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包容)의 덕(德)
〈주역〉에 이르기를, “군자(君子)가 무리를 다스릴 적에 어둠으로써 하지만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밝게 한다.”라고 하였다. [<주역> 명이괘(明夷卦) 상사(象辭)].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밝음을 지나치게 쓰면 지나치게 살피는 잘못이 있게 되고, 너무 살피면 일은 다한다 해도 포용하거나 너그러운 도량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밝게 살피는 것을 끝까지 하지 않고 어둠을 쓰는 것이니, 그런 후에야 능히 사물을 용납하고 무리를 화합시켜, 무리가 친해지고 편안해지는 것이니, 이것은 어둠을 쓰는 것이 바로 밝음이 되는 이유이다. 만일 스스로 그 밝은 것을 자임(自任)하여 살피지 않는 것이 없다면 너그럽고 품어 주는 ‘포용(包容)의 덕(德)’이 없어, 사람들이 눈치 보며 망설이고 불안해 할 것이니, 이것은 무리를 다스리는 도(道)를 잃는 것으로, 이야말로 밝지 못함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율곡 이이 선생,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매사(每事)를 바르게 처리하고자 하면 그 처리함에 있어 근간(根幹)이 되지 않는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포용(包容)의 덕(德)’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포용(包容)의 덕(德)’이 큰 힘을 발휘하려면 반드시 상대방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깊은 사랑의 마음에서 연유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바대로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를 사랑하고 주변의 인물들 즉 매사의 상대방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 즉 ‘포용(包容)의 덕(德)을 품고 닥쳐오는 모든 상황들에 대응하고 처리해 나간다면 바르게 서지 않을 일이 없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에게 남긴 가장 큰 두 가지 계명(誡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께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主)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가복음 12장 28-31절). 우리가 이 두 가지 큰 계명을 지키고 살아간다면 저절로 ‘포용(包容)의 덕(德)을 기르고 이웃을 돕는 올바른 삶을 살게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좁은 생각과 믿음에 방어벽을 치곤 한다. 우리 눈에 참되고 가치 있게 보이는 것을 보호하고자 기(氣)를 쓰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축복의 성(城)이라도 되는 듯이 나의 조막막한 정신적 영역을 지키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가 우리는 끼리끼리의 정형화(定型化)된 생각의 틀에 갇히게 되는데, 이런 생각이 병드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이다.
자기 생각만 옳다고 믿으며, 그 생각을 주변에 강요하는 단순하고 독선적인 공간에서는 거룩함과 숭고함이 숨을 쉴 수가 없다. 끼리끼리만 뭉치려는 생각과 행태는 그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선(善)과 아름다움조차도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진리이실 뿐이며 그 어떤 세상의 무리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포용(包容)의 덕(德)’을 발휘하여 다른 사람과의 만남, 다른 믿음과의 만남, 다른 경험과의 만남 등을 널리 갖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통할 수가 있다. 우리가 ‘포용(包容)의 덕(德)’을 품고 마음을 넓혀 자기를 넘어설 때, 우리는 종종 자기 자신을 치유하거나 발전시키는 진리를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2024.11.21. 素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