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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의 아침 시편] 시인과 걸인의 아주 특별한 교감
출처 한국경제 : https://www.hankyung.com/opinion/article/202302021763i
거지
길거리를 걷고 있었지요. 늙은 거지 한 명이 내 발길을 멈추게 했습니다.
눈물 어린 붉은 눈, 파리한 입술, 다 해진 누더기 옷, 더러운 상처… 아아, 가난이란 어쩌면 이다지도 잔인하게 이 불행한 사람을 갉아먹는 것일까요!
그는 벌겋게 부어오른 더러운 손을 나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는 신음하듯 중얼거리듯 동냥을 청했습니다.
나는 호주머니란 호주머니를 모조리 뒤져 보았습니다… 지갑도 없고 시계도 없고 손수건마저 없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외출을 했던 것입니다. ‘이 일을 어쩌나…’
그러나 거지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손은 힘없이 흔들리며 떨고 있었습니다.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나는 힘없이 떨고 있는 거지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습니다.
“미안합니다, 형제, 내 급하게 나오느라 아무것도 가진 게 없구려."
거지는 붉게 충혈된 두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그의 파리한 두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가 스쳐 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대로 나의 싸늘한 손가락을 꼭 잡아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선생님. 그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것도 역시 적선이니까요.”
나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거꾸로 이 형제에게서 내가 적선을 받았다는 사실을….
*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 : 러시아 시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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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게네프와 윤동주가 만난 거지
러시아 소설가 투르게네프가 인생 후반기에 쓴 산문시입니다. 이 시의 창작 배경은 150여 년 전인 1872년 2월, 찬바람 부는 길거리이지요. 무심코 걷다가 동냥을 청하는 ‘늙은 거지’를 만난 ‘나’는 무언가를 주고 싶어 호주머니를 다 뒤지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게 없습니다.
그사이에 늙은 거지의 손은 ‘힘없이 흔들리며 떨고’ 있었죠.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떨고 있는 거지의 손을 덥석 움켜잡고는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붉게 충혈된 두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거지의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가 어리지요.
농노 1000명 둔 ‘금수저’의 노예해방
더 놀라운 것은 그다음 장면입니다. 거지가 싸늘한 내 손가락을 꼭 잡아준 것이지요. 그리고 혼잣말처럼 자기 손을 잡아준 것만으로도 큰 ‘적선’을 받았다며 고마워합니다. 그 순간 ‘나’가 거꾸로 깨닫습니다. 이 거지로부터 내가 더 많은 ‘적선’을 받았다는 것을요.
이날 시인이 걸인에게 내민 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무형의 선물입니다. 한겨울 거리에서 나눈 시인과 걸인의 특별한 교감, 그것을 통해 온 세상이 따뜻해지는 기적의 순간을 우리도 함께 경험하게 되지요.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금수저’였습니다. 대지주 집안이다 보니 농노가 1000여 명이나 됐죠. 어릴 때부터 사색적이었던 소년 투르게네프에게는 농노들의 삶이 너무나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농장을 관리하면서 조금만 잘못해도 농노들을 때리고 시베리아로 보내버릴 정도로 마구 대했죠. 그들에게 휘두르던 채찍으로 아들까지 후려치곤 했습니다.
이런 어머니에게 반감을 가졌던 그는 모스크바대학과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면서 시야를 넓혔고, 1850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농노들을 모두 자유롭게 풀어줬습니다. 그러면서 자유주의 사상으로 러시아 사회를 개혁하려 했지요.
그의 문학에는 이 같은 사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밑바닥 걸인을 대하는 자세가 남달랐던 이유도 이와 상통하지요. 그의 작품은 우리나라 근대 문학기에 많이 읽혔습니다. 일본을 통해 번역된 것이긴 하지만, 그중 산문시 ‘거지’가 특히 많이 소개됐지요. 아마 식민지 조선의 시대적 상황이 독자들의 마음을 건드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시의 특별한 독자 가운데 시인 윤동주가 있었습니다. 그가 연희전문 2학년 때인 1939년 9월에 쓴 ‘투르게네프의 언덕’은 ‘거지’를 패러디한 것이지요. 형식도 산문시이고 기본 배경과 설정도 비슷합니다. 다만 화자인 ‘나’가 걷는 곳은 ‘길거리’가 아니라 ‘고갯길’이고, ‘늙은 거지’는 ‘세 소년 거지’로 바뀌었지요.
식민지 청년의 비애와 부끄러움
윤동주 시 ‘투르게네프의 언덕’은 이렇습니다.
나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그때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병, 간즈메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하였다.
둘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셋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름한 입술, 너덜너덜한 남루, 찢겨진 맨발,
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 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보았다.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셋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근소근 이야기하면서 고개로 넘어갔다.
언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넝마주이 아이들의 행색이 ‘늙은 거지’만큼 비참해서 호주머니를 뒤져 보는데,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 등 있을 건 다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것들을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아이들에게 내주지를 못하는군요. 왜 그럴까요? 동정심이 생기는 것과는 달리 자기 물건을 선뜻 적선할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한편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아이들을 부르지만, 정작 아이들의 반응은 차갑기만 하지요. 저마다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 자기네끼리 소곤소곤 고개를 넘어가 버립니다. 그렇게 아이들이 사라진 언덕 위에는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아무도 없지요.
이렇게 용기도 없고, 실행력도 없고, 이야기를 나누려는 시도마저 실패했으니 얼마나 낯이 뜨겁고 무안하겠습니까. 그 모습이 곧 윤동주가 처한 식민지 조선의 슬픔이었죠. 나라 잃은 젊은이의 ‘부끄러운 자화상’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19세기 러시아 문호가 쓴 ‘거지’와 20세기 조선 청년이 쓴 ‘투르게네프의 언덕’이 절묘하게 겹치는 장면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지요. 그 시공간의 경계에서 피어난 문향(文香)과 인향(人香)의 여운이 오늘따라 더욱 은은하게 전해져 옵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빛명상
스님과 쫑쫑이
하루는 학회 사무실로 낯이 익은 스님 한 분이 들어왔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스님."
나는 엉겁결에 일어나 스님을 반갑게 맞았다.
안면이 많은 스님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합장을 하면서 재빨리 기억을 더듬어도 어디에 계신 스님이었던지 언뜻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무관세음보살."
스님도 나를 향해 합장을 해주었다.
"그리 앉으시지요."
나는 스님에게 자리를 권하면서도 계속 생각해봤지만
언제 어떻게 보았던 스님인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정선생!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글쎄요. 분명 많이 뵈었던 것 같은데 사실은 좀...... 죄송합니다. 벌써 건망증인지......"
"예끼!"
"예?"
"야, 광호! 정광호!"
"아니, 스님?"
나는 영문을 몰라 눈만 동그랗게 뜨고 스님을 바라보았다.
그런 스님의 얼굴엔 장난기처럼 짖궂은 웃음이 하나 가득 담겨 있었다.
"날쎄 나. 나 재운이야. 자네 친구 재운이라고, 알아보겠나?"
"재운이? 어릴 때 대신동에서 같이 살았던 그 재운이......?"
나는 반갑다 못해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어렴풋한 꼬마 재운이의 얼굴이 40년 세월의 장막을 뚫고
기억 이편으로 훌쩍 뛰어 넘어와 스님의 얼굴에 겹쳤다.
"아니 세상에...... 정말 자네가 그때 그 재운이란 말인가?"
"글쎄 그렇다니까? 하하. 이게 얼마만인가?"
그 친구는 어릴 때부터 한 동네에서 살았던 죽마고우였다.
상급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서로 뿔뿔이 흩어지기 전까지
십수 년을 같이 자라면서 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던 친구였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정말 감개가 무량했다.
"야, 이거 정말 반갑네.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살다보니 또 이렇게 만나게 되는구만."
"그러게 누가 아니라나. 정말 반가우이. 수십 년이 지나도 웃는 모습은 여전하구만."
"여전하긴? 이제 중늙은이 다 됐는데......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만 자넨 어떤가? 얼핏 보니까 유명인사 다 된것 같던데?"
"유명 인사는 무슨...... 아, 정말 그런데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난 생각도 못했어."
"책도 쓰고 그러면 유명인사 아닌가? 하하, 책 보고 알았네.
신도 중에 한사람이 우연히 자네 책을 가져다주더구만. 정말 깜짝 놀랐네.
내가 자네 책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아나?
그래서 이렇게 한 걸음에 달려온 걸세."
"그랬나? 어쨌든 잘 왔네. 정말 반가워."
우리는 반가운 마음에 한동안 웃음꽃을 피우면서 시간을 거슬러 동심을 추억했다.
"대신동 옛 동네는 가끔 가보나? 난 절에 묶여있다보니까 통 가보질 못했어."
"있기는 하지만 옛 모습이 아니야. 그렇지 않겠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택지개발이네 도로 편입이네 해서 완전히 변했어."
"그럼 개울이고 뭐고 다 없어진 거야?"
"응. 없어. 산들도 다 깎여나갔고."
"그 개울 참 맑았는데...... 지금 내가 있는 암자 앞의 개울도 그때 물처럼 맑지는 못할 거야.
자네 생각나나?
그 개울에서 여름엔 멱감고 겨울엔 썰매타고 하던 일 말이야."
"왜 생각이 안 나겠어. 우리가 거기서 얼마나 놀았는데.
그 추운 겨울에도 거기서 하루 종일 썰매타고 놀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네."
"그랬지. 그때 썰매 만든다고 판자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몰래 남의 판자도 많이 뜯었는데.
그러다 주인한테 들켜 매도 많이 맞고 말이야.
그래도 죽어라고 판자를 뜯어다가 썰매를 만들어서 연탄 집게로 지치고 놀았으니......
그때 생각하면 참 짖궂었어. 그때 자네 애들한테 썰매 많이 갖다줬었지?"
"그래 형들 썰매 집어다가 많이 나눠줬지."
"하하. 그래 맞아. 그러다가 형들한테 들켜 논길로 밭길로 막 도망다니고 얻어 터지고 하던 자네 모습이
지금도 눈에 보이는 것 같네그려. 하하......"
"내가 그랬었나? 하하하."
"내 사실 그때부터 알아봤네. 광호 자네가 이런 모습으로 살지말이야."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자네가 자네 혼자만을 위해서 살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알아봤단 말일세.
자넨 주위에서 어려운 친구들을 보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못했지.
꼭 뭐라도 퍼다줬어. 나는 지금도 생각이 난다네.
옷이고 신발이고 먹을 거고 죄다 친구들에게 퍼다주던 자네 모습이 말이야.
그 많은 게 다 어디서 나오는지는 몰라도
하여간 안 갖다주는 물건이 없었으니까 자네도 참 어지간했어."
"하하. 우리가 원래 대식구였지 않았나. 자연 옷이고 신발이고 많았으니
한두 개 빼내는 건 표도 나지 않았지. 어릴 땐 누구나 한 번쯤 그러는 거 아닌가?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을 가지고 새삼 들추기는......"
"그래도 자네는 하여튼 유별났어. 나는 지금도 인상 깊은 기억이 하나 있네.
언젠가 친구들하고 자네 집에 놀러 갔더니 자네 식구들이 참외를 먹고 있더군.
먹을 게 아쉽던 시절 아닌가? 친구들이 꼴깍꼴깍 침을 삼키고 있었지.
그러니까 자네가 친구들에게 참외를 하나씩 나눠줬어.
그런데 자네도 기억나지? 정복이라고.
그 친구가 참외를 소매 속에 넣고는 멀뚱히 다른 사람 먹는 모습만 바라보고 섰는 거야.
그 친구 집이 가난하지 않았나?
돌아가 가족들과 나눠 먹으려고 했던 게지. 그때 자네가 어떻게 했는지 아나?
엄마를 조르다 안되니까 부엌에서 몰래 참외를 광주리째 가져다가
자네가 먹던 것까지 보태서 정복이한테 주는 거야.
내 그 모습을 보고 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탄복을 했는지 모르네."
그 친구는 나도 모르고 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허, 사람 무안하게 자꾸 그런 소리는...... 아참, 그래 정복이하고는 연락이 되나?"
"아니. 그 친구 본 것도 수십 년일세."
"보고 싶구만. 어디서 뭘하고 있을라나? 그 친구 머리에 기계충이 많았지?"
"많았지. 나도 있었고. 그 시절에 많이 그러지 않았나?"
"하긴 그랬어. 여러모로 부족하고 어렵던 시절이었으니까."
한동안 이런저런 유년 시절의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마치 빛바랜 사진첩을 들춰보는 것처럼 때론 웃음으로 때론 그리움 속에 추억담이 무르익었다.
우리는 향수와도 같은 아련한 감상에 젖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
어느 정도 추억 속의 여행을 마치고 나자 그가 화제를 현실로 옮겨왔다.
어느 정도 추억 속의 여행을 마치고 나자 그가 화제를 현실로 옮겨왔다.
"그래 학회 일은 어때? 할만한가?"
"그럭저럭 괜찮네. 힘들 때도 있지만 마음은 편해서 좋아. 보람도 느끼고."
"책에서도 대충 읽었네만 정말 대단하더군. 존경스러웠네.
자네 덕업은 웬만한 깨달음을 가진 사람과는 비할 바 아닐 것 같더니.
나도 수양을 한다는 땡초지만 부끄러운 점이 많았어."
"이 친구가 오랜만에 만나가지고는 계속 사람 무안한 소리만 하고 있구만.
그만 하세나. 어지럽네."
"무안한 소리는? 사실이 그런데. 나는 자네가 신부님이 돼 있는줄 알았네만
하여튼 역시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었구만. 사람 타고나는 성품은 어디 안 가는가보이."
"그만 하라니까 사람도 참...... 그리고 신부님은 어디 아무나 되나?
그나저나 이젠 자네 얘기 좀 해보라구. 자네는 좀 어떤가?"
"나 같은 땡초야 늘 그렇지. 절에 박혀서 예불하고 가끔 책이나 읽고 그러네."
"불가엔 언제 든거야?"
"이제 30년이 거의 다 돼가네. 한창 청년이었을 때니까."
그러면서 그는 이루지 못한 자신의 사랑 이야기 한 토막을 내게 들려주었다.
상대는 동네 감나무집 딸이었다는데 그 아가씨라며 나도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녀 집이 워낙 가난하다보니 집안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고
그것이 불가에 드는 데에 적잖은 계기가 되었던 모양이다.
"꼭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지......"
슬픈 기억이라는 듯 그는 축축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부럽구만. 그런 열병 같은 사랑을 해본 젊은 날의 기억을 가졌다는 게 말일세."
"그래. 지금은 좋은 추억이지. 덕분에 부처님의 길도 따를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나는 그때의 인연을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그는 공연한 감상이 겸연쩍다는 듯 목소리를 쾌활하게 바꾸어 말했다.
"그렇게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보기가 좋구만그래.
아무튼 나는 자네가 스님이 되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네."
"그런가? 그래도 내 승려 생활에는 자네 도움이 많았던 것 같은데?"
"농담은...... 자네가 스님인지도 몰랐던 내가 도움은 무슨......"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닐세. 사실 그동안 불가에 있으면서
내게는 늘 떠나지 않는 생각이 한 가지 있었다네.
내가 흐려지거나 나태해지려고 할 때면 항상 그 생각을 떠올렸지.
그러다 보니 자네도 항상 생각하게 됐고.
내 언젠가 자네를 보면 꼭 이 이야기를 하리라 마음먹고 있었어."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감을 못잡고 그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자네 쫑쫑이 기억나나?"
"쫑쫑이......?"
"그래 쫑쫑이. 우리집에서 키우던 쫑쫑이 말이야."
"아. 그래 생각나! 쫑쫑이."
쫑쫑이는 재운이네가 키우던 개의 이름이었다.
송아지만한 덩치큰 똥개였는데 그래도 성질이 유순하고 영리한 개였다.
나를 무척 잘 따랐기 때문에 주인인 재운이와도 숱하게 다퉈서 쉽게 기억이 났다.
"다행히 기억하는구만. 그럼 해피도 기억나지?
그 왜 쫑쫑이 말고도 우리집에 있던 또 다른 강아지 말이야."
"그래. 스피치였더가? 외래종 강아지가 한 마리 더 있었지.
근데 갑자기 개들은 왜?"
나는 별안간 무슨 개 이야기인가 하여 난데없이 느껴졌지만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런데 광호 자네는 해피보다도 쫑쫑이를 훨씬 예뻐했어. 그렇지?
솔직히 귀엽고 예쁘기로 치면 해피가 더 했는데 말이야.
다른 사람들도 해피를 더 예뻐했고, 안 그런가?"
그건 그랬다. 애완용이었던 해피의 외모는 사실 똥개 쫑쫑이가 따라갈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처럼 쫑쫑이를 훨씬 예뻐했다.
쫑쫑이가 불쌍했기 때문이다.
해피는 좋은 음식만 먹고 잠도 방안에서 자면서 사랑을 흠뻑 받는데
쫑쫑이는 항상 마당한 구석에서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속이 상했던 것이다.
"난 지금도 그때 자네가 쫑쫑이에게 했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나네.
자네는 쫑쫑이에게 맛있는 걸 참 많이 갖다줬지.
부친 가게에서 얻은 명태 대가리도 많이 갖다주고 해피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말일세."
"똑같은 개인데도 차별 대우를 받는 쫑쫑이한테 아마 측은감을 느꼈었던가보이."
"그러니까 쫑쫑이도 나중엔 주인인 나를 제쳐두고 자네만 따르게 됐어.
자네만 보면 좋다고 펄쩍펄쩍 뛰면서 말이야.
어떤 땐 자네가 우리집 근처까지만 와도 내 미리 알 수 있었다네.
녀석이 냄새를 맡고 미리 짖고 뛰며 난리였으니까."
"그래. 나를 잘 따랐지. 내가 며칠 보러 가지 않으면 우리집까지 찾아왔었으니까."
우리집까지 찾아와 문 밑 틈새로 낑낑거리며 나를 부르던 쫑쫑이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문을 열어주면 녀석은 펄쩍 뛰어올라 내 품에 안겼고
그러면 나는 녀석을 데리고 들판에 나가 족히 반나절은 달리고 뒹굴면서 놀아주곤 했었다.
"언젠가 이런 일도 있었지? 한 번은 학교를 파하고 나오는데
운동장에 쫑쫑이 녀석이 엎드려 있었어. 헌데 나를 보고는 꼼짝도 않던 녀석이
광호 자네가 오니까 벌떡 일어나 자네한테 달려가는 거야.
내가 아니라 자네를 마중나왔던게지.
그 다음에 우리가 어땠는지 자네 혹시 생각나나?"
"하하. 그래 생각날 것도 같구만. 아마 뒷동산에 올라가서 대판 싸웠지?"
"맞아. 엄청 싸웠어. 우리가 쫑쫑이 문제로 몇 번 싸우기는 했어도
아마 그때처럼 크게 싸웠던 적은 없을 거야.
그때도 쫑쫑이는 주인인 나한테 으르렁거리고 달려들면서 자네 편을 들었지.
그래서 싸움도 더 크게 오래 갔지만 말이야."
"하하. 그래, 그랬어. 그때 자네 나한테 많이 맞았지?"
"예끼, 이사람아. 자네가 더 터졌지 무슨 소리야......"
우리는 장난기어린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웃음을 나눴다.
"헌데, 그 얘기는 왜 갑자기 꺼내는 건가?
쫑쫑이의 일하고 자네 불도 생활을 하는 거하고 무슨 연관이 있다고?"
나는 다시 분위기를 모으며 그에게 물었다.
"연관이 있지. 항상 나를 분발시키는 역할을 하니까.
나는 불가 생활내내 한시도 그때 일을 잊은 적이 없었네.
늘 마음에 새기면서 불제자로서의 내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일깨워 왔지."
"글쎄?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낮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눈 말일세.
그때 대부분 사람들은 해피만 예뻐하고 쫑쫑이는 쳐다보지도 않았지.
나도 그랬고.
그런데 자네는 그늘진 곳의 쫑쫑이에게 사랑을 주었어.
그러면서 부러운 우정을 나눴지. 그럼 나는 왜 못했을까?
쫑쫑이가 미워서? 그게 아니거든.
다만 마루 위의 해피에게만 익숙해져서 마당 아래 쫑쫑이를 보지 못했던 것 같으네.
만일 내가 해피에게 쏟은 애정의 십분의 일만 쫑쫑이에게 줬어도
자네와 싸웠을 때 쫑쫑이는 주인인 내 편을 들어줬을 거야.
해피와 쫑쫑이도 훨씬 사이가 좋았을 거고.
하지만 결국자네처럼 소외된 곳을 바라볼 줄 아는 눈이 없었기 때문에
나도, 쫑쫑이도, 해피도 모두 서로 어긋나면서 으르렁거렸던 거지.
바로 그것을 알게 됐다는 걸세.
불가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속세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다가 문득 깨달은 내용이지.
늦게 철이 난 게야. 정말 가슴에 와 닿더구만.
그래서 이후 시작된 내 불도생활에서 그때의 기억을 거울로 삼게 됐다는 얘기야."
그는 차분하면서도 깊이 있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을 그리 좋게 해석하니 내가 쑥쓰러우이.
훌륭한 농부는 돌밭에서도 만석을 이룬다더니 자네가 그렇구먼.
내게 그리 깊은 뜻이 있었겠는가만은 어쨌든 자네의 생각에는 나도 동감을 하네."
"그래. 낮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진정한 사랑이었어.
사실 개개인이든 종교든 사랑을 얘기하면서도 그동안 너무 높은 곳만을 보아왔어.
의식을 했던 못했던 낮은 곳은 흔히 소외를 시켰지.
그러는 사이 사랑과 관심에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생긴 세상이 되었네.
하지만 세상에는 높은 곳보다 낮은 곳의 사람이 훨씬 많지 않은가?
행복의 총량이 아무리 많다한들 그렇게 편중되어 있다면
참다운 사랑의 세상이라 할 수 없겠지.
진정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이 될 수 있으려면
물이 아래로부터 차오르듯 사랑과 관심도 낮은 곳에서부터 차올라야 할 걸세.
한 사람이 열개를 갖는 것보다 열사람이 한 개를 갖는 것이
진정한 극팍왕토의 모습일 거라는 얘기야.
나는 이런 것들을 그때 쫑쫑이와 자네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늘 되뇌인다네.
그러면서 낮은 곳을 바라볼 줄 아는 눈과 마음이 깨어 있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스스로 단속하는 것이지."
그의 조용한 목소리가 잔잔한 감명으로 내 마음에 전해졌다.
그가 불도를 닦으면서 스스로 성찰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것 같았다.
친구이기 전에 훌륭한 구도자로서 나는 그가 기쁘고 반갑게 느껴졌다.
"부족한 친구를 그렇게 좋게 기억해주니 고마우이.
그리고 자네의 그 깊은 혜안에 진심으로 감명을 받았네.
전적으로 동의를 하네.
세상을 진정 온기로 채울 수 있으려면 낮고 소외된 곳부터 채워야 할 거야.
자네 같은 불자가 세상을 지키고 있으니 그래도 마음 든든하구만."
"고맙기는 내가 더 고맙지 이 사람아.
내게 그것을 일깨우고 있는 장본인이 자넨데.
어쨌거나 그래서 지난 승려 생활에서 자연 자네 생각도 많이 하게 됐었다네."
"그런 얘기였군. 이거 고맙고도 미안한데...... 자네는 나를 그렇게생각해주고 있었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나도 앞으로는 자주 생각해줌세. 하하."
"사람도 참......"
그날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늦게까지 나눴다.
참 많은 주제로 대화를 나눴지만 그와 나는 기본적으로 마음이 일치했고 쉽게 공감대를 느꼈다.
그렇듯 오래 전의 친구와 과거는 물론 현재의 생각까지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참 특별한 일이었는데 우정을 넘어 동반의 감정까지 느끼게 한 만남이었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던지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농담이 아니라 내 정말 자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네.
자네라는 존재를 통해서 내가 깨달은 것이 너무도 많아.
앞으로도 그럴 것 같고. 내게 그랬던 것 처럼 다른 중생들에게도 좋은 깨달음 많이 주시게.
극락왕토의 건설은 바로 자네 같은 사람에게 책임이 있지 않겠나?
나도 기도하겠네.
어차피 진리는 한 뿌리이니까 같이 노력해보세나.
내 이 말을 오늘 꼭 하고 싶었네."
나 또한 그에게 화답을 해주었다.
"과분한 말이군. 자네처럼 모든 것을 폭넓게 바라보고 포용할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세상에 필요한 지혜가 아니겠나? 종종 찾아와서 많은 가르침을 해주시게."
너무 짧게 느껴진 40여 년만의 만남이었다.
그러나 이젠 다시 만날 수 있기에 아쉽지 않았다.
돌아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40년 전 쫑쫑이 때문에 싸웠던 우리가 40년 후 쫑쫑이를 통해 마음이 하나 될 수 있다니......
그것이 세월의 힘이고 또한 모든 진리의 한 뿌리인 하늘의 힘일 것이다.
어느새 넓은 가슴이 되어 돌아온 친구의 성불(成佛)을 기원하며 빠른 재회를 기다린다.
출처 : 초광력 빛(VIIT)으로 오는 우주의 힘
첫댓글
남 달랐던 나눔
소외된이를 돌보는 마음..담아갑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드립니다.
낮은곳을 바라볼수 있는 마음이 진정한 사랑이다.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 행복하고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시인과 걸인의 아주 특별한 교감!!"
감동합니다.🙇♀️
스님과 쫑쫑이의 일화를 봅니다. 주인보다 더 따르는 학회장님이였지요.
"극락왕토의 건설" 친구와의 기나긴
대화내용을 봅니다. 명심합니다.
낮은 곳을 바라보는 마음,
어릴때부터 남달랐던 학회장님,
늘 보듬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투르게네프와 윤동주님의 시,, 소개해 주신글 잘 보았습니다,
빛의책 <스님과 쫑쫑이> 함께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한문장 차분하게 살펴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운영진님 빛과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동정심을 가지는 것과 직접 도우려는 실행력은 다르다는 것을 다시 느낍니다.
훌륭한 구도자가 된 친구분을 보며 옛 추억을 회상하며 들은 에피소드가 낮은 곳부터 채워나가는 마음임을 느끼며 마음 따뜻해집니다. 감사합니다.
소외되고 낮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
깊이 담습니다. 감사합니다.
작은것이라도 나누고 베풀 수 있는 따뜻한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엣친구와의 대화를 읽으니 마음이 따뜻해지고 즐겹게 느껴집니다
많이 반가우셨고 추억도 함께 나누며 행복하심이 느껴집니다
우정을 넘어 동반의 느낌 까지 느끼신 좋은 친구와의 만남이 긴 여운으로 남네요
즐거운 만남의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소외된 어려운 쪽을 챙기시는 어린 시절 학회장님의 사랑 가득하신 감격스런 이야기~ < 스님과 쫑쫑이 > 빛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나온과거이야기하나의추억마음의따뜻함을느끼게하네요,감사합니다, 빛과함께
스님과 쫑쫑이이야기 감동입니다.
귀한 빛역사이야기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학회장님 어릴적부터. 소외된 곳을
바라볼 줄 아시는 사랑의
마음 모든것을 폭넓게 바라보고
포옹할줄 아는 마음에 지혜
진정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소외되고 낮은곳을 바라볼수 있는마음 새깁니다.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스님과 쫑쫑이"
세월의 힘이고
또한 모든 진리의 한 뿌리인
하늘의 힘일 것이다.
감사한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투르게네프와 윤동주 시인
너무나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오늘 두 분을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긴글이었지만 순식간에 읽어 나갔습니다.
좋은 깨달음을 주신 친구분께 감사드리고 두분
우정에 감명받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 감사합니다. 깨달음은 큰 에너지로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마음을 주고받는 삶을 보는 귀한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과 쫑쫑이...귀한글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학회장님의 어린시절이 상상이 됩니다. 낮을 곳을 보시는 학회장님 우주마음님께 감사와 공경의 마음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낮은 곳을 살피시는 귀한 마음 잘 담습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어릴때부터 남달랐든 학회장님의 인품이 뭍어나는글
감사합니다.
귀한 빛 의 글 진심으로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릴 적부터 어려운 친구들이나 이웃들에게 무엇이든 나누시고 베푸신 학회장님의 따뜻하신 성품이 느껴집니다.
물이 아래에서 차올라 흐르듯 사랑과 관심도 낮은 곳부터 차올라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됨을 마음에 담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른 이를 돕는 학회장님은 변함없는 분이십니다.
함께 행복한 세상을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린시절이나 언제나 늘 가난하고 어려운 분들께 무엇이든 나누어 주시는
학회장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공경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