던은 지적합니다. “우리 예배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진노를 균형 있게 제시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자비와 사랑처럼 편안한 부분에만 일방적으로 초점을 맞추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초월적인 하나님의 무한한 위엄을 가진 분이 아니라 단순히 어디에나 계시는 ‘친구’나 ‘형제’로 축소되지는 않습니까?” 어떤 예배라도 하나님의 자비하심, 내재성, 친밀감과 함께 그분의 거룩성, 초월성, 경외감에 대해 균형 있게 반응하지 않는다면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예배인도자나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 모두가 예배 가운데 이 부분에 실패할 때 우리의 예배는 저급한 사랑 타령으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존경과 두려움이라는 복합 감정
경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레’인데 ‘두려워하는’, ‘경외하는’의 의미를 가집니다. 존경하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이 공존하는 것, 그것이 경외감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신 10:12) 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갖고 있는 양면성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라 합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죄로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공경합니다. 두려워하면서도 그분의 한없는 사랑을 알기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뜨거운 사랑과 깊은 존경심이 교차하는 경외감으로 예배드린 경험이 있습니까? 두려움만 있는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닙니다. 두려움만 주는 신은 참 신이 아닙니다. “야곱아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먼 곳으로부터 구원하고 네 자손을 잡혀가 있는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누릴 것이며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렘 30:10)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흩어진 땅에서 이끌어 내셔서 약속의 땅으로 다시 인도하실 것과 그곳에서 태평과 안락을 누리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우리가 주변 상황을 인하여 위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마음을 주셔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마땅히 품어야 할 마음은 존경심과 두려움의 복합감정인 ‘경외감’입니다.
경외감의 극치는 십자가
하나님의 초월성도 경이롭습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것도 경이롭습니다. 그런데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의 능력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한 인류구속 사건이 훨씬 더 경이롭습니다. 경외감의 극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주의 왕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몸을 찢기어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렇게까지 고통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던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한 괴로움 속에서도 잠잠하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그분은 말 한마디로 십자가 선고를 바꾸실 수 있습니다. 자신의 피 한 방울이면 온 인류의 죄를 사하고도 남을 분이십니다. 그런데 쉽고 편한 길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온 몸에 채찍을 맞으셨고 살을 찢기셨습니다. 군중들 앞에 벌거벗는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 없이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돌아가시던 순간은 하나님마저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깊고 친밀한 관계가 창조 이전부터 단 한 순간도 단절된 적이 없으셨는데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처절한 상황에서 버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육체적으로 완전히 죽었던 몸이 다시 사셨고, 단 한 번의 골고다 피 흘림으로 인류구속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하여 자주 듣다 보니 제대로 실감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종교적 교훈, 역사적 기념사건, 아니면 목걸이 장식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세상의 어떤 죄성도 그 영향력도 힘을 잃게 만듭니다. 약이나 식물에는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구원의 약효는 2000년이 지나도 여전합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주시는 역사는 오늘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때마다 예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우리는 자주 죄에 빠집니다. 그러나 죄를 지어도 의인으로 짓는 것입니다. 날마다 자백하면 됩니다. 구약의 제사는 단회적인 씻음입니다. 죄를 씻기 위해 매번 제사드릴 때마다 피를 흘립니다. 그러나 신약은 단 한 번의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피 흘림의 제사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신비는 단지 죄 사함의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21세기를 사는 내가 2000년 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예수의 부활하심을 힘입어 나도 의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살아도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경외는 경배의 뿌리
영광스런 임재가 있는 주의 집, 성전을 향해 나아갈 때 우리는 풍성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없이는 감히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 보혈의 공로 없이 감히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시 5:7) 시인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해 경배한다고 합니다. 경배하는 마음의 깊숙한 곳에 경외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경외감이 하나님을 경배하게 합니다. ‘경배’라는 단어는 자주 찬양과 연계해서 사용됩니다. 밥 소르기는 찬양과 경배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지만, 그분이 진정으로 찾으시는 것은 예배자입니다. 둘째, 찬양은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드리는 행위이고, 경배는 하나님과 주고받는 친교의 행위입니다. 셋째, 찬양은 외향적, 회중적인 반면 경배는 내향적이고 개인적입니다. 찬양으로 하나님의 행위를 칭찬할 때 경배로 하나님의 성품을 예배합니다. 경배는 예배의 더 깊은 단계라는 점입니다. 즉 경배는 너무나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데 초점을 둡니다. 따라서 찬양과 경배의 시간에 높으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표하고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결단이 없다면 그것은 참된 찬양과 경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시록 7:9-10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궁극적인 지향점인 ‘천상 예배’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그분 백성의 이마에 인을 치셨습니다. 인을 치셨다는 것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의 인 치심은 주님이 우리를 그의 소유로 삼으신다는 표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왕으로 고백한다면 인침 받은 증거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고,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인침 받은 또 다른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이들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합니다. 즉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교회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인 한계를 넘어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 속한 자들로부터 모여든 자들로 구성됩니다. 이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종려가지를 흔들며 찬양합니다. 흰옷은 어린양의 피로 씻음을 받아 깨끗하게 된 자의 옷입니다. 이들은 구원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에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던 것처럼 주님을 인한 승리와 구원을 축하하고 경배합니다. 큰 무리가 찬양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완전히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백성은 구원의 완성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시편에 나오는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올라가면서 구원의 하나님께 찬양으로 나아갔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께 나아가는 순례자들로서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게 하시고 날마다 천국의 소망을 품고 찬양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영의 귀가 열려져 찬양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고통 앞에서 찬양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찬양을 다시 부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먼저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육신의 문제, 재정상의 문제, 관계의 문제 등등 환경을 보아서는 도저히 노래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베푸신 구원으로 인하여 우리부터 주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감격 속에 새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존경하는 이 경외의 태도는 오늘 우리 시대의 참을 수 없는 예배의 가벼움을 극복하게 합니다. 십자가 사건과 보혈의 신비는 묵상하면 할수록 더 큰 경외감을 우리에게 심어줍니다. 깊이 있는 예배를 경외감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성경의 대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이듯 찬송의 대주제 역시 그리스도와 그분이 행하신 복음 구원 진리의 사역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입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께 찬송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영혼의 외도를 피하라
시 25:12-22, 약 4:4-5 / 민경설 목사
바울 이후 최고의 신학자이며 성자로 불리는 어거스틴은 말하길 “하나님 안에서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에는 참안식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소유하면 모든 것이 유토피아가 될 줄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참안식은 없습니다. 외도는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혼의 외도도 있습니다. 영혼의 외도는 영혼이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에 도취되어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세상 물은 먹으면 먹을수록 목마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돈, 출세, 정욕, 술, 도박, 취미, 오락, 건강 등에 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치면 외도가 됩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4:4) 세상과 벗이 되었다는 것은 세상과 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세상과 영적으로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져서 하나님과 짝이 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벗이 된 것은 간음입니다. 외도인 것입니다. 세상과 짝이 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과 짝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신랑이 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 영혼의 외도를 피할 때 참안식이 있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께 있을 때 하나님이 참안식을 주십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주님의 일도 아니고 주님이 주시는 축복도 아닙니다. 주님 자신이어야 합니다. 영혼의 외도를 피하는 자의 축복이 있습니다.
첫 번째, 우리가 살아갈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시25:12) 인간의 삶은 선택입니다. 하루에도 셀 수 없이 선택을 하게 됩니다. 오늘 내 인생이 왜 이런가? 과거의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래가 복되기 위해서는 복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주님이 나를 통하여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길로 가는 것이 축복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친밀함을 주셔서 근심에서 자유하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곤난에서 끌어 내소서”(시25:14-17) 하나님의 친밀함은 하나님의 은밀함,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실상이라는 뜻입니다. 근심은 사실 속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이 은밀한 것을 보여주셔서 근심이 없게 하십니다. 친밀한 것은 친한 사이일 때 가능합니다. 친하지 않으면 비밀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말해주십니다. 평안함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근심하고 있는 것은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께 없기 때문입니다. 어짜피 지금 걱정하고 있는 일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다 되어질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사탄에게서 자유하게 됩니다. “내 원수를 보소서 저희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시25:19-20)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에게 사탄이 손을 대지도 못합니다. 사탄은 사람의 관심사를 하나님에서 세상으로 끌어내는 일을 합니다. 주님만 바라보면 겁낼 것이 없습니다.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날그날 살아갑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따라가면 됩니다.
네 번째,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시25:13) 하나님만 바라보면 은사대로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면 주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육신의 일 뿐만 아니라 영혼이 잘되게 하십니다. 공부, 직장의 일, 무엇을 하든지 주님만 바라보고 하십시오. 할렐루야!
주의 친밀함은 경외
시 25:14 / 김근중 목사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성경을 보면 한글로 친밀함이란 단어가 꼭 한군데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친밀함이란 히브리어 단어 소드(d/s )는 의논, 협의, 조언, 집회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다시 21회나 나옵니다. 소드는 지혜 있는 "의논"이 성공에 이르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잠 15:22). 의논하는 것이 곧 친밀함입니다. 우리는 중요한 일을 주로 누구와 의논합니까? 친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절친한 분이 있다면 그 분이 누구이십니까?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소드는 좋은 충고를 할 수 있는 신실한 친구들을 뜻합니다. 이러한 친구들은 결코 어떤 사람에게도 비밀을 누설하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행하는 지혜 있는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밀한 조언을 받을것이다”(암 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그런가하면 소드는 회의, 혹은 집회라는 뜻이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은 사악한 회의를 싫어하십니다. [렘23:18]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19] 보라 나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20]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21]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22]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저들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겔 13:9)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 부분을 다시 정리합니다. 친밀함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 훌륭한 경영을 의논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매우 비밀한 것을 조언해 줄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회의, 공회입니다. 여호와의 공회, 그 거룩한 집회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관계를 뜻합니다. 이것은 곧 여호와의 총회를 뜻하고 이것은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할 수 있는 관계성을 뜻합니다.☀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입장에서 하나님과 친밀해 질 수 있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 또 어떤 것이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것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입니다.
아바마마, 아버님, 아버지, 아빠! 어떻습니까? 어느 말이 친근감이 더 있습니까? (막 14: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갈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아바(ABBA)라고 하는 단어는 우리말의 아빠와 같습니다. 저는 처음에 주여! 혹은 주님! 이라고 하는 표현이 매우 쑥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이러한 명칭의 사용이 자유로웠고 편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단계에서 예수님처럼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단계가 더 친근감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꼭 아빠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이러한 친근감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 곧 친밀함이라는 말입니다. 한 번 말해 봅시다. 불러 봅시다. 아빠!
둘째는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 친밀함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특징을 보면 이 말씀에 모든 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 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요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나 아빠라고 하는 개념도 친밀함의 상징인데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행하는 것이 곧 친밀함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했다고 해서 분노하고 신성모독이라고 하여 고발을 했습니다. 그 친밀함의 표현이 싫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마치 우리가 영화 Sound of Music 에서 나오는 모습과 같습니다. 아버지가 대령이었나요? 아버지가 집에 오시면 자녀들은 모두 일렬로 서서 부동자세를 취합니다. 모든 것이 군대식입니다. 긴장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믿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모든 순종이 의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것,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단순한 의무에서 비롯된다면 그 관계는 그냥 법적인 관계요, 긴장의 관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순종은 의무나 책임 이전에 자발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알고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아버지의 생각을 그대로 자신의 삶에서 표현하고 나타내는 것,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친밀함입니다. 그리고 이 친밀함에는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하는 일이 곧 아버지, 곧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것, 즉 순종은 곧 영성이며, 성공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결국 순종이며,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도 결국은 적용이고 순종입니다. 그리고 이 순종(사랑, 용서)이 곧 친밀함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할렐루야!
셋째는 주님을 알기를 더욱 원하는 강한 영적 굶주림입니다.
(시 42:1) 『[고라 자손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팔레스틴 지역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사슴이 물이 없어서 갈급하다가 사람이 사는 동네에까지 내려와 지쳐 쓰러져 있는 모습에서 따 온 것입니다. 사슴이 이렇게 물을 갈급해 하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목마르게 갈급해 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또 그 이후로 은혜도 많이 받았고 그리고 지금도 은혜를 받고 있지만 그럴수록 주님을 더 깊이 알기를 사모하고 배우기를 사모하며 경험하기를 열망하는 그 강한 영적 굶주림이 더해지는 것을 가리켜 친밀함이라고 합니다.
지난주에 뉴욕 한인교회에서 있었던 대사, 즉 외교관의 신분을 가진 어느 장로님의 간증을 테잎을 통해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주님을 알기를 갈급해하던 방황의 시절이 있었지만 그 분이 종래에는 말씀과 기도를 통한 큰 은혜를 체험하여 이제는 그 받은 은혜와 받은 축복을 풍성하게 나눠주는 간증이었습니다. 저는 그 분을 통해 현대판 다니엘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강한 영적 굶주림이 결국은 하나님의 친밀하심을 크게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끝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해 지는 마지막 방법입니다.『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하나님과 친밀해지려면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여기서 경외(야레)는 “두려움”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두려움이란 앞에서 말한 아버지 앞에서 경직되고 긴장하는 그런 두려움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관계의 이탈에서 오는 결과로서의 두려움을 뜻합니다.
또한 이 경외는 우리가 악에서 떠나는 것을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욥 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사실 우리가 악에서 떠나야 하나님과 친밀해 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누구와? 무엇과 친한가? 에 따라서 그 인생의 신분이나 결과가 결정됩니다. 만약 우리가 왕과 매우 절친한 사람이라면 어떤 관직의 유무를 떠나서 그는 매우 큰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탁월한 영성이나 도덕성과 지혜를 가진 사람과 절친하다면 그도 역시 귀인이 될 것임에 분명합니다.
여러분! 이 친밀함의 주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과의 친밀함, 주님과의 친밀함, 성령님과의 친밀함을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더해진다는 것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이 친밀함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말씀을 반드시 그대로 시행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치유입니다. 삶의 회복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말 3:12)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친한 친구 되기
시 25:14 / 김형준 목사
성인 5명중에 한명이 관람했을 만큼 흥행에 성공했던 ‘친구’라는 영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관객의 타깃 층을 보면 30대 이상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연령층의 한계와,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부산이라는 제한된 지역적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반적으로 현대인들의 갈증이 무엇인가를 잘 파악했기 때문이라고 평합니다.
현대인은 시장개방, 구조조정, 민영화, 탈규제 등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부도, 배신, 소득감소, 파산, 가정불화, 가출, 이혼, 자살 등 우울한 현실을 접하고 살아갑니다.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하며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야 할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믿음의 마지막 보루라고 여겼던 부모도 자녀도 부부도 믿을 수 없는 세상입니다. 자기 김밥을 먹었다고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인 자식이 있는가 하면, 사는 것이 어렵다고 자녀와 동반자살을 하는 부모도 있으며, 봉급 때문에 부부가 서로를 죽고 죽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끼리끼리 울타리를 치고 서로 보호받으려는 현대인의 본능으로부터 진정 믿을 수 있는 것은 친구의 의리 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담게 된 것입니다. 거꾸로 영화의 이런 메시지가 관객들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사는 시대가 얼마나 두려움과 불신으로 가득하며 동시에 변함없이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가를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일평생 사람과 맺는 관계로 삶을 지속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관계를 통해 우리 삶은 시작되었고, 관계로 인해 인생의 방향이 설정되기도 합니다. 그 중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관계가 있는가 하면, 선택할 수 없는 관계도 있습니다. 부모와의 관계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부모와 관계를 맺지 않고는 우리 존재 자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부모와 잘못 맺은 관계는 일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게 할 만큼 부모-자식간 관계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관계가 있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이 인간은 그렇게도 갈망하던 충분한 신뢰와 안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획과 예정을 따라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내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을 모르거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못 맺고 있을 경우에는 당연히 삶의 이유와 의미 그리고 목적을 알 수 없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꿈과 계획을 이뤄 성공했다 하더라도 성공이 존재목적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자해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죄 때문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요 15:15 말씀은 놀라운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여기서 친구란 막연히 가까운 관계가 아닌 신뢰를 바탕으로 삶의 깊은 부분까지 나누는 아주 밀접한 관계의 친구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단절된 관계를 아주 밀접한 친구 관계로 회복하시고자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출애굽기 34:14에서 하나님을 “그분은 너희와의 관계에 대해 열정을 가진 하나님이시다(NLT)”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친구 삼으시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은, 이제 성령으로 날마다 동행하시며 함께 하길 원하십니다.
그러한 주님을 우리는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와 함께 거하며 동행하기를 원하시는 주님과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기 위해서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믿고 그 가운데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행동을 바꾸는 것 보다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바꾸어야 하는데, 보통 하나님을 만나고 영접한다 할 때 하나님을 느끼려 합니다. 뭔가 보고, 느끼고,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임재를 체험하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고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하는 모습과 방법을 찾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해답을 주고 있는 말씀이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18절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원하는 일이 성취되었을 때만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일 앞에서도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라는 단어는 일상생활에서 하나님과 늘 동행하고 함께 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환경에 지배되지 않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기쁨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누릴 수가 없습니다.
‘고통과 고난이 가득한 이 땅에서 어떻게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입니까?’라고 되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죄로 인해 사망 가운데 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미래와 희망이 없는 존재였는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새 생명을 주시고, 영원한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고난과 아픔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구속 받은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뻐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은 기뻐할 수 있도록 예비해 두기도 하셨지만, 동시에 기뻐할 이유를 이미 허락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도 자주 자주 기쁨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초점이 없는 것과 부족한 것에 늘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보다는 없는 것에 대한 불안함, 불안함을 없애기 위한 초조함 때문에 더욱 힘든 것은 아닌지요. 가끔 사람들에게 질문을 해봅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무엇이든 바꿀 기회를 30초 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 질문에 대해 현재대로 있겠다는 사람은 못 봤습니다. 부족한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삶의 부족한 것을 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찾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곧 이미 허락하신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궁극적으로 구원의 즐거움과 기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 응답하는 바람직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인간이 견디기 어려운 극한 상황에 이를 때에도 끊임없이 기도해야함을 말합니다. 여기서 기도하라는 명령은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기도할 때 쓰는 단어와는 달리, 예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뜻에 초점을 맞추고 그 분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하나님 중심의 기도를 뜻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 정도로 졸라서 무언가 얻어내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얻는 가장 큰 유익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변해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제게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왜 허락하셨는지, 제가 어떻게 풀어 가기를 원하시는지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의 관점을 제게 주십시오.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주님의 마음을 따라 일을 해결하고 사람을 대할 때 복된 결과를 얻을 뿐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며 특징인줄 알면서도 기도만큼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성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 중심의 얘기만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본성을 거슬러 기도하던 중에 나 중심적인 생각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도구로 갖추어지는 과정은 그야말로 놀라운 변화인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일을 시작하기위한 오프닝 세레머니로서도 또한 엔딩 세레머니로서도 아닌 일의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뜻을 살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자 세상 사람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입니다.
마지막으로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모든 환경에서 감사하라는 의미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 범사에 이미 감사가 충만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을 기억하며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고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주는 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로렌스 형제作)’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17세기 로렌스 형제가 전쟁 후 삶에 회의를 느끼고 들어간 수도원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임재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여생을 아름답고 보람 있게 살고자 들어간 수도원에서 정작 자신에게 주방에서 밥하고 설거지 하는 일만 시키는데 몹시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인생의 고상한 목적을 위해 수도원에 들어온 나에게 기껏 맡기는 일이 설거지란 말인가!’ 그러나 곧 하찮은 일상 가운데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로렌스 형제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설거지 하는 가운데도 함께하시는 하나님! 내 삶 어느 구석에라도 함께 가시는 하나님!’ 그러면서 하나님과 대화하기 시작했고, 대화 내용을 편지에 담아 수도원 원장과 주고받았는데, 바로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라는 책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 책에서 로렌스 형제는 숨기도(Breath Prayer)를 추천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호흡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등 짧은 문장이나 성경구절을 가슴에 품고 숨쉬고 내쉴 때 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숨기도처럼 쉬지 않고 기도할 때 작은 것에서부터 주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고, 임재하심 앞에 바르게 반응하며 주님과 가까워 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인식하는 방법에는 이 밖에도 많습니다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잊기 쉬운 순간에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준비해두었다가 문득 다시 깨닫도록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메노나이트나 경건주의와 같은 영성을 추구하는 공동체에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만, 회의를 하다가 중요한 안건이 나오거나 토의가 진지하게 진행되는 중간에 한 사람이 종을 ‘땡’ 하고 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모든 생각과 논쟁을 중단하고 10~15분간 깊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 우리가 나아갑니다.’라고 하나님께 여쭌 후 다시 논의합니다. 그러다 또 심각한 논쟁에 빠지면 다시 한 사람이 종을 치고 다시 기도의 자리에 함께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우리 교회에서도 이 방법을 사용해보면 어떨까, 분열되고 과열된 논쟁 분위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여러분도 구역과 부서에서 이런 방법을 사용하여 분쟁과 과열의 순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모든 논의가 하나로 조정되는 체험을 해볼 수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중요한 약속을 하면 핸드폰에 알람 장치를 해서 잊지 않도록 주의 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알람으로 자신을 일깨우고 약속을 지키는 것처럼,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함을 일깨워 줄 다양한 방법을 개발한다면 임재하심에 합당한 반응과 응답을 드리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과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으며,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친구로 여기시는 백성들에게 말씀을 묵상할 때 이행하실 하나님의 약속을 알려주십니다. 사무엘상 3장 21절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한 문제를 놓고 반복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걱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생각하는 것은 묵상이 됩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고 싶어 하시고, 가까이 두시는 사람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에게 언약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욥은 일용할 양식보다 말씀을 더 소중히 여겼다고 고백했으며, 다윗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 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묵상에 대해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시편 1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여 즐거워하는 자로다”
복 있는 인생이란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의 삶을 세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소극적인 의미에서 첫째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사람입니다. 악인이란 도덕적으로 악한 사람이 아니라 인생의 표준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기준이 없습니다. 기준이 있다면 자신의 욕망뿐으로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인생의 기준을 정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나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영향을 받는 우리로서는 모든 것을 상대화 시키는데 능합니다. 무너지지 않는 것, 부서지지 않는 것, 깨어지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이제는 모든 전제조건이 인정되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입니다. 죄인이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인생의 목표가 없는 사람입니다. 죄에 해당하는 원어 ‘하마르티아’란 ‘표적에 맞지 않고 빗나가다’라는 뜻입니다. 마땅히 따라야 할 어떤 목적을 좇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인생의 기준이 없는 사람(악인)은 인생의 목표가 있을 리 없습니다. 인생의 목표가 없는 사람(죄인)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사상을 전제로 하는 생각과 마음을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묵상’이란 단어를 동양적인 의미로 생각해서 가만히 침묵 속에 잠잠히 잠기는 것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힘을 다해 소리를 내어서 읽는 것을 말합니다. 즉, 말씀대로 살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 묵상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삶을 보면 하루 동안 누구를 만나고, 어떤 사람과 교제하는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제하는 사람의 영향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주는 요소는 무엇이며,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진단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사람과 가까이 만나고 있다면, 이러한 만남과 대화를 경계하십시오.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비신앙적인 생각에 젖어들 수 있습니다.
어차피 세상 사람을 다 만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만남에는 한계가 있고 정해진 만남의 범위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 중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일깨워주는 친구가 있다면 참으로 유익될 것입니다. 대화 중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함께 하심, 인도하심과 섭리하심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둔 사람은 절대 무너지지 않습니다.
자살사이트에서 만나 죽음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게 됩니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사람들이 만나서 죽음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나눈 대화 때문입니다. ‘살아보니까 별수 있냐. 어차피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잿빛 인생 희망이 없잖아.’ ‘살아서 뭐하냐. 일찍 죽자. 인생의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는 네가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철학과 이성, 논리와 설득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지 살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당장 솔깃할지는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허무로 인도합니다. 그 결과가 허무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귀한 인생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좋은 친구, 영성을 깨워줄 친구와의 만남은 이렇듯 중요합니다. 그런데 보다 더 본질적인 만남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 말씀과의 만남입니다. 말씀과 깊게 교제하는 시간을 가지기 바랍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주시는 삶의 지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 것은 약속으로 주어졌습니다. 행동이야 어찌됐든 십자가상의 강도도 구원 받았던 것을 보면 믿음만으로 구원받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세계를 보는 시각과 가치관을 바꾸지 않으면 사명자의 삶은 살 수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민족을 치유하는 일을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을 일찍이 부르셔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세우시고,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도전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 시대가 여러분에게 행복을 주는 시대는 아닙니다. 어쩌면 총선 이후 더 큰 혼란이 우리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지 모릅니다. 거세게 흘러들어오는 쾌락과 향락의 문화가 우리를 병들게 할지도 모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뜻을 정하여 하나님 앞에 서지 않으면 쓰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대세 속에 자신들을 맡기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왕이 내리는 상의 진미를 거절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고집해야합니다. 그럴 때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 이후에 다니엘과 그 친구들을 통해 하나님 역사를 다시금 이루어 가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희망이요 꿈이 되기를 원한다면 말씀 앞에 자신을 다시 돌아보십시오. 여러분 삶 속에 지금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행세하는 것은 무엇인가 점검해 보십시오. 말씀을 마음에 품고 주님의 임재하심 속에 교제하며 살아갈 때 여러분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직접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듣고 나가는 순간 다 잊어버리지 마시고 하루에 한번쯤 오늘 들었던 본문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말씀이 아닙니다. 살아서 생명력이 있고 좌우에 날이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우리 심령과 골수까지 쪼갭니다. 말씀의 인도함을 받는 인생은 삶의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발 위에 등불이 되어 실족하지 않도록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앞에 선택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선택 하는 대로 삶의 방향은 좌우될 것입니다. 그 앞에서 어떤 원칙을 가지고 선택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주님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말씀을 늘 묵상함으로 주님의 좋은 친구 되시기를, 더불어 삶의 놀라운 역동성과 창조성을 체험하며 시대의 어둠을 밝혀 나가는 동안의 귀한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기도
시편 25:1-22 / 차용철 목사
<序言>
본 시는 기도시로서 다윗이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호소하는 시입니다. 형식적인 특징은 9,10,34,37,111,112,119,149편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쓰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대제적으로 각 행의 첫자들이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대로 되어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용서와 인도에 대한 간구(1-7절), 언약적 원리에 대한 상고(8-14절),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간구(15-22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표제어에 '다윗의 시'로 되어 있습니다. 본 시가 다윗의 시인 것은 분명하나 시기와 배경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대적들의 간교함과 잔인함이 표현되어 있고 그로 인한 고뇌 등이 잘 나타나 있다는 점(2,3,16-20) 등으로 보아 알살롬에 의한 반역이나 세바의 반란 등을 겪었던 통치 후반기에 기록한 것이 아닌가 추측할 다름입니다.
1. 용서와 인도에 대한 간구 (1-7절)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우러러 본다고 했습니다 (1절). 전 인격으로 하나님을 향한다는 말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바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대적으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것입니다 (2-3절). 자기를 부끄럽지 않게 해 주시고 원수들이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만일 핍박하는 대적들이 그 뜻을 이루어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면 자신은 대적들에게 패배를 당하므로 인해 수치를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대적이 승리하지 않고 자신이 승리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요청을 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승리하게 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고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를 바라는 자들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기본형 '카와'(קוה)는 '바라다' '기대하다' '기다리다'의 뜻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승리케 해 주실 것을 바라고 참고 기다리는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승리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속이는 자는 승리하지 못하게 합니다. '속이는 자'에 해당하는 '빠가드'(בגד)는 '덮다' '배반하다' '범죄하다' 등의 뜻입니다. 곧 하나님은 하나님을 배반하여 범죄하는 자는 패배하게 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이 승리하게 해 주실 때까지 믿음으로 참고 기다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반드시 승리하게 해 주실 것을 바라본 것입니다. 동시에 대적들은 자신들을 믿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거짓과 속임수로 하나님의 사람을 핍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을 바라본 것입니다. 둘째, 자신을 인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4-5절). 주의 도를 보이시고 주의 길을 가르치시고 주의 진리로 지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주의 도' '주의 길' '주의 진리'는 모두 하나님의 율법(말씀)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원했고 그것은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인도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객관적인 말씀을 깨닫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말씀으로 자신이 삶을 인도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종일 하나님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종일'에 해당하는 '칼 하이옴'(חיום כל)은 '모든 날'(all the day)로서 매일을 말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서 매일 하나님이 위경에서 건져 주시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셋째,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6-7절).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가 영원부터 있었으니 이것들을 기억해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사람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을 속성으로 가지고 있으니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인자를 따라 기억하시고 선함으로 해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사람을 언약적으로 사랑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 속성을 따라 은혜로 좋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말씀을 어긴 죄와 도덕적인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심판을 거두어 달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죄만이 아니라 과거의 죄까지 회상하며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우리에 필요한 자세가 이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인도해 달라고 했고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구조상 도움을 구하면서 하나님이 도와 주실 것을 확신있게 기도한 것은 그가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노력이 있고 죄를 회개하는 노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말씀을 지키면서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2. 언약적 원리에 대한 상고 (8-14절)
하나님은 선하시고 정직하셔서 그의 도로 죄인을 교훈한다고 했습니다 (8절).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며 심판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지만 죄인을 사랑하셔서 좋은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말씀으로 죄인을 회개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고 도로 가르친다고 했습니다 (9절). 하나님은 하나님 거룩함에 겸손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를 말씀으로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라고 했습니다 (10절). '언약과 증거'는 율법 곧 말씀에 대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인도하는 모든 길이 인자와 진리가 됩니다. 그 길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것임을 인지하고 가장 옳은 길임을 알게 됩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나님의 지도와 사람의 순종의 관계를 증거한 다음에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자기 죄악이 크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해 달라고 했습니다 (11절).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집안에 칼이 그치지 않았고 아들이 죽었습니다 (삼하12:10-14). 다윗은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으면서 하나님이 언약적 사랑으로 가르쳐 가장 바르고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인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도와 인간의 순종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신의 죄악을 용서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징계를 사랑으로 인지하는 자는 진정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히12:8-10).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존경하며 순종하는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어떤 자인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은혜와 복을 받는지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첫째, 택할 길을 가르침 받습니다 (12절). 하나님이 가장 좋은 길을 계획하시고 그 길을 알게 하고 그 길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영혼이 평안히 산다는 것입니다 (13절). 세상에서 살 때 평안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려운 환경과 상황이 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으로 인해 넘어지지 않고 담대하고 평강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자손이 땅을 상속한다는 것입니다 (13절). 자손과 땅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에 속한 것입니다 (창15:5, 16:4). 가정과 물질에 복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넷째, 언약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14절). '언약'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하나님께 받을 복에 관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친밀한 동행과 교제를 경험하므로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되고 하나님이 주실 복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그와 같은 복을 누리도록 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간구 (15-22절)
다윗은 하나님께 대적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신의 차지를 아뢰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보호를 요청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면서 하나님이 구해 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구했습니다. 그래서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고 했습니다 (15절).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눈을 항상 하나님을 향해 고정시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외롭고 괴롭다고 했습니다 (16절). 미음에 근심이 많다고 했습니다 (17절). 고난과 곤고와 환난 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18절). 원수의 수가 많고 그들이 심히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19절). '심히'에 해당하는 '하마스'(חמס) 포악, 잔인, 흉악 등의 뜻입니다. 다윗이 느끼기는 수많은 원수들이 자신을 죽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잔악한 증오심으로 대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하나님이 멀리 떠나 전혀 돕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고 긍휼히 여겨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수들로부터 지켜 주시고 그 고난과 고통에서 건져 주셔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結言>
22절에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고난과 고통에서 건져 달라는 간구를 하고서는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모든 환난에서 건져 달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자신이 겪는 고난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미칠 영향을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이 고난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이 느껴져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왕으로서 자신을 위한 간구를 하면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간구를 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적인 의식을 가지고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17장, 롬10:1-4, 엡6:18). .
여호와를 경외하는 복된 인생을 사는 자!
시편 25:12-14 / 광주새로운교회
1. 목숨의 소중함
어느 날 많은 금광 광부들을 태운 여객선 하나가 ‘미시시피강’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 파선되고 말았다. 배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서로 구명정을 타려고 아우성쳤다. 그때 한 사람만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승객들이 버리고 간 금덩어리를 모조리 모아들고 갑판 위로 나왔다. 그런데 구명정에서 던져 준 그 밧줄을 잡고 물에 뛰어든 순간, 그만 그는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후에 그의 시체를 인양해 보니 그의 허리에는 금덩어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그는 금에 욕심을 낸 나머지 자신의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눈에 보기 좋은 다른 어떤 것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소중히 여기며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된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하나님 앞에서의 고백
본시는 원수들의 핍박에 의해 고난에 빠진 시인의 신앙고백과 호소의 내용을 담고 있다. 시인은 먼저 원수들에 의해 고난받는 자기의 처지를 호소한다(1-3절). 그리고 주께서는 인도하시는 분이니 시인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말고 주의 선하심으로 시인을 기억해 줄 것을 간구한다(4-7절). 다음으로 시인은 여호와의 선과 정직과 인자와 진리를 찬양하고, 여호와께서는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사 택한 백성들을 축복해 주실 것임을 찬양했다(8-14절). 마지막으로 시인은 다시 한번 원수들의 대적함을 인하여 고난받는 자기의 상황을 아뢰고 여호와의 보호하심을 간구한다(15-22절).
3. 여호와를 경외하며 주께 가르침을 받고(12)
하나님의 사람들은 누구를 경외하며 주께 가르침을 받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주께 가르침을 받고, 그분을 의지하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은 이렇게 기록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시 25:12) 표준 새 번역은 이렇게 기록한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그가 선택해야 할 길을 주께서 그에게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시 25:12) 다윗은 그분을 경외할 때 주께서 좋은 길로 인도하여 주심을 고백한 것이다. 우리의 입술 가운데도 이러한 고백이 있기를 바란다. 또한, 우리는 사람의 본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주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주님을 경외하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한다. 진리를 좇는 자가 되어 그분을 경외하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20-21) 우리는 빛 가운데로 나와 마음속의 죄악을 회개하며 주와 동행하는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심을 깨닫기를 바란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 32:8) 하나님은 믿음의 자녀들이 행복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시며 그들을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길을 가르쳐 보이시는 주님께 지도를 받기를 소망해야 할 것이다.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시 37:23) 우리 인생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며 믿음의 자녀들의 삶에 관여하고 계심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나’는 무엇을 결단할 수 있겠는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고 그분을 의지하며 사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께 가르침을 받고 그분을 의지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 여호와를 경외하여 영혼의 평안함을 누리고(13)
하나님의 사람들은 여호와를 경외하여 무엇의 평안함을 누리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를 경외하여 영혼의 평안함을 누리고, 쉼을 주시는 주께 나아오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시 25:13) 여기서 ‘평안히 살고’는 여행자가 도중에 숙박지에서 편안히 밤을 지내는 것을 뜻하고 있다. 다윗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영혼이 평안하게 됨을 고백한 것이다. 우리는 복잡해 보이는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는 동안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여 영혼의 평안함을 누려야 할 것이다. 또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임을 알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함을 알고 그렇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잠 19:23)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경외하여 주의 생명 가운데 거하고, 삶에서 재앙도 만나지 않는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의지하여 안전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의식하고 그분을 의지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며 주의 자녀를 잠잠히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주를 바라보며 복된 믿음의 길을 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나’는 무엇을 결단할 수 있겠는가? 쉼을 주시는 주님께 나아와 영혼의 평안함을 누리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 세상의 다른 것을 좇으며 불안한 마음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여 영혼의 평안함을 누리고 쉼을 주시는 주께 나아오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5. 여호와를 경외하고 주의 친밀함을 느끼며(14)
하나님의 사람들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무엇을 느끼며 사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영의 사람이 되어 주님과 친밀함 가운데 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은 이렇게 기록한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시 25:14) 여기서 ‘친밀하심’은 원어로 <d/s: 소드>이다. 이는 ‘비밀 모임’이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감추심 없이 모든 비밀을 밝히실 만큼 사랑하심을 의미한다.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자들에게 친밀감을 가지시고 그 약속의 비밀을 그들에게 보이실 것이다.”(시 25:14) 다윗은 사랑의 하나님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우리 또한 그분의 친밀함을 날마다 느끼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과 친밀함 가운데 거하여 주의 비밀을 날마다 볼 수 있기를 기도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1-12) 우리는 주님과의 친밀함 가운데서 영적인 비밀을 날마다 알아가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점점 부요케 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진리의 영과 동행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심을 믿고, 성령님과 동행하며 주의 일을 잘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성령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알아가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음을 감사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이들은 이러한 복 가운데 거할 수 없을 것이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면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십자가 앞에 나오시기를 바란다. 인간이 모두 전적 부패한 존재임을 깨닫고 원죄를 사하실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 앞에 나오시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자기 뜻대로 살아갔던 과거의 삶을 회개하고, 예수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음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먼저 믿은 주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으며 주의 역사에 크게 쓰임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무엇을 결단할 수 있겠는가? 영의 사람이 되어 주님과 친밀함 가운데 거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의 사람이 되어 주님과 친밀함 가운데 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6. 미련한 자가 아닌 여호와를 경외하는 복된 인생을 사는 자!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영적으로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다른 것을 찾고 다른 것을 좇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을 경외하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리하여 그분의 지도를 잘 받고, 주께서 인도하시는 복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께 가르침을 받고 그분을 의지하며 사는 자!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여 영혼의 평안함을 누리고 쉼을 주시는 주께 나아오는 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의 사람이 되어 주님과 친밀함 가운데 거하는 자! 이러한 복된 삶을 사는 자, 여호와를 경외하는 복된 인생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십자가의 피로 죄를 용서받아(요일 4:9),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천국 백성의 삶을 살게 됨을 믿고(고후 5:17),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