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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4일 오늘의 역사
2024년 우크라군 포로 65명 탄 러시아 수송기 격추…74명 전원 사망
2021 손흥민(토트넘 29세) 아시아축구연맹 2020년 국제선수상 (2015 2017 2019에 이어 네 번째)
2020년 사상 초유 대법원장(양승태)구속
1970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제1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사법연수원 2기를 수료한 후 법관으로 임용되어 1975년 11월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로 임관했다. 대구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제주지방법원, 사법연수원, 법원행정처, 부산고등법원,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판사로 근무하였다.
2002년 부산지방법원장 등을 거쳐 2003년 특허법원장으로 재직하다가 2005년 2월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2009년 2월 16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2011년 9월 25일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장에 임명되었고, 2017년 9월 24일 퇴임하였다. 검찰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제기하였으나 재임 중에 자체 조사에서 문제가 없다고 밝혔으나 대법원장이 바뀌면서 대법원이 검찰에 수사 협조를 하여 강제징용 사건 재판 지연, 통합진보당 의원 지위 확인 소송 등에서 재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 검찰에 의해 구속영장이 청구되었으며 2019년 1월 24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명재권(52세·27기)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양승태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하면서 “범죄혐의가 상당 부분 소명되고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대법원장을 지낸 법조인이 구속된 사례는 대한민국의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2020년 튀르키에 동부 68규모 지진발생 41명 사망 1600여명 부상
2018년 정현 선수(22세 한국체대) ATP 월드 투어 그랜드슬럼대회 호주 오픈 테니스대회 한국선수 첫 4강 진출
2016년 인공지능의 개척자 마빈 리 민스키 세상 떠남(88세)
2012년 그리스 거장 앙겔로플로스 감독 별세
그는 그리스 현대사의 아픈 현실에 대한 성찰과 시적인 영상, 느리고 철학적인 기법으로 '영상의 시인'으로 불렸다. 그는 1970년 '범죄의 재구성'으로 데뷔했다. 이후 독재정권의 탄압 속에서도 그리스 정치사를 다룬 3부작 '1936년의 나날들'(1972), '유랑극단'(1975), '사냥꾼들'(1977)로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특히 아버지를 찾아나선 남매의 여정을 그린 '안갯속의 풍경'(1988)과 인종·정치 갈등에 휩싸인 발칸반도의 운명을 다룬 '율리시스의 시선'(1995·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은 세계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1980년 '구세주 알렉산더'로 베니스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1998년에는 '영원과 하루'로 칸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2011년 귀화자 10만명 돌파
2002년 미국 에너지기업 엔론사 파산사건 청문회 개시
미국 상하 양원이 2002년 1월 24일 에너지기업 엔론의 파산사건에 대한 청문회를 개시, 회계 감리를 맡았던 회계법인 아더 앤더슨 관계자들을 증인으로 소환해 심문을 벌였다. 엔론 게이트는 2001년 12월 2일 에너지 기업인 엔론 그룹이 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불거졌다.
1985년 휴스턴에서 설립된 엔론사는 생산자로부터 매입한 전기와 천연가스를 공장에 판매하면서 미국 7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2001년 가을 수십억 달러의 회계장부 누락과 지난 4년간 5억8000만달러 이상의 수익 과대평가 등 분식(粉飾)회계 사실이 드러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엔론은 법정관리 신청 직전 경쟁업체인 다이너지(Dynegy)와 84억달러 규모의 긴급 합병 계획을 추진했으나, 다이너지의 막판 거부로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엔론 게이트 최대 핵심은 부시 행정부와 엔론의 정경유착 여부다. 엔론은 1989년 이후 580만달러의 정치 헌금을 기부했으며, 가장 큰 혜택을 입은 정치인은 조지 부시 대통령이다. 엔론사를 회계감사했던 아더 앤더슨 회계법인이 엔론 관련 서류를 폐기한 것도 의혹을 증폭시켰다.
2000년 `2000년 총선시민연대` 1차공천반대 인사 66명 발표
476개 시민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2000년 총선시민연대`는 2000년 1월 24일 기자회견을 갖고 16대 총선 공천반대 인사 66명을 발표했다. 명단에는 자민련의 김종필 명예총재, 박준규 국회의장, 한나라당의 황낙주 김수한 전 국회의장과 국민회의 권노갑 전 의원 김상현 서석재 김윤환 의원 등 여야 중진 의원들이 대거 포함됐다.
정당별로는 새천년민주당16명, 자민련 16명, 한나라당 29명, 무소속 5명으로 나타났다. 숫자상으로는 한나라당이 가장 많았으나, 의원 비율로는 30.2%를 차지한 자민련이 가장 높았다. 총선시민연대의 낙선 리스트 작성은 15대 국회 전-현직 의원 329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져, 14대 이전 국회의원들과 원외 정치인들은 제외됐다. 박원순 상임집행위원장은 "뇌물수수와 선거법 위반, 쿠데타 등 헌정질서 파괴 등의 기준을 가장 우선적으로 적용해 명단을 작성했다"고 말했다. 총선시민연대는 2월 2일 2차 공천반대 대상자 47명을 추가 발표했다.
한편 대법원은 총선 이듬해 2월 16대 총선에서 총선시민연대가 벌인 낙선운동은 선거법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의 판결은 시민단체가 정치개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실정법을 어긴 데 대해 법원이 엄정한 법집행 의지를 강조한 것으로 풀이됐다.
1998년 발해탐사 `뗏복항해` 25일 만에 좌절. 4명 전원 사망
1997년 97 무주-전주 동계 유니버시아드대회 개막
97 무주-전주 동계 유니버시아드대회가 1997년 1월 24일 무주리조트내 점핑파크에서의 화려한 개막식을 시작으로 10일간 개최됐다. `젊음을 한곳에, 세계를 품안에`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제18회 동계유니버시아드에는 49개국 1천621명의 세계 각국 대학생 선수들이 출전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동계스포츠 국제종합대회였던 이 대회는 무주와 전주로 나뉘어 성공리에 치러져 동계스포츠 `불모지`였던 한국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1993년 미국 연방대법원 최초의 흑인 판사 마셜 사망
미국 최초의 흑인 대법원 판사를 지낸 더굿 마셜이 1993년 1월 24일 심장병으로 워싱턴 베데스다 해군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84세였다. 1908년 볼티모어에서 출생한 마셜 판사는 1950년대와 1960년대 흑인 민권 변호사로 활약했다. 그가 인권변호사로서 거둔 가장 큰 승리는 1954년 흑·백인을 다른 학교에서 교육하는 인종분리 학교는 위헌이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끌어낸 것이다.
이로써 1896년 이래 “분리하되 평등하다”는 미명 아래 합법적으로 비호돼 온 교육에서의 인종차별이 무너지게 됐다. 그는 이 판결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민권운동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또한 1973년의 임신중절 합헌판결을 비롯해 언론자유의 강화 등 1970년대의 잇따른 진보적 판례를 남기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마셜은 1933년 흑인들의 하버드로 불리는 하워드 법대를 수석 졸업한 뒤 인권변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마셜판사는 1961년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항소법원 판사에 임명됐으며 이어 린드 존슨대통령 정부에서 법무차관을 지낸후 1967년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대법원 판사에 임명됐다. 이후 대법관 재직기간 동안 일관되게 진보적 목소리를 대변했던 그는 적극적인 사형폐지론자였고, 언제나 가난하고 힘없는 자의 편에 서왔다.
1989년 방학 과외 허용
방학 과외 허용으로 과외가 활성화됐다.
1989년 여름방학부터 초-중-고교 재학생의 방학과외가 전면 허용됐다.
중앙교육심의회는 1989년 1월 24일 전체회의를 갖고, 3시간여에 걸친 격론 끝에 2차례의 투표과정을 거쳐 과외금지조치 개선안을 이같이 확정했다. 문교부도 건의를 받아들여 대학생 과외를 전면 허용키로 함으로써 지난 1980년 ‘7.30 교육개혁조치’ 로 전면금지된 과외교습이 9년 만에 부분 허용됐다.
중앙교육심의회가 확정한 과외금지조치 개선안에는
1.과외금지조치를 완화하는 방안으로 재학생의 방학 중 과외수업을 허용하고 2.방학중이라도 계속 현직교원의 과외교습과 학원강사의 과외교습은 금지하며
3.대학 입시제도 개선, 교육방송 확대, 자율학습 자료개발 등 과외요구완화방안이 포함돼있다.
1989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6.25 이후 기업인으로는 첫 북한방문(2주)
1989년 구정 명칭을 ‘설날’로 바꿈
1986년 보이저 2호 천왕성에 접근, 새로운 위성 10개 발견
1985년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 발사
미국 국방부의 신형 정찰위성을 탑재한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가 1985년 1월 24일 오후 2시50분 플로리다주 케이프커내버럴 공군기지에서 발사됐다. 우주왕복선으로는 최초의 군사전용비행으로 본격적인 군사이용의 개막을 의미했다.
미 공군이 3억달러를 투자해 개발한 신세대 정찰위성은 디스커버리로부터 발사된 후 2단식 소형 로케트를 분사해 소련령을 감시할 수 있는 고도 약 3만6천미터의 정지궤도로 진입했다. 이 정찰위성은 소련이 발사하는 각종 미사일 실험의 원격조정 통신내용과 마이크로웨이브 중계에 의한 장거리 전파내용 등을 포착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2개의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어 하나는 기밀내용을 탐지하는데 이용됐고 나머지 하나는 이를 다시 미국에 있는 감시소에 전달하는데 사용됐다. 발사 3일 만인 27일 전원이 군인으로 구성된 5명의 승무원들은 임무를 마치고 무사히 귀환했다.
우주왕복선 개발은 1972년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우주왕복선 개발 계획을 승인을 받아 1976년 엔터프라이즈라는 시험용 우주왕복선이 개발되면서 시작됐다. 이후 최초의 우주왕복선 콜럼비아호가 1981년 4월 12일 우주비행에 나섬으로써 새로운 우주여행 시대를 개막했다. 두번째로 개발된 우주왕복선은 챌린저호. 그러나 1986년 1월 28일 10번째 비행에 나설 때 폭발하는 바람에 7명의 우주비행사가 목숨을 잃었다. 챌린저에 이어 세번째 우주왕복선으로 개발된 것이 디스커버리호이다. 1984년 8월 30일 처녀비행에 나서 총 비행횟수 26회를 기록한 디스커버리호는 주로 통신위성이나 군사위성의 발사를 맡았고, 돈을 받고 외국위성을 쏘아올리거나 외국 우주비행사를 태워주는 일을 했다.
1984년 플 매킨토시 컴퓨터 첫선
1983년 일본, 유사시 대한해협 봉쇄 언명
1983년 소련 핵위성 코스모스 인도양에 추락
1981년 아동문학가 이원수씨 별세
동요 `고향의 봄`으로 널리 알려진 원로 아동문학가 이원수씨가 1981년 1월 24일 구강암으로 작고했다. 향년 71세였다. 1911년 경남 양산에서 출생,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14때 소파 방정환이 주재하던 `어린이` 잡지에 `고향의 봄`을 발표해 문단에 입문하게 됐다.
문인협회 아동문학 분과회장과 경희대 강사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아동문학가협회를 창립한 후 작고 전까지 회장직을 맡아왔었다. 1973년 한국문학상과 대한민국 문학예술상을 비롯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한국현대아동문학의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아동문학이론을 정립하는데 큰 공헌을 해왔다.
또 1940년대의 율동적이며 감각적 경향을 벗어나 현실의식이 짙은 아동소설에 주력해 왔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동시집 `종달새` 아동소설집 `숲속의 나라` `오월의 노래` `참새 잡던 시절` `구름과 소녀` `메아리 소년` `꽃바람 속에` 등이 있다.
1980년 미국, 중국 과학기술협력문서에 조인
1979년 국 고사기 편찬자 태안만려 유해와 동비문이 일본 나라(奈良)에서 발견
1978년 소련 핵추진위성 캐나다에 추락
1976년 재일동포 구정귀성단 1진 527명 모국 방문
1974년 정치인 월파 서민호 사망
1973년 박정희 대통령 월남종전에 성명
1972년 상공부, 첫 통상백서 발표
1971년 스와질랜드의 라마니 수상 내한
1970년 자유당 신민당에 합당
1969년 UN안보리, 러시아어, 에스파냐어를 안보리의 실무어로 승인
1966년 인도여객기 알프스산맥에 추락. 117명 사명
1965년 영국 정치가 처칠 사망
20세기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던 윈스턴 처칠경이 열흘동안의 투병 끝에 1965년 1월 24일 서거했다. 두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에서 초인적인 역량을 보인 그는 그의 생애는 투쟁으로 시작됐듯이 그 종말 역시 병에 대한 투쟁으로 장식됐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장교와 종군기자로 경력을 쌓았으며 1901년에 처음 국회에 진출했고 1차 세계대전 직전에 해군 제1장관에 임명됐다. 2차 세계대전의 암울한 시기 즉, 독일군이 유럽을 짓밟고 있던 1940년에 노르웨이작전 실패를 계기로 총리 체임벌린 대신에 총리에 취임해 영국을 바꾸어 놓았다. 단호하게 그는 하원에서 “나는 피와 눈물, 노력, 땀 외에는 내놓을 게 없다” 고 말했다. 전쟁에서 영국이 독일의 폭격으로 파괴되고 그 침공을 두려워하며 홀로 저항했던 암울한 수개월간 언제나 입에는 시가를 물고 승리의 ‘V자’ 를 치켜든 처칠은 불굴의 상징이었다.
1946년 미국 미주리주 풀턴에서의 연설에서 ‘철의 장막’ 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1945년 총선거에 패배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1951년 다시 총리에 취임했다. 그리고 이때 ‘경(Sir)’ 의 칭호를 받았다.
1963년 인천항 개항 80년 만에 처음 결빙
1963년 동경올림픽 남북한 단일팀 구성 협상 개시
IOC(국제올림픽위원회)가 동경올림픽에 대비해 1962년 9월 1일까지 남북단일팀을 구성하라는 요구를 해옴에 따라 KOC(대한올림픽위원회)는 8월 14일 단일팀 구성을 위한 모든 통신연락을 IOC를 통해 한다는 조건으로 남북한단일팀 구성에 동의, IOC에 통고했다.
남·북한은 이에 따라 1963년 1월 24일 IOC주재로 IOC본부가 있는 스위스 로잔에서 회담을 개최, 올림픽에 사용할 국가(國歌)를 8.15이전의 `아리랑`으로 할것과 임원과 선수 선발을 동·서독단일팀구성원칙에 따른다는데 합의했다. 뒤이어 4월 19일 한국은 올림픽대회장에 게양할 국기(國旗)를 오륜마크 밑에 KOREA로 표시하는데 합의했다.
KOC는 선수단의 호칭문제를 비롯, 선수선발을 위한 예선장소와 일시 등 더 구체적인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1963년 7월 26일 홍콩에서 제2차회담을 열기로 했으나 북한측이 정치적인 발언을 계속해 회담자체가 결렬됐다.
1958년 국제극예술협회(ITI) 한국본부 창립총회
1948년 『동의보감』 목판 전주에서 발견
1947년 임정계 반탁투쟁위원회 조직
1946년 유엔, 원자력위원회 설치 결정
1946년 1월24일, 런던에서 열린 제1차 유엔총회에서 ‘원자력위원회(UNAEC)’ 설치가 결정됐다. 세계 11개국이 참가한 첫 회의가 6월24일 뉴욕에서 열려 명칭을 ‘국제원자력개발기관(IADA)’으로 바꿨지만, 원자력 관리에 대한 미국의 제안을 소련이 거부하는 바람에 결론을 맺지 못하고 폐회됐다.
미국의 안은 세계각국이 원자력을 무기로 사용하지만 않는다면 미국은 보유하고 있는 원자폭탄을 파기할 용의가 있고, 이를 담보하기 위해 원자력개발에 관한 모든 과정을 ‘IADA’ 관리하에 두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 입장에서는 미국이 사찰명목으로 소련의 원폭제조상황을 파악하려한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자 미국은 일주일 뒤인 7월1일, 남태평양 비키니섬에서 공개적으로 핵실험을 감행해 소련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유일한 핵보유국 미국이 아직 원폭을 보유하지 못한 소련에 대해 일종의 시위를 한 것이다. 3년간 갑론을박하다 소련이 원폭실험에 성공(1949. 8.29)하자 유엔안보리는 1949년 11월에 미국의 안을 부결시켜 약화된 미국의 위상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런 가운데 1952년 10월 영국이 원폭실험에 성공하자 원자력은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양국의 중요한 의제로 떠올랐다. 핵보유국 소련도 이제는 미국의 안이 솔직하게 느껴졌다.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1957년 7월에 발족된 것이 오늘날의 ‘국제원자력기구(IAEA)’다.
1939년 칠레 칠란 지진으로 3만명 사망
1932년 항일투사 이장녕 순국
1930년 김좌진 장군 피살
애국계몽운동가이자 1920년 청산리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이 1930년 1월 24일 중국 하얼빈의 집 근처에서 괴한에게 피살됐다. 41세의 나이였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김 장군은 서당 공부 외에 정규교육으로는 2년간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다녔을 뿐이지만, 19살에 ‘한성순보’ 이사가 됐고 오성학교 교감을 맡기도 했다. 또 신민회, 기호흥학회와 같은 단체에 가입해 애국교육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교육이나 언론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고 느낀 김 장군은 북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다 붙잡혀 2년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1919년 3·1운동 후 임시 정부의 지원금으로 사관양성소를 설립하고 이듬해 홍범도 장군과 연합해 청산리에서 일본군 1200여명을 사살했다
1921년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 사임(후임에 이동령)
1920년 이탈리아 화가 모딜리아니 사망
이탈리아 화가 모딜리아니가 1920년 1월 24일 결핵성 뇌막염으로 사망했다. 36세였다. 고흐처럼 살아 생전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불행한 화가 모딜리아니는 자선병원에서 "이탈리아!...카라 이탈리아(그리운 이탈리아)"란 마지막 말을 남기고 피를 토하며 숨을 거뒀다.
이탈리아 항구도시 리보르노에서 유태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모딜리아니가 화가로 입신하기 위해 청운의 뜻을 품고 파리에 입성한 것은 22세때였다. 그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피카소의 권유로 몽마르트언덕에 정착해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파리에서 그는 금방 퇴폐한 예술가의 무절제한 생활에 함몰된다. 미남인 그에게 뭇 여자들이 따랐고 그녀들은 스스로 옷을 벗어 보수없는 모델이 되어주었다.
어떤 날 밤에는 술에 취해 미친듯이 화를 내는 주정뱅이가 되었으며, 또 어떤 날 밤에는 격노해서 자기의 가장 아름다운 데생을 갈갈이 찢어버리곤 했다. 모딜리아니가 그의 미술의 본령인 초상화와 나체화를 본격적으로 그린 때는 1904년부터였다. 이날의 죽음으로 그의 활동기간은 고작 16년에 불과한 셈이다.
1908년 삼림법 공포
1908년 국의 베이든 포엘 장군 보이 스카우트 창설
우리나라에서는 1922.10.5에 조선소년군과 조선소년척후대가 조철호와 정성채에 의해 동시에 발족하였다가 1924년에 이상재를 총재로 통합 1937년 일본이 강제해산시킴, 해방 뒤 1946년 한국보이스카우트 다시 창설 1953.1 세계보이스카우트연맹 가입
1907년 대한매일신보, 한일조약 부인의 칙서를 게재
1888년 독일의 항공기 설계자 하인켈 출생
1879년 가이슬러 펌프와 가이슬러 관을 발명한 유리불기공 가이슬러 사망
1848년 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금광 발견 골드러시 시작됨
1776년 독일 작가 호프만 출생
1624(조선 인조 2) 이괄의 난 일어남
1428년 강원도에 지진 발생
76년 제14대 로마제국 황제 하드리아누스 출생
41년 제4대 로마제국 황제 클라디우스 즉위
41년 제3대 로마황제 칼리굴라 암살