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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시(軍浦市)
경기도 중부 서남단에 위치한 시.
1989년 시로 승격되었으며 서울과 가깝고 교통이 편리하다. 1970년대부터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여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인구의 주야간 이동이 많다. 대규모 주택단지가 생겨나 수도권 주택난 해소에 도움이 되고 있다. 면적 36.41㎢, 인구 265,999(2023).
개관
동쪽은 의왕시, 서쪽은 시흥시, 남쪽은 화성시·안산시, 북쪽은 안양시·과천시·광명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6°54′∼ 126°52′, 북위 37°18′∼ 37°22′에 위치한다.
대한민국 경기도 중서부에 있는 시. 서울의 남서부와 인접해 있어 교통이 편리하며, 안양·의왕에 인접하여 이들 도시와 함께 수도권의 인구와 공업을 분담하는 위성도시로 급성장했다. 행정구역은 군포1동·군포2동·산본1동·산본2동·금정동·재궁동·오금동·수리동·궁내동·광정동·대야동 등 11개동이 있다(행정동 기준, 법정동 기준 9개동). 시청소재지는 경기도 군포시 청백리길(금정동)이다. 면적은 36.41㎢이고, 인구는 265,999(2023현재)이다.
자연환경
시의 남서부는 안양시와의 경계를 이루는 수리산을 비롯한 100~200m 내외의 구릉성산지가 넓게 분포하며, 북동부는 침식평야가 발달해 분지형상을 보인다. 화강암이 기반암인 침식평야를 중심으로 도시와 공장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하천은 안양천의 상류지류가 북동부의 경계를 따라 북류하다가 동쪽의 LS전선공장 부근에서 본류와 합류하며, 북서부의 산본천과 중동부의 당정천도 모두 북류하여 안양천으로 흘러든다.
토지의 50%가 산지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지역이다. 동쪽에는 모락산(帽洛山, 389m)·관악산(冠岳山, 629m), 서쪽에는 수리산(修理山, 474m), 남쪽에는 오봉산(五鳳山, 205m) 등이 솟아 있다. 동부와 서부는 산지가 남북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남부와 북부는 낮은 계곡평야가 전개되어 있어 남북간의 교류는 쉬우나 동서간의 교류는 어렵게 되어 있다.
동쪽에는 안양천 지류가 동남∼서북으로 시의 중심부를 지나고 서쪽에는 수리산에서 발원하는 안양천 지류가 산본을 거쳐 안양시 호계동에서 안양천에 합류한다. 서쪽 하천 주변에는 오래 전부터 농업이 발달했으나 1990년대 들어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택지가 되었다. 또한, 동쪽의 하천 유역에는 논농사가 발달했으나 1970년대에 안양시의 공장이 대거 이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현재는 공장용지로 변하였다.
지질은 화강편마암·화강암 등으로 되어 있으며, 이들 암석은 오랜 침식으로 평탄화되었다.
기후는 중부내륙지방에 위치해 한서의 차가 심하다. 연평균기온 11℃ 내외, 1월평균기온 -4℃ 내외, 8월평균기온 26℃ 내외이며, 연평균강수량은 1,200㎜ 정도이다.
역사
대야미동과 부곡동 일대에서 찍개와 뗀석기 등이 출토되었고, 구석기시대의 유적들이 대체로 큰 하천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음을 고려할 때 군포는 한강에 인접해 있으므로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발견된 것이 없으며,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부곡동과 산본동에서 고인돌이 발굴되었다.
군포시는 조선시대의 과천현의 남면 일대가 1914년 시흥군 남면이 되었다가 시로 발전한 곳이다. 과천은 삼국시대에 백제의 영토였다가 고구려의 남하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삼국시대의 명칭은 동사힐현·율목군 등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에 율진군으로 바꾸어 한주에 속했다.
삼국시대에 이 지역은 백제에 속했으며, 475년에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진하여 율목군(栗木郡) 또는 동사과(冬斯胯)를 설치하였다. 551년 신라와 백제 연합군의 공격으로 이 지역은 다시 백제가 차지했으나 553년에 신라 진흥왕이 신라 영토로 삼았다. 삼국통일 후인 경덕왕 때는 율목군을 개칭하여 한주(漢州)에 속하도록 하였다.
-940년(태조 23) 곡양현은 금주(衿州, 또는 黔州)로, 율진군은 과주(果州)로 개칭되었고,
-990년(성종 9)부터는 부림(富林, 또는 富安)으로 별칭되기도 하였다.
-995년(성종 14) 10도제 실시에 따라 기내도(畿內道)에 예속되었다.
-현종 때는 5도제 실시에 따라 양광도(楊廣道)에 예속되었다가, 1018년(현종 9) 광주목(廣州牧)에 소속되었다가 뒤에 감무가 파견되어 독립했다.
-1284년(충렬왕 10) 이곳의 용산처(龍山處)를 부원현(富原縣)으로 승격하여 과주에서 분리했다가,
-1390년(공양왕 2) 경기도가 좌·우도로 분리될 때 경기좌도에 예속시켰다.
-1402년(태종 2) 8도제 실시로 경기도에 예속되었으며,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를 개혁할 때 금주는 금천현으로, 과주는 과천현으로 개칭하여 현감을 두었다.
1413년(태종 1)에 지금의 이름인 과천현으로 바뀌었다. 이듬해 금천에 병합되어 금과현으로 되었다가 수개월 후에 복구되었고, 세조대에도 금천현과 병합된 적이 있으나 곧 분리되었다. 별호는 부안·부림이었다.
-1414년 금천현과 과천현이 병합되어 금과현(衿果縣)으로 불리다가 곧 폐지되었다.
세조 때의 진관체제 성립에 따라 광주진관(廣州鎭管)에 소속되었으며, 현감이 절제도위(節制都尉)를 겸임하였다.
-1456년(세조 2) 다시 금천현이 과천현에 병합되었으나 얼마 뒤 복구되었고,
-1795년(정조 19)에는 시흥현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으로 시흥군·과천군·안산군으로 개편, 인천부(仁川府)에 속했다가
-1896년 경기도의 4등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군면이 폐합되어 안산군·시흥군·과천군이 시흥군으로 통합되면서, 과천군의 관할구역 중 노량진·본동·흑석·동작동은 북면리, 우안리·양재 등 8개 리는 신동면, 안양 등 4개 리는 서이면, 관문리·문원리·갈현리·하계리·막계리는 과천면으로 개편되어 시흥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과천군이 시흥군에 병합되면서 남면이 시흥군 남면으로 관할이 바뀌었다.
-1979년 5월 1일 시흥군 남면 일원을 읍으로 승격하면서 군포읍이 되었다.
-1989년 1월 1일에는 시흥군이 의왕시·군포시·시흥시 등 3개 시로 분할, 조정되면서 시로 승격되어 군포시가 되었다.
-1989년에는 산본·금정·당동 일원이 산본신도시지구로 지정되어 개발되었으며,
-1992년 5월 2일 금정동을 금정동과 재궁동으로 분동하였다.
-1993년 1월 6일 시청사를 당동에서 금정동으로 이전했고, 1월 14일 재궁동을 다시 재궁동·오금동으로, 6월 8일에는 산본2동을 산본2동·수리동으로 분동하였다.
-1994년에는 화성군 반월면 일대가 편입되면서 시역이 확장되었다
-1994년 12월 29일에는 대야동을 군포시에 편입하고, 수리동은 다시 수리동·궁내동으로 분동했으며,
-1995년 2월 28일에는 산본2동을 산본2동·광정동으로 분동하였다.
산업·교통
전체면적의 51.3%가 산지이고 경지는 17%, 대지 13.2%, 도로 5.0%이다. 경지 중 논은 147ha, 밭은 216ha이다. 논농사는 주로 남부의 앞진부리·넘반·늦피울·안골·도장골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나 생활하수·공장폐수 등으로 점차 감소하고 있다. 주요 농작물은 쌀이며, 밭작물로 고추·호박·파·상추 등이 생산된다. 특용작물로는 참깨·들깨·땅콩 등이 재배되고 있다.
서울 근교에 입지하고 200∼400m의 산지가 곳곳에 형성되어 있어 이곳을 중심으로 과수·화훼·목축업이 발달하였다. 주요 임산물로는 밤·대추·은행 등이 생산되고 있다. 농업 인구는 전체 인구의 0.3%이며, 제조업 인구는 12.2%이다. 주요 제조업은 조립금속·화학섬유·종이인쇄·식료품 공업이 활발하다.
중소 규모의 제조업이 입지하면서 산업시설과 위락시설이 많이 진출하고 있다. 시장은 일반 시장이 8개, 연쇄점 1개가 있으며, 위락시설로는 골프장·식당·수목원·모텔 등이 있다. 인구 규모에 비해 금융기관이 21개가 있을 정도로 금융업무가 활발하다.
군포는 안양·수원·과천·안산을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므로 도로율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높다. 도로는 1호 국도가 동남∼서북진하여 시의 동쪽을 지나고 있고, 47호 국도가 동남부에서 들어와 시 중심부를 거쳐 서남부로 지나고 있다. 안산∼과천선은 4차선으로 확장되고 북쪽에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동서로, 남쪽에는 신갈∼안산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철도는 경부]이 남북으로 지나고 지하철 과천선이 47호 국도와 나란히 들어와 경부선 전철에 합류하고 있다. 산본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승객 수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
관광
시의 중심부는 군포 역전에 형성되어 있으며 주변에는 관광명소가 거의 없다. 원래 역전취락에서 시로 승격된 신흥도시이다. 서울의 인구 팽창으로 인해 수리산 동쪽 산록면에 산본신도시 아파트가 건설되어 있다. 주변의 관광지로는 자연적 관광자원인 수리산과 반월저수지를 꼽을 수 있다.
수리산은 안양시와 인접해 있는 500m 정도의 낮은 구릉성 산이지만, 명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산 정상에는 X자로 뻗어 내려간 능선이 제각기 모양을 달리하면서 변화 있는 등산 코스를 이룬다. 그리고 반월저수지는 경관이 좋아 인근 지역에서 많이 오고 있다.
교육·문화
최초의 교육기관으로 1920년 당동에 군포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한 뒤 1997년에 군포초등학교로 개칭하였다. 1970년에는 둔대초등학교, 1981년 금정초등학교, 1985년에 산본초등학교가 개교하였다.
중등학교로는 1982년 당동에 군포중학교, 1985년에 산본중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89년에는 금정동에 군포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고등교육기관으로는 1991년 순복음신학대학이 당정동에 설립되어 1993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뒤 1998년에 한세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6개교, 중학교 12개교, 고등학교 8개교와 한세대학교가 있다.
유물·유적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으로 부곡동에서 무문토기편이 발굴되었다. 신개발 도시로서 인접한 화성군·안양시 등에 비해서는 유물·유적이 많지 않다.
군포산본동조선백자요지(軍浦山本洞朝鮮白磁窯址, 사적 제342호)가 있다.
수리산에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수리사(修理寺)가 있다.
당동에 방자유기장(方字鍮器匠,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0호) 기능보유자가 있다.
산본동에 이기조선생묘(李基祚先生墓, 경기도 기념물 제121호)와 전주이씨안양군묘(全州李氏安陽君墓, 경기도 기념물 제122호), 대야미동에 김만기선생묘역 및 신도비(경기도 기념물 제131호), 정란종선생묘 및 신도비외 묘역일원(鄭蘭宗先生墓―神道碑外墓域一圓, 경기도 기념물 제115호) 등이 있다.
민속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민속놀이가 별로 없기 때문에, 대체로 전국적으로 널리 전승되는 놀이가 행해진다. 집단적인 놀이로는 두레놀이·장치기·줄다리기와 정월대보름의 세시놀이인 달집짓기놀이·비녀돌리기 등을 들 수 있다.
두레놀이는 마을 장정들이 농사철에 풍물을 치면서 농사일에 흥을 돋우는 놀이이지만 시가 도시화되면서 농사를 짓는 가구가 많지 않아 동제(洞祭)나 특별한 마을 행사가 있을 때만 농악놀이로 행해진다. 장치기는 나무공이를 둥글게 깎아 이것을 작대기로 쳐서 상대편 문에 집어넣는 놀이로 지금은 행해지지 않으며, 줄다리기 또한 세시놀이로 보다는 체육대회의 놀이로만 남아 있다.
달집짓기놀이는 정월 대보름날 밤에 높은 산마루에 올라가 달집을 짓고 달맞이를 하는 놀이로 이 또한 현재는 행해지지 않는다. 달집은 마을에 있는 모든 집에서 짚을 조금씩 얻어다가 쌓아서 오두막집처럼 만드는 것으로, 이 달집을 지어놓고 기다리다가 달이 떠오르면 즉시 달집에 불을 붙이고는 온 마을 사람들이 활활 타는 그 주변을 빙빙 돌면서 풍물을 치며 놀았다.
다음으로 비녀돌리기는 정초나 한가위에 젊은 부녀자들이 모여 둥그렇게 둘러앉고는 술래가 그 둘레를 돌다가 어느 한 사람의 뒤에 비녀를 놓으면 그 사람이 술래가 되어 다시 둘레를 한 바퀴 돌기 전에 비녀를 찾아 술래를 잡으러 따라가는 놀이로, 오늘날의 수건돌리기와 같은 형태로 진행되는 것이다.
한편, 개인놀이로는 어른의 경우 씨름·엿치기·돈치기·고누·골패·화투·그네·널뛰기 등이 있으며, 아이들의 놀이로는 숨바꼭질·말타기·공기놀이·다리세기·딱지치기·말이어가기·땅뺏기·달랑개비돌리기·연날리기·제기차기·팽이치기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에서는 본래 한강 이남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화랭이패 세습무에 의해 주도되는 도당굿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현재의 동제에서는 이러한 면모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6·25 이전에는 화랭이패들이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 사이에 마을을 돌아다니며 우물고사도 하고 각 집에 고사를 지내주기도 했다는 노인의 증언이 있고, 군포와 거리상 멀지 않은 과천 찬우물에 화랭이패 세습무였던 임상문 일가가 살았던 것으로 보아 화랭이패에 의한 도당굿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불확실한 사실이고, 현재 군포에서는 4곳 정도의 마을에서 동제가 유교식으로 조촐하게 치러지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행해지고 있는 동제로는 산본동 수리산 산신제를 비롯해 당말 당동 도당제, 피곡동 느티울 산신제, 삼성마을 도당제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수리산 산신제는 일제 때 일시 중단되기는 했지만 이 일대에서 가장 오래 된 당제로 전해 온다. 이 산신제는 일 년에 두 차례 지내는데, 제일은 제를 지내기 3∼4일 전에 초하루나 초이틀 중 택일하며, 혹 마을에 부정한 일이 생기면 다음 달로 연기한다.
제의장소는 원래 제당 없이 나무와 바위를 신체(神體)로 모셔 제를 올렸다고 하지만, 현재는 수리봉·태을봉의 기와로 지붕을 한 당집이나, 태을봉 옆 갓모봉에 있는 작은 당에 제를 올린다. 당주는 생기복덕하고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 제의 사흘 전에 결정하며, 조라술을 올리기 전까지는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또한 당주집 앞에는 부정한 것을 물리치고자 황토흙을 깔아둔다.
축관과 봉준(奉尊) 등 제관 2명은 제일 바로 전날 선정된다. 제물로는 아직까지도 소를 통째로 잡아 사용하며, 과일, 떡시루 3개 등이 진설된다. 제의과정은 큰당에서 먼저 산신제를 지내고 작은당에서 간단히 제를 올리는 형태이다. 큰당에서는 ①강신 및 참신 ②독축 ③헌작(단작) ④대동소지 및 개별소지 ⑤철상의 순으로 제가 진행되며, 큰당의 제를 마친 후 제관을 비롯한 몇 사람만이 작은당으로 옮겨 간단히 제를 올린다.
제의에 사용되는 비용은 산축회나 애양회의 계(契) 공동기금으로 쓰고는 행사 후 지출액만큼 돈으로 추렴해 걷는 방식이다. 군포 지역 여타 마을의 동제도 대체로 수리산 산신제와 대동소이하다.
설화·민요
설화로는 수리산에 얽힌 홍수신화적 성격의 설화를 비롯해 지명전설이 많이 전승되고 있으며, 개중에는 역사적 인물과 결부된 것도 있다. 먼저 수리산의 지명유래를 보면 천지개벽 때에 서해안 바닷물이 밀려들어와 이 세상이 모두 물에 잠겼는데, 이 산의 꼭대기에 수리가 앉을 만큼의 공간은 남아 있어서 수리산이라 명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 지명에 얽힌 흥미로운 전설로는 「검바위전설」·「노랑바위전설」·「감투봉전설」 등을 들 수 있다. 「검바위전설」은 마을의 세도가 집에서 일하던 종이 잘못을 저질러 매를 맞아 죽자, 그 아들이 달아나 유명한 지관이 되어 나타나서는 옛 주인의 선친 묘소 앞에 있는 복을 주는 검은 바위를 부수도록 해서 결국 그 집을 망하게 하여 복수했다는 이야기이다.
다음으로 「노랑바위전설」은 4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어 걱정하던 임금이 명산대천에 기도하여 왕자를 얻었는데, 왕자가 세 살 때 전란이 일어나 강화로 피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배는 풍랑을 만나 난파되고 말았다. 그 때 물속에서 거북이 나타나 왕자를 구해서는 관모봉에 데려다 놓고 왕자를 위해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갔다.
그러자 왕자는 거북이 자신을 버리는 줄 알고 화가 나 곁에 있던 큰 바위를 내려쳤는데, 갑자기 그 바위가 무너져 내리면서 왕자가 깔려 노란 피를 흘리며 죽었다. 내려가던 거북도 굴러 내린 바위에 깔려 죽어서 바위로 굳어졌다. 그 뒤 왕자가 죽으면서 흘린 피가 그 바위를 노랗게 물들였다 하여 노랑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감투봉전설」은 출가했던 딸이 친정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가 “흰나무 세 그루가 있는 북서쪽 바위에 무덤을 쓰라.”는 유언을 듣게 된다. 하지만 친정아버지보다 먼저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딸은 그 자리에 묘를 썼고, 그 후 친정아버지도 돌아가셔서 같은 곳에 묘를 쓰게 되었다. 그 뒤부터 새벽이면 그 곳에서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나 싸우기 시작했다.
친정오빠가 여동생이 그 곳에 무덤을 쓴 것을 알고는 옮기라고 했으나 여동생이 듣지 않았다. 그러자 친정오빠가 낫을 들고 두 용이 싸우는 데로 가서 한 용을 베었는데, 죽은 용이 자기 아버지 모습으로 변했다. 이후로 이 봉우리를 용이 승천하려고 싸웠던 곳이라 하여 감투봉이라 이름하게에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밖에 역사적 인물과 결부된 지명전설을 보면 정조대왕이 수원 현륭원에 원행(遠行)할 때 군포천변의 우물에서 물을 마시다가 옷을 적셨다고 하여 금정(扲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또, 조선 성종의 후손인 옥담(玉譚)이 정자를 짓던 중 꿈에 찬란한 광채가 나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그 정자에 광정(光亭)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것이 후에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고 하는 설화 등이 전한다.
이 시에 전승되는 민요는 대체로 옛 시흥군에서 채집된 것과 별 차이가 없이 지역의 민요는 유희요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노동요는 체계적으로 채록된 것이 없으며, 의식요 역시 전승의 유무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빈약하다. 반면에 유희요는 통속민요와 더불어 풍부하게 전승되고 있다. 그러나 이 유희요 역시 순수한 군포시의 민요라고 보기는 어렵다.
노동요 가운데 「이앙가」가 있다. 이는 모를 옮겨심는 모심기에서 불리는 민요로 경기도 남부의 모심는소리와 대체적으로 일치하며,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희귀한 자료가 있다. “에에렐렐 상사도야/아라랄랄랄랄 상사로구나//이 논배미를 얼른매면/술도나고 밥도나고/아랄랄랄 상사도야//”. 이와 같은 후렴구는 경기도 남부에서 충청도·전라도 등지에 널리 퍼져 있는데, 그러한 보편성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민요이다.
여성들이 전승하는 노동요도 있었을 법한데, 그 흔적은 뚜렷하지 않다. 여성들의 핵심적인 노동 가운데 베틀에 얽힌 소리는 신세자탄을 겸한 시집살이 노래와 관계되는 것으로, 비교적 자세하게 그 내용이 채록되어 있다. “시집온지 삼일만에 뷕이라고 나려와서/가마뚜껑 열어보니 엉거미가 줄을치고/낫거미가 줄을치고 남배뚜껑 열이나서…….”다른 지방에서 찾을 수 없는 표현의 생동감이 이곳의 민요에서 느껴진다.
유희요 가운데서는 놀이에 얽힌 소리와 언어유희요에 관계되는 것이 전승된다. 이 중 달노래와 통음요가 아주 특징적인 자료이다. 달노래는 전국에 널리 발견되는 것과 상통한다. 통음요는 통자에 얽힌 통자유희요라고 할 수 있다. 그 사설은 “신통 방통 노 방통/금부통 장구통 여우홀림통 …….”으로 된다. 전승되는 민요는 매우 빈약한 형편이나 최소한의 실상은 알 수 있다.
인구
서울과 가깝고 교통이 편리해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된 곳이다. 1970년에 1만 1,498명, 1980년 4만 304명, 1990년에 9만 9,956명으로 1970년을 기준으로 보면 지난 20년간 무려 7배가 넘는 8만 8,458명의 인구가 증가했다. 대단위 주거지역으로 개발된 이후 2006년의 인구는 27만 7,781명으로 1990년을 기준으로 2.8배 증가했으며, 2010년 29만 3,263명, 2015년 28만 7,519명을 기록했다. 2023년 기준 인구는 26만 5,999명이다.
30~39세의 젊은층의 분포가 많고, 인구의 주·야간 이동이 많다. 동별로는 행정·업무·상업 중심지인 금정동과 대단위 주거지역으로 개발된 산본동·오금동·재궁동·궁내동·광정동의 인구밀도가 높은 반면, 공장지대인 대야동은 인구밀도가 낮다. 산본동의 택지개발로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 인구 17만여 명을 수용하는 대규모 주택단지가 생겨나서 인구분산과 주택난 해소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군포2동에 가장 많은 인구(4만 2,914명)가 분포하고 있다(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