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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2일오늘의 역사
2024년 중국 원난성 산사태 44명 매몰
2024년 충남 서천읍 서천특화시장 화재 점포 227개를 태우고 약 2시간 만에 진화
2023년 배우 강수연의 유작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정이’ 공개 하루 만에 세계 1위
온라인 콘텐츠 서비스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 패트롤에 따르면 ‘정이’는 전날 기준 한국을 포함해 미국, 멕시코, 브라질, 베트남, 스페인, 체코, 태국 등 31개국에서 넷플릭스 영화 부문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정이'는 영화 ‘부산행’과 드라마 ‘지옥’ 등을 만든 스타 감독 연상호이 연출한 SF 영화로, 전설적인 용병 ‘정이’의 뇌를 복제하여 최고의 전투 A.I.를 개발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2022년 22일 세계적 불교지도자이자 평화운동가인 틱낫한 스님 열반
2022년 일본 오이타 해역 규모 6.6 지진…국내서도 진동 감지
2021년 북한 평안북도 구성에서 서해상으로 순항미사일 2발 발사
2020년 한국 남자축구(감독 김학범) 세계축구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9회 연속진출 성공,
2019년 노동자의 아버지로 불린 조지송 목사(영등포 산업선교회 초대 총무) 사망
2018년 일본 군함도 강제노역 피해자 최장섭 씨 세상 떠남(89세)
2011년 소설가 박완서 별세
‘나목(裸木)’ ‘휘청거리는 오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의 작가 박완서씨0세의 일기로 지병인 담낭암으로 2011년 1월 22일 별세했다.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난 박완서씨는 1950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현상공모에 ‘나목’ 으로 당선되어 등단한 이후 여성의 몸에 새겨진 전쟁의 상흔을 쉼 없이 되새김질하면서도 사랑과 용서·화해의 높은 세계를 노래하며, 문학적 성취와 독자의 사랑을 동시에 얻은 작가였다.
1970년 데뷔 이후 40년간 ‘한 말씀만 하소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 ‘친절한 복희씨’ 등 10권의 소설집을 묶었고, 15편의 장편을 발표하며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현대문학상, 만해문학상, 인촌상, 황순원문학상, 호암예술상, 대한민국문학상 등과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93년부터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했고, 2004년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됐으며, 2006년 서울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부는 24일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2008년 삼성특검, 삼성 에버랜드 물품 창고에 대한 압수수색
삼성특검, 삼성 에버랜드 물품 창고에 대한 압수수색을 계속 하였으나,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같은 날, 특검 수사팀은 이순동 삼성 전략기획실 사장과 이형도 삼성전기 부회장을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
2007년 엠마우스 운동 창시자 아베 피에르 신부 사망
2000년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결성
국내 스포츠사상 처음으로 프로야구선수협의회가 2000년 1월 22일 탄생했다. 비록 등록선수 417명 가운데 일단 75명만으로 결성한 ‘반쪽짜리’ 협의회였지만 국내 스포츠계 전반을 뒤흔들만큼 의미가 컸다.
가입선수들이 이른바 ‘노예문서’와 다를 바 없는 KBO의 규약과 계약서 때문에 선수들의 권익이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구단주들은 ‘프로야구가 사느냐 죽느냐를 가늠하는 잣대’라고 규정,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선수협의회는 1988년 최동원과 1996년 이상훈의 주도로 결성 움직임을 보였으나 구단들의 반발로 불발된 바 있다.
미국은 1885년 선수동맹이 결성된 이래 1969년 정식으로 노조를 출범시켰고 일본은 1985년 노조가 결성됐다. 선수협 사태는 시즌동안 잠잠하다가 2000년 12월 20일 프로야구 6개 구단이 송진우 등 회장단 6명을 방출함으로 심화됐으나 다시 2001년 1월 20일 문화관광부 장관의 중재로 정상화됐다. 이후 방출선수 6명을 전원 복귀시키고, 현 집행부는 사퇴하고 새 집행부를 구성한다는 등의 5개항의 합의안이 결정됐으나 선수협 사태는 이후에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마찰을 빚었다.
1999년 한일어업협정 발효
한국과 일본 사이의 새로운 어업협정이 1999년 1월 22일 발효됐다. 그러나 입어 조건 등에 대한 양국간 실무협상이 결렬돼 상대국 배타적 경제수역내(EEZ)에서의 조업이 불가능해지는 등 시작부터 파행을 겪게 됐다.
양국은 이날 정부 세종로청사 조약체결실에서 양국 의회의 동의를 거친 비준서를 교환했으나, 세부계획 마련을 위해 일본 도쿄에서 열린 고위 수산당국자회의는 일본 EEZ내에서의 대게 저자망 어업과 붕장어 통발어업에 대한 양국간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됐다. 이에 따라 상대국 배타적 경제수역에서의 조업은 할 수 없게 됐으며, 이날 일본 EEZ내에서 조업중이던 우리 어선 3백36척은 모두 한국수역으로 철수했다.
새 어업협정은 유엔해양법에 따른 배타적경제수역 경계 확정 전까지의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유효기간을 3년으로 했으며, 체약국 한쪽의 이의 제기가 없는 한 자동연장된다.
1999년 중앙일보, 삼성그룹으로부터 계열분리 신청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출
1999년 대한민국 국가안전기획부의 명칭을 국가정보원으로 변경,
부총리급에 해당하는 안기부장의 직급을 국정원장, 장관급으로 조정.
1992년 김용순 북한노동당 국제담당비서-아놀드 미국무차관 뉴욕에서 첫 차관급회담
1990년 전국노동자협회(전노협) 창립
1990년 민정-민주-공화 3당 합당선언
민정-민주-공화 3당이 1990년 1월 22일 합당을 통한 신당창당에 최종 합의했다.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총재는 이날 오전 10시부터 약 9시간 동안에 걸친 청와대회담을 통해 이같이 합의하고 각 당별 5인씩 모두 15명으로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 곧바로 통합신당 창당작업에 착수키로 했다.
3당의 합당선언은 가히 혁명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지난 45년 간 수많은 정당들의 합종연형(合縱連衡)이 이루어져 왔지만, 여당과 복수야당이 합당한 것은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민정-민주-공화 3당은 2월 9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서 전당대회 수임기구 합동회의를 열어 합당을 의결, 통합신당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합동회의에서는 3인 최고위원에 의한 집단지도체제를 규정한 당헌을 채택, 공동대표인 3인 최고위원에 노태우 전민정, 김영삼 전민주, 김종필 전공화당총재를 선출했다.
1987년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 규탄 평양시 청년 학생 집회
1985년 고리원자력발전 5호기 시험운행
1982년 전두환 대통령, 북한에 민족통일협의회의 구성 제의
전두환 대통령이 1982년 1월 22일 국정연설을 통해 민족통일협의회의를 구성할 것을 북측에 제안했다. 남북한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통일헌법을 제정하고 그 헌법에 기초해 통일민주공화국을 이룩하자는 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 첫째 남북양측의 민의를 대변하는 대표들이 참가하는 민족통일협의회의를 구성하고 둘째 이 협의회에서 민족, 자유, 복지, 자주의 이상을 추구하는 통일민주공화국을 실현하기 위한 통일헌법 초안을 마련하고, 셋째 이 초안에 대해 남북한 전지역에서 민주적 방식에 의한 자유로운 국민투표를 실시해 확정-공포하고 넷째 이런 과정을 거쳐 확정된 통일헌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 통일국회와 통일정부를 구성함으로써 통일국가를 이룩한다는 것이었다.
1980년 소련, 반체제 물리학자 사하로프 박사 고리키로 유배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1980년 1월 22일 소련 정부에 의해 체포돼 볼가 강변에 있는 고리키(현재 지명은 니주니노브고로트)로 강제추방됐다.
사하로프는 1947년 26세의 나이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듬해에는 수소폭탄의 이론적 가능성을 검토하는 특별그룹의 일원으로 뽑히는 등 과학적 능력을 인정받았고 1953년 수소폭탄 실험을 성공시키며 소련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32세의 나이로 소련 과학아카데미 최연소 정회원에 선출된 사하로프는 레닌 훈장과 노동자영웅훈장 등을 받으며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핵무기의 윤리성에 회의를 느끼고 1957년, 반핵을 제창하면서 그의 인생은 가시밭길로 들어섰다. 이후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며 반전와 평화를 위해 싸웠다.
1968년 7월 22일, 긴장완화 전 소련의 민주화를 주장한 사하로프의 에세이 ‘진보, 평화공존, 지적 자유에 관한 고찰’이 소련 지하 출판 문학인 사미즈다트를 거쳐 뉴욕타임스에 발표됐다. 세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사하로프는 소련 정부의 경계를 받기 시작했으며, 이후 인권운동가, 평화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사하로프는 소련 인권위원회를 발족(1970년 11월 4일)시켰으며, 사형제 철폐와 정치범 사면을 요구하는 호소문 발표(1971년), 소련의 민주화가 수반되지 않는 동서데탕트는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1973년), 카터 대통령에게 소련과 동구권 국가의 정치범들을 위해 관심 가져줄 것을 요구하는 서한 발표(1977년)를 하며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1975년 사하로프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지만 관영 타스통신은 노벨평화상이 인민의 적 사하로프에게 수여됐다며 강하게 비난할 정도로 소련 정부와의 관계는 악화돼 있었다.
강제추방된 사하로프가 되돌아 온 것은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유배가 풀리면서 였다. 이후 3년 뒤인 1989년 사망했다.
1975년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안 공고
1973년 조지 포먼, 세계 헤비급타이틀전서 조 프레이저 누르고 KO승
조지 포먼과 조 프레이저의 프로복싱 세계헤비급타이틀전. 무패가도를 달리던 두 선수가 1973년 1월 22일 자메이카 경기장에서 만났다. 29살의 챔피언 프레이저는 2년 전 무하마드 알리로부터 타이틀을 뺏었다. 도전자 포먼은 37전 전승에 34KO의 ‘해머펀치’.
그러나 예측불허의 혈투가 벌어질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과는 달리 경기는 2라운드 1분35초 만에 끝났다. 포먼의 쇠주먹에 프레이저는 1회에 3번, 2회 3번 캔버스에 고꾸라졌고 프레이저의 입에선 선홍빛 피가 솟구쳤다 . 포먼은 TKO승으로 24번째 생일을 자축했다.
하지만 1년여 뒤인 1974년 10월 포먼은 챔피언 벨트를 빼앗겼다. 유명한 ‘킨샤사 혈투’에서 20세기 최고의 복서 알리에게 8회 무릎을 꿇었다.
1973년 제36대 미국 대통령 존슨 사망
1973년 아이슬랜드 화산 폭발
아이슬랜드 서쪽 바다에 위치한 헤이마에이(Heimaey)섬 ! 1973년 오늘 평화롭던 헤이마에이 섬은 갑작스런 화산 폭발로 폐허가 되고 맙니다. 섬의 주요 마을과 항구들은 화산재와 흘러내린 용암으로 뒤덮여 버렸습니다. 더구나 화산재가 섬 주변의 바다까지 모두 뒤엎어버려 어업이 주업이던 섬주민들은 살길마저 끊겨 버렸습니다. 아이슬랜드 정부는 물론 세계 여러나라에서 구조대를 보내 재해 복구에나섰습니다. 그러나 섬 전체를 삼켜버린 엄청난 자연재해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거의 없었습니다. 결국 섬 주민 대부분은 헤이마에이 섬을 떠나고 맙니다.
1973년 한성호 침몰 19명 사망 42명 실종
한성호는 목선이며, 1960년 7월에 건조되었다. 정원은 95명이다.
한성호는 1973년 1월 22일 내려진 폭풍주의보가 해제되기 1시간 전인 1월 25일 9시 승객 135명과 구정 화물 6톤을 싣고 목포항을 출발하였다. 중간기항지에서 27명을 내려 주고 가치도로 향하던 한성호는 14시 30분경에 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앞바다에서 파도에 밀려 기울면서 침몰하였다. 사고 지점은 조류가 센 곳으로, 육지와는 20 ~ 30m 떨어져 있었다. 파고는 2 ~ 3m 정도였다.
구조에 5척의 경비정과 헬리콥터를 동원하였고, 1월 27일 오전까지 48명의 생존자를 구조하고 19구의 시신을 인양하였다. 42명이 실종되었고, 희생자는 모두 61명으로 파악되었다. 주민들은 72명의 실종자를 신고하였다.
1970년 점보제트기 뉴욕-런던간 첫 취항
1968년 대간첩대책본부 발족
1966년 길용호, 중공무장선에 피랍
1965년 유럽의회 참가국들 해적방송국활동 저지하는 유럽조약에 서명
1964년 한국, 첫 원유(중동산 33만 배럴) 수입
1963년 프랑스,서독 우호조약 조인
1962년 비구,대처승 불교분쟁 8년만대 단합
1959년 영국, 6시간내 전인류몰살 세균보유를 발표
1959년 반공청년단 결성
1954년 반공포로 포항 도착
6.25전쟁이 끝나고(1953.7.27 정전)반년이 지난 1954년 오늘 ! 북한군 반공포로 육백마흔명이 포항에 도착했습니다. 포항 주민들은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의 품에 안긴 반공포로들을 열렬히환영했습니다. 포항에 온 반공포로들 가운데 국군 입대를 희망한 백 열두명은 간단한 신체검사를 받고 대한민국의 군복을 지급받았습니다. 입대식을 치르고 조국군인으로 새롭게 태어난 반공포로들은 6주동안의 훈련을받고 자대에 배치받게 됩니다. 포항에 도착한 반공포로들은 유엔군 소속의 인도군에게 잡혀있다가 하루전풀려났던 2만2천여명의(21,809) 반공포로들 가운데 일부입니다. 석방된 포로들 가운데 중국군 만사천여명(14,227)은 대만으로 보내졌고, 팔천여명(7,582명)의 북한군은 군산, 대전, 영등포, 포항등지로 보내졌습니다. 자유의 품에 안긴 반공포로들은 각자의 희망에 따라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1951년 한국전쟁 중 국군 중국군에 대한 전면 공격 시작
1947년 지방관리 보선제 실시
1947년 인도 제헌회의, 공화국 선언
1946년 한강에서 제1회 소년소녀 빙상경기대회
1941년 조선총독부 조선 노동자를 일본으로 강제징집키로 결정
1938년 총독부, 각도에 일어강습소 1000여개 설치. 전국민에게 일어강습 지시
1929년 원산 총파업 시작
1926년 임시정부 참모총장‧독립운동가 노백린 사망
1924년 영국 최초의 노동당 내각 성립(맥도널드 내각)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 던진 김상옥 의사 도피 10일 만에 일본경찰에 잡히기 직전 스스로 목숨 끊음(34살)
1922년 비오 11세 로마교황에 취임
1918년 러시아 교포 남만춘 등 귀화한인 공산당 한국지부 창립
1913년 일본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마지막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 사망
1909년 우 탄트 유엔사무총장 출생
1905년 러시아, 행진 노동자 향해 발포(`피의 일요일` 사건 발생)
1905년 1월 22일 일요일 아침.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 광장에서는 가폰 신부가 만든 어용조합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공장 노동자 모임`이 이끄는 15만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여덟시간 노동제와 최저 임금제 등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작성하여 성상(聖像)과 황제 차르의 초상을 들고 동궁을 향해 행진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크리우다가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프라우다의 실현을 요구한다"는 슬로건을 내 걸었다. 러시아 민중사상 속에서 이상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프라우다(러시아말로 양심-약속-진실-정의란 긍정적인 가치의 포괄적인 정신명사)'가 정치용어로서 처음 등장했다.
황제는 마침 부재중이었으나 경찰과 군대가 발포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광장의 눈은 피로 물들었다. 500-600명이 죽고 수천명이 다쳤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이날의 사태는 차르에 대한 노동자들의 신뢰를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러시아 혁명의 불씨가 됐다. 사건 직후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그해 5월 러시아 각지에서 노동자와 군대 사이에 무력충돌이 일어났고 6월 말에는 전함 포템킨호에서 반란이 일어나 러시아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10월에 모스크바 철도 노동자들이 조직한 동맹파업이 전국적으로 이어지면서 혁명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마침내 국민의 기본권과 자유선거에 의한 의회 창설을 약속하는 10월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1903년 미국, 콜롬비아와 파나마운하조약 조인
1901년 빅토리아 영국 여왕 사망
빅토리아 영국 여왕이 1901년 1월 22일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영국 최장수 군주 빅토리아 여왕 재위 64년은 영국의 영광 그 자체였다. ‘빅토리아 시대’는 확장과 정복, 승리와 번영의 동의어였고 원동력은 18세기 후반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산업혁명이었다.
1858년 인도를 직접 통치하기 시작한 것을 비롯, 빅토리아 사망 당시 대영제국은 전세계 모든 대륙에 걸쳐 있었으며 넓이로 따져 1,100만 평방 마일(지표면적의 약 20%), 인구로 따져 4억인(전세계 인구의 약 25%)을 ‘지배’하고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란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이 시대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자 ‘은행’이었다. 1850년 전세계 공업생산의 28%를 영국이 차지했고 강철의 70%, 면직물의 50%가 영국제품이었다. 또 전세계 상선의 3분의 1이 영국 소유였으며 금융자본의 90%가 파운드화로 결제됐다. 또 유사 이래 신이 창조한 것으로 믿고 있던 인류사를 진화론적으로 설명한 ‘종의 기원’이 나온게 빅토리아 시대였다.
1819년 켄트공작의 외동딸로 태어난 빅토리아는 1837년 18세에 즉위했다. 21세에 동갑내기 외사촌 동생인 독일 출신의 앨버트 공작과 결혼해서 4남 5녀를 두었고 이들은 프로이센, 러시아 등 7개국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앨버트는 그녀의 비서이자 각료인 동시에 왕이었으며 그녀의 가장 신임받는 조언자였다. 1861년 앨버트가 먼저 사망하자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의 할머니’로 불렸고 세상을 떠났을 때 37명의 증손자가 유럽 전역에 퍼져 왕실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1900년 탄소 마이크로폰을 발명한 미국의 휴스 사망
1860년 앙리 무오가 앙코르와트 유적을 재발견
1788년 영국 시인 바이런 출생
1637년 병자호란으로 강화 함락
국호를 청으로 바꾼 후금이 정묘호란 발발 9년 만에 또 다시 조선의 국경을 넘어 병자호란이 시작됐다. 정묘호란때 맺은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자는 청의 요구를 거부한 것이 원인이었지만, 이는 명분이었을 뿐 사실은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치기 전 배후의 조선을 제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1636년 12월, 청 태종이 12만 대군을 이끌고 중국 선양(瀋陽)을 떠나 10여일 만에 서울 근처에까지 다다르자 인조는 봉림ㆍ인평대군 등을 강화도로 보내고 자신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1만3000여명의 군사와 50여일치의 식량으로 근근히 버티기를 40여일, 1637년 1월22일, 강화도가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의(戰意)를 상실한 인조는 마침내 1월30일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치욕을 감수한다.
이때 척화론자와 주화론자의 대립은 지금도 역사의 교훈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다. 명에 의리를 지키고 청을 배척해야 한다는 척화론의 중심에는 김상헌이 있었고, 명분을 지키려다 임금과 백성들이 도륙당하는 역사의 단절을 초래하는 것보다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화론의 중심에는 최명길이 있었다. 한쪽은 현실을 중시하고 또 한쪽은 명분과 의리를 숭상한 것. 최명길의 말처럼 항복문서를 쓰는 사람도, 이를 찢는 사람도 모두 나라를 구한다는 마음이었지만, 언제나 약소국에는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결국 소현세자, 봉림대군과 수만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가족과 생이별하고 만주 땅으로 끌려가야 했다.
1561년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출생
839년 신라, 민애왕 피살, 신무왕 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