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말기에 명나라 조정은 위기에 처해있었다. 太子監國, 遷都南京의 방침은 상당히 써볼만한 대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말의 군신들은 결국 이 기회를 놓치고 만다.
남천에 대해서 먼저 의견을 꺼낸 것은 기록상 숭정제였다. 이유는 청나라 군대의 두 번째 침입이었다. 숭정15년 11월, 청나라군은 장자령(지금의 밀운 북쪽)에서 길을 나누어 명나라로 쳐들어 왔다. 수개월간 계주, 진정, 하간, 임청, 연주, 해주(지금의 연운항), 감유, 술양, 풍패등을 무도 격파하고 연도에는 대거 노략질을 했다. 다음해 4월에 북으로 돌아갈 때, 노략질을 당한 州縣이 모두 88개였고, 포로로 잡힌 자가 39만 6천명이었고, 우마 50만여마리, 금 12200냥, 은 220만 5천냥, 보물, 비단 8만필도 가지고 갔다. 청나라 군대의 위세는 대단하여 북경을 진동시켰다. 놀란 와중에 숭정제는 주연유에게 병사를 이끌고 나가서 응전하게 했는데 그가 떠나기 전에, “황상께서는 변방의 오랑캐와 싸우는 것을 얘기하면서 주연유에게 남천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최초의 남천에 대한 언급이지만 이런 논의는 천계제의 황후인 의안황후 장씨가 반대하여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한다.
숭정 17년 정월, 이자성은 서안에서 황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大順이라 칭한다. 대순은 병사를 동진시켜 산서로 들어와 형세가 위급했다. 명나라 조정은 다시 남천을 논의한다. 이때 이명예등이 남천을 주청한다. 그러자 숭정제는 이명예를 단독으로 불러 말한다.
“짐은 그런 뜻을 가진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도와주는 이가 없어서 지금까지 늦춰왔다. 너의 뜻이 짐과 맞는데, 바깥의 대신들이 따르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평구지> 권 8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정월 임신(초사흘), 황제는 중윤 이명예를 불러 접견했다. 좌우를 물리치고 어전에 가까이 다가가서 말했다. ‘오로지 남천만이 현재의 시급함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황제는 사방을 돌아보고 아무도 없자 말하였다. ‘짐은 그런 생각을 한지 오래되었다.’ 남으로 가는 길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다. 그래서 말하기를 ‘4갈래로 병사를 두는 것이 좋습니다. 황제께서는 작은 길로 가볍게 차리고 남행하면 20일이면 淮上에 도착합니다.’.. 밤 초경에 다시 이명예를 안으로 불렀다. 御案의 앞에 가까이 가자 물었다. ‘급히 가려고 하는데, 누가 맞이해 줄수 있겠는가? 도중에 어떤 관리에게 군수물자를 조달하게 하면 좋은가? 어디에 주둔하면 좋은가?’ 이명예는 아뢰었다. ‘제녕, 회안이 모두 요지입니다. 관직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황후는 비록 중간에 미행을 하더라도 두 곳이 긴요하니 예방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관직이면 되겠느냐고 물으니, 이명예는 호부, 병부의 당상관이면 족하다고 말했다. 이경이 되어 이명예는 궁을 나왔다.” 한밤중에 신하를 만난다는 것은 명나라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는 숭정제가 얼마나 남천을 하고 싶어했는지를 말해준다. 대순의 주력군이 이미 산서에 들어왔고, 명나라는 남천에 대해서 시급히 치밀하게 기획하고 준비했다. 예를 들어 신하 좌무제를 남경으로 가는 길가의 수륙사병과 배와 말의 수를 살피게 보냈고, 다시 밀지를 보내어 천진순무 풍원양에게 비밀리에 배 300여척을 준비해서 직고구에서 기다리도록 했다. 강의 얼음이 풀리면 바로 남행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리고 장진언을 병부상서로 하소 원계함을 등용하여 여대기를 대신하여 구강총독으로 삼는 등등의 조치를 취했다.
2월 초하루, 대순군의 격문이 어전에까지 날아들었다. 격문에는 “3월 15일에 경사(북경)에 도달하겠다.”는 말이 있었다. 군신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2월에 대순군 유방량부대는 위휘등 예북삼부를 평정하고 하북으로 빠져나왔다. 2월 26일에는 진정을 함락했다. 이것은 <열황소식>권4에서 말한 바로 경사에서 ‘당시에 틈적(이자성군)이 이미 남하했다.’는 내용이다. <明史.이방화전>에 따르면, 이자성의 주력부대가 산서성에 도착했을 때, ‘이방화는 밀소를 올려, 황제에게 고수하도록 요청했고, 태자를 남경에 보내어 감국으로 하도록 요청했다.’ 황제는 이 상소를 읽고 궁전을 돌면서 이를 논의하고자 했다. 중윤 이명예도 상소를 올려 남천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급사중 광시형등 다수의 대신은 반대입장이었다. <明史雇>의 기재에 따르면 광시형의 반박은 이랬다고 한다.
“태자를 남으로 보내자고 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그러자 신하들이 침묵했다. 황제는 탄식하며 다시 말했다. ‘짐이 망국의 군주가 아니라 그대들이 망국의 신하로다.’ 그리고 소매를 떨치고 바로 들어가 버렸다.”
이로써 볼때 숭정제는 광시형등이 남천을 저지하는데 대하여 아주 불만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2월 23일, 숭정제는 신하들을 불러서 수비대책을 논의한다. 이방화, 항욱, 범경문등이 다시 남천을 제기한다. 그러나 그만두도록 하여 논의가 이뤄지지 않는다. 2월 28일 이방화, 항욱, 범경문등이 다시 남천을 청한다. 숭정제는 노해서 말하기를,“國君은 社稷을 지키며 죽는 것이 고금의 바른 일이다. 짐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다시는 여러말 말라.” 그래서 남천은 더 이상 논의되지 않는다. 3월초4일, 부마인 공영고가 대면하고 아뢰었다.
“적의 기세가 창궐하니 관병이 적을 호랑이처럼 무서워합니다. 대신들로 하여금 도성을 지키게 하고, 황상께서 남행하여 친히 병사를 모집하여 토벌함이 좋겠습니다. 신은 경기지역의 의용군을 모으면 10만은 족히 되니 호송하여 따르겠습니다.“
황제는 결정하지 못하고 주저한다. 여러 신하들도 모두 황당한 말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숭정제가 남천할 마지막 기회였다.
3월 17일 대순군이 이미 북경성 아래에 이른다. 숭정제는 다시 남천할 생각을 한다.
“황상은 몰래 공영고에게 말하기를, ‘경은 전에 짐에게 남행을 권했는데 지금도 가능한가?’ 그러자 공영고가 말했다. ‘이미 늦었습니다. 그때는 사람을 모으기가 쉬웠는데 지금은 일이 다급해져서 인심이 이미 떠났습니다.’ 급해지자 숭정제는 옷을 바꿔입고 백성들틈에 끼어서 북경성을 빠져나갈까도 생각했으나 시행하지 못한다. 할수없이 다시 내원으로 돌아온 다음, 매산에 목을 매고 만다.
그렇다면 훌륭해 보이는 계책이던 남천이 왜 시행되지 못한 걸까?
첫째는 대순군의 전략의도에 대하여 유효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숭정 17년 정월, 장헌충이 사천으로 들어가고, 이자성의 주력은 섬서에 집중되어 있었다. 장강중하류 하남, 하북, 산동에는 기본적으로 농민군이 없었다. 숭정제가 기회를 잡았다면 편안히 남하할 수 있었다. 동시에 숭정제는 장강중류를 지키던 좌량옥을 불러서 태행산동쪽의 하북, 하남일대를 방어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럼 남천의 안전은 보장된다. 장강하류를 지키는 유택청, 유량좌, 황득공, 고걸의 여러부대는 대운하를 따라서 수륙교통선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숭정제는 이런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순군의 주력이 양성을 격파한 후, 군대를 둘로 나눠 하나는 이자성이 친히 이끌고 북상하여 태원, 대동, 선부를 지나 거용관을 넘어 북경으로 진격했고, 다른 하나는 유방량이 이끌고 태행산을 넘어 하남북부로 가서 북경을 포위하는 형국이 되었다. 정월 22일을 전후하여 유방량이 예북3부(하남북부의 3개부)를 얻고, 유여괴에게 부대를 하나 딸려서 동쪽으로 진격하게 한다. 장원, 활현을 함락시키고 하남 산동경계지역까지 진출한다. 이미 운하의 중요도시 제녕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방량의 부대가 동쪽으로 진격하는 속도는 경이로왔다. 2개월만에 동쪽으로 가서 대운하를 장악하고 남으로 경기지역에 도달한다. 숭정제는 남천하는 도중에 대순군에게 쫓길까봐 걱정했다. 그래서 북경을 빠져나가는 모험을 하지 못하여 결국 남천은 무산된다.
둘째는 대담함과 식견이 없었다. <수구가략>에 의하면, “황상은 남천할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후세레 한을 남길 것을 우려하여 조정신하들이 모두 요청하면 못이기는 척 허락하려고 한 것이다.” 숭정제는 남천하고는 싶었지만 역사책임은 지기 싫었다. 그래서 양자간을 왔다갔다 한 것이다. 이는 대담함이나 식견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숭정제는 “문신은 하나하나 다 죽일 놈이다.”라고 한 적이 있다. 심지어 3월 17일에 북경성이 무너지려는 때에는, “황상은 문무 각신하를 불렀다. 황상은 눈물을 흘리고, 신하들도 마주 눈물을 흘렸다. 속수무책이었다. 황상은 어안에 ‘문신은 하나하나 다 죽일 놈이다.’라고 썼다.” 이를 볼 때에 숭정제는 대신들을 매우 싫어했던 것이다. 명나라는 중후기에 들면서 관료들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특히 숭정제때 심했다. 신하들은 공리공담을 즐기고 의리만 이야기할 뿐이었다.
셋째는 제왕의 심리적 문제다. 2월 23일에서 28일 사이에 이명예등이 태자의 남경감국을 요청하자, 광시형은 ‘당숙종의 영무이야기가 재현될 것이다’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숭정제의 아픈점을 찔렀다. (당현종이 태자감국을 시키자 신하들이 태자를 당숙종으로 올리고 당현종을 태상왕으로 밀어냄) 숭정은 먼저 “짐이 천하를 10여년간 경영했지만 아직 다스리지 못했는데, 아이들이 무슨 일을 하겠는가?” 그리고는 노해서 ‘나라의 군주는 사직과 함께 죽는 것이 바른 일이다. 짐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으니...“라고 한다. 숭정제의 내심은 스스로 당현종, 당숙종의 역사가 재연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제왕심리상채의 발현이다. 결국 남천에 있어서는 숭정제에게 그 책임이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첫댓글 숭정제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어 감사드리고 새해에 복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님도 복된 한해가 되길...^^
왜 남천을 안 했나 했더니 주저하다가 쫑이 났군요. 선조는 신료들이 반대를 하거나 말거나 온건파들 끌어들여다가 우격다짐 파천을 했는데, 숭정제는 이런 면에선 선조에 비해 후달리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