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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람의 기도
시 26:1-12
1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3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4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5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6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7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8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9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10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11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2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26:1-12 / [시련 속에서 드리는 기도; 다윗의 시] 여호와여, 판단하소서. 이 몸은 아무런 흠 없이 살아왔습니다. 온전히 여호와 주님만을 굳게 믿고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2) 여호와께서 낱낱이 알아보소서. 이 내 속마음과 생각까지 헤쳐 보소서. 3) 한결같이 따스하게 잘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만 믿고 살았습니다. 언제나 미쁘신 주님만 따라 살았습니다. 4) 거짓만 일삼는 자들과 한자리에 앉지 않고 못된 것들은 찾아가지도 않았습니다. 5) 못된 궁리나 하고 있는 모임이 혐오스러워 나쁜 것들하고는 자리도 같이하지 않았습니다. 6) 여호와여, 내게 아무런 허물이 없다는 걸 보여드리려 이렇게 두 손을 물로 씻고 주님의 제단을 돌며 주님을 기립니다. 7) 참으로 고마우셔라 감사 노래 부르리이다. 주께서 베푸신 그 놀라운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이야기하리이다. 8) 여호와여, 주님 계신 이 집을 사랑합니다. 주님의 영광 드리워져 있는 이 장막을 사랑합니다. 9) 이 목숨을 죄인처럼 거두지 마소서. 이 생명을 살인자처럼 없애지 마소서. 10) 하는 짓마다 나쁜 짓이요, 벌이느니 남등이나 쳐먹는 짓뿐인 것들과 똑같이 취급하지 마소서. 11) 정말 이 몸은 흠 없이 살았습니다. 하오니 이것을 용서하소서. 어여뻐 보아주소서. 12) 내 두 발을 든든한 길에 서게 해주시니 정말 고마우셔라. 주님의 백성 한자리에 모여 있는 곳에서 여호와 주님을 찬양하리이다.
억울한 상황에서 자신의 결백을 천명하며 구원을 간구하고, 호소하는 다윗의 기도입니다.
무죄 천명과 변호 요청(1-3)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여 흔들리지 않았던 다윗은 나름대로 언약에 충실하고, 순결한 태도나 행동의 완전함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올바르게 조사해 달라고 합니다. 주께서 자신의 감정과 의지, 즉 내적 동기를 살펴주시기를 바라며 뜻과 양심을 단련시켜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리 안에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정당한 판단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면서 자신의 무죄함이 드러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무죄고백(4-7) 다윗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자기의 이익을 취하려고 거리낌 없이 거짓말을 하고 음모를 꾸미며 위증도 마다하지 않았던 허망한 사람이나 간사한 자와는 무관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행악자의 집회를 피했고, 악한 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지금 문제가 되는 범죄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무죄함의 상징으로서 손을 씻어, 곧 정결함으로 주의 제단을 두루 다니면서, 하나님의 행하신 기이한 모든 일에 대해 감사와 찬양을 드리려고 성소를 방문합니다.
악인과 의인의 이중 운명(8-12) 다윗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악한 것을 멀리하고,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에 가까이 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멀리하며, 자신의 손은 깨끗이 했음에도, 사악함과 뇌물이 가득한 죄인이나 살인자와 같은 운명에 처할 위기에서 막아 달라고 여호와께 간구합니다. 그들과는 자신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며 1절의 고백처럼 완전함으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밝히며 자신을 속량하고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죄인의 자리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을 평생 찬송하며 살겠다고 서원합니다. 예배의 자리는 다윗의 발을 평탄하게 하여 인생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자신의 간구가 응답되었음을 확신합니다.
적용: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예배의 자리에 빠지지 않고, 찬양하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장편소설 '대지'로 1933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펄 벅' 여사의 한국사랑은 유명합니다. 그녀가 남긴 유서에는 '내가 가장 사랑한 나라는 미국이며, 다음으로 사랑한 나라는 한국'이라고 쓰여 있을 정도입니다. 1960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어느 날 그녀는 따지 않은 감이 감나무에 달린 것을 보고는 통역을 통해 근처에 있던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저 높이 있는 감은 따기 힘들어서 그냥 남긴 건가요?" "아닙니다. 이건 까치밥이라고 합니다. 겨울새들을 위해 남겨 둔 거지요." 그녀는 그 사람의 말에 너무도 감동하여 탄성을 지르며 말했습니다. "내가 한국에 와서 보고자 했던 것은 고적이나 왕릉이 아니었어요. 이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한국에 잘 왔다고 생각해요!“
< 설 교 >
억울하십니까?
시 26-30편 / 최영기 목사
<시편 26-30편>
오늘은 26-30편까지를 총체적으로 상고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인 5개의 시편을 읽어보면 그 내용이 그 내용인 것 같은 생각이들 것입니다. 시편을 읽으면서 이렇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히브리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단어가 주는 뉘앙스도 모르고 히브리 시에 담겨져 있는 운율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동요 가사 중의 하나가 옹달샘입니다.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깊은 산 속' '옹달샘' '눈비비고 일어난다' 이런 단어들이 우리의 마음에 그리움과 따뜻함을 심어주는 단어입니다. 또 여기에는 리듬이 있어서 우리 뇌리에 새것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번역한다고 해 보십시오. 얼마나 밋밋합니까? "Who drinks from the well in a deep valley? It's a little rabbit who comes to drink but only washes himself."
어쨌든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시편의 감칠맛을 이해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도 우리 마음에 시편을 쓰신 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는 이해가 갑니다. 오늘의 시편을 읽어보면 오늘의 시편을 기록한 다윗은 어려움 가운데에 빠져있고 하나님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하나님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해소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Ⅰ. 세상 살며 억울함은 당하게 마련이다
우리가 시편을 읽으면서 특히 오늘 상고할 시편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오해를 받거나 모략 중상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면 세상 살기가 어느 정도 편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결벽증이 있어서 남이 나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오해를 하고 있다 싶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풀어야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이 나에게 관하여 부정적인 말을 했다고 하면 잠을 못 자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살면서 오해나 모략 중상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이런 면에서 많이 편해졌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억울한 비난을 받는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에 따라서 해결 방법도 달라져야할 것입니다.
첫째는 비난받을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비난하는 사람이 상황을 100% 이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억울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충분히 비난할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이러할 때에는 상대방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자꾸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상대방을 이해시키려 하는데 그러면 일이 더 복잡해집니다. 비난에 관하여 동의하고 사과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끝내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는 상대방이 오해로 인해서입니다. 이러할 때에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한번은 설명을 해주어야합니다. 설명으로 인해서 상대방의 오해가 풀릴 수 있는 가망성이 있는데 참고 견딘다고 가만히 있는 것은 피차 손해입니다. 설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때에는 다음에 나오는 셋째 경우로 간주해야합니다.
셋째는 악한 자로부터 모함을 받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에게 호소하는 것은 이러한 경우입니다. 다윗은 26:1-3에서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면서 하나님이 변호해주실 것을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자면 억울하게 비난을 받고 모함을 받을 것을 각오하여야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을 뜨기 전에 세상이 미워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경고를 주셨습니다(요 15:18-19).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고 남에게 잘못해주면 비난과 모함의 대상이 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벗어나야 합니다. 내 동기가 아무리 순수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악한 사람은 순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경우에 비추어 왜곡하여 비난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Ⅱ.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 올바른 반응을 보인다
이러한 비난에 넘어지지 않으려면 흠 없는 삶을 살려고 애를 써야합니다. 다윗도 26:1-5에서 자신의 올바를 삶을 열거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렇다고 다윗이 자신이 도덕적으로 완전하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11절에서 노력한다고 말하고 은혜를 간구하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흠 없는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해야합니다. 전에 한국에서 잘 알려졌던 목사님이 미국으로 출국할 때에 몇만 불을 감추어서 출국하려다 발각이 나서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외국으로 갖고 나갈 수 있던 외화를 제한할 때입니다.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청년이 전날 밤에 와서 목사님을 평소에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미국에 가서 쓰시라고 준 것을 갖고 나가다가 발각이 된 것입니다. 나중에 이 청년은 정보부 요원이었음이 알려졌습니다. 당시에 이 목사님이 반정부 발언을 많이 하셨기 때문에 밉게 본 정보부에서 올무를 만들어서 얽혀들게 한 것입니다. 이 목사님이 철이 없는 분이지요. 정부를 비판하던가 선지자적인 일을 하려면 삶에 흠이 없어야하는데 어리석게 정보부의 계략에 말려든 것입니다. 베드로도 우리가 주를 위한 고난은 귀한 것이지만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고난받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벧전 4:14-15).
우리 교회 목자들도 평신도 목사가 되어서 보통 교회에서 목회자가 하는 사역을 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을 무너뜨리려는 악한 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해야합니다. 그리고 흠이 잡히지 않도록 남에게 비난의 근거를 줄 수 있는 요소를 삶에서 제거하여야합니다. 영혼 구원하는 평신도 목사의 사역이 너무나도 귀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목자 가운데에는 무역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고객이 오면 식당에 가서 음식 대접을 하는데 이들이 맥주도 시키고 소주도 시킵니다. 자신은 콜라 같은 것을 시켜 마시지만 교인들이 행에나 보고서 같이 술을 마신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싶어서 신경이 쓰인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때문에 행에라도 비난의 근거를 줄까봐 염려하는 주님의 진정한 사역자다운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억울하게 비난을 받거나 모함을 받을 때에는 기도 시간을 늘이고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을 늘여야합니다. 다윗도 재난이 닥쳤을 때에 이러한 소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시 27:4-5).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해서이기도 하지만 잘못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서입니다. 남에게 억울하게 비난을 받고 모함을 받으면 우리는 마주 싸우고자하는 투지가 끓어오를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피해자였지만 결과적으로 가해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28:3상에서 나를 자신을 악한 자들과 싸잡아 내동댕이치지 말아달라고 하는데 잘못하면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결과를 방지하기 위하여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에게 호소하여야합니다(28:1-2). 그리고 억울한 것은 하나님께서 풀어주실 것을 간구하여야합니다(롬 12:19).
악한 자와 마주 싸우면 우리도 악해지기가 쉽습니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나 싸움을 보면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둘 중에 더 잘못한 쪽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싸우다보면 둘 다 피장파장입니다. 결국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둘 다 지고 마는 것입니다. 사단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더 많은 시간을 보내어 억울함을 호소하고 시비를 가려주실 것을 간구해야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28:4-5절에서 대적하는 사람들의 멸망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너무 복수심에 불타는 것이 아니냐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다윗의 분노는 개인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관한 것입니다(28:5). 그리스도인은 악에 관하여 분노할 수 있어야합니다. 저는 중국에 가서 탈북자들을 만나보았고 그들의 현황에 관하여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김정일과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지도자 그룹에 대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에서 지성이라는 사람들, 깨었다는 대학생들이 북한 동포를 기아 상태에 몰아넣는 장본인인 김정일에게 전연 분노를 느끼지 아니하고 목사라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그를 옹호할 뿐 아니라 숭배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악에 대한 분노가 있어야합니다.
Ⅲ. 하나님은 자연도 지배하신다
우리가 악한 사람에게 핍박을 받을 때에 하나님에게 호소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주실 수 있으십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은 마음의 평안만 주시기 실제로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못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마음의 평화나 허락하는 분이라면 위기 상황에 처하고 악한 자로부터 안전의 위협을 느껴야할 공격을 받을 때에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호소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물리 세계도 지배하시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시편 29편에서 이러한 사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29:4-6).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항상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 신을 섬기려는 성향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유는 바알은 농경 신이기 때문입니다.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농사를 잘 짓기 위하여서는 바알 신을 섬겨야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시편 29편에서 사실은 바알 신을 빗대어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을 알리고 있습니다. 우렛소리(3절)이나 번개(7절)가 다 바알 신이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10절의 홍수를 정복하신다는 말도 바알의 전설에 의하여 홍수 신을 제압하여서 홍수가 나는 것을 막았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이 시를 통하여 일기를 비롯한 자연을 지배하는 것은 가상의 바알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도 지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일기를 위하여서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에 백광훈 집사님 부친께서 한국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집사님 내외분이 나가셔서 장례식을 치렀는데 2주일간 비가 계속 오다가 장례식 날과 삼오제 날 이틀만 비가 그쳤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감사하다했습니다. 어떤 분은 어쩌다가 비가 오지 않은 것이지 하나님이 장례식을 위해서 비를 오지 않도록 했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간절히 기도했다면 하나님께서 장례식을 위하여 이틀간 청명한 날씨를 허락하셨던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날씨와 자연을 지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 날씨를 위하여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비가 오기를 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고 우리는 우리의 필요만 아뢰면 됩니다. 저는 점점 많은 분들이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가 지레 포기하고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 아닌가는 생각을 합니다. 구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약 4:2).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만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와 자연조차도 지배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Ⅳ. 은혜를 입은 후에는 상응하는 감사와 서원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셨으면 다음에 거기에 상응하는 감사와 서원이 있어야합니다. 지금까지 상고한 다윗의 시는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그런데 거의 모두 다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서원으로 끝이 납니다. 시편 30편에서도 다윗은 죽을병에서 건져주시기를 하나님에게 간구합니다. 그리고 끝은 감사로 끝냅니다(30:11-12). 우리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었으면 그에 상응하는 약속과 서원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난 몇 달 동안에 저희 집에 위기 상황이 있었습니다. 지난 4월에 장에 내시경을 찍었는데 난소암이 재발한 것으로 판명이 났기 때문입니다. biopsy 결과를 보고 처음에는 갑상선 암이 전이 된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제 아내가 갑상선에 암이 생겨서 떼어 냈습니다. 크게 낙심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떼어낸 종양을 재검한 결과 암이 아니고 수술 자리에 남겨진 조직인 것 같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런데 아들 결혼식 때문에 휴스턴에 오셨던 노재윤 집사님이 종양을 검사하시고 난소암이라고 판정을 내렸습니다. 노 집사님 내외는 초기에 떼어내는 것이 어떠냐고 했지만 제 아내 주치의가 약물 치료를 하고 후에 결정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호르몬 치료에 들어갔습니다. 난소암이 자라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호르몬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이 염려할까봐 치료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그러나 집사님과 스태프, 중보 기도 팀에는 기도 요청을 하였습니다. 저도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수요일에는 금식하며 정시에 알람이 울리게 해서 매 정시마다 5-10분을 기도를 했습니다. 석달 후 다시 전신마취를 하고 내시경을 찍었는데 검사한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종양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종양이 있었던 부위를 뜯어내서 생체 검사실로 보냈다고 했습니다. 얼마 후 생검 결과가 나왔습니다. 암 세포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결과를 받고 저로부터 두 가지 반응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감사입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에게 대한 감사입니다. 둘째는 서원이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암이 사라지는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어떻게 무엇을 위하여 기도할 것인가?
제 기도 계획에 관해서는 지금 보류 상태입니다. 검사 결과를 갖고 주치의를 만났을 때에 주치의가 호르몬 치료를 통하여 암이 없어지는 수가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호르몬은 암이 자라는 것을 멈추기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암이 사라진 것은 순전히 기도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약이 고친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암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에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여 주셨으면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약속한 자신에 관해서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큰 은총을 체험하면 감사와 더불어 왜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묻고 거기에 상응하는 서원을 해야합니다. 건강을 회복시켜주셨으면 왜 건강을 회복시켜주셨는지 묻고 상응하는 서원을 해야합니다. 사업을 축복해 주셨으면 왜 사업에 축복을 해주셨는지를 묻고 상응하는 서원을 해야합니다. 회사에서 어려운 승진이 되었으면 왜 승진이 되었는지를 묻고 그에 상응하는 서원을 하여야합니다.
은혜를 입으면 감사와 더불어 은혜에 상응하는 서원을 하여 하나님에게 영광돌리는 우리가 되어야하겠습니다.
도저히 죄지으며 살 수 없는 이유
시 26:1-12 / 유기성 목사
주님, 나를 변호해 주십시오. 나는 올바르게 살아왔습니다. 주님만을 의지하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주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시험하여 보십시오. 나의 속 깉은 곳과 마음을 달구어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진리를 따라서 살았습니다. 나는 헛된 것을 좋아하는 자들과 한자리에 앉지 않고, 음흉한 자들과도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악인들의 모임에서 그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고, 한자리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해주신 놀라운 일들을 모두 다 전하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계시는 집을 내가 사랑합니다. 주님의 영광이 머무르는 그곳을 내가 사랑합니다. 나의 이 목숨을 죄인의 목숨과 함께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나의 이 생명을 살인자들의 생명과 함께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그들의 왼손은 음란한 우상을 들고 있고, 그들의 오른손은 뇌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깨끗하게 살려고 하오니, 이 몸을 구하여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내가 선 자리가 든든하오니, 예배하는 모임에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설교를 준비하려고 시편 26편을 읽을 때, 처음 1절을 읽으면서 “나는 올바르게 살아왔습니다.”하는 구절을 읽는데,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한 도전을 받는 것과 동시에 어쩔 수 없는 거부감이 드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다윗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다윗은 감히 이런 고백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 “주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시험하여 보십시오. 나의 속 깊은 곳과 마음을 달구어 보십시오.” 하면서 3절에서 “주님의 진리를 따라서 살았습니다.” 6절에서 “내 무죄함을 드러내며” 12절에서 “내가 선 자리가 든든하오니” 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장로님께서 주일에 기도하면서“나는 말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지난 주간 또 죄 중에 살다가 왔습니다.”“저희를 용서해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면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나는 올바르게 살았습니다. 나는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나는 죄가 없습니다. 나는 너무나 든든합니다.”라고 기도하면 얼마나 거부감이 들겠습니까?“저 장로님, 어떻게 된 것 아니야, 너무 교만하잖아!”하지 않겠습니까?
성경도 사람은 어느 누구나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시 14:3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렇다면 시 26편의 다윗의 고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까?
저는 몹시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쩔 수 없이 죄인일 수 밖에 없는 다윗이 분명히 “나는 올바르게 살아왔습니다.”고백한 것이 주님이 주시는 메시지라고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은 다윗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결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다 압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다윗에게서 이런 고백이 나오게 만드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냐 하는 것입니다.
시편 26편을 찬찬히 읽어 보면 다윗 자신을 드러내는 교만한 말이 아니라 주님을 드러내는 간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 26:1 …나는 올바르게 살아왔습니다. “주님만을 의지하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히 주님만 의지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7에서는 분명히 이 모든 일이 다 주님이 자신에서 해주신 것이라고 분명히 간증하고 있습니다.
7절 “감사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며, 주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놀라운 일들을 모두 다 전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죄짓지 않으려고 얼마나 몸부림쳐 보았습니까? 회개하고 결심하고 노력하였지만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우리는 죄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놀라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우리가 “나는 올바르게 살았습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삶을 변화시키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면 우리에게서도 다윗과 같은 간증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을 믿었기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신명기 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후 호렙 산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처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드러내셔서 하나님의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모세에게 나아와 우리가 도저히 무서워 하나님의 임재를 감당할 수 없으니 모세 혼자 하나님께 나아가서 말씀을 받아가지고 오고 자신들은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했으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바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건져내신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오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가까이 오시는 하나님 앞에서 뒤로 물러가 버렸습니다.
그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신명기 5장 30절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서 그들에게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이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바로 다음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신 5:31 너는 여기 내 곁에 서있으라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셨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가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 아픔이었을까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기가 막힌 말을 합니다.
말 1: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운 말씀을 예언자를 통하여 하셨습니다.
렘 7:13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를 꺼려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출 20:20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해방하신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였습니다, 그리고 죄의 종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죄짓지 않고 사는 열쇠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면 죄짓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 우리가 다 압니다.
시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놓는 자세로 매일 매일을 살았습니다.
2절 주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시험하여 보십시오. 나의 속 깊은 곳과 마음을 달구어 보십시오.
3절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늘 바라보면서 주님의 진리를 따라서 살았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며, 일기를 쓰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시편은 다윗의 영성일기였습니다.
이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온전한 삶을 살게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집안 일을 하며 직장 생활을 하며 죄짓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며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 수 있습니까?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올바르게 살려고 수도원에서 산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전쟁을 수도 없이 치렀습니다. 그는 왕이었습니다. 얼마나 일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올바르게 살았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가 죄짓지 않고 산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바라 보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삶이 달라지게 됩니다.
4절 나는 헛된 것을 좋아하는 자들과 한자리에 앉지 않고, 음흉한 자들과도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5 나는 악인들의 모임에서 그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고, 한자리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편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알면 심판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9절 나의 이 목숨을 죄인의 목숨과 함께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나의 이 생명을 살인자들의 생명과 함께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가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자가 되면 죄를 지으라고 해도 짓기 싫어지게 됩니다.
온전한 성도, 거룩한 삶을 살자 하면 거부감을 가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왜 거룩하게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마 19: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홍해를 가르신 일을 믿으면서,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신 일을 믿으면서, 왜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실 것은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참 안타깝고도 심각한 일입니다.
엡 4: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하나님의 분명히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단 하나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꿈 이야기를 해서 조심스럽지만, 어제 토요일, 꿈에서 사자를 만났습니다. 누군지 모르겠으나 사람들과 헤어져 집으로 가려고 어둠 속에 길을 가는데, 사자 떼를 보고 멈추어 섰는데, 한 마리가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극한 두려움이 엄습하여 뒷걸음치는데, 그 사자가 나에게 달려들어 힘으로 나를 밀치는 상황에서“도와주세요!”소리쳤는데, 사진기를 든 한 사람이 와서 나를 건져내기보다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그런다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3시 50분이었습니다.
마귀가 나를 공격하려고 하는 것인가? 당연한 일이니 걱정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무엇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밤새 뒤척였습니다. 마침내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그 다급한 순간에는 주님이 생각나지 않고 극한 공포심만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아직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수준이 이 정도구나!
우리에겐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급한 일이 닥치면 믿음도 다 사라집니다.
다윗처럼 늘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위기 때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악한 세상에서 죄를 이기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을 살게 해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예수님을 항상 바라보는 자여야 주님도 우리를 지키고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중보기도 사역자들인 독일의 마리아 자매회, 1944년 독일이 대대적인 폭격받는 중에, 다름슈타트에서 그들의 공동체를 건축을 했습니다. 밤마다 무서운 폭격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자신들 안에 죄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빛 가운데 걷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모이면 서로 자백하고 또 자백했습니다. 오직 주님의 긍휼만 의지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놀라운 평안과 확신이 임했습니다. 공동체의 각 건물들의 건축이 진행되었습니다. 폭격 중에 가나안 공동체가 세워진 것입니다.
영성일기, 우리를 깨끗하게 살게 해 줍니다. 빛 가운데 교제하는 삶입니다.
한 교회 연구소에서 서울에서 크다고 소문난 한 교회 교인들을 설문조사 했더니, 25%가 주일을 성수하지 못하고 있더랍니다. 또 교인들의 30%가 주중에 기도하는 생활을 전혀 하지 않고 있더랍니다. 또 그 중에 40%가 평소에 전혀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50%는 성경을 거의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교인들의 55%는 교인들의 헌금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또 70% 교인들은 교회 주일학교니 찬양대니 구역이니 그런 활동하는데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있답니다. 그리고 더더구나 그 교인들 가운데 85%는 아직 한번도 한 사람도 주님 앞에 전도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100% 교인 모두가 천국은 가고 싶다고 썼더랍니다.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천국과 별개가 아니라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11-12절 그러나 나는 깨끗하게 살려고 하오니, 이 몸을 구하여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내가 선 자리가 든든하오니, 예배하는 모임에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고난을 당하고 낮아짐을 당하고 수모를 당해도 그 자리가 바로 자기가 서야 할 자리요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송축하며 영광 돌리는 축복된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죤 웨슬리 목사,“하나님 외에는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 죄 밖에는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사람,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 백 명만 있으면 세계를 개조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거룩한 성도, 온전한 삶이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고 선교의 기반입니다. 교세가 아닙니다.
기울어져 가는 이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최선의 일인 것입니다.
영국의 신문기자 헨리 스텐리(Henry M. Stanley)는 무신론자였습니다. 1871년 선교사 리빙스턴 (D. Livingstone)이 수년간 본국과 연락이 두절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스탠리는 특종 기사를 쓸 목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리빙스턴을 찾아 밀림으로 나섰습니다. 수소문 끝에 리빙스턴을 찾은 그는 리빙스턴으로부터 무언가 얻기 위하여 그와 함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때 스탠리는 리빙스턴이 흑인들에게 생명을 전하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당시 나는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무신론자에 버금가는 편견을 갖고 아프리카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리빙스턴과 열 달을 지내면서 상당 기간 나 자신을 향한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이 고독한 노인을 만나게 된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 분은 여기에 와서 저 고생을 하고 계신가? 정신이 나간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무엇 때문인가? 무엇이 그를 저렇게 감동시키고 있는가?’우리가 만난 지 몇 달이 지났을 무렵 나는 그분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생활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점차로 타인에 대한 그의 동정의 마음이 나에게도 조금씩 전이되었고, 내 안에도 같은 동정의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경건한 자세와 온유함, 열정과 성실, 그리고 그가 자기 일을 얼마나 열심히 감당하는지 지켜보던 나는 결국 그 때문에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회개하라고 말하거나 강요하지 않았습니다.”후에 스텐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나를 회심시킨 것은 리빙스턴의 설교가 아닌 삶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불완전한 존재이며 많은 사람들이 바르고 순수하게 살기를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의 복음, 그리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은 너무나 흥분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거룩하게 살 수 있음을 증거합시다.
여러분은 증인입니다.
의인의 구속을 위한 기도
성경 : 시편 26:1-12
본 시편의 저자는 ‘다윗’입니다. 다윗이 언제 이 시편을 기록하였을까요? 본문에 나타난 묘사를 통해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왕을 배반할 정도로 허망하고 간사하였으며 그 손의 뇌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인정받기를 힘썼고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정당함을 입증해 달라는 호소(1-2절)
처음 이 두 구절은 이 시편의 주제를 소개하며 분위기를 설정합니다. 이것은 의인의 정당함을 입증해달라는 절박한 호소입니다.
이 호소는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라는 명령법으로 시작합니다. 법원에서 재판을 할 때 최종적으로 하는 것이 선고 공판입니다. 동사 ‘샤파트’는 ‘판결을 내리다’는 의미입니다. 판결은 석방을 위한 결정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의롭다고 선언하다, 정당함을 입증하다, 혹은 공정하게 대하다’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시 9:4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이렇게 간청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자신이 완전하게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완전함’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에 ‘톰’이라는 단어입니다. ‘깨끗한 성품, 성실함, 순수함’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이 그의 완전함에 행하였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처럼 완전하여 무죄하다는 뜻은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에 성실하고 진실하게 지켰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다윗이 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믿음에 있어서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다’라는 말은 ‘미끄러지다, 미끄러지듯 움직이다, 비틀거리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삼하 22:37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내 발이 미끄러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시 18:36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셨나이다
욥 12:5 평안한 자의 마음은 재앙을 멸시하나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리는구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시편 기자의 삶은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발을 잘못 짚는 것도, 미끄러지는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2)믿음과 순종에 기초하여, 자신의 정당함을 입증해달라는 호소는 하나님께 이제 자신을 시험하고 자신의 주장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시라는 호소로 한층 강화됩니다.
시 26:2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시편 저자인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피시고 시험하심으로써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여기에서 ‘살피사’라는 말은 ‘입증하다, 시험하다, 시험해보다’라는 의미입니다.
시 139:23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살핀다는 것은 깊숙이 있는 본성을 날카롭게 꿰뚫어 본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동사인 ‘시험하사’라는 말은 비슷한 강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험한다는 것은 마음에 있는 것을 드러내어 증명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므로 무언가 발견하기 위하여 살펴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신이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것을 확증해주시기를 원하는 것뿐입니다.
세 번째 동사가 ‘단련하소서’입니다. 이것은 금이나 은을 정제하기 위하여 불로 녹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어서 내 누명을 벗겨주셔서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게 하시고 빼앗긴 재산이나 직책을 회복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할 것 같은데 의인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직 내 마음이 의심스러우면 한 번 더 나를 어려움에 빠뜨리셔도 좋다는 것입니다. 나를 더 연단하시라고 말씀드립니다. 이 말은 죄에 있어서는 내 마음이 너무나도 확고하기 때문에 아무리 유혹을 해도 넘어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시 139:23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시 139:24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결백함에 대한 항변(3-8절)
정당함을 입증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완전함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은 악에서의 분리를 요구합니다. 시편 저자는 일반적인 주장을 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말하면서 결백함을 항변합니다.
1)하나님을 향한 충성이 반드시 확증되어야 합니다(3절).
시 26:3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다고 했습니다. 즉 그가 앞에서 말한 경건한 생활이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경건생활을 함에 있어서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교만을 갖지 말고 늘 자신을 죄인으로 알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보는 신앙적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특히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라고 했는데 이것은 세상의 흐름에 역류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행할 때에는 사람들은 우리를 그렇게 좋아하고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우리가 진리에 철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마치 통나무 하나가 강을 떠내려가다가 어느 한 순간 정신을 차리면서 작은 물고기처럼 변해서 냇물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남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그들의 요구를 일일이 거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부터 우리에게는 적들이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느냐 아니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느냐의 문제입니다.
2)하나님을 향한 충성에는 악과 구별될 것이 요구됩니다(4-5절).
시 26:4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시 26:5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악한 자들이 의인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함께 좀 어울려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나름대로 어울려보려고 합니다. 그들이 노는 데로 놀러 가서 어울리기도 하고 그들이 하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함께 어울리면서 그들의 실상이 너무나도 형편없는 엉터리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이 주로 하는 말은 자기 자랑 아니면 다른 사람에 대한 욕입니다. 그러니까 그들과 같이 어울리는 시간이 너무나도 무의미하고 답답해서 잘 어울리지 않게 됩니다.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악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안정감이 없습니다. 마치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흔들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 57:20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3)여호와를 향한 충성은 성소에서 드리는 예배에서 온전히 표현됩니다(6-8절).
시 26:6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시 26:7 감사의 소리를 들려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시 26:8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라고 했는데 이 말은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이 무죄의 표시로써 그의 손을 씻고 제단에 나아갔던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출 30: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출 30:18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출 30:19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출 30:20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
출 30:21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따라서 손을 씻는다는 것은 단지 다윗 자신이 영적으로 순결하고 무죄하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은유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라는 것은 제사에 종사하면서 제단 주위로 다니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예배드리는 행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호소(9-12절)
1)악의 있고 악한 자들에게서 분리되기 위해 기도합니다.
시 26:9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시 26:10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시 26:11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본문 시편 첫 부분에 나오는 호소는 정당함을 입증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에서 자신의 결백을 항변하는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살면서 악과 행악자들을 피함으로써, 여호와를 향한 충성을 유지하여 애썼습니다. 그의 정당함은 여호와가 그를 그들과의 공동 운명에서 면하게 해주실 때 입증될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영혼을 죄인과 함께, 자기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말아달라고 간구합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다윗은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매우 위급한 상황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하 15:14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중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그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 우리를 해하고 칼날로 성읍을 칠까 하노라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성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인이나 살인자들처럼 종말을 맞이하지 않을 것을 믿고 자기 생명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 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10: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마 10: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우리도 죽음의 위기에 처할 때 자신의 성도됨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그분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손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시 26:10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사악’이란 말은 악한 꾀를 의미합니다. 즉 악한 자들은 악한 꾀를 내어 그들의 손으로 직접 그것을 실행하였고 그 수단으로 뇌물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처럼 악한 꾀를 내는 자들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악한 수단을 사용합니다. 뇌물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입니다.
출 23: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신 16:19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뇌물은 악한 수단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그것을 받아도 안 되고 주어도 안 됩니다.
다윗은 1절에 이어서 11절에서 ‘완전함에 행한다’라고 거듭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자신의 목적과 수단이 앞에서 말한 악인들처럼 허탄한 처세술과는 달리 하나님을 중심으로 신앙 가운데에서 행하고 있음을 역설하려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사용한 ‘완전함’이라는 말은 겸손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이어지는 다윗의 간구에 보면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말이 그것을 확실히 입증하여 줍니다.
2)여호와를 찬송하리라고 확신합니다(12절).
시 26:12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그는 자기 발이 ‘평탄한 데’ 섰음을 확신합니다. 즉 지금까지는 깊고 길도 없는 험곡에 갇혀 있었는데 이제 그는 넓은 평야가 열린 평탄한 곳에 서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시 31:8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이러한 느낌과 확신은 하나님께 기도한 모든 것이 응답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기도의 응답을 받았을 때 다윗은 회중에서 하나님께 찬송할 것을 결심합니다.
우리들도 항상 기도하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 보호를 받아 ‘평탄한 데’ 서서 안전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많은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시 22:25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나는 굳건히 서 있습니다
시 26:1-11 / 이종철 목사
이 시는 여호와의 법정에 나아가 자신의 무죄를 탄원하는 시이다. 시인은 자기는 완전하게 행하였다고 변호한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1),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11). 자기의 완전함에 대해서 주님께서 한 번 ‘판단하시고’(1), ‘살피시고’(2), ‘시험하시고’(2), ‘단련해보라’(2)고까지 말한다. 자기는 하늘에 맹세코 거리낄 것이 없다는 태도이다. 마치 자기는 무죄하다고 탄원하는 욥의 항변과 같다 할 것이다. 인생 중에 누가 스스로에 대해 완전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시인의 이런 태도는 우리를 당혹케 한다. 원죄를 강조하는 서구신학이나 내성적 양심이라는 것에 민감한 사람들에게는 특히 그러하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롬3:10,23)라는 말씀 앞에 시인의 확신의 찬 태도는 인간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항변처럼 들린다. 그러나 오해는 말씀 속의 시인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의’의 개념에 대해서 다시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이 시편은 법정소송과 관련하여 언급되고 있음에 주의하여야 한다. 1절의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라는 탄원이나 6절의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라는 호소가 그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완전’은 법정소송이 붙은 장면에서 자기는 죄가 없다는 무죄주장과 같다. 즉 상대적인 완전이다. 그런 점에서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 주님의 구속(11)은 다름 아닌 시인에 대한 옳다는 인정이다.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시인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곧 구속이다. 구약에서 ‘의롭다’, ‘구원하다’는 표현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주관적인 사건이 아니다. 병에서 낫는 것이 구원이고,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손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구원이다. 곧 구원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행동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완전함이라 할 때,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마음에 전혀 사심이 없는 성인군자상을 떠올린다. 세상에 이런 의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성인군자상의 의인관은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의 모습이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상형을 설정해 놓고 스스로를 비하하고 자신 없어 하는 것은 결벽증적인 태도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판단 받는 자세가 아니다. 자기 양심의 판단 앞에 서려는 교만한 태도이다. 의롭다는 판단은 내 양심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신다.
이 시편을 지은 시인은 다윗이다. 그러면 다윗은 의인인가 아닌가? 본 시에서 다윗은 스스로를 완전하다고 말하고 있다. 다윗은 손에 많은 피가 묻었고, 간음과 살인교사까지 저지른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리 뻔뻔스럽게 자신을 완전하다고 말하고 있는 걸까?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성경의 의인관이 다르다. 의는 내면적 양심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관계선상에서 나온다.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시면 옳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시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자는 의인이다. 이는 마치 연인의 사랑에 비유할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의인이다. 비록 부족하고 허물이 많다할지라도 그는 의인이다. 하나님의 기쁨이 그 사람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의인과 악인을 결정하는 객관적 기준은 하나님의 율법이다. 율법은 힘든 것이 아니다. 율법의 원천은 십계명이며 상세한 율법들은 십계명을 자세히 풀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우리를 얽매고 힘들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화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든 최소한의 장치일 뿐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의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지도 않은 여러 법과 도덕들을 만들어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경향이 있다. 죄가 침투하긴 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세계 안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허락하셨다. 죄에 오염될 가능성보다 우리를 둘러싼 선이 더 많다.
율법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잃어버리고 이 율법을 자기 주장과 자기 권리의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율법을 자기 의로움의 수단으로 삼아버렸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유대인의 기득권을 옹호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장벽으로 이용하였다. 이런 오용만 조심한다면 우리는 시인처럼 “나는 무죄하다”고 당당할 수 있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완전한 구속을 받은 우리가 “나는 의롭습니다.” “나는 완전합니다.”하고 어찌 담대히 외칠 수 없겠는가! 이런 당당함과 자신감이 없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헛되게 만드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할 것이다.
시인은 자신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악인과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5-6) 허망한 사람, 간사한 자, 행악자, 악한 자는 모두 피해야 할 무리들이다.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죄인을 멀리해야 한다. 술집에 가서 “주님, 술의 시험으로부터 저를 지켜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한다면 그 기도가 응답될까? 아예 술집에 가지 않는 것이 죄를 짓지 않는 현명한 길이다. 붉은 것을 가까이 하면 붉게 물들게 되어 있고, 먹을 가까이 하면 검은 것이 묻게 마련이다. 악한 것이라면 앉지도, 함께 걷지도, 그 집회에 참여하지도 말아야 한다. 복 있는 사람 가까이 있으면 복을 받게 되고, 복 없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덩달아 복을 잃는다. 그래서 우리들이 드려야 할 중요한 기도 중에 하나는 만남의 복이다.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 늘 주변에 좋은 스승, 믿음의 친구들이 있기를 위해 기도하라. 악한 자와는 아예 가까이 하지 않기를 기도하라.
시인은 자신의 무죄를 분명히 하기 위해 성전에 나아가 물두멍에 손을 씻고 주의 제단을 원을 그리며 도는 의식을 행한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6). 이어서 소리 높여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을 간증한다.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7). 환난의 때에 우리가 행해야 할 일은 먼저 예배를 회복하는 일이다. 늘 감사하며 그의 행하신 일을 증거 하는 것이다. 어려운 때일수록 시인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8) 하며 성전을 즐겨 찾는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성전을 가까이 하고 성전에 와서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의 계신 집에서 우리는 위로를 받고, 주의 영광이 임할 때 우리를 얽매이던 문제들은 힘을 잃게 된다.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사오니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12) 내 발이 평탄한 곳에 섰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서 있다는 말이다. 시인은 주의 집에서 힘을 얻었다. 문제와 맞설 수 있는 은혜를 받은 것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추진하다가 보름쯔 의회에서 종교재판을 받게 되었다. 당시 종교재판에서 정죄되면 그 자리에서 화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마귀의 세력들이 우글거리는 그곳으로 거리낌 없이 갔다. 그리고 그 재판정 앞에서 당당히 종교개혁의 진리를 주장하였다. 그가 그때 한 말이 유명해진 바로 이 말 “나는 여기 확고히 서 있다”는 말이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기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를 확신하였기에 그렇게 당당히 서 있을 수 있었다.
더욱 교회를 사랑합시다.
시 26:8 / 박봉수 목사
얼마 전 유튜브를 통해서 한국사에 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세계적인 역사학자 하버드대의 에드워드 슐츠 박사의 강의입니다. 그 강의 가운데 제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나라가 긴 역사상 외세에 굴복해 본 일이 없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나라는 역사상 유일하다는 것입니다.
이분은 우리나라가 강대국 틈에서 수없는 침략과 억압을 당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굴복한 일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는 점을 놀라워했습니다. 비록 얼마동안 지배를 받은 일이 있었지만 끝까지 저항했고, 결국 투쟁하여 독립을 쟁취했다는 것입니다.
이분은 그렇게 된 원인이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DNA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위기가 찾아오면 단결하는 아주 특별한 DNA가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국가위기에 왕과 지도층이 항복하려고 할 때도 일반 백성들, 여성들, 천민들, 나아가 종들이 의병을 일으켜 저항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은 그 어느 나라도 굴복시킬 수 없는 나라이고, 사실상 세계가 무서워해야 할 나라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분이 말한 정신적 DNA라는 말에 주목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 ‘나라사랑 DNA’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놓여있을 때마다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통해 이 나라사랑 DNA가 드러나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때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상황 속에서 아낙네들이 행주치마에 돌을 날라 힘을 보탰고, 그 덕에 행주대첩의 대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 때 생각지 못했던 아낙네들이 나라사랑 DNA를 보여주었습니다. IMF 국가 부도위기에 그 어떤 나라도 생각하지 못했던 ‘금모으기운동’이 펼쳐졌고, 그 덕에 국가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어린 아이로부터 이름 없는 노동자, 노인, 주부들이 나라사랑 DNA를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이 나라사랑 DNA가 우리나라를 이토록 오랜 역사를 이어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세계 속의 대한민국이 되게 했습니다. 이제야 세계가 이 DNA를 알아보고 놀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이와 유사하지만 더 강력한 정신적 DNA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사랑 DNA’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그리스도인들은 무려 300년을 이어온 로마의 박해를 견뎌내며 교회를 지켜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를 기독교국가로 만들고, 로마 전역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살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일제가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투옥됐고, 순교의 잔을 마시면서도 교회를 지켜냈습니다. 6.25 한국전쟁 때 공산군의 무자비한 탄압을 견뎌내며 교회를 지켜냈습니다. 이제 기독교가 우리나라에서 최대종교로 발돋움했고, 선교사 파송 1,2위를 다투는 세계 속의 한국교회로 우뚝 서게 됐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핏속에 교회사랑 DNA가 흐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 박해를 무릎 쓰고, 이런 교회사랑 DNA로 교회를 지키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변화하는 시대의 도전 속에 이런 교회사랑 DNA로 교회를 지키고 든든히 세워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66년 동안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교회사랑 DNA로 우리교회를 섬기고 지켜왔습니다. 초창기 천막교회 시절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리고 급변하는 주변상황의 도전 앞에서 교회사랑 DNA로 정성을 다해 교회를 섬기고 지켜왔습니다. 이제 어엿한 중견교회로 발돋움한 우리교회는 코로나 위기라는 처음 겪어보는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런 교회사랑 DNA로 하나가 되어, 더욱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고 지켜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통해 어떻게 이 교회사랑 DNA를 살려서 교회를 사랑해야 할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교회 사랑의 뿌리
오늘 본문은 이렇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이 시 26편은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그중에 본문은 다윗이 성전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점이 하나가 있습니다. 아직 성전이 없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성전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광야시절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짓게 하셨고, 그 성막에서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광야시대가 지나고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됐을 때, 사무엘이 성소를 세우고 그곳에 언약궤를 모셔놓았습니다. 그러다 사울 왕 시절에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블레셋이 언약궤를 감당할 수 없어서 돌려보냈습니다. 안타깝게도 사울왕은 돌아온 언약궤를 방치했습니다. 다윗이 늘 이점을 가슴 아파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이 언약궤를 시온성으로 모셔오게 됐습니다. 그 때 다윗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왕이 마치 어린 아이처럼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다윗은 나름대로 정성껏 마련한 곳에 언약궤를 모셨습니다. 그리고 레위인들 가운데 찬양대를 세워서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이 언약궤를 제대로 모실 성전을 지을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화려한 왕궁에 거하고 있는데, 언약궤가 누추한 곳에 모셔져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성전을 지어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는 계획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성전을 사모하는 그 마음은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합니다.
대상 29:3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위하여 준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이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내가 사유한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다윗은 아직 지어지지도 않은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이 불같았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단지 마음속에만 담겨져 있는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이 이토록 뜨거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성전을 보고 성전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성전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보고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성전에서 누군가 함께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리고 그 하나님을 성전에서 섬길 수 있다는 마음으로 성전을 사랑한 것입니다.
사실 많은 교인들이 사람 때문에 교회를 사랑합니다. 목사가 좋고, 교회에서 만나는 교인들이 좋아서 교회를 사랑합니다. 교회에 가면 은혜로운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따듯한 만남과 교제를 통해 위로 받을 수 있어서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러다 보면 사람 때문에 실망해서 교회 사랑이 식기도 합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가면 다른 곳에서와 달리 특별하게 주님을 만날 수 있어서 교회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특별하게 주님께 예배드릴 수 있고, 주님을 섬길 수 있어서 교회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교회 사랑의 뿌리가 주님 사랑이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할수록 더욱 교회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교회 사랑의 이유
본문에서 다윗이 주님을 사랑하기에 교회를 사랑한다고 했다면, 바울은 더 깊은 통찰을 보여줍니다. 엡 1:23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한 마디로 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 누구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씀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과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어떻게 이런 통찰을 가지게 됐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이 말년에 로마감옥에 갇혀서 지난날들을 돌아봤을 것입니다. 특히 처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들었던 말씀, 곳곳에 다니며 교회를 세웠던 일들, 그리고 문제 많은 교회들을 권면하며 바로 세웠던 일들... 그러면서 그 누구도 깨닫지 못했던 놀라운 비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처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처음 들었던 말씀을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행 9:4를 보면 그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처음에 바울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자리에서 주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미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입니다. 주님을 만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네가 나를 박해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이 박해한 것은 교회였고,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를 박해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 말씀의 뜻을 깨닫기 위해 기도하며 오랜 세월 묵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통해 주의 사역을 펼치면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아가게 됐고 처음 들었던 그 말씀의 의미를 조금씩 깨닫게 됐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적 성찰이 깊어지면서 저 놀라운 비밀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면 주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여기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교회를 욕하고 박해하면 주님께서는 당신을 욕하고 박해한다고 여기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사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교회를 싫어하며 교회 출석도 안하고, 심지어 교회 등록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는 믿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컬어 가나안 교인이라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예수는 좋은데 교회는 싫다.”
우리가 이 사람들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지 않습니다. 교회 가운데 실망스러운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상처받고, 심지어 충격을 받은 그리스도인들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대한 오류가 있는 말입니다. 예수와 교회를 분리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씀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바울이 말하는 교회는 모두가 좋은 교회만을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바울이 세웠고 목회했던 고린도교회를 보면 교회 안에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선 교회 안에 파당이 있어 서로 다투었습니다. 교인들이 다툼 속에서 상처받고 또 서로 적대시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교회 안에 윤리도덕적인 문제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성적인 문제로 교회가 시끄러웠습니다.
바울이 이런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네 차례나 편지를 보내야 했던 교회였습니다. 아마 오늘도 이렇게 골치 아픈 교회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인이 되신 이어령 박사는 우리시대의 최고지성이면서 영성을 갖춘 분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이 찾아와서 교회를 비아냥거리면서 이렇게 시비를 걸더랍니다. “많은 교회가 싸우고 세상 법정에서 소송까지 하고 또 어떤 교회들은 사교집단처럼 이상한 짓을 하는데, 그런 데를 왜 가야합니까?” 이박사께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모든 교회가 다 영적인 것은 아니지만 역시 영혼이 메마른 사람이 찾아갈 곳은 교회가 아닌가. 부패한 교회가 있다고 해서 교회에 가지 말라는 것은 병원 의사가 오진해 죽었으니 앞으론 병원에 가지도 말라는 것과 같은 거지.”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가 완전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문제도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고 싫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교회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자식이 못마땅하다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교회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사랑의 자세
그러면 우리는 교회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엡 5:25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데, 자신을 주시면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을 주신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교회가 생겨나기 전의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십자가에 달리신 결과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바로 주님과 교회의 관계가 특별하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셨기 때문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주님께서 보실 때 교회는 주님께서 생명을 던져서 존재하게 된 특별한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주님 보실 때 교회는 애틋한 공동체입니다. 마치 엄마가 열 달 고생하여 난 자식을 볼 때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한 사랑을 느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이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한 지체입니다. 교회와 우리는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다르게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8년 동안 숭실대학교 이사로 섬긴 일이 있었습니다. 이사가 된 뒤에 학교를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부터 숭실대학교를 ‘우리학교’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그리고 늘 학교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당연히 축구경기를 하면 숭실을 응원하게 됐고, 우승을 하면 기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제게 상도중앙교회는 이것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상도중앙교회는 주님의 교회요, 바로 우리교회입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내 교회입니다.
그래서 매일 교회를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교회가 위기 가운데 든든히 설 수만 있다면, 교회가 부흥할 수만 있다면 못할 것이 없을 것만 같습니다. 성도가 아프면 마치 제 가족이 아픈 것처럼 마음이 쓰이고 기도하게 됩니다. 청년 하나 바라던 직장에 취업하게 됐다면 제 아들이 취업한 것처럼 기쁘고 감사하게 됩니다. 어느새 저와 상도중앙교회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이 땅에서 다시 있을 수 없는 가장 사랑하는 교회가 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상도중앙교회의 지체들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주님을 머리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 이 상도중앙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특별히 코로나 위기 속에 교회가 많이 힘이 듭니다. 자식이 아플 때 더 마음이 쓰이고 더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더 교회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더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교회를 위해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계시는 집을 내가 사랑합니다
시 26:8 / 유기성 목사
주님, 주님께서 계시는 집을 내가 사랑합니다. 주님의 영광이 머무르는 그 곳을 내가 사랑합니다.
오늘은 예배당 부채상환을 위한 건축 헌금 작정하는 날입니다.
건축헌금에 대하여 설교하려 합니다.
저는 솔직히 건축헌금에 대하여 광고만 하려고 했습니다. 아주 쿨하게 “부담갖지 마세요. 마음이 생기시는 교인들은 오세요! 그러면 충분합니다.” 광고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건축헌금에 대하여 설교하기 싫었습니다.
제게 예배당 건축에 대한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신 것은 예배당 건축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심장이 안 좋아지셨지만 그 때가 온 교회가 예배당 건축에 매달리던 때라 병원에 가지를 않으셨습니다. 큰 돈이 들까봐 집에서 링거 주사만 맞고 버티다 결국 병을 키워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 경로로 오늘 건축헌금에 대하여 설교해야 한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미 시편 27편 설교 준비가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기에, 정말 오늘 건축헌금에 대하여 설교해야 하는지, 표징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선명하게 지난 주 본문인 시편 26:8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시 26:8 주님, 주님께서 계시는 집을 내가 사랑합니다. 주님의 영광이 머무르는 그 곳을 내가 사랑합니다.
지난 주에 결재하였던 교회 건물 안전진단 보고서가 생각났습니다.
본당 완공 5년 만에 건물 전체의 안전진단을 하였는데, 지난 주 두툼한 보고서가 제 책상에 올라왔습니다. 결재서 앞장에는‘결론은 안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튼튼하게 잘 건축되어 아직은 별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꺼운 책을 읽어 볼 필요도 없지만 이상하게 손이 가서 끝까지 훑어 보았는데, 마지막에 눈에 뜨이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옥외 지상 주차장에서 행사를 할 때, 주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박자 맞추어 발을 구르면 절대 안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의 몸 무게가 적어도 리듬을 타면 엄청난 힘을 받게 되어, 진동이 합쳐지면 건물에 심각한 힘이 주어져 균열이 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번뜩 생각나기를 사람들이 구호에 맞추어 동시에 발을 구르면 튼튼한 건물도 균열이 갈 수 있다면 교회 건축 부채도 교인들이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하고 헌금하면 얼마든지 무너지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건축헌금을 할 마음이 있는 사람만 헌금하라는 것은 헌금할 마음이 없는 사람은 정말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것인가? 이것이 진정한 주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 깨달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성전 건축에 별 마음이 없으시다고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영을 마음에 주심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마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 먹은 후 하나님의 영을 거두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끊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과의 관계를 아주 단절하지 않으시고, 성소를 두셔서 사람들과 만나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소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천막 형태인 성소에는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지팡이를 둔 법궤를 모셔 두었습니다.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법궤가 예루살렘 성에 들어올 때, 다윗은 춤을 추며 좋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늘 함께 있게 되었다고 믿은 것입니다. 다윗은 곧 법궤를 모실 성전 건물을 지으려 했습니다. 법궤를 천막에 모셔두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 것입니다.
그러나 뜻 밖에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는 다윗이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서 그랬다고 하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성전 건물에 소극적이심을 읽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크고 화려한 성전 건물이 중요했다면 먼저 지시를 하셨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야 할 계명을 다 말씀하셨지만 천막 형태의 성막만 지시하셨지, 성전 건물에 대하여는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위하는 어떤 우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애급에서 거대한 우상들과 그 우상을 둔 거대한 신전들을 보고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너무나 특별한 지시였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애굽의 우상들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상과 건물이 아무리 커도 하나님을 오히려 제한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러했기에 솔로몬도 열왕기상 8장 27절을 보면 성전 봉헌식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우상섬기듯 할 때, 하나님은 법궤도 외면하셨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을 우상처럼 여길 때, 바벨론의 손에 무너지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 1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헤롯이 지은 성전에 가셔서 채찍을 드사 상을 뒤엎으시고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는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이 모든 성도들에게 마음에 오셨습니다. 건물에 임하신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마음에 임하셨습니다.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하신 일이 회복된 것입니다. 이제 성전은 그리스도인들의 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게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예배당 건물이 크고 아름답다고 주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우리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배당을 이렇게 크게 짓고 건축헌금을 20년씩이나 계속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게 이 교회에 부임해 올 때, 예배당 건축 문제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당시 저희 교회는 건축 중단 상태였는데, 부채는 이미 150억이 넘고 지하 본당이 다 완공되려면 100억에서 200억은 더 들어야 할 상황에 교인들은 600명 정도 남아 부도 직전에 몰려 있었습니다.
저는 빚을 내어 예배당을 크게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기에 제가 이 교회 담임목사가 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장로님들이 오셔서 교회의 어려운 형편을 눈물로 호소하실 때, 난감하였습니다. 솔직히 당시 저를 청빙하겠다는 교회가 몇군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조건의 교회이기에 옮겨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기에 고려하지도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문제를 안고 너무나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안갑니다 할 수 없어서 기도는 해 보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중에 주님은 제가 이 교회에 가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제가 이 교회에 부임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가르치신 것이 교회 건물을 우상처럼 만들지 말라, 사람들을 끌어모아서 대 교회를 만들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므로 건축 마무리가 가장 중요한 과제이지만 저는 건축을 위하여 목회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저와 교인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이 이끄시는 교회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겠습니다. 건축은 주님이 알아서 해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때부터 주님만 바라보고 가는 목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교훈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너는 성전 건축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안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짓지도 못할 성전 건축을 위한 자재들과 건축비를 다 모았습니다. 나무며 돌이며 금이며 은이며 다 모았습니다. 다윗에게는 성전 건축이 부담이 아니라 큰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이처럼 사랑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했기 때문입니다.
시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다윗의 마음이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전을 사모하는데는 하나님도 말릴 수 없었습니다.
다윗의 성전 건축 준비는 역대상 18-23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렇게 복을 주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한 것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라는 대로 사는 것도 힘들다고 할 것인데, 다윗은 하지 말라고 한 것 까지 열심이었습니다. ‘아,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구나! 복을 받는 비밀이구나.’ 깨달아졌습니다.
저는 다윗의 이 마음을 이 교회에 부임해 와서 보았습니다.
건축과정이 너무 오래되고, 온갖 시험이 겹친 중에도 남아있는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집 팔고 땅 팔아 헌금하고 그래도 끝나지 않은 얘배당 건축 현장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가 부임하여 인테리어 공사를 하기 전 이 본당에 내려왔을 때 보았던 콘크리트 벽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빼곡히 기도제목을 쓰여 있었습니다. 이 본당 전체에 말입니다. 손이 닿는 곳이면 어디나 기둥에 까지 쓰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감동이었습니다. 예배당 공사가 중단된 오랜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기도가 쌓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눈물의 헌금을 많이 받았습니다.“권사님은 하지 마세요!”하면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왜 목사님이 막으십니까?” 교회가 부도 위기에 처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 때 외부 사람들이 1억 헌금을 하는 등 이해가 되지 않는 헌금이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은혜를 베푸시는데는 이런 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9년 동안 많은 분들이 새로이 교인으로 오셨습니다. 그런 결정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좋은 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 교회에는 어려운 문제도 함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딸과 며느리를 좋아하는 이유가 다르다고 합니다. 딸은 딸이니까 사랑합니다. 다른 이유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데 며느리는 흔히 “딸 처럼 하니까” 사랑한답니다. “딸 처럼 하니까?” 그러면 속썩였다는 뜻입니까? 자꾸 돈 달라, 옷 사달라, 공부시켜 달래서 사랑한다는 것입니까? 말은 딸 처럼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잘해 주니까, 사랑받게 하니까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딸은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고 며느리는 하는 것을 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 사랑은 어떻습니까? 집에 문제가 생겼을 때, 비로서 그가 가족인지 손님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조만간 건축 부채는 다 갚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이것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아직 교회와 진정 한 가족이 된 사람은 아닙니다. 교회 건축비 부채가 남은 것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은 진정 교회를 사랑하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한목자교회 교인이 되게 하셨다고 믿으시는 분은 학개서를 주목해야 합니다. 성전 건축에 대하여 소극적이신 하나님께서 학개서에 보면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각한 경제적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학 1:6 너희는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했으며,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품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돈을 넣음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학 1:11 내가 땅 위에 가뭄을 들게 하였다. 산 위에도,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 위에도, 밭에서 나는 모든 것 위에도, 사람과 짐승 위에도, 너희가 애써서 기르는 온갖 것 위에도 가뭄이 들게 하였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학 1:2-4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말하기를 '때가 되지 않았다. 주님의 성전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학개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다. "성전이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지금이 너희만 잘 꾸민 집에 살고 있을 때란 말이냐?
9 너희가 많이 거두기를 바랐으나 얼마 거두지 못했고, 너희가 집으로 거두어 들였으나 내가 그것을 흩어 버렸다. 그 까닭이 무엇이냐?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나의 집은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너희는 저마다 제집 일에만 바쁘기 때문이다.
성전이 낡고 허물어져가는 것을 보고 누군가가 "전을 고쳐야 되겠네요. 새로 지어야 되겠네요."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집을 짓는데는 너무 관심이 많은 것을 보고 하나님이 마음이 상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목자교회 교인이라면 “왜 교회 건물은 이렇게 크게 지은 거야? 언제까지 건축헌금할 거야. 하나님은 건물을 중요하게 여기시지 않아, 마음이라고 마음!” 이렇게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만약 자신의 집은 어떻게 해서든지 좀 더 크고 편하게 살려 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말씀을 바로 깨달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소홀히 하고 무시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내 집 보다 더 위하십니까? 그러면 충분합니다. 사람에게 하는 것 보다는 하나님께 더 감사하십니까? 그러면 충분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복을 걷어차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면 아직까지 건축헌금을 해야 합니까? 20년 장난입니까? 오랜 건축헌금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지난 10년 세월이 건축헌금하고 빚 갚다 세월을 다 보낸 줄 알았는데, 교회가 달라졌습니다. 여러분 선한목자교회 하면 부채 많은 것이 먼저 생각납니까? 건물 큰 것이 생각납니까?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라 는 것이 더 생각나십니까? 신기한 일입니다.
저는 목회하시는 아버님께서 예배당을 건축하시며 경제적인 어려움을 많이 겪으시는 것을 보고 자랐습니다. 어머님은 예배당 건축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저희도 지금까지 목회가 건축헌금의 세월이었습니다. 부목사 시절에 매년 건축헌금을 했습니다. 군목 시절, 두 개의 교회 건축, 두 개의 교회 개축을 했습니다. 부산에 담임 목회를 하러 갔을 때, 건축은 마쳤지만 부채가 많은 상황이었습니다. 생활비 전부를 건축헌금하고 매일 만나를 의지해서 살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제 평생에 모을 수 없는 액수를 헌금했고 지금도 여전히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헌금하며 살면서 재정에 대한 두려움을 이겼고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받았습니다. 제 영혼과 삶이 거룩해졌습니다. 헌금때문에 포기했던 수많은 것들보다 더 좋은 것으로 주님은 채워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예배당을 완공하던 때, [목회와 신학] 잡지사에서 2006년 6월 호에 탐방 기사를 실었습니다. 한마디로 왜 이런 예배당을 지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썼습니다.“이 예배당을 건축할 때, 지금 규모의 교회가 정말 필요했는지 알 수 없지만, 출석 교인 1000명 정도에 알맞은 크기는 2,000평 남짓이다. 성도들의 수에 걸맞은 적당한 크기의 5배가 넘는 규모의 예배당을 짓기 위해 많은 성도들이 감당해야 했던 경제적 부담은 상당히 컸을 것으로 예상된다. 교회를 돌아보면서 400억 원이 넘는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눈물로 기도했던 성도들과 교역자들이 완공된 교회를 보고 느꼈을 감동과 감격에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 교회 신축을 시작했던 시점에서 너무나 무리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부담스러운 공사비와 본당을 최대한 크게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건축적으로 아무런 감동을 만들어내지 못한 상황들이 아쉬웠다.
사는 집이 커지면 사람은 집에 매이게 된다. 관리를 걱정해야 하고 방범을 걱정해야 하며, 가격의 하락을 걱정하고 결국 집에 집착하게 되면서 집을 떠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성전이 어떤 것인지, 교회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면서도 건물에 매달리게 된다. 그래서 실제로 신축된 교회, 건물이 아름다우면 교회 부흥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부흥이 진정한 것인지 냉철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꼭 이렇게 써야 합니까? 너무 솔직한 것 아닙니까? 어지간하면 좋게 써주는 잡지 기사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항의할 만한 기사였습니다. 그러나 하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항의합니까? 당시에는 유구무언이었습니다.
그런데 2010년 말, [목회와 신학] 에서 취재 의뢰가 왔습니다. 2011년에 한국 교회 중 대표적인 교회들을 탐방하는 특집 취재를 기획하는데, 저희 교회를 두번째 교회로 선정하고 취재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주님은 어떻게 교회를 세워가실지 흥미진진합니다,
9년이 지나면서 건축비 부채가 많은 것 공개하며 지냈지만 교인들이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더 많이 늘었습니까? 예배당이 어느덧 비좁아졌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건축을 감당해 오면서 교회는 영적 체질이 강하여 졌습니다.
오늘 건축헌금하는 날입니다. 솔직히 건축 부채문제, 부담스러울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힘을 모으고 뜻을 합하면 이 부채의 짐도 쉽게 무너질 것이라 믿습니다.
놀랍고도 흥미진진한 일에 여러분이 함께 참여하기를 축원합니다.
불완전한 사람들의 온전한 삶
시 26:8-12 / 이규왕 목사
우리는 너 나를 막론하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이미 지나간 과거가 있고, 당면한 현재가 있고, 아직 오지 아니한 미래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 나름대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설계하며 꿈을 꾸기도 합니다.
(약 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지난 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시간과 물질을 가지고 얼마나 성공적인 삶을 살았는가를 판단하는 잣대가 무엇일까요? 또한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요 올바른 삶인지를 헤아리는 잣대는 과연 무엇일까요?
현재가 지난 과거에 뿌린 씨앗의 열매라면, 우리가 현재 어떻게 사느냐 하는 여하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희망이 있는지 없는지 자연적으로 결정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타난 시편 기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올바른가를 점검하고, 더 나아가서 다가오고 있는 미래에 어떤 희망과 포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깨닫는 말씀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과거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이나 글도 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지 않고, 읽고 듣는다고 하지만 한 번도 통독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읽은 것만으로 교회를 비판한다면 과연 누가 비판의 대상이라고 생각이 됩니까?
인간관계에서 종종 제 삼자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이야기를 듣거나, 그 사람이 어떤 중심에서 이런 글을 썼는가를 헤아리지 않고 자구적으로만 글만을 읽고 나서 그것을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자꾸만 오해가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도 그와 같은 오해의 소지를 발견할 수 있는데 무척이나 겸손한 사람으로만 알았던 시편 기자가 자칫하면 가장 오만한 사람으로 오해 될 수 있는 성경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 26:1)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기에서 말하는 완전함이란 '하나님처럼 완전무결하고 무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순종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시편 기자도 우리와 조금도 다름없는 죄인이며, 불완전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도 아닌 여호와 하나님께 감히 어떻게 ‘지금까지 제가 완전하게 살았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완전함이 자의지로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여호와를 의지하므로 그렇게 할 수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 26:1)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은 단순히 종교적 행사에 참여하는 형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항상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놓는 자세로 매일 매일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시 26:2)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여기서 ‘살피시고, 시험한다’는 말은 귀금속의 순도를 검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뜻으로 시편 기자가 자신의 신앙의 순도를 높이기 위해 마음의 담금질을 얼마나 혹독하게 하였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종종 그렇게 당신의 백성을 시험하시고 단련하시는 까닭은 그로 인해 신앙의 순도를 높이시고 마침내 복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 8: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그렇다면 무엇이 복일까요? 시편의 여러 말씀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말씀은 아마도 시편 23편과 시편 1편일 것입니다. 그 가운데 시편 1편의 내용은 시편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포괄하는 말씀으로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사람들은 돈과 권력이 많은 사람을 복되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죄를 멀리하는 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면 바로 오늘 시편기자가 그 같은 복을 받아 누리는 장본인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시 26:4)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시편 기자가 처한 주변 환경은 믿음을 지키고 신앙 양심을 지키기에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죄와 살인이 난무하고 권력자들은 부정한 뇌물을 받고 악독한 자들을 풀어주고 돈과 권력이 없는 의로운 사람을 정죄하며, 될 수 있는 일도 뇌물을 주지 않으면 미루고, 될 수 없는 일도 뇌물을 주면 되도록 해주는 불의한 세상이었습니다.
(시 26:9)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시 26:10)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그와 같은 환경을 핑계하며 약해지거나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함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였을까요?
그것은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하였는데 오늘 성경에서 시편 기자가 악한 자들을 멀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의 말씀을 붙잡는 말씀 중심, 진리 중심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시 26:3)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만일 시편 기자가 제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진리의 말씀을 소홀히 하고 주변의 악한 자들과 어울리며 적당하게 살았다면 결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완전함에 거하였다는 고백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르치고 있는 인간의 실체는 유 무식을 막론하고 세상에 어느 누구도 죄인이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시 14:3)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오늘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로 온전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죄인임을 자각한다면, 시편 기자와 같이 악한 세상에서 더욱 여호와를 의지하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 죄를 멀리하는 구체적인 실제의 삶이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2. 주의 계신 집을 사랑하오니-현재
오늘 성경에서 우리는 시편 기자가 하나님 앞에서 과거에 어떤 자세로 죄를 대적하는 삶을 살아왔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과거에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삶을 자부할 정도로 바람직한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문제는 현재도 그렇게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러한 자세로 살아갈 자신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미워하고 죄인들을 멀리 했던 과거를 영웅담처럼 추억하는 신앙이 아니라 마치 잘 자라는 아이처럼 어제보다 오늘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숙한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는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시 26:5)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시 26:8)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행악자들의 집회와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이라는 말과, 미워하오니 라는 말과 사랑하오니라는 말이 대조적으로 교차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신앙이 무엇이며 바로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미워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사랑해 야할 것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고 선별적인 삶을 사는 지혜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은 멀리하고 버려야 하는 반면, 어느 것은 더 가까이 하고 더 사랑해야한 합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예외가 없는 필수적인 선택사항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시편 기자가 성전을 찾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건물이 좋아서가 아니며,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여 계시는 집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을 어느 곳보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되면 나 주 위해 무엇을 바치오리이까? 하는 마음에서 주의 계신 집인 성전과 교회를 더 가까이 하려고 하는 마음이 솟구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그 대표적인 사례가 다윗과 솔로몬의 성전 건축이라면 신약에서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령 충만한 성도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누가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여전한가? 더욱 간절한가? 아니면 식어져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시금석이 바로 성전 사랑, 교회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현실이 행악자의 집회는 사람들이 비싼 돈을 지불하면서도 자리가 터지도록 모여서 즐기고 노는 반면에, 의인의 집회인 주의 계신 집에는 갈수록 사람들이 발걸음을 점점 더 멀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최선의 삶으로 간주하는 우리 개혁주의 교회가 표방하는 세 가지가 바로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임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 가정이라는 집과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은 행복의 제일 조건이라면, 영혼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집인 교회가 있고 믿음의 형제들인 교우들이 있다는 것은 더 없는 축복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맘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찬양과 기도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종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불완전한 인간이 온전하게 사는 지름길입니다.
(시 84:2) 내 영혼이 주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내 마음도 이 몸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 부릅니다. (시 84:3) 참새도 주의 제단 곁에서는 제 집을 찾고, 제비도 새끼를 칠 보금자리를 얻습니다. 만군의 주님,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시 84:4) 주의 집에 사는 사람은 복됩니다. 그들은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합니다. (셀라)
3.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미래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한 우리가 지나간 과거를 어떻게 살아왔으며,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과 더불어 또 한 가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미래의 결단입니다.
시편 기자는 지금까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온 것으로 만족하거나, 자만하지 않고 미래에 더욱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삶을 살겠다고 다부진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시 26:11)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시 26:3)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물론 그렇게 살면서 육신적으로 불이익을 당하고 손해 보는 것 같고, 수입이 적어지고 진급이 늦어지고 따돌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두려워서 악한 자들과 어울리고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불의하게 살고 그로 인해서 뇌물이 많아지고 부당한 수입이 늘어나는 자리가 결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노란 자리가 아니라 나의 영혼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바늘방석임을 알아야 합니다.
간혹 주변에 과거에 그렇게 믿음이 좋았고 누구보다 청렴결백하게 살아온 사람처럼 보였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시험에 걸려 넘어짐으로 인해 그동안 쌓아 놓았던 좋은 이미지와 명성이 한 순간에 다 무너뜨리고 마는 경우를 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 사람들은 입방아를 찧고 비난하기가 쉬우나 알고 보면 그렇게 남을 감쌀 줄 모르고 정죄하기 좋아하는 사람치고 더 나은 사람이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성경 역사와 주변 사람을 통해서 그러한 것을 보여주시는 것은 비난이나 정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서 나 자신을 비춰보아 나는 그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자만은 금물입니다. 남을 재판하고 남을 고소하던 사람이 법정에서 피고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 인생임을 알고 다른 사람의 실패를 우리는 거울로 삼고 더욱 겸손하여야 합니다.
(고전 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시편 기자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었고 항상 떳떳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누구도 빼앗아 갈수 없는 평화와 기쁨과 당당함이 가득하였습니다.
비록 그로 인해 고난을 당하고 낮아짐을 당하고 수모를 당해도 그 자리가 바로 자기가 서야 할 자리요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송축하며 영광 돌리는 축복된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시 26:12)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사오니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오늘 우리의 삶은 천국과의 별개가 아니라 연장선상에 있음을 주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에 의하면 천국이 천국에서만이 아니라 이 세상 나라가 천국 되게 하는 일을 위해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셨고 우리를 불러 모아 예배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복음전도는 결코 개개인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잡이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지상에 세워주신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마치 천국과 같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되게 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개인만이 아니라 민족과 국가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경제가 급성장하여 선진국에 진입이 임박했다고 좋아할 때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문제가 많은 나라인줄을 잘 깨닫지 못하였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경제 성장의 둔화로 나라가 어려워지면서 과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자성하게 되었습니다.
외국의 투자가들이 가장 민감하게 보는 CPI 라고 하는 부패인지지수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조사대상 90개 국가 중에 청렴도가 48위에 불과한 부패 공화국으로 낙인이 찍혀 투자자들을 우려하게 하고 있습니다.
세계 속에 선진국은 경제지수만 높아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지수도 더불어 높아져야만 세계가 인정하는 좋은 나라와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우리와 대조적인 핀란드를 통해서 그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휴대폰 노키아로 더 많이 알려진 북구의 핀란드는 세계에서 국가의 청렴도가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인구는 서울의 절반에 불과하나 지난 해 GNP는 무려 20,378 달러로 우리나라보다 배나 더 높은 나라입니다.
결코 핀란드는 큰 나라도 아니고 자원이 많은 나라도 아니고 인건비가 싼 나라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계 제 일이 된 비결이 무엇일까요? 두 가지를 꼽고 있는데 전 국민의 90%이상이 개신교 루터교 신자라는 것과 전 국민의 85% 이상이 전문대학 이상의 고학력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산되는 제품은 세계 어디에 내어 놓아도 고부가 상품으로 손색이 없고 경쟁력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국민들의 정직함의 결과고 그 정직은 바른 신앙과 바른 교육의 결과로 결코 뇌물이 통하지 않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핀란드 못지않게 우수한 두뇌와 고학력자들이 노키아와 맞먹는 휴대폰을 세계 시장에 내어 놓고 있습니다. 이제는 부패가 없는 정직함도 세계 시장에 내어 놓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근래 공영 방송에서조차 기독교를 비판할 만큼 교세가 커졌습니다. 그 만큼 교회가 사회적 책임과 역할이 커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와 일천만의 기독교인들과 우리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함과 잘못된 죄를 고백하고 오늘 시편 기자처럼 거듭나 죄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면 어느 민족보다 우수하고 청렴한 국가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는 영혼을 살리는 일만이 아니라 기울어져 가는 이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최선의 일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나부터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 목전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고자 하는 세 가지의 구체적인 결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게 악한 자들과 함께 앉거나 동행하지 않고(4절)
2) 하나님의 집인 교회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하나님의 관심인 영혼을 사랑하며(8절)
3)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예배하고 송축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12절)
물론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불완전한 존재이며 많은 사람들이 바르고 순수하게 살기를 포기하였을지라도 나 하나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게 살아보려고 하는 거룩한 몸부림을 친 것을 우리가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시 26:3) 주의 한결같은 사랑을 늘 바라보면서 주의 진리를 따라서 살았습니다.(시 26:4) 헛된 것을 좋아하는 자들과 한자리에 앉지 않고, 음흉한 자들과도 어울리지 않았습니다.(시 26:5) 악인들의 모임에는 어울리기를 싫어하고, 악인들과 한자리에 있지도 않았습니다.(시 26:6) 주님, 내가 무죄함으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을 두루 돌면서,(시 26:7) 감사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며, 주께서 나에게 해주신 놀라운 일들을 모두 다 전하겠습니다.(시 26:8) 주님, 주께서 사시는 집을 내가 사랑합니다. 주의 영광이 머무르는 그 곳을 내가 사랑합니다.(시 26:11) 그러나 나는 깨끗하게 살려고 하오니, 이 몸을 구하여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시 26:12) 주님, 내가 선 자리가 든든하오니, 예배하는 모임에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