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로 지점/ 마지막 출근
제작: 피터제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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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로 지점, 마지막 편
── 아듀, 내 사랑 상업은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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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날, 퇴계로 지점 문을 박차고 나왔다.
18년 동안 입고 벗던 그 낡은 은행 제복을,
마음속으로도 영원히 벗어던지는 순간이었다.
가슴이 터질 듯 아프면서도,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처음으로 바람을 맞는 것처럼
숨이 확 트이는 해방감이 밀려왔다.
성내역에서 내려 천호동 버스를 타고
태양금속 앞에서 내리면,
집까지는 10분 남짓한 길이었다.
토성 옆 포장마차, 그 플라스틱 막걸리 한 병과
곰장어 한 점을 사이에 두고
나는 여보/카타리나에게 속삭이곤 했다.
“우리… 그냥 다 때려치우고 외국으로 갈까?”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침묵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지금도 가슴이 저린다.김주임이 내 병가중에 국공채 횡령 사고를 일으킨
광화문 사고 이후로 내 영혼은 이미 죽어 있었다.
강압과 의무, 눈치와 굽신거림으로 채워진 나날들.
나비처럼 훨훨 날고 싶었다.
그래서 갑자기 퇴계로 발령이 떨어졌을 때
마음 한구석에서 외쳤다.
“이제야 떠날 때다. 떠나자. 어디든!”
40년 넘게 나는 홀로였다.
부모 덕도, 선배 덕도, 직장 덕도 없이
홀로 버텨왔다.
그러니 이제는 홀로 떠나도 되지 않겠나.
공산국가만 아니라면,
자유를 숨 쉴 수 있는 영어권 나라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간신문 한 귀퉁이의 작은 광고가
내 심장을 쿵 내려앉혔다.
‘투자이민 – 캐나다 퀘벡’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이거다… 이게 구세주다…”
손이 덜덜 떨리며 전화기를 들었다.
세미나장, 상담실, 착수금, 여권 신청…
모든 것이 꿈처럼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 꿈 한복판에
퇴계로 지점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경희 점장.
그는 아침 회의 때마다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우리 앞에 섰다.
신축 이전식 날, 1미터짜리 얼음 조각상이 녹아내리는 걸
멍하니 바라보며/
혼자 나는 중얼거렸다.
“허허실실… 이게 다 허허실실이야…”
본점에서 타온 수천만 원의 경비,
녹아 사라질 얼음 덩어리 하나에 다 쏟아붓다니.
그 돈이면 몇 명의 직원이 가정을 지킬 수 있었을까.
대부계 단말기 앞에서
수건에 쌓인 전표가 미친 듯이 찍히는 걸
나는 수십 번 목격했다.
전 지점 대출 중지 명령이 떨어진 그 시각에도
퇴계로는 몰래 10분의 시간을 할당받아
부실 대출을 쏟아냈다.
비서실, 전산부, 심사부, 그리고 이경희.
그 완벽한 4박자가 맞물릴 때마다
내 사랑 상업은행은 조금씩 죽어갔다.
“도대체… 이 은행의 주인은 누구야?”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들은 이미 망할 것을 알았다.
그러니 마지막 콩고물을 쓸어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그 꼴을 더는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날,
여권이 나왔느냐는 점장의 질문에
솔직하게 “네”라고 대답한 순간
모든 게 끝났다.
“제갈 대리 직인 압수해! 행장 승인 사항이다!”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타협은 없었다.
나는 너무 솔직했던 탓에
날카로운 칼날 위에 스스로 올라섰다.
점장실을 나오자마자
허리 디스크가 쑤셨다.
퇴계로 사우나탕에서 두 시간 동안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채
울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그만둔다. 지금 당장.”
사직서를 쓰는 손이 떨렸다.
18년의 세월이 한 장의 종이 위로
주르륵 흘어졌다.
문밖을 나서며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오고 있었다.
그 비가 내 눈물인지, 하늘의 눈물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 후에 알았다.
나를 밀어내고 캐나다로 떠난 사람이
바로 그 최장식이었다는 걸.
잠실 포장마차에서 그를 만났을 때
소주병을 들어 그의 머리를 내리치고 싶었다.
“너는 월급까지 다 챙기고 떠났으면서
왜 나만 이렇게 내쫓았냐!”
외치고 싶었지만,
그냥 술잔만 기울이다
홀로 비틀거리며 나왔다.
캐나다는 사업성 부적격으로 떨어졌다.
1년을 기다리다 결국 뉴질랜드로 방향을 틀었다.
1990년 4월 10일,
오클랜드 공항에 내 발이 닿는 순간
나는 울었다.
영주권 스탬프가 찍히는 소리가
내 심장 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3년 전,
한국 국적을 완전히 반납하며
마침내 자유가 되었다.
지금,
오클랜드의 창밖으로 키위 나무가 보인다.
점포 다섯 개를 굴리며
가족과 함께 평화롭게 숨 쉬고 있다.
가끔 꿈을 꾼다.
퇴계로 지점 창구에 다시 서 있는 꿈.
그때의 나는
여전히 거미줄에 걸린 파란 나비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거미줄을 찢고 나온
진짜 나비가 되어
남반구의 햇살 속을 날고 있다.
상업은행은
주인이 없었다.
우리가 주인이었어야 했는데
우리는 서로의 자리를 지키느라
침몰하는 배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래서 망했다.
그리고 나는
그 망한 은행을
아직도 사랑한다.
미워할 수조차 없는
내 청춘의 첫사랑처럼
가슴 깊이 묻어둔 채
오늘도
소쩍새 소리를 듣는다.
그 구슬픈 울음이
나를 이곳 키위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그때 그렇게 애타게 울었나 보다.
키위 나라, 오클랜드에서
피터 제갈
눈물로 마무리하며
첫댓글 아듀/내사랑 상업은행아/ 영원히 잠들라! R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