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커피와 담배
인터뷰와 책을 기반으로 한 주관적 해석입니다.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싶어요.
하지만 기분 상할 정도의 비판은 삼가주세요.
20주년을 맞아 리마스터링 재개봉을 한 화양연화.
작품은 언제나 새로운 텍스트로 읽히기 마련이고
이는 화양연화도 피해 갈 수 없는 숙명.
영화 속 치파오는 분명 아름답지만 지나치게 장식적인 소품처럼 보이기도 해.
실제 영화에 등장한 21벌의 치파오 중 10벌은 화면에서의 질감 표현을 고려해 종이로 만들어졌다지.
옷으로서의 기능은 없다고 보는 게 비약은 아닐 거야.
억압적으로까지 보이는 화양연화의 의상, 치파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해.
우선 몇 가지 이야기가 선행되어야만 해.
1. 화양연화는 불륜에 관한 영화다.
맞다. 더 정확히는 ‘비밀에 관한 이야기’.
왕가위는 사랑을 그리는 감독이야.
하지만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사랑을 찾아 헤매지만 모조리 사랑에 실패해.
사랑과 상실, 기억과 향수 이 두 가지가 그의 작품 세계를 지탱하는 큰 축. 핵을 뚫는 정서는 언제나 고독.
때문에 시작과 동시에 실패할 운명에 처했으며 아주 비밀스러운 사랑=불륜 이었을 것.
(이들에겐 최소한으로나마 도덕적 책임을 회피할 변명거리가 주어지긴 해)
2. 화양연화와 치파오
2-1) 왜 치파오를 의상으로 선택했나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60년대 홍콩. 그 시절 여성들은 치파오를 입는 게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었기에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해. 때문에 왕가위 팀은 치파오가 이슈가 될지 전혀 몰랐다고.
(칸 상영 당시, 양놈들 치파오 보고 걍 뒤집어졌대)
2-2) 왜 그렇게까지 딱 달라붙는가
이 사람들 사랑(불륜)에 실패하는 사람들임.
내내 괴로워해. 나름의 양심의 가책 때문에.
규율, 틀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야.
이는 시각적으로 치파오, 집어삼킬 듯한 어둠, 비좁은 공간 세 가지로 구현돼.
화려한 치파오에 갇혀 결단을 내릴 생기조차 잃어가는 수리진.
새카만 어둠 속에서 한숨 같은 담배 연기를 연거푸 토해내는 차우.
좁은 아파트 복도, 국수집 길 골목, 작은방만이 겨우겨우 밀회의 장소로 허락될 뿐.
여성은 의복에, 남성은 흑의 미장센에 가둔 결정에 젠더적 한계가 있지만 단순히 외양을 강조해 시각적 요소로 소비할 목적의 의상 선택은 아니었다는 것.
2-3) 그토록 화려한 이유는
등장인물의 경제적 상황과 성격을 의상으로 표현했다고 해. 특히 치파오의 무늬가 여성 캐릭터의 심리 변화를 대변할 수 있도록 고심했다고 함.
2-4)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본 치파오
서두에 언급했듯이 이 영화 속 치파오는 정교한 장식처럼 아름다우며 동시에 옷으로서 제 기능을 상실한, 억압의 도구로 보여.
작품 속 치파오를 직접 만든 미술감독 장숙평. 이 영화는 그에게 칸 최우수예술성취상을 안겨줘.
미술감독으로서 최고의 성취를 한 셈.
한편으론 성공 그 기저에 부의 시선을 피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니 상당한 양가감정이 들기도 해.
여기서 왕감독의 개입 혹은 지시가 있었는가, 장숙평은 어떤 인물인가를 살펴보자.
장숙평 미술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해.
“우리는 각자가 할 일을 한다.”
왕가위는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상하면 끝. 서로를 잘 알아서 해야 할 일에 대해 단 한 번도 의논해본 적이 없다고 해. 영화의 분위기, 의상, 소품, 심지어는 벽지까지 전반적 외양을 창조하는 것은 온전히 장숙평 미술감독의 영역이란 거지.
“그 친구는 나보다 더 골칫덩어리예요.”
실제 장숙평은 엄청난 완벽주의자.
미술감독일 뿐만 아니라 왕가위 작품의 편집까지 담당하는 장숙평은 다재다능한 만큼 자신의 작업물에 철두철미한 사람이라고.
모든 치파오를 직접 만들었단 사실도, 영상의 텍스처를 위해서라면 종이로라도 옷을 만들겠다는 선택을 했던 것도 이 맥락에서 살피면 어느정도 납득이 가지.
화양연화 속 치파오에 페미니즘적 비판이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야. 다만, 작품성을 모두 전복시킬 만큼의 기만적인 요소는 아니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어.
추가적으로 화양연화에 대한 내 해석을 몇 자 적어보려 해.
3. 불륜을 추억하는 영화인가
화양연화: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고 행복한 시절.
남자가 앙코르와트 사원에 가서 속삭이면서 영화는 엔딩을 준비해.
갑자기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왕가위 감독은 앙코르와트가 시간이 느껴지지 않는 장소여서 선택했다고 밝혔어. 영원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해.
해석하자면 앙코르와트 시퀀스의 의미는
찰나의 비밀을 영원의 장소에 묻고 오는 것.
난 이 행위가 추억보다는 기억과 망각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다고 생각해.
남자의 거처 근방도 아니며 그 무엇과도 연고가 없는 곳이지. 추억하고 싶다면 좀 더 손쉽게 꺼내볼 수 있는 곳을 선택하는 게 보통이니까.
문제는 찰나를 영원이란 시간으로 치환한다는 점.
이건 왕가위 특유의 시간 관념과 관련 있어 보여.
중경삼림의 남자 주인공은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전 연인을 기다려. 그가 설정한 유예기간은 30일.
그러나 종국에 그는 이런 말을 해.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10,000년으로 하고 싶다.”
30일을 10,000년으로 대체해버려. 중경삼림에 나타난 시간의 전변은 화양연화에서 다시 반복돼. 찰나에서 영원으로.
기억은 특정한 순간으로 존재하지만 실제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지. 덧없는 찰나에 대한 갈망을 내려놓고 시간의 연속성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어.
(그래서 축복과 같은 망각, 차우는 성공하는지? 이에 대한 답은 영화 2046이 해줌)
4. 카메라 시선 불쾌하다
말했듯 이건 둘만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
카메라는 이 비밀을 훔쳐보는 시선이기에 관음적일 수밖에.
관객은 여자와 남자의 비밀을 몰래 들여다 보는 입장.
5. 공간의 의미
공간의 크기와 색을 주목할 필요가 있어.
난 이걸 통해 수리진과 차우의 사랑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해.
애당초 둘에게 허락된 공간은 국수집 골목길과 아파트의 복도 정도가 전부.
아주 좁은데 내 생각엔 규범의 작용을 상징하는 것 같아.
좁다는 건 갇히거나 제한이 있다는 의미니까..순리대로라면 아주 작은 공간만이 허락될, 함께여서는 안 될 여자와 남자.
수리진과 차우가
“우리는 그들과 다르니까요.” 라고 반복해 되뇌이는 것도,
그들이 규범 안에 갇힌 사람들이라 못내 마음이 괴로워서 하는 말일 거야.
레스토랑에서 배우자들의 외도 사실을 확인한 날, 둘은 걸어서 집에 돌아가.
식사를 몇 번 같이 하고 나서부터는 함께 택시를 타기 시작해. 단둘만의 공간이 처음으로 생긴 거고, 이때 택시의 내부가 온통 붉은색이야. 둘 사이에 사랑이 피어났음을 상징하는 걸 거야.
이후에 차우가 소설을 쓰겠다며 호텔방을 얻어.
길거리에서 택시로, 택시에서 호텔방으로.
공간의 확장이 의미하는 바는 사랑의 진전일 거라고 생각해. 공간의 크기만큼 사랑도 깊어지고 커진다는 의미일 거야.
그런데 방으로 들어가는 복도부터 붉은색이 넘실대.
호텔방 내부도 붉은색 천지.
호텔방2046은 둘의 사랑이 절정에 달하자 밀회를 위해 마련한 공간. 그렇다면 그 공간을 독차지한 색의 의미는?
화양연화 속 붉은색의 의미는 사랑일 거야.
6. 글을 마치며
전작들에 비해 촘촘한 내러티브와 제법 친절한 스토리텔링.
시그니처인 스텝프린팅과 핸드헬드 기법을 과감히 버리고 선택한 미끄러지는 카메라 워크.
절제된 관능을 균형 있게 지탱하는 서사와 영상, 음향, 연기력까지.
화양연화는 거창한 주제 의식을 전하거나 소름 끼치는 플롯 설계를 가진 영화는 아닐지 몰라도, 잊을 수 없는 시적 경험과 황홀한 감수성을 선사하는 작품이야.
이 영화로부터 어떤 감상을 얻게 되든, 적어도 투자한 시간이 아까울 정도의 작품은 아니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어.
문제 시 수정
花.樣.年 華 (2000)
dir. Wong Kar-Wai
정말 미장센이 너무 충격적일지경으로 아름다워서 입벌리고 봤어... 왕가위 영화보고 스토리는 빈약하고 미장센에만 신경쓴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내가 이야기 다 이해했는데 미장센이 이렇게 아름다운게 뭐가 문제죠!!!!!! ㅠ ㅠ 이 글도 넘 좋다~~~~
최근에 다시 봤는데, 오히려 어릴 때 보는 것과 다르게 지금 보니까 또 다른 메시지들이 공감가고 되새겨지더라
그 과거의 찰나와 더불어 삶 속 관계성에 대해 다시 되새김질하게 되는 자신을 보면서 나도 어른이 됐구나 영화 보는 내내 느껴지더라고.
미장센이나 은유적 장치, 촬영 구조, 연출 전개 방식등이 워낙 특징적인 감독이라 다시 볼 때마다 다르게 느껴지게 돼서 불륜이란 소재는 당연히 극혐이지만ㅎㅎ 계속 두고두고 꺼내보고 싶은 작품이야
불륜영화로만 회자되고 단정짓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영화야
치파오 의상 장치나 당시 홍콩 시대적 배경을 잘 몰라서 앙코르와트 설정을 가져온 것도 직접적으로 홍콩에 큰 영화를 준 역사적 배경 때문인가? 했는데 이 이유 때문이었구나
내가 느낀 개인적인 느낌과 결이 동일해서 다행이다 싶다.
이미 많이 쓰이고 있는 소재고 특히나 프레이밍화되거나 일반화될 수 있는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니...연출적 공백으로 관객도 함께 이 전개에 개입, 참여하게 만들어. 감독의 역할은 이것이라고 보여주는 작품. 영화 보는 내내 이 작품으로 영화, 영상 공부하고 싶더라고. 명작은 영원하다
여시 글 정말 고마워!! 영화를 본 우리들의 찰나도 영원으로 만들어줬어ㅎㅎ
글도 댓글들도 너무 좋다 왕가위의 영화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찰나를 영원히 기억하게끔 하는 것 같아 이런 의미에서 다들 왕가위 영화를 사랑하는게 아닐까 화양연화가 왕가위 영화중에서 미술이 가장 돋보였던 것 같아 그리고 카메라도!! 숨막히고 답답한 감정을 감독, 미술, 촬영, 배우가 모여서 어떻게 저렇게 잘 표현했는지.. 항상 볼때마다 감탄하게 돼
와 글 정말 좋다!! 얼마전에 보고 참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고마워 좋은 글!
와 여시 글도 댓글들도 너무 좋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들 중 하나야 잘 읽었어 고마워!
3번이 잘 이해가 안된다ㅜㅜ 여시야 잘 읽고가!
쉽게 정리하자면 불륜의 시절에 작별을 고한다는 의미였어! 추억하는 행위는 순간에 붙잡혀 시간의 흐름을 부정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영원이라는 아득한 시간을 통해 시간의 연속성을 깨닫고 찰나의 기억에서 빠져나오는 거지..
1번 읽는데 여시 영화 남과여 좋아할 것 같다 나도 이 영화 개좋아하거던,,,안 봤으면 추천이야
엇 나는 불륜 소재를 선호하지 않고..딱히 개의치 않는 정도..나도 남과여 좋아해! 영상도 감성도 딱 겨울이라서..누군가 겨울은 어떤 거냐고 물으면 그 영화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ㅎㅎ
게시글도 댓글도 퀄리티있어서 조으다 ~ 고마워 글쓴여샤👍
오늘 보고 연어하다 왔어! 보는 내내 왜 치파오를 비추는 카메라 시선이 가장 타이트한 허리와 골반쪽을 그것도 반복해서 비추는지 불쾌했어. (치파오가 아닌 다른 부분에서) 영화의 미장셴은 훌륭해서 눈이 즐거웠고 불륜이란 소재임에도 주인공들의 감성이 다 와닿을 정도로 좋았어. 그런데 한편으론 불쾌감이 드니까 이 영화가 20년 전 영화라 극찬을 받은걸까 생각했거든. 이 글 보니까 왜 과거에 극찬받았고 또 지금도 극찬받는 영화인지 알겠다. 그런 요소로 사용한거라 하니 영화 전체가 완전히 다시 한 번 와닿게 됐어! 또 마지막 앙코르와트 사원도 딱 내가 궁금했던걸 풀어줬네😂 찰나를 영원의 공간에 묻고오다니...가슴 절절해진다ㅠㅠ 글 너무 잘봤어 고마워!!
잘읽었어.... 장만옥밖에 안보이다가 마지막쯤 가니까 양조위랑 시너지가 돋보이더라.. 간만에 여운이 남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나 영화 잘 몰라..그냥 왕가위 감독 많이 좋아해서 인터뷰 읽고 영화 계속 반복해서 본 게 전부야..이미지 출처는 전부 텀블러! 많이 볼 땐 하루에 5편도 봤었고 어떨 땐 아예 안 봐..!
이 글은 치파오랑 불륜 소재로 인해서 영화 전체에 대한 평가까지 너무 박해지는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에 썼던 글이었거든..거기에 집중하느라 내용도 주제도 토막 났던 글인데 좋게 봐줘서 고마워☺️
내가 본 왕가위 감독 인터뷰에서는 프랑스 드골장군을 맞이하는 캄보디아 왕 내외의 장면을 캄보디아를 식민지배했던 프랑스와 피식민지였던 캄보디아의 관계를 통해서 은유적으로 홍콩의 정치적인 상황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다고 하더라고. 영국령 아래에서의 홍콩의 원형에 대한 그리움, 작별인사라고... 그래서 나는 화양연화가 보기에만 좋은 영화가 아니라 감독의 역사적인 감수성 아래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사랑관계를 통해서 풀어내는 영화라고 생각해. 마치 패왕별희가 그러했듯이. 내 최애영화 ㅠㅠ 설명 잘해줘서 고마워 여샤! 많이 배우고 가.
맞아. 책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 영상 인터뷰에서는 본문 내용으로 답변했더라!
이번 글에서는 사랑에 집중해서 해석하고 싶어서 역사적 층위는 아예 배제했어.. 나는 그동안 불륜 소재를 못 받아들여서 화양연화를 홍콩 반환 쪽으로 해석해왔는데, 리마스터링 보고 난 후론 영화에 드러나는 감정을 고스란히 가져가고 싶어지더라고..그래서 사실 홍콩반환으로 해석한 글도 있었는데 지워버렸어...ㅠㅠ
+아직도 여운에서 허우적..여시 말이 맞아..해석에 정답은 없지. 어떤 층위의 해석이든, 어떤 방향의 해석이든..!
나야말로 글 읽어주고 정성스럽게 댓글 달아준 점 고마워☺️
@커피와담배 여시 말이 뭔지 나도 리마스터링 보고 느꼈어 ㅠ 그 감정에 하루종일 빠져서 너무 괴롭다고 해야하나.. 그 절제된 감정선이 갑갑하고 사무치게 그립더라고.. 어긋나는 관계들에 대해서 조의를 표하면서ㅠㅠ 앗 지웠구나 ㅠㅠ 나는 어느 해석이 됐든 다 적절하다고 생각해! 여시 암튼 정리 잘해줘서 다시 한 번 고마워~
좋은 글 고마워 여샤
이제야 이 영화 봤는데 여시 해석 너무 좋았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