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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4 -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정복한후 다리우스 대제의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를 세운 키루스 2세는 기원전 530년에 7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트란스옥시아나
서부 마사게타이족과 전쟁에서 여왕 토미리스의 아들 스파르가피세스를 붙잡으니 여왕은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스파르가피세스가 자살한지라 격분한 토미리스가 전군을 이끌고 나가 키루스 2세를 죽인 것입니다.
토미리스 여왕은 키루스 2세 목을 잘라 피가 든 항아리에 넣고 '너가 그렇게 좋아하는 피를 마음껏
마셔라!' 라며 일갈했다는데..... 키루스 2세가 전사한건 맞지만 시체가 능욕당하지는
않았다는 말도 있고, 페르시아 역사가 크세노폰은 아예 그가 수도에서 평화롭게 죽었다고 썼습니다.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즉위했는데 이미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 시리아등
당시 고대 세계에서 부유한 나라들을 모두 움켜쥔 대제국이었으니, '문명 세계' 라고 일컬어지던
지방 중에 유일하게 페르시아에 속하지 않던 나라는 수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집트 밖에 없었습니다.
키루스 2세는 이집트를 정벌하려고 했지만 꿈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자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이어
이집트 원정을 감행했는데.... 당시 이집트는 아흐모세 2세 사후 프삼티크 3세가 즉위한 이래 점차
세력이 쇠락하고 있었으니 이를 노린 캄비세스 2세는 페니키아의 해군을 끌어모아 대군을 이끌었습니다.
페르시아는 국경 사이에 있는 유목 민족들과 동맹을 맺어 사막을 건널 안전한 육로를 확보
했으니, 기원전 525년에 펠루시움 전투에서 프삼티크 3세를 대패시키자
프삼티크 3세는 달아났지만 결국 붙잡혔고..... 수도 멤피스 까지 페르시아 손에 떨어집니다.
이때 이집트는 고왕국과 중왕국은 물론이고 전성기인 신왕국 시대가 이미 지나가고 끝물인
말기 왕조 시대였으니..... 아케메네스 왕조의 정복 이전에도 신아시리아에게 정복
되거나 또는 신바빌로니아와 전쟁에서 완패하는 등 거의 동네북 신세로 쇠퇴해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 프삼티크 3세는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구걸 까지 하며 겨우 목숨을
건지지만 몰래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들켜 수도 수사로 끌려갔는데......
하지만 이집트를 정복한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인들에게 굉장한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스스로 파라오를 겸하며 이집트인들의 지배자로 자리매김 했고 기존 이집트 귀족들과 종교를 모두
존중했으며, 파라오들이 전통적으로 쓰던 '상하 이집트의 왕' 이라는 칭호를 그대로 썼고,
이집트의 대표적 축제인 아피스 축제를 주관하기도 하면서 이집트인들을 존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집트가 엄청나게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던 나라였기에 무작정 찍어누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탓도 있었지만, 헤로도토스를 포함한 고대 역사가들은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에 억압적인 통치를
펼쳤다고는 하지만 정복자들이 피정복민들을 대하는 선례들을 생각해보면 관대한 통치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캄비세스 2세는 나일 강 유역을 넘어 북아프리카 전체를 지배하고자 했지만 이집트와는 달리 북아프리카
지방 원정은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 서부 오아시스 도시들에
원정군을 파견하고 이집트 남부 쿠시도 공격했으나, 극심한 더위에 군사들이 적응하지 못하여 실패합니다.
또한 북아프리카의 최강대국 중 하나였던 카르타고에 대한 해상 원정은 페니키아의 비협조
로 무산되는데.... 뭐 하기사 오늘날 레바논 지방인 페니키아인들이
건너가서 세운 식민 도시가 카르타고인지라 페니키아와는 형제지간이니 그럴만도 했습니다.
이집트에 머무르던 캄비세스 2세는 기원전 522년 페르시아 본토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허겁지겁 되돌아
갔으며, 귀환하던 도중에 사고사로 결국 사망하면서 이제 페르시아는 한동안 혼란기를 맞게
되는데.... 헤로도토스는 말을 타던중 실수로 칼이 그의 허벅지를 꿰뚫어 상처가 감염되어 죽었다고 합니다.
혼란끝에 제위를 거머쥔 사람은 키루스 2세의 아들이자 캄비세스 2세의 동생 바르디야였으니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에 머무르는 3년간 페르시아가 뒤숭숭한 틈을 타 스스로 황제를 선포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캄비세스
2세가 진압하기 위해 페르시아로 돌아오던 도중 급작스레 사망하자 페르시아의 유일한 황제로 올라 선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제동을 건 이가 있었으니 키루스 2세의 사위 다리우스 1세로, 다리우스 1세는 황좌에 앉아있는
바르디야가 가짜라고 주장했으니 진짜 바르디야는 캄비세스 2세가 권력 다툼을 우려해 이집트 원정을
떠나기 직전 몰래 죽여버렸고, 황좌에 앉은 사람은 바르디야를 사칭하는 찬탈자 라는게 주장의 요지였습니다.
키루스 2세의 딸 아토스의 남편인 다리우스 1세가 대놓고 처남인 황제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자
귀족들 사이에서도 점차 동요가 일어났으니..... 결국 바르디야는 즉위한지 1년도 채
못되어 귀족들에게 살해당하고 다리우스 1세가 혼란을 수습하고는 페르시아의 황제로 즉위합니다.
수도 파사르가다에에서 대관식을 치른 다리우스 1세는 엑바타나로 이동했는데, 바르디야의 지지자들이 제국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으로 바르디야가 쫒겨나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가 진짜
바르디야라고 믿는 이들이 많았고, 때문에 엘람과 바빌론 등지에서 다리우스 1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납니다.
다리우스는 먼저 엘람 반란군들을 진압했고 석달 만에 바빌로니아에서 일어난 반란도 진압했지만 그러나
반란은 산발적으로 곳곳에서 터져나왔으며 지지세가 가장 강한 박트리아에서도 반란군이 일어
났고, 아케메네스 왕가의 본산 파르스 지방에 메디아, 파르티아, 아시리아, 이집트등으로 반란이 번집니다.
때문에 다리우스 1세가 쫒겨나는 건 시간문제 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다리우스 1세는 백성들의 지지는
없었을지 몰라도 귀족들의 지지와 병력은 가지고 있었으니, 다리우스는 군대를 동원해 기원전
522년 모든 반란들을 어찌어찌 억누르는데 성공했고, 이 과정에서 총 9명에 달하는 왕들을 죽였습니다.
반란을 억누르면서 페르시아 제국을 안정시킨 다리우스 1세는 연이어 외치에 집중했는데 특히 캄비세스
2세 사후 혼란기에 바로 독립을 선포한 이집트를 재복속하는게 급선무였으니....
다리우스 1세는 대군을 몰아 파라오를 자칭하고 있던 페디바스테트 3세를 쳐내고 이집트를 재점령합니다.
부정부패로 악명이 높던 이집트의 페르시아 총독 아리얀데스를 숙청해 이집트인들의 지지를
얻어냈고 이집트 종교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며 최대한 민심을 달랬으니,
다리우스 1세의 관용 정책 덕택에 이집트는 페르시아에 무릎을 꿇었고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그후 다리우스 1세는 기원전 516년경 저멀리 인더스강 유역으로 원정을 벌였으니 대군을
직접 이끌고 출정한 다리우스 황제는 중앙아시아, 아리아, 박트리아 지방을
거쳐 아프가니스탄 지방에 입성했고 현대 파키스탄 지방과 탁실라까지도 정복합니다.
다리우스 1세는 기원전 516년 겨울을 간다라에서 보내며 인더스 계곡 정복을 준비했는데 기원전 515년
에는 인더스 유역을 모조리 집어삼킨후 페르시아로 되돌아왔는데 인더스 유역을 정복한
다리우스 1세는 신하이자 그리스 모험가였던 스킬락스에게 인더스강을 따라 탐험을 명령했다고 합니다.
스킬락스는 인더스강 어귀를 따라 인도양을 통해 홍해를 거쳐 이집트 지방으로 귀환하는데 성공했으며,
다리우스 1세가 정복한 인더스는 제국 내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인구가 많은 지방들
중 하나였으니, 페르시아 황궁에도 인더스에서 온 조공 사신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매년 8.3 톤에 달하는 금가루를 바치는등 아케메네스 제국 전체 세수의 32% 를 바쳤다고도 합니다.
다리우스 1세는 바르디야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반발에 부딪혔는데, 가장 큰게 바빌로니아
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한 사람이 네부카드네자르 3세라고 자칭하면서 반란의 구심점이 되어 불씨가
엄청나게 커졌던지라 다리우스 1세는 대군을 몰아 바빌론으로 진격해 공성했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키루스 대왕이 썼던 유프라테스강의 물줄기를 돌려버리는 방법까지 썼지만 먹히지 않았고 다리우스 1세는
무려 1년 반 동안 바빌론에 묶여있었는데.... 그러던 중 신하 중 하나가 이중간첩을 쓰자는 계략을 생각해냈습니다.
일부러 조피루스 라는 병사가 페르시아를 배반한 것처럼 꾸미고 바빌로니아에 투항하게 만들어 내부에서
성문을 열어주게 만들자는 것으로, 조피루스는 바빌로니아인들을 속이는데 성공했고 바빌론의 반란도
진압됐지만 1년 반 동안이나 다리우스의 발이 묶여있는 사이 스키타이 유목민들이 페르시아를 침공합니다.
스키타이인들은 이란 북부 지방에서 발원해 다뉴브 강과 우크라이나, 러시아 지방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살던 민족으로, 다리우스 1세에게는 선대 키루스 2세를 죽였을 뿐더러 중앙아시아와 흑해
무역을 훼방놓는 원수같은 존재였으니, 다리우스 1세는 배다리를 만들어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넜습니다.
기원전 513년 동유럽의 스키타이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는데, 이때 다리우스 1세에게 곤혹스러운
점이 있었으니 바로 유목민족 스키타이인들에게서는 점령할 도시도 영토도 딱히 없었다는 것입니다.
스키타이인들은 페르시아 대군이 부담스러웠는지 마을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최대한 충돌을 피하며
기습 게릴라 공격으로 전술을 펴자 난감해진 다리우스 1세는 스키타이의 왕 이단티루수스에게
서한을 보내 전쟁을 끝내고 항복할 것을 권유했지만 거절당하니 전쟁은 지지부진하게 쭉 이어집니다.
군대 사이에 전염병이 돌고 군량이 부족해지자 다리우스 1세는 어쩔수 없이 볼가 강을 건너 트라키아로
철수했는데, 도시를 점령하진 못했어도 다리우스 1세는 꽤 많은 것을 얻어냈으니 동유럽에서
스키타이인들이 가꿔놓은 비옥한 땅을 정복했고 스키타이인들의 무역선 약탈도 중지시킬 수 있었습니다.
다리우스 1세가 단순히 군사 업적만 남겼다면 '대제' 라고 불리지 않았을 것이니
다리우스 1세가 대제의 칭호를 받은 것은 그가 영토 확장에만
그친게 아니라 행정 체계 구축과 내치에도 상당한 업적을 남겼기에 가능했습니다.
다리우스 1세가 남긴 수많은 업적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게 "왕의 길" 이니 무역을 촉진하고 황제의 명령
이 빠르게 제국 곳곳에 내려질수 있도록 만든 길인데, 제국의 서쪽 끝 사르디스 부터 수도 수사에
걸친 길이 2,700km 로..... 파발꾼들이 말을 타면 무려 9일만에 왕의 길을 끝까지 주파할수 있었답니다.
왕의 길은 페르시아의 소아시아 총독부가 위치한 사르디스에서 출발해 아나톨리아 내륙을 거쳐 옛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네베를 통과해 아래로 꺾어져 바빌론으로 향했으며 바빌론에서 2개로 나뉘어 하나는
수도 수사와 페르세폴리스로, 나머지 하나는 엑바타나를 거쳐 저멀리 동방의 실크로드로 직통 이었습니다.
다리우스 1세가 깔아놓은 길 인프라가 워낙 좋아서 후대 로마 제국도 이 왕의 길을 조금만 보수하고 그대로
썼다고 하는데, 다리우스 1세는 요충지마다 초소와 숙소를 설치해 상인과 파발들이 중간중간 쉬어갈
수 있게 했는데, 이덕에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의 파발 보다 더 빠른 것은 없다' 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벌인 장대한 건축에는 홍해와 나일 강을 잇는 거대한 운하를 팠고, 심지어 홍해와 지중해를 잇는 거대한
대운하를 건설하려 시도하기도 했는데 지나치게 거대한 사업이라 중도에 포기하긴 했지만 수도 수사
에는 번쩍번쩍하는 황궁을 신축했고, 파사르가다에등 주요 도시에 미완 건축 프로젝트들도 완성 시켰습니다.
국교인 조로아스터교 신전들을 세웠지만 타 종교인 이집트 멤피스의 프타 신전과 네크베트 신전이며
엘람, 바빌로니아, 유대교, 메디아, 리디아등 지방의 토속 신앙 관련 신전들은 모두 보수
했으며, 이집트에서 석공과 건축가들을 대거 데려와 수사의 황궁을 비롯 많은 건물들을 만들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인구수는 천만명 부터 8천만명 까지 다양하지만 2천만~ 3천만명 남짓이란
것이 정설이니...... 당시 1억으로 추정되는 세계 인구의 20%~ 30% 에 해당했습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황제를 의미하는“샤한샤”를 정점으로 하는 전제군주제 국가였지만
확고한 중앙집권제도를 이루지는 못했으니 대제국이었고 수많은
민족들을 포함하다 보니 중앙정부에서 다 관리할 능력도 없었고 실제로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도입한게 "사트라프" 제도이니... 키루스 2세는 제국 전역을 행정구역 '사트라피'
20곳으로 나누고 지방 총독에 해당하는 사트라프 들에게 맡기는 제도 였으니
초창기에는 사트라프가 총 26명이 있었지만 후일 다리우스 1세 시절에는 36명까지 늘어납니다.
사트라프는 주로 페르시아 대귀족이나 황족 출신으로, 제 관할 구역 내에서는 일본의 번주들 처럼
사법, 입법, 행정, 외교, 군사등 왕과 똑같은 권한을 누렸는데, 대신 세금을 중앙정부에
납부할 의무가 있었고 또한 황제가 부를 때 무조건 군대를 소집해 달려가야 할 의무도 있었습니다.
사트라프의 직위는 겸직이 가능해 권력이 강한 인물은 두세곳을 통치하는 경우도 빈번했는데, 최대의 적국인
그리스와 인접한 아나톨리아 사트라피들이 이런 경우가 많았으니 일종의 “변경백”과 비슷하다고 보면됩니다.
제 구역 안에서는 왕이나 다름없는 사트라프 들이었으니 황제로서는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진
않을까 신경쓰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추가적으로 '왕의 귀', '왕의 눈' 이라고
불리는 감찰관들을 주기적으로 파견해서 사트라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트라프 바로 옆에는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총비서관을 두어 매달
사트라프의 행적을 담은 보고서를 올려보내도록 만들었고, 재무관도
따로 두어서 사트라프들이 국고를 함부로 남용하지 못하게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사트라프 곁에서 감시인들이 견제와 균형을 맞춰야 했지만...... 인간사가 다 그렇듯
사트라프 제도가 수월하게 돌아가진 않았으니, 중앙 정계가 조금만 혼란스러워
지거나 황제가 교체되는 시기에는 이벤트 처럼 반란을 일으키거나 말썽을 부렸습니다.
특히 페르시아가 등장하기 전부터 유서깊은 문화와 역사를 자랑해오던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에서는 황제가 바뀔 때마다 반란을 일으켰으니, 사트라프들이 황실 혈통이 섞인
황족들이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들이 제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시대에는 황족 출신 소(小) 키루스가 반란을 일으켜 그리스 용병들 까지 모아
제위 찬탈을 시도했고, 마지막 황제 다리우스 3세도 박트리아의 사트라프 베소스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영화 <300> 에서 크세르크세스 1세가 "나는 관대하다" 라고 말하는데...... 실제로
페르시아 이전에 메소포타미아를 석권했던 사르곤 왕조인 신 아시리아제국
이나 바빌론 제10왕조 신 바빌로니아 제국에 비하면 상당히 관대한 편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정복 직후 피정복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켜버리는 것이 일반적으로
아시리아가 이런 정책을 썼으니..... 북 이스라엘을 정복한후 성경에
나오는 10 부족을 모두 잡아갔는데, 오늘날 그 후손들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후 사비성과 웅진성에 살던 왕족과 귀족에 부유층등 1만 3천명을 중국
으로 잡아갔고... 이후 복신의 백제 부흥운동에서 왜군은 일본에 살던 풍왕자에게
5천 왜군을 주어 한반도로 나가 백제 왕위를 이었고, 3년 후 왜군 3만이 1천척 배를
타고 나왔으나 금강에서 당나라 수군에 패하니 백제인들은 왜군을 따라 대거 왜국으로 달아납니다.
그후 당나라는 신라 김유신군과 합동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는 669년 4월 신라에 넘어간
황해도와 일부 신라로 달아난 피란민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고구려인을 잡아
당나라 장안으로 끌고 가면서 조리돌림을 시킨후 일부는 공신과 병사들에게 노비로 하사합니다.
평양등 고구려땅을 비우다시피 잡아간 고구려인은 노비가 된 자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중국 각지로 보내니
고구려인 3만 8천 3백호 (23만명) 를 강,회 남쪽과 산남등지 빈 땅(밀림) 에 농노로 몰아넣었으며....
또 3만호 (18만명) 는 실크로드로 가는 외진 곳인 사막 인근인 오르도스에 가두고는 강제 노역을 시킵니다.
그외 나머지 고구려인은 고구려를 침략한 전쟁에서 용병으로 참전한 거란에도 전리품으로 나누어 주니,
영주에 끌려가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고구려인과 고구려에 속했던 말갈인들은
30년후 거란이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키자 혼란을 틈타 영주에서 탈출해 동북 만주에 세운게 발해입니다.
한국인들의 성씨를 분석해 보면 고구려인의 후예는 진주 강씨 97만에 신천 강씨 5만 3천, 횡성 고씨 1만,
익산 이씨 2천명 등으로, 여기에 고려계인 평양 조씨 5만을 고구려계로 쳐 주어도 3~4% 정도니
대부분은 중국땅으로 잡혀간 것인데.... 물론 고구려 하층민들로 신라에 흡수된 이들은 성씨가
없다가 조선시대 말기에 신라계나 가야계 성씨를 쓴 사람들도 있을 것이니 조금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정복민을 노예로 끌고 가는 것은.... 고향땅에 살게하면서 통치하면 처음
에는 이익이지만, 훗날 본국에서 "안사의 난" 등 혼란이 발생하면 피정복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다시 나라를 세우고자 할 것이니 아예 먼 나라로 뿔뿔히 흩어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로마는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점령하면서 저항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까지 무차별 학살하고는
불을 질러 무려 17일간이나 도시를 불태운후 바닷물을 끌어들여 소금을 먹은 불모지로 만들
었으며, 살은자들은 국제 노예시장에 팔았으니 카르타고는 “나라와 민족” 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는 이러한 전통을 깨고 원주민들이 제 고향에 살도록 놔두었으니 관대하다는 것인데
신바빌로니아가 유대왕국을 멸망시킨후 유대인들을 바빌로니아로 끌고 왔는데.....
키루스왕은 바빌론을 정복한후 유대인들을 자기 고향땅인 팔레스타인으로 돌려 보내기 까지 했습니다.
피정복민들이 고향땅에 잔존해 있었기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거나 민심이 뒤숭숭해지는 경우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페르시아는 폭압적인 정책을 펼쳤던 아시리아 보다
훨씬 오래동안 안정적인 전성기를 누렸으니 페르시아의 관용 정책이 효과를 보았다는 뜻입니다.
페르시아는 그외에도 지역의 토후들에게도 사트라프 지위를 부여하면서 민심을 달랬는데,
간혹 사트라프가 반란을 일으켜도 국가 전복 기도나 독립 시도 수준의 악질이
아닌 이상 중앙군을 동원해 진압하기 보다는 사절을 보내 말로 구슬리기를 선호했습니다.
샤한샤 입장에서는 군대를 동원해 짓밟는 것 보다는 대화로 해결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 측면에서 더
효율적이고, 서로 피곤할 일이 없을뿐더러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는 것에 비해 반란 재발의
위험도 낮았으며, 반란을 일으켜도 한두번은 눈감아주는 관대한 지도자라는 인상을 줄수 있었습니다.
관대한 이민족 정책과 법령 체제가 페르시아제국의 영토 확장과 존속의 이유였다고 할수있으며 제국의 공용어
로 이란인들의 페르시아어가 아닌 (인구가 많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통용되던 “아람어”
를 채택한 것인데, 예를 들자면 일본이 중국을 점령한후 일본 국내까지 공용어를 중국어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람어가 공용어이다 보니 예수님도 히브리어 보다 아람어를 사용했다고도 하는데.... 물론 공문서나 종교 문서
에는 페르시아어가 병기되곤 했으며, 페르시아는 아람어나 페르시아어를 딱히 피정복민들에게
강요할 생각도 없었고, 기존의 언어를 쓰도록 허락했으니 동서고금 5천년사에 이런 관대한 나라도 있었나요?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이집트어, 페니키아어, 유대어등 수많은 언어들이 쓰였는데, 심지어
필요할때는 적국이었던 고전 그리스어도 공문서에 쓰기도 했으니, 다만
언어가 워낙 많아 군대에서 지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기기는 했습니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관용 정책이 가장 빛을 발하는 분야는 종교니, 국교는 조로아스터교
였지만 다른 종교를 탄압하지는 않았으며, 이집트에서는 기존의 신전을 확장, 개축
하는데에 국고를 지원해주기까지 했고, 황제를 아문의 아들로 묘사하는 벽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바빌론에 잡혀와 있었던 유대인들을 가나안으로 되돌려보내 준 것도 시조 키루스 2세(고레스) 였는데,
더구나 키루스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데 국고를 들여 지원했으니 배타적이고
외골수 성향이 강한 유대인들이 그를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 라고 여기기 까지 했을 정도입니다?
세계 최초의 다민족 국가(제국) 였던 아시리아는 폭압적인 통치 때문에 타민족들의 분노를 사서 멸망했지만,
두번째로 다민족 국가를 건립한 아케메네스 왕조는 관용을 중시해 다양한 민족들의 포섭에
성공했기에 아시리아 보다 더 오래 갔으니 후에 등장한 다민족 국가들의 성공적인 롤 모델로 평가됩니다.
황제들이 이집트어, 산스크리트어, 페니키아어로 따로 왕명을 지어 부르게 했다는 사실은
황제들도 다민족 포용에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주며, 심지어 마지막 황제인
다리우스 3세는 망명해온 그리스인들에게서 그리스어를 배워 어느정도 구사했다고도 합니다.
당대 최고의 경제 대국이었던 페르시아는 부유함 하나 만큼은 당대 국가들 사이에서
압도적이었으니, 중국은 아직 전통적인 근거지인 중원에서도 벗어
나지도 못했고 또한 훗날 풍요로워지는 강남 지방은 당시에는 늪지대에 불과했습니다.
유럽은 아직 문명이 세워지지 못한 “야만인들의 땅” 이었고, 훗날 대제국을 세우는 로마도 이탈리아 반도
일부만 경영했으며 그나마 인도가 대응할만 했지만 수많은 군소 왕국들로 쪼개져 페르시아에
대응할수 있을 정도의 정치체인 난다 왕조와 마우리아 왕조는 페르시아 말엽~ 멸망 이후에나 등장합니다.
인도는 인류의 여명기 부터 발전을 거듭해온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등을 모조리 장악한
페르시아에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며, 심지어 인더스 유역 서부는 페르시아가
정복하기 까지 했으니.... 즉 당시 페르시아 제국은 압도적인 세계 제1의 경제대국 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