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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을 구하는 기도
시 28:1-9
1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2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3 악인과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 그들은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4 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
5 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괴하고 건설하지 아니하시리로다
6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8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9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시 28:1-9 / [비록 위험이 닥칠지라도; 다윗의 시] 여호와여, 든든한 나의 바위이시여, 주께 부르짖사오니 부디 못들은 체하지 마소서. 주께서 아무 말씀 아니하시면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는 자와 이 몸 하나 다를 것 없사오니 2) 주님의 거룩한 성소를 향하여 두 손 번쩍 쳐들고 살려 달라 부르짖을 제, 부디 이것을 생각해 주소서. 3) 저 못된 것들과 한패라고 이것을 나무라지 마소서. 저들은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늘어놓지만 생각은 어떻게 남을 등쳐 먹을까 나쁜 짓만 궁리합니다. 4) 저들이 저지르는 행실 그대로 저들이 벌이고 있는 못된 짓 그대로 저들에게 갚아주소서. 저들 두 손이 저지르는 그대로 저들에게 응분의 벌을 내려 주소서. 5) 여호와 주께서 어떤 일을 이루시며 무슨 일을 벌이시는지 저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하오니 다시는 일어날 엄두도 내지 못하게 저들을 후려치소서. 땅바닥에 내팽개치소서. 6) 찬양받으소서, 여호와여 살려 달라 부르짖는 이것의 목소리 들으셨도다. 7) 여호와는 나의 힘, 나의 방패 굳게 주님을 의지하는 내게 도움을 주셨도다. 하여 이 마음 기쁨에 넘쳐 감사 노래 부르리라. 8) 여호와여, 주님 백성의 힘이시며 주께서 뽑아 세우신 임금이 든든한 요새처럼 의지하는 분이여, 9) 주님의 백성을 건져 주소서. 주님의 차지인 이 백성에게 복 내리소서. 이 백성의 든든한 목자 되시어 영원토록 돌봐주소서.
위기 상황이 계속되고 있을지라도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확신은 잃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를 찬양합니다.
간청하는 기도(1-5) 위기 속에서 간구하였지만 아무런 답을 하지 않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긴급하게 부르며 답답함을 토로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괴로워하며 자신의 억울한 죽음이 임박했음을 무덤에 내려가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의 지성소를 향하여 기도의 손을 펴서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사다리처럼 만듭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악인과 악을 행하는 자들과 똑같이 간주되어 그들과 함께 심판을 당하는 일만은 막아달라고 간청합니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복수나 사적인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공공의 정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을 공경하는 사람들은 입으로는 화평을 말하지만, 마음속에 악독을 품고 있는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위선자들입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직접 행하신 구원 행동과 자연에 나타나는 창조행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무시했기에 그들이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신뢰와 확신의 찬양(6-9) 다윗은 이제 자신의 간구를 들어주셨다고 고백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사건을 이미 일어난 사건으로 확신하면서 “들어주심이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과 방패가 되셨다고 고백하며 확고한 위기로터 구원하시는 믿음의 근원으로 모든 믿는 자의 백성의 힘이시며, 왕 곧 보호하는 견고한 구원의 요새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분은 다윗이 어려운 가운데서, 시련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은 나의 힘과 방패로 자신을 증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문제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해결되었다고 확신하며 공동체의 문제로 눈을 돌리고 이 백성의 목자가 되어 먹이시고 인도해 달라고 기원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과 창조의 손길을 기억함으로써 창조주의 손에 자신의 인생을 전적으로 맡깁니다. 또한 악을 행하는 것을 버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손을 맞잡아야 합니다.
적용: 기도하는 손은 악을 행하는 손을 버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손을 맞잡아야 합니다.
프랑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풀을 베는 농부는 들판의 끝을 보지 않는다.' 풀을 베려는 농부가 들판의 끝을 보며 "저 많은 들의 풀을 언제 다 베지?"라는 푸념만 하다 보면 결국 의욕도 잃고 일을 끝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계획대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들판의 끝을 보며 걱정할 것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주변에 있는 풀을 베는 데 필요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결과는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 설 교 >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자
시편 28:1-9 / 성흥모 목사
크리스천 유머 중에 ‘청년의 KO패’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든 일을 삐딱하게 생각하는 불량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쪽도 돌려대며..”(마5:39) 라는 성경 구절을 읽고 예수 믿는 자들은 과연 그렇게 하는지 시험해보기로 하였습니다. 주일날 아침... 그는 예배 시간에 맞추어 집 근처의 교회로 갔습니다. 그리고 예배당에 들어서자마자 다짜고짜 장로님 한 분의 뺨을 후려갈겼습니다. 난데없이 뺨을 얻어맞은 장로님이 노발대발하면서 불량 청년의 멱살을 움켜잡았습니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같으니라구! 어디서 배워먹은 짓거리야?” 그러자 부량청년을 장로님의 손을 확 뿌리치면서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고 했는데, 이래도 당신이 예수 믿는 사람이오?” 그러자 장로님이 불량 청년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면서 말했습니다. “야 임마, 네가 내 왼편 뺨을 쳤지, 오른 쪽 뺨을 쳤냐?”고 했다고 합니다. 이 말에 웃어야 하는데... 이 이야기는 지어낸 유머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를 포함해서 우리 교우 중에 지나가는 어떤 사람에게 뺨을 한 대 얻어맞았다고 하면,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떠올리면서 ‘그래...’ 한 대 더 얻어맞아야 한다고 행동할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뺨을 얻어맞았다고 하면 재수 없어하고 기가 막히는 일이요, 그러다가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황당한 일입니다. 정말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맞았다고 하면 한 대 더 맞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어떻게 예수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믿어 거듭난 사람이지만,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어떤 일이 있을 때에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고, 예수 믿는 사람으로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가 물어보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살아가는 것인지, 내가 좋아서 살아가는 방법인지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그냥 기분대로 내가 좋으면 된다고 하면서 나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나를 지켜보시고 있습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 하감하시고 살펴보시고 있습니다.
우리의 앉고 서는 것을 감찰하시는 것이 아니라,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은 우리가 절망 중에 있을 때에, 함께 아파하시고 함께 있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살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름 휴가 중에 로빈 마이어스 목사님이 쓰신 “언더그라운드 교회”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번역하면 지하교회라는 말입니다. 오늘 날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그것을 찾아야 하고, 회복하라고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라고 합니다. 정말 예수 믿는 것 보여주고, 예수를 믿어도 제대로 믿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족들로부터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말씀대로 살았는지 당시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폄훼하면서 “귀신에 들렸다”고 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어야 제대로 믿는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빈 마이어스 목사가 신학교 다닐 때 설교학의 대가인 ‘프레드 크래독’박사의 강의를 들을 것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강의를 벗어나 학생들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박사님이 허튼소리를 하거나, 나사가 풀렸거나 아니면 학생들이 주의해서 듣고 있는지 시험하시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교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 “며칠 전에 내가 집 앞에서 무게가 4Kg 되는 참새 한 마리가 길거리를 걸어가는 것을 보고 내가 참새에게 ‘너 좀 너무 무거운 것이 아니냐?’ 하고 물어보았지요. 참새는 ‘네, 그래서 제가 살을 좀 빼려고 걷는 중이랍니다.’ 하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왜 날지를 않니’ 하고 물었습니다. 그 참새는 내가 마치 멍청이인 것처럼 바라보고는 ‘날아요? 나는 한 번도 날았던 적이 없어요. 다칠테니까요’ 하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네가 ‘네 이름이 무엇이니?’하고 물었지요. 그 참새가 하는 말이 ‘교회랍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날아야 하는 참새가 비둔해져서 한 번도 날아본 적이 없대요. 그런데 그 참새는 오늘의 교회라는 사실에 가슴이 무너지면서 제 자신이 송두리째 갈아 앉는 것을 느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힘껏 날아야 하는 교회가 비둔해지고 공룡화 되면서 이제는 자기 몸을 유지하기가 어려워 자멸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면서 천국을 선물로 주셨고, 나의 더러운 죄와 허물을 다 용서해지시고 해결해주셨는데, 우리는 이 세상에 안주하고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자가용, 좋은 환경을 좋아하다보니 미친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 귀신 들렸다고 하시던 그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처음 제자들은 또 하나의 예수라는 말을 들으면서 살았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따라 죽었습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위험한 인물들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예절 바르고, 예측이 가능한 사람들이요, 괜찮은 사람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모순을 보면서 예언자적으로 외치는 이들도 없고, 가난한 사람들로 인하여 마음 아파하고 그들과 함께 나누고 자기의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그런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로빈 마이어스 목사님이 교회사를 통찰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원문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43쪽에 “심지어 신앙의 성격도 완전히 바뀐다. 1세기 급진적 윤리인 산상설교에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없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말들뿐인데, 4세기의 니케아신조에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말은 단 한 마디도 없고, 오직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관한 말들뿐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저자는 강조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행하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믿는 사람들인가? 우리는 선호하는 성경구절만 선택하고 우리가 선호하는 신조들을 암송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자인 로빈 마이어스 목사님은 예수님을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모델로 삼자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우선 만일에 예수님이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라기보다 우리의 삶의 모델이라면, 우리가 교회 안에서 다투는 대부분의 문제들을 사라질 것이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모델로 하면 우리 사회의 모든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어느 시골교회에서... 목사님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진지하게 물어보았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진짜로 존재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너는 지금 누구한테 질문하는 거냐?” “하나님한테요!” “그럼 내가 누구냐?” “하나님이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 내일 설교 준비는 다 했냐?” 존재와 현상이라는 글에 나오는 말입니다. 현상만을 믿는 자는 의심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본질을 믿는 사람은 마음이 열리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1-2말씀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내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먼저 기도하였습니다.
다윗은 살아계시는 하나님, 지금 지성소 안에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기도하고,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은 “나의 반석이여”라는 말은 “나의 바위이시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당신의 백성들의 바위, 반석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반석이란 견고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신뢰성과 불변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반석이여’라고 말하기가 송구스럽지만, 히브리적 사고는 결코 추상적이거나 철학적이지 않고,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헬레니즘, 그리스 사고로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추상적이고 고상하게 표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자기의 산성, 요새, 바위, 방패, 구원의 뿔, 나의 깃발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견고한 반석과 같이 완전한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라는 말은 침묵하지 말아달라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귀를 막는다는 말은 침묵을 의미하고, 침묵은 포기나 외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면, 내게 잠잠하시면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다고 합니다. 무덤은 음부요, 지하세계요, 참담한 죽음을 말합니다. 지금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서 기도하는지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고 합니다.
2절에서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주의 성소라고 하였지만, 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지성소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본래 지성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있는 성전의 지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있습니다. 갈급한 심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이 말은 나의 애원의 기도, 탄원의 기도를 들어달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손은 어떤 다른 동물보다 발달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손으로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손을 많이 쓰면 두뇌가 발달된다고 합니다. 손재주가 많은 사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손으로 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 피아노를 잘 치거나,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머리가 발달됩니다. 손에 얽힌 일화들이 아주 많습니다. 다윗은 이 손이 기도하는 기능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손입니다.
딤전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분노와 다툼도 손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다윗이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손을 드는 것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항복한다는 의미로 손을 들었습니다. 손을 든다는 말은 기도한다는 다른 표현입니다.
출17:10-11에서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는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의 손을 들었습니다. 기도의 손이 내려오면 이스라엘이 지니, 어떡합니까? 모세의 기도하는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아론과 훌이 양 옆에서 붙잡아 주었습니다. 우리도 기도의 손이 내려오지 않게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애가3:41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손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어야 합니다.
다윗의 기도하는 내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3절에서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은 새번역으로 보아야 그 의미가 살아납니다. “악인들과 사악한 자들과 함께 나를 싸잡아 내동댕이치지 마십시오. 그들은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지만 마음에는 악을 품고 있습니다.” 악인들과 사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반드시 내치시고 영원한 멸망에 버리십니다. 다윗은 자기를 환난에서 보호해달라고 기도합니다.
4-5절입니다.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다윗은 하나님에게 원수를 갚아달라고 합니다. 저들의 악한 행위를 그대로 갚아주시고, 저의 손이 지은 대로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해달라고 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그런 기도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는 다만 그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5:4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도 사랑할 사람이지, 결코 미워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누구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까?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은 기도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6-7절입니다.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다윗은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였고, 그동안 기도에 응답을 수없이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답답하여 손을 들고 기도하던 다윗을 손을 들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그의 간구하는 기도를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힘과 방패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하늘에 계신 하나님, 그러나 그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우리의 구세주로 내어주신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저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기도하는 내용을 계속 변경하면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을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한번 기도해도 되지만, 구체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소돔성에 살고 있는 롯을 구원하기 위하여 소돔성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그 의인 50명으로 인하여 그 성을 멸하지 말아달라는 하였습니다. 어떻게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을 함께 보실 수 있느냐고 하면서 의인 50명을 보시고 그 성을 멸하지 말아야 달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하기를 아무리 보아도 의인 50명이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45명으로 내려잡아 말씀을 드렸습니다. 40명으로, 30명으로, 다시 20명으로, 마지막에는 의인 10명으로 “주님 노하지 마시고 제가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게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열 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러 나온 사람을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기도가 기도 답지 않으면, 하나님이 감동 주셔서 기도 같은 기도를 하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하는데, 6번 정도 같은 제목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나도 아브라함처럼 6번은 기도하겠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도는 단 한번 기도해도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라면 한 번으로 끝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수정해주십니다. 나는 잘 살기를 바랐는데, 하나님은 나중에 기도하기를 잘 믿기를 기도하게 하십니다.
다윗은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8-9절입니다.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있어 힘이었습니다. 구원의 산성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목자가 되어주시고, 산업에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살아온 모든 날에 하나님은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어주셨습니다. 구원의 산성이 되어 주셨습니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A. W. 토저 목사님이 쓰신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토저 목사님은 이 시대의 선지자라는 말을 듣는 목사입니다.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타협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만 외치고 있습니다. 토저는 학교에서 배운 사람이 아니라, 성령님께 배운 사람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진짜는 험한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진짜는 솜사탕 복음을 거부하고 가시 면류관 복음을 믿는다. 진짜는 주님의 ‘일’보다는 ‘주님’에 우선순위를 둔다. 진짜는 행복보다는 거룩을 열망한다. 진짜는 신앙의 기본에 충실한다. 진짜는 무엇을 믿는가에서 진짜는 유한한 세상을 믿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의 황홀한 임재를 믿는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우정을 믿는다. 진짜는 무엇을 행하는가에서 진짜는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의지 앞에 복종시킨다.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다. 과거의 후회를 버리고 주님과의 교제에 힘쓴다. 성령으로 변화된 인격으로서 봉사한다. 영적 전투에서 불퇴전의 믿음으로 승리한다.
신앙생활은 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롬14:17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의는 거룩, Holy를 의미합니다. 평강은 조화와 평안 harmony입니다. 희락은 행복입니다. Happy입니다. 거룩이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다음으로 조화와 평강, 그리고 행복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동심원 세 개를 그리면 가장 깊은 원에는 거룩이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 조화가 마지막 누리는 것은 행복이어야 합니다. 먼저 거룩해야 합니다. 구별되어야 합니다. 달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시간이 남아돌아 갑니까? 쓸데없는 것 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시고 주님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진짜 예수 믿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것을 감사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짜 예수 믿는 사람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자녀들이 됩시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해주십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고 그 아버지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힘 나의 방패
시편 28:1-9 / 이삼규 목사
시편 28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27편과 같은 주제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본 시편의 배경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쫓기고 있을 때 기록하였다고 성경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합니다. 물론 본 시편이 다윗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큰 환난에서 구출 된 후 당시에 했던 기도를 기억하여 기록했다고도 볼 수 있으나 그 서술된 내용이 너무나도 실제적이고 사실적으로 죽음의 위기에 직면한 급박한 상황에서 쓴 시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는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아 부르짖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 주시리라는 믿음에 찬 확신을 가지고서 그것이 이루어지기 전에 미리 감사를 드립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삶 속에서 우리는 이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욥입니다. 그는 원인을 모르는 재앙으로 인해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적인 삶의 자세를 우리는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즉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붙들고 간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악인들과 공동 운명에서 구해달라는 기도(1-5절)
1)여호와께 불경한 자들이 처할 운명에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시 28:1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아마도 다윗은 무슨 큰 재앙을 당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재앙은 성도들도 알아보지 못하고 모두 다 한꺼번에 멸망으로 몰고 가는 그런 재앙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반석’이라고 부르면서 내 기도를 들어 달라고 끈질기게 기도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반석이라고 비유한 이유는 자신이 험난한 생을 사는 동안 줄곧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이러한 표현은 단순히 그의 경험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합니다.
시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다윗의 이러한 표현은 그가 무엇보다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보호자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무엇에 근거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반석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않고서는 신앙이 결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시편 저자의 주된 관심사는 여호와께서 응답하시지 않으시면 그를 괴롭힌 원수들처럼 그도 죽게 되리라는 점입니다. 1절은 탄식의 서론적 부르짖음으로, 그리고 2-4절은 그에 상응하는 간구로, 5절은 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귀를 막는다는 표현은 그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으면 마치 그분이 기도를 들으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이 말씀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첫째,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외의 우상들에게 기도하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됩니다(참조 신 17:2-5).
둘째, 기도의 응답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기도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결코 그 기도를 들어주시기 않지만 그외의 기도는 모두 응답해 주십니다.
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요일 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셋째, 기도는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편입니다.
살면서 겪게 되는 숱한 난제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해결 방법이 됩니다.
출 15: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출 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삼상 1:27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왕하 19:19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
왕하 19:20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
이런 개념은 후반 절에서 좀 더 진전되어 나타납니다.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여기에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이란 말은 ‘내가 주의 은총의 표적을 얻지 못하면’이라는 뜻이고,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라는 표현은 ‘내게 구원의 소망이 사라져 슬픈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시편 30:3절에서는 반대 개념의 표현이 나타납니다.
시 30:3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그의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 아무 말도 듣지 못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가 진심으로 이것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그의 호소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은 자신의 반석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2)그는 여호와께 악을 행한 자들이 받는 심판에서 자신이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시 28:2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시 28:3 악인과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 그들은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시 28:4 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
불경한 자들은 그들이 했던 행동의 결과로 심판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의인은 그 심판에 끌려들어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는 악인이 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서 ‘지성소’를 향하여 기도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신앙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지성소에 법궤가 있으므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손을 들고 기도했다는 것은 집중하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사 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이처럼 하나님이 외면하시면 인간의 삶은 고통과 절망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절규하신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씀을 음미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르짖었다’는 것은 진지한 자세로 기도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려 가슴이 불붙는 듯한 격렬한 갈망으로 간구했다는 의미입니다.
‘악인과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 여기에서 ‘끌다’라는 말은 ‘마샤크’라는 말인데 ‘뽑아내어 관찰하다’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멸망시키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물에 먹이를 놓아 짐승을 유인하는 수렵자의 행위를 나타내는 데 주로 사용된 말입니다. 따라서 ‘나를 끌지 마소서’라는 말은 악한 자들이 당하게 될 멸망의 운명에 속하지 않게 해달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악인과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행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지만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겉으로는 자기 이웃에게 다정스럽게 대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증오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인은 겉과 속이 다릅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아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3)의인은 하나님이 그분을 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들을 멸하시라는 것을 압니다.
시 28:5 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괴하고 건설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의인은 하나님이 악인들을 심판하시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5절은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실 거라는 확신을 표현합니다. 그들이 심판을 받게 되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생각하다’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이해하다, 인식하다, 분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 것 뿐 아니라, 그들이 여호와께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호소합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하신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그분의 주권적 엄위하심이나 그분의 언약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커크패트릭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신앙고백은 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로, 여호와가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부인하고 창조, 섭리, 심판에서 그분이 하신 일을 분별하기를 거부한다. 불신이 그들이 짓는 모든 죄의 뿌리에 놓여 있다. 여호와의 일과 그분이 하시는 일은 4절에 나오는 그들의 행위 및 그들이 손으로 한 일과 강력한 대조를 이룬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을 무시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손으로 한 일을 무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심판을 받습니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괴하고 건설하지 아니하시리로다’ 누가 그들을 파괴하십니까?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괴하십니다. 다시는 그들이 세움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확신 있는 찬양(6-8절)
1)그는 여호와가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분을 찬양합니다.
시 28:6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시편의 어조는 이제 찬양으로 바뀝니다. 5절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확신의 표현인 찬양입니다. 이 찬양은 “여호와를 찬송함이여”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 다음에 찬송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즉 여호와께서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그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음으로 변화된 것은 분명합니다.
2)그는 여호와가 힘과 보호와 구원을 주실 것을 찬양합니다.
시 28: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 28:8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시편 저자인 다윗은 여호와를 ‘나의 힘과 나의 방패’라고 찬양합니다. 여호와가 그의 힘이라고 단언함으로, 그는 자신의 참된 힘이 여호와에게서 온다고 말합니다.
시 29:1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의 방패’라고 단언합니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호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시편에 나오는 이미지들은 군사적 배경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의뢰하는 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의뢰하는 자는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심오한 기쁨을 체험하게 되며, 언제나 그 입에서는 찬송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 기쁨을 체험한 자들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게 됩니다.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롬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시편 저자인 다윗의 신앙고백이 무엇입니까?
시 28:8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다윗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보호자이시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도와주시기 때문에 반드시 압살롬의 군대를 물리치고 다시 옛날과 같이 평화를 되찾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구원과 인도를 구하는 기도(9절)
시 28:9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다윗은 마지막 결론으로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민족을 위한 기도로 끝마칩니다. 여기에서 다윗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구원해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 백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인구조사를 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적이 있습니다. 그가 군사의 힘을 의지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2)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주의 산업이라는 말은 ‘백성’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이제 여호와의 소유로 그분께 속했음을 의미합니다.
신 4:20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 풀무불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
3)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다윗은 본래 직업이 목자였습니다. 그래서 목자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의 목자가 되어 인도해주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목자(쉐퍼드)이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심판하실 것이지만 자기 백성들에게는 목자가 되셔서 영원토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며 나의 방패이십니다.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그분은 우리의 참된 목자이십니다. 늘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분의 인도를 따라 하루하루를 살아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여호와는 굳건한 반석
시 28:1-9 / 이종철 목사
시인은 여호와를 나의 반석이라 부른다. 이스라엘에는 바위가 많다. 여기서 반석이라 부르는 바위는 단순히 하나의 작은 바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바위산을 말한다. 바위는 오랜 세월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를 지킨다. 모진 풍파에도 변함이 없다. 이는 여호와의 불변하심과 신실하심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지키는 데 신실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그 언약을 성실히 이행하신다. 인간은 환경과 감정에 따라 수시로 변하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한결같다. 하나님은 언제나 든든한 바위 같으신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러하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2천 년 전에 기적을 베푸셨던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동일한 기적을 베푸신다. 팔레스틴 땅에서 상한 갈대와 꺼져가던 심지와 같은 무리들을 사랑하셨던 예수님은 오늘도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찾으신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우리를 구원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바위같이 한결 같으시다면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들의 신앙도 한결 같아야 한다. 한 번 은혜 받았으면 그 은혜를 굳건히 붙잡아야 한다. 한 번 결단했으면 변함없이 그 길을 가야 한다. 바위같이 듬직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가장 필요한 사람도 이 바위 같은 사람들이다. 자기 원칙을 가지고 굳건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다. 집은 반석 위에 세운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듯 이들 반석과 같은 존재들 위에 세운 교회나 직장이나 사회는 결코 무너짐이 없다.
반석이신 하나님께 다윗은 탄원하는 데 두 가지 방식으로 탄원한다. 첫 번째는 부르짖음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1) 문제가 있으면 잠잠하지 말아야 한다. 기도에는 침묵기도와 통성기도가 있다. 침묵기도는 하나님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기도이다. QT 라는 말씀 묵상도 침묵기도의 일종이다. 침묵기도는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게 하며 나의 일방적인 독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잔잔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단점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침묵기도를 드리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마음이 심란해서 묵상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때는 부르짖어야 한다. 부르짖어야 기도에 집중할 수 있다. 위기의 때에는 사생결단하며 하나님의 보좌를 흔드는 기도를 해야 한다. 다윗은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1) “내게 잠잠하지 마소서”(1)하며 부르짖는다. 하나님을 깨우려면 소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다윗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높이 들며 기도한다.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2) 손을 높이 들고 하는 기도는 첫째, 하나님 앞에 자신은 무력한 존재임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둘째, 어떻게든 하늘 보좌에 가까이 하려는 간절함이 담겨 있는 기도이다. 셋째, 하늘에 계신 주를 찬양하는 몸짓이다. 얌전히 기도하지 마라. 다급하면 미친 듯이 기도해야 한다.
두 번째는 찬양이다.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6)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7) 시편은 기도이며 또한 노래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이나 시편을 노래로 불렀다. 찬양을 할 때는 우리 몸과 영과 혼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향하게 된다. 찬양은 자기 기분에 취해 감정적으로 부르지 말고 가사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 큰 기쁨이 임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기도시나 예배 중에 찬양을 부를 때 의례적인 순서 중 하나를 치르듯이 형식적으로 찬양하지 마라. 소리 내어 가사를 생각하며 찬양할 때 우리는 설교보다 더 많은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 찬양이 기도를 열어준다. 찬양이 죽어 있으면 기도가 터지지 않는다. 찬양은 또한 가사를 암기하며 그 가사 하나하나를 묵상하듯 불러야 한다. 그래서 중세 교회나 현대의 떼제 공동체 같은 곳에서는 짧고도 단순한 가사의 노래를 수십 번 반복해서 부른다. 부르다 보면 내 영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젖어드는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시인을 이렇게 간절하게 만든 것은 악인들 때문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평화를 말하지만 속에는 악독이 가득한 자들이다(3). 그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자들이다(5). 곧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과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가 드러내고 있는 신의 영광을 하찮게 여기는 자들이다. 시인이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자기가 이런 악인들과 같은 판단을 받는 것이다.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3). 그것은 억울하기도 하려니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악인들처럼 심판 당하고 악인들처럼 허무하게 망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능력없다 조롱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속히 심판하시길 기도한다.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 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 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4) 하나님은 시인의 기도를 들으셨다.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6)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7) 하나님은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이 행한 악한 일들을 헛수고로 돌리며 파괴하기 시작하셨다(5).
자기에 매어 있던 시인의 기도는 마지막 절에서 이웃을 위한 중보기도로 옮아간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9)
시인이 당하는 고통은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다. 전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고통이다. 시인은 자기가 겪는 고난으로 신음하다 동일한 고난을 겪고 있는 이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올바른 기도가 그렇다. 올바른 기도는 자기 폐쇄성 안에 갇히지 않는다. 자기 문제만 해결되면 그만이라는 식의 이기적 기도가 아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준 주기도문은 개인의 기도가 아니라 공동체의 기도이다. 주기도문에는 ‘나’라는 단어가 없다. ‘우리’라는 단어만 있을 뿐이다. 한글 주기도문에는 모두 여섯 번의 ‘우리’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우리 아버지여”,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그러나 헬라어 원어로는 정확히‘우리’라는 단어가 모두 9번 등장한다. 우리가 주기도문대로 기도하고 주기도문대로 삶을 살았다면 자기 안에는 ‘나’라는 존재 대신 ‘우리’라는 존재가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기도는 이처럼 개인 기도에서 중보 기도로 옮아가야 한다. 개인기도만 드리면 응답이 더디지만 중보기도를 드리면 응답이 빠르다. 하나님께서 그 선한 마음을 보시고 우리가 간구한 것뿐만 아니라 간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속히 응답하시며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기쁩니다
시 28:1-9 / 박조준 목사
오늘 아침 봉독하신 시편은 다윗이 쓴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다윗은 어려움을 많이 겪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그를 지켜 주시는 사실을 체험하고 다윗 은 하나님께 노래한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 속에서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확고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침착하고 평안 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은 어떤 뜻밖의 곤경에 부딪쳐도 당황하거나 겁내지 아니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가운데서 7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보십시다.
시편 28편 7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이 시간 이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우리 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표현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령, 여호와는 나의 힘 이라는 말은 내 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니 라고 하는 말은 외적인 것입니다. 내 마음이 저 를 의지하여 란 말은 내적인 것이고, 내가 도움을 얻었도다 한 것은 외적인 것입니다. 내 마음 이 크게 기뻐하여 란 말은 내적인 표현이고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한 것은 외적인 표현 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시적인 표현입니다. 먼저 부분의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니 라고 한 말씀은 다윗의 확신을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을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두 손으로 구원의 하나님을 받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대로 열두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살짝 잡았는데도 그 무섭고 고생스럽던 병에서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옷자락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붙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그의 힘으로 그의 방패로 붙잡고 있 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오늘 이 아침 다윗처럼 우리의 두손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붙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밤을 맞도록 하나님의 사자를 붙들고 씨름하며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않겠습니다 한 것처럼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이 얼마나 확 신에 찬 말입니까?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니 했습니다. 오늘 주신 시편 속의 나의 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을 주의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여기 나의 라는 말이 얼마나 힘과 확신 과 용기를 더해 줍니까! 여호와는 힘과 방패시니 라고 말해도 됩니다. 진리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다윗의 유명한 시편 중에 23편을 우리가 잘 압니다. 거기 보아도 여호와는 나 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한 목자가 아닙니다. 여 호와가 나의 목자로 나와 상관이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될 때에 야만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힘이 되실 때에 내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경험으로 성숙해지고, 약속에 의해서 힘을 얻게 되며 성령에 의해서 생기를 되찾게 되 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믿음을 주관하심과 동시에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매사에 열심을 내게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게 합니다. 그래서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여호 와는 나의 힘과 방패시니 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 말씀을 끝까지 지킬 수 있도록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꼭 받아야 합니다. 사실 성령의 도 우심이 없으면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은 나에게 다시 말해서 우리 각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나의 힘과 나의 방패 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의 눈을 빛나게 하며, 새롭게 하며, 영혼을 소생시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힘과 방패가 되는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존하였을 때 우리는 담대하게 여호와는 나의 힘과 방패시라 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인류의 적인 죽음도 두렵지 아니합니다. 더구나 영원한 나라의 기업을 바라보며 대담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을는지는 몰라도 그가 받을 영원한 기업은 지극히 큰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 사람 이 그 사람이 아주 약해 보일는지 몰라도 그 사람이야말로 지극히 강한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 이 아무 것도 갖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사실 그 사람은 모든 것을 풍성하게 소유 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6장 7절 이하에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서 ...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 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힘과 방패로 삼고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실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 이시라 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에 대하여 자부 심을 가지십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것이다 고 말합니까? 그 세상 불타 버릴 때 그것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우리가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고 말할 수 있을 때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이 나의 것이라 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에게는 무한한 축복이 임하 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때 그 이상 나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분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서 다윗은 상징적인 내용으로 자신의 경험을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게 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좋으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를 수 없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 까? 좋으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니 내면적으로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십니다.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힘이 있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강합니까? 사실 우리는 모두가 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문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해서 고민하는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철학자 럿셀이 말한 대로 사람은 우주를 정복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자신 을 하나도 조정하지 못하는 미약한 존재 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고 말할 수 있 다면 우리는 지극히 강한 사람입니다. 무엇과 싸워도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주어집 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대로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 니라 입니다. 우리가 이기는 것은 우리의 힘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입니 다. 우리는 본질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일과 그것을 자백하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을 때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모두가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착각하지 맙시다. 우리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 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고백했는데 바꿔 말하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밖에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 니 라는 말을 하게 될 때 나약한 자신은 간 곳 없고 강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 큰 용기를 갖다 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 되실 때 우리는 모든 어려움을 참을 수 있는 인내심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그처럼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어떻게 그처럼 잘 감당해 나갈 수가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저희의 힘이 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힘을 얻어 강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우리 앞에 닥친다 하여도 우리는 능히 견딜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 되시면 삼손과 같이 사자를 죽일 수가 있고 그 안에서 꿀을 찾아 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수한 일을 부여하실 때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부여하여 주십니 다. 자갈길을 걸어가라 명하시는 주님께서는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신발까지 주신다 는 말은 의미 깊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어려운 환경에 처할 때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답변은 완전히 다릅니 다 내가 네 입과 같이 있고 너의 힘이 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강하게 하시면 우리가 감당치 못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대로 우리 자신의 힘을 자랑하지 맙시다. 육신의 힘, 권세의 힘, 지식의 힘, 돈의 힘을 자랑하지 맙시다.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삼손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이 힘을 주실 때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당할 수 없을 정도로 놀 라운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떠나실 때 그에게 비극이 닥쳐왔습니다. 눈이 뽑혔습니다. 지혜를 잃었습니다. 근육에 힘이 없고 마음에 맥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능력의 원 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어야 그 힘이 강해지고 강한 지혜가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방패로 삼을 때 순간 순간 우리에게 날라오는 시험의 화살에서 지켜 주시고 두려움을 주는 공포의 화살도 막아 주십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나의 방패가 되실 때 모든 환난에서부터 내가 보호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하나님을 나의 방패로 삼을 때 절대로 안전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라. 이 말씀은 참으로 우리에게 용기와 담력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분 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 때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의 원수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고 해도, 택한 자라고 하더라도 될 수 있는 대로 미혹하려는 공격의 화살을 퍼붓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나의 방패시므로 그러한 공격에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날 시인은 노래했습니다.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 하 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오. 인생의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주께서 주시는 힘으로 걸어가고, 주님의 방패로 원수의 도전을 막으며, 승리적인 인생 길을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윗은,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만 신뢰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라는 말은 입술만의 고백이 아니라 강한 확신과 신념을 가지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단호한 결심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지극히 어려운 환경,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도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합니다 고 말할 수 있을 때 당황하 거나 초조해 하지 아니하고 침착하게 감당해 나아가게 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신뢰할 때 영적으로 불안해 지고 전혀 아무런 힘이 없어지 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8편 8절에,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낫다. 고 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다가는 실망할 때가 생 기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면 우리의 기대하는 것 이상의 확신과 풍성함을 가지게 해줍니다.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했습니다. 도움을 얻을 것이라 고 말하지 않았습니 다. 나는 도움을 얻었도다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기도했으면 받은 줄로 믿으라 고 습니 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기 전에는 내 자신이 약한 자와 같이 보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 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시고 그를 의지하므로 내가 도움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일은 약속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어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두 축복하셔서 오늘 아침 이 자리에 나오신 한 분 한 분이 다 내 마음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시고 이런 고백을 하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고 했습니다. 마음이 기뻐하는 것은 내적인 감정이요, 노래로 저를 찬송하는 것은 내적 감정에 대한 외부적 인 표현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란 피상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쁨이 아닙니다. 참신앙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 아홉가지 중에 두 번째가 기쁨입니다. 이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오는 기쁨입니다.참된 기쁨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 고 했습니다. 슬퍼하는 마음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듭 니다. 사람을 피곤하게 합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줍니다. 기뻐하는 생 활이야말로 능력있는 생활의 비결이 됩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지 기쁜 마음으로 하면 힘든 것을 모릅니다. 우리가 이처럼 어려움이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마음에 기쁨이 있어야 이 모든 역경을 극복 하고 곤란을 이기며 어려움을 참아 어두움이 변하여 밝은 날이 되게 할 것입니다. 전에 영국에 재치와 농담으로 유명했던 카리니라는 코미디언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많은 청중에게 웃음을 선사하곤 했었습니다. 그가 나서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아무리 성격이 무뚝뚝해 서 웃음을 모르던 사람도 웃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엔 기쁨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웃기면서도 자신은 심각한 병이 들었 습니다. 그는 유명한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서 진찰을 받았습니다. 긴 시간 환자와 상담을 한 의 사는 환자인 카리니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의 병은 마음속으로부터 우울한 것이 축적이 되어서 그럽니다. 그러니까 한번 정말 기쁜 마음으로 웃을 수 있다면 그 병은 낫겠는데요.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이 병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예, 요사이 우리 나라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 해서 남을 웃기는 그 유명한 카리니를 아시 지요? 예! 그분의 코미디를 한번 들어보세요. 그분이 못하면 누구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때 카리니가 의사에게 선생님, 제가 바로 카리니인데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우울한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기쁩니다 고 고백했습니 다.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출 정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때 누리는 축복 입니다. 아무리 주위 환경이 어둡다고 해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했습니다. 그가 어디서 이런 글을 썼어요? 감옥 안에서였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주님을 의지할 때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기쁨이 있을 때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찬송을 부를 때는 영감있게 그리고 열심 히 부르라. 그래야 합니다. 큰 소리로 찬송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은 영감있는 찬송이 기 때문에 더욱 담대하게 불러야 합니다. 일할 때 찬송을 부르면 힘든 것을 잊어버립니다. 우울 할 때 찬송을 부르면 우울증이 도망갑니다. 찬송 부르는 것처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그리고 이 방송을 들으시는 여러분, 마음 속에 주님께로부터 임하는 기쁨이 충만해서 주님을 향한 찬송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주를 찬송하리로다.
내가 주를 찬송하리라
시 28:1-9 / 박조준 목사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오늘 본문 가운데서 7절 말씀을 다시 봉독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 마치 치열한 전쟁터에서 자신의 위치를 상실한 채 조용히 앉아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 있는 한 병사를 연상하게 됩니다. 무서운 대포 소리가 땅을 진동하고 여 기 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려오지만 이 사람은 혼자서 독백을 합니다.
치열한 싸움도 잊은 듯, 자기 나름대로 기쁨의 승리만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나약함은 알고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승리는 자기 편이라고 확신하고 있습 니다. 무시무시한 전쟁터이지만 조금도 떠는 모습은 엿볼 수 없고, 침착하고 장중한 그러면서 태연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이처럼 담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 그 병사가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전쟁의 와중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였을 때 평강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떤 의미에서는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업하시는 분의 말 씀을 들으면 사업이라기보다 전쟁이라고 합니다. 공부하는 학생도 경쟁이 지나쳐 전쟁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신앙 생활을 하는 것도 마귀와의 전쟁인 것입 니다.이 시간 우리의 싸움터에서 잠시 눈을 돌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신 본문은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제 하나씩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 기를 바랍니다.
1. 성도의 확신입니다.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되시니 했습니다. 다윗은 이중으로 하나 님의 언약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의 라는 말이 두 번씩 나옵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두 손으로 받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다윗은 두 손으로 하나님을 붙들고 있습니다. 물론 손 끝으로 만 만져도 우리가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꽉 붙잡았던 것처럼 우리의 이 두 손으로 하나님을 꽉 붙잡아야 합니 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시면 가게 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확신이 필요합니다. 손 끝으로 만지작거리지만 마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의 두 손으로 하나님을 꽉 붙들어야 합니다. 바울을 보 세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이런 확신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확 신이 있습니까? 그리고 여기 나의 힘, 나의 방패 라는 데를 주의해 보세요. 물론 그저 여호와는 힘과 방패시 니 라는 말씀도 진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됩니까? 나의 힘 이 되고 나의 방패가 될 때 나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경험으로 성숙해지고 약속에 의해서 힘을 얻게 되며 성령에 의해서 생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우리 마음에 확신을 주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무슨 말씀입니까?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나의 힘이시고 나 의 방패란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확신적인 신앙에서만 가 능한 일입니다. 비록 두 마디에 불과하지마는 시세로(Cicero)의 웅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장엄한 맛을 갖게 해 줍니다. 여러분, 피타고라스(Phthagoras)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또 는 소크라테스(Socrates)의 철학에서 오늘 본문이 주는 말씀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전 혀 비교도 안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일에 부족함이 없습 니다. 세상 사람 볼 때 약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야말로 지극히 강한 사람입니다. 자신 이 아무 것도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 보일지 모르나 그 사람이야말로 모든 것을 풍성히 가진 사 람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사람처럼 이 세상에서 축복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확신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과연 여러분의 아니 나의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면 어떤 축복이 됩니까? 내적인 면으로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여 호와는 나의 힘이 되시니 하였습니다. 보통 우리가 나는 약합니다. 하고 스스로 평가합니다. 그 러나 사실은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보다 나는 더 약한 사람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약한 것을 인정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나의 힘이 되시니 이런 확신을 가지게 될 때, 우리 자신이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강해 집니다. 왜요? 하나님의 힘이 나의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고 확신을 가지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이런 말 을 하였다면 전에 나폴레옹 이상 교만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을 심방하러 갔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나 흘 전에 열 두 살 난 맏아들이 수영을 하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나 장례를 치르고 돌 아온 젊은 어머니가 입원해 계신 집사님을 병문안 왔습니다. 그러면서 그 어머니가 아직도 피곤 해 보이는데도 저는 이번 일로 인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어요 하는 간증을 하시는 것을 듣고 감 격스러웠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슬픔을 이길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의 힘 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습니까? 여러분의 재산이 다 없어 지고 말았습니까? 무서운 중상모략의 상처를 당하셨습니까? 친구의 배신을 당하셨습니까? 여러 분,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시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시는 것을 확신하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다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은 나의 방패가 되신다 고 하였습 니다. 과거를 회상하여 볼 때 이 말씀이 우리에게도 얼마나 사실인 것을 동감하실 분이 많이 계 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시험과 마귀의 유혹에서 우리를 보호하여 주셨고 매일 매일 날아오는 모든 화살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신 방패이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니. 정말 우리 에게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겁내지 아니하고 담대히 살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방패시니, 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인생의 순례길을 가시는 동안 이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2. 성도의 경험입니다.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했습니다. 여기서도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을 볼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란 말씀은 우리 심령 안에서 이루 어진 것을 표현할 말씀이고 도움을 얻었도다 란 말씀은 구체적으로 받은 은혜를 공개하는 것입 니다. 내 마음의 저를 의지하여 라는 말씀은 단호한 결심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여러분, 우리 는 종종 입으로만 신조를 고백하며 믿사오며 믿사오니 합니다. 사실 이것은 의미가 없는 일입니 다. 그 마음이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는 믿음이 있을 때에 참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만이 마음의 평강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여유있는 자세를 가지고 동요없이 용기있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십니까? 그러면 담대하게 사 실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것, 사람을 의지할 때 그것 따라 요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 지하면 요동하지 않고, 우뚝 솟은 바위처럼 튼튼히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시편 118편 8절에 여 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하였습니다. 사람을 신뢰하면 실망할 때도 있으나, 하 나님을 마음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우리의 기대 이상 확신과 풍성함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내가 도움을 얻었도다 하였습니다. 내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외적으 로 도움을 얻은 경험의 간증입니다. 확신이 넘치는 자세에게만이 이러한 신앙고백이 가능한 것 입니다. 믿음을 떠나서 다른 것을 의지하였을 때 내가 속임을 당하였도다 할 수밖에 없을 것입 니다. 혹은 내가 속은 것은 아니나 그가 나를 도우려 하였어도 돕지 못하였도다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러므로 약속하셨으면 약속하신 대로 꼭 지키십니 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체험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마음으로 의지하여 도움을 받으셨습니까? 신 앙생활에 가장 필요한 것은 경험입니다.
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우왕좌왕하는지 아십니 까? 아직도 진리에 대한 내적인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 다.사람이 자기가 경험한 은혜를 표현은 할 수 없다고 하여도 그것을 스스로 간직할 수는 있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식이란 체험을 통한 지식을 말합니다. 체험을 통한 지식을 전하는 것처럼 강한 힘을 가진 것은 없습니다.
3. 성도의 감격입니다.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본문 이 말씀합니다. 여기서도 두 가지 면을 발견하게 되는데 내적으로는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외적으로는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하였습니다. 물론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도 기뻐하 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사람들도 기쁨이요, 웃음입니다. 입에는 웃음이 있는 것 같으나 그 속 마음은 슬픔으로 차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사이는 남을 웃게 하는 코메디언 들이 인기가 있습니다.그러나 그렇게 웃음을 갖게 하는 사람도 자기 자신은 위로하지 못합니다. 전에 영국의 유명한 코메디언 카리니(Carline)는 남을 웃기는 명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남은 웃기게 하였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서 우울한 마음과 절망적인 의식에 사로 잡혀 그를 알지 못하는 어느 의사에게 찾아 갔습니다. 의사는 여러 방면으로 진찰을 하다가 선 생님께서는 특별한 몸의 병은 없어 보입니다. 그저 정신적인 우울증에 걸렸는데 저는 아직 그분 을 만나보진 못했습니다만 우리 나라에서는 남을 잘 웃기는 사람이 카리니라고 하는데 그런 분 이 공연하는데 종종 가셔서 좀 많이 웃으면 선생님의 우울증이 가시게 될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카리니는 퍽 낙심된 표정으로 의사에게 그래요, 선생님. 바로 제가 카리니입니다 고 답변하였습 니다.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이것이 세상에서 보통 있는 일입니다. 자신은 우울한 사람이면서도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한다 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런 사람의 입에는 여름철 같은 미소가 있으나, 마음에는 겨울 철과 같은 설풍(雪風)으로 얼어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마음이 크게 기뻐합니다. 넘치는 기쁨의 표현입니다.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출 정도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이런 기쁨이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거기서 찬송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참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바울과 실라를 보세요. 빌립보에서 억울하게 매를 맞고 착고에 채워 감옥 깊은 곳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이 그들의 기쁨을 빼앗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밤중에 기도 하고 찬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속으로만 한 것 아니고 남들이 다 들을 정도로 찬송하였다고 하 였습니다. 여러분, 영혼이 만족한 기쁨이 가지게 될 때 이런 놀라운 일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느끼실 때 찬송하세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찬송하세요. 이것이 자연 스러운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유행가를 그렇게 열심히 부르는데 우리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찬송을 열심히 부릅니까? 지금 부르는 찬송으로 만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언제나 찬송을 부르 세요. 성도가 함께 모이시면 다른 사람의 흉보는 이야기하지 마시고 찬송 부르세요. 우리 교회 에서는 매월 첫 주일 저녁에는 온 교우 합창의 밤으로 찬송을 부르는데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 니다. 우리 영락 교인들은 모이면 4부로 찬송을 합창하십시오. 집에서 일을 하면서도 찬송하세 요. 장사를 하면서도 찬송하세요.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 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귀합니까! 저는 고전음악 을 듣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기뻐서 찬송하는 노래는 더욱 듣기 좋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마음으로 의지하여 힘을 얻으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방패로 삼아 그 의 능력을 체험하므로 감격한 가운데 마음이 크게 기뻐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찬송을 힘차게 불러 이 제물이 상달되게 하십시오. 주를 찬송하면 피곤, 지루함, 고난 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주님을 찬송할 수 있는 은 혜를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음의 병을고치는 길
시 28:1-9 / 김진호 목사
지난 9월4일 서울 군자동에 있는 모 교회 어린이 선교원 식당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53세 된 황법래란 사람이 교회식당에 들어가 어린아이들이 밥을 먹고 있는데 식당에서 쓰는 칼로 어린이 11명을 마구 찔러서 중상에 처한 끔찍한 사건이 TV와 신문에 크게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경찰이 달려가 범인을 잡고 보니 그는 정신질환자 였다는 것입니다. 어제 뉴스에도 이런 정신질환자가 사람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신적 병든 자가 많이 있습니다.
성인 76명에게 앙케이트 조사를 해보았는데 그 중에 42명이 입원해 본 경험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통계는 우리 중에 60%는 언제나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 아니면 병원 치료를 했다는 통계보고 이었습니다.
이토록 인간의 삶 속에 질병은 필수적으로 따라 다니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병에는 육체적 질병만 병이 아닙니다. 어느 면에선 정신적인 병 마음의 병이 더 무섭고 고치기 힘든 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병이 가정을 병들게 합니다. 사회가 병들고 나라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나라 이 사회에는 어느 곳 하나 건강한 곳 없이 중병을 앓고 있는데 우리 모두 걱정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퍽 오래 전에 부흥회를 간 곳이 인천 앞 바다에 있는 대부도란 섬 교회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부도가 섬이 아니라 육지와 섬 사이에 제방 뚝을 해서 섬이 육지가 되었습니다. 배로만 교통수단이었던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 자동차가 그대로 대부도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참 편리해졌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섬이 육지가 되면서 땅값이 오르더니 가난한 섬이 부유해지면서 순박한 섬에 다방과 술집이 늘어나면서 섬사람들이 타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둑이 들어와서 이제 문을 잠가야 되고 불안해졌다는 것입니다. 대부도도 영적으로 병들어가고 있음을 그 곳 분들이 염려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인간세상만이 병든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물이 병들고 공기가 병들고 땅이 병들고 있습니다. 병에는 특유한 성질이 있는데 자주 번져가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신성해야 될 교회마저 이 병이 들어와 교회마저도 병들어 가는 교회가 자꾸 늘어가고 있습니다.
병은 인류의 적입니다. 병은 사단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병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많은 병든 자를 그 병에서 고쳐 주셨고 마 8:17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체적 질병도 우리를 파괴시키고 좀먹지만 더 무섭고 경계해야될 병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의 병입니다. 마음의 병 정신의 병 영혼의 병은 육체적 병보다 더 고치기 어렵고 우리의 영과 육을 죽게하는 더 무서운 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사들의 말을 빌리면 육체의 질병도 70%는 마음의 병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고치면 육체의 병도 고쳐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병은 안 고치고 육체의 병만 고치는데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의사가 환자를 진찰했더니 암 환자임이 판명되었습니다. 의사의 진단으로는 6개월 정도는 더 살수가 있는데 가족 중에 한가족이 이 사실을 환자에게 말하게 되자 환자 자신이 충격을 받고 나서 이틀 후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암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만 낙심과 절망에 빠지더니 그대로 죽고 만 것입니다. 암 자체도 무섭지만 낙심과 절망이라는 마음의 병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잠 4:20에는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속을 지키라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 14:30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고 했고 잠언 17:20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적극적 사고 방식을 강조한 미국의 노르만 빈센트 필 박사는 "모든 문제는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고 단언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병든 마음은 개인도 가정도 사회도 병들어 가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병은 육체의 병보다 훨씬 더 무섭고 인류를 파멸시키는 최대의 적입니다.
지금 전세계적으로 늘어가고 있는 무서운 에이즈 병도 따지고 보면 인간의 마음의 타락에서 오는 성적문란에서 온 하나님의 심판의 병이 된 것입니다.
노아 시대 소돔성이 육체적인 유행병으로 망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병 영혼의 병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만 것입니다. 사실 육체의 병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때때로 우리의 인격을 유익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자 루터는 "만일 우리가 언제나 건강하다면 거만하게 될 것이다 육체의 병은 겸손을 배워 주는 가장 훌륭한 스승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병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육체의 병을 치료하는데는 수천 가지 수만 가지로 치료약이 연구되어 쏟아져 나오는데 마음의 병을 고치는 약은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의 심리학자들이 마음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상담도 해보고 독서도 하게 하고 음악감상도 시켜보고 취미활동도 장려해보나 이것으로 마음의 병이 고쳐질 수가 없습니다. 욕심의 병을 고치는 약이 있습니까? 불안한 병을 고치는 약이 있습니까? 절망의 병을 고치는 특효약이 있습니까? 미움과 시기의 마음의 병을 고치는 약이 없습니다. 혈기의 병, 불만의 병, 분노의 병, 의심의 병을, 의처증, 의붓증 고치는 약이 없습니다.
세상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청년 다윗을 시기하다가 마음의 깊은 병이 들었습니다. 처음엔 음악을 통해서 시기와 불안과 초조의 악신의 병을 고쳐 본다고 했으나 결국 고치지 못하고 미치기까지 하다가 그 병으로 최후를 비참하게 마치고 말았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성도 여러분들 중에 육체는 멀쩡해도 마음의 병과 영혼의 병들지 않은 분이 있습니까? 우리 모두 마음의 병든 자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육과 마음의 모든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왔습니다. 우리는 겸손히 우리의 병든 것을 그대로 내놓고 만병의 의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고침 받으시기를 네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로,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약은 믿음이라는 약입니다.
요일 5:4에 "세상을 이길 이김은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말했고 요14:1에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으며 마11:28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깨어질 때 마음의 병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시28:7 이후를 보면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 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여 내 노래로 저를 찬양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노래하고 기뻐하는 마음은 건강한 마음인데 이런 건강한 모습은 오직 여호와가 나의 힘이 되시고 나의 방패가 되심을 믿고 의지할 때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보세요!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믿음이 곧 모든 병을 고치는 약이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병도 믿음으로 고치셨다면 마음의 병도 믿음으로만 고침이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인간 마음의 병과 상처를 고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속에 있는 마음의 병들은 모두가 사람을 통해서 인간 관계속에서 상처받고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앓고 있는 마음의 병들의 시작은 모두가 인간 관계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힘으로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만 고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체험하는 행위입니다. 내 속에 믿음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의지하고 깨닫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고 계심을 깨닫고 믿어지는 순간 인간으로부터 상처받은 마음의 병이 치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내 속에 있는 심령의 병들을 깨끗이 고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마음의 병은 신약과 구약인 하나님 말씀으로 고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챨스 알렌 목사님이 쓴「하나님의 치료법」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알렌 목사님은 신, 구약 중 네 군데를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시23: 십계명, 주기도문과 산상수훈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이 네 곳의 말씀을 통해서 마음의 병을 치료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 속에 어떤 회사사원이 크게 출세해서 전무까지 됨, 그때부터 방탕하기 시작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다 병들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불면증에 시달려 매일 술로 잠을 청하고 이젠 직장도 나가지 못해 사직을 강요당하고 자살직전에 교회 문을 두드렸다는 것입니다. 알렌 목사님이 그를 기도해주고 성경을 읽으라고 너무 어려우니깐 시23:을 매일 다섯 번씩 읽고 생각하고 묵상하라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수개월을 했습니다.
시23: 말씀이 믿어지면서 이상하게도 세상 것은 다 분토 처럼 여겨지고 마음의 평온이 왔습니다.
잠도 자게되며 마음이 치료되면서 그의 육체도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히4:12말씀대로 성경은 살아있고 말씀이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요 우리의 병든 것을 쪼개서 고치시는 말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매 금요집회시 여호수아서 강해에 시작되었습니다. 심령의 병든 자들 다나와서 이 말씀 듣고 배우다가 고침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유명한 민주주의 법을 만든 재퍼슨이란분은 만약에 인류역사에 성경이 없었다면 벌써 인류역사는 망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건설하고 치료하고 고치는 힘이 있습니다.
오직 주의 말씀으로 마음의 못된 병들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약은 용서라는 약이 있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위대한 약입니다.
잠 19:11"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용서라는 약을 통해 수많은 심령의 병든자등을 고쳐주셔서 건강한 새 사람을 과거에도 지금도 계속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미 주님의 용서라는 약 때문에 심령의 병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이렇게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내가 너희들을 용서의 약으로 너희들을 고쳐 준 것처럼 너희는 다름 사람을 용서하는 약을 베풀어서 고쳐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코리텐붐이라는 여성 전도자의 간증이 있습니다. 캐토릭에 성녀가 테레사 수녀라면 개신교의 성녀는 코리텐붐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 여인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정권의 미움을 사서 수용소에서 갖은 고문을 당했다. 그곳에서 양친을 다 잃어버리고 형제도 죽고 자기만 간신히 살아남게 되었다. 그후 신학을 공부하여 여성 전도자가 되어 전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원수의 나라인 독일 가서도 복음을 전할 기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날의 악몽을 잊어버리고 가서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데 독일사람들이 회개하고 새로워짐 -
많은 분들이 찾아와서 코리테붐에게 악수를 청하였는데 한남자가 그 앞에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자기 가족을 몰살시키고 자기 몸을 벗겨놓고 고문한 그 사람이 서있더라는 것 분노와 미움이 생기면서 주여 저 사람을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내가 날 죽인 자도 용서했는데 네가 어찌 용서 할 수없느냐 하는 음성이 들리면서 코리테붐 전도자가 그 늙은 남자를 확 껴안고 당신이 날 고문했고 내 가족을 죽인 자지만 난 지금 당신을 용서하고 사랑한다고 악수할 때 이 내용이 독일신문에 실리면서 코리텐붐 여사를 성녀라고 부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존경받고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가족을 용서하세요 이웃을 용서하세요 원수까지도 용서하면 내 병도 낫고 남의 병도 고쳐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용서의 약이 최고의 약입니다.
넷째로 마음의 병은 회개라는 약을 먹어야 고칠 수 있습니다.
죄는 모든 병의 시작이요 원인입니다. 용서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약이라면 회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치료의 약입니다. 지금 내 가정 내 교회 내 사회를 좀 먹고 깊은 병속으로 몰아가는 모든 원인이 되 때문입니다.
약1:15에"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시38편에"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했으며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라고 시편의 기자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임금이 죄로 인해 마음에 깊이 병들었을 때 시51:17"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일1:9에는 "우리가 우리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회개가 내 심령의 병을 고칠 수 있는 특효약입니다.
많은 심령의 병든 자들이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앞에 나와서 회개라는 약을 통해서 고침받고 건강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건강한자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병든자에게 의사가 있어야 되듯이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오셨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사마리아 여인이 세리장 삭케오가 모든 하나님앞에서 회개함으로 불안과 공포와 타락의 길에서 고침받고 새사람 건강한 인생들이 되었습니다.
옛날엔 체하면 소금먹고 한번 토해내면 고쳤다
우리모두 내속에 더러운 죄악들을 주께 다 토해 냅시다.
회개는 죄를 토해내는 작업입니다.
회개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참 용서를 받고 마음의 기쁨과 평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모두 병든자들입니다. 심령의 병, 육체의 병에서 고침받기위하여 믿음이란 약과 말씀이라는 약과 용서와 회개라는 약으로 치료받아 건강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줄, 생명죽
시 28:1-9 / 오정호 목사
한사람의 영향력을 결정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 입니다. 성경전체를 볼 때 한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긍정적이며 창조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태도, 자세에 따라 결정됩니다. 예수를 믿어도 태도가 올바르지 않으면 좋은 영향력을 미칠 수 없습니다. 교회도 동일합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두 교회가 주님께 칭찬받은 이유는 하나님과 복음에 대해서 분명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곳이어야 합니다. 칼 메닝거(Karl Menninger) 라는 정신의학자는 “태도는 사실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Attitude is more important than fact)"라고 말했습니다. 얼굴색깔, 남녀, 국적보다 태도에 따라 그 사람의 영향력이 결정됩니다. 예수를 믿은 연수(年數)가 아니라 예수 믿고 난 후의 태도(態度)가 우리의 영향력을 결정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은 가치체계(value system)에 따라 결정됩니다. 어떤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느냐 하는 것이 바로 가치관의 핵심입니다. 오늘날에는 ‘일 중심’에서 ‘건강 중심’으로 가치체계가 변화되었습니다. 일보다 시간적 여유를 즐기는 모습으로 변하였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주5일 근무제가 오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습니까? 교회 다니는 것은 성경적인 가치체계를 소유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시대가 달라지면 가치체계도 달라지지만 성경적인 가치체계는 영원히 변함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브리서 13:8). 주님만이 우리 삶의 참된 가치가 되십니다.
그럼, 성경적인 태도와 가치체계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① 말씀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머리로만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던져서 말씀대로 사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가 붙잡아야 할 최고의 것입니다. 성경을 눈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올려놓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② 기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자신을 성찰할 때 우리는 자신을 교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인생의 구조조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몇 가지 삶의 원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성도의 위기의식이 기도줄을 잡게 합니다(1-2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1절). 성도가 거룩한 위기의식이 없다면, 적당하게 살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성도의 건강한 위기의식이 실종된 듯 보입니다.
건강한 위기의식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삶의 각성제가 됩니다. 내 삶을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 가정이 할 수 있는 최선이 이것인지에 관한 위기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거룩한 갈등 속의 위기의식을 통해서 우리는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요즘 유비쿼터스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게 우리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유비쿼터스(Ubiquitus)는 "언제든지(Anytime) 어디서든지(Anywhere)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기술 혹은 서비스체계"를 의미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재해석된 유비쿼터스가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위기의식은 불신앙의 표현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위기의식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생각하게 하고, 자신을 새롭게 추스르는 기회로 만듭니다. 영적 재무장과 재정비를 이루어냅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구조를 만듭시다.
요즘 정보 기술(IT/Information Technology)이라든지 생명공학(BT/Bio Technology)이 중요하게 대두되지만 이것이 우리의 영적 자질과 아름다운 삶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기도공학(PT/Prayer Technology)이 우리 삶에 늘 확인될 때 그의 삶의 현장에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을 두려워하는 영적인 위기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겨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2절). 이 영적 위기의식으로 인해 다윗은 낭패로 빠뜨리는 삶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교제회복의 기회로 전환시켰습니다. 위기의식을 사람과 하나님에 대한 불평의 기회로 삼으면 유익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위기의식을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회로 삼으면 하나님께서 합당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둘째, 성도의 기도줄은 하나님의 응답과 맞닿아 있습니다(6-8절).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6절). 다윗의 간절한 기도에 대해 하나님은 응답해 주셨습니다. 기도는 생명의 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를 연결시켜주고, 하나님의 응답이 나에게 구체적으로 와 닿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라는 놀라운 특권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기도 없이는 응답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간절하게 눈물을 가지고 당신께 나아가는 자에게 기도하는 삶의 중요성을 늘 깨우쳐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수준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내 마음의 소원과 간구에 구체적으로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데까지 나아가야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7절). 밋밋하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좀 더 역동적으로 힘차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생명줄인 기도줄로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의 삶이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삶으로 점점 변할 것입니다.
셋째, 말씀을 통해 인생의 바다에 기도의 함대를 띄웁시다!
미래의 우리나라, 가정과 자신을 위해 기도의 함대를 띄워야 합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수 없듯 지금 기도하지 않으면 내일에는 거둘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영적 파종과 추수의 법칙’입니다. 지금 우리가 기도로 눈물뿌리지 않으면 응답의 단을 거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가을에 허락하신 특새(특별새벽부흥회)는 기도의 함대를 띄울 수 있는 놓칠 수 없는 기회입니다. 다함께, 동일한 열정으로 참여합시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과거 우리가 뿌린 것을 거두는 작업일 뿐입니다. 교회와 민족의 미래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금 기도의 씨앗을 뿌려야 됩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뿌려야 됩니다.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 라는 스위스 출신의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면서 탁월한 정신의학자는“평신도로서의 우리의 과제는 예수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교제의 삶을 아주 강렬하게 살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예수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삶을 강력하게 살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성도의 참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새로남 믿음의 가족 여러분,
사명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새벽에 주님을 알현하고, 주님께서 주신 힘을 가지고 하루를 역동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두려워하는 영적인 위기의식을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회로 삼아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겨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생명줄인 기도줄로 늘 연결되어 내 마음의 소원과 간구에 구체적으로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데까지 나아갑시다. 교회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 오늘 기도의 씨앗을 뿌리고, 기도와 말씀을 통해 성경적인 가치체계를 확립하고 예수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삶을 강력하게 살아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복된 삶을 삽시다.
당신의 기도줄은 견고합니까?
당신의 생명줄은 무엇입니까?
특새(특별새벽기도회) 명구
1. 기도가 가는 곳으로 인생이 간다.
2. 당신의 인생을 주님께서 연주하게 하라!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가 될 것이다.
3. 사람 앞에 손들면 주눅들지만
하나님 앞에 손들면 한없는 은혜 받는다.
4. 내 영혼의 화덕에 기도의 산소를 공급하라.
5. 새벽을 정복하면 세상을 정복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시 28:3-7 / 김경향 목사
3절: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조직이나 단체나 국가적으로 ‘화평하자. 평화하자’ 라고 하고, 우리나라처럼 서로가 원수 된 나라일수록 더욱 그러고 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화평하자고 할 때는 한 마디로 항상 ‘내 편으로 와서 화평하자’ 이렇게 말을 한다. 이런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화평은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고 타락된 기준으로 말을 하는 화평이다.
인간들은 ‘나에게로 와야 화평이라’고 하는데, 가만 생각해 볼 때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기는 쪽,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붙느냐, 아니면 지는 쪽, 불리한 쪽으로 붙느냐? 유리한 쪽, 이기는 쪽으로 붙는다. ‘내가 이쪽으로 붙어야 나에게 유익이 있겠구나’ 이런 식으로 되어있다. 어느 누가 힘없고, 아무 것도 없고, 권세도 없고, 가난한 쪽에 붙으려고 하겠느냐? 다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쪽으로 붙는다. 이건 일반세상에서 아예 상식화 된 거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그 쪽으로 붙으면 그게 얼마나 오래 갈 것이며, 자기의 행복이 얼마나 보장될 것인가?
인간들은 다 자기 쪽으로 유리하도록 ‘화평. 화평’ 한다. 하나님도 화평을 원하시는데 그 원하심이 인간은 죽어도 좋고, 불행해져도 좋고 하나님 당신만 좋도록 하는 화평을 원하는 건지? 그래야 만이 당신이 영광을 받고 좋다 그 말인지, 아니면 인간 나에게 영원히 영광스럽고 존귀하고 행복하게 해 주시려고 하나님 당신 쪽으로 오라는 그 말인지? 그래야 인간 네가 영원히 존귀 영광자가 되고 행복하게 된다 이건지? 어느 쪽 화평인지 판단이 되느냐?
그런가 하면 화평도 요사스런 게 많다. 무슨 말인가 하니 마귀가 거짓 종들의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화평과 비슷한 수단을 쓰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차원인 위에서 볼 때는 분명히 목사가 거짓 종임에도 인간은 인간차원에서 위로 보기 때문에 그걸 잘 모른다. 그래서 거짓 종이 예수이름을 가지고 교인들의 마음을 세상 쪽으로 인도를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과의 화평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서 예수를 믿으니 천국에 갈 것이라고 하며, 또한 예수이름으로 세상도 취하라고 한다.
거짓 종이 이렇게 가르칠 때 말씀을 사용을 하니까 구별을 못하는 성도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 화평하는 것 같고, 또한 세상과도 화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화평이라고 봐 주시겠느냐, 약아빠진 술책을 쓰는 나쁜 사람으로 보시겠느냐?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거짓교회에서 거짓 종들이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가득하다 그 말이다. 그러면 이 말의 뜻이 ‘내 마음에는 악독이 가득 들어있지만 사람들 보기에는 화평을 말해야지’ 그런다는 거냐? 아무리 화평의 말을 할지라도 그 신앙정신이 세상소원 목적으로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악하다고 정죄가 된다는 거다.
사람 속의 묘하고, 요사스럽고, 사람들이 잘 알아볼 수는 악한 것이 무엇인가 하니 예수를 안 믿던 사람이 교회에 처음으로 들어와서 예배시간에 예배당에 앉아있지만 그 마음은 세상에 가 있는 것이 있고, 또한 악한 것은 예수를 믿으면서 세상 것을 구하느라고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의 인격으로 향상되지를 못하는 것이 있다. 어찌되었던 둘 다 예수를 믿으면서 그 마음이 두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과 화평이 되지 않고 원수가 되어있는 상태다. 이런 사람의 결과는 세상과의 화평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러면 세상을 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데 자기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있으면서 세상과의 화평을 이루려고 하면 자기가 세상과 화평이 되겠느냐? 성경은 하나님과의 화평이라야 만이 참 화평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은 국가 대 국가, 나라 대 나라끼리, 또한 이웃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서로 원수 시 하고 있는 걸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이룰구원을 위해서라면 교회의 원수라 할지라도 잡아서 쓰신다. 인간이 보기에는 ‘너는 우리 편이다. 너는 원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양쪽을 다 잡고 성도의 이룰구원을 위해서 쓰신다. 하나님은 다 잡고 쓸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이룰구원 면에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이렇게도 붙잡고 쓰시고 저렇게도 붙잡고 쓰신다는 걸 알아야 한다.
세상은 어찌하든지 자기에게 유익이 되도록 서로 속여먹고 살인을 하는 것처럼 같이 예수 믿는 교인인데도 원수 짓을 하는 교인이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예수를 믿지만 그 사고방식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소원 목적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화평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대립 마찰 충돌을 일으켜 놓으면 인간끼리 어느 한 사람을 아무리 내 편으로 만들어 놓는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절친한 친구도 얼마든지 자기의 원수처럼 들어서 쓸 수도 있는 거다. 그런가 하면 네가 저 사람을 원수라고 하느냐? 하나님께서 필요하면 그 사람을 네 친구처럼 들어서 쓰시기도 한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화평이라고 하는 것을 일반 기준적 지식을 가지고 화평을 보지 말라는 거다.
네가 하나님의 마음을 상해놓고 세상과 화평을 하면 그게 정말 화평인 것 같으냐? 화평하는 것 같아도 그 다음 장면에서는 더 큰 것이 네게 올 줄 알아라. 네가 하나님의 자녀란다면 하나님께서 절대로 가만있지를 않으신다.
4절: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다윗이 원수들을 향해서 ‘복을 주십시오. 사랑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하느냐? 저희의 행사는 하나님의 의사와 뜻을 따르지 않는 악한 주장이요 자랑들이기 때문에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라고 기도를 하는 거다.
저희 손을 지은 대로 갚으시라고 하는 것은 육에 속한 세력으로 자타의 영원 궁극적 이룰구원에 손실을 입힌 대로 보응을 하시라는 거다. 자기도 손해요 다른 사람의 구원도 손해 보게 한 그 값을 치르게 해 달라는 거다. 이건 정확한 기도요 옳은 기도다. 다윗이 이런 기도를 하나 안 하나 그들이 그렇게 살았다면 그대로 적용이 되는 거다. 그러니까 그렇게 산 그들에게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을 기도로 다시 경각심을 주는 거다.
진리성도 다윗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을 해 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은 다윗의 어떤 개인감정에서 그들이 미워서 나오는 악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기준해서 하는 기도다. 공의대로 기도를 한 거라 그 말이다. 그래서 이 기도는 옳은 거다.
아닌 말로 어떤 교인이 자기와 다른 사람의 이룰구원에 대해 사망으로 만들어 버렸다면 다른 사람이 다윗과 같은 기도를 하나 안 하나 그에게는 이미 이룰구원 차원에서 사망으로 들어가 있는 거다. 시간적으로 하나님이 나타나 보여지게 역사할 때까지는 자기가 하나님의 진노를 누적시키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런 짓을 한 번을 해도 조용하고, 두 번을 해도 조용하고, 몇 번을 해도 조용하니까 모르는 거다. 그러나 때가 되면 반드시 자기가 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된다. 하나님과 성격적인 면으로 자꾸 화평으로 들어가고, 성질적으로 화평으로 들어가고, 의사적 단일성으로 들어가면 하나님과 자꾸 절친해진다. 그런데 멀어진다면, 차단이 된다면 공의의 심판이 가해진다.
다윗이 기도하는 이것이 자기감정으로 기도하는 거냐, 성령의 감화에 의해서 기도하는 거냐? 성령의 감화에 의해서 기도가 된 거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화 감동으로 기록이 된 거다. 그래서 다윗의 이 기도는 정확한 거다. 공의의 기도다. 우리의 기도도 이래야 한다. 먼저 자기를 살펴보지 않는 기도는 소용이 없다. 이럴 경우 자기가 더 얻어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우리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공의에 맞는 기도, 하나님의 계약에 맞는 기도, 하나님의 언약에 맞는 기도를 해야 한다. 자기를 위한다든지, 가정을 위한다든지, 또는 다른 사람을 위한다든지 기도를 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계약에 맞는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러면 자기가 자기를 위해 기도를 할 때 어떤 게 하나님의 계약에 맞는 기도일까? 먼저는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한다.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 없는 기도는 안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기에게 향한 뜻이 무엇일까?
안간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은 누구에게든지, 어떤 환경 처소에 처해있든지 하나님 당신처럼 온전자가 되는 거다. ‘온전’이란 속에는 하나님의 것으로 지식적 온전, 지혜적인 온전, 그리고 도덕성에 들어가서는 하나님의 선적 온전, 사랑의 온전, 거룩의 온전, 진실의 온전이다. 그리고 이 여섯 가지로 똘똘 뭉쳐지면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인데, 지식에도 의가 있다. 즉 옳은 지식이 있다 그 말이다. 그리고 이 옳은 것으로 가지고 있으면 이 사람은 주권이 있고 능력이 있는 거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성품 속에 들어있는데, 예수 믿는 내가 이 신적인 인격과 성품을 덧입게 되면 하나님처럼 온전자가 되는 거다.
이 세상의 모든 사건과 환경과 존재를 성도에게 붙여주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이런 것들을 겪고 거치면서 하나님의 온전을 덧입으라는 목적이 있다. 이게 믿는 자기에게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따라서 믿는 나는 어떤 큰일이던 작은 일이던 그 때마다 항상 구할 것은 이 면에 대해 구하고 이 면을 위해 모든 일을 처리해 나가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미련하면 안 되고 지혜가 없으면 안 된다. 쉬운 예를 든다면 ‘우리 집이 부자 되게 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많이들 하는데 이런 기도보다는 ‘돈을 벌 수 있는 지식을 주시고 지혜를 주옵소서’ 이게 더 낫지 않느냐? 세상 것을 구하라는 말이 아니라 쉽게 말하면 그렇다 그 말이다. ‘예수 잘 믿게 해 주옵소서’ 이 기도를 하는 것보다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는 지식을 주옵소서. 지혜를 주옵소서’ 이게 옳은 기도다.
자기의 성품이 나쁘면 예수님이 가지신 그 마음을 나에게 달라고 하고, 누가 나를 미워하면 ‘저 사람이 날 사랑하게 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하지 말고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주님의 사랑을 나에게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하라.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 속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없는 게 없다. 성경에 보면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게 해 주겠다’고 하는데, 이 말씀이 머리를 주면 몸통과 꼬리는 안 주겠다는 말이냐? 이 속에는 모든 게 다 들어있는 거다. 다 주는 거다.
5절: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이 너무 많다. 인간을 만들었고, 세상 우주만물을 만드셨다. 세상만사 역사를 섭리 보존 진행하시고, 또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는 것에 대한 답을 성경을 주어서 말씀을 하셨고, 또 말씀대로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역사적으로 보게 해 주셨다.
예수님이 오셔서 역사하신 것으로 예언한 것을 다 보여주셨고, 부활 승천도 보여주셨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감동을 시켜서 개인적으로도 경험케 했다. 보고 듣고 만지게 해서 신앙 양심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시인을 할 수밖에 없도록, 알도록 하셨다. 그런데도 하나님과 화평을 원치 않는 자들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믿지도 않더라.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성경의 표면은, 껍데기는 이방 불신자들까지 시인을 하니까 기독교인이면서 그것마저 불신을 하면 안 되겠고, 그래서 표면은 시인을 하고 주장을 하지만 그 이면은, 속은(주-하나님의 온전을 덧입는 것)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무시를 한다. 영인성장이 되기 위해서는 이면적인 속을 시인하고 알아야 구원건설이 되는 건데 이것을 부정을 하고 모르는데 어떻게 현실에서 영인성장이 될 것이냐? 자기에게 있어서 믿음의 질이 어떻게 건설되어 올라가겠느냐? 구원건설을 파괴하는 자들에게는 성령의 감화가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이들의 일생 자체가 전부는 파괴다. 황폐가 됐다.
나이는 많이 먹었는데 그 속을 보면 인격이 완전히 황폐가 된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보고 인사를 할 때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십시오’ 라고 한다. 이건 사실은 복을 빌어주는 게 아니라 앙화의 말이다. 오래 오래 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듣기 좋은 말이지만 인격이 황폐화 된 사람이 오래 살면 무슨 짓을 하면서 살겠느냐? 원칙적으로 말하면 이런 사람에게는 ‘육신이 고생하지 말고, 죄를 더 짓지 말고 빨리 죽으시오’ 라고 해야 옳은 거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면 괘씸하다고 한다.
우리가 영의 눈으로 보면 속사람이 바싹 늙은 사람이 있다. 껍데기는 번지르 한데 속이 바싹 늙어버렸다. 말하자면 몹쓸 사람으로 돼버렸구나. 어떤 노인을 보면 기술이 있나, 몸이나 건강한가, 몸이나 제대로 관리를 하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먹는 것은 잘 먹고. 이건 사람이 영적인 면에서 완전히 황폐가 된 거다. 우리 기독자는 늙어지더라도 더 나은 쪽으로, 건설적으로 살다가 죽어야 한다.
우리는 영적인 면에서 황폐된 사람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예수 믿어 부자 되자’ 이렇게 나가면 이 사람의 믿음은 망가진다. 황폐가 된다. 깨닫는 것은 하나도 없고, 늘 하나님께 ‘달라. 달라’ 하게 되면 이 사람의 인격은 황폐가 되는 거다. 우리교인들은 자기가 황폐가 되게 살면 안 된다. 말하자면 진리의 말씀이, 진리의 지혜지식이 가득 들어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그만큼 비어있는 것이니 그만큼 황폐가 되는 거다.
6절: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성도다윗의 간구가 무엇이었던가? 의인을 행악자들과 같이 취급하지 말고 구별해 달라는 거다. 그런데 이 응답을 받았다 그 말이다. ‘의인을 행악자들과 같이 취급을 해 주지 마십시오. 나를 그들과 구별해 주십시오. 구별되게 살게 해 주십시오.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은 사람으로 살지 않게 해 주옵소서’ 하는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았다 그 말이다.
그리고 악인들이 화평을 부르짖는 속에는 악독이 있음을 발견케 해 줬다는 거다. 거짓 교인들은 하나님과 화평을 부르짖으나 그 속은 완전히 세상화로 되어있기 때문에 이것이 악한 자들이라는 것을 발견케 해 주셨고, 자신을 그들과 같지 않게 해 달라는 거다. 자신이 이렇게 되려면 영적인 면에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성도들 속에 악한 자들이 있으면 어떻게 되겠으며. 교회 인도자들이 교회 안의 이런 요소들을 발견을 못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것을 모른 채 덮어두고 화평만 부르짖는다면 도대체 어느 쪽 화평이냐? 우리는 화평에 구별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 말세시대에 거짓된 종들의 입에서 화평을 부르짖으나 악독이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옳은 화평이 뭔지 구별을 하지 않는구나.
하나님과 화평을 하려면 하나님의 의사성을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교인들이 받아들이느냐? 반대로 세상을 자랑하고 세상 것을 구하고 있으니 이게 어떻게 하나님의 것을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거짓말쟁이들이다. 악한 자들이다. 결국은 반석 위에 놓여지지 않는 세상이라는 홍수에 다 씻겨갈 것이니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되고 만다. 예수 믿은 게 헛수고가 돼버리고 만다.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성도가 기도할 때 ‘나를 구별된 존재로 만들어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해야 한다. 나쁜 쪽으로의 구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해야 한다. 이건 구별이 들어가는 소리다. ‘하나님의 선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하나님의 지혜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이게 다 구별의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거다.
7절: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성도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무엇으로 삼고 있느냐? 자기의 힘과 방패로 삼고 있다.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의 힘과 방패로 삼는 자가 있느냐? 여호와로 자기의 힘과 방패로 삼는 자는 참으로 귀한 사람이요, 강한 사람이요, 축복받은 사람이다.
여호와를 자기의 힘과 방패로 삼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원수가 쳐들어오니까 ‘아이고 하나님, 나는 도망가렵니다. 하나님이 나가서 싸우십시오’ 이 말이냐? 그냥 말로만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힘과 방패로 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그래, 내가 너의 힘과 방패가 되어주마’ 이러는 거냐?
여호와로 자기의 힘과 방패로 삼았다는 게 무슨 뜻이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인격화 사상화 시켰다는 거다. 그런데 마지막 시대의 교인들이 어디에 등을 기대고 있으며 무엇을 자기의 힘과 방패로 삼는가?
악한 자들이 성도의 영인성장을 죽이려고 화평을 말을 가지고 올 때 이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진리이치와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밖에 없다. 이 방패라야 만이 모든 거짓적인 비진리의 가르침의 정신 사상을 막을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의 힘이니 믿는 자기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이 되어있다면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의 힘이, 그 지혜지식, 그 도덕성이 자기가 손상이 되지 않게 하는 힘이 되는 거다.
이걸 자기는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서 ‘하나님, 나의 힘이 되어 주옵소서’ 라고 하면 하나님이 나비처럼 날아와서 싸워주는 그런 미신적으로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자기의 힘과 방패가 되어달라고 하는 사람은 성경을 본다. 이러면 말씀으로 무장화 되니 이것이 곧 하나님이 자기의 힘이 되는 거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의 힘과 방패가 되는 사람은 강하고 복이 있는 거다. 이게 강한 거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덕으로 강한 거다. 이것이 전혀 없이 원수가 들어오면 하나님이 천사처럼 안 보이게 와서 그 원수를 물리쳐 주는 그런 게 아니다.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말씀순종이 들어있다. 일반적으로 자기가 육신생명이 위태로울 때 누구에게 도움을 얻었다면 평생 그 은혜를 잊지 못한다. 하물며 사망적 세상적인 비진리의 구덩이에서 도움을 얻어서 탈출을 하여 하나님의 생명권 안에서 살면서 이룰구원으로 영인성장이 잘 되어 나간다면 이 땅에서는 물론이고 신령천국에 가서도 하나님의 그 은혜를 영원히 잊지 못하는 거다. 그래서 계:에 보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주님을 향해서 감사 찬송을 하는 거다.
세상이라는 세상은 성도들이 한 눈을 팔면 넘어지기 좋은 세상이다. 만지기 좋고, 보기 좋고, 돌아다니기 좋고, 마음을 빼앗기기 좋은 세상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자기가 말씀을 붙들고 정신만 차리면 이룰구원을 잘 이뤄갈 수 있는 재료들이다. 그리고 세상이라는 세상은 인간 자기를 절대로 가만 두지를 않는다. 산꼭대기에 가만히 있어도, 바닷가에 가만히 있어도, 골방에 가만히 있어도 세상이라는 세상은 시간이 와서 자기를 무덤으로 끌고 간다. 절대로 가만 두지를 않는다. 시간이 자기를 가만 두지 않고 공동묘지로 끌고 가더라. 이게 지금 자기 눈에 보이느냐?
인간은 출생하는 그날부터 시간이 자기를 공동묘지로 끌고 가고 있다. 공부시간에고 끌고 가고, 노는 시간에도 끌고 간다. 자기가 방안으로 들어가고 있어도 시간은 자기를 공동묘지로 끌고 가고 있다. 해가 떠서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 시간은 자기를 공동묘지로 끌고 간다. 젊음을 가만 두지 않고 백발로 몰고 간다. 그런데 이걸 의식을 하며 사느냐?
그리고 세상은 악한 영들이 자기를 사망계로 끌고 가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 인간 자기를 사망계로 끌고 가려고 사사건건 자꾸 건드린다. 이런 세상에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 않고서는 이 악한 세상을 헤쳐 나갈 길이 없다.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다윗은 매사에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이로 인해 그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했다.
어떤 때 마음이 기쁘고 찬송이 나오는가? 1. 세상만사가 내 마음대로 다 잘 되었을 때 찬송이 나온다? 2. 내 믿음으로 세상만사가 잘 되어나갈 때 찬송이 나온다? 3. 하나님의 뜻이 자기 속에 잘 이루어졌을 때 찬송이 나온다? 다윗은 어느 때 찬송이냐? 세 번째다. 그러면 나는 어느 때 찬송이냐? 세 번째냐? 자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인격화 되면 세상만사가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거기에 동화되지 않는다.
위의 세 가지 문제 중에 앞의 두 가지에는 항상 조건이 붙는다. 세 번째 것의 자기가 하나님의 온전으로 이뤄지면 가난해도 찬송이요, 부요자가 되어도 찬송이요, 아파도 찬송이요, 안 아파도 찬송이요, 건강해도 찬송이다. 찬송밖에 없다. 그러니 찬송이 나오는 그 마음을 마귀가 어떻게 건드리겠느냐? 마귀가 어느 허점을 찾아서 건드릴 수 있겠느냐? 반대로 자기가 성질을 부리고 마음 한 쪽 구석에 근심 걱정이 깃들면 마귀가 냄새를 맡고 그곳을 파고 들어온다.
악한 자와 선한 자의 차이
시 28:5-9 / 이규왕 목사
예전에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 라는 성선설과 성악설이 화두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국내외 세계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인륜적인 끔찍한 살인 사건과 약자를 등치는 사기 사건과 무자비한 테러와 전쟁으로 무고한 어린이들까지 희생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인간이 이렇게 악독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라는 성선설이 허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은 본능만 있는 짐승과 달리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인격체 임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무자비하고 악한 이유가 외부적인 환경 탓이 아니라 타락한 내면의 부패한 심성 때문임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렘 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인물이나 지난 역사나 성경 가운데 악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인 또는 착한 사람’이라 일컬음을 받는 사람도 있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창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행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그렇다면 누가 악한 사람이고, 누가 선한 사람인지 그 차이점은 무엇이며, 나는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인가를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1. 누가 악한 사람인가?
사람은 눈으로 사물을 지각하게 되는데 그 눈의 위치와 구조를 보면 항상 외부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인지 항상 남의 실수와 허물은 잘 보지만 실상 자신이 얼마나 악한 사람인가 하는 것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요즈음 세상이 갈수록 악해진다고 개탄을 하면서도 정작 내가 왜 이렇게 갈수록 악
우리 자신이 그렇게 자신에 대해서 무감각해져가는 가장 큰 원인은 마치 고장 난 저울에 물건을 달고서도 그것이 표준 저울인줄로 착각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만이 아니라 자신을 재는 잣대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악한 사람이고 누가 선한 사람인지를 바로 재는 잣대는 무엇일까요? 그 잣대는 세상의 도덕적 규범이나, 국법이나,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을 지으시고 공의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잣대요, 그 하나님이 주신 성경 말씀이 바로 참 잣대입니다.
(수 1: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그러므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악은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좌우로 치우치는 것이며,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정로로 삼고 바른 길을 가게 되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려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의 정로를 따라 살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만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악한 사람들처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며 살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이 선한 삶을 살기보다는 악한 삶을 살기가 더 쉬운 것일까요? 악인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세상에서 고통스럽다면 그것이 두려워서라도 악을 미워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을 구별하시지만 사람은 얼굴만 보아가지고는 누가 선한 사람이고 누가 악한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외모로는 현상 붙은 사나이처럼 범죄형의 얼굴로 금방 보면 알 수 있는 얼굴이 아니라 오히려 착하고 인자해보이고 신사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악인에게 사람들이 속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도 인간관계에서 악인의 특징이 어떠한가를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 28:3)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그렇습니다. 악인이라고 해서 듣기 거북한 욕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웃에게 듣기 좋은 평화를 말하지만 자기는 손해를 보지 않고 이웃을 이익의 도구로만 사용하고 결국 피해를 주는 존재입니다. 겉으로는 듣기 좋은 말로 이웃을 위하는 척 하지만 실상 마음속으로는 항상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한 마디로 말과 행동이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인에게 사람들이 속고 사기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악인이 노골적으로 자기의 본색을 언행으로 드러낸다면 사람들은 그를 가까이 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속지도 않을 것입니다.
무자비한 토막 살인과 같은 끔찍한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세상에서 오늘 성경 말씀처럼 악이 이웃과의 관계에서 단지 이중적인 잣대를 사용하는 것이 전부라면 별로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는 것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에게 보다 더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인 것입니다.
(시 28:5)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다시 말해서 악의 본질은 한 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과의 가장 큰 차이가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라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악인과 의인의 차이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인간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악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한 마디로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세계에 살면서도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이나 범신론이나 우상숭배를 하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로 매일 매일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인간의 인권이라는 미명하에 하나님의 주권이 설자리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동성애가 합법화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롬 1: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롬 1: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한 마디로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죄를 죄로 알지 않게 되며 무슨 짓이든지 다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구이며,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무관심한 불신앙은 모든 죄의 근본인 것입니다.
(롬 1:29) 그래서 인간은 온갖 부정과 부패와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 차 있으며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악의에 싸여서 없는 말을 지어내고 (롬 1:30) 서로 헐뜯고 하나님의 미움을 사고 난폭하고 거만하며 제 자랑만 하고 악한 일을 꾀하고 부모를 거역할 뿐더러 분별력도, 신의도, (롬 1:31) 온정도, 자비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1900 여 년 전에 기록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예언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세상에서 살인보다 더 악독한 죄가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불신하고 그 하시는 일에 무관심한 불신앙의 죄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이 신앙은 종교의 자유이기 때문에 불신앙도 자유라는 망발을 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자초하는 것임을 잊지 말고 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요 급선무 인 것입니다.
속마음이 부패한 인간이 쉬지 않고 죄를 상상하고 꿈을 꾸면서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를 주저하는 것은 사람들이 두렵고 그로 인해 사람 앞에서 자신의 체면이 손상 될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와 같이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열쇠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사람을 피할 곳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이 보지 않은 곳에서도 악을 범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죄악을 근절할 수 있는 비결은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뿐인 것입니다.
(잠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잠 14: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2. 누가 선한 사람인가?
일말의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선이 좋은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죄는 나쁘고 선은 좋다고 말하면서도 실상 세상에는 선을 행하는 사람보다 좋지 않은 악을 행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 이유는 선을 행하는 것은 수고롭고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지만 악을 행하는 것은 인생을 즐겁게 사는 것이라고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즐거움은 마치 마약과 같이 호기심에서 출발하여 결국 파멸에 이르게 하지만 선을 행하는 것은 정반대로 일시적으로 고통이나 희생이 요구되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사람과 자신을 기쁘게 하는 유익이 있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선을 행하는 자보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점점 더 많아져 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서 마치 밤바다를 비취는 등대처럼 선하게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소수의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선한 사람인가 하는 것은 좋은 인간관계에서 잘 나타나게 됩니다. 비록 악인의 번성과 훼방을 받으면서도 인간관계에 있어서 악인과 달리 진실하고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시작과 마침이 다르지 않는 신실한 사람입니다.
악한 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불의를 마다하지 않고 입술에 거짓을 말하며 지위를 이용하여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지만 선한 사람은 무엇보다 거짓을 미워하기 때문에 아무리 자신에게 이익이 온다고 할지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 반면에 자기에게 손해가 올지라도 정직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잠 12:13)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인하여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 (잠 13:5)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하나 악인은 행위가 흉악하여 부끄러운 데 이르느니라
그러나 악인과 똑같은 육신을 입고 동일한 환경에서 그렇게 실천하면서 사는 것은 그의 의지나 인내심과 같은 성품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므로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은혜를 힘입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삶을 실천하므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라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그러한 삶을 본보여준 사람이 바로 오늘 시편 기자입니다. 시편 기자가 악인과 같이 적당히 타협을 하였다면 악인은 시편 기자의 적극적인 후원자 그룹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음 안에서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았기 때문에 악인으로부터 훼방과 위협을 받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도리를 다 한 사람입니다.
1)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의 삶입니다.
시편 기자는 악인에게 고난을 당하는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자신의 반석으로 삶고 그 위에 믿음의 집을 지었으며, 고난이 닥치게 될 때는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가 도우심을 구하며 부르짖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시 28:2)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2)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입니다.
시편 기자가 곤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하는 대신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았습니다.
(시 28:6)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3)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신앙은 외형적인 종교적 의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다가 아니라 얼마나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가 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함을 시편 기자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은 어떤 환경을 만날지라도 절망하지 않고 찬양하는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시 28: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악인의 횡포가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한 세상에서 시편 기자가 그렇게 하나님을 생각하며 선하게 살아간 까닭은 하나님이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여 주시며 결과적으로 악인보다 더 잘되게 하여주시는 축복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 28:9)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
그러나 악인은 어떻습니까? 아무리 부귀권세를 누리며 즐겁게 살아가는 것 같아도 그 마음에는 항상 불안이 떠나지 않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선한 사람은 담대하기만 합니다.
(잠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악인이 일시적으로 득세를 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악인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 28:4)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 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 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물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말처럼 스케이트 선수도 빙판에서 여러 번 넘어진 아픔을 딛고 일어서야만 훌륭한 선수가 되는 것처럼 선한 사람이라고 해서 세상에서 좋은 날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다가 넘어졌을지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함은 하나님은 고난 중에서 당신을 찾는 의인을 결코 내버려 두시지 않고 반드시 재기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잠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을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대개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1) 하나님의 은혜나 도움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고난과 싸우면서 끝없는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는 악한 자들이며,
2) 고통에 억눌린 나머지 자포자기하는 불신앙의 사람들이며,
3)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를 기다리면서 고난 자체를 주께 의뢰하는 믿음의 의인들입니다.
갈수록 악이 지능화되어가기 때문에 누가 아군이며 누가 적군인지, 누가 악인이며 누가 의인인지 가려내기 어렵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흔히 갈수록 세상이 악해진다고 저마다 개탄하면서도 갈수록 다른 사람만 믿음이 약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약해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현실 경제가 어려울지라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하며, 겉과 속이 달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 사회에서 남을 도우며 사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자신을 위한 투자이며 전도의 밑거름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인은 남을 도울 생각보다는 항상 남을 이용하며 자기만 득을 보려는 자입니다. 오늘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지를 돌이켜 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주여! 악인들과 더불어, 죄인들과 더불어 이 몸을 끌어 내지 마소서. 입으로는 이웃에게 상냥하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엉큼한 생각을 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엇보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그 하시는 일에 주의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순종의 삶을 살려고 주의를 기울이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잠 16:20)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물론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때로 선한 사람이 악인에게 괴로움을 당하며 살아갈 때도 있지만 항상 하나님을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의 의지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곧 선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복수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을 방패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네가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네가 말을 마치기 전에 들을 것'(렘33:3)이라고 하셨지만 때로는 시편 기자처럼 간절히 부르짖어도 귀를 막고 듣지 않으시며, 잠잠히 응답치 않으시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알고 보면 우리들의 신앙을 시험하시기 위함이며, 우리로 자신을 돌아보아 겸손을 배우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사4:17) 하나님께서는 '내게 간구하는 자에게 응답하겠고 환란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든지 아무리 세월이 변할지라도 하나님의 관심사가 나의 관심사가 되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사람들이며 그러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복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시 28:9)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
시편 기자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으로 선한 사람을 악인의 손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며 비록 그 속도는 늦을 수가 있으나 선한 사람에게는 마침내 좋은 결과가 있도록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잠 4:18)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잠 4:19)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늘 찬송하리라
시 28:6-9 / 김광일 목사
가수 노사연 (盧士燕)은 수없이 히트곡 ‘만남’을 불렀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말아 후회하지 말아 아 바보같은 눈물 보이지 말아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그녀는 이유 없이 그저 세상을 향해 만남을 불렀지만 신앙을 갖고 난 이후 그녀는 자신이 왜 그토록 만남을 불렀는지 알게 됐답니다. 거기에는 노사연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만남을 가져라. 나를 인격적으로 만나라. 그리고 그 만남의 기쁨을 이웃에게 전하라.” 노사연은 거침없는 크리스천으로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제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니 인생이 즐거워졌어요.” 내면에서 번져 나오는 기쁨이 진심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노사연에게 최근 2년은 믿음을 키워가는 시기였습니다. 권사였던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쓰러져 심폐소생술로 간신히 살아났지만 스스로 숨을 쉬지 못하였습니다. 시련은 그녀에게 하나님을 붙잡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노사연은 고백합니다. “어머니와 가정을 위해 새벽에 엎드려 기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교회와 방송에서 섭외 요청이 들어왔어요. 신앙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는 모습을 많은 사람들에게 부끄럼 없이 드러내 그들에게 희망을 주라는 하나님의 계획이신 것 같아요. ‘만남’이라는 히트곡도 예비하신 것이지요.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고 좋아해 주십니다.” 그녀는 자신이 나날이 아름다워지고 있다면서 웃었습니다. 그 비결도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랍니다. 주위로부터 예뻐진다는 칭찬을 들으면 “성령 성형을 받았다”고 감히 대답합니다. 돈도 안 들고 부작용도 전혀 없는 성형법이라며 추천도 잊지 않는다고 합니다. 노사연은 한 달에 한 번꼴로 교회 무대에 서서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여전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무대에 오른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퍼포먼스를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CCM 앨범을 낼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위해 ‘만남’을 노래했다면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과 만남의 감격을 드러내는 찬송을 부르고 싶은 것이 그녀의 소망입니다.
본 시의 저자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무엇인지를 되새기며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실 복을 간구하며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끌어드리는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의 찬양을 듣다보면 멀리 계시던 하나님도 다윗 편으로 끌려가지 않을 수가 없을 만큼 흡인력이 강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자기편으로 만들어 일을 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본문에 기록된 마음이 원어에서는 심장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즉 심장이 기뻐 뛴다고 표현하며 감격으로 찬송하였습니다. 멋진 찬송이요, 멋진 기도요, 멋진 고백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심장이 기뻐 뛰듯이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다윗은 전쟁터와 같은 살벌한 삶의 한복판에서 두려움 없이 늘 찬송하였습니다. 다윗이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늘 찬송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나의 도움이시기에
인도에서 초기 선교사로 활동하던 스코트 (E.P. Scott) 목사가 선교 지역을 찾아 나섰다가 호전적인 원주민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스코트 선교사를 붙잡아 심장에 긴 창을 겨누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가지고 다니던 바이올린을 꺼내 연주를 하며 원주민 언어로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 이름 높이어 다 찬양하여라 금 면류관을 드려서 만유의 주 찬양” 스코트 선교사는 죽음을 기다리면서 간절히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3절을 부를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눈을 떠서 보니 둘러선 원주민들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그 이름을 가르쳐달라고 사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 스코트 선교사는 여러 해 동안 그들과 함께 살면서 원주민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환경에서도 찬송하는 자에게 역사하며 분명히 도우십니다.
본문 7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할 때마다 도움을 주셨다고 노래합니다. 이 고백을 과거 시제가 아닌 현재 시제로 고백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과거에 한 두 번 하나님을 의지했고, 그때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늘 의지했고 늘 도움을 받아왔으며 지금도 받고 있음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여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을 늘 찬송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나의 기쁨이시기에
리처드 범브랜드(Richard Wurmbrand) 목사는 감옥에서의 세월을 ‘하나님의 지하운동’ 이라는 책을 통해 소개하였습니다. 루마니아 공산당국은 범브랜드에게 ‘기독교를 버리고 공산당에 협조하라’ 고 고문하며 협박했습니다. 그가 말을 듣지 않자 아내도 감옥에 가두어 버렸고, 어린 아들은 아무도 돌보지 못하도록 미아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때 범브랜드는 온갖 고통을 가해오는 감방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기도하였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기뻐하겠습니까? 도무지 기뻐할 상황이 못 되었지만 말씀에 순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빗물에 흠뻑 젖듯이 기쁨을 충만하게 입혀주시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 다른 방에 수감된 아내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아들을 지켜주실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기쁨이 얼마나 컸든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춤을 추며 찬송하기까지 했습니다. 갑자기 독방에서 벌떡 일어나 춤을 추는 모습을 본 간수는 ‘드디어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맛본 기쁨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빌립보 감옥을 흔들어 놓았던 주님이 루마니아의 감옥에도 찾아가셨습니다. 처지가 어떠하든지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하십시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본문 7절입니다.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진리는 내적으로 마음이 크게 기뻐하니 노래로 찬송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기뻐할 때 있고 기쁘면 노래가 나오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 기쁨은 피상적인 것이요, 찰나적일 때가 많습니다. 입에는 웃음이 있는 것 같으나 그 마음속에 허탈함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잔이 넘치는 듯한 기쁨이요,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출 정도의 기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기쁨이 있어야 하고, 이런 기쁨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지경에 빠져도 찬송이 나올 수 있습니다. 억울하게 매를 맞고 착고에 채워져 감옥에 갇힌 처지에서도 바울과 실라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넘쳤으면 기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를 수 있었겠습니까? 기쁨이 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 곳에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향해 찬송을 부르면 모든 걱정이 없어집니다. 찬송을 부르면 외로움이 사라집니다. 찬송을 부르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찬송을 부르면 힘이 생깁니다. 찬송을 부르면 감사가 솟아 날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마음이 기뻐서 부르는 찬송은 듣기에도 좋습니다. 주님을 마음으로 의지하여 힘을 얻고 항상 감격이 넘치는 가운데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크게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나의 구원이시기에
황제 루이14세 (Louis XIV)는 베르사유 궁전을 완공하고 프랑스의 권위를 세계에 널리 떨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철저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개신교를 박해했습니다. 개신교 대표였던 세오졸프를 ‘칙령 거역죄’ 라는 죄목으로 옥탑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해 부활절, 루이14세는 황제의 위엄을 갖추고 부활절 행렬을 거느리고 시가지에 나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세오졸프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큰 소리로 찬송 불렀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왕의 왕이 되시고 우리들의 중보되신 성령 증거하시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처음 열매 되셨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처음 열매 되셨네”. 이 때 루이 14세는 왕의 왕은 예수밖에 없다는 가사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곧장 감옥으로 달려가 세오졸프의 손을 잡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 후 그를 석방하고 신앙의 자유를 선포했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앞에서는 죄인입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만이 고집과 이기심의 감옥에서 구하여 주시기에 찬송 받으시기에 마땅하신 분입니다.
본문 8절입니다.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오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우리로 구원의 길에서 낙오시키지 아니하고 구원의 주로 모시고 살게 하신 축복을 찬송해야 합니다. 가장 큰 축복은 구원의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시편 16편 1절과 2절에 나타나는 다윗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다윗은 구원의 하나님만이 자신의 주님이시며 복이라고 합니다.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 믿는 자들을 유혹하여 구원의 길에서 낙오시켜 자신의 노예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켜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베푸셨으니 놀라운 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을 부름이 얼마나 큰 은혜가 되는지 깨달아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송하여야 합니다.
영국 사회를 변화시켰던 요한 웨슬리(John Wesley) 형제는 일찍이 찬송의 능력을 소중히 여겼으며, 찬송하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기운차게 찬송하라. 맥 빠진 사람처럼, 혹은 조는 사람처럼 하지 말고 음성을 높여서 힘차게 찬송하라. 당신이 사탄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당신의 찬송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듣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도 말고 강력하게 찬송하라.” 생명의 찬양으로 부패하고 병든 영국 사회를 건져낸 웨슬리 형제의 강력한 찬양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환난과 핍박을 견디어낸 선조들의 찬송이 다시 우리에게 불리어져야 합니다.
이 시간 임명받은 찬양대원과 성도들은 입만 움직이는 노래의 사람이 되지 마시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찬송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디 도움이신 하나님을 늘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기쁨이신 하나님을 늘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이신 하나님을 늘 찬송하여 매사에 승리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의 두 손을 들라
시편 28편 1~9절 / 코너스톤 장로교회
어느 날 다윗은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킨 소식을 듣게 됩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일으킨 난을 피해 성을 떠나 도주하게 됩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자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몸에서 난 친아들이니 다윗이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을까요? 다윗은 인생의 황혼기에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 것이죠. 다윗은 어떻게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 났을까요? 지나간 시절 어려움이 올 때마다 다윗은 하나님께로 나아 갔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 절망이 찾아온 지금 그는 과거에 그리했던 것처럼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다시 한 번 부르짖습니다. “(시 28:1) [다윗의 시]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사실 다윗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압살롬의 난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하나님의 침묵이 더 두려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된 것은 아닌지, 혹시 자기 이전의 왕이었던 사울처럼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은 아닌지 그것이 다윗의 가장 큰 염려 였습니다. 다윗은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그와 여전히 함께 해주신다면 아직 그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을 그는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도망자의 신세에 처한 다윗이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 그 자체 였습니다. 특별히 이 시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또한 자신을 왕으로 세우시고 자신의 후손에게 영원한 왕위를 물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그 언약의 당사자이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다윗은 약속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를 부름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1절에 다윗은 말합니다.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다윗은 하나님께서 필히 응답하여 주실 것을 애절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돕지 않으신다면 다윗에게 남는 것은 절망 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평생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왔습니다. 다른 무엇도, 다른 누구도 의지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돕지 않으실 경우 따로 도움을 요청할 예비된 대상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전부이십니다. 하나님만이 그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그는 죽은 목숨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제발 귀를 막지 말아달라고 간절하게 호소 했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꺾이지 않는 소망이 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인의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때로는 기도가 더디 응답 받는 것처럼 느껴지고, 기도 후에 상황이나 환경이 곧바로 달라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결과적으로 의인의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여 주십니다.
2절을 보니 다윗은 ‘주의 성소 향해 손을 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소는 하나님과 주의 백성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다윗은 지금 도망자의 신세이기 때문에 성전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만큼은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지성소까지 들어가 있습니다. 지성소를 향해 다윗이 드린 기도의 핵심은 ‘갚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4절 말씀대로 악인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 대로 갚아 달라는 것아 기도의 핵심입니다. 갚아 달라는 말이 3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복수를 청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처지를 생각해 보면 얼마나 억울한 상황입니까? 자기의 목숨을 노리는 아들을 피해 도망자 신세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간구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가지 손이 등장합니다. 첫번쨰로 하나님을 향해 들고 있는 다윗의 손입니다. 2절을 보시겠어요? “(시 28:2)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다윗은 손을 들고 간절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 손은 믿음의 손, 도움을 구하는 손 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두 번째 손은 악인의 손입니다. “4절에 보면 “(시 28:4)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 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 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악인들의 손은 어떤 손입니까? 타인을 괴롭히는 손입니다. 악을 행하는 손, 추악하고 더러운 손 입니다. 자 그리고 세 번째로 등장하는 손이 바로 ‘하나님의 손’입니다. “(시 28:5)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의 손은 능력의 손이요 창조의 손입니다. 우리의 손은 다윗의 손과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겸손한 손,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신뢰의 손이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고 끝까지 주님의 손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손만이 모든 악인의 손을 꺾으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손이 됩니다. 겸손하게 자신의 두 손을 든 다윗,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의지한 다윗,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응답을 주셨습니다. 6~7절에 그가 하나님을 찬양 합니다. “(시 28:6)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시 28: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다윗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이 흘러 들어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지성소를 향해 손을 들고 부르짖었던 다윗의 기도가 응답 되었습니다.
다윗의 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와 같이 어려움을 당하고 환난을 당하는 자들을 향해 여호와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시 28:8)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시 28:9)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 하나님은 다윗의 하나님이실뿐만 아니라, 지금도 다윗처럼 두 손을 들고 하나님을 간절하게 의지하는 자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의 순간 하나님 계신 지성소를 향해 두 손을 들고 부르짖으며 기도했던 다윗처럼, 우리들도 우리 안에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향해 부르짖으며 기도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기도 응답의 기쁨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주님의 백성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복을 주시고 기쁨과 찬송이 가득하게 하십니다. 고난의 자리에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잡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침묵
시 28:1-9
1. 말씀하시는 하나님 vs 침묵하시는 하나님
요한복음 1:1에서는 “하나님은 말씀이시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에게 직접, 혹은 천사들을 통해, 혹은 환상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수단은 주로 성경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대자연을 통해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홍수, 가뭄, 지진, 쓰나미, 기후이변 등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 인생사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을 통하여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여러 채널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 침묵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하여도 아무런 응답을 듣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큰 고통 속에서 살려달라고, 길을 열어 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하는데도, 하나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이 때, 신앙의 위기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나를 이렇게 버려두시는가?’
인도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섬겼던 테레사 수녀가 자신의 지도 신부인 마이클 피트(Peet) 신부에게 보낸 편지글이 그의 사후에 공개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나 커서 예수님을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기도하려 해도 혀가 움직이지 않아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부재'는 저의 일생에 가장 부끄러운 비밀입니다. 내 영혼에 왜 이렇게 많은 고통과 어둠이 있는지 이야기해 주십시오.”
테레사 수녀가 느끼는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 성도들 대부분이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답답합니다. 기도하면서도 몹시 곤고하고 지칠 때도 있습니다.
2. 침묵이 주는 은혜
이런 하나님의 침묵을 믿음의 거장 다윗도 경험하였습니다. 시편 28편은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1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신다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이 이 시를 지은 상황은 몹시 어려운 처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다윗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화평을 말하지만 속에는 악독을 품고 있습니다. 이런 고통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 “저 악한 사람들을 그들이 지은 악행대로 갚아주옵소서.” 그런데도, 하나님은 조용하십니다.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께서 침묵하시면 나는 죽을 것 같습니다” 라고 합니다.
얼마나 답답합니까?
일본 소설가 엔도 슈사꾸가 쓴 <침묵>이란 소설은 17세기 일본 막부시대 때, 기독교인들의 처참한 박해상황을 모티브로 썼습니다. 신자들을 나무 십자가에 묶고서 썰물 때 바닷물이 빠져나간 후에, 신자들을 묶은 십자가를 모래사장에 세워 놓습니다. 밀물 때, 그들은 나무에 묶인채로 바다에 수장됩니다. 이 광경을 숨어 지켜본 주인공 로도리꼬 신부는 가슴을 치며 괴로워하면서 본국 포르투칼 선교부에 이렇게 보고합니다. “아아, 바다에는 조금도 그치지 않고 계속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다는 그들을 죽인 다음, 마냥 무서우리만치 굳게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수많은 어린아이들과 여인들이 신앙 때문에 처참하게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계속 침묵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충성하고 주님의 복음을 위해 헌신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영광스런 삶을 살아가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주님께 충성하고 있지만, 여전히 고난 중에 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침묵>이란 이 소설은 바로 후자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위한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침묵하십니다.
그러나, 그냥 하나님의 침묵으로 끝난다면, 우리의 삶이 너무 힘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침묵,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게 해줍니다.
구약성경 욥기의 주인공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1:1) 였습니다. 그에게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었고,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이요 거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태풍이 몰아쳐서 집이 무너져 열자녀가 졸지에 다 죽었고, 그의 수많은 재산은 이웃나라의 도둑들에게 다 도난당하여 알거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고통 속에서 욥은 때로 하나님께 대들며 기도하고 항변하였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오랜 세월 고난을 잘 감당하고 있던 중, 하나님께서 욥의 잘못을 책망하시면서 욥이 깨닫게 됩니다. “내가 주에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긴긴 고난의 세월 속에서 하나님은 욥의 기도에 침묵하셨고, 이 기나긴 하나님의 침묵을 통하여 욥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귀로 듣기만 하여 알던 하나님, 이제는 눈으로 뵙는 것처럼 주님을 더욱 선명하게,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더라도, 기도의 줄을 놓지 마십시오. 때로는 침묵이 더 크게, 더 무겁게 말하는 것처럼 들려올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 가운데도 변치 않고 주님을 찾고 구하면, 하나님과 더욱 깊은 영적 교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영적 자립심을 키워줍니다.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스스로 할 수 있느냐, 의존하느냐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이 자라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침묵하심으로 우리 스스로 기도하면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배드리면서, 우리의 경험과 지식을 사용하여 힘들어도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도록 하십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영적으로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와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이 사랑하는 친구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나사로에게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이틀을 더 기다렸다가 내려가보니 나사로는 죽은 지 이미 나흘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나사로의 여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많이 속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래도 오빠가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을 병이 아니라 하셨는데, 왜 오빠가 죽었는지, 또, 왜 예수님은 오시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무덤에 가셔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고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죽어도 다시 산다는 부활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흘동안 오빠의 죽음을 고스란히 고통으로 떠안으면서 결국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것입니다. 침묵은 말보다 더 큰 웅변입니다. 하나님의 침묵, 이 기간은 우리에게 고통스런 기간이지만,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게 도와주는 은혜가 있습니다. 침묵은 영적 자립심을 키워줍니다.
세 번째, 오직 믿음으로 살도록 우리를 훈련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 멸망당하였고, 남 유다도 이제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져가고 있는 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습니다.
합1: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그 때, 하나님의 응답이 왔습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답답하여도, 하나님의 자녀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역사를 이끌어가고 계심을 믿는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십시오.
이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하나님은 침묵을 통하여, 끝까지 하나님만 신뢰하는 사람으로 우리를 만들어가십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를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세워주는 은혜가 있습니다.
3. 침묵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부르짖으며 기도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다 들으셨음을 확신합니다.
6-7절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지만, 가만히 계시지 않고 고난당하는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나의 힘, 나의 방패이신 하나님은 내가 기도할 때, 고통을 이길 힘을 주시고, 방패로 나를 보호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고통 속에서도 끈질기게 기도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기뻐하며 찬송할 수 있습니다.
엘리 위젤(Eli Wiesel)이라는 헝가리 태생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악명높은 독일 나치 정권하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중 한 사람입니다. 그가 수용소에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소재로 란 넌픽션 소설을 썼습니다. 어느 날, 수용소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을 교수형에 처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교수대의 밧줄이 내려와 목에 감기자 나이 많은 노인은 곧바로 숨이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린 소년은 쉽게 죽지 않고 밧줄에 목이 달린 채 20여분 이상 발버둥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참혹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유대인들이 여기저기서 탄식하며, 안타까워하며 중얼거렸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하나님은 정녕 우리를 버리셨고 떠나셨단 말인가?’
그런데 바로 그때 엘리 위젤의 마음속에 헤집고 들어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바로 지금 여기 있다. 나는 저 교수대에 매달린 저 소년과 함께 매달려 있고, 저 소년과 함께 아파하며 고통당하고 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고 계십니다.
침묵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감내할 힘과 용기를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침묵 기간은 우리에게 은혜의 기간입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은혜, 영적 자립심을 키우는 은혜,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가게 하는 은혜의 기간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 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예배자의 기다림
시편 28편 / 최종혁 목사
우리는 26편부터 계속해서 다윗의 시를 살펴보고 있는데, 각 편에서 다윗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성소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들은 특별히 ‘예배자’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은 기도와 기다림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제가 어릴 때와 참 많이 달라졌습니다. 제가 학생시절만 해도 누군가와 약속을 하려면 전화를 해서 약속을 잡아야 했습니다. 몇 월 몇 일 몇 시에 어디서 만나기로 하고 그곳에서 그 시간에 만났습니다. 시간이 되었는데 상대방이 나오지 않으면 기다려야 했습니다. 계속 기다려도 오지 않으면 그제서야 다른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전화나 문자메시지를 보내서 시간이 되는지 확인하고 그날이 가까워 오면 자세한 약속을 잡습니다. 약속 시간에 그곳에서 갔는데 상대방이 오지 않으면 전화나 문자메시지를 합니다. 상대방의 상황을 듣고 조금 더 기다릴 수도 있고 그냥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과거와 오늘날이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예전에 비해 기다리는 과정이 빠졌습니다.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 확실히 적어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기다렸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주시고 그 자리에서 해주시지 않고 기다리라고 약속하신 경우입니다. 노아는 비가 올 것이라는 약속을 기다렸고,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즉각 왕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그 약속이 언제 이루어질지 알지 못했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직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서 현재의 어려움을 견뎌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아무런 소망도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자기는 나이가 들어가고 아내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어가는데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다윗도 왕으로 세움을 받았지만 실제 왕이 되기까지는 많은 죽음의 위험을 넘겨야 했습니다. 노아의 경우도 비가 금방 오지 않아도 방주를 만들어야 했고,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그 사실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면서 어려움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기다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 사이에서는 기다림이 오래 되면 혹시 약속 자체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닐까 걱정하게 됩니다. 약속을 한 사람이 약속을 잊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약속한 사람이 약속을 지킬 능력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없이 그저 약속만 던져놓은 것입니다. 혹은 마음이 변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능성 때문에 맘 편하게 기다린다는 것은 쉽지 않고,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기다리다 보면 약속 자체나 약속을 한 사람에 대해 이러한 질문을 던져봐야 할 시점이 옵니다. 그러다가 기다리기를 포기하게 되기도 합니다.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있을 때 포기합니다. 혹은,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을 때 포기합니다. 결국 우리가 무언가를 계속해서 기다리게 만드는 것은, 그 후에 얻게 될 것의 가치와 그에 대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두 가지가 있을 때 우리는 계속해서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과 관련해서 생길 수 있는 문제 중 하나라도 하나님께 해당되는 것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지킬 능력이 없거나, 그러고자 하는 마음이 없을 수 있을까요? 처음에는 하겠노라 하셨는데 마음이 변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상이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그런 걱정을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시는 시기와 방법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만들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 곧 하나의 시험이 되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고 또한 자라게 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그 순간에 바로 이루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부러 기다림의 시간을 주셔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 예배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27편의 끝에서 다윗은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기다리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이어지는 28편은 다윗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중의 모습이 드러나 있고 기다림의 끝에 다윗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그 기다리는 중에 간절한 마음으로 도우심을 구하고 기다림을 끝났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축복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1. 기다림 중의 간절함(1~2절)
다윗은 지금 기다리는 중에 있습니다. 어떤 상황인지를 특정 지을 수는 없지만 분명한 악으로 인해 고통 받는 중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특별히 다윗은 1~2절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간절히 바라는 모습을 보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2절에서도 비슷한 말을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라고 반복하면서 자신이 지금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에 대해 그가 의지하는 “반석”이라고 표현하면서 도우심을 구합니다.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는 2절 끝에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로 하나님의 응답을 구합니다.
하나님은 마치 일부러 귀를 막고 듣고 계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윗의 상황에 대해서 무관심하신 것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니 이제 그만하겠다고, 포기하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간절히 매달리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간절한지 그의 표현을 보십시오.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무덤 혹은 구덩이는 종종 ‘사망’과 같은 말로 사용이 되기도 하는데, 특히 아무 소망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비참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그런 죽음을 언급하면서, 만약 하나님께서 다윗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시면 자신이 그런 자들처럼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과 자신이 다른 것이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나의 반석”이라고 부르는데 하나님이 잠잠하시면 자신의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와 전혀 다를 것이 없지 않느냐고 하나님께 반문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정말 간절한 심정으로 진정을 담아 하나님께 구하고 있습니다. 마치 벼랑 끝에 서서 유일하게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향해서 도움을 청하는 것처럼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계신 곳을 바라보며 그 손을 높이 들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특별히 다윗은 여기서 “지성소”를 언급합니다. 앞선 시편들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여호와의 집, 성전, 초막 등으로 표현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성소”라고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계신 바로 그곳을 강조합니다. 아마 할 수만 있었다면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구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이런 기도를 처음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께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구원을 구했지만 그에 대한 응답이 없자 그 부분에 대해서 지금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귀로 듣지 못하는 것처럼 하시지 말아 주십시오, 마치 말을 못하시는 것처럼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렇게 하니 지금 자기 상황이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신을 섬기는 다른 악인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있지 않습니다. 간절히 하나님께 구합니다. 그 뜻을 이루시기를 구합니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기도의 간절함은 줄어들 때가 많습니다. 점점 확신이 줄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도해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다윗처럼 더 간절하게 구해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구해야 합니다. 불의한 재판장도 계속되는 과부의 간절한 기도에 그 원하는 바를 들어 주었습니다. 사랑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은 훨씬 더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고 싶어 하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일지 모릅니다. 그 방법도 기다림 중에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2. 기다림 중의 간구(3~5절)
다음으로 실제로 다윗이 기다림 중에 간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무엇을 구했을까요? 한 마디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공의를 나타내시기를 원했습니다.
“악인과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 다윗은 악인과 자신을 구별했습니다.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라는 말은 이미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끌어낸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 나는 그렇게 하시지 말라는 기도입니다. 나는 그들 중의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4). 다윗이 구하는 것은 ‘공의’입니다. ‘사회 정의’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악한 자들에 대해서 그들이 행한 ‘대로’ 갚아 달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마땅히 받을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한 일에 대한 결과이자, 노력에 대한 보상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그들에게 주라고 하나님께 구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한 일, 노력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3). 이들이 한 일은 정직하지 않게 행한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악을 품고 겉으로는 평화를 말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마치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처럼 말하고 이웃을 위하고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그 마음 속에 있는 것은 악독입니다. 상대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이익을 채우려는 궁리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궁극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므로”(5). 악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일하신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이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공의로 심판하실 분이 계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자신들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이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의 법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들이 하는 잘못된 일에 대해 법적인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을 아는 것, 생각하는 것이 사람들의 행동을 달라지게 만듭니다. 어떤 일은 아예 하지 않고, 어떤 일은 하더라도 조심스럽게 혹은 다른 방법으로 합니다. 법과 심판에 대해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궁극적인 심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심판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하시는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손으로 악을 행하고 자신의 원하는 것을 만들어 가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파괴하고 건설하지 않으실 것입니다(5절). 마치 전쟁에서 건물을 무너뜨리고 다시 건설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전쟁에서 패한 반역자들을 끌고 가서 멸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알기에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이 땅에서 이뤄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조금 불편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익숙한 우리에게 다윗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좀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악한 자들에게 심판이 이뤄지기 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대치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구하는 것은 그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복수가 아닙니다. 왕으로서 그 나라 안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었기에 더욱, 악한 자들의 악한 행동으로 인해 사회 정의가 무너지고 자신을 포함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통 받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구합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가 뉴스를 통해 사회의 죄악을 보면서 해야 할 기도이고, 위정자들을 위해서 할 기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이뤄지기를 하나님의 상식 하나님의 법이 통하는 사회가 되기를 구하는 것, 그것을 인정하는 지도자들이 일어날 수 있기를 구해야 합니다. 사실 시편을 보면 이런 내용의 기도가 많습니다. 세상의 죄악은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도 그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죄악이 그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도 그칠 수 없습니다.
기도와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이라는 주제로 확장해서 생각해 보면 비슷한 원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와 방법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또한 그 기다림 중에 계속해서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마치 불의한 재판관을 계속해서 찾아간 여인처럼 말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라면, 그분이 행하시기를 기다리며 계속해서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5절에서 다윗의 기다림은 끝이 납니다. 하지만 다윗의 기도는 끝나지 않습니다. 기도 응답에 대한 찬양과 또 다른 중보의 기도로 이어집니다.
3. 기다림 끝의 찬양(6~7절)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6). 다윗은 하나님께서 결국 그의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심에 대해서 감사하며 찬송합니다. 시편을 읽다 보면 자주 발생하는 상황입니다. 어떤 어려움 중에서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도우셨을 때에 그분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시편이 정말 많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자연스럽게 읽어가는데 실생활에서 우리는 그렇게 잘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구할 때는 열심히 구하는데 응답하심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넘어가거나, 그냥 상황이 그렇게 잘 풀렸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감사하게 생각은 해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감사를 표하지 않습니다. 마치 예수님께 고침 받은 10명의 나병환자들과 같습니다. 다 똑같이 고침을 받았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의 마음을 표하며 예배한 사람은 한 명 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감사한 마음이 없었을까요? 그들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 역시 감사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께 돌아가서 그 감사를 표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고침을 받은 것 자체가 너무 놀랍고 그들에게 기쁜 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최대한 빨리 깨끗해짐을 인정받고 가족에게도 돌아가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해야 한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자주 그렇게 합니다. 마치 이것만 해주시면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처럼 기도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해주셨을 때는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면서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다윗이 생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십시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힘과 방패가 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았고, 또한 자신의 삶을 통해 이 부분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구하는 즉시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신 것은 아닙니다. 정말 힘든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러다가 나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그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죽음을 맞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믿고 간절히 그리고 꾸준히 구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응답하셨고, 다윗을 도우셨습니다.
이제 얻을 것 얻었으니 끝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다윗의 마음은 이제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악한 자의 마음에는 악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그로 인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찬송하리로다”는 어떤 사실을 인정하다 혹은 고백하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시편에서는 주로 “감사하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받은 것으로 기뻐하며, 그것을 주신 분께 감사하고 그분을 높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실망할 이유도 없습니다. 기다리는 중에는 실패한 것 같고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 그를 조롱하기도 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리는 중에 기도하고 기다림의 끝에 찬양할 수 있게 합니다. 다윗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4. 기다림 끝의 중보(8~9절)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그들”은 9절에 나오는 “주의 백성”, “주의 산업”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 “나의 힘”이라고 고백 했었는데(7절) 그것이 단지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모든 자의 힘이 되십니다. 특별히 다윗이 여기서 왕으로서 이런 기도를 하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왕 뿐 아니라 모든 백성의 힘이 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구합니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자신을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고 인도하신 것처럼 주를 의지하는 모든 백성에게 그렇게 해달라는 중보의 기도입니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하기를 구했지만, 주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구원, 복, 인도하심이 있기를 구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왕으로서 바라는 사회입니다. 하나님이 높임 받으시고 그분의 법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입니다. 우리도 이런 세상을 바란다면 계속해서 구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우리의 생각을 좁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처한 상황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도 바라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바라보지 못합니다.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이 제일 중요하고 제일 힘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바라고 있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위해 기도합니다. 기다림이 끝날 때 우리는 이 사실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익숙해져야 할 기다림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체하셔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간절히 기다리고 기도하며 기다립니다. 기다림의 끝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복을 이웃들과 나눕니다.
무엇이 우리를 기다릴 수 있게 할까요? 이 힘든 기다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누가복음 18장에서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의 예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던지신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기 위해 예수님은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열쇠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의 신실하신 아버지께서 결코 그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들”과 같은 결과를 맞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다리는 중에도 다른 이들과 같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 맞습니다. 믿음 없는 자에게 마땅한 것이 나와는 관계없다고 말하려면 내가 믿음 있는 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기다리며, 정말 그런 자처럼 삽시다. 그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의 삶입니다.
들으소서!
시편 28편
제가 한때 문학소년을 꿈꾼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부터 시를 읽기를 좋아했고, 대학교 때에는 소설을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제가 시나 소설을 읽을 때 사용했던 방법이 있습니다. 어느 한 시인이나 소설가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 그 한 사람의 것을 몽땅 읽는 것입니다. 특히 대학교 때에 소설을 읽을 때에 그랬는데요. 예를 들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을 것을 계획을 세우잖아요. 그러면 서점에 들러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지은 소설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다 구입해서 옵니다. 방학 때 같은 때에 집중해서 읽으면, 하루에 10시간씩 읽을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한 시간에 30페이지 정도를 읽을 수 있어요. 그럼 하루에 한 권 정도씩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읽었습니다. 제가 그런 방식으로 읽은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의 것만 읽다보면, 그 소설가의 글의 특징, 그리고 패턴 그런 것을 저도 모르게 익히게 됩니다. 그러다보니까 누군가의 시를 읽어주면, “아. 그 시는 어떤 시인의 시풍을 담고 있는데!” 그렇게 시의 작가를 어느 정도 맞출 수도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시편을 오늘까지 28개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거의 대부분이 다윗의 시편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시편 가운데 대부분 기도의 시편이었습니다. 오늘 시편 28편도 기도의 시편 가운데 하나입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렇게 다윗의 시편, 그것도 기도의 시편만 계속 읽고 묵상하고 준비하다가 보니까, 일정한 패턴을 알게 되었어요. (1) 다윗은 참으로 어려운 상황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위기의 순간을 경험합니다. (2) 그 순간에 다윗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무엇이냐면요? 기도에요.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밖에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다윗의 기도는 어떤 기도냐면요? 얌전하게 하는 기도가 아니에요. 부르짖는 기도에요. 탄식의 기도에요. 간절한 기도에요. 어쩌면 목숨을 내어놓고 하는 기도에요. “하나님! 하나님 아니면 누가 나를 살려주시겠습니까? 살려주세요!!!” 그런 기도입니다. (3) 그러다가 다윗의 시편이 급변해요. 내용이 완전히 바뀌어요. 조금 전까지 막 탄식해요. 때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그러다가 갑자기 감사를 표현합니다. 찬송을 드립니다. 막 기뻐합니다.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이 볼 때에는 어떨까요? “저 사람, 좀 이상한 사람 아니야?”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전에 말씀을 연구하기 위해서 자료를 검색하다가 시편을 연구하는 구약성경학자가 쓴 논문 하나를 본 적이 있는데요. 무슨 내용을 다루는 내용이었냐면요? “다윗의 시편의 내용이 급변화하는 이유!” 그런 것을 연구하는 논문이었습니다. (4) 자. 다윗의 기도시편에서 내용이 왜 갑자기 변화할까요? 왜 탄식에서 갑자기 감사로 바뀌고, 찬송으로 바뀔까요? 다 예상되시지요? 네! 다윗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겁니다. 그래서 심각한 위기의 상황에서 건짐을 받은 겁니다. 그러니까 감사하고 찬송하게 됩니다. 오늘 시편 28편도 지금 말씀드린 패턴이랑 똑같아요. 이 패턴에 따라서 말씀을 묵상하듯이 나누어 보겠습니다.
(1) 오늘 시편에 보면 다윗은 또 상당한 어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다윗이 처한 어려움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알 수는 없어요. 다만 3절을 통해서 그 어려움을 가늠은 해볼 수 있습니다. “악인과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 그들은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다윗이 누구 때문에 지금 심각한 어려움에 빠져 있냐면요? 바로 악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이 있어요. 앞에서는 “화평, 샬롬”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속에는 악독이 있어요. 샬롬이 아니라, 다윗을 해치려고 하는 악한 마음이 있어요. 그러니까 앞과 뒤가 다른 겁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뒤통수를 치는 겁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상황이 아마도 다윗에 대하여 반역을 일으킨 압살롬을 추종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대부분이 다윗의 부하였어요. 그러니까 다윗 앞에서는 고분고분한 겁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고 보니까, 그런 사람들이 뒤통수를 치고 압살롬 편에 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을 엄청난 위급한 상황에 빠뜨린 주범들이 된 거에요.
(2) 자. 이 위기의 상황에서 다윗이 무엇을 하고 있나요? 만일 이 시편이 압살롬이 반역한 때에 경험한 일을 반영한다면, 그 반란의 초기에 다윗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저 급히 도망가는 일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죽이겠다고 반역을 일으킨 압살롬을 생각해도, 그리고 평소에는 자신의 충성된 신하인 것처럼 보이던 자들이 그 반역에 가세했다는 현실을 보면, 아마 그 충격이 더 컸을 겁니다. 그러니 더 무기력해졌을 겁니다. 그때 다윗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1절과 2절을 보세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짓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짓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다윗은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다윗의 부르짖는 기도가 어땠을까요? 간절한 겁니다. 거의 생명을 걸고 하는 기도입니다.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요? “하나님! 내가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으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심정으로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3) 그런데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다윗은 얼마 전까지 탄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탄식으로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힘과 방패십니다. 그래서 나는 크게 기뻐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렇게 고백합니다. 무슨 조울증 환자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방금 전에 탄식하던 사람이 기뻐합니다. 금방 죽겠다고 기도하다가 찬송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다윗이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의지하였더니,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얻었습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의지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을 주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다윗의 찬송의 근원이 어디에 있나요? 그의 기쁨의 이유가 어디에 있나요?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들으소서! 내 기도를 들으소서!” 그렇게 부르짖었는데,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겁니다. 기도의 응답이 있으므로 탄식이 바뀌어 기쁨이 되고, 찬송이 된 겁니다.
이 말씀에 의지하여 축복하기를 원합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다윗과 같은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해야 합니다.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어쩌면 다윗과 같이 생명을 걸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들어주시지 않으면 저 죽습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좀 버릇없게 보여도 그렇게 기도하셔야 합니다. 부모님의 심정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아빠, 엄마가 나 도와주시지 않으면 나 죽어요.” 자식이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든 도와주는 겁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자녀가 죽는다고 하는데,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죽겠다는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간절한 기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에 하는 기도의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본당이 참 넓잖아요. 본당에 들어가서, 한 바퀴를 크게 돌면서 기도합니다. 5분도 걸리고, 10분도 걸리고 그래요. 개인적인 기도도 잠시 드리고요.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하고요. 그렇게 기도할 때에 제 마음이 아주 간절해요. 왜 그러냐면요? 여러분에게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므로 여러 차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을 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절하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또 들어주시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기도하는 겁니다. 성도 여러분도 간절하게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다윗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의 은혜를 누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시편 28편의 종반부분을 보면, 다윗의 기도는 개인적인 기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주신 그 하나님을 향하여 다윗은 중보기도로 나갑니다. 8절과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오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시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개인적인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경험을 가지고 이제 다윗은 중보기도를 하는 겁니다. 누구를 위해 중보 기도하냐면요? 백성들 전체를 위해 중보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중보 기도합니다. “저를 구원해주셨듯이 우리 백성도 구원해주십시오. 우리 백성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우리 백성의 목자가 되셔서 영원토록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보여주는 위대한 신앙, 그리고 우리가 오늘도 따라가야 할 신앙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이기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나만 복 받으면 되는 종교가 아닙니다. 내 자녀만 잘 되면 되는 종교가 아닙니다. 내 사업만 성공하면 되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만 부흥하면 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웃을 품어야 하는 종교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품어야 하는 종교입니다. 열방을 품어야 하는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 때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너만 복을 내려줄게.” 그러시지 않으셨습니다. “너를 열방의 축복의 통로로 삼아줄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참된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이웃을 생각해야 하고, 나라와 민족을 생각해야 하고, 열방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첫걸음이 무엇이냐면요? 다윗이 지금 하고 있는 일입니다. 중보 기도하는 일입니다. 성도님들을 위해 서로 중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 전체를 위해 중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지역의 이웃을 위해 중보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중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열방을 위해 중보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과 믿음으로 기도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길 기도합니다. 특히나 호국보훈의 달인 6월에는 코로나 19 때문에 큰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 나라와 민족을 품고 기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